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94강-흠과 악(신17;1-7) 1607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8. 4. 07:41
2016-07-31 15:00:30조회 : 81         
   흠과 악 160731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흠과 악(신명기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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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7-31 15:33 
흠과 악

2016년 7월 31일                         본문 말씀: 신명기 17:1- 7

(17:1)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1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17:3)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17:4)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17: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17: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17:7)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자들의 오해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실만한 긍정적인 가치가 있기에 함께 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이유는 죄를 폭발적으로 양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속에 무엇을 꿈틀거리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안을 밖으로, 밖으로 안으로 뒤집을 줄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꽁꽁 자기 내부를 강제로 틀어 막기를 급급하면서 복은 죄다 얻어 챙기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안과 밖으로 거꾸로 뒤집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따로 그 원형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흠없는 양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현장을 일으키십니다. 따라서 신명기 오늘 본문은 항상 제사를 병행해서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사의 의미를 배경으로 해서 이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신력이 멀쩡하다는 점을 과시하는 용도로 이 말씀 준수에 도전에 나서게 됩니다.

이 말씀을 현실화해 보겠다는 주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자신에게 주셨다고 여깁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돌리는 방식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준행하는 것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시도는 도리어 미끼에 걸려든 겁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기를 둘러싸면서 살아가는지를 발췌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싼 생활 환경에 사수하는데 진력을 경주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에게 손해나는 일을 자처할 리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기도회하면서 “나를 저주해주세요”라고 요청할 위인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일서 5:20-21에 보면,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아들 예수님이 아니면 우상이다 는 겁니다. 예수님 개입없이 우상 규명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내가 선택하는 우상은 온전히 우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온전히 수행했다는 여부는 예수님의 오심으로만 드러날 사항입니다.

예수님의 개입없이 자력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제대로 지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하는 자는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데 만약에 자신이 그동안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래도 돌로 쳐죽이실 겁니까? 인간에게만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손에 숨긴 것이 있어 손을 벌리라고 엄마가 요구하면 더 꼭 손을 오므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일단 자신에 대한 요구는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겁니다. 이런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있는 이상, 어느 인간이 스스로 저주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기 잡아 주니 도리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입니다. (누가복음 5:8)

사람들 보기에 ‘고기 잡는 행위가 뭐그리 죄악된 것이겠는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생각은 그게 아닙니다. 자신이 사수하고 싶은 것, 즉 ‘나는 가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 주님이 묵사발 만드시는 행위로서 자신을 찾아드신 겁니다. 쉽게 말해서 급발진 사고에 의해서 아름다운 자기 가게가 폐허가 된 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마 10:6) 이 말씀은 이미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땅 끝에서 가서 열심히 선교나 전도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3:15에 보면,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실행하는 그 전도로 인하여 생겨나는 부작용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양’이 유발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잃어버림’이 중요합니다. 즉 멀쩡하고 괜찮은 자아라고 여기는 자와 협상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저를 떠나소서. 죄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유발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찾아오시면서 끔찍한 저주의 말씀을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말씀을 대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바르게 살아도 악을 온전히 제거할 수 없는 양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이유는, 본인만큼은 최종적으로 유일하게 가치있는 존재라고 남겨놓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거도 없이 나타나는 이 말도 안되는 교만에 대해서 그냥 예수님에게 바치고 맡겨야 합니다. 그 맡기는 현장이 바로 제사 현장이요 신약에서 십자가 앞입니다.

