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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95강-제사장 판결(신17;8-13) 1608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8. 13. 17:12
2016-08-07 14:54:38조회 : 92         
   제사장 판결 160807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제사장 판결(신명기 17: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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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8-07 15:34 
제사장 판결  
 
2016년 8월 7일                                 본문 말씀: 신명기 17:8-13

(17:8) 네 성중에서 송사로 다투는 일이 있으되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17:9)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것을 네게 가르치리니

(17:10)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무릇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17:11) 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법률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고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기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7:12)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17:13)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천자히 행치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법이란 사적인 원한을 갚아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원한을 갖는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당연해 보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 어디서나 제사장이 존재한다는 의식을 놓치면 아니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구어 나가시는 나라를 가지고 인간들의 이상적인 나라로 바꾸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인간들의 이상적인 나라를 사람들이 생각하면서 항상 먼저 잡는 틀은 곧 ‘정의(正義)’가 살아있게 하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의라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뿐더러 도리어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요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잘 산다’의 요건은 ‘제사장 중심주의’입니다.

즉 제사장의 존재이유가 계속 살아나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요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율법도 이 제사장 중심주의와 관련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 살아있음’을 위해서 개인들의 ‘살아있음’조차도 가차없는 허물게 됩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만약에 제사장의 판결을 인정치 않으면 그 인간을 속아내듯이 죽여버려라”입니다.

사람들이 사회 생활하다보면 다투게 마련입니다. 다투는 이유는 각자의 생활습관이나 관점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가 자신에 대해서 정의롭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주장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우월적 직위에 있는 정의가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일이 복잡해지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기 위해 재판관을 찾았지만 재판관은 고소한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당해서 내가 고소할 수밖에 없는 그 쪽편에 서서 그쪽에 유리하도록 판결을 내리게 되면 참으로 이 현실에 대한 실망을 크게 할 것입니다.

반대로 판사가 나의 편에 서서 내가 요구할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면 참으로 이 현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아직도 정의는 살아 있네”라고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이 바로 이스라엘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없는 악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백성을 위해 제사장이 있는 조건이 이스라엘의 운용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에 대한 태도에서 사람들은 자기 욕구와 욕망으로 다가서게 마련입니다. 법에 대해서 ‘자기 파멸’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다가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애초부터 잘못된 겁니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제사장 중심성’이 필히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사적인 소원을 해결하기 위해 제사장이나 재판관이 있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실시하는 근본된 오류, 즉 세상을 평가하면서 과거에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식으로 보는 그 관점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가진 소유와 재물과 형편을 줄기차게 지난 과거로부터 애쓰고 노력해서 일구어낸 결실물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층 안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미래는 늘 불확실성을 지니고 마중 오게 마련입니다. 늘 불안하고 늘 공포스러운 미래를 떠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과거→현재→미래’로 볼 것이 아니라 ‘미래→현재→과거’로 찾아드는 시간관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즉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재판에서 승리하여 미래의 행복을 확보하고 보장받으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미래는 과거로부터 차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영역에서 도리어 아래 쪽으로 향하여 계속 유입되어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도리어 과거의 허술함을 발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은 바로 예수님의 ‘의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11-12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기에 최종적인 제사장이 나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전에 율법을 지상에 주신분이요 동시에 그 해답도 알고 계시고 알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사건이 먼저 벌어지고 그 사건 안에서 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답을 위해서 그 답의 진리성을 위한 사건에 계속 여기 저기 벌어져야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가 ‘미래→현재→과거’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면 소송사건에서 져나 이기나 상관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제사장의 위상과 그 중심성을 증명하기 위한 일들이고 그 판결과정까지 이미 영원한 제사장이신 주님께서 관여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미래 안에 놓여 있게 된 자는, 미래에 와서야 생기는 상황 안에 놓인 자입니다. 그 상황이란 다름아닌, 세상에서는 “망했다”는 소리를 듣는 처지에 있다할지라도 ‘최종적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었기에 죽어도 여한이 없이 삽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재판장의 최종 판결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관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어차피 자기 중심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최종 제사장과 연결지어서 자체적으로 완성을 뿜어내어서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천자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교만하고 함부로 하고 자기 멋대로 하고 결국 건방지다는 평을 받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속아내는 방편으로서 나름대로 억울해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보상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지, 소송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송자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기어이 과거로부터 관습적으로 내려온 자기 현실관에 부합해야 분이 차는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제사장 중심성’에 도전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예수님에게 절대로 맡길 위인이 아닙니다. 그저 이용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수없이 이런 자들이 구원되지 못하도록 조치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는 자기로 인하여 즐거워해서는 아니되는 자임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6-08-10 12:01 
95강-신 17장 8-13절(제사장 판결)1608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7장 8-13절입니다. 구약성경 289페이지입니다.

