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강-신 16장 9-12절(칠칠절)1607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6장 9-12절입니다. 구약성경 288페이지입니다.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역사에다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심어놓았습니다. 이 인류의 역사에. 그래서 하나님을 찾을 때에 뭐 대한민국의 역사라든지, 뭐 필리핀의 역사라든지, 그렇게 찾지 마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언약을 주시고 약속을 나타내신, 그리고 동행하신,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이렇게 규합해야 됩니다. 정리가 되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던 그 시기도 다른 모든 민족들은 다 나름대로의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과 지상의 있는 자기 민족과 통하는 그러한 채널을 만들었는데, 그 채널이 뭐냐 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은 왕을 신의 자녀, 혹시는 신의 증인, 신의 사자,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묘사하고 표현했습니다. 두 민족이 전쟁을 한다, 이거는 외부적으로 볼 때는 왕과 왕이 맞짱을 뜨는 것이지만 사실은 각자의 자기 민족에게는, 이거는 우리를 지키시는 신과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라고 그렇게 부추깁니다.
모든 민족들이 다 그래요. 지금 중국도 마찬가지고, 고대역사도 마찬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류의 역사들이 나름대로의 자신의 신들을 앞장세워서 그렇게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인 신이, 가시적인 것, 눈에 직접 나타난 그 신의 모습은 곧 왕입니다. “왕을 본 자가 곧 신을 본 자다.” 고대 이집트부터 뭐 계속해서 그렇게 돼요. 이집트의 신은 태양신의 아들이에요. 그러한 흔적들을 출애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에, “내가 신들에게 재앙을 내린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들에게. 바로 바로 왕을 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이집트에 있는 신의 대변자 역할을 해요. 따라서 신의 아들, 왕의 자식을 죽이는 것은, 그것도 맏아들을 죽이는 것은, 곧 이 애굽 나라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저주받을 나라라는 뜻입니다.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신들이 가짜임을 들통 내고 그 들통 낸 증거로써 소위 신의 대리자로 군림하는 이 바로 왕과 그 집안을 아주 대를 끊어버립니다. 그게 열 가지 재앙들 중에 마지막 재앙이에요. 마지막 재앙이 맏아들 죽이는 건데, 초점은 바로 왕의 아들을 죽이는 겁니다. 덩달아 그 애굽에 있는 모든 가정들의 맏아들은 다 같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서 신을 부정한다고 하지만, 다들 신을 부정한다고 말하지만, 신을 부정한다, 나는 무신론자다, 라고 하지만, 방금 이 원리에서 추려보면 ‘나는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못 믿고 유보해 놓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이 없다가 아니라 내가 눈을 확인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내가 뭘 믿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렇게 한 곳에다 밀쳐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했던 그들이 막상 거기서 어떤 과학자가 되던, 물리학자가 되던, 생물학자가 되던, 또는 판사가 되던, 그렇게 한 평생 살고 마지막 나이 들어 보게 되면, ‘나 죽으면 어떻게 되지?’ 라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동안 신이라는 것을 자기의 편리한 용도로 사용했는데, 막상 죽음 앞에서 자기가 자신감이 없는 겁니다. 그럴 때 연세 들어서 급하게 교회를 와요. 교회 오면 급한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이거 사단 나는 거죠. 사단 나는 겁니다. 자기 정당성을 기어코 고집하면서도, 자기 정당성과 하나님이 붙을 본드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붙을 수가 없잖아요.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이게 내 몸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의 종교생활 스티커 붙이듯이 해버리면, 이게 떼면 언제든지 떼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되어버리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깊숙이 하나님이, 야! 믿자! 영원토록 우리 민족이 유지되기 위해서 신을 믿자가 아니라, 아예 그 민족 깊숙이 신이 개입된 나라는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나라 자체가 아예 없던 거니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생겨난 나라가 유일하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다면 그것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거죠.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제대로 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복 받은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제대로 된 저주, 저주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 부여된다는 점에서 복 받은 민족이에요. 여차하면 당하니까. 누구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그럼 다른 민족은? 다른 민족은 신을 자기가 필요한 대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 신을 바꿔치기 한다든지, 뭐 바꿔볼까? 한다든지, 이러면 신은 노리개이기 때문에 장난감 갖고 놀다가 싫증나면 바꾸면 되잖아요.
