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16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9강-시간 밖으로

아빠와 함께 2016. 2. 2. 07:44
2016-01-16 12:12:03조회 : 135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9강) 이름 : 서경수 (IP:175.215.227.136)

2016 겨울수련회 제 9강(시간 밖으로)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은 ‘시간 밖으로’입니다. 시간 밖으로 가면 이미 죽은 자인데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다시 시간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건 옛날 나를 죽였던 그 세계를 관람하고 유람합니다. 그리고 내가 왜 죽어야 마땅한가를 확인하는 가운데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었는가를 날마다 확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을 보는 성도의 입장입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 있는 자가 보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이 모든 내용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선지자가 남겼던 모든 내용들이 성령에 의해 ‘잡곡 강정’처럼 뭉쳐져 있어요. 그리고 그 둘 사이는 연결이 안 됩니다. 한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0장 7-8절을 보면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38장을 보면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민족인데, 이 민족을 반드시 쳐부수는 일을 마무리 짓고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5-16절에 “네가 네 고토 극한 북방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오늘날 단군의 후손인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이스라엘과 곡의 관계인데, 이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역사적 사실을 마지막 이 세상 끝날 때 그대로 실어버립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하면, 그 때 이스라엘과 관련된 곡과 마곡이고, 이스라엘을 해코지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곡과 마곡을 심판함으로 세상이 끝장난다고 했던 것입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곡과 마곡은 뭔가? 언약과 무관한 모든 나라가 곡과 마곡입니다. 제가 첫 강의에서 길게 연대기를 나열했는데 그것을 ‘큰 연대기’라고 한다면, 현재 우리는 나의 가족과 친구가 포함된 ‘작은 연대기’를 만들어요. 내가 결혼한 것은 언제이며, 집을 살 때는 언제고,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은 언제 했고-- 이것은 나의 작은 연대기인데, 이것은 무엇을 모방했는가 하면 보다 큰 연대기를 모방했고, 이 연대기는 보다 큰 연대기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큰 연대기를 길게 나열한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는 이런 큰 연대기에서 영향을 받고 압력을 받으면서 형성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언약 없는 연대기 속에 있는 존재이며, 이것이 우리는 전부입니다. 이것을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 집에 아들이 있다면, 이 아이가 작은 연대기에서는 우리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해야 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가문을 빛내면 내가 속한 민족을 빛내게 되고, 더 나아가 연류에 공헌하는 인물이 되겠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주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마곡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네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 이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첫 시간에 연대기를 장황하게 나열한 것입니다. 이문세 3집에 나오는 ‘광화문 연가’까지 거론한 것은 그 중에서도 자기 취향에 맞는 작은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4인조 그룹 ‘이글’의 ‘호텔 켈리포니아’를 거론한 것도 이쪽에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 작은 연대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왜 그룹사운드를 결성해서 노래를 부릅니까? 큰 주체에서 보면 그들보다 앞선 가수들이 연기를 얻고 부와 명예를 가진 것을 보았기에 그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또 그들의 노래가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기에 닮고 싶었을 것이고, 이런 욕망들이 얽혀 주체 형성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는 자녀를 교육시키고, 우리도 이런 관계성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보면 마곡이지요.

마곡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지요.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개무시하는 마귀가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우리는 이방인이 되었는데 ‘이방인’이라는 용어도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면 우리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너와 내가 똑같은 인간입니다. 똑같은 인간에서 ‘내가 이방인이구나.’라는 인식이 생기는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인공의 자리에 있는 나를 왜 갑자기 변두리로 몰아냅니까?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인류의 역사를 보세요. 몽고 사람은 그들대로, 필리핀 사람들은 그들대로, 나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각각 주체의 자존심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조국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살잖아요. 그런데 그 배후에 마귀가 있다고 하면 대단히 불쾌하지요. 이건 자존심 상하는 문제입니다. 자존심 상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끊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끊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하고 강의하는 것은 ‘흉내 내기는 그만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어설프게 기독교 신자 흉내 내는 것은 이제 끝냅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주체인 내가 조국과 민족과 내 가족을 위해서 사는데 힘이 좀 모자라서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체는 그대로 있고 주체의 욕망을 추가하기 위해서 종교적 몸부림을 치는 일을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어린양의 피로 용서 받는 복음을 훼방하는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간단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무시하든지 아니면 그 말씀을 펼쳐 그 말씀에 따른 새로운 주체가 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서두에 ‘요한계시록은 없다. 남은 것은 역사뿐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종교는 내 주체가 미흡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신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언약,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마지막에 있습니다. 마지막 성경 중 마지막 22장에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생명수를 준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계시록 이전에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첫째 부활(영생)을 얻었고, 영생을 얻은 입장에서 옛날 내가 죽어야 될 짓들을 했던 역사의 세계에 다시 들어오게 해서 ‘아, 내가 시간 밖에 있는 유령 같은 존재구나.’를 알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고, 17절에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께 속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모든 이야기는 이미 다 이루어진 이야기입니다. 시간 밖에 나가 있는 사람에게는 다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느긋하게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키는 자’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데 ‘지키게 된 자’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 이건 우리의 과거 이야기입니다.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기에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시간 밖에서 영생을 얻게 하시고 ‘네가 옛날 어떤 자리에서 구원 되었는가를 요한계시록을 통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나는 복 받을 짓을 한 적이 없구나. 내 배후에 사단이 있었구나.’를 알게 되지요.

