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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장래일,발생 1404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10. 08:15
2014-04-18 01:26:44조회 : 978         
유튜브(70강, 71강) 장래일, 발생 140417 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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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자 (IP:116.♡.234.248)14-04-25 11:34 
70강-YouTube강의(장래 일)1404017-이 근호 목사


제목은 “장래 일”입니다. 장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장래일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 전도서8장7절에 보면,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 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에도 똑같이 장래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데 신약에는 장래 일이란 글을 쓰면 안 됩니다. 그 장래 일이 현재 일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종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개인적으로 장래일 같으면 그것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데로 세상이 맞추어 줄까? 그렇게 자기 사적인 장래 일만 뽑아서 관심들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개인을 위한 성경책은 없습니다.


에베소서2장8절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할 때에 그 말을 보고 사람들은 대단히 많이 오해해요. ‘날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사적으로 믿음을 주셨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에베소서1장에 보면, 사적인 구원은 애초에 없고 교회에다 믿음을 준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집단적으로 믿음을 준건데 사람들은 자기와 형제, 자기집단, 교회의 머리가 된다 생각하지 않고, 나의 머리가 된다고 주님을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아, 나를 위해서 이 믿음을 특별히 선물로 주었구나.’ 이렇게 생각해 버려요. 그렇다면 이런 믿음은 어디다 써먹느냐 하면, 나만이 구원받는데 쓸모있는 믿음이 돼버려요. 그런 믿음은 구약에도, 신약에도 없습니다.


구약 전도서에서 장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신약 때 와서 종말이 되게 되면, 우리가 사적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가가 완전히 다 노출되는 그 시점이 종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종말이란, 우리의 개인적인 모든 일이 전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음이 다 노출되는 그 시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자,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실제로 마지막 때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합니까? 전혀 체험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여전히 사적인 나름대로의 꿈과 계획에 푹 빠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바꿀까요? 무엇을 무엇으로 바꿀까요? 사적으로 마지막 때 이런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적으로 나에게 이런 믿음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적으로 나만이라도 먼저 구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남의 집안보다 우리 집안부터 먼저 구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의 남편보다 내 남편이 먼저 구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사적인, 사적인, 사적인 모든 욕구와 욕망이 신약이 되면, 마지막이 되면 그 자체가 오해고, 오해고, 오해라는 것을 집단 구원에 의해 앞에서 전부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적으로 난 구원받았다는 그 자체가 잘못이다. 는 것을 종말의 원칙 앞에서 회개되어야 되고, 인정 되어야 되겠죠.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뭐냐.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래일과, 신약에 막상 왔던 그 종말과 사후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구약에서 장래 일이라 하는 것은, 항상 출발점이 내가 궁금한 나의 장래일, 보통 사주팔자 볼 때도 그렇게 하자나요. 어제 진도에서 안산고등학교 학생들이 배가 침몰해서 죽었는데 안산고등학교 학부모 입장에서 어떻습니까? ‘아후.. 미리 알았으면 내 애는 그 배에 태우지 않았을 건데..’ 라고 생각하겠죠. 그게 바로 종말에서 말하는 종말 때 죄가 되고,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장래 일이라 해서 내가 미처 모르는 어떤 미래 일을 자꾸 장래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장래일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 집단적인 장래 일을 이야기해주죠. 사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인 장래 일을 언급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 배가 미리 침몰하는 것을 안다면, 내 애는 거기 보내지 않겠죠? 사적인 이익부터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친한 친구한테 ‘애 거기 가지마. 거기 침몰하게 돼있어.’ 이렇게 알려줄 거예요. 미리 안다면, 별에서 온 그대라면 미리 그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인간들이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는 그 장래 일을 만족시켜주고 그걸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그런 종말, 그런 장래 일로서의 종말 덩어리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어쨌든 사적인 궁금증이라든지 기대, 희망 그런 것을 다 드러내는 종말은 아니다.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어주는 종말은 아닌 거예요. 그럼 종말은 누구를 위한 종말이냐.


구약에서 이스라엘나라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해 둡시다. 그 이스라엘나라 백성들은 자기 나라 어떻게 되느냐가 궁금했고 나중에 메시야가 오게 되면, 필히 우리 혈육적인 아브라함자손만은 반드시 구원된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한 성경해석 문자 그대로 풀이하게 되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 다른 나라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그럼 그 이스라엘 하나님 할 때, 그 이스라엘이 어느 나라입니까. 바로 본인의 나라 말고, 달리 이스라엘 나라가 없는 거예요.


똑같은 오해가 오늘날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니까 사람들은 교회마다 주님이 자기머리라고 우깁니다. 왜, 자기가 생각하는 이 교회 말고 다른 교회가 도저히 생각하기도 싫고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죠. 이게 바로 제가 아까 처음부터 이야기한 사적인데 매여 있다는 이런 오류가 자꾸만 성경을 봐도 그런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만 이야기 합니다. 종말은 이런 사적인 기대나 희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종말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럼 이게 아니라면, 기존의 이스라엘도 아니라면 그럼 누굴 위한 종말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따로 챙겨놓은 집단, 그 진짜 이스라엘을 위한 종말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개인예정론이 아닌, 개인선택론도 아닙니다. 개인이 창세전에 예정 받아서 받는 그런 구원론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출발점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그 지체 자체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보기엔 차이점이 없는데, 차이점이 뭐냐.


