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16년 여름수련회 교재

아빠와 함께 2016. 6. 22. 15:04

2016년 여름 수련회 교재(마태복음 강해)

-한없이 작은 권력-

Ⅰ. 서론

1. 하찮은 감응체

거미는 눈∙코∙입과 같은 감각 기관이 없어서 보거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뇌 기관이 없어서 지각이나 기억 기능도 없다. 그저 거미줄 꼭대기에 앉아 파장을 타고 몸에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진동을 느끼자마자 정확히 먹이에게 달려들어 거미줄을 감아댄다. 모든 권리가 박탈당한 채.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곤충채집통 안에서 바짝 마른 곤충들이 핀으로 고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권력의 표본 안에서 악은 자연 질서의 행세를 하게 된다. 묶여 있으면서 자율성을 만끽하고 있다는 환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곤충처럼 인간은 자기 터전을 마련한다. 큰 곤충이다. 내부를 파서 밖을 만들고 확장시킨 공간이기에 항상 새로 형성된 막장에 둘러싸여 있다. 스스로 갇히게 하는 환경 조성이다. 폐쇄적이다. 외부에 상주하는 누군가에 의해 폭파되지 않는 한 그 밀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환상은 이 안에서 꾸며진다. 장식에 동원되는 자원은 신과 자연과 인간이다. 이게 자신을 질식시키는 화생방 훈련장이 될 줄이야! 자기로 인한 폭력을 의식하고 시달린다.

자기를 격려하고 배려하고 자신의 권리를 외쳐보지만 막장 안에서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자기를 위한 독서와 창작, 건강 유지, 자기 증진은 맹목적 자기 단련에 불과하다. 여기에 진정한 속죄, 죄, 회개는 성립되지 아니한다. 자신에 대한 관리와 지침을 매일 같이 자기에게 내린다.

인간은 가시적 외부와 투쟁한다. 투쟁하므로 비로소 주체가 되고 동시에 타인에게는 남이 된다. 타인에게 괜찮은 타인이 되려는 심리가 온 인격에 퍼진다. 이로써 전체는 타인의 세계다. 본인은 기계 부품이나 원료처럼 사물로 전락한다. 전체 기계 밑으로 인간은 굴복 당한다.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곱게 남겨둔 정신과 육체마저 불구가 된다. 자기 이상을 지탱해줄 마지막 터마저 위협받기 때문이다. 불쾌감이 고통으로 바뀐다. 눈앞에서 숱한 기계 부속품이 교체되고 전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다. 남은 것은 전체 기계의 통일성이다.

동일성 속에서 개인은 고독하고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어디든 복종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개인주의 정신은 고독을 낳고, 전체주의 정신은 복종을 요구한다. 투명한 무늬 같은 동일성 세계. 이런 곳에서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의 그림마저 그저 밋밋하다. 영원한 동일성 세계가 구원의 세계라면 차라리 세속의 지루한 연속일 뿐이다.

내가 만든 이 재미없는 자유마저 던져버릴 바깥 장소는 없을까? 막장 안에서의 세계는 이상하다. 내가 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무엇에 쫓긴다.

2. 공포 속의 체제

가면은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곳에 편재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환경에 적응하려면 의태(擬態) 동작이 필수적이다. 가면을 쓰고 기존의 동질성 속으로 스며든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가면들이 서로 비슷한 이유는 누구나 동일한 공포를 느낀다는데 있다. 동일한 응시 아래서 늘 감시당하면서 산다는 느낌은 누구나 체험하는 바가 되고 이것이 동일한 심리구조를 낳는다. 생이 획일적이고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벌써 보이지 않는 시선에 의해서 조종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조작 가능하고 복종시킬 수 있고, 유능하고 다시 조립해서 완성할 수 있는 순종적인 기계로서의 신체, 명석하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 유용한 신체, 물질적인 신체가 부상하는 것이다.

금지를 선언하고 침범을 단죄하는 권력은 이미 없다. 그것은 미세하게 신체에 미치는 한없이 작은 원력이다. 미세한 신체에 반복해서 작용해, 이를 통해 순종적인 신체를 만들려는 권력이다. 이것이 바로 규율이다.

