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3강 [법과 의미]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끝 시간에 어떤 분이 정말 좋은 질문을 하셨어요. 사실 그 질문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질문이냐 하면, 마태복음 1장에 족보에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다른 여자들은 거론하지 않고 왜 우리야의 아내만 거론해야 되는가? 여자들이 족보에 네 명 등장하거든요. 그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질문이 나와야 설명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질문을 마무리하고 세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서 마지막 끝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태어난다. 마지막 끝이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다면 앞에 있는 족보가 성령에 의해서 꼭 태어나야 될 이유가 돼요. 보통 인간들 족보와 달라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하면 일반 족보와 같아 보이죠. 그런데 마지막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되면 그 앞의 족보가 우리가 생각했던 인간들이 흔히 아는 일반적인 족보가 아니란 걸 감 잡아야 돼요. 어느새 그 족보가 노선을 이탈했습니다. 분명히 광주로 가는 기차가 어느새 부산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족보 자체가 특별히 제시하는 이유는 그러니까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하면서 족보를 나열했단 말이죠. 교회 오면 누구나 처음 보는 마태복음 1장부터. 우리가 아는 상식을 뛰어넘어요. 요셉을 멀리하고 요셉이 없는 상태에서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가 임신해야 앞의 족보와 맞아 떨어진다는 걸 강조하는데 우리는 왜 그래야 되는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걸 정당화시키는 족보로 등장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6절에 나와요.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전에 여자 이름, 첫 번째 유다는 다말에게서, 두 번째는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세 번째가 보아스는 룻에게서. 여기 여자 이름이 나올 때 이 여자는 이미 남자에게 예속된 여자입니다. 이 세계는 남성의 세계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의도적으로 뭐가 없느냐 하면, 요셉과 정혼했지만 요셉은 없어요. 이 말은 무슨 의미냐 하면, 세계 최초로 밝히는 바입니다. 정혼하지 않고 마리아가 성령으로써 아기 예수를 임신한 게 아닙니다. 요셉을 만난 적도 없는 상태에서 마리아 혼자서 아기 낳는 게 아니에요. 요셉과 정혼 상태에서 분명히 약혼자가 있는 상태에서 임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남성의 세계에 개입한 거예요. 마리아도 곧 있으면 결혼해서 남자의 아내로서 살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을 넘어서기 직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해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난 경계선은 남성의 세계가 과연 전체성, 전부인지 문제 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이건 남성에서 남성으로 내려오는 남성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은 짝이 없다고 했지요. 여자의 후손이 있고 남자의 후손이 있는 게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이 있고 상대역이 뱀의 후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것은 달리 말해서
남성이 전부가 되는 입장에서
남자에게 예속된 여성 말고 달리 여성의 후손이 등장했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비교하지 말고 남성은 일단 여자의 후손과 비교되는 뱀의 후손이라는 설계도를 가지고
남성이 전부를 차지하는 전체 세계에 대조해보란 말입니다.
그러면 남자의 세계는 장차 남자 없이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투쟁적인 관계에 놓이도록 계속 역사가 진행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마지막 때입니다. 그건 누가 정하느냐? 그건 선지자가 정하지요. 말라기 선지자가 정한 겁니다. 마지막 선지를 보냅니다. 엘리야를 보내요. 이것이 구약의 마지막 대목이에요. 그래서 마지막 선지자가 나타난다면 이의 없이 마지막 때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선 아들을 통해서 모든 걸 말씀했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언약의 안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 마지막 같은 소리하고 있네. 예수님 태어난 지 이천 년이나 지났는데 마지막이 언제 오는데. 조금 있으면 리우올림픽도 하고 마지막 낌새도 보이지 않아요. 마지막 낌새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걸 마지막이라 하느냐? 낌새가 안 보인다고요? 그것은 마태복음에 돌발적으로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채택하는 거죠.
그래서 어제 첫째 시간에 관점을 바꿔야 된다. 관점을 어떻게 바꿔야 되느냐? 우리가 있고 하나님이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정지돼있고 우리는 그 주변에 따라가서 예수님을 위해서 항상 거기서 우리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가 뭐냐? 별도 거기에 박혀있고 나도 거기에 박혀있는 거예요. 별이 가만있다가 이 지상에 누가 등장하니까 별이 거기로 쏠리더란 말이죠.
