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마태복음1강-관점정리

아빠와 함께 2016. 8. 6. 15:22
2016-08-06 11:01:10조회 : 26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1강 [관점정리] 이름 : 한윤범 (IP:14.39.134.67)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1강 [관점정리]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서 사라진 모든 자의 방향을 저희들이 추적해서 알게 하옵소서.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음을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된 것을 이제는 우리의 운명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 번째 강의 제목은 [관점정리]입니다. 마태복음이 신약에 처음 나오면서 소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춰봅니다. 그런데 관점정리가 안 돼 있기 때문에 백 독, 천 독을 해도 그저 경험밖에 되지 않아요. 마태복음을 여러분이 다 외우시죠? 마태복음을 흩어보면 어떤 것을 느끼느냐 하면, 누군가 와서 관점이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시작했는데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 점점 더 한쪽은 머물러 있는데 저쪽은 후다닥 사라져 가버리는 겁니다.

 

오늘 오후에 울산의 대나무 숲을 이야기했는데 까마귀 떼가 앉아 있습니다. 장관이라 하는데 대나무 숲의 까마귀가 있다가 날아가 버리죠. 그래도 대나무 숲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왔다 가버린 거죠. 그럴 때 어느 쪽이 움직였고 어느 쪽이 멈췄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대나무 숲은 멈춰있었고 까마귀 떼는 왔다 갔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걸 시비 거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이, 인간 세계가 멈추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왔다 갔는지, 아니면 주님이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고정돼있고 인간들이 주위를 돌고 있지 않는지 관점을 다시 생각해봐야 돼요. 누가 우리한테 찾아와서 갔다는 것보다도 주님이 계신데 우리가 그만큼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멀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인류의 문명사나 과학사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동설, 지동설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늘이 움직이느냐, 땅이 움직이느냐는 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대세가 뭐냐 하면, 지구는 멈춰있는데 태양이 움직였다고 본 거예요. 사실은 그전에도 이게 아니라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말발이 서질 않았고. 그런데 갈릴레이 갈릴레오에 의해서 태양이 있고 지구가 움직인다고 봤습니다. 그럴 때 태양이 공전하는 것이 아니고 지구는 공전한다는 거예요. 태양도 움직이죠. 태양이 가는 걸 황도라고 하는데 19세기 초에 베셀이라는 독일의 천문학자가 망원경으로 지구의 공전을 다음과 같이 증명했습니다.

 

지구가 있고 별이 있는데 만약에 태양이 있고 지구가 공전한다면, 여기 A, B, C, D 지점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별이 하나 있는데 A 지점에서 별을 봤을 때 C 지점으로 움직인다면 그만큼 차이가 날 것이란 말이죠. 그 차이 나는 각도를 연주시차라 합니다.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말은, 지구가 도니까 차이가 나지 만약에 돌지 않으면 차이가 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차이가 나는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빛은 파장으로 돼있거든요(혹은 입자). 파장으로 된 것을 조사해보면, 어떤 때는 빨강으로 보이고, 어떤 때는 파랑으로 보이고, 어떤 때는 편이가 없음으로 보인다 말이죠. 적색 편이는 길어지니까 멀어지는 거예요. 청색 편이는 짧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이렇게 가게 되면 이쪽 파장이 파랑이 되고, 이쪽은 빨강이 되면서 스펙트럼에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변화가 일어나니까 지구의 공전이 맞는다는 겁니다.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은, 멀어질 수도 있고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것으로 태양이 도는 게 아니고, 사실은 지구가 돈다고 한다면, 이걸 마태복음에 그대로 적용시켜 보는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땅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모든 족보에 대해서, 아들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의견이 점점 더 빠져나간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아기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빠져나가요. 그럼 이건 멀어지는 거죠. 인간의 생각과 공유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은 그냥 멈춰있는데 주님만 홀로 잘 먹고 잘 살아라 야들아, 하고 쑥 빠지는 겁니다.

