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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감사,진노의 얼음장 1304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6. 17:58
2013-04-05 01:29:47조회 : 1903         
유튜브 (28강, 29강) 감사, 진노의 얼음장 130404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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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자 (IP:116.♡.234.248)13-04-07 21:34 
28강-YouTube강의(감사)130404-이 근호 목사


28강. 제목은 감사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누구나 사람이 자기한테 잘해주면 감사하죠. 근데 잘해준다 라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잘해주는 것인지, 못해주는 것인지 그 판결을 당사자가 임의대로 그렇게 판정을 해버리면 상대방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일을 일으켰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마치 나를 해롭게 한다고 오해할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상대방의 호의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게 되죠. 쉽게 말해서 감사에 대해서 할 때 성경에서는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분명히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했는데, 우리는 감사할 것 따로 뽑아놓고, 감사하지 않은 일 따로 뽑아놓고, 그래서 감사할 것만 감사하겠다고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립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언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자신에게는 문제가 많다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말씀 앞에서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이어져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 한다는 것은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감사할 것 따로 뽑아놓고, 이거는 죽어도 감사 못할 것 따로 뽑아놓는 감사할 것과 감사 안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판단하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그 문제점을 들쑤셔 놓는 겁니다. 그것을 밝혀 놓아서 결국은 모든 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지간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백성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을 때 “이제 애굽에서 이렇게 너희들을 탈출시켰으니까,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머리써서, 알아서, 성실과 열심으로 내가 기다리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너라.”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동행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그 상태가 바로 약속의 땅 천국인데, 애굽에서 살던 그 행세와 버릇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뭔가 그 오는 도중에 수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뭘 수정해야 될까요? 감사할 것 내가 정하고 이것은 감사 안할 거니까 감사 안할꺼야! 라는 고집, 기존의 관념들, 이것은 스스로 고치라하면 스스로 고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셔서 나서서 그들을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면서 약속의 땅에 골인하도록 그렇게 친히 이끄시는 겁니다.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제가 방금 구약 얘기했지만 신약도 똑같은 원리로 적용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 증거가 뭐냐.” 라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변해도 괜찮습니다. 전에는 “이런 이런 것은 감사하고, 이런 것은 감사 안할꺼야.” 라고 자기가 임의대로 감사할 것과 안할 것을 구분 지었는데, 주님의 성령이 함께 있고 주님이 함께 동행 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밖에 없는 그런 일들만 일어났다는 것으로 마음이 바뀌어 지시거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있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뀌는가! 그 방식은 뭐냐! 그거는 구약 애굽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실시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신약에 똑같은 방식을 했는데요, 먼저 구약부터 얘기한다면 애굽에서는 그들이 즐겨먹던 모든 것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물도 제공하지 않았고, 양식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원 받았다는 아주 짧은 시점에 구원받은 기쁨을 갖고 있었는데, 그걸 뒤로하고 하나님이 약속의 땅 그 땅으로 가면서 감사는커녕 매순간마다 원망과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와중에서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재로 나선 모세는 죽을 지경이었고 괴로웠습니다. 백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모세를 대해서 원망하고 이것은 곧 하나님에게까지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원망하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마실 것, 가장 기본적인 잠잘 것, 이런 기본적인 것이 해결이 안되는데 우리보고 뭘 더 요구하느냐!” 라는 식으로 “이게 하나님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냐!” 하는 식으로 대들었습니다.


자~ 어디가 문제일까요? 그들의 문제점이 뭘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 갖고 있고 있는 것을 추가적으로 더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근원적으로 싹 뺏어 버리고 오직 천국에 필요한 것으로 대체해서 그들에게 제공하시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필요한 것, 필요치 않는 것을 빼버리고 하늘나라에 꼭 필요한 것만 그들에게 보상해주기 위해서 뺏는 과정과 더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놓이게 된겁니다. 근데 그들은 천국이 필요 없는 건데, 그냥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뺏어가니까 거기에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불만과 불평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만나이었을까요? 아니면 생수였을 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그 자신도 모르는 원초적인 죄. 그 죄에서 그것을 노출시켜서 그 죄에 대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있어야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 용서가 있기 위해서는 그들은 왜 가장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것이 용서 일 수밖에 없는가를 그 이유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의 기본적인 바탕을 뜯어내는 작업을 주께서 하신 겁니다.


