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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99강-선지자와 율법자(신18;15-18) 1609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5. 18:55
2016-09-04 14:50:11조회 : 49         
   선지자와 율법자 16090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선지자와 율법자(신명기 18:15-18)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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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6-09-04 15:55 
선지자와 율법자 

2016년 9월 4일                             본문 말씀: 신명기 18:15-18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18: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하나님께서 율법도 주시지만 선지자도 따로 세우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는 통로가 이중이 됩니다. 선지자 게통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시기에 그 자체로 ‘완료’가 됩니다. 그 개인이 구원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 상태를 미리 알려주는 통로입니다. 

계통이 이처럼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말은, ‘완료’와 ‘미완료’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헛갈리게 두 개를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로 방식과 방법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두 개를 준비해주시는 이유는, 인간들의 구원요구를 거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지, 어떤 방식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요청하든지 간에 항상 율법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쪽에서 실시되는 모든 것을 율법 통로로 일원화 시켜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주를 믿습니다”라는 것조차 인간에게는 ‘믿어서 구원’이라는 법을 지켰다는 행함 인식으로 되돌아 오게 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선지자에게는 바로 이런 요소까지 극복된 형태로 새로운 구원통로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 예가 모세에게 이미 일어났습니다. 출애굽기 3:1-5에 보면,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면 인간은 감당 못합니다. 하지만 이 ‘감당못함’을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사용하십니다. ‘감당 못함’이란 그 자체로서 완료와 미완료의 만남을 뜻합니다. 이는 완료가 온전히 미완료를 지배하고 통치하고 장악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미완료’는 소멸되면 아니됩니다. 

미완료는 계속 미완료로서 지속되어야 합니다. 불과 떨기나무의 만남에서, 떨기나무는 조금도 자체적인 것을 잃지 않습니다. 그 형태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모세의 소감이 이러합니다.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이처럼 의문을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쪽에서 내미는 그 어떤 수단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결합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신기하고 이상한 일을 보면서도 선지자 모세는 딴 소리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을 받들 만한 위인이 되지를 못합니다.” 즉 자신의 정력과 자신의 열심과 요령과 지혜를 소모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은 그럴 만한 자신감이 없다는 나오는 겁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에 대해서 사명주시는 생각을 철회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모세에게 압박하고 나서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쪽에서 예상한 방식의 관계로서 하나님과 연결되고 교제하고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떨기나무가 일반적인 화재라면 얼마 안가서 홀라랑 다 태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불이라면 떨기나무 제 모습을 유지합니다. 제 모습에서 변형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입니다. 즉 떨기나무는 자체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성을 분명히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존재성에 대한 감각을 지닙니다. 즉 “내가 여기 있다. 그러니 나는 마땅히 가치 있다”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서 이런 의식이 타인에게 피해가 된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나 천국에 대해서 이런 의식은 그대로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 저 지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 높은 곳에 넣어주세요”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이런 인간, 이런 모세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불로서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과 접속이 될 경우에 인간 존재가 어떤 식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예상한 방식이 아니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기 선에 그 어떤 식으로 변화를 발생되기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 예상 상황 속에는 기존의 자기 가치가 손상되지 않고 유지될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들이 율법을 지키는 심보를 미리 구조화할 수가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기대하는 하나님의 관계는 ‘거룩의 눈금’을 그려보는 식입니다. 

