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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93강-재판(신16;18-22) 1607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8. 4. 07:40
2016-07-24 15:01:17조회 : 127         
   재판 160724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재판(신명기 16: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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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7-24 15:45 
재판

2016년 7월 24일                            본문 말씀: 신명기 16:18-22

(16: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16:19)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16:20)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

(16:21)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곁에 아무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16:22)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특이한 나라입니다. 절대로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아니되는 나라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 앞에 섰을 때에, 누가봐도 하나의 개인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입니다. 곧 모세를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건드리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특이한 질서체는 이미 야곱이 밤에 천사가 사다리 타고 왕래할 때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천사가 하나가 아닙니다. 숱한 천사들이 야곱의 머리 위에 들락거립니다. 이는 곧 하늘과 통하는 그 문은 결코 사람의 손 때가 묻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이 이 땅에서 심심하게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아쉬워하지도 않습니다. 천사는 사람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고 활동합니다. 인간은 악마를 부릴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천사에 의해서 생겨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단체로 애굽 나를 빠져나옵니다.

하나의 국가 체제를 갖추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재판장과 유사(지도자)를 세워하고 하십니다. 당연히 이들이 하는 일은 재판입니다. 하지만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재판장이나 지도자라는 그 인간 자체보다 그들이 놓여 있는 법의 질서체가 더 우선됩니다.

즉 사람 눈에 보기에는 이스라엘은 그저 인간 대 인간들의 군집같아 보이지만 실은 이스라엘은 나름대로의 촘촘한 법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인간들보다 그 인간들 사이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법망은 어느 인간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법망 안의 존재’가 곧 인간입니다.

그래서 재판관이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나타내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법 안에서 구원이 성사된다는 이 현실성을 제시하는 겁니다. 즉 사적인 재산 문제나 억울함이나 기타 여러 가지 벌어지는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도로 개인적인 이익이나 생존 문제로 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쪽에서 야곱에게 약속을 내리신 그 말씀은,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통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천사들에 의해서 성취가 됩니다. 인간이 손 댈 것이 없습니니다. 쉽게 말해서 이 구원의 통로는 원활하게 하늘과 땅이 통해야 합니다. 수도관이나 하수도관이 막히면 안 되듯이 이 통로로 막히면 아니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에게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이 구원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행세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지도자나 재판장이나 말씀을 가르친다는 계급에 의해서 통로가 막힐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나 교회를 인간들은 ‘권력 단체’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조직체 안에서 등록하므로서 구원을 확보하려는 심사를 사람들은 감추지 못합니다. 따라서 조직체가 유지되면 덩달아 자신의 구원도 보장이 되고, 교회라는 권력체나 이스라엘이라는 권력체가 해체되면 자신의 구원을 보장될 수 없다는 불안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성당이나 교회는 사람들을 안심시킬 요량으로 각가지 안전책을 마련해서 상품화 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런 장난질을 통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더욱더 인간들의 법망으로 조아놓으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 소위 윗사람이 부리는대로 아랫사람이 부림을 당하는 것으로 보다 권력이 탄탄해지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이런 조직체에서 재판이나 지도 지침이라는 것을 결국 오직 한 목표로 쏠리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있어야 구원도 있다’는 방침입니다. 바로 이런 취지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틀어막는 현상입니다. 로마서 2:14-15에서는 하나님의 법망은 인간의 양심까지 확대가 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즉 사람들 각자 본인들 마음자체가 법망에서 못 빠져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양심이라는 것과 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작용하는 율법이라는 것이 날이갈수록 점점 많아지고 추가된다는 겁니다. 어릴 때나 혹은 하나님 말씀을 대충 봤을 때에는 스스로 충분히 용납된다고 여긴 행위들이 더욱 말씀을 대하게 되면 하나님의 법망은 점점 불가능으로 실감됩니다.