근데, 실제로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하나님의 긴 꼬리, 또는 하나님의 몸통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이스라엘밖에 없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가지고 온 지구상의 모든 민족을 맞닥뜨리게 하고 만나게 합니다. 그 지구상의 민족들과 이스라엘과 만나는 그 사건을, 그러한 경우들을 4대 민족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4대 민족으로. 이스라엘 자체에 열 족속이 있었고 그 뒤에 제국들이 등장합니다.
바벨론, 메대파사, 헬라마케도니아, 로마, 이게 바로 다니엘에 나와요. 다니엘에 이거 나오면서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말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장렬하게 멸망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줬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뭉개버려요. 지금에 있는 이스라엘은 혼혈아들입니다. 아무 핏줄하고 관계없어요.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아놨는데 모아놓고 보니까 핏줄이 너무 섞여서 그 아브라함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냥 팔레스타인 땅 차지하고 있는 일개 민족밖에 안 돼요.
구약적인 이스라엘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 잔재가 남아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유대나라가 되고요. 유대나라도 로마에 의해서, 티토스에 의해서 AD71년경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세상 DNA속에, 핏줄 속에 흩어져서 흔적도 없이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세계 금융을 쥐고 있는 민족이 있는데, 그 민족이 유대민족이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통화나, 화폐, 달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제통화금융위원회에서 하는데, 통화금융위원회장이 이제껏 유대인이 아닌 자가 없어요. 지금 유대인들이 그걸 다 갖고 있는 거예요. 3차 대전 아무 상관없습니다. 7년 대환란 아무 관계없고요. 그냥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혼혈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표현상 유대인이지만 아무 의미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차를 바꿨다고 할까나? 자진해서 그 이스라엘 차를 고물로 해버리고 다른 차를 갈아탔는데 그 차가 뭐냐, 신약의 교회라는 겁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차를 타고 오셨다가, 알아서 스스로 망쳐버리고, 이제는 교회로 갈아타셨는데, 그 교회라는 것이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먼저고 나중에 생긴 것이 이스라엘이라면,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그 몸이 먼저고 그 몸의 지체로서 등장해야 할 그러한 단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여러 장소에 있더라도 항상 교회는 여러 개라고 하면 안 돼요. 단 하나여야 합니다. 머리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이 세상의 교회는 오직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너는 어느 교회 다니냐고 물을 필요 없어요. 우리는 오직 어느 교회가도, 심지어 교회 안 다닐지라도, 우리는 하나의 몸에 소속이 되면 됩니다.
신분적으로 하나님이 먼저고 이스라엘인 것처럼, 예수님의 몸이 먼저고 그 다음에 우리가 거기 지체로서 들어붙어있는 겁니다. 이 설명을 하면서 제가 문어이야기를 많이 하죠. 문어몸통 있고 문어발 8개있고. 그래서 우리가 주어진 모든 삶은, 우리가 80까지 사는 것은 며느리가 반찬 해줘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은혜로. 니는 니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몸통 안에 있는 가지들로서 살아가셔야 되는 겁니다. 언제쯤 이런 고백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었던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반드시 해야 되죠. 왜 갈아타기를 하셨습니까? 우리의 상식은 뭐냐 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이 교회의 당회장이라면, “우리교회는 당회장이 하나님이란다. 예수님이란다.” 이러면 단박에 떠오르는 것은, “그럼 그 교회는 안 망하겠네.” 그 생각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망하게 함으로써 속에 들어있는 진짜 교회를 내비치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만약에 네 식구가 있다, 사진 한 장이 딱 붙어있다, 중국에서 사진사가 눈길에서 찍었는데, 그 그림 밑에 예수님은 이 집에 보이지 않는 주인이요, 하는 그런 사진이 딱 걸려 있다 칩시다. 자,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래서 우리 집은 안 망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때문에 우리 집안은 뿔뿔이 흩어지고 망해야 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혈육으로 연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내 형제와 자매는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혈육적인 내 자식이 내 형제고 내 자매가 되면 굉장히 좋죠. 참 이런 복이, 그러나 그걸 미리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왜? 몸통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리 내 자식, 내 남편이 하더라도 지옥가면 지옥 가는 거지,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고 태클을 걸면 안 됩니다. “얼마나 기도했는데 보내십니까?” 이렇게 할 권한이 없어요. 오순도순 네 식구 살면서, 이렇게 오순도순 사는 것이 이거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고 축복이고 행운이다. 언제 하나가 삐져서 나는 교회 안 다닌다고 하고 나는 아빠가 듣는 복음은 이상해서 못 듣겠다고 하는 그런 소리가 몇 년 뒤에 나올지는, 그거는 주님한테 달려있지 우리가 그거 가지고 불안, 불안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파괴되고 멸망하면서 속 이스라엘, 진짜 숨어있는 이스라엘이 나오는데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남은 자로, 남은 이스라엘, 남은 자다운 이스라엘은 행함으로 되지 않고 은혜로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 속에 딱 이렇게 장착을 시켜놓은 거예요. 껍데기 이스라엘은 다 멸망시켜놓고 그 껍데기 이스라엘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오직 은혜로 남은 칠천 명이라든지. 이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은혜로만,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만 나타나는 사람만 불쑥불쑥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내장되어 있는 것과 표면적인 것과 구분지어서 생각을 해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칠칠절, 잘 안 쓰지만 칠칠절이라고 하면 요새 교회들이 잘 아는 용어로써는 맥추절입니다. 6월에서 7월까지 맥추절로 교인들이 알고 있는데, 특별헌금 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주 한국교회 맥추절 지켰습니다. 돈 냈습니다. 왜냐하면 6월 달되면 헌금이 줄게 되었습니다. 이거는 목회 한해, 두해하면 몰라요.