율법을 의식하면서,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성사하려는 자들은 자신 쪽에서 불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론과 실습이 큰 차이가 나듯이 모세가 만난 참 하나님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못할 분이십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든 율법은 인간들 입장에서 ‘감당 못할 관계를 감당할 수 있는 관계로서 충격을 완화시킨 중화제’ 같은 것으로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 소견과 자기 요구사항을 끼어 넣을 여지가 있는 것이 곧 율법이다 고 여기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도 율법은 인간은 지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인간 속성 안에 이질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완전한 율법을 제공하므로서 인간들 마음 내부에 그 완전함을 자기 행함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유발시키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질적인 것과 하나님께서 새롭게 마련하는 선지자형 통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갈라디아서 2:16-19에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 목표로 하는 그 죄찾기에 정확하게 꽂힘을 당해
율법의 목표하는 바를 달성했다는 증거가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즉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바로 그 방식을 기대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질적인 구원방식이 담겨 있다는 것이 비로소 폭로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다’, ‘하나님 믿는다’는 말조차 인간에게는 ‘나는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법으로 간주하고 행함에 달성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쪽에서 제시하는 모든 것이 철회당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불로서 등장했다는 말은 ‘소멸의 기능’을 실시하는 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가능한가요? 이미 완료 그 자체로서 이스라엘에 꽂혀들어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적 방식이 아닌 선지자의 완료 방식입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모든 성도들은 다 그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들은 자기 행함이나 자력으로 해서 선지자 되거나 구원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선지자의 등장 그 자체만 해도 율법으로 구원의 한계를 말해주는 겁니다. 선지자는 ‘거룩의 눈금’ 자랑하는 자들로 포위되어 삽니다. 자신들의 구원방식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밉상을 받고 비난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마치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구원된 자로 삽니다. 

이것이 바로 주위에 있는 율법자들을 화나게 만드는 존재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줄 때는 이런 방식으로 구원되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의 화가 선지자의 본성의 깊이를 더 파악하게 만듭니다. 억울한 선지자, 미래의 양상을 앞서 자신의 일상 속에서 터져나오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늘 낯선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너는 왜 우리들과 다른가?”로서 추궁당하게 됩니다. 선지자도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당해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상해서 등장된 존재가 아니라 윮법의 완성상태로 등장해야 하는 선지자, 바로 이 선지자들이 신약의 성도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구원방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장에서 나에게 아무런 일도 생겨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엄청난 일을 일으켰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하고 비교하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에게 다루어지는 하나의 떨기나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09-05 02:05 
99강-신 18장 15-18절(선지자와 율법자)1609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8장 15-18절입니다. 구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율법을 줬는데 선지자가 왜 필요한가, 선지자는 율법의 완성을 뜻합니다. 율법이라 하는 것은 시작점을 의미하죠. 미완료를 유발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완전한 율법과 어설프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만남을 주선하시는 겁니다. 근데 그 결과는 어떠냐, 그 결과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설 수 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결국에는 알게 됩니다. 그 아는 것이 완료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만난 것을 큰 불 만난 것으로, 그렇게 간주합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그냥 평범한 자기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호렙산에 올라가서 그냥 매일 하던 대로 양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매, 하나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보니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아니하더라. 타지를 않은 거예요. 

탄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 타는 소재가 조금이라도 없어지게 되면 불꽃이 사그라지게 되어 있는데, 떨기나무는 그대로 있는데 계속 불만 붙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떨기나무는 그대로 있고 그냥 무슨 불이 뒤집어 쓴 겁니다. 그렇게 나타나셔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말이죠. 이 말은 뭐냐, 인간이 니가 나와 만나고 싶어? 그러면 니가 만나는 것은 어떤 만남이냐 하면, 바로 너가 감당 못할 불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떨기나무처럼. 

이 붙은 떨기나무는 그대로 있는데 불은 또 덧입혀지고,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아, 이처럼 하나님이란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그냥 하나님하고, 실제로 나타난 하나님은 이렇게 다르구나. 어떻게 다른데? 우리는 하나님 만나면, 하나님 안녕하십니까? 하면서 말도 걸고 싶은데, 막상 하나님을 딱 만나게 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거는 몸 둘 바를 모르죠. 이것을 감당치 못한다. 하나님을 우리가 감당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감당치 못한 그러한 현상이, 이제는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운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약시대에 모든 인간이 선지자 같은 자들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약시대에 모든 인간은 한 것도 없는데 완성자가 되는 거예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완전한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의인이 되는 겁니다. 한 것도 없어요. 뭐 의롭게 한 것도 없는데 완전한 자가 되는 겁니다. 누가 보기에 완전한 자냐, 주님 보시기에 완전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도 있고 선지자도 있다면, 이것은 미완료에서 완료로 나아가는 그런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완료와 미완료, 두 개 다 집어넣어놓고 설명해주시는 겁니다. 율법을 주게 되면 율법을 지켜야 되겠죠. 율법을 지키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에 이야기도 했지만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습에 들어갑니다.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부합니다. 시험 칩니다. 뭐 약간의 실습은 하겠죠. 그러나 현장실습에 나가게 되면 엉덩이에 놓을 주사를 허벅지에 놓는다든지, 이런 실수를 하면 정신 바짝 차리고 해야 되겠죠. 