하나를 지켰다고 자부해도 그 지킨 것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계속 일어나고 벌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법의 확대는 성도의 본성까지 침투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의 성도됨을 본인이 결사적으로 지킨다고 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즉 구원이란 이래나 저래나 성도가 손 댈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성도는 새로운 위상과 위치를 부여받을 뿐입니다. 그 예가 열왕기하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 이야기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왕하 5:18)

즉 자신이 자기 고국 땅에서 림몬이라는 우상에게 절하더라도 본인은 여호와에게 절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다움의 특이성입니다. 곧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특이성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럴 경우에만 하나님의 일방적 구원의 통로를 가로막지 않는 바가 됩니다.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의 구원에 일절 첨가되지 못함을 자인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바로 이 어두운 시대의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선지자들입니다.(베드로전서 2:9) 자기 자리가 곧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알리는 특이한 자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비겁한 변명처럼 들리더라도 자기를 위한 자리가 아님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7-25 06:10 
93강-신 16장 18-22절(재판)1607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6장 18-22절입니다. 구약성경 288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곁에 아무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이스라엘 나라는 특수한 나라입니다. 특수한 나라이기 때문에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딱 하나만 조심하면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파이프, 그 통로를 방해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파이프에 뭐가 막히게 되면 물도 흐리지 않고 수도관도 막히면 안 되잖아요. 뚫려있어야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건져내는데 거기에 인간의 손이 타면 안돼요.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로 깔끔하게 구원이 되어야지, 그래야 천국에 가는 겁니다. 거기에 인간의 손때가 묻어버리면 그거는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통로가 되어서 천국에서 거절당합니다.

그러면 그 통로는 어떻게 생겼는가, 야곱의 꿈속에서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들이 굉장히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습니다.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은 천사들이 논다는 뜻이 아니에요. 천사들이 놀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차 고장 났으면 하이카한테 맡겨야지, 지가 손댄다고 하니까 직원들이, 저만치 가 있으라고 하잖아요. 다 알아서 해준다고. 천국도 모르면서, 모르면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모르면서 왜 자기가 자기한테 손을 댑니까? 맡겨야죠. 맡길 때, 주께서 그냥 모든 것을 우리를 통해서 다 해내십니다. 이 맡기는 것을 제가 지난 목요일인지 실제로 경험을 했었어요.

아내는 어머니 돌보러 가고, 아내는 바쁩니다. 이쪽저쪽 다 돌본다고. 그래서 제가 김밥을 해봤어요. 뭐 김밥 김 말아서 하면 되지, 라고 쉽게 생각을 했는데, 김밥을 말아보니까 이쪽 모서리 김과 저쪽 김이 붙지를 않아가지고, 나중에 만들어놓으니까 내 배 째라는 식으로 안에 있는 김밥속이 다 들어났어요. 이게 붙지를 않아서 동그랗게 말려 있는 것이 아니라 펑퍼짐하게 늘어져 있어요.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어요. 김발로 하는 것을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김발 찾다가 없어서 맨손으로 했는데, 처음해보니까 붙여지지를 않는 겁니다. 그냥 쥐고 손으로 붙여가면서 먹었죠. 아내한테는 보여야하니까 김을 한 장 더해서 붙여놓고 검사 받았습니다 만은, 이거는 반칙이잖아요. 김을 두 장이나 붙여놨으니까 이건 떨어질 리가 없죠.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문제, 천국 가는 문제, 이거 어설프거든요. 그러면 어설프면 우리는 손을 안 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왔을 때 홍해바다는 불가능한 겁니다. 지팡이를 가졌으니까 지팡이에 의해서 물이 갈라졌습니다. 주일학교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만은, 모세가 지팡이를 든 게 아니에요. 지팡이가 모세한테 일을 시키는 겁니다. 지팡이가 있다는 말은 니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이 말이죠. 바로 왕한테 니 혼자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지팡이가 있다는 것은 니는 그냥 폼이고 실제로 일을 꾸미고 말을 하게 하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은 너 아니고 하나님이 너를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게 야곱에게 천사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을 때 그 천사의 숫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많았는지 하나님의 군대라 했어요. 그 군대가 야곱을 통해서 열 두 아들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열 두 아들의 집합체를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운명은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거는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구현하는 입장에서 그게 현실화 되면서 등장한 게 바로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맞닥뜨리고 이스라엘 나라가 부딪치는 모든 상황은 이거는 인간이 예상한대로가 아닙니다.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거예요. 쫙 펼쳐놨다고 하니까 또 김밥 생각나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는 겁니다.

