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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92강-수장절(신16;13-17) 1607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19. 07:39
2016-07-17 15:00:39조회 : 49         
   수장절 160717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수장절(신명기 16:13-17)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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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7-17 15:52 
수장절

2016년 7월 17일                           본문 말씀: 신명기 16:13-17

(16: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6: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16)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16: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수장절을 달리 말해서 초막절이라고 합니다. 텐트치고 살면서 전에 광야 시절을 추억하는 겁니다. 수장절이란 1년 농사한 결실물이 다 하나님의 도와주심으로서만 얻어진 것임을 자인하고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장절(초막절)은 그 전에 있는 두 개의 절기 없이는 성사될 수 없습니다.

즉 유월절을 수장절을 내다보고, 수장절은 유월절을 근거로 하고 맥추절은 그 중간과정을 보여줍니다. 수장절로서 1년 중 더는 절기가 없이 마감됩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가장들은 반드시 1년에 이 세 차례 치뤄지는 절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이 백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은 자체적으로 순환합니다. 이러한 순환은 자체적으로 ‘시간의 단위’를 만들어냅니다. 시간의 단위란 본디 시간이 표현할려고 하는 바를 자체적으로 완결시키게 됩니다. 즉 시작과 끝을 자체적으로 다 보여주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의 해의 유월절과는 연속성을 갖지 않습니다.

그 다음의 해는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시작과 끝’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가치를 위함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특이함과 가치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자신의 몸을 근거로 단위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 그 시간 단위는 줄곧 하나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나이’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보여줄 성격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시간 단위’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다입니다. 시편 90:7-12에 보면,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날 계수함’을 아는 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인간들은 ‘마지막’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마지막’을 기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을 집어넣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있어 시간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슬픔과 수고 뿐’입니다. 아무리 길게 오래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인생길이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배우는 기간입니다. 인간의 인생이 수고와 슬픔 뿐이라면 하나님의 시간은 얼마나 긴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우냐가 관권입니다.

또한 시편 35: 9에 보면,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손을 도로 오무리게 되면 우리네 일생이란 일종의 거품처럼 이미 날아가 버리고 그 현장에 아무 것도 없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세계로 넘어서려면 ‘인간의 시간’을 넘어서야 합니다. 양으로 따지던 인생을 질(質)로 따질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마지막’을 접해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 세계란 ‘시작’과 ‘마지막’ 사이에 갇혀 있는 꼴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시작에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시작은 마지막을 위해서 있고 마지막은 시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시간 단위 말고 하나님의 시간 단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 단위는 ‘시작’과 ‘끝’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자체적으로 시간이 마감이 됩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은 새로운 ‘질(質)’입니다.

즉 슬픔과 수고를 복과 영광으로 바꾸어지는 사례와 경우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원래 ‘시작’이란 복과 영광으로 출발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좋게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동행하시는 작업을 통해서 ‘마지막’을 발생시키시고 새로운 시작 라인line을 형성시키십니다.

바로 초막절 안에 여기에 대한 좋은 예가 나옵니다. 초막절을 7월 15일부터 7월 21일까지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이 지향하고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 절기에 나타나는 제물의 추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29:13-14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칠월 십오일에는 너희가 너희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 일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너희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열셋과 수양 둘과 일 년 된 수양 열넷을 다 흠 없는 것으로 드릴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연이어 나오는 그 다음날, 그 다음날의 제물과 비교해보면, 동물로 드리는 제물에 있어 숫자의 변동이 있는 동물 제물과 숫자에 변동이 없는 동물 제물이 나옵니다. 숫자에 변동이 있는 제물은 수송아지 제물 뿐입니다. 하루가 지날수록 숫자가 13에서 12 식으로 줄어듭니다.