죄를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이해도를 넘어서서 죄가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즉 죄는 ‘신원조회’가 아니되는 겁니다. 죄만 그런게 아니라 ‘의(義)’도 그러합니다. 내가 쥘 수있는 의는 없습니다. 내가 판단해서 소지하는 의는 어느 새 추가적인 하나님의 엄중한 법 앞에서 죄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의롭게 되려다가 도리어 죄인으로 마감되는 겁니다. 율법이 더한 것은 죄를 확대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개선으로 보완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 점검표를 만들어서 보다 온전함 경지까지 나아가고자 합니다. 미흡한 것은 촘촘히 채워서 구멍이 생기기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은 복음에 대한 저돌적인 반발뿐입니다. 즉 하나님을 소위 안다는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살해당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 오늘 본문의 완성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본인을 위한 말씀으로 가로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관심사에 우리가 자신을 빼주시고 오직 진리의 완성된 활약상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6-08-03 06:35 
94강-신 17장 1-7절(흠과 악)1607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7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288페이지입니다.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 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희 가운데 혹시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말이 아멘이지, 이게 아멘 될 일입니까? 점치고 사주팔자 봤다고 공개적으로 끌어내가지고 사람을 돌로 쳐 죽이고,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주사 맞는 것이 아니고, 돌로 쳐 죽이고, 피터지게 만들고,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북한도 아니고, 이런 일을 행할 때에, 이런 대목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안 들은 걸로, 못 들은 걸로, 성경에서 이런 것 좀 솎아내 가지고 이런 것 없는 성경책을 따로 만들면 안 되겠는가? 좀 긍정적인 이런 성경책을 원하는데, 여러분 야구할 때 한쪽은 공을 던지고 한쪽은 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지고 공을 던지는데, 우리는 그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딱 받고 보니까, 신명기 17장이 딱 들어있다고 봅시다. 우리는 으악! 하고 감당이 안 되죠. 어떻게 처리가 곤란해요. 어떡하라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죽이는 겁니다. 2차 대전 때 유대인들을 죽일 때, 또는 전쟁에서 포로를 죽일 때 정면으로 보지 않게 등 돌리게 만들어버립니다. 근데 등을 돌려서 앞면을 봤을 때 특별한 사람, 아는 사람은 살살 죽이고 총알로 안 아픈데 죽이고 하는 이런 것이 아니고 등을 돌리게 해서 안면몰수하고 그냥 등짝보고 전부 다 총을 쏘는 겁니다.

이 총 쏘는 원칙이 개개인의 감정이라든지, 정이라든지, 관계, 이런 것을 다 무시하고 원칙대로 밀어붙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이런 신명기 17장 말씀을 딱 주게 되면, 우리 가족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보잖아요. 등짝을 보지 않고 얼굴을 맞대고 보기 때문에 “아이고 우리 애는 안 됩니다. 제가 대신 맞을게요.” 이렇게 나올 공산이 커요. “우리 애는 안 됩니다. 우리 애를 애먹이면 저 아이를 그 자리에 집어넣어주세요.” 그런 식으로 해서 아는 사람 끼리끼리 하나님의 저주를 이렇게 방비하려고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근데 제가 이 본문 다 읽었잖아요? 여러분 다 보셨죠? 복음부터 이야기합니다. 복음부터. 좀 수상하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할 수 없어요. 복음부터 먼저 말씀드립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먼저 받았어요. 이 말씀을.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아무리 우상 섬긴 사람을 돌로 쳐도 이 신명기 17장의 완성은 아닙니다. 오해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현재 이슬람나라도 마찬가지고. 이슬람 그들은 구약을 경전으로 봤습니다. 구약성경대로 한다고 저 짓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약 성경을 경전으로 봐도 성경을 이해 못하고, 자기의 원칙대로, 구약성경의 말씀대로, 알라는 위대하다는 그 말씀대로 그냥 처치해버려요. 소련의 군관들이 있었는데 군사훈련을 받는데 공산주의 사상을 거부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을 붙잡아왔어요. 군관들 모임에서. 그래서 그 사람을 죽이라고 하니까, 등을 보여야하는데, 앞을 보니까 아버지다 말이죠. 자기 아버지는 못 죽여요. 그럴 때 옆에 있던 동료가 그 아버지를 죽여 버립니다. 그 못 죽였던 사람의 이름이 장학수라는, 인천상륙작전영화이야기입니다.