규율은 권력의 물리학이고 미세한 것에 대한 조작술이다. 권력은 미세한 곳에도 깃든다. 권력은 이후 한결같이 사소한 부분, 미세한 부분으로 향한다. 아무리 사소한 세부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상’이 등장한다.

감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절차는 다음과 같다. 배분의 기술→ 활동의 통제→ 발생 과정의 조직화→ 힘의 합성.

규율적인 권력 체제에서 처벌 기법은 속죄를 추구하지 않는다. 억압 같이 않으면서도 자체적으로 억압을 요청하게 만든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개별적인 행동과 성적, 품행을 수량화한 수치를 시시각각으로 계상하고 기입해, 개개인은 분포도 안에서 하나의 고유한 위치를 점하게 한다. 이는 항상 사후(事後)적으로 도출 되는 ‘평균’과의 차이를 통해, 거리를 통해, 간격을 통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분포도는 하나의 가치를 제시하기 위해 기능하며 항상 사람들에게 본인들이 실현해야 할 척도를 부여한다.

규율은 상시적으로 개인마다 점수를 매겨 단계별로 분류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등질(等質化)화시킨다. 결국에는 법으로 느껴지지 않게 한다. 이는 ‘규격’이다. 서랍장 같은 특정 규격 속에 개인들이 들어앉아 살게 만든다. 주위에 비슷한 규격의 동료들을 분포시킨다.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갖게 하는 유죄와 무죄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다. 원천적으로 본인의 자리에 합당한 존재임을 스스로 즐거워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명령이 아니라 기꺼이 동조를 유도한다.

평화는 불안 위에 세워지고, 전쟁은 공포에서 힘을 얻는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 권력 효과이며 그 해소책은 한 사람을 의존케 하는 것이다. 결국 국가는 한 인격처럼 등장한다. 만약 단일 판단에 의한 지도가 아니라 다수에게 맡겨지면 각자의 판단의 욕구가 부각되면서 서로 방해하거나 반대함으로 인해 전체의 힘을 감소시킨다.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 다수를 지도하는 단일판단 즉 하나의 인격은 항구적이어야 한다.

결국 국가의 성립은 모든 개인의 권력과 힘을 하나의 인물 또는 한 집단의 인간에게 부여해서 모두의 의사를 단일 의사로 만드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인격을 책임지는 하나의 인물을 원하고 그 인물은 집단 내의 모든 이를 자신과 관련시켜 지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백성은 홀로 사는 존재이지만 왕과 연계해서 인격을 사회적 인격으로 소지하게 된다. 각 가정마다 다음과 같은 훈계 소리가 들린다. “나랏님은 절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애굽은 이렇게 현실 속에서 재등장한다.

국가는 모든 자의성과 우상성을 넘어서는 객관적 정신이므로 개인은 오직 국가의 일원일 때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국가 안에서 자유는 특수 이익이나 공동 이익을 넘어선 통일로서 존재한다. 군주권 밑에서 각 권력이 개체적 통일로 총괄된다.

3. 어설픈 목격담

그런데 누군가 이 국가를 뚫어지게 보고 계시는 분이 있다. 사람들도 본성적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의 눈은 응시의 눈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응시를 자애로움으로 해석하는 것은 응시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문명의 방어이며 억지다. 응시란 인간들이 시도하는 ‘신에게 발견되기’를 거부한다. 하나님 쪽에서 알아서 만남을 시도하신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의 내부 심리가 공포스럽게 반응한다. 준비되지 않는 조우가 되기 때문이다. 응시란 결핍을 유발시킨다.

주체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외관의 불완전성을 일시로 고정시켜주는 환영(幻影)적 질서뿐이다. 그렇게 외관으로 주어지는 환영적 질서를 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눈이며 눈의 봄(seeing)이다. 눈의 봄은 주체의 응시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좌초하는 지점, 그것의 불가능성의 지점에서 작동하는 대체물이다.

