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강 허무한 명분 (정석훈 목사 녹취)
사사기 12장에 보면 입다의 딸이 죽고 난 뒤에 입다가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때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암몬 사람들과 싸울 때에 왜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고 말합니다.
이전 사사기 8장에서 기드온이 미디안을 파하고 돌아왔을 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에브라임이 행동 합니다. 분명 입다는 암몬 자손들과 싸울 때에 에브라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4절에서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입다는 길르앗 사람과 더불어 에브라임 사람들을 칩니다.
5,6절입니다.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데 나로 건너게 하라 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게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 천명 이었더라”
이것은 전쟁영웅은 나라를 다스릴 합당한 권한이 있다고 스스로 그렇게 내세우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한 쪽에서만 발견되는 차이입니다. 치는 쪽에서만 발견되는 차이 십볼렛이냐 씹볼렛이냐, 살이냐 쌀이냐의 차이입니다.
이런 차이는 사실 레위지파를 은혜를 받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십볼렛 하든지 씹볼렛 하든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위지파의 은혜가 끊어지고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는 기준에서 보니, 너와 나의 차이를 두고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사만 이 천명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모습입니다. 비록 이것이 집단적이 모습을 띤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왕이 없으므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것은 사사기 21장에서 이스라엘 연합군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죽여 버리고, 남은 사백 명 젊은 처녀들을 베냐민 자손에게 주었습니다. 나머지 부족한 이백 명은 매년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에 올라오는 선교단체 아가씨들을 납치해서 강제 결혼하라고 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족한 한 지파 베냐민 지파를 채우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도하는 주인공들, 그들이 아무리 승리했고 권력을 장악해도 하나님 보시기는 왕이 없으므로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이것으로 함몰되느냐? 무너지느냐?
그런데 사사기를 보면 동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라는 A층인 현실 층 즉 관념, 개념, 기호, 언어, 상징, 역사 그야 말로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입니다. 현실이란 해석의 결과입니다. 이 세상 보는 것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면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됩니다.
A층,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현실이 캐묻게 됩니다. 네가 어느 정도 힘을 갖고 있는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 희미한 등불 밑에서 눈물만 뚝뚝 흘립니다. 이것이 옥경이의 현실입니다. 묻는 것이 전부 이런 것입니다.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리고 좀 살았다 싶으면 자랑질 합니다.
그런데 A층 밑에, 즉 사사기 아래층에 동행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룻기입니다. 룻기는 사사기 9장 이후에 발생하는 사건의 지하층(B층)을 형성하면서 그곳에서 사람들이 구하지 않은 하나님께서 준비한 왕이 나옵니다. 그 왕이 이방나라에서 나옵니다. 이방나라는 이스라엘에는 없는 사람입니다. 부재, 마이너스 혹은 0입니다. 이렇게 없는데서 있게 하십니다. 마치 없는 이스라엘이 밤에 만들어진 것처럼.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꼭 백부장 같습니다. 백부장이 이방인인데 그 이방인이 천국의 본 자손을 추방시키고, 이방인이 그 자리를 다 차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본 자손은 쫓겨나고 그 자리를 이방인이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는 그 자체가 안티 이스라엘, 즉 스스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계획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사기를 통해서 자기 가족부터 먼저 챙기고 자 감정부터 먼저 챙기고 자기 민족부터 먼저 챙깁니다.
사사 삼손이 민족을 구하는 것과 여자 1,2,3을 따라다니는 것이 똑 같습니다. 그저 이스라엘을 어떻게 한번 살려 볼까? 사사들 열둘을 집어넣었지만 제대로 된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사본인부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니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사기에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K1 시합할 때 울타리 안에서 싸우는 것을 우리는 밖에서 구경하는 것처럼 구경하면 됩니다. 이렇게 밖에 나온 사람이 희망이 있습니다. ‘주여 내가 사사가 되겠습니다.’는 식으로 나대지 마세요. 나대는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사인데 나대니까 사사가 가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댈 때는 반드시 명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얼마나 허무하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까먹고 덤벼 덥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 바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 어머니의 서원대로 제가 신학교 가서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이럴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간단합니다. ‘나대지 말고 쓸데없이 맹세한 입다를 보면서 네가 깨달아!’라고 하십니다. 말도 안 되는 맹세를 하면서 하겠다는 그것은 그모스나 몰렉 즉, 이방신을 섬기는 버릇이 또 나온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살아도 주님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우지만, 하나님은 성의 표시만 하면 복 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님이 좋습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말이 훨씬 와 닿습니다. 성의만 표시하면 복 줍니다. 평안할 때 기도하지 않다가 아쉬울 때 성의를 표시하면 복 주는 그것이 사사기입니다.
