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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소유와십자가,성도의 삶의 의미 1401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9. 07:34
2014-01-03 01:25:20조회 : 1240         
유튜브(60강, 61강) 소유와 십자가, 성도의 삶의 의미 140102 이름 : 이근호 (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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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자 (IP:116.♡.234.248)14-01-05 15:08 
60강-YouTube강의(소유와 십자가)140102-이 근호 목사


제목은 소유와 십자가입니다. 먼저 한 예를 들어볼께요? 길에 오만원이 한 장 떨어져 있다. 나 말고 그 근처에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그 오만원을 주었다고 합시다. 공짜로 생겼으니까 굉장히 기쁘죠? 오만원짜리 돈을 주울 때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기쁨의 일이라는 것이 발생 되었습니다.


이 복음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복음이라는 것은 내가 원인이 되어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외부의 다른 분이 원인이 되어서 그 분이 내가 당할 모든 저주와, 징벌과, 심판을 대신 담당해주셔서 그 담당해주신 것이 담당한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그 십자가 사건의 효력이 우리에게 선물로, 무상으로 도달됨으로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둘 중에 어떤 기쁨이 오래 지속될까요? 복음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사실 순간적입니다. 몇 초 몇 분을 가지 않아요. 또다시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지 자기의 신상에 어떤 병이 난다든지 갑자기 손해 보는 일이 있으면 또 화가 치밉니다. 그런데 길에서 오만원을 주었다면 몸이 즉각적으로 머리가 따질 것 없이 남이 볼까봐 우리는 얼른 후딱 집어넣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참 난 행복한 사람이고 재수 좋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돈 주운 것에는 그렇게 기쁨이 오래가지만 왜 복음들은 것은 모기약 뿌리듯이 뿌릴 때 만이고 돌아서면 다시 냄새가 없어지는 것처럼, 사라지는 이유가 뭔가? 그건 바로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힘을 소유함으로서 자기를 살려내는 원리가 이 육신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추방되고 난 뒤부터는 인간은 저주의 구덩이 속에서 놓이게 된 겁니다. 그때부터 가만있는 다고 아무도 살려주지 않아요.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통가운데서 애를 써도 겨우 살까 말까하는 이유는 도처에 바로 저주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저주의 힘과 맞서 싸워서 저주는 우리를 죽이려고 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이왕 사는 거 한번 살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누가 이기느냐. 저주가 이기고 우리는 패배합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는 좀더, 더 저주에 맞서서 살아야 되겠다, 살아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몸이 그것을 계속해서 훈련하다보니 길거리에 떨어진 오만원이 나로 하여금 몇 분이라도 더 오래 살게 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뻐하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육신이라 하는 것은, 항상 최종적으로서는 자기 사는 쪽으로 모든 것이 진행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걸 자연스럽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욥이 처음에 자식 잃고, 재산 날아갈 때는 자기의 육신만은 결코 하나님 때문에 살지 자기 소유로 살지 않는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자기의 생명을 직접 위태롭게 하고 병들게 했을 때는 욥도 참다못해 자기본성을 폭발 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럴 것 같으면 저를 죽이시든지 아니면 아예 태어나지 말게 하시던지 왜 이렇게 태어나게 해서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라는 원망의 소리를 함으로 말미암아 욥을 통해서 우리는 욥의 육신뿐 아니고, 나의 육신을 어떤 원리와 어떤 속성이 가득 차 있는가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자, 그렇게 볼 때 사람들이 흔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데 내가하는 신앙생활이 옳은 신앙생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그걸 어떻게 판별하느냐하면, 이렇게 판별하면 제일 명확합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인간이 살고자 하면서 신을 도입하고 신을 찾을 때 그게 신앙이 아닌 거고, 그게 바로 종교입니다.


제가 지금 종교와 신앙을 날카롭게 구분하고자 하는 겁니다. ‘신앙이 뭐냐.’ 라고 했을 때 종교생활하지 않는게 신앙이거든요? 그러면 종교생활이 뭐냐. 종교생활 자체가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게 신앙생활인데, 신앙이 뭐냐 하기이전에, 종교생활이 뭐냐를 규정해야 되는데 이 종교생활은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신과 교류하고, 신과 교제를 하고, 신과 어떻게 약속을 맺고, 신을 어떻게 생각을 하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그 죄에 근거한 종교생활이 되는 겁니다.


흔히들 세상사회에서는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그 종교생활의 첫 번째 타자가 누구냐 하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입니다. 가인이 일 년 농사를 잘 지어놓고 하나님덕분에 이렇게 풍성한 수확을 얻었습니다. 라는 성의 차원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 요새 말하면 추수감사절을 드린 겁니다.


