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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두개의 질서,있음과 없음 1307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8. 11:59
2013-07-05 01:25:55조회 : 1403         
유튜브(40강, 41강) 두개의 질서, 있음과 없음 130704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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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자 (IP:116.♡.234.248)13-07-08 17:46 
40강-YouTube강의(두개의 질서)130704-이 근호 목사


제목은 “두개의 질서”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나중에 죽어서는 천국을 간다. 말은 굉장히 쉬운 것 같은데, 막상 그렇게 해서 하나님나라에 갔던 사람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구약성도들이 천국 간다는 것을, 쉽게 간다는 인식을 그들은 도저히 갖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 장벽을 느꼈는데 하나는 공간적인 장벽, 지리적인 장벽을 그들은 겪어야 했습니다.


천국을 가는데 우리가 알아서 길 찾아 갈 수는 없는 거고, 하나님이 동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행하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공간적인 장벽을 겪어야 했는데 예를 들면, 홍해 같은 것이 대표적이겠죠? 다리도 없고 건너갈 수 있는 보트도 없는데, 뒤에는 애굽 군사들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됩니까. 헤엄칠 수 있는 입장도 못되고, 이렇게 딜레마에 빠지는 그런 경우를 소위 하나님 백성들은 겪어야 했습니다.


약속의 땅 천국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면 쉽게 천국에 들어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선배들은 난처한 입장을 한 두번 겪은 것이 아닙니다. 공간적인 장벽은 홍해를 건너가고 난 뒤에 요단강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요단강에 강물이 불어나서 홍수가 났거든요?


우리 생각 같으면 비 그치고, 물줄기 줄어들 때 바지가랭이 걷고서 저쪽으로 건너가는데 성공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조건을 겁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보고 먼저 건너가서 강 한복판에 언약궤를 들고 서라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지시를 오해해서 그걸 같이 경험하지 아니하고 딴 길로 새 나가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법은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고 죽으면 천국 간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공간적인 장벽과 또 장벽이 있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기억적인 장벽이죠? 그 장벽하나를 소개해 드리면 민수기 11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라고 이 만나 외에는 먹을게 없다고 불평들을 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천국 가게 된 사람들이 중간 중간에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가 제목을 두 개의 질서라 했는데 하나는 천상의 질서고, 또 하나는 지상의 질서입니다. 지상의 질서를 아래층으로 보고 천상의 질서를 윗층으로 본다면 에레베타가 있든지 안그러면 계단이 있어서 우리가 알아서 올라가면 될 수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이 두 개의 천상의 질서와 지상의 질서는 어떤 연결되는 계단이나 연결되는 인간적인 어떤 방식이 전혀 끊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없습니다. 상당히 억지 같죠?


그리고 민수기 11장 1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소리를 합니다. “그들이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라는 겁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지금 약속의 땅 요즘 말로 하면 천국이죠? 이 천국 가는 이 경로가 왜 그리 재미없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재미없는 일 하겠습니까? 사람이 재밌게 해야 따라가는 즐거움이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 동행해서 약속의 땅에 갔던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 한다는게 재미가 없다는 겨예요. 재미가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상의 질서에 푹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앞으로 살게 될 천상의 질서는 재미없는 그러한 질서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몸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협조를 하지 않게 되죠.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은 교회 다니면서 이 지상에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고 아주 쉽게들 생각하는데 구약의 백성들은 하루하루 삶이 광야에서 만나먹고, 그 다음날도 만나먹고, 그 다음날도 만나먹고 그리고 텐트 철거하고, 또 이동하고, 또 만나먹고 광야에서 사십일 생활하는 그 하루하루가 애굽에서 재밌던 삶과 떼어놓고 그걸 격리시키는 아~주 아픈 장벽, 괴로움 고생 이런 것을 겪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주 심하게 겪었어요. 그렇게 겪는 가운데서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이 천상의 질서와, 지상의 질서의 차이점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천상의 질서라 하는 것은 은혜로 채워지는 질서입니다. “모든 발걸음과 모든 행동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 개입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능력으로 저희들은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라고 이렇게 차곡차곡 채워지는 것이 은혜의 질서입니다.


반면에 지상의 질서, 애굽에 살았던 질서는 뭐냐 하면, 모자란 힘을 어떻게든 보충해서 그 힘을 내가 소유함으로서 생존에 안정을 누리는 그런 질서, 그것이 바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방식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상의 질서라 하는 것은, 힘을 많이 끌어 모아서 그걸 소유화 시키는 겁니다. 뭐든지 내 소유화 되지 못하면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니까 내가 뭔가 소유한게 있을 때는 행복하고, 많이 소유하면 많이 행복하고 흔히 그것을 교회에서는 축복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야될 천국의 질서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도리어 천국의 질서를 위하여 지상의 질서는 전부 다 삭제 돼야 되고, 빼먹어야 되고 빠져야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천국이야기를 복잡하게 이야기 하는 이유가 이미 우리가 신약시대에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구약 역사 속에서 이렇게 복잡하게 하나님께서 친히 복잡하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 경로가 있거든요.