우리는 K1 경기장처럼 울타리 쳐진 바깥에서 반장이 선생님께 얻어맞는 것을 보자 이말 입니다. ‘아 저렇게 나대다가 얻어맞는구나!’ 우리는 할 자격도 없이 가만히 있었을 뿐입니다. 그야말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 간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민족을 위해 살았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그런 사람들의 귀한 명분을 다 무시한다는 말입니까? 가족과 국가를 살린다는 그 고귀한 것을 무시한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구약시대입니다. 신약은 아예 우리를 죽여 버렸습니다. 명분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바짝 마른 뼈인데 거기에서 무슨 명분이 나옵니까?
삼손의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를 낼 때 수수께끼가 카메라 줌 역할을 합니다. 수수께끼를 낼 때 삼손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들이 수수께끼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수수께끼에 쫙 빨려 들어갑니다. 수수께끼를 풀면 진리가 나오는 줄로 압니다.
허무하면서도 허무한 줄 모르는 사람들을 허무하게 되돌려 주는 것이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를 풀어 보니 삼손이 배고파 사자를 때려잡아 죽였는데 나중에 그곳에서 꿀이 나와 그 꿀을 퍼먹는 사적인 이야기가 수수께끼의 해답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수수께끼를 만들게 하신 요인이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명분 때문에 의미를 갖고 산다는 우리로 하여금 허무의 극단에 이르게 합니다.
‘인생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자에게 주님은 ‘네가 그것 알아서 뭐하려고 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사는 것이 뭔지?’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것 네가 왜 알아야 하는데?’ 라고 하십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삽니까?’ 라고 하면 ‘그냥 허무하게 살아’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허무의 끝을 보라고 하십니다. 허무의 끝을 보니 거기에 지하층에 흐르는 B층, 즉 하나님께서 자기 증명을 위해 스스로 예정했던, 우리에게 묻지 않았던 따로 준비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룻기’입니다.
요란한 현실, 옥경이 세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습니까?’를 내어 놓는 그러한 현실세계 밑바닥에 지하수로 흐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모압 여인, 저주 받을 이방여인이 시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시어머니가 자기 민족의 고향인 모압 땅으로 온 후 모든 것을 날리고 망했습니다. 남편 죽고 아들 둘 다 죽었습니다. 허무 그 자체입니다. 이제 손 털고 돌아가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꼴아 박게 하셨구나!’ 라고 했을 때, 룻은 약속의 땅에 적용되는 원칙인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끝내는 그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허무로 몰아넣는 분입니다. ‘같이 허무하자. 같이 죽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의 죽음에 관심 있는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입니다.
A층 즉, 현실 층 때문에 B층이 숨어 있습니다. 숨어 있는 B층의 존재는 A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럴 때 A층에서 B층과의 만남 즉, B층이 현실에 드러납니다. 이것이 사사기 13장에 나오는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율법의 인격화입니다.
이제는 율법을 그들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증명하는 절차가 법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드러내는 절차가 법입니다. ‘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롬4:15).’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책감만 증가합니다. ‘법을 지켜야지’ 하면 법에서 ‘저리 가라’고 합니다. ‘법은 네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있을 것’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7절에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 법을 지키기 위해 따로 인격자, 인물을 준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법에 손대는 것이 아니라 허무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법을 지키겠습니다. 저도 이제 성령 받았으니 성령 받은 티를 팍팍 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저리 가세요!’