하지만 반면에 수양과 1년된 수양이나 염소의 제물의 숫자는 일주일 내내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곧 ‘차이나지 않는 제물’과 ‘차이나는 제물’과 비교해서 어디에서 멈추는 가를 봐야 합니다. 민수기 29:32에 보면,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일곱째 날에 수송아지 일곱에 멈춥니다. 7과 7를 일치시키면서 멈춥니다. 이는 바로 창조의 첫 장면에 합치됩니다. 7일로 완성된 창조는 마지막에도 7과 맞춰지면서 완성으로 마감됩니다. 이는 곧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시간 박스box’ 형식으로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성도의 하루하루 삶이란 늘 새로 시작하고 새로 마감되는데 이는 함께 계신 하나님의 속성을 표출하기 위함입니다. 절기란 이처럼 늘 시작과 끝을 같이 보여주는 행사입니다. 하나님과의 동생이란 이런 성질을 보여주게 됩니다. 오래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길게 살아도 돌아보면 이미 다 소모된 인생일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껍데기만 남은 인생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7-17 23:20 
92강-신 16장 13-17절(수장절)1607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6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288페이지입니다.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수장절이라는 것은 뭐냐, 저축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창고에 모은다. 추수한 것을 끌어다가 저장하는 절기. 일 년을 단위로 해서 마지막 절기는 수장절입니다. 그 위에는 다른 절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수장절을 통해서 어떤 면을 나타낼 수 있느냐 하면 마지막 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는 알곡은 거두어서 곡간에 드리고 쭉정이는 모아서 불에 태우는 그 마지막 때에,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것과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나타나서 한 이야기가 바로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성경을 설교를 하는데 참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마지막 때를 설교하는 것이 참 어려워요. 왜냐하면 신약시대가 마지막 때라고 해놓고 째깍째깍하고 시간은 가고 있잖아요. 마지막 때라고 하면 시간이 스톱이 되어야 하지, 마지막 때라고 해놓고 째깍째깍하고 가니까, 이게 무슨 마지막 때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마지막 때다,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해놓고 구체적으로 며칠 후에 오느냐를 원하지, 그냥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come soon이라고 하면, 얼마나 가까이 왔는데? 며칠 남았는데? 정확하게 며칠 남았는지 이야기해야지 가까이 왔다고 이러면 듣는 사람이 상당히 모호하고 이거 뭐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나오는데, 기름을 준비한 처녀 다섯 명과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 다섯 명이 있더라. 그런데 신랑이 온다는 이야기는 있고 밤늦도록 오지를 않았다. 그러면 누구 잘못이에요?

신랑이 간다면 한 시간 뒤에 가겠다고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야지, 그냥 간다는 이야기만 있고 마냥 기다리게 되니까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죠. 그래서 기름을 준비하나 안 하나 다들 잠자고 있는데 갑자기 도적같이 들이닥쳐서 신랑 왔다고 하니까, 그때 기름을 준비한 처자들만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기름 준비하지 않은 처자들은 탈락하잖아요. 그러니까 주유소 가까이 살아야 돼요. 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sk주유소 옆에 있다고요. 급하면 기름 준비해야 되니까.

이것은 시간에 관해서, 예수님이 생각하는 시간관념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관념이 서로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현재 자기의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이 있더라도 그 안에서 뭘 찾아야 하느냐 하면 마지막 때를, 흔적들을 발굴하고 찾아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인데, 오늘 본문 같으면 수장절이 그 마지막 때를 묘사하고 있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에서 절기를 지킬 때는, ‘아, 마지막 때구나!’ 그럼 우리가 사는 것은 뭐냐 그냥 거품입니다. 그냥 거품으로 사는 거예요. 거품은요, 훅 불면 바람에 휙 날아가 버리죠. 아무것도 없죠. 인생이라 하는 것은 기껏 살았다고 하지만, 아무리 고생, 고생했다고 하지만, 주께서 한숨에 훅 불어버리면 다 없어지고 그냥 바닥만 남습니다.