성경말씀을 우리가 외울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할머니들은 교회 와서 성경을 쓰기도 해요. 그러나 성경 쓰는 것이 실습은 아니에요. 성경을 실습한다는 것은 현장에서 실습할 조건을 주께서 그때그때 조성해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좁은 길로 가거라. 넓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 뻔히 이론상은 알아요. 넓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찾는 사람이 많은 길로 가면 멸망의 길로 통하고,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는데, 막상 어떤 삶의 환경 속에 들어갔을 때는 편한 길로 가고 싶고, 다수의 말이 진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소수의 말보다 다수의 말에 끼어들고자 그냥 이 몸이 따라가요. 이론은 아는데 실제 삶에서 안 먹히는 거예요. 그럼 뭘 아느냐 하면, 아, 내가 아는 것은 헛방이고 실제 삶에서는 어느 말씀도 못 지키는구나. 이걸 알면 돼요. 지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면, 말씀 못 지키면 저주받아야 됩니다. 그럼 저주받으면 구원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냥 자기 세계를 펼치는 거죠. 그럼 구원은 어떻게 누가 됩니까? 너희 속에 선지자가 있다는 겁니다. 선지자는 율법과 다른 계열이에요. 율법 말고 달리 선지자 된 사람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고 선지자 된 것 자체가 완성이 되는 상태. 여러분 부럽지 않습니까? 그런 선지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신약시대에는 모두 다 성령을 받기 때문에, 전부 다 성령 받은 순간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선지자는 모든 것을 아는 겁니까? 아니요. 모든 것을 이미 받아 놓고, 어째서 이것이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그냥 완성된 것이냐를 알아가는 그 나날이 한평생 이어지는 겁니다. 

뭐 금수저 라고 해서, 부잣집 애들이 태어날 때부터 해서 노는 것이 달라요. 못 사는 애들은 항상 부모 생각하고 집안 생각합니다. 나라도 아껴 써야지. 이렇게 하는데, 잘 사는 애들은 자기만 생각해요.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없어서 천만다행입니다만. 자기가 돈 얼마나 잘 써야 친구들한테 으스댈 수 있느냐? 그것만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부모가 어릴 때부터 계속 대주어서, “니 마음대로 해라. 돈 걱정하지 마라. 니 원대로 다 해줄게.” 원대로 다해주니까 자기는 그냥 소비하는 것만 하는 거예요. 

수요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인간은 자기가 소비하면서 자기가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자아가 형성돼요. 마트에 가서, “니 뭐 살래?” “나 이거 살래.” 고를 때, 그 고르는 자체가 자기의 본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못 사는 애들은 “제가 뭘 골라요? 엄마 형편대로 주세요.” 이러면 못 사는 애들이에요. 은수저고 흙수저고 그런 겁니다. “엄마. 저거! 저거!” 이러면 좀 사는 애들이에요. 가정교육이 애들 다 버려놔요. 나는 이 정도로 살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신약의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냥 보통 사람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아버렸으니까, 이제는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고, 용서받은 상태고,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 금수저에요. 그런데 행세가 뭐냐 하면 옛날 율법 때 행세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얼마나 내가 착해야 하나님 보시기에 당당하겠느냐? 자꾸 이런 쪽으로 나가요. 자기 생각은 안 해도 되는데, 옛날 버릇이 있어가지고, 내가 이 정도 하면 내가 보기에 어떨까? 자꾸 자기 생각에 매진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섭섭한가 하면 구원하신 주님이 섭섭해지는 거예요. 주신 은혜는 모르고. 은혜는 모르고 이만큼 산 것도 내가 머리 써서 이만큼 살았다고 자꾸 자기 자랑을 해대니까. 십자가를 자랑해야 되는데,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공들인 것을 자꾸 자랑하는 거예요. 