성령 받았으면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뿐이지 무얼 지키겠다고 합니까? ‘저리 가세요.’ 그러면 또 로마서 8장 4절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라’고 반박합니다. 그 말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속았습니까? 복음을 알기 전에는 성령 받아서 율법 지키자는 말에 얼마나 복종했습니까? ‘여러분들이 성령 받지 못했을 때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는데 성령 받았으니 율법 지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는 말에 세뇌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죄책감만 증가할 뿐입니다. 법이 주는 저항감이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빨리 달아납니다. 우리는 법의 완성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증서 써주면 이혼된다고요? 주님께서는 법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하십니다. 간음죄가 달라집니다. 한 번도 바람피우지 않는 사람이 가장 간통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기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자 나이 구십이면 인간 되는 줄 압니까? 애초부터 인간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인간인 것을 증명해 보세요.
허무합니다. 삼손은 민족이고 무엇이고 자신의 9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는 무의식, 물론 이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무의식의 감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조절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실인이야. 나는 하나님의 예정된 사명을 감당해’ 라고 하지만 그 내부는 여자 1, 2, 3만 있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양다리 걸치지는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삼손 자신의 모든 힘은 자기가 원하는 여성을 차지하는데 몰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블레셋이 죽어 나갑니다. 무슨 이런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해방합니까? 삼손은 자신의 사적인 욕구, 욕망을 발산하면서 그 부산물로 나오는 것이 ‘블레셋은 죽었다.’입니다. 여러분 이것도 구원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초월합니다. B층은 예수님과 하나님만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무엇이 있긴 있지만 그것의 존재 확인은 A층, 즉 언어의 존재 층에 올라 와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성경말씀은 언어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인격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재로 보았습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다.’로 본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이론이 삼위일체입니다. 왜 삼위일체 교리가 엉터린가 하면 삼위일체 안에 하나님의 존재를 가두어 놓고 내가 삼위일체 외부에 존재하듯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피조물인데 존재한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면 주님도 나와 동일한 존재함의 속성이 있으니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천국 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세부터 나온 신학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주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우상입니다.
‘내 모자가 빨갛다.’고 한다면, 모자는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습니다. ‘모자가 빨갛다.’ 이것이 모자에 대한 모든 것입니까? ‘모자는 머리에 쓰는 것이다.’ 이것이 모자의 속성에 맞는 실체가 됩니다. 엄마에게 ‘모자 빨갛다’고 할 때 엄마는 ‘모자는 머리에 쓰면 된다.’고 합니다. 모자와 합치되는 것은 기능이지 빨갛다, 노랗다는 색깔이 아닙니다.
지금 B층에 있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A층으로 올라오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얻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믿는다는 믿음이 내 존재에서 나온 내 존재를 정당화 하는, 내 믿음을 정당화하는 욕망에서 나온, 나의 실체에서 나온 더러운 속성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믿지 않으면 되는데 얼마나 믿음 없으면 믿고자 합니까? 믿지 않으면 됩니다. 마지막 시간이 위기입니다.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위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목사님 어떤 사람이 죽으면 이 땅에 있는 자아와 동일성을 갖고 있는 같은 인간이 됩니까, 아니면 다른 인간이 됩니까?’ 이 질문 만드는 것도 수년 걸려서 만든 질문입니다. 뭔가 궁금한데 열심히 연구하다 보니 만들어낸 질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내가 동일한 나로써 천국에 살게 되는 것입니까?’ 걱정 반 우려 반, 합쳐서 전부 염려입니다.
천국 갈 때 ‘나’라는 것이 그냥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호출당한 언약의 호출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를 그냥 보지 마시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속성을 반영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끝나고 난후 속성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긍휼의 그릇, 다른 하나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이것 밖에 없습니다. 진노의 그릇에 맞게 새롭게 피조 된 자는 지옥에 모이고, 주님의 긍휼 속성이 담긴 자들은 긍휼을 입고 천국에 갑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행했던 인간의 축척된 행함은 어떻게 됩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행한 대로 심판받아 지옥 갑니다. 그것이 ‘행위 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하기 때문에 어떻게 행해도 그것은 ‘네가 반드시 행해야만 했던 행위’라 해서 그 책임을 주님이 가져가 버립니다.