 

빠져나간 분, 주님이 중심인지 그냥 버티고 앉아 있는 우리 해석이 옳은지를 검토해봐야 돼요. 마태복음의 이런 관점정리가 먼저 검토돼야 되는 겁니다. 그동안 마태복음을 보실 때 어떻게 바라봤습니까? 뭔가 예수님 오셔서 의견 맞지 않고 그냥 빠져나가는 느낌을 못 느끼셨습니까? 울산 대나무 숲의 까마귀 나가듯이 분명히 뭔가 앉았는데 쑥 나가버렸는데 예수님 다녀간 뒤에 인간 세계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울산 대나무 숲에 까마귀 앉든 말든 변화가 없듯이 그냥 그대로. 예수님 다녀가도 우리는 역시 맛있는 것은 맛있고, 즐길 건 즐기고, 아이 낳고, 장가가고시집가고, 변화가 없어요.

 

그럼 마태복음이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오셔서 이상한 객소리하다가 나는 죽노라, 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아버지여, 하면서 과대망상증 비슷하게 하고 가버렸다. 가고 난 뒤에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냥 그대로에요. 아무런 일 없어요.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인간이 멈춰있고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게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나와요. 별이 움직입니다. 원래 별이 움직이는데 이상한 움직임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별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하늘 길을 다니는 자체를 움직임이라 하는데 그 별이 인간이 사는 주거환경까지 들어옵니다. 별이 하늘에 그냥 계시면 되잖아요. 무슨 큰일 났다고 별이 일상적인 환경 속까지 들어온단 말이죠. 별이 인간을 보려고 왔느냐? 그게 아니에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별은 어디 있느냐 하면, 지구가 있고 별이 있으면 하나님은 별 저편에 있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안정되게 지구는 돌아가고 별도 제자리 잡고 돌아가고. 그래서 이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왜 별이 자기들 노는 하늘 동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고 들어오느냐 말이죠. 자칫하면 침대까지 들어올 판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별이 지목하기를 그 집 아니고, 미장원 말고 옆에 우체국, 거기야. 별이 그렇게 지목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집요? 아니, 빌라. 그 뒷집. 202동? 아니, 201동. 얼마나 집요하게 딱 꽂아서 찾아오느냐 말이죠.

 

별은 욥기에 의하면, 하나님 따로 계시고, 별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제자리에 박혀있고, 인간은 인간 자리에 박혀있고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서 허용된 활동대로 돌아가면 된단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 별이 움직였는데 인간세계까지 파고들어왔는데 뭘 보려고 찾아왔습니까? 도대체 어떤 인간이 있기에. 보통은 별이 주거환경까지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여기에 없어야 될 인물이 생긴 거예요.

 

없어야 될 인물은 그전까지 없었던 인물이에요. 이 말은 신원조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는데 열두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시는데 “누구야, 너?” 도대체 신원조회가 안 돼요. 주민등록이 안 돼 있어요. 요한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실례지만 신학교 어디 나왔습니까?” 출생지도 모호해요. 베들레헴이냐, 갈릴리 사람이냐. 마태복음 13장 마지막 대목에 보면, 기껏 신원조회 한 것이 아버지가 목수라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남들 다 이야기하는 그 아버지와 엄마가 하나님의 절기에 따라 갔다가 잃어버렸고 사흘 동안 찾다가 결국 찾았는데 예수님이 양친께 하는 이야기 좀 보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습니까?” 만약에 제가 요셉이라면, “누구야, 너? 뭐야? 너 어디서 왔어?” 이럴 거예요. 사실은 알고 있지요. 마태복음 1장에서 천사가.