그 바닥에 뭐냐 하면 시간의 단위가 있어요. 시간의 단위. 절기는 시간의 단위를 언급하는 겁니다. 시간의 단위라고 하니까 이것도 참 생소한 이야기예요. 우리가 아는 것은 1초, 2초, 3초...1분 2분... 1시간...이게 시간의 단위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시간의 단위라고 하지 않습니다. 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곽으로, 규격으로써 이야기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마감이 되었는지, 시작과 마감이 한 규격화될 때 그걸 시간의 단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때가 되고, 그 다음에 출발하는 것은 마지막+1이 아니라, 첫 출발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새롭다는 것은 마지막 때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출발지점이고,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출발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의미가 마감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 자체적으로 완료가 되어버려요. 시작과 끝에서 시간이 완료가 되어 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1 2 3 4 5 6 7로 마감이 돼요. 그 다음에 1 2 3 4 5 6 7 또 이렇게 돼요. 곽을 짜서, 한 컨테이너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예요.

이쪽 컨테이너에서 저쪽 컨테이너로 이동이 안돼요. 그냥 이동이 안돼요. 안 되고, 그냥 이 곽으로 마감되고, 또 새로 시작하고 마감되고, 또 시작하고 마감되고....,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쌓아보면 층층이 되겠죠. 이걸 층층이 쌓게 되면 땅에서 하늘로 이게 연결이 되는 겁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이걸 히브리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죽 연속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 시간은 헬라적사고방식이라고 해요.

인간들의 철학적 사고방식에서는 인간들의 몸 중심으로, 느끼는 중심으로 하다보니까, 육천년, 칠천년, 이 만년, 칠십 오 억년, 이렇게 하지만, 히브리사고방식에서는 달랑 7일밖에 없어요. 7일. 1 2 3 4 5 6 7, 다시 1 2 3 4 5 6 7...7일 안식일에 쉬고 1 2 3 4 5 6 7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시간단위에 맞춰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행동을 하시는 거예요
. 그래서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그것이, 예수님의 행동이 왜 마지막 때냐, 지금 그걸 설명해드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고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 “그렇게 시간적으로 착착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 왜 마지막이냐?” 그렇게 따져 물으면 “당신은 시간에 대한 사고방식 자체가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시간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죠.            

시편 71편 20절에 보면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 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다는 겁니다. 고난을 받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게 되어도 동행하게 되면 그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 돼요. 그게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라고 하는데, 똑같은 시간을 가지고 같이 가버리면, 같은 속도로, 시속 80킬로로 같이 가버리면 창문열고 같이 이야기가 돼요. 둘 다 스톱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떠날 시간도 안 됐는데 갑자기 버스가 떠난 느낌이 드는 것은 옆에 있는 대기된 버스가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같이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이 동행할 때 우리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따로 있어요. 하나님의 시간대는 1 2 3 4 5 6 7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을 하니까 우리의 시간이 있더라도 그 시간에 맞춰서 같이 움직여줘야 되는 겁니다.