주님께서 ‘네가 나에게 속하지 않았다면 그런 강도짓 하지 않았겠지?’라고 하시면서 가져갑니다. 우리를 위로하는지 나무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내 안에 있는 속성이 나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 허락 없이 주께서 장악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나실인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삼손은 없습니다. 나실인이 먼저입니다. 얘기 없는 곳에 그 속성을 집어넣기 위해서 마노아 가정에 나실인으로 얘기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실인이란 무엇인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고유시간을 확보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고유시간을 확보했다는 말은 보통은 해와 달과 별에 의해 시간이 지나가지만 나실인의 머리카락에 고유시간을 확보합니다. 이 세상, 옛 하늘과 옛 땅에 저촉 받지 않는,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의 시간을 체크하는 시간이 나실인의 머리카락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인격으로 버린 인물이 나실인입니다. 이 근거는 보통의 제사 제물에는 사람의 신체일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보자가 있지 않습니까? 더럽기 때문에 어린양이 있습니다. 그 어린양이 들어갈 자리에 더러운 것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런데 화목제물에 나실인이 서약한 기간 동안 자라난 머리카락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나실인인 그 인간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장차오실 메시아를 율법의 인격화로 미리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장착을 한 것입니다. 이럴 때 삼손은 두 가지를 보여 주어야 됩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자신이 머리카락으로 인해 힘을 가졌을 때, 이 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사십년 압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알지만 여자가 좋은데 어떡합니까? 이것은 자제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절제할 수 있었다면 벌써 절제 했습니다. 절제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체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랑받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고 그냥 혼자 사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절제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안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오히려 우리의 껍질이 더 벗겨집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삼손이 민족을 해방한다는 그런 사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여자만 밝히는데 자신의 온 힘을 던집니다.
성공했습니까? 여자 하나 건졌습니까? 세 명 다 놓쳤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나실인의 사명에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일부러 B층을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졸지에 자신이 의인이 됩니다. 아래층에 등장하는 룻은 윗부분, A층 즉, 옥경이 현실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A층은 율법이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인격화 된 사람이 나실인 삼손입니다. 이 삼손과 룻을 나란히 놓고 보면 명확해 집니다. 삼손은 율법의 인격화인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신을 받았지만 그 머리카락은 자신의 정욕과 자신의 욕망에 소비했습니다. 수수께끼를 내었는데 수수께기를 풀어보니 허무로 끝났습니다. 허무로 끝난 그 자리가 얇은 습자지가 됩니다. 십자가는 이곳을 뚫고 들어옵니다.
로마서 1장 3,4절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습자기를 뚫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그분이 살아있는 다윗이 메시아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다윗이 노골화된 현실세계를 뚫은 유일한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습자지를 뚫었습니다. 그렇다면 습자지에 귀 기울이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바로 허무하게 사는 것입니다. 극단의 허무, 사랑의 체제에서 벗어나서 사랑해도 아무것도 아니요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아닌 어떤 명분도 핑계에 불과합니다.
허무하면서도 허무하지 않은 척하며 살아왔던 세계가 옥경이 층입니다. 개뿔도 없으면서 있는 척해야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재미로 사는 세계입니다. 복음은 뚫는 것입니다. 내가 뚫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뚫으면 허무를 내 손에서 해소하려는 나의 종교적인 시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여 이 정도로 낮추면 되겠습니까?’ 라는 식입니다.
몽골에서 선교하는 어떤 사람이 쓴 책 [내려놓기] 상하가 나왔습니다. 내용을 보니 복음은 없고 자기 자랑만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정도 내려놓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면, 이에 대해 주님은 ‘그것마저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또 한층 더 낮추어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라고 재차 물으면, 주님은 ‘그것도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또 더 낮추어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로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네가 천성적으로 허무한 존재임을, 기원적으로, 시원적으로 허무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네가 알기 까지는 너는 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A층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임을 자랑으로 삼고, 내가 믿음 소망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세계가 옥경이 세계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면 ‘저는 어릴 때 어떻게 했고, 어떻게 했고’ 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은 행함이니 지옥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성으로 인간의 동일성을 유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네 속성을 유지하는 한 갈 곳은 지옥 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자고 한 사람은 거지 나사로입니다. 부자가 지옥 갔습니다. 지옥 가서 하는 행세를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에게 지시해서 자신에게 물 좀 갖다 달라고. 세상 살든 그 버릇 지옥가도 안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성이 자기 실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가도 우리 속성 안 버렸다는 말은 곧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지옥이 궁금해요? 보고 싶어요? 마음껏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가면 ‘서로를 보시고 인사하시고 사랑 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허무를 보세요. 최 허무, 김 허무, 박 허무, 서로서로 허무로 악수합시다.
