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강-신 18장 9-14절(미신 금지)1608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8장 9-14절입니다. 구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내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읽었던 본문 앞에 보면,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이러거든요. 그러면 뭐 안 들어가면 되잖아요. 들어가거든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근데 들어가게 되면 우리 인간에게 상당히 부담이 돼요.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마라. 이거 해야 된다. 저거 해야 된다. 그러면 불편한 것을 싫어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안 가면 되지. 뭐. 안 가면 그런 지시도 안 받을 거고. 그러면 사는 게 부담 없이 지 하고 싶은 대로 사니까. 그게 우리 인간 해방, 인간 존엄성을 살리는 멋진 세계가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특히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와서 천국 가라.” “뭐, 천국 안 갈래.” 이 한마디로 말미암아, “엄마나 가. 나 천국 안 갈래. 그냥 이 땅에서 살다 죽을래.” 이 한 마디에 고만 그동안에 준비된 이야기가 무용지물이 돼버려요. 본인이 안 가겠다는데. 우리는 그 불신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사실은 이미 준비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천국을 내가 만들어가서 나를 위한, 나 잘되기 위한 가짜 천국을 조립해서 그걸 그대로 가지고 천국 가려고 하는 그런 시도는 아닌지. 아니면 내 것 버리시고 그냥 일방적으로 백퍼센트 베푸셔서 준비해놓은 거기에 그냥 들어가게 하시는 그 나라인지를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주님께서 이런 저런,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일들을 하는 것은 바로 이방인들이, 그들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을 내가 너희들에게 특별히 들어가게 해주신다는 주님의 배려를 이야기해주시는 겁니다. 이거는 니가 들어가고 말고가 아니라, 이거는 당연히 너의 마지막은 천국이다. 이 하나님과 함께 산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에요. 못난 인간들끼리 합숙 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2층 침대 앞뒤로 있는 기숙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겁니다. 얼마나 부담 되겠어요? 얼마나 거룩해야 되겠어요? 얼마나 완전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도 완전하라고 하는데, 완전의 끝은 어디일까요?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고려한다는 것은, 힘들다. 부담된다. 이래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신분이 주님 보시기에 고귀한 신분으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 나온 내용은 뭐냐, 그 나라 가게 되면 이런 것들은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것들이 용납되지 않느냐면 바로 무당 같은 것을 섬기는, 무당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항목들이 나와 있어요.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정성이 대단하죠. 귀한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몰렉이라는 그 우상한테는 이렇게 정성을 보여줘야 그게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복술자들, 복술자라 하는 것은 점치는 것을 말하고, 길흉자들, 비슷한 사람들이에요. 장래를 미리 예측하는 사람들. 요술하는 사람들, 무당이나 진언자들, 전부 다 이건 현재 우리 형편이 나아지겠습니까? 하는 길흉을 측정하는 사람들. 그 다음에 진언자나 신접한 자나, 전부 다 이거는 신에게 뭘 받아서 횡설수설하는 사람들, 신과 접촉되어 있는 사람들, 그 다음에 박수라고 되어 있는데, 그냥 무당이라고 보시면 되고. 박수무당. 초혼자들, 죽은 혼을 불러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마라. 반드시 니가 사는 땅은 이런 것들이 보편화 되어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예. 우리 그거 안 하겠습니다.” 하면 그만이겠죠. “예. 여기 항목들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만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했던 안 했던 상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나라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여기서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것을 사람들은 행위를 가지고 접근해요. 부처를 섬기면 우상이고, 예수한테 절하면 우상 아니고.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우상 아니고. 이런 식으로 미신과 미신 아닌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 결정하려고 하는데, 나중에 보면 이 미신 섬김, 우상 섬김이 인간의 행함과 관계없이 인간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다루어지고 그걸 주께서는 추궁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물론 겉으로는 여호와를 섬겼는데 속에는 무당 짓이고 여기 나온 항목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내 손으로 내가 하나님을 한번 주물러볼라고, 내 손으로 다루어보려고 하는 겁니다. 인형처럼, 반려신, 반려견처럼. 내 손으로 내가 기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은 그런 충동이, 이러한 미신을 섬기는 마음과 동일한 마음가짐이에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해요. 왜, 그들은 이렇게 미신이나, 또는 우상이나, 미신 행위를 왜 하느냐? 그거부터 알아야겠죠. 왜 하느냐 하면 바로 자기 인생가운데서 성공을 따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성공을. 성공 앞에 환장하는 거죠. 인생을 이대로 조질 수는 없다. 뭔가 내가 성공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이루고야 말겠다. 성공심리가 있어요.