별 따라 동방박사가 왔고, 동방박사만 온 게 아니에요. 동방박사를 호위무사처럼 보호한 게 있었습니다. 그들이 꿈에 나타난 천사들이죠. 하늘나라는 굉장히 바빠요. 천사 긴급 투입하고, 테러 진압반 투입하고, 호위무사 투입하고, 어린양 왔다고 모든 시나리오가 어린양 중심으로 짜여지는 겁니다. 없던 중심이 등장한 거예요. 없던 인물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것은 인구에 +1, 숫자 하나 더 보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인간의 숫자가 전체성에 속합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제일 이해 못하는 게 ‘전체성’이란 단어 같아. 전체성이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에 호응이 되고 그것을 긍정하고 인정해주는 전체성 속에 정보로 플러스해서 보태게 되는 거예요. 예수? 그 예수가 지금의 나를 더 안정되게 만드는 데 있어서 협상하고, 타협하고 이의 없다고 치고 의견조율해서 이 정도 예수라면 우리 편에 넣어줄 수 있다고 해서 수입한 그 예수.
이 전체성을 허물어지지 않아요. 아주 단단하면서 예수라는 정보 하나 추가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을 때 그 전체성은 끄덕도 없는 거예요. 이게 전체성이에요. 사람들은 어떤 데이터를 원하고 정보를 원하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말고 우리가 모르고 있는 초월적인 요소를 메시아가 와서 제공해준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추가해서 받아들여서 우리가 하늘나라 가는데 더 확실한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용납하겠다고 그 전체성을 안정되게 지키려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전체성이 마리아로 인하여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천사가 대동하고 동방박사가 이동했고 별이 따라 왔고 거기에 대해서 헤롯왕이 갑자기 발작해서 베들레헴에서 두 살 아래 아이들 다 죽이고 하는 이런 일련의 작업은 이 전체성에 포함되지 않는 이상한 쪽이 허락도 없이 침입했다는 거예요. 침범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상 걸린 거예요. 그 사람을 용납하다가는 자칫하면 전체성이 다 허물어져버려요. 그러면 전체성이 가짜가 되고 그걸 관리했던 남성의 세계는 가짜가 되면서 남성의 세계가 어디로 가느냐? 뱀의 세계와 합치되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제자들은 몰랐지요. 마태복음,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보좌하고 따라다녔는지의 기록입니다. 그 기록이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자기가 엉터리 같이 살았던 하나하나가 복음이 될 줄이야 사전에 예상도 못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도 복음이 될 줄이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함으로써 베드로는 사도가 된 겁니다. 배신 없는 인간은 주의 종이 될 수 없어요.
여러분이 아는 사도 바울 있지요. 그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열 살 때 가말리엘 문하에 갔고, 28살에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고 예수님 만나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31살에 사막에 갔다가 그리고 40살까지 다소라는 곳에 박혀있다고 바나바가 인간 만들려고 데려와서 안디옥에서 1년 동안 같이 목회하다가 바나바와 42살 때 1차 전도로 터키 지방에 갔고, 45살 때 2치로 터키와 그리스 지방을 돌았고, 3차로 간 데 또 가고 그동안 있었던 교회 실패담을 담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서를 쏟아내었고, 마지막에 구제금 들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52살 때 잡혀서 결국 67살 때 참수 당했는지 죽었지요.
그럴 때 그 사도 바울을 우리는 진짜 사도 바울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속으로 이렇게 합니다. 흥! 칫! 뿡! 우리는 껍데기를 보는 거예요. 나는 주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꾸 나를 보지 말고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가지고 노신 거예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성령 받은 모든 이들이 나처럼 되는 거예요. 두 개의 자아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고. 한쪽 자아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돼있고, 보장돼있다는 말은, 어떤 행위라도 어떤 실수와 실패라고 그 속성이 변경되지 않는 위치에 올라가 있고, 한쪽은 맨날 실수하고 맨날 짜증내고 반발하는 그러면서도 목숨 끊어져 죽는 얼마든지 버려도 되는 고물, 고물 같은 걸 가지고 우리가 모여 있는 거예요. 제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다윗에서 어떻게 남자 없이 태어난 게 정당화되느냐? 다윗이 둘로 나눠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나야 될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다윗과 그리고 왕의 자격으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다윗으로 새롭게 등장하면서 여기에 우리야 장군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6절에서는 족보가 인간의 육에서 육으로 이어지는 연속되는 족보가 어느 순간부터 육이 아니고 성령에서 마리아로 태어나는 영적 족보로 노선을 바꾸는 그 지점에 다윗 자리에 우리야를 집어넣어요. 그러면 남자가 둘이 됩니다. 그 뒤에 솔로몬이 나와요.
