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4강 [온전한 의]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응시라고 했는데 응시를 뭐라고 했는가 하면, 보통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게 되면 보이는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하게 돼요. 판단을 했을 때 결론이 나올 겁니다. 사람이 뭔가 본다는 것을 지각이라고 하고 지각을 하게 되면 이해를 하게 되고 이해를 하게 되면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지각하고, 이해하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결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에요. 결론을 내렸으니까 그 결론을 결론1이라고 한다면 그 결론에 의해서 처음에 했던 이해를 하게 되면 이해2가 되고 그 때 내가 느꼈던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지각1에서 지각2로 바뀝니다.
바뀌면 거기서 새롭게 이해를 하게 되면 이해3이 되고 결론1에서 결론2, 다시 결론3으로 바뀝니다. 그 결론3에서 다시 또 들어가요. 이렇게 내린 결론가지고 소급해서 ‘과거에 나는 이렇게 했다.’ 가 되어버리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한 행동은 합리화되고 정당화되는 겁니다. ‘나는 이런 행동을 했다.’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했어야 돼.’ 이렇게 돼버려요. 누가? ‘내가, 내가 경험을 하는 것이 옳았었어.’ 그렇게 돼 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꾸 뭐가 생기는가 하면, 권력이 자꾸 누적이 되는 거예요. ‘건드리지 마. 나는 과거의 모든 것이 현재의 내가 되기 위한 합리적인 절차였어.’ 이렇게 돼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권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기는 것이에요. 거기에 시간이 첨가되면 이것이 역사가 되고, 찬란한 우리나라의 역사, 우리 교회의 역사, 우리 집안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역사라는 것이 나왔으니까 역사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또 하나의 뭐가 나오는가? 법이 나와 버려요. 이것이 전부 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보게 되면 여기서 권력이 나오지요. 권력체가 나오니까 나왔던 사람이 또 등장하고 또 등장하니까 이게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권력 체의 투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런 대표적 권력체가 북한, 신천지, 다단계, 대기업, 이런 것들, 병영, 군대, 학교, 병원, 물론 교회도 포함되고요. 이 권력 체 자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나라 자체가 권력체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권력체가 되기에 여기서 자발적인 충성과 복종이 생기는데 그 이유는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의미가 권력체가 있기에 나는 거기에 소속되었다는 점에서, 그게 없으면 내 존재의미가 날라 가버립니다.
이게 심각한 굴레인데 이러한 심각한 굴레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딜레마에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낯섦. 낯섦이라는 것은 원인 없는 결과. 원인 없는 결과를 완전히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자기원인을 자기권력 체에서 찾아요. 찾아야 그 권력 체에서의 자기존재의 이유가 있기에, 그리고 정당화되기 때문에.
자, 어떤 의미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찾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새벽기도를 연속적으로 40일 나왔는데 애 성적이 많이 올라가더라. 그러면 이것은 인과관계가 성립됩니다. 40일 했는데 5등이 올라갔으면 비례해서 80일 동안 하게 되면 10등 올라가고. 그러면 200일 기도한다면 아예 천정을 뚫을 거예요.
성경에서는 그냥 행함이라고 하지만 그냥 행함이 아니고 존재의 의미는 바로 내가 생각한 자기 자신에 대한 법적인 것을 바탕으로 존재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이 법, 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산상설교, 산위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법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해요. 모든 세상은 법으로 만들었다. 시작 자체가 그래요. 모든 세상은 법으로 만들었고 이 세상 마감은 그 법이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질 때 완전체, 완벽한 것이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 온전한 의가 있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필히 심판이 따른다, 그런 뜻이에요. 그렇다면 법이라 하는 것은 온전한 의를 이루지 못할 경우에 법으로 처벌을 하는데 이 처벌이 온전한 처벌로 이어짐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제대로 처벌하는 그 자체가 ‘역시 법은 완전해.’라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법을 날리는데 너희는 이제 죽었어.” 그런 뜻이에요. 내가 전하는 이 법은 너무나 완벽하기에 일점일획이라도 법을 못 지킨 사람에 대한 처벌은 그야말로 가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산상설교가 5장, 6장, 7장이 나오는데 7장 마지막에 뭘로 마감이 되느냐 하면, 홍수로 마감이 돼버립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뜨려요. 그 전에 더 무서운 말이 나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있는데 나는 모른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다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이야기한 살 처분이지요. 다 죽이는 거예요. 사람 나고 법 난 것이 아니고 법 나고 사람 난 거예요.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자를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12장에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는데 모든 법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자라는 것이 뭐냐?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이잖아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사람이 될 수 없는 분이 지금 사람으로 오셨다는 그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올 이유가 없는 분이 사람의 아들로 왔다. 이 말은, 기존에 사람이라고 우기는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자기 자신을 가로막은 막이지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요새 하는 W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면, 만화 속의 세계와 만화를 쓴 작가의 세계가 있는데, 현실은 만화를 쓴 사람의 현실이 현실인데 착각하기를 만화속의 세계가 진자 현실2로 등장합니다. 만화를 그리는 작가의 딸이 만화 속으로 넘어오니까 강철이라는 인간이 그 딸의 신원조회를 하는데 나오지를 않아요. 멜기세덱반열에 있는 것처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아무것도 흔적이 없어요.
