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강-신 16장 4-8절(누룩)1607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6장 4-8절입니다. 구약성경 287페이지입니다.
“그 칠 일 동안에는 네 사경 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너는 육 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칠일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것,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니가 애굽에서 살지 않고 가나안 땅, 열조가 있었던 가나안 땅을 니가 정복해서 산다. 그렇게 약속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했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치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어디 가서? 어디 가서 터 잡고 안전하게 살 것이냐? 그걸 목표로 할 거예요.
그런데 그 어디 가서 사는 데에 몰두하다보니까 그들은 뭘 생각하지 안했느냐 하면, 우리가 그곳에 가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면서 가는 게 있어요. 어떤 것을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가기만 하면 도착 한다, 이 지점에서 저쪽 지점으로 도착 지점만 생각했지, 그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 못한 거죠.
어떤 모임에서 버스 대절해서 어디 가게 되면, 뭐 오늘은 설악산을 간다 할 때, 사람들은 대구에서 설악산 가는 목적지만 생각하죠. 그럼 편안히 한 숨 자는 사람도 있고, 책 보는 사람도 있고, 뭐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는 사람도 있는데, 괜히 또 오지랖 많은 사회자가 등장해서 “자, 여러분! 심심하죠? 그냥 가기 뭐하니까 다들 노래 한 곡조씩 뽑읍시다. 기사양반 노래방 되어 있죠?” 해가지고 가게 되면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마이크 들이대면서 “자, 이번에는 김 집사님! 장로님 한 번 노래하시고!” 그거 또 찬송가 보면서는 하지만 외워서는 못하니까, 가사가 1절부터 4절까지 돼있으니까, 그것도 억지로 한다고 박수치고 주께 영광 돌린다고 찬양하는데, 그러다 교통순경한테 걸려서 벌금 한 오 십 만원 내고 하는데, 그냥 곱게 가면 되잖아요? 곱게?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간다면서요? 곱게 가면 돼요. 죽으면 곱게 가면 되는 거예요. 너무 그렇게 가는 데만 집착하게 되면, 그 천국 가고 싶어서 환장해서 일찍 자살하는 사람도 있어요. 고생스러우니까. ‘에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천국 가면 되지.’ 그러나 하나님의 전략은 그게 아니에요. 어느 쪽에 간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은 그곳은 이쪽 애굽에서, 출발지점에서 나왔던 그 인간에게는 그쪽 세계가 없습니다. 없어요.
가나안 땅이 있다고 하니까 그 땅이 그냥 우리가 가던, 가지 않던 그 땅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으로 사람들의 상식은 그렇게 생각하죠. 뭐 걸어가기만 가면 땅은 거기에 늘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곳은 가나안 땅이지 주께서 생각하는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 된 가나안 땅이에요. 그 약속이라는 요소를 누락시키면 안 됩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 맞습니다. 맞는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받지요. 근데 주의 이름을 내 쪽에서 불러버리면 예수님은 나의 하나의 대상이 돼요. 내가 관계해야 할 하나의 상대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주님께서 천국이라고 할 때는, 주님이 그 천국을 우리를 대상으로 삼아서,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집어넣는 것이 있어요. 그 집어넣는 것이 오늘 신명기 16장에서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될 기능이 되는 겁니다. 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그 기능 중의 하나가 유월절 지키기에요. 유월절 지키라 하는 것은 보통 달력으로는 3~4월, 이걸 하나님의 종교력 으로는 1월 달로 칩니다. 1월 14일까지 양을 준비하고, 준비된 양을 15일부터 7일 동안에 무교병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집회하다가 마지막 날에는 대성회로 모이는 그런 유월절을 지키라는 겁니다. 쓴 나물을 먹고 고기는 유월절 양을 먹되 내일까지 남겨두지 말고 다 먹지 못하거든 불에 태우라는 그런 조항이 나와 있다 이 말이죠. 그게 오늘 읽었던 본문이에요.
이 본문을 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가기만 하면 되지, 우리가 가기만 하면 되지 이 일을 왜 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 일을 왜 해야 되느냐? 그것은 변화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겠다는 것은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이에요. 저 사람 사는 땅에 우리가 왜 못 살아? 하지만 정작 그런 마음으로 갔다 이거에요. 못 살아요. 추방됩니다. 쫓겨 나와요. 결국은 그들이 바벨론에 추방되었습니다.