얼른 생각하면 차이점이 안나죠? 개인 개인이 모여서 교회되니까 교회가 이행됐다는 이야기나 방금 제가 이야기한 창세전에 교회를 예정했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 아니냐. 라고 생각  하시겠는데 이게 똑같은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똑같은 말이 아니냐 하면, 진정으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를 위해서 성령으로 믿음을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더불어 된 이 교회를 위해서 선물로 줬습니다. 따라서 나 말고라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왜, 더불어 생각하니까. 그게 우리입니다. 우리라는건 더불어 새로운 우리, 더불어 생각한 그 집단을 위해서 일괄 믿음을 줬지, 나만 달랑 구원 받으라고 믿음주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로 고백이 될 때, 이것이 진짜 성령 온 믿음에 합당한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저희보고 ‘너희만 교회냐. 너만 신자야? 너만 예수 잘 믿어? 너만 복음 알어?’ 라고 지적할 때, ‘그래 성령께서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줬기 때문에 나는 성령 받았어. 그러니까 내 믿음은 옳은 믿음이야.’ 라고 대답한다면, 그 대답 자체 속에 하나님의 집단성이 지금 빠져버렸어요.


‘나는 구원 받아야 돼.’ 하는 그 욕구와 욕망과 부합된, 오류된 성경해석을 본인이 하고 있는 겁니다. ‘너만 잘났어. 너만 교회야. 너만 참된 믿음이야.’ 라고 할 때, 아니야. 우리야. 왜, 주님 안에서 ‘나’ 라는 것은 소멸되고 사라지는 겁니다. 왜, 구약 때 나만이, 나만이 하다가 멸망한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이거든요.


따라서 그걸 안 이상 신약에서의 이스라엘은 ‘나만 잘났어. 나만 진짜 믿음 좋아.’ 라고 할 수가 없고, 주께서 주님을 출발점을 해서, 주께서 참된 신앙인이니까, 주님이 참된 의인이니까 주님의 몸의 지체에 합했던 자들을 위하여, 교회 자체를 만들기 위해서 일괄적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선물로 줬기 때문에 나만 잘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질문한 사람들도 ‘너만 잘 믿냐.’ 라는 질문자체가 바로 개인적인 욕구에 빠져있는 사람의 잘못된 질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종말이란, 우리가 궁금해 하는 그 장래 일을 해결해야 되는 종말론이 아니라, 종말론은 예수님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생각이 오류가 있음을 오히려 노출시키고, 주께서 그냥 일괄적으로 자기 교회를 일방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수용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종말적 현상입니다.

 유일자 (IP:116.♡.234.248)14-04-25 11:35 
71강-YouTube강의(발생)1404017-이 근호 목사


71강 제목은 “발생”입니다. 제가 발생이라고 한 것은 원래 일어나지 않았는데 오, 이런 일이 일어났었나? 할 때는 발생이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예측을 해가지고 하는 것을 임신, 또는 생산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적당하겠죠. 발생이라 하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일어났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일들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앞에는 홍해바다고 뒤는 따라오는 애굽의 말발굽 소리가 아주 요란합니다. 모세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은 대책이 없어요. 모세가 물이 갈라진다는 것을 미리 안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출애굽기14장 14절에서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자.”


발생이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전제가 있어야 돼요. “가만히 있자. 주께서 하시겠지. 주께서 하시겠지.” 라고 한 겁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천사 3명이 찾아와서 “내년 이맘쯤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할 때에 물론 사라는 비웃었죠. 그럴 때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떻게 임신한 어떤 과정들을 미리 알았습니까? 전혀 몰랐죠. 그저 허허 웃죠. 왜, 이건 자기가 미리 예상할 수 있는 생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뭔가 발생을 한다니까 그 계획 잡은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계획을 미리 눈치 챌 수 없는 겁니다.


마리아에게 임신한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성도가 돼서 믿음이라고 할 때에, 믿음을 미리 예상해서 믿음을 만들었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발생된 겁니까? 믿음이 미리 예상했다면, 홍해사건과, 여리고사건과, 십자가죽음사건과, 천지창조와 같은 차원에서 이어지는 그런 믿음이 아니고, 인간들은 얼마든지 조작해 낼 수 있는 가짜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이 생긴다면 홍해바다에서 깜짝 놀란 바다 자체가 갈라진다는 것은 과거에 그런 일은 없었거든요? 바다자체가 갈라지는 것처럼 이거는 애굽 군사도 놀랬지만 막상 건넜던 히브리인들도 놀라고 모세도 놀랄 일이예요. 갈라진 바다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음의 바닥을 몸소 친히 뚜벅 뚜벅 걸어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우리가 예상하는 그런 믿음과 실제로 성령이 와서 발생한 믿음사이에는 죽음이라는 건널 수 없는 엄연한 단절된 벽이 놓여 있다는 거예요. 그 벽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라는 벽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은 저희들에게 주어지질 않아요.