솔로몬 아빠가 다윗이냐, 우리야냐 하는 문제입니다. 육적으로는 다윗이 되겠지요. 그러나 마리아가 남자 없이 여자의 후손의 세계를 형성하는 그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남자를 없애버리는 새로운 육의 증거물로 태어나는 것이 솔로몬이에요. 다윗과 밧세바에서 먼저 태어난 아이는 죽어 버립니다. 죽고 난 뒤에 죽은 자리에 새로 태어난 아이가 솔로몬이에요. 이 솔로몬은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 다윗에 내장돼있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솔로몬이 오는 데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우리야가 되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숫자를 다윗부터 세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부터 세서 14대를 맞추는 겁니다.
남자를 둘 나와요. 다윗과 우리야가 나온다니까요. 다른 여자들,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여자 이름이 나오지만 우리야의 아내는 밧세바가 없어요. 우리야의 아내는 괄호의 아내에요. 육으로부터 죽음을 당했으니까 죽음의 아내, 죽은 자에서 나오지 아니하면 성령의 족보에 가입될 수 없다는 원칙이 서버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난 뒤에 성령의 세례의 완성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필요 돌아가셔야 돼요. 죽은 자에서 나온 영이 아니면 우리는 죽은 족보에서 노선 변경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죽었던 자와 함께 죽고 죽은 자와 함께 했다는 이유 때문에 함께 살아날 때 그걸 로마서 6장에서는 연합이라 하고 세례라고 하는데, 우리는 바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위치, 신분이 바뀌는 겁니다. 지금 알고 듣는지 분간이 안 되는데
성령이 왔다는 건 한 마디로 이거에요. 너, 죽었어.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살아있으니까 마이크 들고 있지. 살아있는데 어떻게 죽었느냐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죽은 자가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실패를 하고 남한테 욕을 하더라도 그건 죽은 자기 때문에 죄책을 묻지 않아요. 죽은 놈을 또 죽입니까?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한테 죄책을 묻는다는 게 말이 되겠어요? 예수님, 이리와. 왜 과속했어? 이게 말이 돼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진짜 하나님 앞에 나와도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수치는 범죄가 그대로 남아있을 때 수치를 당하는데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두 번 다시 더 이상 우리에게 저주라는 것이 오질 않아요. 저주를 불러도 저주가 오지 않아요. 사도 바울은 어느 정도로 용감한 줄 알아요?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이여, 제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랑해주세요. 심지어 제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자의 여유입니다. 넉넉하거든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원했던 게 아니고 주님이 원했던 바가 내 속에 장착돼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모든 코스가 성령에 의해서 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갔던 모든 코스가 성령에 의해서 가는 것처럼 성도가 이 정도 됩니다. 성도가 헌금 내고 복 받고 그게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는 어느 정도냐?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거예요.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겁니다. 사람 죽이고 교도소 갔다고 해서 누구 하나 거기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는 겁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게 성도의 신분이에요.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은 이미 죽은 노선에서 산 노선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조건 하에 그렇습니다.
방금 이게 진리거든요. 이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나오면, 그걸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인식론은 진리가 아니에요. 새벽에는 은혜 받았는데 오후 2시 되니까 또 짜증나서 싸웠어요. 그건 인식론이에요. 왔다갔다해요. 목사님, 만약에 치매 걸려서 예수 안 믿으면 어떻게 해요? 그건 인식론입니다. 치매 걸리게 하신 것을 치매 걸리기 전에 미리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치매 걸려서 무슨 허튼 소릴 하더라도 치매와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처음 끝 발이 나중 끝 발이에요.
