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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강-전진하는 경계

아빠와 함께 2016. 8. 6. 15:23
2016-08-06 11:02:04 조회 : 14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2강 [전진하는 경계] 이름 : 한윤범 (IP:14.39.134.67)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2강 [전진하는 경계]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에서 특이성을 끄집어내야 된다는 식으로 첫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첫 시간은 관점정리, 관점이 누가 중심이냐? 예수님이 중심이냐, 우리가 중심이냐? 예수님이 중심일 때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좋은 관계가 아니라서 제가 언급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좋은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뭐냐고 물으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좋은 관계라면 십자가라는 살해당하고 살해하는 그런 일이 없어요.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뭘 봐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가 왜 일어났는가에 주목해야 돼요.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할 때 십자가가 뭐냐 하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겁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각각 다른 세계를 고수하고 고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른 세계가 뭐냐? 각각 나름대로 이게 전부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의 걸고 티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반발 기류가 있는데,

 

제가 반발이라는 말을 했지만 예수님 오기 전까지 반발 없어요. 잘해보자, 개혁해보자, 점점 나아지겠지, 인간의 지혜는 영원무궁하다, 좀 모르면 공부하면 되고 연구하게 되면 새로운 살 길이 나오겠지. 인간이란 좌절할 때마다 희망을 품었고 그 희망이 용기로 극복이 되었고 이제까지 문명이 이만큼 발전했기 때문에 희망을 꺾으면 안 된다. 이게 바로 인간 세계에서 소통하는 기본 원리에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하잖아요. 정주영 회장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오히려 시련은 더 나은 동기부여가 될 뿐이지 여기서 좌절하거나 무너지면 안 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교육을 받아왔어요. 통하지 않으면 조율하면 되는 거예요. 조율한다는 것이 소통입니다. 인문학의 주제 아닙니까. 모든 인문학의 주제는 소통이에요.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더라도 대화로 풀게 되면 안 풀릴 게 없다는 겁니다. 참고 인내하게 되면 언젠가는 정답이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다. 나는 너희들 정체를 이야기한다. 본질, 정체, 힘의 원천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언급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는 먹혀들지 않아요. 그런 말 자체가 배후에 아무도 없을 때는 그게 돼요. 지금까지 내가 못해 왔지만 앞으로 잘하면 되겠지. 이건 인간 배후에 아무도 없을 때는 성립되는데 마태복음 4장에 가보면 벌써 광야에 사탄이 와 있습니다. 사탄이 와서 예수님과 이야기가 끝났어요. 그리고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집주인이 가구를 쥐고 있을 때 예수님이 담타고 와서 집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그 가구를 빼앗아 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보여준다고 돼있어요. 마태복음을 보시면 의견 조율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됩니다.

 

마태복음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붙어 있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구약 끝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마지막 때. 마지막 때에 마태복음이 있는 게 아니고 마태복음이 마지막 때를 유발하고 생산해요. 마지막 때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에게 마지막이란 말은 그건 실례에요. 인간에게 희망을 끊는다는 말은 지금 살 필요가 없다는 말로 통하기 때문에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절망적인 언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절망적인 언급을 했고 사람들에게 제거 대상이 됐고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끝까지 인간들이 몰랐던 것은 뭐냐? 신원 조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 손으로 죽인 사람이 누구였지?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메시아는 유대인들의 주기적인 시간 개념에 맞춰 납득이 되도록 오게 되는 메시아거든요. 따라서 메시아는 아니고. 그럼 뭐지? 마태복음 27장으로 이야기가 끝났어요.