에스겔 37장 12-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무덤에 들어간 사람까지 끄집어내는 주님의 능력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됩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무덤을 열고 나올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없어요. 없으니까 이스라엘 사람을 새롭게 생산해 냅니다. 누가? 먼저 무덤을 열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에스겔이 예언한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해서 자기와 함께 무덤을 열고 나올 사람을 모집했는데 그 중에 이방인도 합류를 시켰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목 베인 영혼들은 첫째 부활, 무덤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해서. 이 전체를 이야기하면, 사르트르의 표현처럼 우리는 던져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원해서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면서 이미 조성된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이야기하기 전에 창세기 1장 3절에 이미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은 빛과 의논해서 ‘빛을 만들까, 말까?’ 이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있게 하셨습니다. 스바냐 1장 3장을 보면 “내가 사람과 짐승을 멸절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고, 모든 피조물을 지으셨는데, 스바냐에서는 사람과 짐승, 새, 물고기 등을 다 진멸한다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자신이 만든 것을 왜 진멸합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편성 하겠다는 것입니다. 구조조정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께 내 사정을 열거하면서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나는 왜 건강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 집은 가난합니까?” 이런 것을 따지려거든 스바냐 1장 3절을 보면서 따지세요. 가난하고 병든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예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내가 하는 일이 실패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재편성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리스도로 재편성하면 했지 왜 내 일은 안 되게 합니까?” “난 너를 죽일 거야?” “죽으면 안 되는데?” “나와 함께 죽고 나와 함께 다시 살아서 이 세상에 다시 집어넣을 거야.” “다시 세상에 집어넣는 이유는 뭡니까?” “나의 증인이 되어라.” 이것이 주님의 재편성 작업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죽었다가 산 자가 죽은 자와 세상에 섞여서 죽은 척하며 살아가는 이 상황,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풍경입니다. 돌려보는 재미입니다. ‘그래, 옛날 내가 이러했었지.’ 그저 내 생존, 내 주체가 나의 작은 연대기를 사수하고 지키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 헌신하자.’ 또는 ‘인류의 발전을 위해 연구 개발하자.’ 기껏 이런 것입니다.

스바냐는 선지서입니다. 이것이 그대로 요한계시록에 담깁니다. 세상이 왜 진멸되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재편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로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작업이 필요합니까? 행함을 주장했던 자들은 사단과 함께 유황불에 던져집니다. 유황불도 이사야 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야기한 예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진행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재편성하면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진멸하겠다고 하셨기에 반드시 진멸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 자신이 진멸하겠다는데 누가 토를 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두 권의 책이 나오는데, 행위책과 생명책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행위로 버티겠다고 하는 자는 유황불에 들어갑니다. 이들이 행위책에 이름이 있는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편성하기 위해 자기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 제거 대상이 됩니다. 그럼 생명책은 뭡니까?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자기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영원히 어린양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는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만, 안 믿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좋아하면 안 되는데’ 하는 약간의 미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구절에 근거해서 제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살인하지 않으면 천국 갑니까? 행음 안 하면 천국 갑니까? 우상 숭배 안 하면 천국 갑니까? 거짓말 안 하면 천국 갑니까?” 제가 여러분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 역사적 이스라엘 입장에서 그 때 언약과 관련된 사항을 가지고 이야기한 거예요.