펼쳐지니까 이스라엘과 맞닥뜨리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이스라엘과 상대한다고 하지만 이스라엘과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상대하니까 그들 적들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적은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나님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이 그 통로를 틀어막아 버려요. 깔끔하게 시원하게 통로가 뚫려야 되는데, 이제는 나라가 되다보니까, 한 번 잘 해 볼까? 하고 통로를 인간들이 행함을 동원을 시킵니다.

그러지 말라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이 누구냐, 오늘 본문 18절에 “재판장들과 유사 곧 지도자들을 세울 것이요“ 이게 바로 신명기 오기까지의 전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일을 여기다가 밑에 깔고 이해를 해줘야 해요. 만약에 이걸 깔고 이해를 안 하면 이렇게 됩니다. 교회 세웠다, 교회는 하나님께 기쁘게 바치는 성도가 돼야 한다,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 지도자 말 잘 들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이 짝 나는 겁니다. 요거 가짜입니다. 이거 가짜이스라엘이고 가짜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러온 사람만 필요하지, 교회를 만들어야 될, 교회를 유지해야 될 사람들은 교회 내에 아무도 없어야 돼요. 아무도 없어야 됩니다. 지도자요? 이번 수련회 마태복음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누가 지도자인데? 지도자는 그리스도만 지도자입니다. 아비? 누가 아비인데? 하나님만 아비인데. 너희는 이 땅에 지도자나 아비를 세우지 말라. 이거는 바로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구약 때는 재판장과 지도자가 있잖아요? 하면 그거는 왜 그들이 이스라엘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율법적인 차원으로 한 번 세워보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막지 말라고 세워놨는데, 막지 말라고 세워놓은 그 재판장과 지도자들이 깔끔해야 할 하나님의 통로를 도로 틀어막아버립니다. “나에게 잘 보여야 너는 구원받아.” 그런 지도자.

십자가 지신 주님만 섬겨야 될 자들이, 목사 섬기고, 장로 섬기고, 집사 섬기고, 이게 당연시되는 것처럼, 그게 교회인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이 가짜인지를 실컷 구경하시기바랍니다. 어차피 지옥이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지옥에 구경 올 일은 없어요. 인생 살면서 원 없이 한 번 지옥을 체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인간에게 벌벌 떠는 인간들을 마음껏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아 놓고 구원 안 받은 것처럼 벌벌 떨지 마세요. 구원은 성령이 주시는 것이지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제가 한 두 번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교회에서 안 들어먹은 이유가 나중에 보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그래요.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 온 것이 아니고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세상에서 사랑 못 받은 거 교회에서 사랑받기 위해서. 그런 노림수가 있다 보니까 가짜에게 구더기가 끓는 거예요. 인간의 삶의 투쟁은 딱 하나밖에 없다고 헤겔이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정투쟁.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 외에는 다른 투쟁은 없다는 거예요. 날 알아달라는 거예요. 예. 그게 인간 맞습니다. 인간이 타고난 것은 맞는데, 그것이 하늘나라의 파이프에 흐르는 구원의 방식을 틀어막는 것이 되고 이게 가리는 것이 된다는 것쯤은 미리 알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이 재판관이나 유사들은 특별히 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 막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행함으로 바꾸지 않도록 그들은 특히 조심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일반적인 나라들에도 이런 재판관이나 지도자들이 있죠. 우리나라 조선시대만 해도 지방고을사또들은 본인이 경찰이고 경찰서장이고 다 합니다. “니는 우리 권세 있는 집안에 해를 끼쳤으니 너는 평생토록 관비가 되어서, 관기가 되어서 어른들을 섬겨라. 옥녀야!” 하면 그렇게 해야 돼요. 옥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고 주상까지 등장해서 옥녀를 사랑하지만. 옥중화라는 드라마이야기에요.

옛날에는 모든 권력체가 누굴 위함이냐 하는 것은 첫째 나를 위함이다, 그것도 아니에요. 두 번째 권력자를 위함이다, 그것도 아니에요. 이 세상은 아무리 나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그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고 학대하고 핍박하는 그런 관계, 그런 권력적인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그 관계를 하나님께서 촘촘히 어떤 것으로 바꿔치기하는데, 레이저빔으로 바꿔치기 해요.