 

어떤 사나이가 성전에서 행패 부리다가 경찰한테 잡혀서 사형 당했다. 끝. 그건 역사에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28장이 문제입니다. 안식일 첫날에 무덤에 가보니까 무덤이 비어있다는 거예요. 누가 훔쳐갔겠지. 금반지나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 훔쳐갔다고 소문을 냈지만 실상은 훔쳐간 게 아니고 훔쳐갈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어 있어야 훔쳐가지 살아서 돌아다니는데 뭘 훔쳐가.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던 자가 살았다면 그를 죽였던 인간은 뭐가 돼요? 그 인간들이 죽은 자들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좀비가 되는 거예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은 죽은 자로다. 지금 마태복음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처음 나왔다고 성경 한번 읽어보자고 해서 마태복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나올 때부터 졸기 시작해서 재미 하나도 없고 어릴 때 들었던 동방박사 나오는 것이나 재미있지 앞에 족보가 무슨 재미가 있어요. 누굴 낳고, 낳고. 나도 경주 이 씨 몇 대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부터 나열된 것은 모든 개념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떠날 개념과 남아서 심판받을 내용으로 연결되게 돼있어요. 1장에서 나온 것은 육이 둘로 나눠집니다. 육에서 나온 육과 성령에서 나온 육으로 나눠져요. 성령에서 나온 것은 마리아가 육이지만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잉태함으로 육에서 나온 자와 성령으로 나온 자가 이미 마태복음 1장에서 나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육에서 나온 육, 그러니까 보통 인간들을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자식이 자식을 낳은 이들은 반대로 질문을 받아야 돼요. 예수님으로부터.

 

저들은 왜 저렇게 엉망입니까? 저들은 누굽니까? 질문을 반대로 해야 돼요. 예수님 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너희들은 그런 질문할 자격도 없어. 육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들이 납득되지 않는 분을 등장시켜서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셔서 모든 인간들로 내가 누군지를 재정립하고 예수님 안목에서 다시 보게 하는 그 내용이 바로 복음이 되는 거예요. 이게 기쁜 소식이 된단 말이죠. 누구한테? 이런 소식에 대해서 아무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상체계를 부정하는 이런 인간을 절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게 복음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시절이 지나고 오순절에 사도들이 왔을 때 옛날 잘못한 것을 회상하고 기록하면서 그때는 복음이 아니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보니까 이게 복음이구나. 그래서 그 사람을 성령으로 난 자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난 자가 성령세례 받고 예수님 나라에 합류해야 될 하나님의 양들이 되는 겁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니까 이제는 어렵지 않지요.

 

제 말이 맞는다면 성령으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경과해야 되느냐 하면, 육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줘야 돼요. 누구든지 내 의견에 토 달면 나는 참지 못한다는 것을 마음껏 육적인 본색을 드러내야 돼요. 그 중에 베드로도 합세했고 열두 제자도 동의했고. 베드로는 저주한다고 이야기했고, 노골적으로는 안 했지만 뒤에서 궁시렁궁시렁 이야기 다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같이 겪어야 돼요. 우리도. 이미 겪으시고 난 뒤에 오신 분도 있고, 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이 중에서 예수님을 제일 미워한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하면 다들 먼저 손들어야 돼요. 제가 가장 예수님을 욕했고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제일 싫어했어. 그런 자랑질을 해야 돼요. 그래야 십자가마을이지. 문제는 그걸 진행 중인 사람도 있다는 거지요. 나는 아무리 봐도 잘났는데 살 가치가 있어서 사는데 이걸 왜 살 처분한다고 하느냐?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인자,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아기 예수지요. 예수님이 오실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다는 거예요. 이게 다잖아요. 이것 말고 뭘 또 해야 됩니까. 어떤 사람들은, 난 그런 사람 보면 답답해서, 그것만 하면 안 되고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손 못 들어요. 아무리 예수님 기다려도 나중 문제고 당장 코앞에 있는 돈 문제, 먹고 마시는 문제, 자식 키우는 문제, 피아노 레슨 문제, 그런 문제가 심각합니다, 라고 이런 소리를 해줘야 되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한 다리는 이 세상에 걸치고 한 다리는 하늘나라에 걸치고, 말이 안 돼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하나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는 미워한다는 거예요. 사랑을 한다면 달랑 사랑만 할 수 없어요.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인 미움 대상을 유발하게 돼있어요. 사랑이 있는 곳에 미움이 있고 축복을 유발하는 곳에 저주가 있습니다.