앞면을 봤다가는 죽일 수가 없어요. 서로 아는 사람끼리 어떻게 이 말씀을 합니까?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라도 내 거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것을 하나님이라도, 우하나님이라도, 여기 우씨는 좀 용서해주시기바랍니다. 우하나님이라도 내 것 건드리면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욕해버리고 반발합니다. 이것을 방어기제라고 해요. 방어기제. 인간 속에는 내 것이라고 형성된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요소가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요소가 있어요.

애들을 보고 손에 뭔가 수상한 것이 들어있었을 때, 엄마는 이야기합니다. “야! 손 펴봐!” 손 펴보라고 하는 명령 자체가 애로 하여금 손을 더 다물게 만들어요. 이를 악물고 손을 꽉 쥐죠. 기어이 손을 강제로 펴서 울어야 손에 사탕 한 개 쥔 것이 등장하죠. 인간에게 뭐 하나 내놓으라고 하면 더 움츠리게 마련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더 움츠린다는 것,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저항요소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이 말씀 주신 겁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킨다고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이 말씀이 우리한테 오기 전에 누가 가로채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할게요!” 하면서 가로채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이걸 몰라요. 구약성경에서 구약성경 말씀 주신 당사자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자기보고 자기에게 이 신명기 17장을 주신 겁니다. 이게,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거든요. 예수님이 자신에게 이 말씀을 줬는데 해석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슬람이나 오늘날 기독교나 천주교나 이 말씀을 자기가 지켜가지고 두리번거리면서 혹시 또 걸려들 일 없는가? 돌 던질 일 없는가? 하고 찾고자 하는 것, 그건 위선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더 위선을 유발하는 그러한 용도로써 주께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라 하는 것은 죄를 더욱 더 키우는 목적으로 율법을 준 겁니다. 율법을 어겨서 죄가 아니라 지킨다고 하니까 더욱 죄를 추가적으로 더 짓는 거예요. 추가적으로. 자, 그렇게 하나님께서 유도하시는 그 의도가 있을 거예요. 그 의도가 뭐냐, 요한일서 5장 20절에서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절,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셨거든요. 21절과 비교해보면 뜻이 나타납니다. 21절,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빼놓고는 다 우상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우상을 자기 임의로 찾고자 하는 겁니다. 조상 숭배하는 것, 그리고 갓바위에 갖다 뭐 바치고 비는 것, 이렇게 또 팔공로 삼거리에 보면, 특히 금요일 아침 되면 사과, 과일, 떡, 돼지대가리, 다 갖다놨어요. 삼거리거든요. 삼거리에 제물 바치면 새 차 사가지고 사고가 적게 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덕분에 나만 사과나 먹을 만한 것을 수거해서 아내하고 같이 먹지만.

자, 우상이라는 것은 그냥 사주팔자 안보고 점 안치면 그게 우상이 아니고 토정비결 보는 것을 그게 우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토정비결 지은 사람은 이지함입니다. 이지함은 옥중화에 보면 나와요. 자기 자신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외에는 모두 다 우상인 거예요. 그러면 내가 우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이유를, 그 테스트하는 방법을 쉽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금요철야기도하고 새벽기도 하는데, 어느 누구도 “주여! 저를 저주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제가 지금껏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이 바닥에 들어서고 난 뒤에, 교회하고 난 뒤에, “주여! 뭐하십니까? 저주 빨리 안 하시고? 제발 좀 우리 집안 빌어먹게 하옵소서. 더, 더, 더 빌어먹게 하옵소서.” 이거 기도하려고 커피 석 잔 먹어가면서 철야하는 사람 제가 못 봤습니다. 철야기도 할 때. 그래서 인간은 우상입니다.