땅이 같은 땅이라고 해서 같은 땅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있으면서 그 보이지 않는 어떤 약속의 땅이 같이 겹쳐져 있습니다. 이 겹쳐져 있다는 사실을 유월절 기능을 통해서 이걸 미리 파악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보성1차 아파트에 산다, 근데 보성 3차로 이사를 간다, 이 아파트나 저 아파트나 이삿짐 부리고 가서 살기만 하면 되지, 라고 하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귀신이 나오는 집이에요. 귀신이 나와서 못 살아요. 진즉에 귀신 산다고 이야기를 해야지, 왜냐하면 이쪽에서는 귀신이 안 살았거든요. 근데 그쪽에서 귀신 나온다고 하면 못 살잖아요.
가나안 땅이, 평범한 보통 땅을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이라고 규정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만한 이유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약속의 땅의 열 족속이 아무 무장도 안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쫓겨난다는 말은 이스라엘 속에 계신 분이 있거든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합니다. 그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멀쩡하게 살고 있는 가나안 땅 족속들이 쫓겨난다는 말은 거기에 뭐 있다는 거예요. 거기 뭐 있다는 겁니다. 동행하면서도 뭐 있음을 간파를 하지 못하게 되면 쫓겨나는 가나안 족속들이나,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그 인간이 맨 그 인간인데, 어딜 함부로 그 땅에 살아요? 못 살죠.
우리가 그 땅을 접수한다고 먼저 성급하게 하지 말고, 왜 멀쩡하게 살던 사람들이 그 땅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추방되어야 하느냐,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께 뭐가 잘못됐기에, 뭐가 틀어졌기에 그들은 추방되어야 하는가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눈치를 채야 합니다. 그 약속의 땅은 어떤 땅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살고 싶어 하는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살고 싶어 하는 땅을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그 이름을 두시려고 한 땅이에요. 그 이름을 두시는 땅. 그 이름을 두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약속의 땅은 그냥 약속의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과 함께 사는 땅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민족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추방되어야 했고,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있음에 의미를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그 땅에 들어가서 산다. 따라서 쫓겨난 가나안 민족은 여호와 이름이 지니고 있는 그 하나님의 능력과 성질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사정없이 추방되어야 했다 이 말입니다.
그 이름이 뭐냐, 미리 앞당겨서 결론 내리면 요한계시록 22장이에요.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데 어린 양의 보좌가 있더라. 어린 양의 보좌. 그 어린 양이 뭐냐, 어린 양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어린 양이라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어려워지죠. 어렵지만, 그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방금 애굽에서 나왔던 입장에서는 애굽적인 사고방식이 충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이름과 존재의 연결성이 잘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이름 부르면, 예수 부르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가 맞습니까? 지저스가 맞습니까? 예수아가 맞습니까? 이거 어느 것이 맞아요? 발음을 예수라고 해야 할지, 지저스라고 해야 할지, 어느 정도 맞아야 하는지, 이거 맞을 수가 없어요. 다시 이야기하지만은 내가 예수님을 대상으로 삼아버리면 나의 상상력이 동원돼서 이미지를 그리게 되는데 그 이미지는 다 헛방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게 하셔서 주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려면 주님 보는 이미지로 성도들은 똑같이 균일화되어야 해요.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똑같이 성전이 되려면, 집단 성전이 되려면, 우리 개인적인 이미지로는 소용이 없다는 걸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해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 쪽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시는데, 그 이미지는 하나의 우리가 그려야 되는 것 말고 하나의 주님의 능력으로 임하는 겁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는 거거든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낸다는 것이 이게 실용성 있는 기능이 돼요. 기능이 되면서 그 기능이,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작용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는 셈이 돼요. 주님의 이름과 함께 있는 셈이 돼버립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얼굴도 안 보고 사랑을 하는 것 하고, 얼굴 보고 사랑하는 것 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얼굴도 안 보고 사랑을 하게 되면 고소영이라든지, 장동건이라든지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어요. 얼굴도 안 보고. TV에 나오는 얼굴 말고, 직접 내 얼굴, 제 얼굴 다 끄집어내어 현장에서 만나지 않고 사랑하면 우리는 뭐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소영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하여튼 예를 들어서 고소영이라든지, 태양의 후예에 나오는 송혜교라고 합시다. 그리고 또 남자 배우 송중기라든지, 얼마든지 하는데, 막상 얼굴을 딱 마주치게 되면 연예인이잖아요. 갑자기 자체발광이라고 해서 빛이 막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랑하기는커녕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벌벌 떨 수가 있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귐이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라 하는 것은 범접할 수 없는, 차마 내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그쪽에 자기가 순복되는 그러한 기운이 있을 때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 해봤습니까? 하품만 할 게 아니고 그런 사랑 해봤어요? 너무 신비스러워서 감히 나 같은 것에게 말만 걸어도 저쪽에 누(累)가 되는 것 같아요. “아! 정말..그냥 있어 주세요. 내가 몽땅 다 바칠 테니까. 저 같은 것은 신경 쓰지도 마세요. 저는 있으나마나, 그대 있음에 저는 그걸로 족합니다.” 이게 현존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것. 어떻게 부부가 서로 그렇습니까? 서로 볼 때 너무 고귀해서 범접할 수가 없습니까? 안 그러면 뒤에서 쥐어박고 싶고 하는 그런 게 있습니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부부될 때까지만 사랑하지 말고, 부부된 뒤에 본격적으로 사랑해야 돼요. ‘저렇게 귀한 존재인줄 왜 미처 몰랐을까? 결혼 한지 56년차인데 아직도 저렇게 고귀할 수가!! 56년 동안 내가 저렇게 귀한 몸을 미처 감안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돼야 사랑의 관계가 유지되는데.