이미지가 도달한 현실의 리얼리티(실재)는 그것을 관찰하는 주체의 자아가 포함된 현실의 리얼리티를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이미지들의 배열 앞에서 그것이 자연스러우며 사실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해당 이미지들의 배열이 자아의 세계 이해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계의 구조와 유사한 질서의 이미지들을 자꾸만 만들어내게 된다. 나로 인해 완전한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완전한 자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응시를 당한다는 것으로 인해 우리 인간이 속한 세계의 질서를 응시의 욕망이 언제나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응시의 공포는 시작된다. 그동안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세계-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즉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응시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응시가 쏟아지는 지점은 결여가 공백으로 나타나는 자리이다. 인간 세계의 질서 내부에 생기는 균열의 지점, 지식이나 진리의 체계에 난 구멍이 곧 하나님의 응시로 생긴 지점이 된다. 그것은 결국 세계의 표면을 감싸며 보호하는 질서화 된 이미지들이 찢어지며 붕괴는 그 지점의 빈자리로부터 떠오르는 공포의 시선이다.

응시는 주체-타자 관계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타자 속의 주체, 주체 속의 타자이다. 그것은 주관성이 보지 못하는 주체의 공백이지만 타자 속에 기입되어 타자를 분열시키는 주체적 잉여물이다. 주체나 타자나 모두 전체로 존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응시이다. 그것은 주체의 무력함과 타자의 분열을 동시에 드러낸다.

응시의 욕망이 우리가 속한 세계의 질서를 언제나 넘어선다는 사실로부터 응시의 공포는 시작된다.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세계-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즉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는 한 응시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게 되는 것이다.

응시에 대한 대응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무당들이 행하는 굿판을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굿은 세계의 심연(공백)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초월적인 힘들을 인간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심연 속에서 발산되는 초월자의 응시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욕망을 달래기 위해 인간이 마련할 수 있는 제물들(이미지들)을 준비하는 것이 바로 굿이라는 행위의 본질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무당굿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이미지들의 향연은 귀신(타자他者)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그의 응시의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모호한 귀신의 욕망을 대화 가능한 인간의 목소리로 환원시키는 무당의 행위다. 이게 종교다.

4. 헛되지 않는 공허

예수님의 생애를 인간이 추적하다보면, 결국 인간 본래의 자리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 공허가 기다린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공허를 삶의 배경으로 하여 줄곧 동행해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을 본다는 것은 평생 겪어온 이미지들은 그것이 아무리 확고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주체의 판타즘(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들통 나는 순간을 맞이했다는 말이다. 그 어떠한 지식으로도 완전한 체계를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존재할 수 없고 그 체계 내에는 어딘가에 균열이, 즉 구멍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진리란 바로 이와 같은 지식의 체계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구멍(또는 구멍을 내는 효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진리성이 아무리 허망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허망함 없이는 미리 도달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진리가 허망한 지식을 늘 현실세계로 소환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해서 바닥까지 갉아먹고 소멸하고 싶어도 진리가 이 작업을 성사시키지 못하도록 막는다. 즉 인간은 끝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속에 터를 잡고 허망해야만 하는 존재라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노예다. 자기를 지배하는 군주를 찾지 못하고 거리에 나선다. 다른 자율체를 거기서 만난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면서 묻는다. “왜 당신의 자율과 나의 자율이 서로 다르지요?” 아무도 답변하지 못한다. 인간은 꾸준히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주인을 잃었다.

이 거리에 예수님도 나서신다. 그리고 자신도 인간이면서 자신을 대하는 이들로부터 인간성을 탈취당한다. 인간은 정확한 때와 정확한 공간을 지정해주지 아니하면 관계를 맺지 못한다. 시간은 정확성을 상징한다. 적어도 지구 안이라면 어디에서나 1분의 길이는 같고,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한다. 말 그대로 규격화된 규칙성이 지배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간을 ‘자신의 때’로 바꾸신다. 시작도 끝도 없는 중얼거림.