예수님은 안 그랬어요.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도록 이미 창세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어요. 예수님만이 우상이 아니고 나머지기는 다 우상입니다. 나를 저주하지 말라고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우상의 시작이에요. 가짜하나님, 가짜예수, 가짜삼위일체, 가짜성령, 가짜복음을 내가 골라서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마트에서 물건 살 때 여러 가지 있지만 내가 필요한 것을 고르듯이.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카트에 담아서 그것을 계산하고 자기 소유로 삼거든요.

하나님께서 신명기 17장을 주시는 이유가 현재 이스라엘 속에 진짜 이스라엘이 따로 들어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나는 이스라엘에게 오지 않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했어요. 전에 제가 신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했죠? 신학교에서 차인배교수라는 분이 선교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에 내가 질문했는가, 또 누가 질문했는가, 누가 질문했는지 이런 질문을 했어요. 강의 끝나고. “교수님. 선교하라고 한 시간이 넘도록 강의를 했는데,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하신 말씀을 왜 하셨습니까?”하고 신학생이 딱 한마디 질문을 했습니다.

한 시간 넘게 침 튀기면서 열강을 해놓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해요. 말을 하시라고 해도 말을 못해요. 말을. 선교해야 하늘나라가 확장된다고 그렇게 구라 쳐놓고 지금 그 말,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하는 거기에 대해서 말을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선교를 안 한 것이 아니고 선교를 했거든요. 땅 끝까지 사람 한 명 찾아내서 배나 지옥백성이 되게 했던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나옵니다. 배나 지옥백성 만드는 작업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염두에 두고, 그걸 전제로 깔고 나는 너희들이 시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그 선교프로젝트를 거부하고 나는 너희들이 놓치고 있는 것, 너희들이 빼먹고 있는 것, 너희들의 잘못된 인간위주, 인간들의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놓쳐버린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던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선교 안 한 것이 아니에요. 선교를 하시되 그건 아니고를 병행해서 선교하신 거예요. 그건 아니고. 선교센터 만들어서 선교하는 그건 아니고. 너희들 방식으로, 한 사람도, 어떤 인간도, 한명도 구원받지 못하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듣고 있는 너희들도 그렇게 해서 구원받고 싶은 거지?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력으로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 없지? 그지?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구원받을 생각도 없었는데 주께서 쳐들어오셨잖아요? 신명기 17장을 들고.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말씀으로 쳐들어왔잖아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급발진이라고요. 난데없는 새벽에 장사하고 있는데 급발진해가지고 차가 들어와 보세요? 유리창 다 깨지고 다치고.

주께서 우리의 가장 놓치지 않으려는 그 대목에 허락도 없이 그냥 급발진해서 쳐들어와버린 겁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고기 잡는 것이 뭐가 죄가 되겠습니까? 그냥 고기 잡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목사 하는 짓이 죄가 되고, 장로가 죄가 되고, 검사하는 것이 죄가 되고, 의사, 판사가 죄가 되고, 그리고 농사짓는 것이 죄가 되고. “주여, 죄인입니다.”

주께서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다는 사실. 그 숨겨진 기억을 되살려서 말씀 안에 담아놓았던 겁니다. 그러면 뭐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조치인가, 무슨 조치가 남아있는가, 중심 바꾸기 조치가 남아 있어요. 중심 바꾸기 조치. 자, 중심 바꾸기 조치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이 이 말씀을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주게 되면 어길 생각 없어요. 이 말씀을 주게 되면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자, 애를 쓰면서 어떤 것을 느끼느냐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다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저만치 멀어지는 거예요. 또 가까이 가면 저만치 멀어지고. 이거는 아,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말씀을. 또 말씀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그렇게 말씀은 종류대로 많은지. 온갖 종류의 말씀들이 있어요. 이걸 지키면 저걸 위반하게 되고, 저걸 지키면 이걸 위반하게 되고. 날씨 좋으면 우산장사 아들을 걱정하게 되고, 비 오면 소금장사 아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이 세상은 모순과 모순으로 점철되어서 어느 하나를 잡아야 해요.