그 성공심리가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나와 나를 비교하는 겁니다. 어릴 때 내가 갖고 있던 세상관과 지금의 자기 형편과 비교하면서 자기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내가 어릴 때, 젊을 때는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라고 한 건 아닌데, 목표가 있는데, 지금 그 목표에서 이만큼 미흡했으니까 따라 붙어야 되고 그 차이를 메워야 된다. 메우면 뭐가 되느냐 하면 메우면 성공이고, 못 메우면 어떻게 되느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는 거예요.
제가 아침에 어려운 말, I, You, It, He.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객관화는 작업입니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거예요.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인간인지, 아니면 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인지를, 판정을 본인이 내리겠다는 겁니다. 본인이 내려서 이만하면 됐다 싶으면 성공한 인생이고,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거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기가 그렇게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사항들, 복술, 길흉, 무당, 요술, 진언, 초혼. 다른 말로 하면 점치는 것, 사주팔자 보는 것, 그리고 궁합보는 것, 토정비결을 보는 것, 그리고 죽은 영혼을 끄집어내는 것, 그리고 정성을 다한다고 자기 재산과 자기 자식까지 불 속에, 불 속까지 들어간 사람은 별로 없지만 신학교 보내는 사람은 많아요. 나중에 우리 아들 병에서 낫게 되면, 잘되게 되면 제가 신학교 보내겠습니다. 저는 생각해요. 수능 400점 만점에 390점 나오면 신학교 보내겠는가? 한 번 생각해봐요. 절대로 안 보냅니다. 400점 만점에 150점 나왔다. 얼른 보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공, 실패 그 논리에, 모든 인생을 다 거기다가, 그 기계틀에 다 걸은 거예요. 무엇을 선택하면 나에게 성공이 올 것이고, 무엇을 하게 되면 실패할 것인가, 심지어는 자녀들 이름 지을 때도, 어떤 이름을 지을 때 이게 성공이냐, 실패냐. 우리 곡성에 사시는 성도님의 손녀의 이름이 뭐냐, 성이 장이고 이름이 보리, 장보리에요. 이름을 누가 지었느냐 하면 시가 쪽에서 지었답니다. 시가 쪽에서 짓는 이름의 특징이 전부 다 연예인 이름이에요. 연예인 이름의 좋은 점이 뭐냐, 이름 짓기 싶다는 거예요.
이름 하나 지어도 성경적 이름으로 짓는 이유가 뭘 내다보느냐 하면 ‘이름까지 바꾸었는데, 설마 실패한 인간으로 봐주겠느냐, 좋은 거 하겠지.’ 라는 그 성공심리가 있어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인간치고 성공 싫다고 하는 사람 누가 있겠고, 성공 거부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라고 하실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성공을 끄집어내는 사람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끄집어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공을 끄집어내버리면 뭐가 죽느냐 하면 우리 인생에 깊숙이 개입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죽어버려요. 하나님의 마지막 끝이, 마지막 최후에 합격하려면 하나님의 약속이 거기에 칩처럼 장착되어야 하는데, 그 약속이 무시당해버립니다. 약속 준 것은 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엉뚱한 것 가지고 복과 성공과 실패를 그렇게 가늠해버려요.
장사를 하는데, 장사가 잘 된다. 성공했구나! 못하면 실패했구나! 그럴 경우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했다. 이 말은 곧잘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실패했다. 이게 은혜라는 말과 실패라는 말의 두 단어를 정말 이렇게 쉽게, 쉽게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참 드물어요. 주의 은혜로 실패했습니다. 그 말을 잘 안하게 되죠. 상당히 오기가 있어서 그럴 경우가 있다고 의심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하지 마라 이 말이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니 인생, 니 거 아니야. 내가 뭔가 니 속에 칩을 심어주려고 하는 거예요. 어떤 정보를 니 안에 심어주려고 하고, 그 정보는 마지막에 니가 하나님 앞에 만날 때, 너의 면상이나 그런 것을 보지 않고 니 안에 하나님이 직접 심어준 것을 되찾고자 하는 그런 관계가 있습니다. 마치 주님이 주신 낚시 바늘이 우리 안에 있어가지고 낚시 줄을 잡아 땡기는 주님의 줄과 이렇게 연결되어 있어야 해요.