 

복음이란 말은, 지금까지 제 강의가 어렵다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 앞에서 전도, 선교, 헌금, 기도, 예배,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생각도 마세요. 그게 복음입니다. 오시는 분이 우리와 의논 안 합니다. 등을 두드리면서 열심히 해야지. 이런 게 아니에요. 베드로가 고기 잡게 해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베드로가 제일 먼저 손들었어요. 나 같은 인간을 어찌 상대하십니까? 이건 주님의 격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 나와요. 주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울산의 태화강 대나무 숲에 까마귀 떼처럼 가버리겠다는 거예요. 이 땅에 머물러 출세시키겠다는 게 아니고 내 백성 잃어버린 양 찾아서 손잡고 떠나겠다는 겁니다.

 

의외로 복음은 기쁜 소식이에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하고 싶어도 할 재주가 없어요. 주님이 원하는 걸 할 재주가 없어요. 마태복음 5, 6, 7장에 나오는 법이 무슨 뜻입니까? 네가 지킬 만하면 지켜봐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 못 지키느냐? 마음의 문제기 때문에 못 지켜요. 시간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꿇어앉는 데 다리가 찌릿찌릿해서 그런 게 아니고 돈이 없어서 헌금 못하는 게 아니고 돈을 아무리 교회에 처발라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한테 다 들통 나서 그래요. 우리 마음구조 자체가 그래요. 따라서 되지도 않을 말씀을, 주께서 할 수도 없는 말을 하신 겁니다.

 

저한테 하는 질문이, “목사님, 기도 어떻게 합니까?” 주기도문이란 말하지 않는 기도를 말해요. 입 다물어. 그게 주기도문이에요. 주기도문에 대한 성취는 입으로 나불거려서 성취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유구무언입니다. 그것을 유발시키면서 예수님 홀로 다 이루기 때문에. 한 적도 없는 주기도문의 결과를 우리는 한 것도 없으면서 공짜로 혜택을 입게 돼있어요. 그게 바로 주기도문이에요.

 

모든 복음 안에서 내용은 부지런히 설치고 활동하는 것은 예수님 혼자 그렇게 했지 아무도 나대거나 돌봐주고 도와주는 것 없어요. 예수님 수고한다고 잡채해주고 탕수육해주고 예수님 발밑에서 성경 말씀 듣는다고 무슨 소용 있습니까? 오빠 죽으니까 자매가 나대서 예수님한테 대들고. 우리 오빠 왜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오빠, 안 죽었다. 죽였잖아요. 안 죽었다. 죽었잖아요. 안 죽었다. 죽었잖아요. 개념 또 틀렸네, 개념 또 안 맞네. 오빠가 죽었잖아요. 안 죽었다니까.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누가? 중심되시는 분이. 그런데 어떻게 변두리에 있는 날파리처럼 따라가야 될 우리가 거기에다 토를 달고 이의를 제기하는 게 되겠어요. 되겠어요, 하지만 토 안 달순 없고. 답답하니까.

 

마태복음 1장에서는 완전히 초 치는 거예요. 너는 안 돼, 라는 말 속에 안 되는 걸 내가 되게 해준다는 게 섞여있어요. 너희는 절대로 안 돼. 하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할게. 섞여있는 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언약의 내용은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밖에 있는 것을 안으로 집어넣는 게 언약의 핵심이에요. 예수님 안에 있는 의는 바깥에 내고, 바깥에 있는 인간의 죄를 예수님 안으로 걷어 들임으로 죄가 의가 되고, 또 죄가 의가 되고 주께서는 죄를 재료로 해서 의를 생산하는 반복되고 회전하는 계속해서 가동시키는 그것이 언약입니다.

 

언약을 가동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죄가 필요하겠지요. 죄만 필요한 거예요. 모든 것을 율법으로 죄로 만드는 겁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이에요.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한테 관심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해야 될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 언약을 가동시키는데 초점이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모든 죄를 죄로 지적함으로써 자기 안으로 끄집어 당기면서 교류를 직류로 직류를 교류로 만드는 걸 트랜스라 하지요. 경상도 표준말로 도란스. 트랜스 역할을 하시는 거예요.