사사기는 K1 격투기 경기장입니다. 이방인은 들어 갈 수 없고 관여할 문제도 아닙니다. 단지 밖에서 구경하며 지켜보라고 합니다. 삼손을 보라. 끝에 허무로 끝났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허무해야 하도록 태어난 것이 천성적인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런 허무한 상태에서 습자지에 귀 기울입니다. 물론 귀 기울인다고, 십년 지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무로 살자고 할 때 뚫고 들어옵니다. 산 다윗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다윗이 뚫고 들어오면 우리를 삼켜 버립니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듯이 우리를 삼켜버리면 이것이 우리가 예상 못한 기적입니다. 성령 받은 것이 기적이고 십자가를 아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기적 받았다면 다른 기적은 갖다 버려야 합니다. 다른 기적은 내가 있다는 유혹거리가 되기 때문에 갖다 버리세요.
재산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재산 꼭 쥐고 있어야 자식에게 버림받지 않습니다. 부동산 꼭 쥐시되 나의 가치는 허무 자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가치는 허무의 끝장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삼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보았자 내 감정을 위해 핑계 되고 변명하며 소비할 뿐입니다. ‘나 의인인데 이 정도는 어때’ 라는 식입니다. 그런 본색이 그 동안 나도 미처 몰랐던, 그런 못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주께서 구원받는 절차로서 그것을 행하게 하십니다.
마지막 대목입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립니다. 머리카락 속에 해와 달과 별로 측정되는 시간이 아닌 B층,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위해 예정된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려버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블레셋은 승리의 개가를 부릅니다. 삼손을 죽이는 장소가 의미심장합니다. 블레셋의 신 다곤의 신전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죽은 분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는 신명기21장 22-23절 말씀처럼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계시적 싸인이 됩니다. 저주받은 자가 맞습니다. 그 저주 받은 자에 동참하는 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자신의 행함은 죽고 오직 십자가로만 구원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십자가 이야기할 때 A층 에서는 십자가 사건이 15년 전 지나간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는 순간 밑바닥에 흐르는 B층이 항상 현실 층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계는 있지만 한계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죽은 자로 보이고, 십자가 안에서 내가 너희를 보니 너희가 죽은 자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한쪽에서만 본 차이입니다. 이 땅은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자의 입장에서, 자기 쪽에서만 보기 때문에 그렇게 오류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밑층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예정에서 본 그 차이는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승리했다고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스타 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에 와서는 스타 의식이라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허무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자 그러면 룻기를 봅시다. 룻기는 이와 전혀 다른 흐름이 흐르고 있습니다. 룻은 ‘망한 집안을 하나님이 망하게 했기 때문에 나도 망해도 좋습니다.’라는 식으로 같이 그곳에 뛰어 덥니다. 정말 이상한 여자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말렸습니다. ‘나이도 젊은데 희망이 있다. 새로 시집 가거라. 요즘 세상에 흠이 아니다. 총각들은 얘 있고 이혼해도 착하고 예쁘면 무조건 좋아한다.’ 예쁘고 착하면 기회는 항상 열려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럴 때 룻이 말합니다. ‘저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를 망하게 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라고 합니다. 이제 나오미는 이름을 바꿉니다. 마라, 슬픔의 여자로 바꿉니다. 기쁨으로 갔다고 슬픔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래층에 있는 룻기는 출애굽 대기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제는 외부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우리의 대는 끊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율법이 개입됩니다. 율법의 인격화는 삼손이 다곤 신전에서 죽을 때 비로소 나실인의 사명을 마감합니다. 나실인 된다는 것은 죽으라고, 율법의 완성은 죽음이라는 것을 비로소 압니다.