주님의 얼굴을 보면 죽습니다 인간은. 죽으니까, 그럼 뭐가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라고 물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억지로 살려주는 그 능력이 사랑이에요. 대신 하나님께서는 뭐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동행함에도 불구하고 살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도중에 들어가는 시스템, 장치가 있어요. 그 장치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 만나고 죽었죠. 죽었는데 주께서 축복해주니까 이름이 바뀌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면서 브니엘,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봤음에도 살았다가돼요.
그것은 뭐냐 이미 하나님의 축복의 기능자로서 가는 곳마다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인간으로 이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달라져야 되고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사람의 변화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질이 달라지지 않은 채 변화되는 것, 이걸 행함이라고 하고 활동이라 하고 행동이라고 합니다. 본질은 변화하지 않은데 그냥 움직이는 것, 밥을 먹는다고 인간 자체가 달라지고 그런 것 없잖아요. 나는 그대로 있고 달라지지 않은 내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책을 보고 그렇다 이 말이죠.
그런데 또 하나의 변화는 뭐냐, 질적 변화라 해서 내 자체가 계속 달라지는, 내 자체가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자체가. 내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질적 변화인데, 질적 변화에서 중요한 것은, 특히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달라지고 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위치해 있는 환경이 달라져요. 이게 중요합니다. 내 마음이 달라지고 내 인간성이 달라지는 것은 이거 기독교가 아니고 복음이 아니고 불교입니다. 아무리 성경구절을 더덕더덕 갖다 붙이고 기독교 이름으로 백날 해봐야 이거는 불교, 불교적이에요.
베드로전서나 이런 성경구절 동원해가지고, “이제는 인간이 되어라. 전에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는데 서로 사랑해라. 사랑하게 되면 당신의 급은 올라갈 것이다. 당신의 내면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점 더 본받아지고 융성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 끝까지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저는 분명히 합니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폭발합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기중기 열대면 폭발하지, 나중에 미쳐버려요. 왜 미치는 줄 알아요? 정신병이, 노이로제가 왜 걸립니까? 지하철 타고 집에 와서 손을 열두 번 더 씻는, 저도 열두 번까지는 아니지만 좀 씻는 편이에요. 백날 씻으면 뭐 합니까? 후다닥 씻는데. 뭔가 뭐 만졌다 하면 세균 몇 마리가 여기 있다고 하고. 이게 점점 정신질환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정신질환자로 다 바꿔버려요. 다 만들어놓아요. 목표를 정합니다. 이정도 돼야! 누가, 누가 자학을 잘하나 시합하는 거예요. 이 정도는 돼야! 헌금하는 것도 시합하는 거예요. 몇 퍼센트, 이 정도는 바쳐야 복을 받는다. 사람을 못 살게 굴어요.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나처럼~ 목사는 맨날 기도하고 성경보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하지만 목사들은 할 일이 없잖아요? 하루 일하고 육일 노는데 뭐 있어요. 성경이나 보지. 할 거 뭐 있어요. 일요일 지나면 만세! 하고 그때부터는 노는데. 이게 폭발해요. 계속 선에 대한 집착이 자기를 폭파시킨다니까요. 나중에 폭파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찢어져요. 미쳐버려요. 미쳐버리면 내가 예수다 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 도사가 한 둘이 아니에요. 내가 신이다. 내가 모든 걸 다 안다. 나를 믿어라. 신자들, 추종자들 우르르 생겨요. 팬클럽 생기고.