우리가 이걸 무시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 무시해 버리면 우리는 우리의 상상 속에 내가 일방적으로 지어낸 상상속의 천국인데 그 천국은 있지도 않는 천국이죠. 그건 거짓말이죠. 실제로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고 싶다면, 구약 성도들이 경험했던 그 지상의 질서와 천상의 질서와 연결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강제로 천상의 질서에 집어넣은 그러한 체험과 사건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지상의 질서라 하는 것은, 힘을 소유함으로서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을 만끽하면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송두리째 망가지고 부셔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천상의 질서라 하는 것은, 바로 거저주시는 매일같이 거지처럼 얻어먹는 매일같이 거저 주었기 때문에 인생에 대해서 화낼 이유가 없는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공급받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 질서 아래 놓여 있을 때 그것이 천상의 질서고 천국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구약에 나오는 이런 공간적인 장벽, 에덴동산이나 홍해나 요단강 건너가는 공간의 장애, 그리고 관습적인 장애,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 과거에 이렇게 살았다. 몸에 익혀버린 그러한 질서를 신약에서는 그 두 개를 어떻게 합치는가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결합이 됩니다.


그렇게 되게 된다면 우리는 신약에서는 십자가란 장애를 우리에게 매일같이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상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몸이 거기에 밀착돼있고 그 지상의 질서에 대해서 어떻게 하든 결합시키려고 애쓰는 자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든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그 십자가 피로써 용서도 함께 주어진다는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상의 질서를 통해서 죄를 알고, 그 죄가 천상의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 구심점이 되는 예수님의 용서와 결합하면서 우리는 천국으로, 천국으로 지금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제에 있습니다.

 유일자 (IP:116.♡.234.248)13-07-08 17:46 
41강-YouTube강의(있음과 없음)130704-이 근호 목사


제목은 “있음과 없음”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와서 신을 믿을 때, 신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신이 있다고 할 때 그 있다 하는 그 용어를 하나님이 계시다 하기 이전에, 하나님한테 붙이기 이전에 어디에 붙여서 사용했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또는 탁자가 여기 있다. 의자가 저기 있다. 개가 저기 있다. 나무가 있다. 일방적으로 있다 하는 그런 있음에 대한 것을 가지고 그걸 어디다 붙이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 또는 하나님이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줄에 걸면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나님 계신 곳 어딘가에 계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옹호하고 존대해 드린다고 하는데 막상 하나님 쪽에서 우리보고 너는 있다. 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라고 책망을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토대가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 되겠죠?


신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는 내가 구원받는 어떤 밑천으로 삼고자 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향과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뭐라하냐 하면 나만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있고. 그 외의 사람은 없다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없는 겁니다.


그 없다를 성경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죽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 죽었다는 이야기를 더 해볼게요. 지금 이순신 장군 없습니다. 왜 이순신 장군이 없냐 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전에 있었는데 지금 없을 경우에는 이거는 행방불명되든지 죽었을 경우잖아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미 죽었다고 할 때에 우리가 보통 다른 사람에게 그분 죽었어. 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그분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라는 말과 같은 말인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이미 죽었다고 보는 겁니다. 죽은 걸로 간주하는 겁니다. 이미 죽었다고 본다면 우리가 입에서 저는 하나님계심을 믿어요. 라는 아부성 발언, 안 그러면 진정으로 우러나서 한 것 관계없이 한 그런 모든 발언도 우리의 구원 받는데 하등의 보탬이 되질 않습니다.


교회 나와서 목사가 어떤 멘트를 날립니다. 문장을 날릴 때, 교인들은 그 문장을 귀담아 들어서 그걸 주워 모아서 그게 숙제 인 것처럼  머릿속에 담습니다. 목사한테 들었던 어떤 성경지식이나 모든 걸 담아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이걸 있다고 꽁꽁 묶어버립니다. 내가 목사님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간증하게 되면 죽어도 내가 간증한 것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그런 계산을 하게 되어있죠.