 

여기서 위기에요. 이 땅에 없으실 분은 없어야 돼요. 그게 우리가 살기 편하고 우리 상식대로 살아도 지장 없습니다. 왜 침입했는가, 에요. 왜 침투하셨는가? 침입이란 말은 마태복음 11장에 나와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이 땅에 개입하신 것은 이 땅을 흩고 속속들이 모든 체제, 사상들을 다 손대고 지나가면서 뭘 하느냐?

 

이번 강의 여덟 번째 제목을 미리 이렇게 정해봤습니다. ‘살 처분’ 오리나 닭, 돼지가 전염병 걸렸을 때 이걸 해요. 요즘에 하나 더 포함됐어요. 좀비. 좀비까지 살 처분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살 처분 나옵니다. 신원조회도 안 되신 분이 괜히 뛰어들어서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살 처분하겠다. 그래서 참다못한 현명하신 유대인 지도자들께서 이런 정신분열증 환자는 용납되지 못한다. 마땅히 당연한 조치지요. 살해했습니다. 너부터 죽어라. 여기가 어딘데 까부느냐, 하고 죽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입니다.

 

살 처분당할 대상이 예수를 믿는다는 게 말이 되겠어요? 분명히 여기는 그동안 다른 예수였을 가능성이 많아요. 나를 저주하고 나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큰소리치며 예언하신 그분을 내가 믿겠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 빼놓고 다른 걸 믿을 가능성이 있고,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남들 다 예수, 예수 하니까 예수가 뭔가 이익이나 가져다줄 줄 알고 겁 없이 예수를 불렀던 경우 등 하여튼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 당시에 메시아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고대했어요. 그 메시아는 시간의 주기를 통해서 오게 돼있어요. 유대인들에게는 시간의 주기인데 유대인 말고 다른 모든 민족들은 시간의 동질성, 그 내부에 항상 동질하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시간의 동질성 앞에 모든 인간은 차이가 없다. 오직 시간은 동질하다. 거기에 반해서 유대인 말고 다른 모든 민족은 인간의 동질성이에요. 그 안에 인간 속에 신이 있어서 신을 믿는 인간들은 동일하다. 이런 철학으로 그들은 육천 년 문명을 이뤄왔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이집트 문명에서 모든 건축물들은 통로가 중요해요. 통로를 통해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함을 받아요. 이 땅은 아무것도 아니고 나그네 길이고 오직 죽음의 세계만 되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와 여기 사이에 바로 왕이 있습니다. 신의 아들, 태양의 아들이에요. 이게 바로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죽음과 관련돼있어요. 사람은 죽으면 사라지지만 영혼은 영원하다. 미이라 만들어요. 언젠가 영혼이 돌아와 합체되면 영원히 살 수 있다.

 

헬라인들의 주거환경이 신전으로 돼있습니다. 신들은 전담하는 전공분야가 달라요. 박카스라든지, 제우스. 여러 가지 신들은 신전에 모음으로써 모든 변화를 고정시켜놓고 그 신에게 제사 드리면 헬라문화는 안정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잡한 것은 신들이 전담해서 처리해주니까 자기는 신만 믿고 안정하게 살면 되는 거예요. 중국문화 중심에는 조상이 있습니다. 특히 중국 남동쪽이나 타이완에서는 향 피우고 조상에 대한 섬김이 대단해요. 조상이 마을의 중심터가 되는 겁니다.

 

그럼 오늘날 현대인들은 뭐냐? 현대인들은 안정된 게 없어요. 불안, 불안해요. 그러면 인간은 뭐가 중심이냐? 방문이 중심이에요. 방문 닫고 컴퓨터게임만 하면 지가 중심이에요. 내가 중심이에요. 현대인들은 자기가 중심이에요. 옛날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겁니다. 있지도 않은 신을 믿었고, 사람은 살다죽으면 그만이지 왜 죽음에 대해서 벌벌 떨고. 번개 치는 신이 왜 필요해요. 피뢰침 하나면 다 막는데. 모든 병은 의학으로 해결하면 되는데. 불쌍하다. 몰상식한 무식한 조상들.