병원의 레지던트라는데 그런 것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 병원 자체가 없어요. 드라마대사대로 하면 맥락이 안 맞아요. 원인결과가 맞아떨어지지를 않아요. 그러면 뭐가 부정되느냐 하면, 이 현실자체가 우리한테 ‘우리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의심하게 하는 겁니다. 왜? 우리 속에 신원조회가 안 되는 사람이 끼어듦으로서 우리 자체의 붕괴의 조짐이니까. 그러다가 이쪽 세계(만화 속)에서 이쪽 세계(현실)로 넘어가는데 성경에서는 넘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로 가로막아 버려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키지 아니하면 이쪽 모니터를 통해서 가상세계에서 진짜세계, 이걸 실재계라고 하는데 상징계에서 실재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죄 때문에 의의 나라에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가면 되잖아요, 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이미 나 자체가 바뀌어서 가버려요. 그래서 내가 가고자 하는 그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함몰되고 그 나는 날라 가버렸어요.
그러면 지금의 나는 뭐냐? 십자가이후에 있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 지음 받은 나가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마르다 오빠도 마찬가지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죽고 난 뒤에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잖아요. 그래서 살아났을 때 누가 놀랐습니까? 유대인들 다 놀랐고, 그리고 누이동생들 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보는 우리도 다 놀랐어요.
유대인들이 놀라서 예수님만 죽이려 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난 나사로 죽이겠다고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이 세상이 성도에게 그렇게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지금 돈 떼먹고 도망갔다든지 혹은 죽이겠다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성경에 보면 나사로 죽이겠다고 하는 겁니다. 왜? 신원조회가 되지 않기에. 원인결과가 매치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인자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의 막이 되어서 오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는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결국 알지 못한다. 너희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천국입구를 가로막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대학교 선교단체 이야기와 정반대에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것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 말 들으면 올 수가 없다는 것이 마태복음 13장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에 보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20세기 초에 브래드라는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 신학자의 고민이 뭐냐? 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놓고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귀신에게 당부를 했는가? 그게 그 사람에게 평생 풀리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내린 결론이 뭐냐? “예수님은 사실 메시아가 아닌데 메시아 흉내를 낸 사람이다. 메시아 흉내를 냈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걸 마치 메시아 본연의 기능인 것처럼 조작을 했다.”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왜 갈 수가 없는가 하면, 구원받는 자아는요, 예수님의 작업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의 결실물로 나와 준 그 사람이 아들의 나라에 갈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나무가 완료가 되고 포도나무의 열매의 자격으로서, 포도나무의 가지에 붙은 자격이 돼야 갈 수 있는 거예요. 만일 우리 쪽에서 목숨 걸고 간다면 주께서 말립니다. “베드로야,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너는 목숨을 바쳐도 절대로 올 수 없는 곳이 처소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목숨을 내놓을 테니까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네 목숨 그냥 가지고 있어.” 헌금 한다고, 십일조 한다고 가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짓거리를 해도 못가는 곳을 주께서 따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갈 수 없는 곳에 가기 때문에 우리는 면류관도 반납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께서 받아야 된다는 고백을 영원토록 할 수 있는 거예요. 영원토록. 그것도 멈추지 않고, 싫증내지 않고 영원토록 할 수 있는 거예요.