전체적인 그래프를 그려보면 몇 월 달에 헌금이 줄고, 주는 그 시점을 노려서 교회에서는 핑계 삼아 목돈내기를 하게 되면 얼추 예산이 맞아갑니다. 연말 되면 또 목돈 내는데 두 개 남았어요. 하나는 추수감사절 때 목돈 내는 날, 크리스마스 봉투 돌려 목돈 내는 날. 그렇게 되면 1월 달까지 버팁니다. 1월 달되면 또 각자 얼추 목돈 내는 날. 성경말씀하고, 뽑기하고 돈 바꾸는 날이 있어요. 그렇게 해서 교회가 돌아가는 겁니다. 맥추절은 뭐냐 하면 한참 목돈 안 나올 때 이게 농경시대부터 나왔거든요. 촌에 농사지을 때부터 그게 있어요. 순환서클이 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해요.
그러나 맥추절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맥추절은 이 세상에 숨어있는, 다른 민족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밑에 있는 율법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것들이 이스라엘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거예요. 미국의 옐로스톤이라는 그 공원에 가면 멀쩡한데 시간 따라서 간헐적으로 뜨거운 유황물이 솟구쳐 올라오는 거예요. 높이 10미터이상, 어떤 것은 5미터이상 되겠지만 막 올라와요. 그러다 평소에는 조용해요. 숨겨진, 내장된 것이 바깥으로 분출되는 겁니다.
그래서 칠칠절하면 분출되는 그 의미를 알아야 돼요. 그 분출되는 것은 그 표면적인 이스라엘이 아니고 은혜로 남게 되는, 이스라엘만 알아먹는 그런 내용이 바깥으로 분출되는 겁니다. 지금껏 이야기한 것이 머리 나쁜 사람은 참 더 복잡하죠. 성경전체를 봐야 돼요. 성경 통으로 봐야 해요. 성경 전체를 다 알고 통으로 봐야 해요. 안 그러면 행함이 돼버린다니까요. “이거대로 하면 복 받습니까? 이거 안 하면 저주받습니까?” 이래 되면 사기꾼한테 백발백중 걸려듭니다. “이거 하세요. 저거 하세요.” 성경에는 그런 것 없어요.
분출되는 내용이 뭐냐, 세 가지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월절이고 하나는 맥추절인데, 맥추절은, 칠칠절이라고 해서 유월절 다음에 49번째 주간이 지나고 난 뒤에, +1 그걸 칠칠절이라고 하는 거예요. 49주간이 지나고 난 뒤에 플러스 1주간. 칠칠절을 다른 말로 하면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그 오순절은 여기 맥추절이라고 하는데 그 麥자가 보리맥자인데, 사실은 밀가루가 처음 열매 맺는 날이에요.
원래 약속의 땅은 하나님계시는 땅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의 땅의 모든 생산물은 인간의 노동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거기서 소산물이 나와요. 만약에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버리면 아무리 농사지어도 거기서 뜸부기와 뭐 기근과 적신과 병충이 일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소산물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 약속의 땅에서 생산이 없거든, “니 죄 지은 줄 알아라.” 그런 뜻입니다. “니 율법어긴 줄 알아라.” 그런 뜻이에요. 물론 그게 구약적 의미입니다. 이걸 신약에 가져오면 큰일 나요. “당신이 바로 헌금이만큼 했으니까 벌 받았잖아? 애 성적 나쁘잖아?” 이런 식으로 하면 큰일 나는 겁니다.