시간이 녹아내린다. 자연의 나무 위든, 인공적 사물 위든 흘러내리는 시간은 본래의 규격화된 틀을 유지하지 못한다. 시간과 공간에 기초한 현실이나 일관된 논리도 찾아볼 수 없다. 태곳적 모양을 간직한 듯한 생명체 위에 널브러진 세계도 여지없이 흘러내린다. 인류가 생긴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본디 이 세상에는 정확한 시간의 자리가 없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 14:35)

허약한 실존 구조, 어디를 건드려야 내가 무너지는가?

Ⅱ. 본론

1. 마태복음 줄거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발전과정과 예수님만이 꼭 메시야 됨과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족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언약의 변천이 누구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느냐를 동시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언약은 그 최종 완성된 모습을 보이기까지 기존의 관념들을 수정하면서 진행된 것입니다.

그 수정된 결과로 세 부류의 언약의 발전이 보이는데 첫째는 아브라함에서 다윗 까지요, 두 번째는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에, 세 번 째는 바벨론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입니다. 이 세 가지로 나눠지는 시대로 볼 때 각각의 시대에 있어 언약의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1:17)

첫째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는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 신앙전수 또는 언약 전수가 가능해졌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는 시형제 결혼법과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시대인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의 언약 전수는 현 이스라엘 왕 가문을 부정하는 독특한 다윗언약의 심판적 기능에 의해 언약이 전수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밧세바’라 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아(다른 이방여자는 여자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다) 다윗의 신하 우리아의 신앙 수준과 맥을 같이 하지 못함으로 인해 솔로몬 이하 왕들은 언약이 이방나라 바벨론으로 이주해야 하는 창피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번째 시기에 있어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는 사실은 언약은 가문이 언약 상대자로서 미흡할 때는 비가문 중심으로 전환되어 그리스도와 연결을 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바벨론에서 그리스도까지는 앞에 있는 점들을 성취하고 극복한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 가문 계통의 정통성도 회복할 뿐더러 신앙적인 미흡함도 제거된 계통을 밟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다윗 때까지 적용된 시형제 혼인제도에 따라 명목상의 족보와 실질상의 족보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 이중성을 노출하기 시작합니다. (1:28)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마리아는 그가 낳은 자식이 명목상은(이름으로는) 요셉가문의 자식이 되지만 실질상은 성령으로 나신 분이라 하늘에 속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아담계통과 무관한 분입니다(마치 룻기 4:5에서 룻이 낳은 자식이 오벳이 죽은 자 즉 엘리멜렉의 기업을 잇는다 하지만 실질상은 보아스의 아들인 것처럼 룻기 4:21). 여기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죽은 자의 족보, 땅의 족보를 하늘의 족보와 연결 시켜주시는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계통 중 언약 안에 있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고 죽음에서 건지려고 오신 것입니다(1:21). 이 사실을 안 요셉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서 동침을 하지 않았습니다(1:25). 그러면 누가 자기 백성이 되고 언약의 자녀들입니까? 그것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과 너의 하나님으로 구분 짓기 위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1:23).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에 관해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며 어떠한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자기 백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위 옛언약의 상대자인 이스라엘을 상대로 하여 자기 백성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2장에 가면 동방박사가 등장합니다. 이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에 들어감으로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의 존재와 현 이스라엘과의 사이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호세아 11:1에 나타난 예언이 어떻게 예수님으로 해석되는가를 보면 더욱 분명해 지는데,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고 지적하면서 현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간주하고 예수님 있는 그 자리를 이스라엘로 顚倒(전도)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2:17-18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예언도 예수님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본 두 살 아래의 어린 아이를 참이스라엘로 보고 있습니다(라헬이 그 자식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가나안 땅에 오시지만 스스로 자신을 나사렛 사람으로 칭함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마 2:23). 그곳은 이방 지역이며 언약 밖의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4:15-16/이사야 9:1-2).