똑같은 비슷한 하나님의 작업이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하신 흔히 오병이어라 하죠?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로 오천명 먹이는 장면에 주님께서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빈들이고, 광야고, 때도 저물었고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요구했습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세요. 예수님도 먹을 것을 주라고 먼저 언급을 하셨습니다. 자~ 그럴때 그들은 그들이 필요한 끼니를 주시는 것이라고 그렇게 오해를 했습니다. 역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 오천명이 다 배부르게 먹고 그리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남았습니다. 자, 이 사실을 나중에 요한복은 6장에서 이런 사실을 해석을 하는데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너희들에게 떡을 준 것은 결국 너희들을 살릴 수 없는 떡을 나에게 원했다.” 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한 차원에서 떡을 주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 “우리에게 기적이다, 놀라는 능력이다.” 라고 주신 것은 그 기적과 능력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원했던 능력과 기적 이었다. 라는 겁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그런 기적과 능력을 원한다는 것은 “너희들이 왜 천국 갈수 없고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는가.” 그것을 절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무턱대고 하나님께 그런 기도와 그런 간구를 하게 하게끔 그렇게 하나님께서 유도 하신 겁니다.


“하나님 이것 필요합니다. 하나님 저것 필요합니다.” “이것 주셔야 감사하고 저것 주셔야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의 항목 기뻐하는 항목을 그들은 철저하게 털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으로 주께서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늘나라에 필요 없고 지금 자기의 명예와 체면과 자기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의 근원적인 죄에서 나온 죄의 열매였고 육신의 열매였습니다.


그렇게 다 인간의 죄들이 노출되고 난 뒤에 주님께서 그 다음에 정작 사는 것은, 너희들이 원하는 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산다고 “피”라는 것을 앞에 제공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누구냐! “예수님을, 메시야를 이렇게 피 흘려 죽게 만든 당사자가 누구냐! 박해자가 누구냐! 바로 너희들 자신이다.” 라는 박해자 입장에서 예수님이 피해자로 엮어질 때, 그 엮어진 통로를 통해서 용서의 피가 흐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이고, 이 방식 외에는 어느 인간도 천국에 간 사람이 없습니다.


맘껏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기도하세요. 그리고 성령을 받으시면 충실히 기도한 그 기도의 모든 것이 주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우리가 감추어 놓은 죄라는 것이 발각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진정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가, 용서해서 감사가, 긍휼해서, 자비해서,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감사인 겁니다.