 

현대인들은 이성적으로 따져보니까 내가 곧 신이에요. 방문이 중요해요. 방문 닫고.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티비보고, 나 혼자 영화보고, 울고불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결혼이고 취직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방콕. 그러니까 안정성이 없지요. 불안, 불안한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인간뿐만 아니고 인간이 생각한 별은 별자리에 그 위에 하나님, 지상에는 나, 이런 안정된 체계가 별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다 틀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별은 사람 구경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없었는데 발생된 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아기 예수에요.

 

그러면 아까 그림을 봅시다. 별이 움직인다. 지구 중심에서? 아니, 별은 움직인다. 예수님 중심으로. 별마저. 지구는 있음의 전체성이에요. 마태복음 1장 족보 할 때 제가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났다고 돼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 4절. 이 말은 뭐냐 하면, 여자에서 태어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전체성은 태어나더라도 남자에서 태어나야 돼요. 이 이야기 처음 듣습니까? 미리 당겨서 하면 안 되는데. 모든 딸이든 아들이든 전부 남자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자가 전체성이에요. 아담은 전체 인류를 대표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에서 태어난 법이 없어요. 남자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는 여자에서 태어났다고 돼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진리체제에서는 포섭되지 않고 포획되지 않는 신원 조회가 되지 않는 낯선 분의 등장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이제 우리는 죽었다 이 말입니다. 살 처분 당했다. 우리는 죽었다. 우리는 버티지 못한다. 그분의 횡포에 버틸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 오시면서 사람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의논하고 상대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태복음에 여러 번 찾아봤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의논상대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에요. 제자들과 이바구한다고 해서 좋은 의견 청취하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이었어요. 예수님은 아버지하고만 이야기했단 말이죠. 이 말은 너희들과 상대하지 않아,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과 상대한다고요? 다른 예수 아니에요? 다른 예수 같은데.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과 의논하는 상대가 아닙니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간이고, 예수님의 쓸개고, 예수님의 창자고, 예수님의 발톱이요, 예수님의 이빨이고, 예수님의 머리카락입니다. 그걸 예수님의 지체라고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사지. 문어다리, 오징어다리 열 개. 다리가 무슨 몸통과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백날 기도해봐야 우리 기도는 거절당합니다. 그 거절당하는 명칭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해봐야 거절당합니다. 절대로 우리 기도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해봐야 철없는데, 뭐.

 

제가 어릴 때 옛날 촌에 있는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만 어떤 마을에 초가집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중에 기와집이 하나 있으면 나중에 저런 기와집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해봤지요. 지금은 옛날 기와집이 문부터 낮아서 못 들어가요. 가구 하나, 책상 하나도 못 들어가요. 난장이만 살았나. 난방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기와집이 욕망의 종착점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게 욕망의 마지막입니까? 욕망의 종착점이 왜 그리 자꾸 이어지는지. 또 다른 걸로 더 큰 걸로, 더 큰 걸로 계속 이어지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철이 없다. 현실 보는 눈이 왜 그리 좁은지 철이 없느냐고 이야기하지요.

 

성경에서 예수님 바라보고 병 낫고자 오는 사람은 철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은 어떤 이유 때문에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붙들고 병 낫게 해달고 하니까. 왜 붙들어요? 빠져나시는 분이잖아요. 왔다가 그냥 가버린 거예요. “잘 먹고 잘 살아라. 너희는 죽었어.” 이렇게 빠져나가신 분이란 말이죠.