레이저빔이라 하는 것은 007영화에 보면, 007영화나 유명한 도둑놈영화를 보면 마지막 보물을 찾기 위해서 그 비밀금고에 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저광선이 쭉 있어가지고 그걸 건너뛰고, 아주 요가를 하듯이 건너 뛰어가지고 그걸 끄집어내야 되잖아요. 미션임파서블 그런 영화에 나오거든요. 이 세상을 그냥 보면 사람과 사람관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촘촘히 율법과 율법의 촘촘한 그물망으로 다 바꿔놨어요. 조금만 행동해도 법으로 따지게 되는, 따짐이 되는 그런 행동들, 법 구조 안에서만 인간들은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뭐 안 들키면 완전범죄지. 완전범죄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촘촘히 다 레이저빔이에요. 율법이라는 레이저빔에 다 걸려들게 되어 있어요. 그건 뭐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저라도 뭐 이렇게 길에 보면 촘촘히 다 걸려들어요. 차 옆에 창문 열었다, 아 담배피울 모양이다, 담배꽁초 버린다, 5초전, 4초전...딱 버려요. 어제도 어떤 식당에 갔다, 누구 떠든다, 식당에서 떠들게 되면 남의 대화에 망해 되잖아요. 식당에 가서 단체로 떠들어서는 안 된다. 기차타면 분명히 휴대폰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세 명씩 보이고. 제가 봐도 다 보여요. 어딜 가도.

산책하러 간다, 개 목줄 안 하고 나온 사람이 있다, 목줄하고 다니세요. 그러니까 아이고 저런 분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담배피우고 그냥 꽁초 버리고, 모든 게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이 각자 하는 일이 있으면 거기에 관심이 없지만 나이 60넘어서 잔소리만 는다고 하잖아요. 할 일이 없으면 모든 게 전부 다 레이저망, 법적인 레이저망, 누구처럼 살아라, 나처럼 살아야 정답이라는 것을 기준으론 삼아서 레이저빔을 쏘아댑니다. 그러면 제가 표준입니까? 아니죠.

표준은 예수님이십니다. 백날 이렇게 법적으로 추궁을 해봐야 이거는 마귀가 하는 짓이고, 진짜 모델은 예수님처럼 되지 아니하면 아들의 나라, 천국에 못 갑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촘촘히 율법 망으로 그물을 치는 거예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점점 더 증가하면 할수록 율법은 점점 더 추가되어 진다는 거예요. 열 개를 지켰다면 11번째가 새로 추가 됩니다. 11개를 지켰다면 12번째 율법이 새로 주어져요. 결국은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요. “어디서 내 앞에서 의롭다고 행세해?” 이게 주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있는 사도바울의 명령은 구약의 명령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완벽함과 철저함으로 더 밀어붙입니다. 뭐 구제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돈을 사랑한 것 자체가 죄에요. 돈을 사랑한 자체가.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그게 우리한테는 빠져나올 구멍이 없어요. 율법에는. 로마서 7장이나, 특히 로마서 2장 같은 데는 더 심하게 우리를 궁지로 몰아세웁니다. 뭐냐 하면 양심에 비추어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이 있거든 하나님의 진노가 너를 기다린다고 니가 간주하면 된다고 이렇게 나와요.

로마서 2장 14절, “율법 없는 이방인의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는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그 사람은 율법 없어도 정죄 당한다. 양심이 율법기능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 바깥에 있는 국가법도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마음의 법까지 나를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재판관이나 유사들이, 그들이 남한테 재판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도 자기가 재판을 내리는 그 법에 의해서 본인도 당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이 말은 뭐냐 하면 누구만 죄 없다? 예수님 본인만 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본인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칠 수는 있는데, 칠 수 있다는 그 자격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유일하게 용서할 수 있는 자격자가 돼요.

어설프게 남을 지적하는 사람은 뭐가 안 되느냐,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자격자에서 박탈당합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그 사람의 죄를 아는 사람만이 완전하게 그 사람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죄를 자기 것으로 가져와야 돼요. 나 죄 있고 니 죄 없다는 것을 만드는 작업을 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작업마저 율법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웃을 사랑하는 거예요. 희생 없는 사랑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 안에.