이상과 같은 모든 행위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결국 추구하시는 바는 제 2의 출애굽으로 모세언약 체계 안에서 새로운 언약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타파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등장해서 그 일을 준비합니다(3:1-2). 특히 도끼가 나무뿌리 위에 놓였다는 것과 타작마당이라는 표현은 역사의 종결이 임박했음을 말합니다. 이는 옛언약의 무너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기존의 언약에 따른 적절한 심판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동시에 율법의 구원에 대한 적극성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성령의 사역 목적은 예수님을 통해 모든 의를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 출발이 바로 4장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마귀의 시험입니다(4:1).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면, 여자의 후손에 의한 뱀의 후손의 정복이 달성되는 그 순간이 바로 모든 의가 달성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옛언약의 출발지점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이 심판에서 모면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례를 달리 이해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자들이 심판에서 면제되는 이유를 만들어 주기 위한 뛰어듦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즉 언약의 상대자로서 이스라엘이 했어야 될 일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의로웠다는 판정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고소하는 사탄의 판정은 부당함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에 대한 정죄는 힘으로 정복하는 정죄선언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심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들이 예수님의 백성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사탄이 정죄당할 충분한 이유가 됨을 밝혀줌으로서 사탄을 인간 세상에서 축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탄은 잘못 되었는가?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사탄에게 시험 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정죄할 근거를 성령께서 마련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정복함으로 율법이 요구한 온전한 심판의 완성을 내다보려고 합니다.

그 심판은 완전한 자(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비난이 부당함을 보임으로서 사탄을 정죄할 이유가 율법적으로 정당해지는 것입니다. 시험 결과 사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제시하는 것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하나님 말씀으로 공박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로서가 아니라 이미 된 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면서 결국 이 신분은 곧 자기 백성의 신분이기도 합니다. 천국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이루어졌고, 남은 것은 자기 백성을 그 분이 선택하는 일입니다(4:18-22). 이것은 영원한 출애굽이라고 볼 수 있는데 모세의 역할은 예수님이 하십니다(5:1).

예수님은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직접 말씀을 내리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모세율법 같이 조문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예수님의 오심을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심정을 헤아리는 자가 바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 자만이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줄 수 있습니다.

사실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을 아는데 있습니다(5:17/7:17). 예수님의 백성은 이와 같이 예수님 마음에 동참되기 위해 초청 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만이 옛언약을 완성한 의미에서의 새언약에 속한 사람들입니다(8:11-12). 그 뒤로 계속 예수님을 알도록 훈련을 시키고 또 능력도 주어서 그들로 예수님의 일에 참여케 합니다(9장-12장). 바로 이런 자가 예수님의 모친이며 형제며 누이들입니다. (12:49-50)

13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독특한 일 진행에 대하여 비유로 나타냅니다. 그 비유는 일단 비 언약 계통에게 못 알아먹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3:15). 각종 비유들의 내용은 이미 천국은 왔고 천국의 활동은 조금도 인간의 도움이나 노력이 요구됨이 없이 순전히 예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나타나는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귀중성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오직 예수님이 알려주는 자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초월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세상 끝)이란 현재 이런 형식으로 나타난 천국에 대하여 수용하지 못하는 자들을 가려내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13:47-50).

여기서 천국과 새 언약과의 관계는 천국이 이 땅에 임할 여지를 새 언약이라는 근거에 의해 마련한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옛 언약을 공략하면서 임합니다. 천국은 어떤 방해나 장애도 극복하고 이 땅에 임할 수 있다는 점을 14장, 15장에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천국의 표적은 십자가 사건으로 집약됩니다(16:4). 왜냐하면 그 십자가 사건이 바로 옛 언약 체계에 대한 최종적 부정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십자가 사건에서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됨이 나타납니다(16:16).

여기서 예수님은 교회의 나타남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데 교회란 인자됨을 십자가 상에서 이해하는 자의 모임입니다. 만약 달리 이해한다면 (예를 들면 신기한 이적이나 말씀 같은 것) 그것은 바로 사탄입니다(16:23). 인자의 고난에 대해 베드로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자 그 자체가 정복자의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천하를 정복하러 오신 분이 정복당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요(16:23) 교회활동의 중심 내용입니다(16:19).