529년에 로마 법전이 만들어집니다. 그 로마 법전이 오늘날 모든 성문법의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추가하겠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 안 하면 지옥 갑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당시의 율법인 살인, 우상 숭배의 완성은 ‘살인 안 했다. 우상 숭배 안했다.’가 아니라 ‘주여, 제가 상한 심령입니다.’라는 것이 다윗 언약에서 보여준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아니에요. ‘내 이웃을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나는 이 말씀을 도저히 못 지킵니다. 주여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내 대신 누가 희생했기 때문에 상한 심령도 하늘나라 가도록 다윗 왕을 통해서 언약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 대신 돌아가신 분은 다윗의 자손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 맞지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언약의 완성은 점을 안 치는 것이 아니고, 점을 세 번 치다가 한 번으로 줄이는 것도 아니고, 술 끊고 담배 끊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 끊은 나를 끊어야 됩니다. 왜냐? 담배를 끊게 되면 담배를 끊었다는 것이 나의 의가 됩니다. 이런 나를 끊어야 됩니다.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이 땅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은 ‘시간 밖으로’입니다. 시간 밖에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데 마치 덜 죽은 것처럼.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죽은 자에게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이미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산 자로 판정이 나면서 첫째 부활에 참여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느긋합니다. 수시로 먼저 합격했기에 정시에 원서 넣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친구들과는 전혀 달라요. 합격자가 이 세상을 보는 겁니다. “층간 소음 유발자는 지옥 갑니까?” 시대가 바뀌면 점점 더 죄 항목이 추가돼요. 우상 숭배 안 해도 층간 소음 유발하면 지옥 갑니다. 우상 숭배 안 하고, 층간 소음 안 일으켜도 지옥 갑니다. 왜냐?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편성하는데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자기 행위로 의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행위책의 법칙에 의해서 지옥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성경 구절을 들어 반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이 대목과 상충되지 않습니까?

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합니까? 죽은 자가 보여줄 수 있는 행함은 ‘죽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이 본문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호세아 14장 9절에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의인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생산된 의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말미암아 생산된 의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마치 저주 받은 자처럼 보입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즐거워하는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8).”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미친 사람이죠.

이 사회의 부적응자고, 부적격자고, 미친 사람이라고 평가 받았던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그 미친 자 중심으로 재편성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를 나의 주로 믿는 사람은 미친 사람 아닙니까? 볼 게 뭐 있다고. 그리고 늘 ‘같이 죽자’고 하시는 분에게 무슨 기도를 해요?

“주여, 건강을 주시옵소서.” “같이 죽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성경에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구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구한 것은 그게 아닌데 왜 성령을 주십니까? 주님은 같이 죽을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구하지 않아요. 내 자존심을 높이고, 내 주체가 확장되는 것, 내 자식 공부 잘하고, 내 사업 번창하고, 가정이 화목하고 이런 것을 구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것은 “너는 이미 죽은 자야.”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느끼는 존재의 가벼움, 이 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다이어트 할 필요 없어요. 저울 위에 올라가면 바늘이 안 움직여요. 몸무게가 0입니다. ‘내가 유령인가?’ 저울이 말을 한다면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은, 주님께서 집어넣은 도를 행함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 14장 9절은 뭐냐?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는데(묵시 세계에서 의인은 생산되는 것이죠)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걸림돌이죠.

걸림돌 없는 설교는 절간의 염불과 같습니다. 걸림돌은 넘어지게 하는 거예요. 누가 넘어집니까? 그동안 나를 사수하려고 했던 내 주체가 자빠져야 돼요. 마치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지고 손, 발이 부서지듯이.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내 주체의 자랑거리가 넘어져 박살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 밖에 있는 존재가 시간 안으로 들어올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십자가를 내세우는가 하면, 3-5절에 보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했어요.

행위의 주인공은 살아 있는 자신의 주체가 될 것이고, 그런 주체가 행위 한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을 것이고, 그 주체를 거룩한 곳으로 강화시킬 목적으로 법을 동원합니다. 내가 복을 따내기 위해서 계속 법을 지키려고 나서는데 이것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더 살고 싶다.”는 것이죠.

이런 자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아주 초를 치는 말을 쏟아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율법 지키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만 유독 저주에서 빠지나갈 생각 마라.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3절에 나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저주 받으라고 던져진 존재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저주 받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복음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 난 사람” 이 가사를 바꿔야 합니다. “당신은 저주 받기 위해 태어 난 사람”으로. 이런 인간을 22절에서는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주체가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현재 자기가 속해있는 익히 아는 시간의 벽을 힘들게 밀어내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과학과 철학, 예술은 뭔가? ‘더 살고 싶다. 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것이 저주인 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이 저주의 시간을 더 길게 연장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아버지, 이제 호스 뽑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둬라. 더 살고 싶다. 내 통장에 돈 남아 있잖아.” “아버지, 저주를 계속 받으시렵니까?” “나는 이것밖에 몰라. 내 주체는 이것이 전부야!”