왜 큰일이 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이 땅은 의미가 없고 새로운 땅은 예수님이 가져온 십자가 안에서만 새로운 땅이 있어요. 그 땅의 이름을 뭐냐 아들의 나라라고 해요. 아들의 나라는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현재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대자연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포기해야 할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십자가 안에만 들어있어요. 땅이 있다고 땅이 아니에요. 더러운 땅은 땅으로 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피어있는 땅만 땅인데, 그 땅을 처소, 또는 성령 안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 통으로 된 것을 간추려서 짧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유월절과 뒤에 있는 칠칠절과의 차이점이 뭐냐, 유월절은 무교병, 다시 말해서 먹기 좋은 빵을 만든 것이 아니고 딱딱한 빵을 만들어서 우리가 애굽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어떤 희생을 치렀는가를, 그런 덕택에 우리는 이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 유월절입니다. 오늘 신명기 16장 12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와죠.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그러니까 모든 절기마다, 유월절도, 맥추절도,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수장절이 나오는데, 그게 3대 절기인데, 이 모든 절기에서 계속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있습니다. “니들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때는 니들은 사람의 종이었어. 세상의 종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나의 종이야. 나의 아들이야” 이런 뜻이 있어요. 그러니까 옛날에 사람의 종이었을 때 했던 그 원칙은 내가 있는 한 나는 용납 못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살던 때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지켜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본인이 본인을 지키는 인생은 그게 곧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본인이 본인 지키기를 포기해야 그게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럼 포기할 만한 어떤 근거를 제시해야 우리가 포기할 것이 아니냐? 그 근거가 바로 유월절이고 맥추절이고 수장절입니다. 그게 어떻게 해서 근거가 되느냐 하면 처음에 유월절에는 딱딱한 빵을 먹는다고 했죠. 그게 무교병이에요. 이스트가 들어있지 않은 딱딱한 빵. 그런데 맥추절 되면 말랑말랑한 먹기 좋은 빵을 먹어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딱딱한 빵을 먹음으로써 이 땅은 주님을 위해서 있는 땅이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있는 땅이 아니라는 우리의 고백이 49주간 계속 유지가 된다면, 맞이하는 것이 맥추절이거든요. “주님 덕분에, 주님의 그 딱딱한 빵 덕분에 우리는 말랑말랑한 맛있는 떡을 먹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수장절이 되면 “이렇게 얻어진 모든 것은 사실은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노동의 대가가 아니고 주께서 하신 대가가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그렇게 되려면, 이 3대 절기를 지키려면 무엇이 빠져야 되느냐 하면,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된, 그러한 원칙이 3대 절기 속에 계속해서 살아있어야 되겠죠.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 저는 자장면 빈 그릇으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장면 빈 그릇으로. 아까 집에서 나오다보니까 문 앞에 자장면 빈 그릇이 있어요. ‘저게 바로 유월절이고 저게 바로 맥추절이고 저게 바로 수장절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내부에 이 세상을 빈 그릇으로 만들어버릴 그런 심판하실 위력자가 바로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을 때하고 애굽 나라와 함께 있을 때와 태도가 다르죠. 모세가 여호와 이름으로 애굽 나라에 갔을 때 어떻게 됐습니까? 작살났습니다. “나 너하고 안 논다.” 이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면, 이 세상이 여호와를 모르고 주님을 모르는 이 세상은 작살나는 겁니다. 애굽 덕택에.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 앞에 드릴 때는, 이 세상은 사실은 비어있는, 아무것도 아닌 빈 그릇이라는 것을 내놓아야 되겠죠. 이 정신이 바로 맥추절이고 유월절이고 수장절이에요.
뭔가 제사 드린다, 뭔가 제물을 바친다, 이 말은 바치면 더 챙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맘대로 하시옵소서.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뜻이에요 이게.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점에서 실패한 거예요. “이 제사를 드리면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주겠죠?”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거예요. 아직 주제파악이 안 된 거예요. 하나님께 빈 그릇을 드리고 뭔가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하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주어진 모든 것은 너를 위함이 아니고 너를 제물로 바쳐서 우리 하나님,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한 그러한 땅에 너희들이 지금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절기라고 하는 것은 제사 드리고 뭘 바치잖아요. 바칠 때, 바치는 그 원칙이 세상과 구분되는 원칙을 반복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날마다 나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자, 이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아무리 그게 성경대로 옳다고 했다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생소하겠죠. 사실 오늘 제목이 칠칠절인데, 지금 같으면 제목을 바꾸고 싶어요. “생소함”으로.