하나님께서 변화시킬 때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그동안 환경을, 내가 나를 잘난 존재로 증명하기 위한 환경을 세상에서 끌어당겨서 그 안에 자기를 놓아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했던 괜찮은 성과들을 가지고 자기를 둘러쳐버리니까 그 안에서 자기는 누구한테도 밑지지 않는 잘난 존재가 돼버려요. 나 이렇게 잘났다, 저렇게 잘났다, 그래 돼버립니다. 그 환경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왜 동행할 수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은 잘난 존재를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주의 이름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거예요. 죄에서. 따라서 우리는 그냥 죄가 어느 정도 두꺼운가를 계속 죄 속에 있어야 돼요. 그럼 죄 지으라는 말인가? 죄를 안 지어도 괜찮아요. 그냥 살면 그게 죄가 돼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편리한지 몰라요. 그냥 바르게 열심히 살면 그게 죄가 돼요. 그러니까 죄가 삯은 뭡니까? 죽잖아요. 죄의 삯은 죽는다고. 불교신자든 기독교신자든 관계없이 죽어요. 목사든 신부든 다 죽어요. 그게 다 정산해서 털어보니까 죄에요. 죄.
혈과 육에서 죄가 나오니까, 혈과 육은 오늘 아침에도 이야기했듯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겁니다. 다 털려야 돼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환경을 바꾸게 되면, 그게 터가 됩니다. 터. 그게 갈 곳이 돼요. 최백호는 말하기를 지 맘은 갈 곳이 없다는데, 자기가 하나님께 다루어지게 되면 그 곳이 터에요. 이 몸뚱아리가 딴 곳에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다른 환경으로 바꾸어지게 되면, 바꾸어진 환경이 내가 생각지도 못하고 예상치도 못한 환경이 터입니다. 그게 예수 안이고 그게 성령 안이에요. 그게 주님 안이에요. 하나님 안이 되는 겁니다. 어디를 굴러도.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던, 지중해에 있던, 갈릴리에 있던, 항상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을 합니다. 어디를 굴러도 그 성령 안이에요.
어른들 놀이 게임에 보면 산비탈을 내려오는데 둥그런 풍선을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요. 그걸 굴려버리면 그 커다란 풍선이 산비탈을 굴러도 그 안에 있는 자기는 재미 좋은 거예요. 막 돌면서. 캡슐 안에 들어있는 인간입니다. 그게 예수 안에 들어있는 인간이에요. 환경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은 좀 받아 적으세요. 환경이 그 사람을 구원해요. 환경을 바꾸어주는 겁니다. 어떤 환경으로? 죄인 아닌 척하는 인간을 죄인으로 바꾸어줌으로써, 내 대신 돌아가신 분, 어린 양을 의지하고, 그 대신 나의 행함을 절대로 의지하지 않게 하는 그러한 기능이 작렬하는 곳, 그것은 바로 반복되는 유월절 속에서 그것이 접촉되고 그것을 느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기능을.
그게 어떻게 반복되느냐, 그 일을, 그 환경을 조성하시는 분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뭐고 하나님의 이름은 뭐냐, 하나님은 숨어계셔요. 그럼 나타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 한글자로 말하면 주가 돼요. 주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와 함께 일을 벌이시는 하나님. 그게 바로 주님입니다. 그냥 불상처럼, 동상처럼 서 있어 버리면 그건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헌금 들고 다가가야 돼요.
그런데 주님은 활동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저쪽, 주님 쪽에서 날마다 뭘 받는 것이 아니고 친히 주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친히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의 말씀처럼. 친히 주시는 분이에요. 주셔서 이 모양 이 꼴 된 겁니다. 해답이 저쪽에 있으면 내가 찾아가야 되지만, 우리가 이 자리, 내가 이 모양 이 꼴 된 자체가 주님의 은혜의 작품이고 이 자체가 해답이에요. 이 자체가 해답입니다.
그러면 해답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께서는 거부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부하는 것. 거부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뭐냐 하면 ‘누룩’입니다. 그게 누룩인데, 누룩은 먹지 말라는 거예요. 누룩 안 먹는 날이 일주일 계속됩니다. 누룩은 먹지 말라. 유월절에서 양 잡고 누룩은 먹지 말라. 그러면 뭐가 관계되었느냐, 어린 양과 누룩이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어린 양은 누룩을 배척한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면 누룩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저는 가끔 생각해봤어요. 우리나라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술을 다 없애버렸으면 좋겠다. 모든 사건이 술에서 나오기 때문에.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술을 없애도 문제가 있어요. 누룩이 있어서 그래요. 술 안 팔면 집에서 누룩으로 막걸리 담그면 되잖아요. 아, 이거 골치 아프네. 그럼 누룩 값을 한 만 배로 올릴까? 혼자서 온갖 상상 다 해봅니다. 하도 술 때문에 사건이 나서.