 “네 성중에서 송사로 다투는 일이 있으되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것을 네게 가르치리니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무릇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법률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고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기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니 말 것이니라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그리하며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천자히 행치 아니하리라”

성경을 볼 때에 두 종류의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나아가는 해석이 있고, 미래에서, 완료된 상태에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를 전부 다 삼켜 버리고 없애버리는 쪽으로, 그렇게 두 종류의 시간 층이 있고 두 종류의 해석이 있습니다. 미래에서 오게 되면 이미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정답을 알고 있는 입장인 반면에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차올라오게 되면 정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해도 이게 정답이 아니면 어떻게 할까? 내가 판단하는 것이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믿는다는 것이 믿음이 아닌 걸로 들통 나면, 나는 헛수고잖아? 늘 이게 불안, 불안해요. 이것은 바로 두 개의 시간 층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항상 과거를 근거로 해서 현재를 분석해서 미래의 보다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본질을 그냥 유지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그 방식도 있어요. 그리고 율법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 해석도 있고, 율법의 완성된 미래에서부터 출발해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에, 나는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했었구나, 하고 살펴보는 그런 방식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두 가지 다를 제가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여기에 8절에 보게 되면 “네 성중에서 송사로 다투는 일이 있으되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9절,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나아가서 물으라” 이래 됩니다. 너와 나는 1과 1, 합해서 2가 되겠죠. 근데 율법은 1과 1에서 해결 짓지 말고 제 3의 요소를 끌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 3의 요소가 뭐 그리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근데 제 3의 요소가 과거에서 현재로 나아갈 때는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재산문제나 여러 가지 이웃하고 다툼문제에 있어서 판결하기가 힘들다, 그러면 제 3의 요소인 재판장이나 레위인에게 물으면 된다, 그러면 그거만 생각하면 ‘그래, 이게 궁금했었어? 그거 해결했으니까 앞으로 잘 살아야지.’ 이렇게 돼버리면 과거에서 현재로 그냥 미래로 쭉쭉 나아가는 방향이에요.

근데 미래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뭔가 구타하거나 때리거나 싸우거나 피 흘리는 일이 있거든 재판장에게 물으라. 이 본문을 미래의 관점에서 이렇게 봐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그 재판을 시작할 때 기대했던 재판의 판결이 나오지 않더라도 상관없음.’ 이렇게 돼요. ‘내가 고소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거봐! 내가 옳잖아. 내가 잘 판단했잖아.’ 라는 그런 기대가 생기지 않더라도 그것 때문엔 슬퍼하거나 노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가는 거예요.

도리어 이렇게 하겠죠. 내가 왜 이 재판, 판결에서 지더라도 상관없느냐? ‘그 재판에서 반드시 이겨야 되는데, 그래서 내 뜻을 반드시 관철해야하고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돼.’ 라는 그런 것들이 나의 미래에 오실 분을 자꾸 가로막고 과거로부터 올라오는 것을 자꾸 고수하게 만들어요.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방법을 자꾸 고수하고 지탱하려고 하게 되면 그것은 그 자체가 실패로 끝납니다.

그래서 제가 시간을 갈아타라고 이야기했죠. 과거로부터, 현재로, 미래로 가는 것을 갈아타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가는 시간 노선으로 갈아타셔야 해요.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두 개의 빌딩이 있는데 한 41층 되어서 이쪽 건물과 저쪽 건물 사이를 건너갈 수 있는 통로, 스카이 브릿지가 있어요. 서울에도 그걸 본 따서 높은 건물 중간에 있는데, 아주 고난이도의 기술인데, 삼성에서 그렇게 만들었답니다. 이쪽 시간에서 저쪽 시간으로 건너가는 통로가 있는데, 그 통로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라는 통로로 이렇게 건너올 수가 있어요.