가인 말고 주위에 아무도 없고 형제간도 없다 했을 때, 가인은 자기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린 이 제사에 대해서 본인이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훌륭하기도 하고, 경건하기도 하고, 고상하고 거룩한 자아의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받은 것은 다 자기가 챙길 수 있는데 그 귀한 것 중에서 일부를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면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덕분에 받은 것이니까 하나님 받으시는게 합당합니다. 교회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신앙인의 참된 모습으로 보이겠습니까? 그만한 신앙인도 오늘날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람인데 그 가인이 마귀의 모습입니다.


신앙이 뭐냐! 육신에서 나오지 않는 요소가 신앙입니다. 근데 육신에서 나온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기독교가 되든, 불교가 되든 종교생활입니다. 내가 참된 신앙이냐, 아니냐를 판정할려면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종교생활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정리해야 돼요.


길에서 돈 줍고 그래서 내가 더 살게 되어서 기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오만원 주웠는데 그 중에 삼만원을 헌금했다. 십일조보다 더한 거예요. 십에 육조를 한 거예요. 그거다 신앙생활 아닙니다. 종교생활입니다. 그 배경에는 나를 이렇게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자기 사는 것이 우선돼 있을 때에는, 그것이 바로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기껏 신에 대해서 선악과적인 인식가지고, 선악과적인 방식으로, 선악과적인 종교적인 형태로서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고, 연결을 시키고자 시도하는 것, 가인의 제사 그게 바로 종교생활입니다.


그것이 완악한 것이고, 죄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최고의 범죄라는 것을 인정한다. 라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인간일수가 없고 그저 육신덩어리 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시편116편 11절에 보면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되어있는데 그 모든에다가 자기 자신을 여기다가 집어 넣어 보세요. 이런 이야기하는 나도 역시 거짓말장이라는 겁니다. 모든 사람. 나 빼놓고 모든 사람이 아니고, 그냥 모든 사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 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거짓말 외에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거짖되는데 이 거짖된 종교생활에서 진짜 천국갈 수 있는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시편116편 15절에 보니까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여기 성도가 나오고 성도는 죽음으로서 말합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언제 죽일 겁니까?’ 이 거짓말만 매일같이 하며 하나님께 누를 끼치는 나를 예배드리면서도 거짓말하고, 헌금하면서 거짓말하고, 전도하면서 거짓말하고, 설교하면서 거짓말하고, 성경보면서도 거짓말하고, 기도하면서도 거짓말하는 이 육신을 언제 죽이실 겁니까? 주께서 답하기를 성도가 죽는 것은 귀한 사건이다.


바로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매일같이 성도에게만 반복됨으로 말미암아, 성도로 하여금 매일같이 십자가 안에서 늘 죽고 늘 사는 그러한 능력의 혜택을 제공하는 것, 바로 그 능력 안에서 그것이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이 벌리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유일자 (IP:116.♡.234.248)14-01-05 15:09 
61강-YouTube강의(성도의 삶의 의미)140102-이 근호 목사


삶의 존재 의미가 뭐냐. 성도가 예수 믿었으면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5장에서 하는 말이 나에게 욕망이 있는데 “이 몸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1장에서도 그런 말씀 하셨죠.


개인적으로 생각해서는 이제 이미 영생을 얻었으면 일찍 이 세상을 제대하는 것이 편하죠. 고생스럽게 군대생활 하는 것보다 제대해서 우리가 갈 곳이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거든요. 거기가면 두 번 다시 이사는 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나오는 법도 없고 좋든, 싫든 본의 아니게 영원히 거기서 천국의 복락을 마음껏 누려야 됩니다.


물론 거기 나사로도 가 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음성을 들으면서 엘리야 모세도 더불어서 거기에 다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생각한다면 빨리 손을 떼고 떠나고 싶은데,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죽고 싶다고 해서 금방 데려가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그 점에 대해서 고린도후서12장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말 자체가 이상하죠. 능욕 받는 것과, 궁핍한 것과, 핍박받는 것과, 곤란당하는 이것을 기뻐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 기뻐할 일입니까? 짜증날 일이죠. 이런 일보고 기뻐할 사람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저 내 육신하나 편하면 그게 행복이고 기쁜 거지 무슨 이런 기쁨의 요소에 무슨 핍박과 궁핍과 곤란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 성경이라는 것이 체험화 되기까지는 성령이 도와줘야 체험이 되지, 은혜로 이걸 안다고 해서, 반복한다 해서 체험되는 건 아닙니다. 그 이유가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니라“ 약할 때 강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9절에 봐도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로 이점을 아는 거예요.