율법 안에는 하나의 밀알이 죽어야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아무나 하지를 못해요. 아무나 해버리면, 죄인이 죄인을 위해서 죽어버리면 이거는 자체가 결과가 안 나와요. 죄 없는 자가 투입되어서 죄 있는 자를 대신해야 그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처럼 죄가 없이 되는 그 원리가 거기다 적용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작업을 위해서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 택한 백성은 율법의 촘촘함을 수용해야 됩니다. 율법의 촘촘함이라고 하니까 잘 실감이 안 나죠. 뭐 촘촘해도 최선을 다해서 지키면 되지,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지를 신명기 21장 율법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신명기 21장 18절에 보면,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 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19절,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절,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21절,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아, 이거 무섭지요. 예쁜 손녀딸을 이럴 수 없습니다. 이쁜 아들을 이렇게 할 수 없어요. 보통 엄마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아들을 살려주고 나를 대신 죽여 다오!” 뭐 이래 나옵니다. 내 자식은 하나님도 못 건드린다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거예요. 내 자식은 하나님도 못 건드려요. 내 자식 잘되게 해주는 조건이 나와 있으면 내가 교회 나와 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특히 어미들. 이 율법이 지금 레이저빔으로 쪼여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 조항 몇 개 안돼요.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유발시켜줍니다. 하나님의 법에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재판관과 유사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야 돼요.

또 이런 것이 있어요. 민수기에 보면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는 죽여 버려라. 돌에 쳐 죽이라고 할 때,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진짜 미운 사람 같으면 안식일을 빌미로 이 참에 죽이자 하고 죽일 수 있는데, 근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가족이나 일가친척이 안식일을 어겼다면 진짜 뇌물을 써서라도 돌 맞는 현장에서 빼내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16장 19절에 보면 뇌물 같은 것은 바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뇌물을 줄줄 알고, 그럴 줄 알고 또 뇌물까지 바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우리가 성경을 너무 건성으로 보니까, 대충 보니까 이런 것이 안 드러나는 겁니다.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방법은 발렌시아에서 온 방법이 하나 있어요. 발렌시아, 스페인 동쪽에. 뭐냐 하면 장작을 패는데 그냥 패는 것이 아니고 타이어에 놓고 패면 나무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거기에 다 보듬어지는 거예요. 발렌시아에서 온 편지에 보면 그런 것이 나와요. 아침에 직장 가는 사람들은 그런 것 못 봅니다. 장작을 팰 때 그냥 패면 다 튀어나가서 제대로 못하잖아요. 타이어 안에 모으면 돼요. 어떤 분이 그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인간극장에 보면 그걸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주님께서 팰 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라는 타이어안에서 그냥 줘 패는 거예요. 패면 장작이 어디로 가느냐, 기껏 날아봐야 주님의 사랑과 긍휼에, 주님의 십자가 용서에 접촉되겠죠. 평소에는 인간들이 지 잘난 재미로 살아요. 인정받기 위해서 나 잘났다. 건드리지 마라. 우리 집안 최고다. 그런데 주님께서 도끼로 막 패버리면 어디에 도달되느냐 하면 쪼개져서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는 타이어 그쪽에 짧은 거리지만 거기에 맞는다 이 말이죠. 타이어에 있는 예수님의 피를 맞고 다시 한데로 모인다 말입니다.

그러면 재판장과 유사들은 뭐냐 하면 인간의 완전성을 기대하고 그들을 재판한 것이 아니고 한 번 이런 죄를 짓게 된 것은 너를 사랑해서 죄를 짓게 했다는 겁니다. 아, 이거 참 주의해야 될 대목에 왔습니다. 너로 하여금 그런 죄를 짓게 한 것은 이미 너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용서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저쪽 십자가에 갔다가 마주쳐서 다시 모아지는, 십자가 중심으로 우리는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 땅에서 여러 가지 일을 부딪치게 하시는 겁니다.

전화하면서 큰소리 나는 일을 벌이게 하시고, 짜증나게 하는 일을 벌이게 하시고, 세상에 뭐 만나는 것마다 참 짜증나죠.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멀리 보면 정겹지만 가까이 보면 전부 다 지옥이에요. 집안끼리 뭐 짜증 안 날 일이 있겠어요. 오히려 조용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이래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지도자가 그 정도 되려면, 지도자나 재판관들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자기 의견을 개진해서는 안돼요. 이거 어렵죠. 뭐냐 하면 내가 남한테 상담을 해준다든지 할 때는 그 사람이 나를 의지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아이고, 목사님 이런 설교가 어디서 나옵니까? 뭐 어떻고 하면서, 자꾸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의지해서, 그 다음이 문제에요. 의지하게 되면 그 사람의 평가나 기준에 휘둘리게 돼요.