 

트랜스 역할, 언약적 역할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바로 차이 나는 계속해서 기존에 알고 있던 너희들의 땅 개념, 천국 개념, 율법 개념을 주께서는 틀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제자들끼리 예수님, 천국에서 누가 높습니까? 또 틀어버립니다. 어린아이 하나 데려옵니다.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소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짐과 똑같다고 했어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몸은 있으되 자아가 없어요. 몸이 있다고 해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재 첫 번째에 보면, 하찮은 감응체. [거미는 눈, 코, 입과 같은 감각기관이 없어서 보거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사는가? [그저 거미줄 꼭대기에 앉아 파장을 타고 몸에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진동을 느끼자마자 정확히 먹이에게 달려들어 거미줄을 감아댄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모든 권리가 박탈당한 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사셨습니까? 평생 어떻게 사셨습니까? 선택했다고요? 아닙니다. 선택은 선택할 항목 안에서만 골라잡았어요. 인간은 처음부터 선택에 의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내가 남자가 될지 여자가 될지 절대로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이미 기본 모체가 선택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인생은 한 마디로 말해서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내가 교사가 되지 않고 판사가 된 이유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내가 30등 했는데 1등을 한 것은 공부가 제일 쉬워서 어쩔 수 없음. 공부가 그렇게 재밌어. 재미있는 걸 재미있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단 말이죠. 내가 저 여자와 결혼한 것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여자분들 결혼한 남자를 보세요. 그 남자가 그때 돼서 다시 만난다면 또 그 남자에요.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음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걸 사도 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딱 적합한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맞춤도 그런 맞춤이 없습니다. 딱 맞아떨어져요.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죄인 된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자기 죄 문제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제발 부탁하는데 자기한테 채찍 들고 때리지 마시고 자학하지 마시고. 제가 오전에 그런 설교했습니다. 내가 아픈 것은 가짜 자아기 때문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제목이 길어요. 김광석의 노래에요. 아픈 자아는 가짜입니다. 진짜 자아는 중심 되는 주님께서 따로 꼬불쳐놨어요. 하늘나라에. 이미 우리는 이 땅에 죽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3장 3절. 사도 바울이 외쳤던 복음이 이거였거든요. 왜 가짜 붙들고 그렇게 탄식하고 걱정하고 수고하고 염려하느냐 말이죠.

 

빈 껍질인데. 무슨 껍질에 연연하고 거기에 미련과 애착을 왜 갖느냐 말이죠. 모든 걸 다 투자하고. 심지어 돈까지 다 쏟아 붓고. 그게 뭐라고. 가짠데. 그러면 교회에다 돈 낼까요? 교회도 가짠데 가짜한테 돈을 바쳐요. 좋은 소리할 때는 좀 받아 적으세요. 내가 가짜면 내가 좋아하는 교회도 가짜에요. 그럼 진짜는 어디 있습니까? 그걸 왜 찾아요. 가짜 자체가 재료인데 언약 안에서

 

가짜에 대해서 탓하지 마세요. 자기가 가짜 됨을. 주께서 그렇게 유발시킨 거예요. 가짜가 있어야 진짜가 있을 것 아닙니까. 가짜가 중심이고 진짜는 뺑뺑이 도는 거예요. 여러분, 실험해볼까요? 음식 들고 수풀에 가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날파리들 달라붙잖아요. 이 세상은 예수님 가는 곳에 귀신이고 마귀든 간에 모든 75억 인구가 다 따라오게 돼있어요. 서로 곁눈질하면서. 실례지만 어딥니까? 이슬람교. 나는 천주교. 이러면서 따라온다고. 다 헛된 종교, 아무 의미도 없는 종교, 기독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믿든 안 믿든 간에 그리스도께서 합력하여 안 믿게 하고 믿게 하고. 그게 마태복음이에요.

