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강-YouTube강의(진노의 얼음장)130404-이 근호 목사
진노의 얼음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계시록은 성경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데요. 계시록을 볼때 사람들이 상당히 난감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소에 세상이라는 것은 전부가 사건과 사건, 그리고 역사와 역사 이런 걸로 계속 이어져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뭘했고, 이성계 장군이 어떻게 조선을 세웠고 전부 다 우리가 이해 안 될 이야기가 없어요. 미국의 링컨 대통령 이야기, 히틀러 이야기, 전부다 역사로 다 정리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 역사들이 뭉쳐서 세상에는 또 다른 말로 현실이다 이렇게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뉴스마다 역사, 사건, 현실, 세상 이것이 막 쏟아지고 있죠. 그래서 우리는 온 몸으로 그걸 만끽하면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 세상을 구상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보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하라, 어떻게 이걸 정리해야 될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당황해 하는데, 그중에 한 귀절은 요한계시록을 볼 수 있는 힌트가 되는 구절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 “내가 또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모세의 노래를 불렀다.” 역사적으로 봐서 모세라 하는 것은 BC1400년경 사람,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대략 한 서기 70년, 80년경. 그런데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지금 부른다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와 시간은 전혀 이거는 맞지를 않죠.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 시간관을 여기서는 포기를 해야 됩니다. 이거는 없다고 여기고 요한계시록 성경자체가 이야기하는 그 구조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불이 섞인 유리바다니까, 이건 마치 모세 때에 일어난 홍해바다 갈라진 것을 지금 이 신약시대에 그대로 가져와서 신약시대에 감추어진 현실, 이것을 수직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얼음장으로 본다면 우리가 얼음장 안에 들어가 봅시다. 그러면 얼음장이 있고, 그 위에 바깥세상이 있겠죠? 얼음장 안에 들어가서, 호수 안에 들어가서 얼음장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희미하게 보일 겁니다. 얼음장 두께 때문에, 빛이 다 온전하게 수용되지 않기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죠?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 보면 “유리바다 밑에 진노의 불같은 것이 섞여 있다.” 이 말씀입니다. 진노의 불이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밑에 세상이라면 위에 세상에는 유리바다는 하나님의 구원 받은 성도가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 구약에 보면 이들이 부른 노래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앞에 무언가 어떤 역할을 했던 어린양이예요. 세상에 뭐 어린양이 한 두 마리가 아닌데, 특별히 어린양이 어떤 어린양이냐 하면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했다는 이 말이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항상 일찍 죽임을 당한 모든 역사에 속한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벌린 일 때문에 일찍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어떤 시대와 관련 없이 다 적용이 가능한 독보적인 사건으로서의 어린양의 죽음, 곧 십자가죠.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은 유리바다를 건너가고 있는데, 그 유리바다 밑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있더라 이 말이죠.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홍해를 건너갈 때는 그냥 바닷물이 갈라졌고, 갈라지니까 땅이 나왔고, 그 땅을 두 발로 건너서 이쪽 애굽에서 저쪽 광야 쪽으로 무사히 건너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겁니다.
그래서 건너와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러니까 구약이라 하는 것은 요단강을 건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홍해를 건넜다고 구원되는 거는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어떤 역할을 했냐 하면은 일시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지리적으로 건너왔다고, 그것이 곧 천국에 도착했다고 간주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할 때는 지리적으로 수평적으로 이쪽저쪽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뭔가 갖추어야 될 요소를 넘어서는 어린양의 효과에 의해서 구원 돼야 그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양의 효과,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인데 그 밑에 얼음장 밑의 세계와 이쪽 세계를 구분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어린양의 죽음이 결정적이라는 것이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 받지 못한 세계는 어린양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 찬 세계이어야 된다는 거죠. 바로 그런 식으로 저녁 9시 뉴스에 나오는 모든 일들을, 그리고 드라마 이야기나 모든 우리가 이 세상에 겪고 사람들을 만나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모든 사건과 사태는 결국엔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고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일찍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요인들의 충만이라고 이렇게 해석해야 옳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해석입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악된 것이라면 배후에 악한 세력에 의해서 발생된 터져버린 사건이라면, 도대체 누가, 누가 자발적으로 이 힘에서 벗어나서 그야말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주만 거룩합니다.” 라는 찬송을 부를 위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아무도 없는 겁니다.
자력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난다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심판의 불에서 자신의 의로움으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단지 죽기만 했을까? 아니면 어떻게 구원의 효과를 주셨는가. 그것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십자가 지시고, 다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작업을 한 겁니다.
건지시는 작업을 했는데, 그 작업이 도달했느냐 도달 안했느냐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구분하느냐 하면, 바로 이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우리가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말씀을 우리에게 덮치게 하는 겁니다. 말씀을 덮치게 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구원되기로 확정이 된 사람한테는 이 요한계시록 이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만으로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 사람만이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딱 들어서게 되면 야~예수님 십자가가 그때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본디오 빌라도가 결정 내려서 터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이후에 우리가 이 땅에 어느 한국땅에 어느 지방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연관을 시켜서 생각토록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는데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때문에 우리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는 이 말씀에 합치된다는 사실을 믿게 되고, 그걸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 진거지, 하나님 말씀 자체로서 우리에게 덮쳐진다는 사실을 수용하게 되는 사람, 그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해석한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모든 세상을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빈틈없이 하나, 둘 다 현재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십자가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다시 확인하고 감사하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 합치된 구원받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성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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