시작하신 분이 끝까지 책임진다.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우리한테 일을 맡기지 않아요. 시작하신 분이 자기 일로 시작했기 때문에 마감도 자기 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인식론은 문득문득 자기의 인식론적 잘못을 들춰내면서 시작부터 내가 아니지. 바보, 바보. 이것을 점차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어제 강의 중에서 얼른 지나갔지만 중요한 말을 했어요. 우리가 말을 해야 되는데 그 말을 예수님이 대신 이야기해준다는 말을 제가 했어요. 그게 바로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성경 말씀을 아무리 해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가 말할 것을 대신 말씀해줍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이야기하신 분은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께서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가 뭐냐?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러니까 주께서 참새도 기르신다. 그 말이야. 끄집어낸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 말 그대로 이야기해요. 그 뜻이 뭔데?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뜻이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는 뜻이야. 그래 맞아. 내가 하고 싶던 말이 그 뜻이야. 항상 마감재가 말씀으로 증거해요. 그 말씀을 내가 잘 설명할 순 없어요. 하지만 말씀을 전파하게 되면 상대방이 믿든 말든 성령께서 알아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서 믿은 게 아닌 것처럼 성령께서 오신 것처럼 그들도 성령께서 알아서 우리처럼 행함도 없이 구원받게 하시는 매개체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전도나 선교에 대해서 우리가 걱정, 염려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삼천 명 목회하고 천국 가나, 평생 두 명 목회하고 천국 가나 똑같은데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하느냐 말이죠. 여름에 땀 뻘뻘 흘리면서 삼계탕 해서 하루에 손님 백 명 받아서 하나, 손님 하나도 없이 자기 식구만 삼계탕 먹으나 구원받기는 마찬가진데 왜 그렇게 가게 성업하려고 길길이 신경 쓰느냐 말이죠.
인생이란 것은 끝에서부터 다시 거꾸로 사시면 되는 거예요. 지금부터 가는 게 아니고 이미 끝 지점에서 되돌아와서 구경하듯이 사는 겁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을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처럼 이미 폐허화된 세상을 되돌아보는 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게 성령 가진 자의 여유입니다. 돈 가진 자의 여유만 흉내 내지 말고 성령 가진 자의 여유도 흉내 내세요.
이번 강의 제목은 [법의 망토]입니다. 망토는 겉옷처럼 뒤집어쓰는 것. 법의 망토라고 제목을 단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와 싸웠는지 적을 찾아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법은 혼돈에 개입돼요. 어린아이 몸이 혼돈입니다. 어린아이는 질서가 잡히지 않아요. 혼돈에 법이 추가되면 여기서 의미가 생깁니다. 존재의 의미죠. 존재의 의미가 시간이 흐르면 나의 역사가 돼요. 존재의 의미가 환경을 만나서 투여, 투사하면 여기서 권력이 생깁니다.
현재 이천 년 인문학 역사가 달랑 이것 하나입니다. 반 페이지도 안 돼요. 이것 하나가 전부입니다. 여러분 잘 오셨어요.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전부 다 딱 이것 하나에요. 몸에다 혼돈에다 법을 집어넣습니다. 의미가 생기는 거죠. 어린아이가 뭐라 하면, 그래 엄마 좋다 이 말이지. 주변에 있는 어른이 재단을 해요. 의미를 규정해버립니다.
우리 손녀딸이 있는데 4개월째인가 우연찮게 엄마, 했어요. 그러니까 사위가 아이가 벌써 엄마의 의미와 단어가 일치된 줄 착각해서, 아이 착하다. 나는 그 다음에 아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부지, 이러는 거예요. 사위가 부산 사람입니다. 그 다음부터 엄마는 쑥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안 하고 있어요.
숟가락으로 먹어야지 손으로 먹는 것 아니야. 혼돈에 법이 제공됩니다. 법은 선과 착함과 옳음과 그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법은 혼란스러우냐, 평화로우냐, 그게 문제에요. 모든 인간의 법은 옳고 그름과 관계없어요. 잡범들, 도둑질하고 편의점에서 훔치고 그런 것은 잡범에 속해요. 진짜 국가법에서 중요한 것은 공안법이고 지식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혼돈 상태가 되면 안 돼요.