내가 과연 미래에서 현재로, 과거로 건너가는 시간에서 건너왔는지, 돌아봐서 십자가가 보이면 이미 이쪽에 속한 거예요. 미래에서 현재로, 과거로 간 겁니다. 그러면 미래에는 무슨 말씀이 있기에 율법 해석에 있어서 미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도대체 신약에는, 완성된 상태에는, 마지막 때는 뭐 어떤 구조로, 어떤 체계로 되어 있기에 그렇게 재판에 져도 상관없단 말인가? 이렇게 궁금하실 거예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이라는 것이 나와 있고요. 팔복하면 사람이름 같은데, 그건 아니고요. 팔복하면 제가 별로 안 좋아해요. 하도 복이 8가지밖에 없다는 그런 뜻 같은데, 복은 여덟 가지가 아닙니다. 복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항상 1로 가야되지, 네 개, 다섯 개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복의 마지막에 뭐냐 하면 10절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고 고소를 당하거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방금 본문을 보게 되면 항상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로 차올라옵니다. 뭔가 가정사나 이웃 간의 다툼이 있거든 제사장에게 가거라. 이게 바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모호한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이에요. “제사장한테 가게 되면 해결 받습니까?”꼭 이렇게 되거든요. “제사장한테 가라.” “그럼 하나님 제사장한테 가게 되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이 됩니까?” 라고 할 때에 미래에서 내려오게 되면 제사장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소원풀이해주는 제사장 말고, 마지막 때는 제사장이 따로 있어요. 재판관이 따로 있습니다. 최종 판결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만 알아도 이미 너는 복된 자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복된 자냐 하면, 자기 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복된 자에요. 자기 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엄마가 애를 키우는데, 아이가 너무 이쁠 때는요, 자기 인생은 망가져도 좋다. 이 아이만 잘 된다면. 서슴없이 자식 사랑 앞에서 자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아가씨일 때는 그렇게 몸매 관리하다가는 애 하나 놓고는 몸매 관리 같은 것은 신경 안 써요. 애가 너무 예쁘니까. “내가 뚱뚱해도 좋다. 살쪄도 괜찮다. 그러나 너만 잘되면 내가 소원이 없겠다. 물론 이게 몇 개월 가지도 않지만. 그렇게 예뻤던 애가 예상 밖에 영 아니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몸매 관리나 신경 쓰죠. 인간인 이상은.

그렇더라도 너무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목숨에 연연하지 않아요. 자기 목숨에 연연하는 것은 너무, 너무 좋은 것이 없다는 논리밖에는 안 됩니다. 그거밖에 안 돼요. 뭔가 ‘까짓것 내 목숨하나 없어져도 괜찮아.’ 라고 할 정도로 그 괜찮은 분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리고 그 나타난 분이, 나타났다가 또 다른 분으로 바뀌면 안 되잖아요. 확정지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나타난 분이 세상 모든 변화를 좌지우지하고 모든 세상의 마지막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최종결정자이면 참 좋겠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주님이여!” 라고 부를 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아요.” 이게 합류되어 있다고 보면 돼요. “주여!” 라고 할 때는 “죽여도 괜찮아요.” 이런 뜻이 밑에 딱 보태져있습니다. 그런데 “주여!” 라고 기쁨으로 하면 되는데, “주여, 주여, 집 사 주세요!” 라고 하면 이거는 엉터리에요. 이거는 뭔가 엉뚱한 거예요. 이거 잘못된 겁니다. “주여!” 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주님만 계시만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나이다.” 그게 바로 미래의 최종적으로, 마지막 저 세상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세리라도 창기라도 괜찮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옆에 같이 달린 강도라도 괜찮아요. 불의한 청지기라도 괜찮습니다. 전혀 그런 것은, 천하의 죄인이라도 문제 삼지 않아요. 거지나사로가 되어서 온 몸이 종기로 뒤덮었어도 그거 괜찮아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주님이 버티고 있는 이상에는, 최종적인 것, 바로 그것이 마태복음 5장에서는 그걸 마지막 복음, 그게 바로 복이 있다. 나로 인하여 니가 어떤 수모를 당해도 오히려 니는 흥얼대도 괜찮다 이 말이죠. 좋아라 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앙 안에서의 자유고 성령 안에서의 희락입니다. 거칠 게 없는 하이킥, 인생은 거칠 것 없는 하이킥이에요. 승진 안 되고 그만이고, 퇴직 되도 그만이고, 짤려도 괜찮고, 누구하고 다퉜는데 얻어맞아서 코피 나도 괜찮고, 쪼르르 달려갈 게 없어요. 쪼르르 달려간다는 것은 아직도 과거에서 현재로 해가지고 모호한 미래, 확정되지 않은, 뭐가 뭔지 아직까지 남아있는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볼 때는 기어이 내가 재판에서 이겨가지고 소송금이라도 따내겠다. 반드시 전세금이라도 받아내야 되겠다고 하겠지만, 이미 최종적 시점에 와버리면, 그러한 내 욕심을 채우는 그것조차도 이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최종 제사장과 성도의 만남의 전형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무사히 십자가 다리를 건너와서 갈아탔다고 치고, 다시 본문을 보면, 오늘 본문은 왜 있느냐, 오늘 본문을 이렇게 보게 되면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 말씀을 먼저 설명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서로 치고 받다가 니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하니까, 너와 나 2밖에 안되니까 3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원활하게 처리가 안돼요. 그래서 제사장을 불렀어요. 불렀는데, 그럼 제사장이 해결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라는 그런 의문점이 들죠.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재판을 했는데, 판사가 제대로 해결을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불안감이 드는데, 이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천자히” 라고 합니다. 천자히, 교만하게, 건방지게, 제멋대로, 이런 뜻입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재판장을 찾았다는 말은 이제는 나한테 손해가 오고 내가 터무니없는 모함을 당한다 할지라도 재판관의, 제사장의 판결이 그게 이미 확정이 된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재판장에게 가라 이 말입니다.

