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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강의-제자와 신자,내 뜻대로 마옵시고 1212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6. 08:01
2012-12-21 01:27:22조회 : 3239         
유튜브 강의 14, 15강 제자와 신자, 내뜻대로 마옵시며 121220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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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강   음성           동영상

 이한례 (IP:203.♡.41.16)12-12-21 20:14 
14강-YouTube강의(제자와 신자)121220-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14강인데 제목은 ‘제자와 신자’라는 주제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신자였겠습니까? 아니면 불신자였겠습니까? 제자니까 당연히 신자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 마치 신자처럼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더불어 생활을 같이 했으니까 분명히 신자처럼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이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은 신자가 이러하다,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게 아니고 불신자는 이러하다. 불신자는 이러한 자들이 불신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들을 뽑아 세웠던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이 교회 올 때 ‘목사님, 어떻게 하면 신자가 됩니까?’라는 질문을 시작해서 교회생활을 하는데 그 질문이 잘못됐습니다.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목사님, 불신자가 무엇입니까?’ 불신자가 무엇인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성경에서 말하는 신자라는 개념이 수립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함께 있는데 함께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온갖 천국의 내용과 말씀을 그렇게 들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옆에 붙어있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신자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데리고 그렇게 3년 동안 같이 동고동락(同苦同樂) 해도 그들의 불신앙은 계속 불신앙으로 남아있는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같이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붙어있었다고 해서 불신자가 신자 되는 것 아니고, 불신앙이 신앙 되는 거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12제자의 역할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서 진정 무엇이 불신자인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그러한 역할을 그들은 톡톡히 하고 있었습니다.


불신자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제넘게 신자를 언급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믿음과 불신앙을 어떻게 이걸 해결하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성찰하고 자기 자신이 연구하고 분석해서 그래서 자기의 노고를 거쳐서 힘든 수고를 거쳐서 그것을 사람들은 진리라고 그렇게 가지려고 하는 겁니다. 다듬고 연구하고 분석해서 ‘그래, 이거 믿을만해.’ 믿을만한 것은 차곡차곡 자기의 마음의 창고에다 담아두고 내가 믿을만한 것을 믿겠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신자라고 그렇게 우기고 싶은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죠? 세상의 수학에서 세상의 과학에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회생활에서 보여주지 않고 믿으라면 그거 믿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죠. 이 말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우리 인간은 본 게 없으면 절대로 믿지 않는 존재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를 신자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고서 믿도록 조치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그러한 강렬한 의지를 이미 우리가 내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들은 사람들을 불신자를 신자 만들기 위해서 실적과 업적으로서 그들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동의하면 신자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줍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교회가 불신자를 통째로 신자 만드는 그런 공장노릇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보는 것도 보고 믿었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고 내쳐야 되는데, 반대로 ‘내가 보이니 비로소 믿습니다.’ 그런 것만 골라서 수집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기도를 해서 응답이 있고 어떤 실적이 있다면 우리가 그 실적을 보고 ‘아!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안다면 그건 믿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불신앙에 포함 되는 겁니다. 기도를 해도 아무런 실적이 없을 때 그게 비로소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 그걸 믿는다면 그게 신앙인 겁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네가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 중에 하나 도마에게 보여주니까 예수님께서 참된 목자를 보여주니까 ‘야, 이제야 믿겠습니다.’라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도마야 너한테는 그런 식으로 보여줘서 믿느냐”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보여서 믿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보지 않는 것을 믿어야 될 텐데 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가 없는 이유가 인간은 지금껏 본 것에 의해서 계속해서 자기의 이해력을 키워왔습니다. 이것 봤으니까 이거 안다. 이거 봤으니까 이거 안다. 자기가 안다는 것은 그동안 많이 보아왔다는 것들의 집합입니다.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그동안 본 것, 이해한 것, 그것을 이해 못하는 것이 주어질 때 달리 말해서 ‘이건 내가 본 게 아니야.’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신앙은 시작되는 겁니다. 야! 이건 상상도 못했네.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내 세계관 안에서는 도저히 이런 일은 나올 수도 없었네. 이건 내 예상을 내 꿈과 비전을 이건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야.‘라는 감탄과 더불어서 새롭게 믿어지는 그것.