 

예수님께서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별이 멈춰 섰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여러분은 학교에서 이걸 많이 배웠을 거예요. 태양이 있고,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라 해서 아홉 개의 행성이 돈다는 걸 배웠지요. 실제로는 이렇게 안 돌아요. 이건 인간중심입니다. 태양이 가게 되면, 설탕이나 단 음식을 갖고 가면 날파리들이 따라오잖아요. 태양이 가면 소용돌이치듯이 아홉 개의 행성들이 빙빙 돌면서 같이 따라가고 있어요. 실제로 이래요. 태양은 움직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동방박사가 본 별은 하늘에 박힐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지금 땅에 와 있잖아요. 그러면 별은 예수님이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졸졸 따라가야 돼요. 그런데 인간만큼은 뻘쭘하게 있습니다. 저건 뭐지? 저 인간 왜 나타났지, 하면서 아무것도 몰라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지요. 제자들이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믿음이 없는 자야. 다른 말로 하면, “너 어딜/누굴 쳐다보느냐?” 그런 뜻이에요. 믿음이 없는 자야 왜 의심하느냐? 지금 제자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의심 문제가 아니잖아요. 풍랑이 갑자기 일었다는 그 문제지 왜 의심을 해요. 저희들끼리 시기, 질투했습니까. 풍랑이 일어서 배에 물이 들어오고 빠져 죽게 됐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물론 그전에 풍랑아, 잔잔하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왜 풍랑은 예수님의 말을 듣게 됐어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리고 풍랑이나 별이라는 대자연은 예수님 중심으로 따라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혼자 자기들이 중심이고 우리가 스톱돼있다고 본 거예요. 내가 사는 땅은 영원무궁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냥 없는데서 왔으니까 이상한 소리하니까 죽여 버리고 손 털고 별일 없을 걸. 예언만 늘어놨을 뿐이지, 특히 마태복음 24장 예언 보면 너무 살벌합니다. 여러분 다 아시죠. 마지막 때 이 세상이 어떻게 깨지는지. 심지어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달이 어두워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특히 대전 겨울수련회에서 한 요한계시록 할 때는 우당탕탕 했지요.

 

[생명의 신호] 158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난리가 났다. 일곱 천사, 일곱 대접, 일곱 나팔. 그런데 우리 일상은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가끔 중국에서 황사가 날아올 뿐입니다. 영화관 속에서 자기들끼리 총 쏘고 인천상륙작전하고 난리 났어요. 그런데 영화관 소리가 바깥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 격차가 갈수록 심화됩니다. 마귀가 체포되어 유황불에 들어가는데도 조용합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홀로 일찍 죽임을 당하신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인간은 남자에서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의 출생,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전체성의 자식입니다. 전체성은 전부, all, 모든 것의 자식이에요.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에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는 모든 것을 보완하고 보충하는 점점 더 허블 망원경보다 더 좋은 망원경 있으면 발견되는 플러스알파적인 요소지 이 요소 때문에 기본 본체가 흔들리거나 그럴 리는 없다고 여기는 전체성의 자식들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중심이고 싶어 해요. 우리한테 문제 있다는 생각을 손톱만큼도 하기 싫어해요.

 

유명한 천문학자 호킹 박사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우주는 왜 있느냐고 하니까 인간이 진화의 최정점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주는 있다고 했어요. 더 이상 인간은 진화가 없어요. 우주가 왜 있느냐? 우주가 저기 있네, 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라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 우주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불교에 의하면, 화엄의 인연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겼다고 이야기해요.

 

왜 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느냐? 현대인들은 방문에 잠겨있는데 가끔은 심심하면 세상은 의미가 뭐냐, 죽는 것 다음에 뭐가 있느냐, 나란 존재는 어떤 의미냐? 늘 하는 게 아니고 심심하면 묻게 되거든요. 묻는 마지막 답을 과학자가 대답해야 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네가 바로 진화의 최정점에 있다. 네가 바로 신이라는 뜻이에요.