수요일에 제가 십자가마을에 올린 글이 하나 있습니다. “왜 기도 응답이 없나” 왜 기도는 응답되지 아니한가, 그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가 하면, 우리 정석훈 목사님이 설교 가운데,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 하는 이야기가 “은혜 받았으면 순종해야지.” 라고 그 목사가 꼭 그렇게 이야기했대요. “뭐 은혜 받았으면 순종해야지. 은혜 받은 티를 내야 되지. 뭐 은혜 받아놓고 가만히 입 닦으면 안 되지.” 그런 뜻이에요. 

그 이야기가 정말 잘못된 이야기에요. 정말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뭔가 순종을 하게 되면 대가를 반드시 노리게 되어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을 때는 자기 모든 것을 감수하다가, 좀 이렇게 교회 와서 누가 잘했다가 칭찬하게 되면, 순종했으면 뭔가 보너스가 있어야지, 하고 인간은 반드시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유별난 짓을 하게 되면 반드시 기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뭐 피아노 중고라고 누가 새 피아노로 바꿔놓게 되면 꼭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애들 피아노에 올라가게 되면 “에이! 올라가지마!” 이렇게 돼있어요. 반드시 인간은 행동을 그저 하는 법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내리사랑이라고 하는데, 순수한 내리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게 되면 두 가지 타입이 있겠죠. 상품이 있어요. 율법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그런 상금이 걸려있으니까. ‘내가 지켜서 상금을 타내야지.’라고 열심히 애쓰는 타입이 있는 반면에, “제가 선지자 할라 했습니까? 주께서 일방적으로 성신을 퍼부어서 선지자 만들어놨는데? 저는 선지자 할 생각 없었어요.”라고 하는 그 태도 자체가, 삶 자체가 달라요. 

선지자는 투덜투덜 거려요. 왜?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선지자가 됐으면 뭐가 그리운가 하면, 저 율법에 매인 사람들이 더 그리워요. 율법에 매인 사람이. 나 이만큼 했더니만 복 주더라. 십일조 만원했는데 다음에 30만원이 굴러오더라. 이런 것 있잖아요. 30배, 60배. 그 재미가, 도박하는 재미거든요. 돈 놓고 돈 먹는 재미가 진짜 재미지. 이거는 뭘 해도 시큰둥, 잘해도 의미 없음, 죄 지어도 의미 없음, 재미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느 쪽인가를, 사실 율법 쪽이면 지옥 갑니다. 사실 선지자 쪽이 되어야 돼요. 여기서 우리가 확인해봅시다. 어느 쪽인지를. 확인 방법은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자, 문제 냅니다. 문제 하나 맞춰보세요. 예수님께서 차다고 가다가 과속해서 경찰한테 걸렸다. 자,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과속할까요? 안 할까요? 문제가 어려우면 더 간단하게 하면, 예수님께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새벽두시기 때문에 차도, 사람도 없다. 그런데 빨간불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횡단보도를 건너가실까요? 안 건너가실까요? 

이거 제가 25년 전인가, 30년 전인가, 어느 교회에서 제가 청년회 강의하면서 이 문제를 냈습니다. 예수님께서 횡단보도 건너려고 하는데 빨간불인데 아무도 없어요. 새벽 두시 반에 아무도 없는데, 그냥 신호 지킬까요? 안 지킬까요? 라고 문제 냈는데 애들이 답변을 못했어요. 제가 정답을 말하겠습니다. 주께서는 신호 안 지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준법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완성체이기 때문에. 완성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걸 지켜서 얻는 보람, 기쁨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의 제정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의 제정자는, 율법은 죄를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율법은 이미 완성된 뭔가 꼬불쳐놓은 완성이 있어요.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을 위해서 율법이 차후에 필요한 겁니다. 사랑을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 성부와 성자 사이에 그 사랑을 위해서, 십자가 사랑이죠. 희생. 

그 희생을 위해서, 그것을 알아주고, 찬양하고 찬미할 피조물들이 필요해서 피조물들을 만들었고, 그 피조물들을 죄에 빠트렸고, 그 죄에게 율법으로 다가갔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우리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갈라디아서 2장의 말씀처럼, 십자가를 아는 자는 율법에 대해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복음이 성사되는 겁니다. 