인자가 이 땅에서 영광받기 전에 하실 일은 고난 받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자에게 반역을 시도한 세력에 대한 영원한 정복에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인자로서의 영광이 공개되는 때입니다. 그 영광을 옛 언약 아래 있던 자들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17:3). 새 언약의 사람들과 옛 언약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변화산상입니다. 그 중심은 예수님이고 그 성취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의 사명을 다할 때 이루어집니다.

아들의 사명은 구약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지 못한 장자의 사명을 예수님이 자책으로 여겨 그 책임에 대한 온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옛 언약 파기에 따른 책임추궁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마땅히 치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옛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새 언약이 실효성을 줄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 됩니다(17:12).

인자로서의 고난은 아들의(언약 상대자의) 권리를 회복시켜 언약이 없고 아들이 없는 역사를 아들로서의 묵시세계로 뒤덮어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결국 악에 포로가 되어 있는 역사적 상황에서(17:14-21) 무상의 은전을 제공하여(17:26-27/ 18:23-27/ 19:14-15/ 18:1-4/ 20:1-16/ 21:28-32/ 22:1-10/ 22:34-40) 그것을 제공받은 자에 대한 법적 구금이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악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고 언약의 참된 아들(예수님)을 고난과 죽음으로 처리한 악의 세력에 대하여는 그들의 잘못된 법적용과 잘못된 법해석으로 나온 응분의 대가를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는(23:27-36) 증거가 확보되기 위한 고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역사를 긍정하러 오시지는 아니하셨습니다. (24:1-3) 예수님은 직접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간에 어떤 화해점도 없음을 확인하셨습니다. 유일한 언약이라는 접촉점 마저 배후세력의 조종으로 인해 수행능력이 상실됨이 옛 언약을 대표하는 예수님의 수난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깨어지고 질서는 파괴됩니다. 그 가운데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개개인의 결단과 선택을 요구합니다(24:14/24:23-26). 여기서 마태복음은 복음이란 수난과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24:13).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인자가 최후의 영광된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복음의 영광이 수난 속에 감추어져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24:30-31). 꼭 그릴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의 묵시성이 눈에 보이는 역사 속의 것으로 오인 받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25:1-14의 지혜로운 처녀 비유나 25:14-30의 달란트 비유나 25:31-46까지의 마지막 양과 염소 분류의 비유 같은 것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유월절에 맞추어 죽음을 준비하십니다(26:1-2). 이것은 분명 옛 모세언약과 대비시켜 새 언약의 의미를 노출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이 모세언약의 기조사상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은 새 언약의 기조를 이루는 사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 즉 역사로부터의 배척을 발견하지 못하는 새 언약 해석은 잘못된 해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마저 이해 못하는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마지막 재판에서 자신의 묵시성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함으로 예수님의 처형의 이유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26:64).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부르짖음은 오직 엘리야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무리들에 대한 희망마저 소용없음을 보여줍니다(27:47-49).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처리는 정치권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 정치화된 종교와 종교화된 정치가 어디에서 그 일치점이 발견되느냐 하면 역사 수호와 역사 긍정이라는 점에서 타협의 악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망시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성도가 무덤에서 일어나고 지진이 발생한 것은 옛 언약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에게 찾아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이 천사와 관련지어 설명된다는 것도(28:2)

이미 묵시의 세계가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충격과 흥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의심과 기쁨이 한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모든 권세는 이제 내가 가졌다고! (28:18)

Ⅲ. 결 론

상실을 지불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껏 자신의 가면만 만지작거리면 손질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인간은 늘 마귀로부터 기만당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 그곳은 예수님마저 하나님에게 버려진 지옥이며 산 자로서는 예수님만이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성령께서는 그 지옥의 힘을 지면에서 퍼 올리게 된다. 성령 받은 자는 세상의 힘보다 더 무서운 힘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이다. 이들의 눈에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손대는 식으로 사는 것이 곧 뱀의 능력을 뒤집어 쓴 채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 발견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개인적인 신체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 체제’로 계시 범위를 확장시키는 작업에 성령 받은 자들이 동원된다. 참으로 지극히 작은 권력으로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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