이것은 그 전에 우리가 봤던 것도 아니고 알았던 것도 아니고 이해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어서, 그게 성령이죠.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불신자로 만들어 가는 그 과정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오직 복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하면 성령에 의해서만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노력과 나의 성찰과 도 닦는 것과 탐색에 의하지 아니하고, 오직 거저주시는 선물로만 우리를 신자 되게 하시는 그 작업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이건 우리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본문을 대하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행한 것이 아니요, 선물이라면 선물이라고 넙죽 성질 급하게 받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의 행한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의 행한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왜 믿음이 되지 못하고, 불신에 대한 증거에 불과한 것인가를 우리가 파악을 하려고 해야 돼요. 내가 행한 것, 내가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한 것, 왜 이런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것은 불신앙의 열매로만 우리에게 계속 기억 속에 남아있는가를 그걸 깨달아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자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 아니고, 불신자의 모범을 보여준 겁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과 떨어져 있으면 예수님을 추종하니까 같이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니까 마치 멀찍이서 보면 신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 분명히 저 베드로는 신자라고 알고 있었던 어떤 나이 어린 소녀가 베드로에게 ‘당신도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 맞죠?’ 라고 하니까 그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솔직하기도 하고 가장 본질을 드러낸 순간이기도 하고, 한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같으면 실수라고 할 수 있는데 세 번이나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쉽게 말해서 ‘나는 저 사람을 믿은 적이 없다.’ 다른 말로 ‘나는 저 사람에 대해서 철저한 불신자로 그동안 살아온 사람이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다.’라고 장담했고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평생 예수에 대해서 불신자입니다.‘라는 고백.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일부러 그러한 불신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왜, 그것이 신자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불신자구나, 나는 내가 본 것만 믿는구나, 내가 행한 것만 믿는구나.‘라고 솔직하게 자기를 고백하게 하시는 그 작업, 그런 작업이 닭이 울므로서 그게 말씀께서 의도적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우리의 불신의 자리에 집어넣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복으로서 복을 받아서 이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더라도 늘 손에 만져지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이미 용서했다는 그런 불신의 죄까지 용서했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 이게 복된 신자인 겁니다.

 이한례 (IP:203.♡.41.16)12-12-21 21:57 
15강-YouTube강의(내 뜻대로 마옵시고)121220-이 근호 목사


제15강 제목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면 거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도 나오는데 요한복음 17장에도 나오고, 특히 결론부분에서 상당히 궁금하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을까?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내용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더 나아가서 내가 아침, 저녁마다 하는 기도내용이 예수님의 기도내용과 일치될까?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고, 일치가 되면 응답받을 가능성이 높고, 일치되지 아니하면 응답 안 될 가능성이 높다는 그런 걱정도 아울러서 우리가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그 내용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39절에 나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겁니다.