복음은, 아, 이건 진짜 어려운건데요. 진짜 여러분 본질을 알고 싶어요. 복음은 내가 믿는 순간, 이게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은 믿든 안 믿든 그 자체로 완성되는 거예요.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학교에서 회초리를 만들었습니다. 회초리를 만든 순간 그게 완성이에요. 그런데 어떤 애가 놀리듯이, “선생님. 회초리를 만드셨는데, 맞을 애가 없으면 회초리 만든 것이 무용지물 되니까, 회초리는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죠?” 라고 한다면, “니 이리와! 너 좀 맞아야 되겠어!” 이렇게 되겠죠. 

회초리는 그 애 말이 맞아요. 회초리는 맞을 애, 안 맞을 애가 구분되게 하기 위해서 회초리를 만든 것이 맞는데, 꼭 맞을 애가 어떤 앤가 하면, 회초리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애들만 맞을 애가 되는 거예요. 지옥 갈 애가 되는 겁니다. 이 말 한 내가 잘못이다. 정말. 예수님은 준법정신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뭐냐 하면 미완성이기 때문에, 사람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법 하나 지키면 의롭다 여기고, 의롭게 되면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갈 보람을 느껴요. 아, 내가 이 정도로 착하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정도로 내가 이 정도로 의롭다. 이게 맴매를 해야 해요. 

이게 바로 행위 책에 해당돼요.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이들은 모두 다 유황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태어난 인간 족족 그 인간밖에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인간밖에 없는데. 태어난 인간 족족. 칭찬받는 재미로 살아가는 그 인간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자기 백성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범죄유발자에 동참시킵니다. 이걸 세례라고 하죠. 로마서 6장에. 함께 죽으시고 함께 태어나게 한다. 

함께 죽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범죄에 대해서 내가 따로 빠질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를 지적할 때,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누가 남한테 비판할 때 그 비판이 너한테 비판이 통하는 겁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잖아요.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법이 있기 때문에, 그 법을 가만히 두지 않아요. 자기가 만든 회초리 따로 있습니다. 그 회초리 가지고 자기는 안 때려요. 자기도 안 때릴 뿐 아니라 자기가 예뻐하는 자기 자식도 안 때려요. 꼭 미운 남을 때리는데 그걸 활용해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야기해요. 나이 60넘었다고 잔소리만 는다고 저보고 이야기하는데, 저도 해당돼요. 저는 잔소리 안 하는데. 자기가 든 매는 꼭 남을 때리기 위한 용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뭐라고 했습니까? 미운 자식을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쓸데없는 자식, 그냥 내버린 자식을 나한테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니가 가장 사랑하는 니 자식을 너의 죄를 위해 나한테 바치라고 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의 죄악 된 세상에 대해서 니가 원인제공자로서 니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미 죄 짓고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존재하고 난 뒤에 착하게 살면 착하게 되고, 나쁘게 살면 나쁘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자체가, 본인은 몰라요. 남들은 알아요. 방귀 뿡뿡 뀌면 냄새가 난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니까 문제라니까요. 피해를 주니까.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부모가 치매 걸리고 나중에 스스로 똥오줌 가려내지 못하면, 아무리 요양사가 가까이 있더라도, 뭐 독일, 미국, 아프리카나, 그런 멀리 있는 곳의 자식은 걱정됩니다. ‘우리 부모님 잘 계신가?’ 걱정 되죠. 근데 걱정을 하게 만든 동기를 만들었다는 자체가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고, 빨리 죽어야 되는데..’ 누구 마음대로 죽어요?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죽습니까? 