 

출애굽기에 보면, 유월절에 어린양 잡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심판을 면제를 주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심지어 애굽이라도 어린양의 피가 있으면 그 피를 보고 심판을 면제해주는 거예요. 어린양이 언약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그냥 천사 왔는데 웃고 있는 게 아니에요. 피 흘린 어린양이에요. 피를 왜 흘렸겠어요? 그 집에 있는 주인과 식구들 때문에 피 흘렸잖아요. 양은 흠 없는 양이에요. 흠 없는 양이 죽었다는 말은 우린 흠 있다는 말이잖아요. 제발 흠 좀 있으세요. 부탁하는데. 없으면 발굴하든지. 흠이 있으면 있을수록 주께 감사할 게 될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강의 제목이 [전진하는 경계] 또는 경계선. 육이오 전쟁 때 시시각각으로 남북 경계선이 자꾸 이동하지요. 남쪽에서 치고 올라올 때는 경계선이 백두산을 향하여 전진하지요. 전진하는 경계선. 예수님 자신이 움직이면서 완전히 색깔들이 다 드러나요. 도미노게임에서 넘어지는 순서에 따라서 무너지지 않은 색깔과 무너지고 난 뒤에 뒷면 색깔이 연속적으로 바뀌잖아요.

 

마태복음 1장에서 27장까지 연속적으로 가면서 색깔들이 바뀌어요. 점잖고 상식이 있고 합리적이고 모든 것에 모범이 되는 유대인, 바리새인 세계에서 단지 예수 그리스도란 사람이 등장해서 지나가면 말썽이 나고 소동이 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주려함이 아니고 불화를, 분쟁을 유발시키려 왔다. 그런 예수를 믿고 있으니 여러분들도 참. 누구와 분쟁입니까? 다른 이북 사람하고? 아니에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딸이고, 고모고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아이고, 이 웬수라고 하잖아요. 말 안 듣는 딸이 늦게 들어오고 하면, 이 원수, 하지만 그건 예뻐서 귀여워서 그런 소리하지만 진짜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원수가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침투하지 않았으면 천국 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손에 손잡고, 아버지가 널 지켜줄게. 엄마가 널 보호해줄게. 아빠, 사랑해요. 온갖 재롱을 다 떨지요. 까르르 웃고. 그리스도만 와 보세요. 원수의 집단, 집합체가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책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마치 지뢰를 밟는 것 같아. 어디서 또 무엇이 터질지 몰라요.

 

전진하는 경계라는 것은 점차 갈수록 개념에 차이를 두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는 육에 대한 개념이 영과 다르다고 했지요. 2장에서는 지역이 달라요. 갈릴리 지역이 메시아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 3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앞으로 올 것이냐, 이미 왔느냐는 문제, 세례 요한을 통해서. 4장에 보면,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느냐? 인간이냐, 인간 배후의 악마가 쥐고 있느냐? 5장에 보면, 진정한 율법은 어떤 율법이냐? 산상설교, 5장에서 7장까지 나옵니다.

 

8장에 보면, 누가 이스라엘이냐? 백부장이 이스라엘이냐, 이스라엘 자체가 천국 가느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백부장이 천국 가고 본 자손은 쫓겨날 것이다. 쫓겨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못 들어간다는 게 아니고 그동안 무던히도 인간들을 속여 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저처럼 하면 구원받는다고 목사들이 수시로 매주, 성경 공부할 때마다 속여 왔다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 목사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까? 이야기하신다면,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잖아요. 그게 붙고 안 붙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믿음이 중요한 거예요. 제가 여러분이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여러분을 믿게 하시는 게 중요한 거예요. 목사가 믿게 못해요. 그냥 자는 참에 잠 깨다가 저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고 참고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도 있네. 그렇게 보는 견해로 참고로 해보지. 그 정도, 그 정도라도 해주기 바랍니다. 어차피 믿는다고 해도 안 믿고, 안 믿는다는 말도 안 믿어요. 얼마나 믿었으면 안 믿는다고 스스로 겸손을 떨겠습니까. 얼마나 자기가 죄인인 걸 알면 믿고 있으면서도, “목사님, 저는 절대로 안 믿습니다.” 이 사람 믿는구나. 모든 게 복잡해요.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말을 할 때 정상인이 돼요. 프로이트 이전에 정신학자들의 씨름했는데 프로이트 이전부터 있었어요. 어떤 소녀가 이상하게 아무 이유 없이 몸이 아파요. 그런데 어릴 때 있던 이야기를 의사 앞에 말로 털어놓는 순간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체는 말을 통해서 주체가 다시 제자리를 잡는 거예요. 우리 말하면 안 돼요. 정신과에서 말하는 정상인지는 모르지만 천국은 못 가요. 뭔가 있는데, 하는 말을 고맙게도 주님이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 대신 아버지한테 말을 다 해놓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아는 게 맞잖아요. 주님이 이야기해줘요. 우리 대신.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린 옆에서 맞장구치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에요. 풍랑아, 잠잠하라. 사실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 이야기에요. 이런 것.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다. 제가 원했던 게 그 말이에요, 라고 뒤에 맞장구나 치면 돼요. 말 한 마디로 해서 구원받는 것 없어요. 고백해서 구원받으면 나중에 고백서, 사본 돼서 온 인터넷에 다 떠돕니다. 그것 베낀다고.