서울대학 나와서 운동권해가지고 나라걱정 지 혼자 다하고 민중운동 다 하더라도 삼성그룹에 취직하고 나면 그거 다 잊어버려요. 사람은 한 가지만 하게 되어 있지, 두 가지는 못하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운동권하다 이것 안 되고 저것 안 되면 남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국회의원 출마하면 돼요. 그러면 돼요. 하는 재주가 그 재주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문제를 주께서는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이렇게 해결하는 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렇게 해결합니다. 울산의 태화강에 보면 거기 학성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학성동에 4킬로미터의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저는 울산에 한두 번 간 것이 아닌데, 아무리 봐도 4킬로미터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울산 시에서 구라 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4킬로미터의 대나무 숲이 있는데, 거기에 까마귀가 쭉 앉아있는데 그게 장관이라는 거예요. 근데 학성동 주민한테 물어보세요. 그거 장관 아닙니다. 그거 빨래 옥상에 널어놓으면 똥 다 쌉니다. 어쨌든 간에 까마귀 떼, 백로 떼가 쭉 앉거든요. 앉았다가 이게 떠나버려요.

자, 대나무 숲이 달라질 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요. 대나무 숲이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그냥 까마귀 떼가 앉았다가 날아가 버리죠.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내가 선을 행하고 이렇게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나한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자꾸 생각해요. 대나무 숲이 갑자기 갈대숲이 된다든지, 대나무 숲이 없어진다든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잖아요. 그냥 까마귀만 앉았다가 날아갔을 뿐이죠.

마찬가지로 마귀의 죄가 우리에게 와서 날아가도 우리의 일상은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죄가 앉았다가 날아가도 일상이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가 왔다 가도 달라진 게 없어요. 근데 교회 와서는 뭐라고 거짓말 하느냐 하면 착한 일 하면 복 받는다고 거짓말 하고 나쁜 일하면 저주받는다고 거짓말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은 대나무가 되어 가지고 있다가 까마귀 떼가 오면 발목을 잡아야 돼요. 까마귀 떼가 앉았다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발목을 잡아야 해요.

이 말은 선이 오면 선을 잡고 악이 오면 악을 날려 보내고 해서 내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티를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와 그리고 같은 차원의 의는 신원조회가 되지를 않습니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에서 없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우리가 사는 생활현실은 뭐냐, 생활현실은 그야말로 생활공간이에요. 내 생활에 필요한 것만 주워 모아서 그걸 공간으로 구축한 겁니다. 거기에 대한 죄와 의는 어떤 변화를 주지를 않아요.

멀쩡하게 죄 짓고 안 들키면 평생 가는 겁니다. 행복하게 지옥가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설교했거든요. 행복하게 지옥 간다니까요. 복음 전하는 목사들 중에 마음에 어떤 아픔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제발 복음 전하지 않는 목사들 교회 망하고 불 좀 나라고. 어느 교회 불났거든요. 불나서 망하라고 하지만 멀쩡해요. 불 하나도 안 나요. 교인들만 점점 더 부흥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진짜 악과 의는 신원조회가 안 된다니까요. 확인이 안 돼요. 확인이.

이게 자꾸 확인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 이 자체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신명기 본문 한 번 봅시다. 보게 되면, 하도 이 이야기가 엄청난 이야기라서 제가 입 떼기가 미안해서 그래요. 미안하지만 한 번 더 하겠습니다. 5절에 “너는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그 성문에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돌로 쳐 죽이라 이 말이죠.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변화를 해봐야 이게 근절되지 않아요. 악이 근절되지 않아요.

아무리 회개하고 반성하고 또 헌금하면서, “주여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라고 백날 해봐야 돌아서면 헤헤거리고 인간 자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근절되지 않는다는 말이 맞아요. 우리가 나만 생각하는 마음이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달라지지 않는데 자꾸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게 바로 정말 영원히 뽑아낼 수 없는 근원적인 죄가 되고 신원조회가 되지 않습니다.