나실인 삼손은 그동안 이스라엘 지배의 명분이었던 다곤 신상에서 죽습니다. 다곤 신상 기둥 둘을 붙잡고 죽습니다. 건축가들은 삼천 명이나 들어가는 곳의 건축기둥이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쇠사슬로 묶었던 것을 잡아당기니 기둥이 무너지면서 다곤 신전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되지도 않는 것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문에서 가장 먼 것을 고르는 것과 똑 같은 짓을 합니다. B층을 모르고 A층에서 놀던 버릇을 가지고 해석합니다. 창조과학회가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옛날 유물 파면, 땅 파면 거기에 예수가 나옵니까? 이 세상은 수수께끼입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이 이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해답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해답을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은 허무입니다. 90년을 살아도 해답을 모릅니다. 몰라야 됩니다. 그러면 알아야 된다고 합니다. ‘네가 뭔데 알아야 되느냐?’ 모르기 위해 태어났는데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습자기 뚫고 십자가 들어오면 모든 것을 다 압니다. 모든 연령이 다 시청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어떤 분이 ‘얘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얘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얘들에게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통성 기도하는 얘들처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안 됩니다. 얘들은 나름대로 허무를 압니다. 그것이 절차입니다. 나름대로의 허무를 느낍니다. ‘엄마 시험문제 한 개 틀렸어. 죽고 싶어’ 이것이 바로 허무입니다. ‘나 인생 이렇게 살아야 되겠어?’ 라는 식으로 허무를 느낍니다. ‘주님이 주신 절차야.’라고 하면 ‘무슨 그런 주님이 다 있냐?’ 라고 할 때 ‘어, 주님께 관심이 있네.’ 이렇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관심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문제는 부모의 욕심입니다. 무엇을 기대합니까? ‘엄마 나 십자가로 구원 받았어요’ 라고 하면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용돈타기 위한, 스마트 폰 얻기 위한 술책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것을 하지 마시고 허무로 태어난 원천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허무하냐? 나도 허무하다.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출애굽 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삼손은 조금 자란 머리카락과 자신의 목숨을 바꿉니다. 나실인 즉, 율법의 인격화는 반드시 언약대로 죽는 죽음을 거칠 때 비로소 나실인의 사명은 마감이 됩니다. 나실인은 포도나무에 관련된 것과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적용시킵니다.
누가복음 22장 1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이 나실인이라고 증거하십니다. 나의 죽음이 율법의 인격화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자체가 인격화된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B층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B층과 A층의 경계를 뚫고 A층, 즉 기호의 세계, 상징세계, 현실 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고 부활한 후 자기의 세계로 가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임시적인 정류장이 됩니다. 그런데 이 원리가 다윗을 탄생시킨 룻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룻기에 보아서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아스가 참 멋진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보다 보아스가 좋습니다. 첫째, 부자이고 두 번째는 과부라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완전 드라마입니다. 세 번째 남자가 침착하다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내 아이 낳아달라고 하지 않고 먼저 다른 사람에게 권리를 물어 보고 정당하게 권리를 삼으로 말미암아 ‘내 아내가 되어 줄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보아서는 이용당한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이용당했습니다. 늙은 여우에게 이용당했습니다. 할머니를 조심해야 합니다. 할머니 정도 되면 이미 사랑의 체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자기만 사랑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귀찮습니다.
나오미가 부자이면서 자기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 보아스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낳은 자식은 죽은 자신의 남편 호적에 올려 버립니다. 그 방법이 바로 노선 교체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 교체입니다. 법적인 장남 따로 있고 마음속의 장남이 따로 있습니다. 주님 마음속의 장자는 따로 있습니다. 인간의 족보에서 이탈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아니면서 아들 되게 하는 작업, 그 작업을 위해서 기존 법적인 아들을 죽여 버리고 죽은 그 아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 호적에 넣기 위해서 죽은 우리에게 성령을 불어 넣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 너희도 살리시리라(롬8:11)고 합니다.
이 모든 효과는 바로 철도 노선을 교체하시는 룻기의 법칙, 즉 다윗언약의 법칙에 의해서 육에서 영으로, 육에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작업을 구약부터 시험을 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보면서, 율법 지킬 필요도 없고 극렬하게 아무것도 하지를 마세요.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한 것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습자기 뚫고 올라온 십자가를 알아 버리니 그동안 내가 노력했고 알았던, 교회에서 했던 것으로 너무 돌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허운석 선교사님 말씀대로 너무나 돌아 왔습니다.
정말 쓰잘떼기 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다 이루었는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습니까? 허무하게 되어 있는 것을 새삼스럽지 않게 여기게 하시고, 허무하기에 날마다 십자가를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