만약에 조금이라도 자기가 기여한 바가 있다면 천국 가서 생색 낼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는가? 우리 이름은 없어요. 죽은 자는 이름이 없어요. 없기 때문에 누구 이름인가? 산 사람 이름으로 가요. 누가 살았어요? 예수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에 나오고, 사도행전 2장에 나오잖아요. 예수 이름으로.
“진정 살았다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물로 지금 내가 앉아 있습니다, 서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이야기가 너무 기니까 짧게 “믿습니다.” 하면 돼요. 너무 길면 입만 아프니까 그냥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는 그 말이지요. 내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하게 하신 일인 것을, 늘 일을 할 때는 몰라도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돌이켜 보면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자아가 등장한다면 기존자아는 교체해야 돼요. 기존자아는 권력에서 나왔거든요. 권력에 존재의미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권력을 정통으로 공격합니다. 권력을 공격하면서 그 권력이 가짜 권력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뭐가 안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기에. 그러면 의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자, 내가 법을 이야기할 테니 의가 나오는지 한 번 봐라.” 이렇게 하면서 기존의 권력이 뭐냐?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일단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멘트를 날리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기준, 일종의 높이뛰기입니다. 이번 올림픽에 이신바예바선수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높이뛰기의 바를 걸쳐버리는 거예요.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걸쳐놔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해서 바리새인을 제일 높은 바로 설치해버립니다. 바리새인이 이신바예바 선수에요. 최고입니다.
그 바리새인이 이신바예바선수처럼 선봉에 서고 그 뒤에는 바리새인을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훈련하고, 노력하고, 자기 법을 내면화화고, 상시화 시키기 위해서, 툭 치면 의가 나오고, 툭 치면 의가 나오고, 자동기계처럼 의가 나올 수 있도록 훈련과 훈련을 거듭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수련회에서 하는 짓이잖아요. 목 다 쉬도록 기도하고. “목사님, 기도하면 10초를 못 넘깁니다.” “훈련하면 5분이 됩니다.” 그러면 목표는 5분 동안 해도 지치지 않는 기도. 그렇게 하게 되면 5분 동안 기도가 돼요.
5분 동안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10분짜리 성도가 참석하게 되면 “5분은 되는데 10분이 안됩니다.” 그래서 10분 동안 기도하려면 또 열심히 새벽기도 하면 10분이 되고 15분이 되거든요. 두 시간짜리 오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 정점까지 간 사람들입니다. 모든 훈련교습 안이 다 들어 있어요. 경건의 훈련을 그렇게 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키면 시킬수록 존재의 의미의 강도가 더 세밀해지기 때문에.
‘나 이 정도야.’라고 하는 것은 그 정도마저 버리기가 더 힘들다는 뜻이에요. 헌금 10만원 하다가 2천원 내 보세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그만큼 했다는 말은 그만큼 스스로 자기 의를 포기하기가 힘들어 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지옥에 가까운 거예요. 자기 의를 못 버리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를 설치해 버립니다. 바를 설치해놓고 그 다음부터 바리새인들이 만든 법을 시비 걸어요.
너희는 모세를 거론하는데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죽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그 여러 가지 어려운 내용들이 있는데 5장을 봅시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게 주님이 주신 법의 핵심부분입니다. 법을 지키는 자는 법을 지킨 이후의 나에 대한 관심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법 자체의 취지만 드러난다면 네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호리라도 남김없이 처벌하게 되면 너는 지옥가고 법은 휘파람 불면서 법이 법대로 뚜렷하게 그 위엄성과 의로움이 드러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예요.
너는 망가지든 말든 법만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29절에 보면,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오른 눈을 아직 달려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나는 이 눈으로 한 번도 범죄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지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안경도 더 쓰고. 혹시 눈알 빼갈까 싶어서. 오른 손이 멀쩡하다는 말은, 한 번도 오른 손을 가지고 컨닝 한 적이 없고 나쁜 짓 한 적도 없다고 되거든요.