어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10시 이전에 들어오라고 법을 낸다는 말은, 10시 이전에 들어오면 착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말이고, 10시 이전에 들어와야 가정이라는 질서체에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그래놓고 아버지는 11시 반에 들어오고 12시에 들어오고 그래요. 그렇더라도 나는 어기더라도 너는 지켜야 돼. 그래야 질서가 잡혀요.
법은 혼돈에서 질서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야 의미가 생겨요.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런 행동을 해선 안 돼. 왜?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그게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과도하게 되면 노이로제 걸리고 정신병 걸리고. 어릴 때 과도하게 사랑한다든지 방치한다든지 하면 노이로제 걸리고 신경증에 걸리는 겁니다. 정신분석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람들은 과거는 망각하고 잊어버렸지. 프로이트는 그런 소리 들으면 미칩니다. 망각한 게 아니고 억압됐다는 거예요. 억압된 것이 나사가 풀리면 그것이 욱하는 성질로 튀어나옵니다. 과도하게 간섭 받은 아이는 초조하기 짝이 없어요. 가만있어봐, 가스는 껐나? 청소는 했고? 내가 휴대폰을 어디 뒀지? 내가 이런 말을 했는데 실수한 건 아닌지 다시 가서 사과할까? 사과했는데 안 받아주면 어쩌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그게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프로이트란 사람과 그 제자 라캉이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 사람은 정신과 의사니까 생물학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것은 번식과 관련돼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욕망은 번식과 관련돼있어요. 최근에 도킨스란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은 dna의 운반체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은 껍데기에요. 번식이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짝짓기 욕망이 있는데 그것으론 사회에서 못 사니까 사회가 혼란스러우니까 이걸 계속 억압하는 게 윤리와 도덕이고 자라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 교회에서 배운 것, 그리고 신이란 이름으로 내면화된 모든 것이 바로 억압된 거예요.
그래서 학생수련회에서 철없는 전도사가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새 사람 됐으니까 막걸리 먹어도 됩니다. 학생들은 전도사님이 막걸리 먹어도 된다는 말은 막걸리가 허용된다는 말이지 나중에 벌겋게 되고. 얼마나 억압됐겠어요. 그 부모로부터, 가정으로부터, 학교로부터.
그런데 라캉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정신적 현상은 짝짓기란 욕망에 억눌린 게 아니고 말을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말로 법을 줬기 때문에 너무 과도한 법이나 너무 방치된 것으로 인하여 자기 존재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라캉의 입장에서 이상적인 사람은 말을 주고받는 대화의 상대를 찾으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나 여자 입장에서 대화가 되는 상대를 선택할 것이냐? 이건 라캉 쪽이고. 뭐래도 예쁜 게 최고다, 하는 것은 이건 프로이트 쪽이에요. dna운반체니까. 저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괜찮은 dna 운반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sns에 보면 꼭 못 생긴 것들이 글을 잔뜩 올려서 좋아요, 엄지 척. 얼마나 젊은 사람들이 외로운지,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왜 자꾸 찾아요. 한영애 노래입니다. 잘 있었니, 임창정의 <소주한잔> 전화 걸어서 안부를 왜 물어요. 자꾸 대화 상대를 끌어당기는 거예요. 왜? 어릴 때 자기 존재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 말씀보다 이걸 더 잘 듣고 있네. 다 말씀과 관련돼있습니다.
이 의미로 자기 확장에 나섭니다. 존재의 의미가 되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잖아요. 마태복음 18장에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어린아이는 몸은 있으되 자아가 없지요. 자아가 없으니까 남에게 의존할 필요 없어요. 그냥 맡기면 되니까. 같은 18장에서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해요.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용서하면 됩니까? 베드로는 자기 한 사람과 저 한 사람, 두 명을 이야기해요. 예수님은 용서를 의미하면서 둘이 아니고 삼이 개입될 때 문제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얼마나 용서해 주는지, 하지 말고 어떤 임금에게 신하가 있었는데 그 신하에게 많은 빚을 탕감해줬어요. 그런데 탕감 받은 그 신하는 자기 종한테 돈 50원, 100원 그것 갚지 않았다고 옥에 가뒀어요.