그래서 그 믿음은 열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로 죽음을 근거로 해서 십자가 죽음을 담뿍 담고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준 믿음 그 믿음이 그야말로 구원받는 유일한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발생이라 할 때는 반드시 그 전에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그러한 분위기가 잡아야 됩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는데 갑자기 일이 발생되었을 때에 이거는 내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께서 일으킨 사건으로 우리가 담박 그걸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겠죠. 자, 그러면 봅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마냥 기다립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일이라고 고백하기에는 이러한 장애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지금 인간들은 뭐든지 꼼지락거리고, 뭐든지 움직이고 활동합니다. 움직이고 활동할 때는 그냥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이 아니예요. 반드시 기대와, 예상과, 목표와, 목적을 생각하면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인간들 역사의 관점에서는 세상의 어떤 일도  우연한 일도 없고, 다만 우리가 원어를 미리 분석 못해서 그렇지 찾아내기만 하면, 반드시 원인이 필히 있는 결과로서의 일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 출렁이고 있습니다.


진도에서 배가, 육천오백톤급 뱃머리가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원인을 찾지요. 왜냐하면, 그 원인이 결과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배가 무너진 것을 발생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마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거는 원인이 있어서 생긴 일이 아니고, 그건 발생된 일이거든요.


왜냐하면, 아무도 그 배가 빠질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배 빠지기 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장부터해서 그 누구도 빠진다는 것을 확신하고 배를 그렇게 몰지를 않았어요. 선장도 일부로 차선 하려고 그렇게 몰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아무도 모르는데 일어났어요.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대해서 이건 반드시 인간이 개입하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반면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홍해사건, 배뿐만 아니고 햇볕, 공기 뭐 일상 움직이고 이 모든 것도,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참새가 시장에서 팔리고, 우리가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거를 발생적 입장에서 보신다는 겁니다. 그걸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모든 것이 안 일어나도 되는데, 주님의 뜻이 듬뿍 담겨서 일어난 일이 되는 거예요. 배가 안 빠져도 되는데, 우리는 안 빠지고 싶은데 두 달 전에도 그 배는 빠지지 않았고, 한 달 전에도 그 배는 빠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제 그 배는 진도 앞바다에 빠졌습니다. 원인을 찾아내면 찾아낼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원인이 일어난 일에 대한 원인이 또 있을 거잖아요. 그 원인이 일어난 일을 원인이라고 하고 결과라 했던 원인은 또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찾아가보면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주께서 의도해서 만들어진 발생된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건 발생된 일이다, 그거는 반드시 인간이 실수해서 그런 일이다.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그게 무슨 뜻이 있느냐,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고 하시겠죠? 관계있습니다.


고린도후서4장 3절~4절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세상 신, 세상신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신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세상신이죠. 마귀죠. 악마죠. 우리는 악마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고, 악마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놓쳐버리고 사시는데, 성경에 분명히 악마라고 이야기 나오고, 그 악마가 겨냥하는 것이 있어요. 뭘 겨냥하느냐하면,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악마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배를 악마가 빠트렸단 그런 뜻이냐. 악마가 빠뜨렸단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이냐. 배가 어떻게 빠지던 멀쩡하게 다니던 간에 사람들은 매사를 사람 손에서 원인을 찾아낼 수 있고,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가 살길을 자기가 스스로 살만한, 그런 자신감이 있다는 식으로 복음을 가리는 식으로 주님이 모든 일에 개입해서 주님의 은혜가 개입했다는 그걸 삭제하고, 지워버리고, 떼버리는 쪽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발생이란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냥 발생이 아니야. 원인과 결과의 연쇄 고리로서 세상에 일어난 일이야.’ 라고 해버리면 뭐가 빠져 버리느냐 하면, 주께서 복음문 차원에서 모든 것을 발생시켰고,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우리가 숨 쉬는 것도, 우리가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모든 것도 주님의 복음적 관점에서 일어난 일이란 그 발생적 논리 고리를 세상신이 의도적으로 그걸 없애버린다니까요. 없애버리면, 우리는 주께서 하신일도 생각하지 않고, 마땅히 그런 일은 안 일어나야 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안 죽어야 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생각했던 그런 지금까지의 버릇과, 관행과, 관습을 그대로 정당한 것으로 붙드는 셈이 돼요.


신이시여, 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납니까? 이게 무슨 뜻이예요.‘ 우리 인간한테는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안돼죠. 그럼 우린 섭섭합니다.’ 왜, 우리는 대단한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해서는 안 될 존재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그동안 세상신이 인간을 그런 식으로 곡해시켜왔고, 세상현실을 변질시켜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도 주께서 개입해서 발생되지 않는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