같이 움직여 줄 때,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이 고집을 부리면서 같이 자기백성, 인간들의 시간밖에 모르는 이스라엘과 함께 움직일 때 이스라엘은 뭘 느끼느냐 하면 마지막을 느끼는 거예요. “아이고, 우리 시간 계산은 헛방이구나! 이거는 거품이구나! 우리 시간 계산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아무리 인생을 칠십을 살고 팔십을 살아도, 우리가 산다는 것은 몇 년 살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고와 슬픔뿐이구나!” 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자,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았다고 우리가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하나님은 질을 봐요. 70, 80, 몇 년이라는 시간의 양을 보는 것이 아니고,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그 안에 있는 시간을 채웠던 그 내용이 뭐냐를 보는 거예요. 그것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 수고와 슬픔뿐일 때, 수고와 슬픔에 마지막이 들이닥칠 때, 수고와 슬픔뿐인 그 자리에서 행복과 기쁨의 날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수고와 슬픔뿐인 시절이 행복과 기쁨 앞에서는 그냥 손바닥처럼 접으면 없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 손바닥이라는 것은 손바닥을 한 번 접어보라는 거예요. 분명히 펼 칠 때는 좀 길어 보이죠. 손금 보는 사람들은 생명선이 어떻고 하잖아요. 이걸 한 번 접어버리자 이 말이죠. 접어버리면, 반죽한 밀가루를 동그랗게 만들어 손바닥에 놓고 접어버리면 안에 내용물이 중요하잖아요. 수고와 슬픔을 동그랗게 접어버리면 이거는 결국 뭐가 되느냐 하면 살아도 없는 것이 돼버리고 동행하시는 분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러면 동행하시는 시간은? 하나님과 우리와 몇 년 삽니까? 그렇게 묻는 것은요, 우리가 평소에 내 시간 사는 버릇 때문에 묻는데, “하늘나라에서 몇 년 삽니까?” 묻는 것이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어떻습니까?” 물어야 돼요. 그거는 수고와 슬픔이 아니고 행복과 축복과 복과 용서와 사랑만 넘칠 뿐입니다. 시간을 묻지를 마세요. 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하나님의 시간을 우리가 흡수통합받기 때문에, 수고와 슬픔뿐이라도 주와 동행해서 마지막 때가 되면, 이쪽에서 이쪽으로 건너가 버리면 그때는 그저 축복과 사랑뿐입니다. 영광뿐입니다. 그런 인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이 히브리적 사고방식으로 보는 겁니다. 양이 아니고 질로 본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서른세 살 때 돌아가셨거든요. 박목월 시인도 서른세 살 때 죽었고, 가수 김광석도 서른세 살 때 죽었고, 뭐 서른세 살에 죽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죠. 그런데 서른세 살 죽었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뭐 애석하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보기에는 서른세 살이나 오래 사나 하늘나라가기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으니까.

절기를 제가 설명해드릴 텐데요. 복잡할 수가 있는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이 절기라 하는 것은 마지막 때를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절기에서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지난 해, 2015년에 절기 드렸으니까 이번 2016년에는 지난해 걸로 때우자고 할 수가 없어요. 절기로써 마감이 되고 새로운 절기가 주어지게 되면, 절기를 딱 까보면 그 안에 마지막이 들어있고, 그 마지막이 들어있다는 것은, 니가 인생을 몇 십 년 살았다고 말을 하지 말고, 지금 하루 살았다 치더라도 마지막 때가 되게 되면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겁니다.

40을 살아도 영원히! 50을 살아도 영원히!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몇 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동안 강도짓하면서 고생 많이 했을 겁니다. 안 들키려고. 안 잡히려고 고생 많이 했을 건데, 하지만 오늘 밤에 낙원에 가게 되면 그거 다 잊어버려요. 손을 모아버리면 없는 것 같은 인생. 그래서 거품이라고, 인생은 거품이에요. 지금 굉장히 인생이라는 것이 실감나잖아요. 취직해서 일하려고 하면 아프고 고생스럽고 애 키우는데 힘들고 잠 못 자고 하죠. 어제 새벽 두시에 2층집 애가 울어서 잠을 못 잤어요. 그런데 엄마는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애가 아파서 우는데. 그처럼 인생사는 것이 하루하루가 힘들어요.

근데 그게 거품이라니까요. 나중에 뒤돌아보면 없어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그것 때문에 마지막 때라는 겁니다. 살다보면 마지막? 아니죠. 주와 함께 동행 하면 마지막입니다. 주와 함께 동행 하면 매일 매일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냥 늘 하늘나라에 턱걸이 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간당간당하게 턱걸이 할 생각을.....,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턱걸이 하는 거예요.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그렇게 턱걸이를 하려면 밑에 스프링이 있어야 하는데 그 스프링이 뭐냐, 세 가지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유월절, 맥추절, 그 다음에 수장절, 다른 말로 하면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라고 할 수 있죠. 자, 그렇다면 이 절기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초막절이라고 하는 것은 텐트 생활하는 것을 기념해서, 일주일동안 7월15일부터 7월21일까지 텐트 생활하는 거예요. 텐트 생활해가면서 뭘 잡는가 하면 어린양과 숫양과 염소와 소를 잡습니다.