누룩은 뭐냐 하면 이것이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하는 이스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빵을 먹되 맛있게 먹어야 해요. 근데 누룩을 빼라는 말은, 결국 우리가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하면서 약속의 땅이 뭔지 몰라요. 약속의 땅은 내가 나를 살리는 곳이 아니고, 터가 아니고, 주님 쪽에서 우리를 살려주는 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고 천국인 겁니다.
그러니까 그 곳에 가려면 내가 평소에 나를 살리는 식으로, 내가 스스로 맛있는 빵을 많이 먹음으로써, 탄수화물이 들어옴으로 내가 에너지를 얻어서 산다는 이러한 방식과는 안 맞는, 새로운 영생의 방식을 지금부터 여기서 실습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누룩 없는 딱딱한 빵을 먹으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을 먹되, 고기를 먹되 그 날에 먹어야지 그 다음날까지 넘기지 말라는 말은, 이 고기가 내 에너지 보충용으로 먹는 고기가 아니고, 이 고기는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내 대신 희생당한 그 고기는 그 날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그 날만 먹어야 된다 이 말이죠. 내일까지 놔뒀다고 고기가 상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고기라 하는 것은 기력 살리기 위해서 먹잖아요. 기력을 살린다는 것은 내가 알아서 살리겠다는 거예요. 그런 세계라면 애굽으로 족하고, 그런 세계라면 니 때에 족하고, 숨어있는 주께서 준비해놓은 그쪽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누룩을 먹지 말고 어린 양 고기를 그 날에 먹으면 우리 내부에서 뭐가 생기는가, 이게 생겨요. 결, 물결, 무늬가 생겨요. 우리에게. 나무를 대패로 밀어버리면 나무가 반듯하게 되면서 거기에 특정한 무늬가 발생합니다. 그걸 결이라고 해요. 숨겨진 결이 나오죠.
주님께서 우리를 밀어버리면 우리가 숨겨놓은 죄가 나옵니다. 그 죄가 뭐냐, ‘나는 내 힘으로 살아야지. 나는 누구 믿을 것 없어. 나는 나만 믿어야지.’ 라는 그 결이 나와요. 그걸 어린 양과 결부해서 그걸 대패로 밀어버립니다. 그럼 숨겨진 내 죄, ‘나만 살면 돼. 나만 행복하면 돼.’ 라는 그게 나와요. 그 결이 바로 우리 속에 계속 남아있는 누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룩을 먹지 말라는 것은, 이러한 나 자체가 새로운 환경에 의해서 없앨 수 없는 이 죄를 대신 가져가신 어린 양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지막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내가 산다가 아니고 함께 사는데 성공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여기서 혼자 살듯이 천국에서 혼자 산다가 아니고, 여기서는 혼자 살았지만 그때는 주 안에서, 주 앞에서, 주와 함께 사는데 성공하게 된 겁니다. 홀로 사는 것 성공하게 되는 것은 PC방에서 혼자 게임하고 있으세요. 함께 사는 겁니다. 함께 사는 것이 싫으면 천국 가지 마세요.
그래서 개인 부활, 개인 구원이 없는 겁니다. 개인이란 말이 없어요. 그리스도를 방사 축으로 해서 전부 다 스파이더맨처럼 그리스도와 연결된,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된 하나의 형제가 이룬 그러한 집단 부활이 있어요.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늘로 휴거하고 이 모두가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머리 되신 분과 다 연결되어 있어요. 개인 구원은 없고 주님과 관련된 구원만 있어요. 그래서 “주님 때문에 저 구원받은 거 맞죠?” 라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러한 고백이 나오게 되면 그게 나의 기능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기능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 ‘나만’이라는 것에 경계선을 쳐버려요. 나만 잘되면 오케이가 돼요. 아, 이게 누룩 같은 겁니다. 나만 잘되면....., 자식, 형제 그거는 세상이고 몸 아프면 다 귀찮아요. 아무리 온유와 화평과 자비를 하라고 해도, 이빨 아프면 자비가 어딨어요? 짜증나는데.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 이빨 아픈데?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주시는 분은 치과의사밖에 없어요. 이빨 고치면 갑자기 기분 좋아져요. 이거는 혼자서 시작해서 혼자서 끝내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영생이 아니고 나만 좋으면 나는 구원이라는 그런 개인적인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나 바로 십자가 앞에서 더불어 구원된다는 것, 더불어 구원되는 겁니다. 이것이 함께 가는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로 가면서도 환경이 주 안에 있으니 죄인 된 기쁨으로 갑니다. 전에는 잘난 기쁨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망신당하고 못난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