그러면 제삼의 인물이 개입되지 않으면 용서라는 게 성립되지 않아요. 용서는 내가 할 수 없고 저쪽에서도 할 수 없어요. 용서는 제삼자가 따로 출몰해서 용서의 진수를 보여주게 되면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미 용서받은 자가 되기 때문에 남을 용서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말은 중간에 예수님이 가로챈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말은 자신만이 지키는 거예요. 그 당시 유일하게 성령 받은 분이기 때문에. 성령 받은 분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게 돼있어요. 내가 나서게 되면 두 종류의 다윗에서 한 종류의 다윗으로 변해버립니다.
다윗은 양을 횡령한 자에게 네 배나 갚으라고 했지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법을 거론하십니까?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법이 없이 살아가야 될 사람이에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은데. 법 없이 살아가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법의 저촉을 받고 거기에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운전했는데 과속에 걸렸어요. 기도의 응답입니다. 과속해서 걸린 것과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것과 전혀 상관없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경찰이 거기 있는 이유가 네가 기대한 것이 어긋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늘 평생 경험하라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참 이런 말을 하는 제가 잔인한 것 압니다. 얘 성적 내려가도 구원과 관계없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제가 알거든요. 지금 이것이 우리가 세상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의미가 환경을 만나게 되면 권력을 낳습니다. 권력이 질서체가 되는데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인데 뼈대도 없는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의 아들을 넘봐? 막장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봉투 내밀면서 이것 먹고 아기 지우고 유학 가라고 보냅니다. 이게 권력입니다. 어디서 박사학위도 없는 것이 우리 교회에 부목사로 오려고. 이것이 교회라는 것이 자체적인 의미가 생기고 환경을 조성해서 권력체로 만든 겁니다. 그 안에서 질서 지키고 교회법 생기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이걸 치는 거예요. 응시. 바라봄입니다. 응시라는 말은 그냥 바라봄인데 제 뜻은 그게 아니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게 돼있어요. 내가 바라보고 있고 저 사람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이건 평범한 거예요. 그런데 응시는 뭐냐? 내가 찾을 수도 없는데 다른 분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내 속에 계속 살아있을 때 그게 바로 응시라는 겁니다. 원인을 찾을 수 없어요.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한지 아무 일 없는데 왜 근심, 걱정이 되는지 아이 다 키웠는데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차 조심하라고 하는지. 그래야 내가 편한지.
내면화된 법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아무리 완벽을 갖추어도 응시를 의식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인간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 상처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칭찬하고 적들이 하나도 없는데 불안, 불안해요. 원인을 찾을 구석이라고 있어야지. 그런 낌새도 없어요. 분명히 최적의 에어컨이 다 됐는데 잠이 오지 않아요. 왜 잠이 오지 않는가?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나쁜 징조라고 이미 법적으로 내면화돼서 그래요. 잠이 안 오면 안 오는 채로 천국 가면 되지 왜 잠을 자야 됩니까? 이게 자체적으로 권력화
응시에 대해서 교재를 봅시다. 4페이지 중간에 보겠습니다. [응시의 욕망의 우리가 속한 세계의 질서를 언제나 넘어선다는 사실로부터 응시의 공포는 시작된다.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세계-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즉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는 한 응시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게 되는 것이다.]
응시를 지우려면 나도 같이 지워진다고 해서 응시를 지울 것인가, 같이 동반해서 파멸할 것인지 선택한다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신이시여, 왜 저를 몰아세웁니까? 더 이상 어떻게 완벽하게 살 것을 요구하십니까? 더 이상은 못합니다. 누가 뭐랬어요? 혼자서 그런다니까요. 신이시여, 예수님이여, 그것만은, 아들만큼은 못 내놓겠습니다. 안 내놓으면 되지, 뭐.
하나님께서 걱정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트라우마가 박혀있는 것을 걱정하는 거예요. 행동 똑바로 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자꾸 주님께서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마라, 무시로 기도하라, 복음으로 원수를 대적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 있는 줄로 족한 줄 알아라.
