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YouTube강의(내 뜻대로 마옵시고)121220-이 근호 목사
제15강 제목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면 거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도 나오는데 요한복음 17장에도 나오고, 특히 결론부분에서 상당히 궁금하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을까?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내용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더 나아가서 내가 아침, 저녁마다 하는 기도내용이 예수님의 기도내용과 일치될까?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고, 일치가 되면 응답받을 가능성이 높고, 일치되지 아니하면 응답 안 될 가능성이 높다는 그런 걱정도 아울러서 우리가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그 내용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39절에 나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겁니다.
여기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는 이 대목에서 먼저 내 뜻이 무엇인가에 우리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통해서 충분히 우리는 매일같이 반영이 되고 있습니다. 내 뜻 말고 다른 뜻에 의해서 우리는 발을 움직이고 눈동자를 돌리고 말을 하고 머리를 굴리고 이런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다 내 뜻, 어떻게 하면 내 뜻을 관철하는가, 여기에 정신을 집중시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의 뜻 이루려고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고, 오직 내가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는 내가 희망하는 그 내 뜻을 위하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할 때 특히 새벽기도나 금요철야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은 전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느냐, ‘그저 내 뜻대로 하옵소서.’가 가득 차 있습니다. 커피까지 마셔가면서 졸음을 쫓아내면서 진짜 뿌리 뽑는 심정으로 목숨 바쳐 가면서 모든 악한 악조건의 날씨를 이겨가면서 그렇게 시도하는 그 모든 집단기도나 개인기도의 열성 있는 기도의 초점은 그저 어쨌든 저쨌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와 관련돼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도를 3시간, 4시간, 5시간 계속 했는데 응답하기를 ‘절대로 네 뜻대로 하지 않겠다.‘라고 나오신다면 우리는 그 다음 금요철야 할 때는 무슨 제목으로 기도를 해야 되죠?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끄집어내는 모든 것이 내 뜻에서 나온 ’내 뜻대로 하옵시고‘의 기도기 때문에, 이것은 그 자체를 만약에 차단시킨다면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게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보면 제가 전반부 “내 뜻대로 마옵시고“만 이야기했는데 그 뒷부분을 봅시다.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을 우리가 감응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서 아버지 뜻이란 그냥 ‘아버지 뜻대로 하겠습니다.’ 해서 실시되는 게 아니고 내 뜻은 이 뜻인데, 이 뜻은 아버지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 뜻은 묵살해 주시고 내 한평생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내 뜻대로만 안 되는 쪽으로 내 몸을 사용하여 주시고,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뜻대로만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겁니다. 문장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실 의미가 없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그냥 외우기만 해도 마치 멋있어 보이는 것 같은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기도를 드렸을 때 예수님의 기도와 합치되는 기도를 하려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부터 충실하고 끝까지 아버지 뜻대로 밀어붙여야 되는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에 충실하려면 자기의 숨어있는 뜻이 무엇인가를 다 끄집어서 그대로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라 하는 것은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왜냐 하면 끊임없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뜻이 추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이런 겁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이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고 쉬운 이야깁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반드시 행동의 결과를 내다보지 않고 어떤 업적과 실적을 내다보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그런 사람은 없어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이것이 하나의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되어서, 필히 내가 수고한 어떤 보상과 성과가 이렇게 나와 준다는 걸 은근히 노리면서 그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시장에 장보러 가더라도 반드시 뭐는 사서 돌아온다. 마트에 가서 이건 사고 돌아온다는 미리 예상을 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을 굴릴 때는 그 굴리는 수고와 노동만큼은 어떤 더 추가적인 혜택과 이익이 주어지는 것을 반드시 의식하면서 행동하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해놓고 사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얼른 내 뜻대로 되었는지 안 됐는지 내 기대대로 됐는지 얼른 살피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새벽기도를 한다든지, 신방을 할 때, 어느 집에 두 주간 나오지 않는 교인이 있다 합시다. 그러면 신방 가기 전에 빡세게 기도를 합니다. ‘ 하나님 제가 신방 갈 때 그 사람의 마음을 감동 감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신방해서 좋은 관계가 되어서 다음 돌아오는 주일날에는 교회 출석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출석에 빠진 사람을 신방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할 때는 조심스럽게 하고 말하는 것이 은혜가 넘치는 말이 되어서 상대방 듣는 사람이 상처가 되지 않게 해주시고, 그래서 오직 말씀만, 복음만 전파되어서 그 복음에 성령에 감동하여 교회 다음에 나오기를 원합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인도 대충 만족스럽게 신방을 끝내고 상대방도 좋은 인상으로 헤어지고, 그 다음에 그것이 목요일이라면 돌아오는 주일에는 이제 기다립니다. 내가 신방 갔는데 벌써 두 번 빠졌는데 세 번째 그 사람이 올까, 그 사람의 그 자리를 주목하면서 드디어 강대상에 오르게 됩니다.
이럴 때 만약에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면 목사님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 뜻대로 드디어 오게 하셨군요.’ 이렇게 표현합니다. 과연 그 사이에, 그 가운데 솔직히 깨놓고 말해서 본인은 그런 기대가 없었던가요? 그 절차 가운데서 자기가 다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것은 “내 뜻대로 되옵시고“를 계속해서 실시한 게 돼요. 내 뜻대로 되기 위해서 아버지 뜻이 동원되게 해달라는 그런 식이 돼 버렸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의 기도하고는 이거 어긋난 겁니다.
그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는 뭐냐, 결국 그 목사의 잘못은 내가 신방을 열심히 했던 그 결과가 그 다음 주일 날 그 사람이 평소에 앉던 그 자리에 등장하는 것, 이것과 결부해서 뜻의 완성으로 본 게 그게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기도했고 신방을 했고 그 신방의 결과로서 그 사람이 교회 나왔고, 따라서 내가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신방하는 것도 뜻이고, 온 것도 뜻이다. 해서 그것을 종합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잘못된 해석인 겁니다.
그럼 무엇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냐,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복음의 결실이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그 자체가 결실 이예요. 복음을 전파하고 난 뒤에 어떤 교회가 부흥된다든지 교회 교인이 온다든지, 신방을 했더니만 참석했다는 이런 것이 어떤 업적과 결과로서 하나님의 뜻은 남는 게 아닙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욥기에 나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도 하나님이십니다.” 욥에 있어서 주실 때만 하나님 뜻이 아니고, 가져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 교인이 참석을 안 했을 때 그건 내 성과가 없는 것이고, 참석하면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그 목사의 성과주의 사고방식, 바로 그것이 평소에 숨어있던 자신의 뜻이었던 겁니다. 그 뜻을 우리가 주의 뜻이라고 시도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주의 뜻을 빙자한 실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자기 뜻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마는 겁니다.
사람은 그저 고상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멋지게 하는 것도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기 뜻 이예요. 하나님께서의 뜻은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숨어있는 자기의 욕심과 욕망, 목표란 이름의 욕망, 주의 영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가식화된 그런 욕망을 다 끄집어내놓고 바로 그 가운데서 주의 복음만 전파되었다면 그 자체가 바로 주의 뜻입니다. 그 예가 스데반집사가 설교하고 난 뒤에 오래 산 게 아닙니다. 스데반집사는 설교하는 동시에 그는 죽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바로 말씀이 우선이고 자기는 나중이라는 것, 자기가 살아서 자기 눈으로 어떤 결과를 보는 이것은 주의 뜻이 아니고 그저 나의 욕망에서 나온 나의 뜻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그야말로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이 땅에 살다 가신 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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