자꾸 주님께서 신체를 가지고 절단하라고 나온 것은 신체를 가지고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그 신체를 유발시킨 마음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워낙 인간들이 자기 마음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법의 취지는 쉽게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양말부터 먼저 만들고 이 양말에 맞는 발 찾기가 율법입니다. 신데렐라에요. 구두부터 먼저 있고 온 마을의 처자 중 누구 발이 맞는지를 찾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법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냈기 때문에 그 양말에 맞는 발은 누구 발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발 밖에 없어요. 아무도 안 맞게 되어 있어요. 안 맞으면 안 맞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처벌이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지키지 못하면 거기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계속해서 모든 것을 완전히 쌍끌이로 갈아버려요. 모든 법체제를 갈아버리고 그래서 법이 무너지면 뭐가 무너지지요? 법이 무너지면 존재의 의미 무너지지요? 존재의 의미 무너지면 또 뭐가 무너지지요? 권력이 가짜 권력으로 무너지겠지요.
그런데 이 법을 싹 가니까 그 바리새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아니면 대들겠습니까? 대들겠지요. 그 대드는 방법을 미리 예수님께서는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문둥병자가 와서 “저를 깨끗하게 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고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마 8:4)라고 하면서 적절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적절한 예물이라는 것은 새 두 마리를 잡아서 하는 것이 있어요. 한 마리는 물 위에서 잡아서 피를 흘려서 나머지 한 마리의 날갯죽지에 발라서 날려 보내는 거예요. A-항공기 폭파시키고 그 피를 K-항공기에 붙여서 날려 보낸다는 그 말이지요. 훨훨 창공을 나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레위기에 보면 문둥병이 나오는데 그 문둥병과 피부병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있습니다. 피부명은 고치면 되지만 문둥병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풀리지 않는 저주로서 문둥병이 들어갑니다. 문둥병은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확인하는 거예요. 제사장이 고치는 것이 아니고 관찰하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서 이런 문둥병이 있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응시의 최종지점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진리에 있다는 겁니다.
이 진리, 모든 우리의 전체성을 파괴시키는 우리 속의 빈자리, 공백의 자리, 그곳을 주께서는 쳐다보고 있습니다. 문둥병이라는 거예요. 주의 말씀대로 문둥병을 고쳤다면 그 고침 받은 문둥병을 이제는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너의 가장 깊숙한 곳에다 그 문둥병을 놓아버리라는 그 말이지요. 그걸 두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거 누가 읽어봐야 돼요. 중요합니다.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가 문둥병을 가지고 우리의 제일 깊숙한 곳에, 우리의 존재의 의미가 있던 곳, 내 자존심의 근원, 내 체면과 위신의 근원, ‘어릴 때부터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야. 우리집안은 이런 집안이야.’라고 했던 그 가장 깊숙한 곳에다가 문둥병을 가져다 놓게 되면, 안치된 그 문둥병을 대신 가져감으로 말미암아 존재의 의미 자체에서 그리스도가 대신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것이 나의 가장 깊숙한 곳의 존재의 의미가 되고 그게 원인이 되어서 새로운 결과물로 자아가 생기는 거예요.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주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왜?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당사자, 양말을 먼저 만드신 분이기에 거기에 맞는 맞춤 발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마태복음을 이렇게 보면 쉬워도 너무 쉬워요. 예수님이 자신의 할 일을 미리 당겨놓고 그것을 자기 쪽으로 회수하는 식으로 죽 나열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가짜로 등장하느냐 하면, “제가 지킬게요. 제가 지켜서 주님 앞에 영광돌리겠습니다.” 이렇게 손들고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다 가짜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 8장, 그리고 9장, 계속 나가면서 무엇을 와해시키는가? 권력을 와해시킵니다. 권력을 와해시키는 방법은 낯선 원인을 제공하면서 기존의 권력체가 그 원인을 찾지 못해서 우왕좌왕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9장을 봅시다. 여기에 어떤 중풍병자가 오지요. 이 사람은 중풍 병을 고치러 온 사람이에요. 맞지요? 감기 나으러 온 사람이 아니지요. 중풍 병 낫고자 위해서 온 사람이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중풍병 낫고자 할 때에 그 사람의 존재의 의미의 최종원인은 뭡니까? 중풍병만 없으면 나는 어떤 사람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왔지요. 중풍병만 나으면, 그래서 내가 온전해진다면, 나머지는 내가 온전하니까, ‘나머지 온전한 것 + 중풍 병 나았다 = 그러면 나는 온전하다.’ 그래서 소문 듣기를 예수님께서 모든 병을 고친다 하니 ‘나도 그렇게 병을 고쳐볼까?’하고 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 사람을 뭐로 사용했습니까? 네 죄를 내가 사한다고 했습니다.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은 병 낫고자 해서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죄를 사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그 사함을 받은 사람이 “나는 중풍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를 하겠어요, “죄 사함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예? 모르겠어요? 이렇게 쉬운데? 죄사함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겠지요.