신원조회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나에 대해서 손 댈 수 없다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내 운명과 내 팔자, 내 미래에 대해서 나는 손을 떼야 됩니다. 떼고 그냥 맡기세요. “주여, 저는 이런 존재밖에 안 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적용시킵니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제발 좀 너 자신에 대해서 잃어버렸다는 감각을 좀 가져 도!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이라는 감각을 가져 도! 니가 손 댈 문제가 아니다.”

신원조회가 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손으로 다룰 수 없는 의가 날아와서, 까마귀 떼처럼 날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변화될 수 없는 새로운 변화된 자아로 이미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만들어버릴 때 나오는 고백이 뭐냐,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이건 신약 때고. 그럼 구약 때는 어떻게 하느냐, “주여, 이 양을 받으시옵소서.” 그걸 두자로 제사라고 합니다. 그 제사가 인격화 되었을 때는 뭐냐, 사람을 죽일 때는 두 세 증인 가지고 손대서 죽이라. 이 말이에요.

두 세 증인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과 아버지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두 증인이거든요. 하나님과 아들. 본인이 증인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신원조회 되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이 다룰 수 없는 의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신명기 17장을 우리가 들어가 봤습니다. 엄청납니다. 이거 다 때려죽여야 되고, 결국 때려죽이다 죽이다 못하면 내가 나를 죽여야 될 판국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알거든요.

우상이라는 말은 우상섬기는 것만 우상이 아니고 남을 탐내는 것도 우상이고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우상이고 욕심내는 것도 우상이고 부모보고 왜 저를 태어나게 했냐고 하는 것도 우상이고 돌로 쳐 죽일 인간이에요. 즐겁게 노세요. 이것도 죽이고 저것도 죽이고 나중에 살아남을 위인이 없어요. 다 죽여야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별로 안 죽었어요. 왜? 안 죽이니까. 주님이 죽이라고 해도 안 죽여요. 이쁜 손녀딸, 아들을 우에 죽입니까? 보호를 하고 싶죠. 내 손 안에 있는 사탕인데. 주님이 백날해도 강력한 방어기제가 작용을 해요. 내 것 건드리면 하나님이고 가만두지 않겠다. 이런 심보를 무슨 수로 내가 나를 고칩니까? 못 고친다니까요.

근데 그 심보를 그냥 그대로 가져오세요. 어디에다가? 제사에다가. 그 제사에 누가 동원되는데? 우상이 아닌 제물. 오직 예수님이신 어린양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가져와! 그냥 너 가져와! 죄진 너 그냥 가져와! 그리고 바꿔치기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 자신을 늘 바꿔치기 하는 작업을 해요.

이미 바꿔치기가 완료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완료가 되게 되면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바꿔치기 한 그 감각이 우리 속에서 계속 일어납니다. 균질 속에 요동친다는 말이 있죠. 내가 이런데 갑자기 균열이 일어나죠. ‘내가 꼭 바보 같아.’ 이런 느낌. ‘뭔가 세상에 대해서 너무나 내 중심 같아.’ 이런 느낌.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은 이미 바꿔치기 한 그 작업이 나의 주도권을 쥐고 우리 인생을 마지막까지 책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신명기 17장 이야기는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속에 계신 주님과 마주쳐서 주님이 신명기 17장을 가지고 나로 하여금 내 속에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는 작업장. 그 현장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남은 인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강력한 방어기제, 내 것 사수하려는 목적으로 교회 나와서 조금만 흠집나면 유감없이 유감을 표하는, 우리의 타고난 악마적인 본성, 우리가 손대지 말고 그냥 주님의 벌여놓아진 어린양의 십자가 그 제사 앞에 죄인으로서 다가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