그런데 이러한 모든 시도가 성경에 보면 다 소용없는 짖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든지, 신학을 하든지, 심지어 기도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 이모든 것은 우리가 구원 받는데 아무 소용없는 짖이예요. 그럼 뜸들이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하면, 하나님의 있음이 확장 되어서 거기에 편입되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 그냥 악마가 있다고 있음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있다고 있음으로 보지 않고요, 의미 있는, 의롭게 있는 것을 있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의롭게 있는것. 이 세상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로 있을 때 있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서 있을 때만 있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언약 밖에 나가는 것은 있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이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하나님이 언약 안에 있다고 했을 때, 거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있었는데 그것이 구약에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있기에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게 아니고요, 언약이 먼저 있기에 언약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차후에 이스라엘나라를 하나님이 만드신 겁니다.


그러니까 있음이란 그 토대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인데 그 언약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언약이 먼저 있고, 언약이 있다는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증거하기위해서 이스라엘은 없는데서 만들었고 죽은데서 살린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은데서 살린다는 거는 잘 믿기지 않죠? 이것은 유월절 날 죽음의 천사가 왜 찾아왔겠습니까? 모든 애굽에 있는 장자를 다 죽이기 위해 온 겁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모든 장자가 다 죽었는데 거기에 이스라엘장자들은 사실은 이미 죽었다고 봐야 돼요. 왜냐하면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가 아니었으면 그들은 애굽 사람과 같이 죽은 장자를 품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어린양 때문에 그들 장자가 안 죽고 살아났으면 그들의 삶은 내가 살았다하면 안됩니다.


 어떻게 되느냐, 어린양의 담겨있는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의 언약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내용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장자가 살아온 겁니다. 살아있다는 주인공이, 주체가 어린양이 살아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지, 어린양 믿는 내가 살아 있다는걸 가지고 내가 살아 있다고 하면 안돼요. 예수님이 천국가기 때문에 천국이지, 내가 천국 갔다고 그게 천국이 되는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자칮하면 그게 내 나라가 되고, 내 나라는 천국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했지 인간의 나라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보시기에 있다. 라는 것은 언약 안에 있을 때만 있음입니다. 근데 언약 안에 있는 분은 누구냐.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분이고, 진짜 사랑하는 분이고, 의로운 분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것을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 지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밖에 있는 사람은 존재하고 있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언약밖에 있기 때문에 있어도 없는 겁니다. 그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성경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죽음은 그냥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더불어 하나님 보시기에 죽음은 이런 형태를 가지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으면 그냥 눈 감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 언약 안에서의 진정 죽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어도 자기 죽음을 몰라요. 죽음을 심장 멈춘다, 두뇌가 정지 된다 그걸로 알고, 죽음은 편하게 잠자는 것이라고 알지, 죽는다는 것이 저주와 심판과 더불어 생존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언약에서 언급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그래서 성도가 성경에서 그런 쪽으로 이야기 할 때는 그 취지를 잘 알아야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도다. 이렇게 사랑이 먼저 나오고요, 그 다음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는 이 말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들은 다 죽어 있었어요.


죽어 있다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오해하기를 십자가 못 박아 죽은 그 예수님만 죽었고 물론 그 옆에 강도들도 죽었지만 그걸 쳐다보고 우리는 안꼬가 움직이니까 안 죽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게 언약밖에 있으니까 예수님을 아직도 육으로 판단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 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도 옛날에는 예수님을 육체로 본거예요. 육체로 본게 딴게 아니고 언약 밖에서 예수님을 판단했다 이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살았고, 예수님은 어떻게 될까? 이렇게 볼 때 이미 육체로 보는 거예요. 언약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는 숨 쉬고 있으니까 살았다고 보는 겁니다. 근데 언약에 보면 이미 우리는 죽어 있는 겁니다. 그것이 언약, 십자가를 통해서 아하, 맞구나. 이미 우리는 죽어 있는거 맞구나. 내가 보기에 살아 있는게 멀쩡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것이고, 죽음이란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저주와 더불어 있는게 죽음. 저주와 심판에 휘감겨서 그냥 생존하는게 죽음 이예요.


따라서 죽음의 반대말은 생명인데, 생명은 산다고 생명이 아니고, 축복으로 영생으로 휘감겨 있는 이걸 산다는 겁니다. 언약적으로 그렇게 정립되야 돼요.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님들 설교할 때는, 여러분들이 고생하면 나중에 예수님 때문에 낙을 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고,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주와 함께 고난 받으면 나중에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해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 생명이고, 진리이고,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언약적인 관점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 언약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죽어도 살고, 지금 살아 있어도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언약 때문에.


끝으로 그러면 우리가 언약이 있다, 없다를 어떻게 아느냐. 언약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영생과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영원히 저주가 없다는 사실이 이미 우리는 실제로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우린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