사도 바울의 모든 권면과 행동은 제발 너 자체에 대해서 기대와 희망을 손을 놔라. 내가 이미 손 놓은 걸 너를 니가 무슨 수로 그걸 쥐고 착한 인간 만들겠다고 그렇게 신경 쓰느냐 말이죠. 내가 포기했는데 너도 같이 포기하면 되잖아요. 자기 포기가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그 모든 말씀은 주님께서 이뤘기 때문에 이제는 무엇을 버릴 것이냐 알려주기 위해서 버릴 고물을 이래서 못 지켰어, 이래서 못 지켰으니까 버릴 건 버린다는 취지로 주셨는데 우리는 고물을 가져다 색칠하고 예쁘다고 하는데 냄새 나는데 뭘 예뻐요.
그래서 그 뒤의 말이 중요합니다. [응시에 대한 대응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무당들이 행하는 굿판을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굿은 세계의 심연(공백)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초월적인 힘들을 인간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심연 속에서 발산되는 초월자의 응시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욕망을 달래기 위해 인간이 마련할 수 있는 제물들(이미지들)을 준비하는 것이 바로 굿이라는 행위의 본질이다.]
제물들, 괄호 열고 이미지들, 성당입니다. 교회입니다. 파이프오르간이고 철야기도입니다. 모든 성당과 교회, 절간이 굿판이에요. 좋다는 뜻 아니에요. 살풀이 굿이에요. 살이라는 것은 무당이 살을 쏜다고 이야기해요. 무당은 세계를 에너지로 보기 때문에 기로 보기 때문에 그 기가 우리 내부에서 균형을 깨기 때문에 병에 걸린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병에 안 걸리고 정신 느슨하게 놓으면 스트레스 받으면 암에 걸린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무당이 이미지화 시켜서 굿판을 벌이는 거예요. 악귀야, 나오너라. 무당이 하는 그 이야기가, 환자가 그래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그걸 무당이 대신 해주니까 갑자기 몸이 가뿐해지는 거예요. 한 500만 원 날렸습니다. 내가 못 흔드는 대나무를 대신 흔들어주고 내가 못 노는 작두에 대신 뛰놀고. 무당은 숙련됐기 때문에 함부로 따라하면 안 돼요. 하여튼 무당은 돈만 보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그런 효과로 깔끔하게 낫는 겁니다. 이천만원, 삼천만원 바칠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이 너무 천박스럽고 정말 부끄럽지요. 그걸 대체한 것이 바로 교회, 성당, 절, 이런 겁니다. 점잖지요. 이걸 중심으로 한 게 뭐냐?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욕해도 유대인들 참았습니다. 사려 깊고 배려하고 단독행위하지 않고 의견조율하면서 침착하기 짝이 없는 그런 합리성을 가진 배운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결정하기 이전에 전통적인 해석은 어떻게 했는지 차분하게 심사숙고하고 세밀하게 조사해서 성경 말씀을 해석했던 전통적 해석법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해도 꾹꾹 참았어요. 뭐 때문에 그랬습니까? 법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괜히 쑤셔 건드렸다가 혼란만 더하면 안 되니까. 평화가 중요하니까. 했는데 기어이 못 참고 터뜨린 사건이 있었으니 예수님이 어디를 건드렸습니까? 법의 본부, 아지트가 있어요.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더는 못 참는다. 참을 만큼 참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인 겁니다. 죽일 때 최소한으로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 내부자 고발을 이용한 겁니다. 배신자를 찾았고 가룟 유다가 적절했고 음모가 있었고 단독으로 만났고 거기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고 밤에 조용한 시간에 경찰 보내서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한 사람을 없애서 나라가 조용하다면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돼있지요. 그런데 그 의미를 예수님이 이렇게 바꿨습니다. 한 사람 내가 죽어서 있지도 않은 새로운 이스라엘이 형성된다면 한 알의 밀알이 돼 주마. 똑같은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서로 상반된 의견을 내놓게 됩니다. 이게 바로 노선이 바꿔지는 거예요.
그럼 율법의 망토는 권력에 대해서 행사하는 것이 법에서 나왔고 법은 혼란과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서 법적으로 돼있는 겁니다. 권력이 이렇게 되게 되면 개인을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바로 교재에서 거미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어설픈 목격담 이전에 하찮은 감응체와 공포 속의 체제, 그 이야기가 권력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