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강-YouTube강의(성도의 삶의 의미)140102-이 근호 목사
삶의 존재 의미가 뭐냐. 성도가 예수 믿었으면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5장에서 하는 말이 나에게 욕망이 있는데 “이 몸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1장에서도 그런 말씀 하셨죠.
개인적으로 생각해서는 이제 이미 영생을 얻었으면 일찍 이 세상을 제대하는 것이 편하죠. 고생스럽게 군대생활 하는 것보다 제대해서 우리가 갈 곳이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거든요. 거기가면 두 번 다시 이사는 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나오는 법도 없고 좋든, 싫든 본의 아니게 영원히 거기서 천국의 복락을 마음껏 누려야 됩니다.
물론 거기 나사로도 가 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음성을 들으면서 엘리야 모세도 더불어서 거기에 다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생각한다면 빨리 손을 떼고 떠나고 싶은데,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죽고 싶다고 해서 금방 데려가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그 점에 대해서 고린도후서12장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말 자체가 이상하죠. 능욕 받는 것과, 궁핍한 것과, 핍박받는 것과, 곤란당하는 이것을 기뻐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 기뻐할 일입니까? 짜증날 일이죠. 이런 일보고 기뻐할 사람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저 내 육신하나 편하면 그게 행복이고 기쁜 거지 무슨 이런 기쁨의 요소에 무슨 핍박과 궁핍과 곤란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 성경이라는 것이 체험화 되기까지는 성령이 도와줘야 체험이 되지, 은혜로 이걸 안다고 해서, 반복한다 해서 체험되는 건 아닙니다. 그 이유가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니라“ 약할 때 강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9절에 봐도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로 이점을 아는 거예요.
사람이 족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여유있게 살아도 그 사람은 새로운 더 많은 것과, 더 큰것과 더 기대할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지금의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대해서 기쁨을 유보시켜야 됩니다. 더 많은 것이 될 때까지 기쁨을 잠시 멈춰야 되는데 사도바울이 알았던 이 기쁨이라 하는 것은 내일 기뻐하지, 혹은 모래 기뻐하지가 없고, 그 즉시로, 그 자체로 기쁨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약해져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약해지게 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조치가 실제로 나한테 조치가 취해진다는 자체에 대해서 내가 기뻐한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하면, 주님께서 지금 살아서 일하고 있음을 내가 느끼도록 해주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겁니다.
상당히 어떻게 보면, 오기 같기도 하고, 정말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말이라도 이런 식으로 해서 스스로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 느낌이 들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가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뭣 때문에 오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에게는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계셨습니다. 하나님품안에 있던 독생자인데 요한복음1장에서 아버지를 떠나서 이 땅에 내려 왔습니다.
그럴 때 우리인간들은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날 일이고 우리에게는 상관없다고 생각할겁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복음이라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꿍지렁, 꿍지렁 뭘 하셔가지고, 그 혜택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우리가 구원받는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는 고 자체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지, 아니면 내가 못한 것을 주께서 했다는 것이 기뻐하는 것인지, 어느 기쁨이 우세한지를 우리가 따져봐야 돼요.
내가 아무것도 안했는데 예를 들어서 헌금 안 해도 구원받고, 전도 안 해도 구원받고, 교회 출석 안 해도 구원받고, 기도 안 해도 구원받고, 이래도 복을 받고, 저래도 복을 받고, 죄져도 복을 받고, 사기를 쳐도 복 받고, 사람을 죽여도 천국가고, 간음해도 천국가고 이래서 기쁜지, 아니면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어떤 죄를 져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실제 우리 내부에서 체험화 시키는 그 작업이 기쁜지, 둘 중에 어느 쪽이 기쁘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만약에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평소에 우리는 얼마나 살기 위해서 고생을 해야 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것도 안하고 탕자가 돼도 구원받는다고 했으니까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안해도 돼.‘ 이걸 만약에 기쁘게 여기신다면 그거는 엄청난 오해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일을 시키느냐하면, 예수님께서 고생한 것이 양식이 없어서 고생이 아니고, 어떤 친한 사람이 없어서 외로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한 것은 아버지의 뜻 때문에 고생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왔을 때 아무도 자기 말을 알아주질 않았어요. 옆에 있는 제자들 마저도 곡해하고 오해 했습니다. 소위 소통이 되질 않은 거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는 너무나 엄청난 심적인 아픔과 고통을 품고 사셨어요. 비록 자신이 죽고 부활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통곡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했어요. 아버지의 뜻만 성사되기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만 성사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든 환경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통곡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뜻은 내가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방치해도 아버지의 뜻은 알아서 된다는 그런 우리의 편한 것을 우선으로 하는 논리가 성사되는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은 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끊임없이 우리가 시달리고, 고생하고, 약한 자 되고 모든 힘은 다 박탈당하는 그러한 현실 속에 휘말리면서 비로소 터져 나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도 안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됐다는 결실이 거기서 맺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가 편한 것을 우선으로 해서 복음을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면으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가 온 그것이 그냥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사항이 아니고, 오늘날 성도에게도 그대로 카피가 되어서 그대로 복사하듯이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진다는 내용.
이 성경말씀이 그냥 성경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변변치도 않는 맨날 어설프기 짝이 없고 맨날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주의 생각하는 나 같은 이 허접스러운 육신과 인생 속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아버지에게 모든 걸 버린 그 사태가 여전히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그거는 말로 다 할 수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여, 어떻게 저를 골라서 주께서 시련 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그 작업을 저희 몸을 통해서 카피를 해나가십니까? 어떤 그런 혜택을 저에게 누리게 하십니까? 세상에 이런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라는 것이 고린도후서12장 9절~10절에서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약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그런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고 이런 작업을 실시로 내 몸에 지금도 유발시켜내시는 그 실제 상황을 일으키시는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주님을 바라볼 때 이거는 세상도 감당 못할 정도로 강한사람으로서 관계가 맺어졌다는 사실. 이거보다 이 세상에 강한 것이 있을까요? 이게 바로 신앙인의 강함입니다.
어떤 세상도 톱으로 켜는 것과, 돌로 맞아 죽이는 것도, 어떤 것도 이 기쁨은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직접 집어 넣어주신 인간의 능력으로 있을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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