 

9장에 보면, 죄 인식이 달라져요. 내가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해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중심 되는 예수님이 어느 쪽에 붙는가가 중요해요. 부족하다고 철야하는 그들에게 붙지 않고 죄인에게 붙지요. 그래서 죄의 개념을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인정해요. 10장에 보면, 새로운 이스라엘 나옵니다. 열두 제자를 뽑으니까. 11장에 보면,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라고 이야기할 때 세례요한의 역할은 끝났어요. 그 역할을 열두 제자가 인수인계합니다. 장차 성령 받게 되면.

 

12장에 보면,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와요. 안식일에 노동해도 되느냐는 문제에요. 안식일에 뭘 하고, 뭘 안 하고 안식일을 지킨 여부가 나와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인자 모시는 것, 인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게 안식일의 완성이다.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라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안식일 지키는 게 아니고 이미 안식일 돼버렸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안식일이 이미 나타났어요. 나타났기에 지킬 필요 없다고 고백하는 그 자가 나타난 안식일과 연결 돼있는 사람입니다. 그럼 안식일에 그만한 혜택이 있어야 되는데 혜택이 뭐냐? 안식일에 손 마른 자가 멀쩡하게 낫는 것.

 

13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말로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하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없는 나라인데 예수님의 활동 여부에 따라서 그 자리에만 등장하는 출현하는 출몰하는 나라. 그 다음에 14장에서는 새로운 구원받는 자가 등장합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인이 낫게 되는데, 마태복음 14장 36절 보겠습니다.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게 교재에 나옵니다. 이 대목을 인용해놨지요.

 

제가 교재 올린 것이 유월 말에 올렸습니다. 7월에 <W>라는 드라마가 나왔어요.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만화세계와 실제세계가 소통이 돼요. 모니터를 통해서. 이게 7월에 나온 거예요. 왜 이걸 강조하느냐 하면, 제가 6월말에 올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과 하늘나라를 연결하는 유일한 모니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주인공이 만화 속에 있다가 화가 나서 현실 세계로 넘어왔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할 수 없는 다른 세계와 연결 창으로써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손을 대면 저쪽 주님만 갖고 있는 천국의 능력을 이쪽에서 흡수가 돼요. 천국의 능력, 언약의 능력은 죄를 의로 바꾸는 능력이에요. 죄는 오염된 겁니다. 죄와 오염이란 것은 예수님 중심의 하나님 의와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에요.

 

그 장치가 언약장치인데 여러분 발전기 원리를 아시죠. N극과 S극 사이에 코일을 감아서 왕복시키면 여기서 전류가 흘러요. 왕복시키는 힘은 수력이나 화력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사용하셔요. 오염과 거룩 사이에 몸을 집어넣어요.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이 나오고 용서가 나와요. 그러기 위해서는 전 세계를 구조를 새로 바꾸어야 돼요. 거룩과 오염된 두 구조로 구분해야 돼요. 이게 바로 전진하는 경계에요. 앞으로 점점 더 나아가는 경계선을 유발시키는 거예요.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내시고 하는 말이, 이게 하나님과 세우신 새 언약이라 했습니다.

 

이쯤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우리는 소용돌이처럼 말려들었음을 확인만 하면 돼요. 마태복음뿐만 아니고 마가, 누가, 요한복음, 성경 전체가 다 그렇지 뭐. 그게 복음이에요. 사시는 대로 편하게 사시되 고민하지 마세요. 어차피 가짜니까. 진짜는 따로 있으니까. 진짜는 예수님이 알아서 다 준비해놨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왔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게 관심사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복에 관심 없어요. 이스라엘은 가짜거든요. 이스라엘 말고 잃어버린 양이란 말이죠. 누구한테 잃어버렸겠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버림받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온 거예요. 이스라엘은 자기를 의의 나라라고 주장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의의 나라에서 계급적으로 제일 낮은 계급이 뭐예요?