사람의 성공, 실패라는 인식이 잘못된 것은, 인간을 관계없이 단독적으로 딱딱 끊어서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질이나 역량을 보지 않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된 낚시 줄을 보는 거예요. 제가 말은 참 쉽게 합니다마는, 제가 이 말을 하면서, 제가 생각한 것이, 가슴 아픈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목사님. 얼마나 성경을 봐야 꿈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 말 할 때, 그 말을 압축해서 해버리면 “내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면 내 능력 활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자꾸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을 함유해야 된다는 것에 자꾸 초점을 맞춰요.
관계가 중요한데, 주님과 낚시 줄이 중요한데, 낚시 줄은 가위로 끊어버리고, 독자적으로 제대로 뭔가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사람인 거예요. 그게 바로 금요철야기도 보면 나옵니다. 차 탈 때 그냥 차타지 않습니다. 앞에 보면 주일, 수요일, 몇 시 나오고, 뒤에 보며 금요일 철야기도 몇 시에 하는 게 나와요. 보통 9시라고 딱 되어 있어요. 옛날에 철야기도 9시에 안 했어요. 7시에부터 새벽 5시까지 했습니다. 요새는 9시에 하고 10시 11시 되면 다 끝나는데, 그것도 요령이 생겨서 가지고.
9시 딱 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럼 아, 저 교회 철야하는 교회구나. 철야할 때 뭐라고 하지? 주님의 관계에서 기도할까? 아니면 독자적으로 자기 신앙적인 역량과 능력을, 내가 증강시켜가지고 내가 품어온 능력가지고 내가 편리할 때, 필요할 때마다 이걸 하나의 쿠폰처럼 써먹을 수 있는,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능력을, 많이 써먹으면 많은 역량이 생기고, 조금 써먹으면 적은 결과가 나오는, 그런 식으로 써먹기 위해서 독자적인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기도하는지. 그거 뭐 물어보나마나죠. 물어보나마나.
주여, 제가 열심히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은 옆 사람이 다 퍼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 안 하잖아요? 내가 기도할 테니까 기도 더듬거리는 저 사람한테 응답 다 가게 하옵소서. 나한테 오지 말고 저쪽에 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법은 없다 이 말이죠. 둘이 막 곁눈질하고, 둘이 막 째려보면서, 니가 오늘 누가 다리가 저린지 한 번 해보자 해가지고 악바리처럼 악을 쓰면서 기도하잖아요. 주여! 부르면서. 주여 삼창하면 사창 해버리고. 안 질라고. 그게 관계성이 다 끊어진 거예요. 관계성이.
주님이 원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성인데, 낚시 줄인데, 자기는 자기 자신을 객관화보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똑바로 하라고 지시하고 그런다 말이죠. 언약은 일단 관계성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성을 확실하게 계속해서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오늘 같은 말씀을 주신 겁니다. 미신이라든지, 이러한 우상숭배의 특징은 바로 개인적으로 자기가 요구하는 멋들어진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수법으로써 이것이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굿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지금 미리 이야기합니다마는, 이러한 이방민족들이 하는 무당짓거리가 나중에, 여호와 또는 기독교 예수 이름으로 교회에 그게 그대로 들어오게 돼요. 관계, 언약적 관계냐, 아니면 개인적인 역량이냐, 그걸로 완전히 판정 나버렸어요. 개인적인 역량을 위해서 예수 삼위일체 3창을 하든, 5창을 하든 간에 그것은 무당 짓이 되는 겁니다. 개인적인, 자기가 자기를 성공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전에 있던 지하실 소망교회가 앞에 간판 걸어놓은 것 보세요. 목적을 이끄는 삶이라고 되어 있었잖아요. 교회가 목적을 이끄는 삶이에요. 십자가를 아십니까? 가 아니에요. 책 줬는데 읽어보지도 않은 것 같아요. 목적으로 이끄는 사회, 또 보세요. 개인적이에요. 개인적. 내 목적, 저 사람이 가져가세요. 이거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목적으로 이끄는 삶. 거기에서 비전이에요. 꿈. 입을 크게 벌리라 채우리라. 이런 것. 시편에 나오는 말씀. 입을 얼마나 벌려야 돼요? 입은 결국 다물게 되어 있어요.