 

그러면 뭘 틀어막느냐 하면 목사가 주의 십자가로 다 이룬 것을 목사가 가로막는 것이 돼요. 이걸 사자성어로 한국교회입니다. 한국교회. 그러면 뭐냐 재판장과 지도자를 그만큼 빵구를 내요. 나는 있어도 오늘까지 있고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본인 스스로가 없다고 생각해야 돼요. 내가 없으면 뭐가 있는가 말씀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재판장이나 지도자 자체가 내게 필요해서 말씀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말씀 때문에, 십자가 말씀, 용서의 말씀, 말씀 때문에 잠시 잠간 내가 이 자리에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이거는 목사, 장로뿐만 아니고 모든 성령 받은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직장에 가서 누굴 만나고 누구와 이야기해도 저 사람을 내 종으로 내 팬으로 만들 것이 아니고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앉게 하고 저 사람과 대화를 하게 한다 이 말이죠. 저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저 사람을 돕기 위해서 주께서 잠시잠간 이렇게 하신 거예요. 안 그러면 촌에서 파마 값을 54만원 받아 챙깁니다. ‘저거 내 밥이야. 저거 내 먹잇감이야.’ 이러면 안돼요.

그것은 뭐냐, 주의 사랑을 가로막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이렇게 보면 베드로전서 말씀이 맞아요. 오늘날 성령 받은 너희가 이 세상의 지도자요, 재판장이요, 선지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이에요. 우리는 교회 간판 없고 직책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집사라고 하지만, 뭐 아줌마, 아저씨라고 부를 수 없어서 하는데, 아무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이 어두운 시대에 예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종입니다.

뭐냐 하면 니는 니 힘 모으기 위해서 살지, 나는 힘을 빼기 위해서 산다. 주께서 너를 만나게 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으로 주께서 몰아넣으신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 점에 늘 실패한다는 것을 일단 우리는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만약 성공하게 된다면 그래, 내가 그만큼 믿음이 좋다고 또 자기한테 돌아와요. 성령께서 늘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위치, 자리가 중요하거든요. 쉽게 말해서 너는 개인이 아니고 어떤 나라야. 하나님의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세운 나라의 일원으로 속해져있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문둥병자가 되었다가 병이 나은 사람이거든요. 왜 갑자가 나아만 장군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나아만이 누굴 만나느냐 하면 엘리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만나 병 고치러 갔다가 엘리사를 만나지도 못했는데 병이 나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제가 해드리고 싶은 거예요. 저 사람 만나면 효과 있겠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엘리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아만 장군에게 일어난 자기변화입니다.

자기변화가 18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이 정말 제가 오늘 설교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아만 장군 본인이 여호와의 종이면서도 세상에 나가서, 림몬이라는 것은 우상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동화사나 통일교에서나 어떤 곳에서 일한다하더라도, 내가 비록 부처한테 절하고 무슨 일을 한다 할지라도, 이거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하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누가? 나아만 장군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이 말을 중요시 여기느냐 하면은 우리가 아무리 성경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 종이 되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비겁한 변명과 핑계 외에는, 평생토록 이거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어요. 왜냐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은커녕, 우리는 몸 다치기 싫어하거든요. 우리는 이 땅의 사람으로서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체면 깎이는 짓은 못한단 말이죠.

그러나 한 가지 나아만 장군의 특이점이 있어요. 이상한 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어떤 짓을 하고 내가 부처한테 절을 하고 어떤 짓을 하더라도 이거는 절대로 부처한테 한 것이 아니고 나를 이렇게 새로운 사람 만들어준, 새 사람 되게 한 예수님에게 한 것을 주께서는 알고 계시죠? 라고 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제 말은 뭐냐, 믿음은 티낸다고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구멍을 뚫어서 그 자리를 비운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 증거 하라고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이제는 남한테 나 믿음이 좋다고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 없어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간에, 주께서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종을 사용하였나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의 제사장이고 선지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님 살아계시고, 일하시고, 믿음 없는 자에게 이렇게 믿음까지 주셨사오니, 이것은 우리의 비겁한 변명과 핑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특이성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작업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