그 생소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설교마치겠습니다. 창세기 41장 17절에서 20절에 보게 되면 바로 왕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하숫가에 서서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하숫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고 그 뒤에 또 악하고 심히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악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그 파리하고 흉악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니”
소가 풀을 뜯어먹어야지 소가 소를 먹는 수가 있어요. 바로의 꿈속에서. 애굽 땅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이라고 바로 왕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현실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파악해내지 못한, 숨어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창조의 비밀인데, 그게 바로 왕에게 불쑥, 옐로스톤의 유황물처럼 간헐적으로 불쑥 올라온 거예요. 본인은 감당이 안 되니까 누구한테 물었느냐 하면 요셉한테 물은 거예요. 요셉이 그걸 설명하면서 계속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바로 왕이여 이 애굽나라는 당신 것이 아닙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애굽나라가 유지되고 복 받는 것은 애굽나라와 전혀 상관없이, 애굽나라 저 편에 있는, 야곱의 언약을 받았던, 바로 내 아버지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미리 애굽나라에 하나님의 지혜가 작렬하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가 있던 가나안 나라는, 그 가나안에 계속 살면 안 돼요.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와서, 애굽에서 기적을 맛보고 다시 옮겨가야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땅이 되는 겁니다.
세상을 경유하고 세상 죄를 거쳐야 천국 가는 거예요. 우리가 깨끗하면 천국 못가요. 착한 사람 천국 못가요. 우리가 이 땅에서 같이 저주받고 이 땅에서 죄인인 것을 알아야, 죄인인 것이 들통 나야 천국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입니다. 왜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죄 때문에 죽었고, 예수님의 의로 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원리를 오늘날 우리 인생을 통해서 복사를 하고, 재판再版, 되풀이 해나가는 거예요.
아까 집사님이 기도할 때 이 평범한 삶이 악하고 죄악 된다고 할 때에, 이 생중계를 듣는 사람은 저게 무슨 근거로 해서? 그렇게 심한 말을? 그것도 죄라고 악이라고 그렇게 심한 말로 꼭 그렇게 강조를 해야 복음적 기도인가? 라고 의아해할 거예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사랑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착해도 악해도 자기 사랑에서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말은 “우리가 이렇게 악하니까 착하게 삽시다.” 라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런 내용이죠. 악하니까 바르게 살아서 악한 일 그만하고 이제부터 착하게 살자는 그런 뜻이 아니고, 반드시 경유해야 될 하나의 심층적인 십자가 원리를 지금 통과중이라는 고백이에요.
생소한 겁니다. 아직 보지 못한 거예요. 이 본문 자체가. 사람은 보는 것이 전부거든요. 근데 애굽의 바로 왕은 나는 그런 꿈은 생전 보지도 못했다는 거예요. 꿈에 나오는 그런 희한한 동물은. 지금 성도가 바로 남들이 보지 못하고, 봐도 알지 못하는, 그 원리에 따라서 우리는 지금 천국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분명히 열심히 자기가 일해서 월급 받아놓고 하는 말이 “주여, 열심히 노동한 것도 죄입니다. 이 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제가 번 것이 아닙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오버액션, 과도한 겸손. 무지막지한 과도한 겸손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남은 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숨겨진 남은 자는 그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런 고백을 따라하거나 흉내 내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통 납니다. “니 죄인이라 그럼 싹 가져간다. 할 말 없지?” 이래 되면 또 “겸손했잖아요? 겸손했는데 왜 가져가십니까?” 이것은 말로 백날 해야 소용없고 당해봐야 합니다. 당해봐야 “주여, 저는 참 정당합니다.” 그런 제대로 된 간증, 이제는 죄인이라는 말을 바꾸고, 그동안 나는 정당하고... 항상 정당했다는, 이게 어떤 의미에서 주님 앞에서 솔직한 고백이겠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른 원리로 살아가는데 우리는 흉내 내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고치면 구원되겠습니까? 라는 말을 바꾸는 요령부리기에 급급했지만, 그것마저 다 허사고 진실로 주께서 찾아오시게 되면 우리는 주님에게 대한 반항심만 나올 뿐임을, 미리 십자가 앞에서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