율법에서 못 벗어나는데, 이것을 확장시켜 놓은 것이 예수님 중심의 재편성의 구조적 질서입니다. 그럼 대책이 뭔가? 갈라디아서 4장 8-1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라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지키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가 지켜야 내가 천국 가지요. 죽 쒀서 개에게 주려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열심히 해서 복을 받겠다는데 이런 짓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너는 이미 주체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은 네가 따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네 안을 점령해서 접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악한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그러기에 나는 주님을 모시는 가마꾼입니다. 제가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을 ‘시간 밖으로’라고 정하기 전에 ‘여행용 가방’을 생각했어요.

왜 여행용 가방을 생각했는가 하면, 시간 밖에 있는 우리가 시간 안으로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여행 가방을 쥔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여행용 가방이란 말입니다. 주님께서 선지서에 나오는 모든 예언대로 지금도 묵시적으로 활동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어느 대목에 붙어 있어야 하는가? 주님께서 여행가방(우리들) 속에 요한계시록을 넣고 끌고 가시는 거예요.

왜냐? 주님이 제시한 요한계시록의 결실물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흰옷 입고 천국 가있다.’는 것을 우리를 가지고 자랑하고 싶어서 이미 죽은 우리를 이 땅에서 계속 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 안에 요한계시록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환등기입니다. 필름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환등기에 넣으면 바깥 스크린에 요한계시록 내용이 펼쳐지겠지요. 이것이 바로 주와 함께 있는 우리의 위치고, 우리의 위상이고,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당부합니다. 성도라면 제발 티내지 마시고, 나대지 마시고, 설치지 마세요. 신자인지 아닌지 분간 못하도록 하세요.

가방은 우리가 쥐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필요할 때 이동시킵니다. 자기가 괜히 신자라고 나대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신자 아닌 것 같아요. 자신이 신자라는 주체를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의심이 들어요. 자유가 없고 너무 열심을 내며 달려가요. 여유도 없고 대범함도 없고. ‘이것 못 지키면 지옥 가겠지?’하며 벌벌 떨고. 666 도장 받을까봐 불안해하고.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과거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서는 승인이 났는데 내가 확인이 안 됐거든요. ‘그래, 네가 어떤 꼴이었는지 보여주마.’ 죽 가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교회 안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교회라고 여긴 교회를 찢어야 됩니다.

이스라엘을 깨면 그 안에 진짜 이스라엘이 나오는 것처럼 교회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부수라고 여러분을 파견한 겁니다. 여행용 가방, 환등기로. “저것이 아닌데. 저것은 자기 신앙 자랑이고, 헌금 한 자랑이고, 목회 자랑이고-- 맞아. 내가 저러했지? 내가 곡과 마곡이었지. 주여 감사합니다.”

이사야 62장 4-5절을 보겠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우리가 신부되려고 환장한 것이 아닙니다. 주유소에 가서 기름 아무리 잔뜩 준비해도 신부 안 됩니다. 신랑 기다린다고 졸리는 잠을 참기 위해 성냥개비로 눈꺼풀에 받쳐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 62장 이 말씀은 ‘잡곡 강정’처럼 요한계시록에 굳어져 있어요. 천사가 와서 손을 대면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 중심의 재편성 때문에 우리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은 너무 과분하고 그냥 천국에 넣어주시면 구석자리라도 만족하겠습니다.” “아니야, 너는 신부야. 내가 준 흰옷을 입어야 해.” 이것은 신부를 위함이 아니라 신랑의 위상에 맞추기 위해 신부를 단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랑의 명예를 위한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한다는 것을 온 우주에 자랑하고 싶어서 주님은 신부를 단장시킵니다. 자랑거리의 대상들이 모인 곳이 천국입니다. 신부 자신을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의 피 값으로 흰옷을 입게 되었습니다.’하고 주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4장로이고, 많은 사람들이 보좌 앞에 배치되어 면류관을 반납하며 보좌를 바라봐요.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넘치고 성도는 그곳에서 마음껏 찬양하고 주께 영광 돌립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벌써 이루어졌습니다. 전기밥솥에 이미 버튼을 눌렀기 때문에. 오늘 밤 죽으면 우리는 이곳에 갑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과거로 봐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몸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미래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19절에서 ‘장차 될 일’이란 표현을 섰습니다. 이미 죽었지만 몸까지는 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것이 바로 네 모습이고, 네 안에 요한계시록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IS 여성대원입니다. 우리 몸에 요한계시록의 폭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몸을 어서 벗고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제 옛날 꿈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즐길 일만 남은 사람들, 이들은 시간 밖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이유도 없었습니다. 단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해서 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안 믿고 싶었는데,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냥 내 주체대로 남들처럼 살고 싶었는데 어린양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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