그 사람이 또 중풍 병이 걸려도 그 사람에게는 중풍 병이 존재의 핵심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병 걸려 죽든, 늙어죽든, 어떻게 죽든, 까불다가 죽든 관계없이 죄 사함 받았다는 그것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겁니다. 그래서 병 낫기를 기도는 하되 그것은 내가 원했던 기도이기에 응답은 기대하지 마세요. 원인 없는 것이 결과가 되어줘야 돼요. 내가 기대한 것은 이미 원인을 내가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는 원인을 미리 알아챘습니다.” 하는 것이 자기 의로서 자기 내부에 깊숙이 장착됩니다.
“저도 쪼끔은 주님의 뜻을 알기는 알지요?” 이렇게 까불다가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병을 낫게 하는 것은 하나의 연막전술이었지요. 병 낫게 해주고 지옥 보내고, 병 낫게 해서 지옥 보내고, 그렇게 계속 하시는 겁니다. 인자 자체가 그래요. 인자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는 겁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인자자체가 꼭 인간이거든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실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할 때 “그래! 내가 사람의 아들이다.”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너희들이 생각한 인간은 아니다.” 하는 뜻입니다.
임금님을 뭐라고 이야기하지요? 주상전하라고 하지요. 옥녀가 어떤 암행어사를 만나서 하는 말이, “암행어사 나리! 주상전하 만나거든 과거시험을 없애주세요. 대비마마가 봉은사증축하는 일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서 과거시험을 서둘러 치르려고 한다는 말도 있고 과거시험에 쓸 종이마저 다 매점매석하고 있는 판국이니 차라리 이번 과거시험을 없애서 그것을 좀 해결해주세요.” 라고 할 때 암행어사가 하는 말이 “내가 꼭 주상전하께 알리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암행어사가 바로 주상전하에요. <옥중화>를 봐야 이야기가 되지요.
메시아가 하나님이라니까요. 자꾸 변장하는 거예요. 브래드라는 신학자가, 자기가 해놓고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이유가 뭐냐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뭐냐 하면, 이미 이 세상은 마귀의 손아귀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발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의미로? 마귀적 입장에서 재해석해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알리지 말라고 한 그것으로 도리어 예수님이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어요.
주님께서는 ‘그럴 줄 알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왜곡된 해석의 범람의 바다, 그것이 바로 이 멸망해야 될 이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만, 만약에 제가 안수를 했는데 갑자기 거기서 앉은뱅이가 나았다. “저, 집사님! 절대로 남에게 알리지 마세요.”라고 했더니 병 나았다고 온 동네 돌아다니더라는 말이지요.
병 나았다고 온 동네 돌아다니면 아, 예수님한테 온다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병 낫는다는 결과를 유발하겠지요. 이것은 익히 인간들이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 죄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예수님만나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떠들어댄다면 그 유대권력체에서 이걸 유행시키겠습니까, 아니면 금지시키겠습니까? “너 죽어!” 그렇게 되지요. “내가 나흘 만에 죽은데서 살아났어.” 이렇게 이야기하고 돌아다니니까 누가 가만두지 않습니까?
이제는 예수님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사로도 죽이려 드는 거지요. 그걸 통해서 이 세상의 권력체, 인간존재의 의미의 덩어리, 이것들이 얼마나 적그리스도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까발리시는 겁니다. 점점 더 위험한 세계에 몰입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교회에서 복음만 이야기안하면 교회는 그야말로 좋은 친목단체입니다.