자, 쉽게 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장이 있다는 말은 니한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서 니가 미리 짐작할 그런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다는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박혀 있는 제사장의 권한을 위해서 니가 해결 못할 일이 벌어졌으니까. 이러한 관점이 참을 수 없는 거예요. 정말. 우리 사적으로,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내가 사는 입장에서는요. 도대체 이런 논리가 이게 가슴에 안 들어와요. 판사 니가 뭔데?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판사 니가 뭔데? 해서 3심제에요. 상고하고 항소하다가 그것도 안 되면 헌법재판소에다 하는데, 그것도 안 되면 어떻게 할랍니까?

뭐 ‘김영란 법’ 해서 정해놓고 이게 옳은지를 헌법재판소에다 고소를 해요. 그것도 만약에 원하는 대로 어떻게 하려고? ‘김영란 남편 법’을 또 만들어야 되겠네요. 이게 자기 뜻이 관철될 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용납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중심성 문제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이 중심으로 버티고 있는 이유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데, 인간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직접 하나님과 해결하라고 그래요. “하나님이여 이런 억울한 일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하옵소서.” 본인은 억울하죠. 근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솎아내라는 겁니다.

어떻게 솎아내는가, 12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그리하며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천자히 행치 아니하리라” 이럴 것 같으면 한 번 꾹 참고 말아야 할 것 같아요. 괜히 고소하다가 목숨 달아날 수가 있습니다. 괜히 나대다가. 억울하다고 동네방네 발설하다가 재판까지 가게 되면, 억울한 정도가 아니에요. 돌에 쳐 죽임을 당해서 니는 저주 받아라 해서 지옥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바로 구체적인 것은 출애굽기 22장에 있는데 여러분들이 깊이 알 필요 없고요. 한 번 쭉 일어볼게요. 1절,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그러면 소를 도적질 당한 사람은 멱살 잡고, 왜?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밖에 안 갚아 줍니까? 나는 소 한 마리 잃고 정신적인 피해 보상은 적어도 소 한 마리에 소 열 마리는 갚아야 내가 약간은 만족하겠는데, 재판장 니가 뭔데, 니 소도 아니고 내 소인데, 나는 열 마리 갚을 것을 기대했는데 다섯 마리 판결합니까? 재판장이면 다야? 이런 인간은 소는 없고 지 목숨 달아나는 판결뿐입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절,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놈이 밤중에 들어왔을 때에는 누구야! 하고 망치를 휘두르다 맞아 죽었으면 살인죄가 아니지만, 훤한 대낮에 도둑이 온 것을 잡아놓고 죽으라고 막 패가지고 죽으면 그 때린 사람이 도둑한테 배상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피 흘린 죄에 대해서 그 가족에게 배상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재판장한테 “어이, 김판사 당신은 도둑맞아 본 적 없지? 도둑이 와서 간이 철렁 내려갔는데, 그 앞에서 대낮이면 어떻고, 들어와서 나는 패고 싶어서 팼다. 도둑놈이 잘못이지, 정당방위를 왜 벌하느냐? 벌금 못낸다.” 이래 나오면 그 사람을 잡아다가 쳐 죽여 버려라. 도둑 때리다가 지가 죽게 생겼어요.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보면서, 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뜻대로, 원대로 해줄 것이라는 이런 터무니없는 욕망을 가지고 교회 와서 성경을 보게 돼요. 그런 하나님 없습니다. 중심 잡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고, 그 제사장이라는 중심과 마지막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 중심과 서로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동네가 아니에요. 천국은 율법 지켜서 갈 수 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나를 떠나야 되는 동네에요. 내가 떠나려면 억지로 떠나서는 안 돼요. 아주 나 같은 인간은 죽어도 괜찮아요. 아주 너무 좋아서 서슴없이 자기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사람.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가는 시간을 아주 지긋지긋한 그런 뜻으로 얼른, 미래의 확장된 상태에서 현재로,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는 그런 식의 시간 층으로 건너온 사람만, 이미 확정된 사람만, 구원이 결정된 사람만, 느긋한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신명기를 보고 읽을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을 쳐 죽이라고 하는지, 그것은 내가 설계한 인생 노선에서는 구원의 요만한 어떤 접촉점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하고 상대하세요. 1대1로. 그래서 2가 되는 것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번 수련회 할 때 용서라는 말을 할 때 이랬습니다. 