민수기 29장에 보면 초막절 날, 다른 말로 하면 수장절 날, 수장절은 곡식을 저장하는 절기고 동시에 옛날 광야에서 텐트 생활했던 것을, 그 고생했던 것을 추억하는 그러한 절기, 두 개가 포함이 됩니다. 12절에 보면 “칠 월 십오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 일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그러면서 제물을 바칩니다. 제물을 바치는데 제물의 숫자가요, 수송아지 13마리부터 출발을 합니다. 7월 16일에 12마리, 17일에 11마리, 이렇게 차곡차곡 일주일 동안 한 마리씩 줄여나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제물의 숫자로 표현된 방향표시기라고 이래보시면 됩니다. 숫자가 줄여가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될, 우리가 바라봐야 될 것은 결국 어느 라인으로 가야 되는가. 가보니까 마지막 날에는 민수기 29장 32절에 보면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 7이라는 라인을 딱 정돈해버려요. 라인을 정돈해버립니다. 어느 숫자 기준? 7로 해버려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게 마지막이에요. 근데 마지막이 이게 처음 창조가 시작되는 날이에요. 창조시작과 마지막이 늘 같이 시간의 단위로, 한 컨테이너, 한 단위로, 한 박스로 같이 들어있는 겁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쉽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동행을 시간 단위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절기입니다. 나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번 수련회 교재를 미리 한 달 전부터 나누어드렸습니다. 마태복음, 지극히 작은 권력이라는 제목으로 나눠드렸거든요. 거기에 보면, 글이 함축되다보니까 글이 좀 난해하죠. 이상민 성도는 글이 난해해가지고 그림을 하나 우리교회에 올려놓았습니다. 어벤져스나 엑스맨 포스터인줄 알았어요. 하여튼 얼마나 수고했겠어요. 거기서 지극히 작은 권력이라고 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있는데, 겨자씨만큼 있는 거예요. 지극히 작은 권력이에요.

근데 그 지극히 작은 권력이 뭐냐, 우리를 소자 만드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소자.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는 지극히 작은 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이 땅의 모든 흐름에서, 시간단위에서 지극히 작은 권세만 있어도 우리가 이 땅을 벗어나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는 권력을 갖고 있는 셈이 돼요.

마지막이 함께 있기 때문에, 마지막이 있게 되면 우리가 살아온 것이 압축이 되어서 살아도 안 산 게 되거든요. ‘언제 내가 그만큼 살았어? 내가 이만큼 살았어?’ 모르긴 몰라도 연세 한 70, 80쯤 되면 지금 살아온 것을 다 잊어버렸을 거예요. 그렇죠? 97된 올케가 와도 같이 늙어간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무리 생각을 해도 뒤돌아보면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왜? 이미 다 소모했기 때문에. 지난 세월은 다 소모하고 남은 것은 늙어 후줄근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주체하지 못하는 늙은 껍데기만 남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정상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껍데기뿐이에요. 권력 그 안에 갖고 있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께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이 땅에 투입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게 창조의 시작이고 창조의 마감이었습니다. 바다도 잔잔케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그렇게 하셨지만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살았지만 죽고, 죽었는데 사는 게 되고. 이게 압축이 돼요. 죽고 사는, 시작과 마지막이 딱 들러붙어있으니까. 살아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지만 내 안에는 그리스도가 살고 있고. 이게 동행이에요. 함께 사는 동행이다 이 말이죠.