 

카스트 제도에서 제일 낮은 계급이 수드라잖아요(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하여튼 접촉하면 안 되는 천민들, 불가촉천민들. 이스라엘에서 불가촉천민이 세리와 창기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희들보다 세리가 먼저 하늘나라 간다고 했습니다. 그게 겸손하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사고방식이 나는 가치 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다고 하는 이상은 그건 아무리 마음을 낮추고, 낮추고,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백날 내려놓아도 소용없어요. 내려놓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내려놓으면 안 생깁니까?

 

마태복음 3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오니까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도 구원받으려고? 잘난 네가? 어디서 이 동네 룰도 모르고 구원받으려고. 너희들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돌멩이도 구원받겠다. 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게 욕설인 듯 욕설 아닌 욕설 같은 욕설. 도대체 구원하겠다는 건지 뭔지 모르겠어요. 너희들이 왜 왔어? 죄인들만 오는 곳인데 잘난 너희들이 왜 왔는데? 심사하러 왔어?

 

경계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집어넣음으로써 주변 상황이 바뀝니다. 착한 것, 덜 착한 것, 보다 더 착한 것, 이렇게 구성돼있던 계급이 전부가 더럽고 오염되고 죄고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럽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들어가는 족족 그걸 더러운 것으로 바꾸는 메커니즘이 날 때부터 인간 속에 장착돼있는 거예요. 살인자의 피입니다.

 

내 것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물건 건드리는 것 아닙니다. 내 자존심, 내 가치, 이만큼 살아왔는데 값을 쳐주지 않는 모독적인 발언에 대해서 경멸하는 것에 대해서 가만있을 위인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심화돼요. 경계선이 전진하니까.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이야기합니다. 얘들 있는데 이런 욕해서 죄송합니다만 경건한 욕이라 괜찮습니다.

 

1강, 2강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관점을 정리해야 된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데 약속을, 메시아 오기를 기다렸는데 주께서 오셨다, 라는 관점이 잘못 됐다는 겁니다. 우리가 괜찮은데 주께서 합세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너희들이 기다린 메시아부터 모든 것이 네가 죄인인 걸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건전하고 괜찮다고 배후에 있는 악마가 시킨 대로 사주한 대로 그냥 그러려니 정상이니 이렇게 해서 영원토록 천국까지 가는 거야. 이렇게 집단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이 어떤 낯선 분, 있지도 않은 분, 정말 희한한 탄생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의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엉망진창인 세계를 같은 관점으로 동의한다고 수용할 때만 복음의 관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엉망진창인데 이걸 개선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시간을 마치면서 이야기합니다. 제발 엉망진창을 손대지 마세요. 이유가 뭐냐? 앞으로 살면 살수록 더 엉망이 돼요. 아직 엉망의 밑바닥을 구경도 못했어요. 살면 살수록 엉망에 더 엉망이 되는 걸 여러분이 시원한 마음으로 감상이나 하면 됩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멀었습니다. 아직 내일까지 못 살아서 그렇지 내일 살면 좀 더 진전 봅니다.

 

일 년 더 살면 앞으로 십년 더 살면, 치매 걸려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사람 아닙니다. 곤충인지 짐승인지 좀비인지 구분 안 됩니다. 살 처분 되도 본인은 싫어하지만 가족들은 대환영할 거예요. 그 사람 때문에 남들이 힘들어 죽겠어요. 그런 분들도 젊을 때는 다 착하다고 내세웠고 옷도 근사한 것 입고 가락지도 끼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거기에 분주한 겁니다. 우리 곁에 누가 왔다 갔는지 신경도 안 써요. 나만 안 건드리면 항상 나는 좋은 사람으로 남한테 베풀 준비가 만반의 돼있는 윤리적 도덕적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들이 바로 마귀의 자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