 

큰 바위 얼굴, 누군가 올 것이라고 여기고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만 결국 어느 날 나이 많고 큰 바위 얼굴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당사자였습니다. 소망하는 자가 곧 그 세계의 중심이고 주인공이에요. 이걸 세 자로 전체성. 남자가 모든 인류의 대표가 됩니다. 그럼 여자는 뭐냐? 전체를 받쳐주는 마이너스 남자에요. 여자는 없어요. 남자를 위해서 여자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창세기 2장을 인용해서 이걸 배필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자가 왜 있는가? 남자를 돕기 위해서 있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여자가있는 것은 남자를   깽판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게 돌보는 거예요. 남자는 자기 자리에서 완료가 되고 스톱이 돼버려요. 신도 예수도 삼위일체도 나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걸 깽판놓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후손이 나오지요. 여자의 후손의 짝이 남자의 후손이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의 특징이 짝이 없어요. 성경 많이 봤지만 이건 안 보이든가요? 남자의 후손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에 이미 복속과 예속과 지배 속에 합류가 됐습니다. 남자 속에 여자가 포함되고 말았어요. 남자가 여자를 지배해놓고 두리번거립니다. 여자를 찾는 게 아니에요. 자기와 한바탕 붙을 상대자, 남자 없는지 찾습니다. 여자는 자기보다 급이 낮으니까, 자기 예속 하에 있으니까.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야 되니까.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 등장했다는 말은 이건 남자의 후손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인간이 아담의 대표거든요. 그 전체성을 파괴시키는 그러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남자에요. 요한계시록 12장에 여자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 점을 좀 더 친절을 다하여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남성의 성질과 여성의 성질이 달라요. 남성은 자신이 전체성입니다. 자기중심이에요.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미진한 것을 전체성에 포함되지 않는 예외적인 것을 하나 둬요. 남자들이. 그걸 ‘신’이라고 합니다. 이 신을 남자가 상대해야 될 신으로 보는 겁니다. 남자가 전체고 남자에 포함되지 않는 하나의 예외가 있다. 남자를 되게 하는 신이 있다는 겁니다. 이건 신을 믿는 거예요, 신을 필요에 의해서 요청하는 거예요? 신을 요청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전체로 있음을 인정해주는 시다바리 신인 거예요.

 

현재 내가 남성으로서 전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걸 호응해주고 받쳐주고 남자가 여성을 지배하는 것도 합법화시켜주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 남자를 후원해주는 신을 하나 걸쳐놓은 겁니다. 그리고 그 신에게 다가가는 것은, 여성은 다가가지 못하고 여성은 반드시 남자한테 인수인계된 여자의 운명은 남자한테 일체 맡기고 남자가 신에게 다가가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여성은 뭐냐 하면, 남자한테 소속될 수도 있고 발을 뺄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여성에게 있는 걸 여성적 속성이라고 해요. 여성적 속성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남자한테 매일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럼 남자는 애가 타지요. 저걸 마저 잡아먹어야 되는데. 여성은 본인이 필요에 따라서 남자에게 용납할 수도 있고 싫으면 뺄 수도 있고.

 

그래서 라캉은 여성은 없다는 말을 했어요. 왜 없느냐 하면, 남자가 원하는 여성은 일단은 남성의 소유물로 거치고 난 뒤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진짜 여성은 없는 거예요. 여성은 없는데 여성이 활개 치거든요. 그럼 저건 뭐지? 그걸 신비라고 했어요. 여성은 신비에요. 신비기 때문에 열 명의 여성을 거느려도 신비로운 여성은 자기 범주 바깥에 또 있어요. 열 명은 일단 아니야. 이미 남자가 다 돼버렸어. 그 너머에 또 하나 찾아야 돼요. 끊임없이 찾아요. 열한 명? 열한 명 끝났어. 열두 명 째, 열세 명 째.

 

여성이란 남자의 전체성에 문제 있음을 지적하는 거예요

. 목사님, 그건 하나님이 지적해야지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미 남성과 한 패가 돼있기 때문에 소용없어요. 신과 남자가 한 패가 된 그 한 패마저 몽땅 웃기고 있다고 비웃을 만한 자유로운 영혼, 거기에 여성이 있는 게 아니고, 여성이 나타나고 등장해요. 있으면 안 돼요. 있으면 찾아가니까. 우연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지요.