절기 안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창조가 들어있고 마지막 때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수송아지 열세마리 잡는다. 그 다음날 열두 마리, 그 다음날 열한마리..이걸 합해서 이게 70마리에요. 그 나머지기 숫양이나 그런 것들의 숫자는 그대로 가요. 숫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열넷은 날이 바뀌어도 늘 유지하고 있어요. 다른 제물은 유지되는데 수송아지만은 숫자가 하나씩 감한다, -1이 된다는 말은 이 절기가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방향성이, 이쪽으로 보라는 것, 뭘 바라보는가, 마지막 절기가 처음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가게 되면 우리의 최초가 보이게 되고, 그럼 우리의 인생은 거품에 불과하다는 것, 인생은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흘러가도 흘러가는 시간은 세상적인 계산에서 흘러가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흘러간 적이 없는, 그냥 잠깐 왔다가 잠깐 은퇴하는, 사라지는 거죠. 연극무대같이. 역할하나 맡고 대사하나 하고 그 다음에 없어지는, 그럼 그 연극은 주를 위한 연극입니다. 주로부터 와서 주께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수난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잠깐 투입했다가 빠져버리면 그만인 거예요. 남는 것은 뭐만 남는가, 동행하시는 분이 남죠.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대속이라는 말은 대신 나타내주시는 분. 짧은 내 인생을 통해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정작 주인공은 따로 계시다는 것을 짧은 인생을 통해서 마구마구 표현케 해주시는 그 능력, 성령의 능력이요, 주와 동행하시는 능력입니다.

성도? 별거 없습니다. 이게 성도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런 거예요.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뭘 해도 탓하지 않고, 어떤 잘못이나, 교도소에 들락날락해도 그 잘못을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니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니 인생은 원래 나에 대한 대타였다는 거예요. 대역이었지, 대타였지, 정작 니 인생의 주인공은 예수인 나지 너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답니다. “죄 문제는 해결됐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받느냐?” 라고. 성경은 죄 문제 해결하라고 있는 책이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게 있어요. 노아가 방주를 탔는데 방주가 물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40일 동안 비가 내리다가 그쳤어요. 그러면 노아가 비 그쳤다고 방주열고 바깥으로 나오면 물에 빠집니다. 그 홍수에 빠져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구원은 죄가 없는데서 구원이 아니고 죄가 넘실거리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의인되고 영생 얻고 천국 가는 것이지, 내가 죄 안 짓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온 천지에 죄가 있어요. 죄를 알면 알수록 감사하죠. 고맙고, 고맙고 또 감사하죠.

죄와 같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고, 저주받아야 되는데, 코앞에 저주를 보는 거예요. 저주를 보면서도 자기는 저주를 안 받으니까, 이런 땡잡은 일이 어디에 있어요? 그게 바로 절기 지키는 마음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거품이에요. 나중에는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절기에요. 왜? 내 안에 시작이고 처음 되시는 분이 함께 동행 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은 절기를 지키면 안 됩니다. 안산홍 집단은 지금도 절기를 지키는데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안산홍 집단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 안 돼! 어머니라고 해야 돼!” 라고 하는데, 이번 수련회에 하나님 아버지가 왜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 어머니가 왜 성립이 안 되는지 말씀드릴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말하는 아버지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님이 중재한다는 말은, 이것은 잘못된 말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을 중재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비로소 등장하는, 그때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 우리가 아는 인간 사이에 중재하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애초부터 이거는 없어요. 내가 그냥 비친 거예요. 스타워즈의 영화에 보면 손에 있는 광선총을 누르면 쭉 나오잖아요. 나밖에 없는 인간이 스위치를 누르니까 내가 만든 하나님이 쭉 나와 가지고 거기다가 예수님 투입해서 중재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독점해서 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몰라요. 전부 다 마귀한테 지배받고 있는데 무슨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 없어요. 그리고 평소에 하나님 없이 살고 있고. 자연스럽게 살면 하나님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아바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이 생기는 겁니다. 예수님 계시고 예수님이 광선총을 쏘게 되면 없던 하나님 아버지가 생겨서 ‘아, 이분이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구나.’ 제대로 이제 아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제물 바치고 수장을 하고 초막을 하는 이것은 바로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텐트생활 고생, 고생했지만 지금은 약속의 땅에 와서 옛날에 텐트 생활 고생한 것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그런 넉넉한 기쁨을 또 한 번 반복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하루하루가 반복입니다. 시작과 마지막의 반복, 절기의 반복,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반복. 그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움직이는 절기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절기 되시는 분과 동행함으로, 우리는 한줌밖에 안 되는 인생을 거품처럼 살고 있습니다. 저희들 이 거품 속에서 주께서 동행해주셨다는 그 감사와 기쁨이 늘 새롭게 표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