 유일자 (IP:116.♡.234.248)13-04-08 21:40 
29강-YouTube강의(진노의 얼음장)130404-이 근호 목사


진노의 얼음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계시록은 성경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데요. 계시록을 볼때 사람들이 상당히 난감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소에 세상이라는 것은 전부가 사건과 사건, 그리고 역사와 역사 이런 걸로 계속 이어져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뭘했고, 이성계 장군이 어떻게 조선을 세웠고 전부 다 우리가 이해 안 될 이야기가 없어요. 미국의 링컨 대통령 이야기, 히틀러 이야기, 전부다 역사로 다 정리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 역사들이 뭉쳐서 세상에는 또 다른 말로 현실이다 이렇게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뉴스마다 역사, 사건, 현실, 세상 이것이 막 쏟아지고 있죠. 그래서 우리는 온 몸으로 그걸 만끽하면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 세상을 구상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보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하라, 어떻게 이걸 정리해야 될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당황해 하는데, 그중에 한 귀절은 요한계시록을 볼 수 있는 힌트가 되는 구절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 “내가 또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모세의 노래를 불렀다.” 역사적으로 봐서 모세라 하는 것은 BC1400년경 사람,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대략 한 서기 70년, 80년경. 그런데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지금 부른다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와 시간은 전혀 이거는 맞지를 않죠.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 시간관을 여기서는 포기를 해야 됩니다. 이거는 없다고 여기고 요한계시록 성경자체가 이야기하는 그 구조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불이 섞인 유리바다니까, 이건 마치 모세 때에 일어난 홍해바다 갈라진 것을 지금 이 신약시대에 그대로 가져와서 신약시대에 감추어진 현실, 이것을 수직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얼음장으로 본다면 우리가 얼음장 안에 들어가 봅시다. 그러면 얼음장이 있고, 그 위에 바깥세상이 있겠죠? 얼음장 안에 들어가서, 호수 안에 들어가서 얼음장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희미하게 보일 겁니다. 얼음장 두께 때문에, 빛이 다 온전하게 수용되지 않기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죠?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 보면 “유리바다 밑에 진노의 불같은 것이 섞여 있다.” 이 말씀입니다. 진노의 불이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밑에 세상이라면 위에 세상에는 유리바다는 하나님의 구원 받은 성도가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 구약에 보면 이들이 부른 노래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앞에 무언가 어떤 역할을 했던 어린양이예요. 세상에 뭐 어린양이 한 두 마리가 아닌데, 특별히 어린양이 어떤 어린양이냐 하면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했다는 이 말이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항상 일찍 죽임을 당한 모든 역사에 속한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벌린 일 때문에 일찍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어떤 시대와 관련 없이 다 적용이 가능한 독보적인 사건으로서의 어린양의 죽음, 곧 십자가죠.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은 유리바다를 건너가고 있는데, 그 유리바다 밑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있더라 이 말이죠.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홍해를 건너갈 때는 그냥 바닷물이 갈라졌고, 갈라지니까 땅이 나왔고, 그 땅을 두 발로 건너서 이쪽 애굽에서 저쪽 광야 쪽으로 무사히 건너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겁니다.


그래서 건너와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러니까 구약이라 하는 것은 요단강을 건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홍해를 건넜다고 구원되는 거는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어떤 역할을 했냐 하면은 일시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지리적으로 건너왔다고, 그것이 곧 천국에 도착했다고 간주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할 때는 지리적으로 수평적으로 이쪽저쪽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뭔가 갖추어야 될 요소를 넘어서는 어린양의 효과에 의해서 구원 돼야 그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양의 효과,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인데 그 밑에 얼음장 밑의 세계와 이쪽 세계를 구분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어린양의 죽음이 결정적이라는 것이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 받지 못한 세계는 어린양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 찬 세계이어야 된다는 거죠. 바로 그런 식으로 저녁 9시 뉴스에 나오는 모든 일들을, 그리고 드라마 이야기나 모든 우리가 이 세상에 겪고 사람들을 만나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모든 사건과 사태는 결국엔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고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일찍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요인들의 충만이라고 이렇게 해석해야 옳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해석입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악된 것이라면 배후에 악한 세력에 의해서 발생된 터져버린 사건이라면, 도대체 누가, 누가 자발적으로 이 힘에서 벗어나서 그야말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주만 거룩합니다.” 라는 찬송을 부를 위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아무도 없는 겁니다.


자력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난다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심판의 불에서 자신의 의로움으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단지 죽기만 했을까? 아니면 어떻게 구원의 효과를 주셨는가. 그것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십자가 지시고, 다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작업을 한 겁니다.


건지시는 작업을 했는데, 그 작업이 도달했느냐 도달 안했느냐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구분하느냐 하면, 바로 이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우리가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말씀을 우리에게 덮치게 하는 겁니다. 말씀을 덮치게 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구원되기로 확정이 된 사람한테는 이 요한계시록 이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만으로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 사람만이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딱 들어서게 되면 야~예수님 십자가가 그때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본디오 빌라도가 결정 내려서 터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이후에 우리가 이 땅에 어느 한국땅에 어느 지방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연관을 시켜서 생각토록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는데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때문에 우리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는 이 말씀에 합치된다는 사실을 믿게 되고, 그걸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 진거지, 하나님 말씀 자체로서 우리에게 덮쳐진다는 사실을 수용하게 되는 사람, 그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해석한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모든 세상을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빈틈없이 하나, 둘 다 현재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십자가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다시 확인하고 감사하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 합치된 구원받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