자,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겁니다. 그럼 언약이 어떤 식으로 들어오느냐, 이것만 알면 되죠. 언약이 낚시 줄이라면 낚시 줄을 몰고 우리 속에 깊숙하게, 내 힘으로 빼낼 수 없을 정도로, 내 역량으로는 도저히 빠지지 않을 정도로 주님의 언약 관계가 들어오는 방법은 뭐냐, 그걸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약이란 마지막에서 과거를 향하여 낚시 줄을 던지거든요.
그럼 마지막의 특징이 뭐냐, 모든 존재하는 것은 파괴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언약의 내용은 뭐가 있다가 아니라 멀쩡하게 있는 이것이 왜 깨지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언약적 질문을 하는 거예요.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그게 아니라 멀쩡하게 있는데 왜 저를 죽이십니까? 이게 언약적 질문이에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 멀쩡한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 앞에서 할 질문이 그 질문이에요. 어찌할꼬? 저 분이 왜 죽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아버지께서 양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맞을 채찍을, 모든 희생을 주께서 대신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그럼 질문이, 예수님이 피 흘렸구나! 우린 좋다. 이게 아니라, 왜 내가, 열심히 성공, 성공 신화를 꿈꾸는 내가, 왜 내가 이렇게 깨어져야 됩니까? 깨어지게 한 것이, 자기의 꿈과 기준이 깨어지고, 깨어지게 한 것이 그게 복인 줄 알아야, 이게 언약의 낚시 줄과 관련된 사람이에요.
롯데의 제 2인자가 평소에 누가 놀러가자고 하면 안 죽었어요. 골프 치러 가자고 하면 안 죽었습니다. 검찰에서 소환한다고 하니까 죽었거든요. 그러면 왜 죽어요? 왜 죽는데? 내가 생각한 성공한 나의 모습과 현실적인 내 모습이, 이게 격차가 나니까 그게 짜증이 나가지고 그래서 죽은 거예요. 성공한 저게 진짜 나인데, 그게 나의 객관화거든요. is that,그 사람. 내가 그 사람을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지금의 나는 내가 원치 않는 다른 객관화에 의해서 소환 당하게 되어서 지금 우사당하게 됐다 이 말이죠. 그걸 내가 못 참겠으니까, 내가 사라지는 방법은 뭐냐, 자살밖에 없다. 그래서 죽은 겁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하는데, 안 깨어지려는 그 자아상을 왜 자꾸 그걸 고수하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은 결국 보는 것이 자기 얼굴만 봐요. 사람의 즐거움은 자기 얼굴보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셀카 봉으로 이렇게 저렇게 찍는 것처럼 자기 얼굴보고 사는 거예요. 자기 얼굴보고. 다른 기쁨은 없어요. 자기 얼굴보고 사는 겁니다.
지난 광주 공부할 때, 두 명의 할아버지하고 할머니가 공부하기 전에 난리도 아니에요. 누가 외손자가 예쁘냐?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보여주고. 셋 중에 누가 더 예쁘냐? 그중에 저도 포함이 됐는데, 그런데 또 김을수 집사님은 우리 애 보세요. 말도 아주 겸손하게 잘하면서 이정도 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제 3자인 구자근 사모님은 조집사님 손녀가 제일 예쁘다고 판정을 내렸어요. 우리 외손녀는 3등이에요. 3등. 절대로 남의 외손녀 예쁜 것을 인정을 안 해. 왜냐하면 목표 가치가 있거든요. 비전, 꿈이 있다고요. 적어도 이 정도 사람이 되어야 우리 집 사람이라는 꿈이 있다고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인 것을 알아요. 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낚시 줄을 던집니다. 던지면서, 다른 관점의, 마지막 때 아무리 예쁜 것도, 마지막엔 그걸 묻지도 않고 다 깨트리는 겁니다. 그런 내 얼굴보고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그런 모든 거울 같은 이미지는 다 깨져버려요. 깨어지기 위해서 인간은 존재하고, 외손녀도 존재하고, 다 깨어지기 위해서. 오죽했으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겠습니까? 천국이라는 것은.