때만 되면 놀러들 가고, 복음만 안 전한다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 눈치도 없이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것은 요주의인물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복음이 이런 책입니다. 마태복음이 이렇게 무서운 책인 줄 여러분 몰랐지요. 마태복음 10장을 보겠습니다. 군데군데 하는 이것은 지난시간에 다 한 거예요.
10장에 보게 되면, 여기에 1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나님의 온전한 의를 이룬다는 것은 온전한 처벌과 심판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살고 있는데 그런 우리가 왜 처벌받고 멸망하느냐?” 그것은 온전한 의가 행사되는 현장에 있기에 그렇습니다.
가짜 발을 가지고 진짜 온전한 양말을 신으려고 하는 자체가 온전한 의가 가만두지 않고 반드시 처벌을 하게 되어 있고 심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열 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결국 무엇을 전한다는 말입니까? 심판을 전한다는 말이에요. 10장 22절에,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이 말은 이 세상 자체가 그렇게 만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병 고쳐준다고 해서 환영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병 고침이 다가 아니고 예수님 복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병고쳐준 그 사람이 오히려 너에게 달려들 것이다. 병 고쳐준 것은 고마운데 딴 소리를 하지 마소.”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5만원 주면서 우리교회 와 달라고 해서 가서 복음을 전하면 그 5만원 날리는 겁니다. 5만원 주면서 오라고 했을 때는 반드시 복음을 빼고 이야기를 해 줘야 해요. 그게 아까 말한 굿판이에요. 이미지를 좋게 내놓는 거예요. 그 다음에 10장은 넘어가고 11장 11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이 뜻이 안 풀려서 본문을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바꾸고, 킹제임스버전이 어쩌고 하는데 세례요한에게는 제 삼자가 없어요. 일대 일로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왕에게(헤롯대왕의 둘째아들로 갈릴리와 뵈레아지역의 분봉왕)에게, 권력체에게 대들었습니다.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일(마 14:3,4)을 문제 삼은 것 같아요. 그 결혼이 법적으로 옳지 않다고 했어요.
세례요한과 헤롯왕이 일대 일로 맞대결한 거예요. 제 삼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역할은 그걸로 끝나버렸어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예수님에게 인수인계해서 바톤을 넘기고 세례요한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겁니다. 기존권력 체에서 제 3의 응시,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응시를 세례요한이 더 이상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치 않은 거예요.
IS라는 집단이 십자가를 다 부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바보인지. 응시하는 권력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에요. 북한 부순다고 해서 우리나라 좋은 나라 되는 것 아닙니다. 왜? 북한은 보이는 거예요. 신천지를 이단이라고 한다고 해서 다른 쪽이 멀쩡한 것도 아니고. 히틀러가 폴란드와 헝가리를 침범한다고 독일이 커지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숨어 있는 권력이 따로 있는데 우리가 같이 상대하는 경쟁자인 그것을 없앤다고 해서 좋은 나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운동하고 지상에 천국을 이루겠다고 이벤트를 벌이는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니에요. 환경 운동한다고 예수님이 한손에 십자가, 한손에 쓰레기봉투 들고 왔습니까? “여러분, 십자가 지시고 환경은 보호합시다. 분리수거 잘 하시고!” 이렇게 오셨습니까?
제발 좀 악이 범람하도록 그냥 좀 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이해했지만 걱정되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세상은 선과 악이 아니에요. 살기 편한 세상이냐, 아니면 혼란스러운가, 그것만 필요한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 필요한 것, 혼란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수결이고 다수결은 투표에 의해서 결정하는 겁니다. 투표에 의해서 많은 숫자가 한시적인 진리의 법체제로서 가동이 되는 거예요.
이 법하고 예수님의 복음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다수가 그러자고 하면 그냥 그런 거예요. 어차피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걸 누가 허락했는가?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마귀를 누가 부리십니까? 주께서 부리시는 거예요. 내어버려 두시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게도 하시고. 성경말씀대로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한다면 악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11장에 보면, 세례요한 이야기는 끝났어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에 대한 개념, 천국 자체가 예수님에게 인수인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일을 받아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천국이라면 이 천국에 대해서, 여기에 뭐가 있는가 하면, 가짜천국관이 여기서 반드시 성립이 돼요.