1대 1로는 용서가 안 되고 제 3의 요소가 들어와야 용서가 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가 저 사람을 7번 용서하고, 또 얼마나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할 때 주님께서 7번에, 7번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제 3의 요소를 끌어들입니다. 어떤 임금이 있는데 신하가 빚을 졌는데 빚을 탕감해줬다. 그런데 그 빚을 탕감 받은 신하는 얼마나 지 맘대로, 지욕심대로 했는지, 자기 하인이 요만큼 빚을 졌는데 그걸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그래서 임금은 아예 그 되바라진 신하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이처럼 용서라는 것은 어떤 누구도 남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나한테 죄 지었다? 나한테 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남이 나한테 해코지 했다? 남이 나한테 해코지 한 게 아니에요. 아무리 해코지해도, 아무리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죽어도 좋다는 분이 계신다면 그 쳐다봄 자체가 저 사람한테 용서로 가는 거고, “니가 감히 나한테 대들어? 주님이여 정의가 살아있죠? 제가 정의를 실시하겠습니다.” 하고 나대는 자는 “니가 바로 진짜 정의를 훼방하는 나의 방해물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일본의 횟집에 가면 “이랏세이마세!” 우리말로 하면 “어서 오세요!” 그렇게 영접해놓고 갈 때는 별로거든요.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이 되어가지고 일본 횟집 보면 너무 잘 느껴져요. “스미마셍” “소오데스까” 이런 얍삽한 것. 그처럼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재 구축되어 있는, 내 노동과 내가 인사 잘하고 내가 겸손하고, 이런 것들이 지금의 횟집을 유지했다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는 앞으로 뭐 잘하겠지, 모호하게 남겨 둘 때에, 그 인간들은 나는 나로 인하여 즐겁고 행복한데, 그게 만약에 위에서 누가 폭행을 가해서 피를 흘리게 되면 고소하게 될 거에요. 바로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과거에서 현재로 가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오직 자기만 챙기고 자기의 행복만 챙기면 그만이기 때문에 폭력사태라든지 본인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근데 이스라엘은 그 폭력사태의 의미는 당하는 본인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중심에 있는 제사장에게만 그 의미가 있어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고 그 제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제사장은 장차 모든 게 완료된, 한 분 밖에 없는 제사장, 그 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에 제사장 중심나라가 된 겁니다. 이게 바로 율법 해석입니다.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서 설명하는 것.

이거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수련회 강의에 보면, 마태복음 23장 23절에, 너희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는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된다고 할 때, 이것도 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내고, 의와 인과 신도 해야 된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된다는 이런 본문이 적혀 있어요. 근데 그 뜻은 그 뜻이 아니고 이런 뜻이에요. 의와 인과 신은 행하되 소득의 십일조를 외식으로 하는 것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헬라어로 그렇게 적혀 있는 거예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의와 인과 신이 되지 않으면, 건성, 건성 드리는 어떤 십일조도 십일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석해야 될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료된 상태에서, 예수님이 희생된 제사장이기 때문에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되어 되는 거예요.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행함은 거절되어야 하거든요. 거절되어야 할 십일조의 행함을 이것도 행하라고 하면 말이 되요? 안 되죠. 그러면 왜 십일조를 그렇게 좋아하느냐? 평소에 행하는 행동이 내가 이렇게 행해서 현재 내가 이만큼 됐으니까 앞으로 더 잘되면 미래는 더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그 시간 층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가지고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바리새인 길을, 지옥의 길을, 악마가 기다리는 길을, 악마와 합치되는 그 지옥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율법을 주신 것을 바로 예수님과 연관시켜서 주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껏 살아온 것이 내 덕이다. 정말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는 맞습니다 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세계, 천국 안에서의 성도의 고백인 것을 이제는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