사람이 족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여유있게 살아도 그 사람은 새로운 더 많은 것과, 더 큰것과 더 기대할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지금의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대해서 기쁨을 유보시켜야 됩니다. 더 많은 것이 될 때까지 기쁨을 잠시 멈춰야 되는데 사도바울이 알았던 이 기쁨이라 하는 것은 내일 기뻐하지, 혹은 모래 기뻐하지가 없고, 그 즉시로, 그 자체로 기쁨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약해져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약해지게 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조치가 실제로 나한테 조치가 취해진다는 자체에 대해서 내가 기뻐한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하면, 주님께서 지금 살아서 일하고 있음을 내가 느끼도록 해주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겁니다.


상당히 어떻게 보면, 오기 같기도 하고, 정말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말이라도 이런 식으로 해서 스스로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 느낌이 들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가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뭣 때문에 오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에게는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계셨습니다. 하나님품안에 있던 독생자인데 요한복음1장에서 아버지를 떠나서 이 땅에 내려 왔습니다.


그럴 때 우리인간들은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날 일이고 우리에게는 상관없다고 생각할겁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복음이라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꿍지렁, 꿍지렁 뭘 하셔가지고, 그 혜택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우리가 구원받는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는 고 자체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지, 아니면 내가 못한 것을 주께서 했다는 것이 기뻐하는 것인지, 어느 기쁨이 우세한지를 우리가 따져봐야 돼요.


내가 아무것도 안했는데 예를 들어서 헌금 안 해도 구원받고, 전도 안 해도 구원받고, 교회 출석 안 해도 구원받고, 기도 안 해도 구원받고, 이래도 복을 받고, 저래도 복을 받고, 죄져도 복을 받고, 사기를 쳐도 복 받고, 사람을 죽여도 천국가고, 간음해도 천국가고 이래서 기쁜지, 아니면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어떤 죄를 져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실제 우리 내부에서 체험화 시키는 그 작업이 기쁜지, 둘 중에 어느 쪽이 기쁘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만약에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평소에 우리는 얼마나 살기 위해서 고생을 해야 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것도 안하고 탕자가 돼도 구원받는다고 했으니까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안해도 돼.‘ 이걸 만약에 기쁘게 여기신다면 그거는 엄청난 오해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일을 시키느냐하면, 예수님께서 고생한 것이 양식이 없어서 고생이 아니고, 어떤 친한 사람이 없어서 외로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한 것은 아버지의 뜻 때문에 고생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왔을 때 아무도 자기 말을 알아주질 않았어요. 옆에 있는 제자들 마저도 곡해하고 오해 했습니다. 소위 소통이 되질 않은 거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는 너무나 엄청난 심적인 아픔과 고통을 품고 사셨어요. 비록 자신이 죽고 부활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통곡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했어요. 아버지의 뜻만 성사되기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만 성사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든 환경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통곡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뜻은 내가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방치해도 아버지의 뜻은 알아서 된다는 그런 우리의 편한 것을 우선으로 하는 논리가 성사되는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은 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끊임없이 우리가 시달리고, 고생하고, 약한 자 되고 모든 힘은 다 박탈당하는 그러한 현실 속에 휘말리면서 비로소 터져 나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도 안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됐다는 결실이 거기서 맺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가 편한 것을 우선으로 해서 복음을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면으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가 온 그것이 그냥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사항이 아니고, 오늘날 성도에게도 그대로 카피가 되어서 그대로 복사하듯이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진다는 내용.


이 성경말씀이 그냥 성경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변변치도 않는 맨날 어설프기 짝이 없고 맨날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주의 생각하는 나 같은 이 허접스러운 육신과 인생 속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아버지에게 모든 걸 버린 그 사태가 여전히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그거는 말로 다 할 수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여, 어떻게 저를 골라서 주께서 시련 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그 작업을 저희 몸을 통해서 카피를 해나가십니까? 어떤 그런 혜택을 저에게 누리게 하십니까? 세상에 이런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라는 것이 고린도후서12장 9절~10절에서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약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그런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고 이런 작업을 실시로 내 몸에 지금도 유발시켜내시는 그 실제 상황을 일으키시는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주님을 바라볼 때 이거는 세상도 감당 못할 정도로 강한사람으로서 관계가 맺어졌다는 사실. 이거보다 이 세상에 강한 것이 있을까요? 이게 바로 신앙인의 강함입니다.


어떤 세상도 톱으로 켜는 것과, 돌로 맞아 죽이는 것도, 어떤 것도 이 기쁨은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직접 집어 넣어주신 인간의 능력으로 있을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