 

믿거나 말거나. 마태복음 간단한 걸 그렇게 억지를 부리시면 그 억지에 동조하라는 느낌 주지 말라고 하는데. 여러분, 이건 친절을 다한 거예요. 억지가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한테 시비 걸고 싶어요. 정말 억지가 아닙니다.

 

우선 마태복음 1장 봅시다. 17절,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자, 헤아려 봅시다. 아브라함 1, 이삭 2, 야곱 3, 유다 4, 베레스 5, 헤스론 6, 람 7, 아미나답 8, 나손 9, 살몬 10, 보아스 11, 오벳 12, 이새 13, 다윗 14. 아브라함과 다윗까지 14대 맞지요. 맞는 것처럼 보여요.

 

그 다음 봅시다. 다윗 1, 솔론몬 2, 르호보암 3, 아비야 4, 아사 5, 여호사밧 6, 요람 7, 웃시야 8, 요담 9, 아하스 10, 히스기야 11, 므낫세 12, 아몬 13, 요시야 14, 여고냐 15. 왜 15가 됐지요? 왜 15냐 말이죠.

 

그 다음에 세 번째 14대 봅시다. 여고냐 1, 스알디엘 2, 스룹바벨 3, 아비훗 4, 엘리아김 5, 아소르 6, 사독 7, 아킴 8, 엘리웃 9, 엘르아살 10, 맛단 11, 야곱 12, 요셉 13, 그리스도 14. 14지요.

 

그런데 앞과 마지막 14대는 맞는데 중간은 15가 됐지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여기 6절에 보게 되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에요. 그러면 다윗 1, 솔로몬 2 하면 안 되고 우리야 1, 솔로몬 2 해야 되는데 우리야 자리에 우리야의 아내가 들어가요. 여자가 들어간다고. 그러니까 이건 남자의 전체성에서 전체성 세계 자체가 여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거예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지금 지구가 움직이느냐, 태양이 움직이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세계 전체가 하나님이 도와주러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 인간들이 처음부터 누굴 졸졸 따라가야 돼요. 그분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이 땅 전체에 없는 존재로 신원 조회가 안 돼요. 없는 존재로써 와야 됩니다.

 

신원 조회고 뭐고 그냥 왔다고 하면 될 텐데 왜 그러냐? 문제는 여자의 후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머지는 뱀의 후손이 된다는 거예요. 뱀의 후손이 되면 전부 다 살 처분돼야 돼요. 이게 마태복음 24장에서 지구 멸망의 타당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박살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그걸 언급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믿어서 구원받자. 그건 마태복음에 있지도 않는 이야기에요.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고 침입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도둑놈으로 와요. 담 넘고 와서 자기 백성 빼가는 거예요. 흥분할 게 아니고.

 

그냥 난데없이 누가 왔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중심이고 이 세계는 영원무궁하다고 자부하는 세계에 누가 날아 왔어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플러스 하나, 어떤 괜찮은 인물 하나, 어르신 하나 온 모양이다. 같이 의논 맞춰서 잘 살면 되겠네, 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신 그분이 이 지구를 완전히 작살낸다고 했을 때 어느 누가 납득하겠어요. 제가 오후 설교에서 했지만 어떤 교회 철야기도 시간에 주여, 저를 저주하고 집안 말아먹게 하옵소서, 이렇게 철야 기도하는 사람 없다고 했지요. 그만큼 다른 예수 믿고 있는 거예요. 다른 하나님 믿고 있는 겁니다.

 

평소에 전체성, 남자 중심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을 남자 중심의 후손이 만나고 이바구한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만날 수 없고 접촉이 가능하지 않아요. 그럼 안 되는 접촉을 어떤 식으로 되느냐? 그건 10분 쉬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