이게 깨어지는 거예요. 깨어질 때 그냥 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니가 예상도 못한, 하나님이 따로 준비한 축복이 있기 때문에, 니가 좋아하는 것은, 죄인인 니가 좋아하는 것은 주님이 준비한 것에 양보하라는 겁니다. 양보해라. 쉽게 말해서 양보하라고 하지만 사실은 막 깨어버리죠. 자식 키우면서 굉장히 좋지만 나중에는 실망스럽죠.
그러한 증거가 아모스 7장 8절에 나옵니다. 이것만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모스 7장 8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 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이래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모스가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가뭄이 오고 두 번째는 메뚜기가 와서 황무하고 세 번째 벌이 뭐냐, 바로 성벽에다가 다림줄, 다림줄이라는 것은 뭐냐 수직으로 제대로 집이 지어졌는지, 아닌지, 안 그러면 기울어져 지진이 오면 왕창 무너질 집인지, 측정하는 줄이 다림줄이에요. 무너지기 전에 주께서 다림줄을 쳤다는 말은, 이 성벽과 이 성전은 깨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성전을 주셨다. 이것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성전을,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잘못된 생각으로 이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모스는 마지막 때 선지자에요. 선지자 자체가 문서로 남는 선지자는 전부 다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을 우리가 설파할 필요가 없어요. 세례요한이 외치 것도 그거에요. 마지막 때입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봐라.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한테 회개하면 천국 백성이다. 지금 그게 기쁜 소식이거든요. 기쁜 소식이 왔기 때문에 자기 비전, 꿈에 대해서 너무 연연할 필요 없어요. 나는 성공해야 된다. 독자적으로 성공해야 돼. 나만 성공해야 돼. 그럴 필요 없어요.
주님 성공했으면, 주님 성공한 것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나는 자동적으로 주님 때문에 성공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왜냐, 그 낚시 줄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게 복음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 존재하는 것은 깨어지기 위한 준비과정, 깨어지기 위해서, 깨어지는 객관화, 깨어지는 대상으로 자기 인생을 보시면 되는 겁니다. 깨어진다는 것은, 성공한 이게 깨어지면서 우리는 속을 바라봐요. 성공한 내 이상이 깨어지면서, 그러면 내 안에 뭐가 장착되었지? 아, 내게 하나님의 언약이 있구나! 그럼 뭐냐, 죽어도 가는 천국.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 가는 천국. 그 천국, 낙원이 내 속에 있다면, 너무 깨어질 것에 미련 두거나 연연하거나 집착할 필요 없는 겁니다.
내가 왜 독단적으로 성공해야 합니까? 그 성공은 또 다른 성공에 대한 미련인데. 성공해보세요. 또 성공을 기대할 거예요. 그러면 그 자체가 실패에요. 오늘 본문에서 미신하지 마라. 미신은 뭐냐, 자꾸 언약은 모르고 따로 성공적인 자아상을 만들어내니까, 그게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뭐 전능하신 신을 믿든지, 뭐 예수 십자가를 믿든지, 어떤 것을 믿든지 내 성공한 그것을, 내 이미지를 갖고 싶다는 그 욕구가 결국은 모든 마음 문제거든요. 이게. 행위를 믿든 부처를 믿든 그 마음가짐이 목적을 이끄는 삶이라면 그게 미신입니다.
참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이상적인, 나 잘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버릴 수는 없어요. 그러나 순간적인, 잠깐의 이질적인 것이 우리의 전부의 속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것, 저것 자랑하면서 실은 정말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 있음을 겸해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들 앞에서는 뭔가 내가 무시당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항상 남보다 먼저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런 죄인입니다.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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