그러면 이 가짜천국과 예수님 두 세력과의 투쟁이 되겠지요. 빼앗는다는 말은 빼앗기는 쪽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빼앗기는 쪽이 천국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힘겨루기가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 쪽에서 저쪽을 공격해서 빼앗아온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예수님의 희생이 필요한 거예요. 이 말은, 인간들은 아무리 설쳐도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세례요한은 그냥 잔소리를 했잖아요. 예수님은 잔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희생해 버려요. 그 가짜 권력에 의해서 그냥 죽어버립니다.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했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 진짜 천국인 예수님을 침략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 천국은 없어요. 그러면 천국을 기대하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예수님이 죽으심과 더불어서 “에이 씨, 괜히 헛바람만 들었잖아.”라고 하겠지요.
그 길을 주께서 가시는 겁니다. 누구처럼? 세례요한 때처럼 인수인계 받아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천국이 잠복되어 들어가 버립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말한 대로, 시냇가 물 밑에 있는 다슬기처럼. 냇물은 요란한데 다슬기는 가만히 웅크리고 있지요. 밑에 달라붙어 있어요. 사금 채취하듯이 다슬기를 채취하면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 이야기를 또 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그야말로 어떤 말을 해도 먹히지가 않는 거예요.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서러워하지 말고, 이걸 불편해하거나 짜증내지 마시고, 이게 주의 일이 지금 너무 잘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열 두 제자가 복음 안 믿는다고 해서 생떼부렸습니까? “뭐 이런 게 있어?” 하고 권력으로 대들었습니까? 그냥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하지요. 여러분 가족 중 누구에게 “복음 믿어라. 교회 가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복음까지 알아라.” 이렇게 한다면 강렬한 방어기제가 작용하는 것처럼 방어하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너무 기대를 하지 마세요. 21절에 나옵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는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고요. 여기서 권능이 모자란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질의 권능이 작용한다는 말입니까? 멸망 받아야 된다면 멸망도록 권능을 행사하는 그것도 주의 일입니다.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25절에 나옵니다. 지금 예수님은 혼자서 좋아서 웃고 계셔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늘나라 어린이집 할 일 있어요? 여기서 어린아이라 하는 것은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말하겠지요.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이 어둡고, 패역하고, 비 복음적이고, 반 복음적일 때 휘파람불고 찬양하라는 그 말입니다. “세상 꼬라지 잘 돌아간다!” 놀리는 식으로 그러지 마시고요 진짜 잘 돌아가야 돼요. 복음을 열 명에게 전했는데 한 명도 안 받아들인다? 명절에 친척들에게 복음 전하면 다 느끼는 거잖아요. 집안식구가 원수라는 말이 빈말이 아닙니다.
“아재요, 옛날에 많이 도와줬지요? 애들 공납금도 대주고. 그런데 제 말좀 들어보소. 십자가…….” 하면 “아이고, 됫니더, 됫니더.” 이렇게 하지요. 안동말씨로. “그만 됫니더.” 또 “동생아 고만 해래이.” “형님, 그게 아니고.” “고마 니나 잘 믿으래이.” 하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쾌재를 불러야 된다니까요. 이게 내 소원대로 안 되듯이 나도 저 사람같이 내 뜻대로 내가 구원받을 수 없는 입장인데 거기에 누가 개입하는가?
숨겨진 원인제공자,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 그게 마태복음 11장이라면 11장 26절의 말씀이 내 안에 장착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걸어 다니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내 속에 아버지의 소원덩어리가 들어 있다. 이게 바로 걸어다니는 마태복음 11장 후반 이야기입니다. 이래도 실망할 필요가 없고, 저래도 실망할 필요가 없고, 이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게 29절에 나오지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결국 쉽다는 말조차도 원인을 주님이 제공해야 돼요. 쉽게 하려고 내가 나한테 원인제공하면 안되고 이 자체가 주님의 결과로서 받아 들여야 됩니다.
네가 주님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먼저 너를 생각하고 다루고 있기 때문에 네가 네 앞길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마라. 네 일은 쏙 빼고 네가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일이 된다는 것을 네가 믿으라는 그 말입니다. 네가 연필을 깎든지 잠을 자든지, 잠자는 것도 주의 일로, 주의 일로, 주의 일로, 항상 모든 일어나는 일이 주의 일로 살아왔다는 것을 믿으시고 점심식사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