끝까지 죄 유발자로 죽을 때까지 계속 살아야죠. 빨리 죽겠다는 말은 나는 죄 유발자가 아니라는 것을 조기에 거두기 위해서 새치기 하는 건데, 새치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살아있을 때까지 끝까지 살아남아서, 있는 죄, 없는 죄, 다 끝까지 쏟아내야 돼요. 너, 나 때문에 힘들지? 아이, 고맙습니다. 그래 말이야 이게 죽어야 되는데. 주의 뜻대로 이게 안 죽네. 뭐 그런 소리 한다고 해서 죄를 감해주시고 할 줄 압니까?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 자기 죄를 감하려고, 착한 일 많이 쌓으려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한평생입니다. 저는 그걸 가지고 거룩의 눈금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인간 자체가 하나의 온도계 같아요. 눈금. 항상 자기가 나는 어느 정도 착하냐? 악하냐? 눈금이 그려져 있어요. 그어져 있어요. 이게 바로 미완성이고 미완료 다 말이죠. 

근데 선지자도 마찬가지로 알아요. 아는데, 선지자는 다른 이야기를 냅니다.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데, 거룩의 눈금가지고 장난치는 게 이거밖에 안 되는데, 왜 이런 나를 아무 대가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그냥 구원해줬습니까? 이게 니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기록되었기 때문에. 선지자라 하는 것은 율법으로 행하는 보통 인간과 특이하게 선지자를 집어넣어버리면, 선지자는 율법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에 형성됩니다. 

그러니까 율법 지키는 사람이 선지자를 보면 이상해요. 아이구 좋겠네? 좋기는? 선지자는 좋은 것도 아니에요. 율법 지키는 틈바구니에서 선지자는 오해받기 때문에 좋은 것도 아니에요. 니 선지자냐? 그럼 기적 행해봐라! 만날 이런 욕을 한단 말이죠. 니 선지자인데 밥 세끼를 왜 못 챙겨 먹냐? 꼴좋다. 선지자가. 

선지자는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고후11장), 선지자 꼴 보세요. 그게 사도입니다. 그게. 그리고 아프기는 얼마나 아픈지, 또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아픈데 빨리 빼내주세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빨이 아픈지 모르겠는데. 세 번씩이나 기도해도 “됐다 고만. 니 은혜가 족하다. 내가 보기에는 가장 적합한 환경이야. 뭘 빼내?” 하고 사탄의 가시를 그냥 두시잖아요. 

그러니 선지자의 몸이 엉망진창이에요. 자기 몸이. 왜? 남들은 자기 가꾸기나 하면 되지. 거룩의 눈금 위에서. 그런데 선지자는 거룩의 눈금이 이미 고장 났어요. 자기가 자기 하루하루를 자기가 어떻게 손 댈 수가 없어요. 이게 성령세례 받은 성도의 모습의 진면목입니다. 

이론상은 내놔야 되는데, 실상은 내가 자꾸 관리를 해야 내 마음이 차니까, 이 둘 사이의 갈등. 율법 지켜서 천당 갈 거냐와, 다시 말해서 행함으로 천국 갈 거냐와, 그거 없이 그냥 천국 갈 거냐가, 내 속에 투쟁을 일으키는데, 그 이유가 뭐냐, 우리 몸이 우리가 신경 쓰라는 몸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벌어진 그 전쟁터가 우리 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이 게임을 벌이는 게임의 현장이 되고 맙니다. 

함이 이길 거냐, 그냥 은총이 이길 거냐를 보여주는 하나의 진열장 같은 것. 또는 투쟁장. 또는 청도 소싸움 하는 데. 그러한 현장이니까, 우리는 그냥 즐기세요.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야야, 내 신경 쓰지 마라. 내 혼자서 밥 잘 해먹고 내 혼자서 잠 잘 잔다. 내 신경 쓰지 마라. 그러면 어무이, 그게 더 신경 쓰입니데이. 야야, 추 석인데 차 밀리니까 오지 마라이. 어무이, 오라는 이야기로 밖에 안 들립니데이. 꼭 오라는 이야기로 밖에. 

어쨌든 우리는 이 게임장을, 주께서 설치한 이 게임장을 벗어날 수 없어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행함 가지고 보람 느끼고, 구원받기는 공짜로 구원받고. 이 어설픈, 그래서 저는 어설픈 완성자,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게 해주시옵소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 관계없이 구원받은 선지자를 집어넣은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감당치 못할, 화로다 죄인이라는 소리밖에 할 수 없는, 그것이 도리어 율법 완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