여기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는 이 대목에서 먼저 내 뜻이 무엇인가에 우리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통해서 충분히 우리는 매일같이 반영이 되고 있습니다. 내 뜻 말고 다른 뜻에 의해서 우리는 발을 움직이고 눈동자를 돌리고 말을 하고 머리를 굴리고 이런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다 내 뜻, 어떻게 하면 내 뜻을 관철하는가, 여기에 정신을 집중시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의 뜻 이루려고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고, 오직 내가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는 내가 희망하는 그 내 뜻을 위하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할 때 특히 새벽기도나 금요철야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은 전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느냐, ‘그저 내 뜻대로 하옵소서.’가 가득 차 있습니다. 커피까지 마셔가면서 졸음을 쫓아내면서 진짜 뿌리 뽑는 심정으로 목숨 바쳐 가면서 모든 악한 악조건의 날씨를 이겨가면서 그렇게 시도하는 그 모든 집단기도나 개인기도의 열성 있는 기도의 초점은 그저 어쨌든 저쨌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와 관련돼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도를 3시간, 4시간, 5시간 계속 했는데 응답하기를 ‘절대로 네 뜻대로 하지 않겠다.‘라고 나오신다면 우리는 그 다음 금요철야 할 때는 무슨 제목으로 기도를 해야 되죠?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끄집어내는 모든 것이 내 뜻에서 나온 ’내 뜻대로 하옵시고‘의 기도기 때문에, 이것은 그 자체를 만약에 차단시킨다면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게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보면 제가 전반부 “내 뜻대로 마옵시고“만 이야기했는데 그 뒷부분을 봅시다.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을 우리가 감응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서 아버지 뜻이란 그냥 ‘아버지 뜻대로 하겠습니다.’ 해서 실시되는 게 아니고 내 뜻은 이 뜻인데, 이 뜻은 아버지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 뜻은 묵살해 주시고 내 한평생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내 뜻대로만 안 되는 쪽으로 내 몸을 사용하여 주시고,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뜻대로만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겁니다. 문장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실 의미가 없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그냥 외우기만 해도 마치 멋있어 보이는 것 같은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기도를 드렸을 때 예수님의 기도와 합치되는 기도를 하려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부터 충실하고 끝까지 아버지 뜻대로 밀어붙여야 되는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에 충실하려면 자기의 숨어있는 뜻이 무엇인가를 다 끄집어서 그대로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라 하는 것은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왜냐 하면 끊임없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뜻이 추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이런 겁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이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고 쉬운 이야깁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반드시 행동의 결과를 내다보지 않고 어떤 업적과 실적을 내다보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그런 사람은 없어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이것이 하나의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되어서, 필히 내가 수고한 어떤 보상과 성과가 이렇게 나와 준다는 걸 은근히 노리면서 그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시장에 장보러 가더라도 반드시 뭐는 사서 돌아온다. 마트에 가서 이건 사고 돌아온다는 미리 예상을 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을 굴릴 때는 그 굴리는 수고와 노동만큼은 어떤 더 추가적인 혜택과 이익이 주어지는 것을 반드시 의식하면서 행동하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해놓고 사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얼른 내 뜻대로 되었는지 안 됐는지 내 기대대로 됐는지 얼른 살피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새벽기도를 한다든지, 신방을 할 때, 어느 집에 두 주간 나오지 않는 교인이 있다 합시다. 그러면 신방 가기 전에 빡세게 기도를 합니다. ‘ 하나님 제가 신방 갈 때 그 사람의 마음을 감동 감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신방해서 좋은 관계가 되어서 다음 돌아오는 주일날에는 교회 출석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출석에 빠진 사람을 신방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할 때는 조심스럽게 하고 말하는 것이 은혜가 넘치는 말이 되어서 상대방 듣는 사람이 상처가 되지 않게 해주시고, 그래서 오직 말씀만, 복음만 전파되어서 그 복음에 성령에 감동하여 교회 다음에 나오기를 원합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인도 대충 만족스럽게 신방을 끝내고 상대방도 좋은 인상으로 헤어지고, 그 다음에 그것이 목요일이라면 돌아오는 주일에는 이제 기다립니다. 내가 신방 갔는데 벌써 두 번 빠졌는데 세 번째 그 사람이 올까, 그 사람의 그 자리를 주목하면서 드디어 강대상에 오르게 됩니다.


이럴 때 만약에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면 목사님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 뜻대로 드디어 오게 하셨군요.’ 이렇게 표현합니다. 과연 그 사이에, 그 가운데 솔직히 깨놓고 말해서 본인은 그런 기대가 없었던가요? 그 절차 가운데서 자기가 다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것은 “내 뜻대로 되옵시고“를 계속해서 실시한 게 돼요. 내 뜻대로 되기 위해서 아버지 뜻이 동원되게 해달라는 그런 식이 돼 버렸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의 기도하고는 이거 어긋난 겁니다.


그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는 뭐냐, 결국 그 목사의 잘못은 내가 신방을 열심히 했던 그 결과가 그 다음 주일 날 그 사람이 평소에 앉던 그 자리에 등장하는 것, 이것과 결부해서 뜻의 완성으로 본 게 그게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기도했고 신방을 했고 그 신방의 결과로서 그 사람이 교회 나왔고, 따라서 내가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신방하는 것도 뜻이고, 온 것도 뜻이다. 해서 그것을 종합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잘못된 해석인 겁니다.


그럼 무엇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냐,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복음의 결실이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그 자체가 결실 이예요. 복음을 전파하고 난 뒤에 어떤 교회가 부흥된다든지 교회 교인이 온다든지, 신방을 했더니만 참석했다는 이런 것이 어떤 업적과 결과로서 하나님의 뜻은 남는 게 아닙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욥기에 나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도 하나님이십니다.” 욥에 있어서 주실 때만 하나님 뜻이 아니고, 가져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 교인이 참석을 안 했을 때 그건 내 성과가 없는 것이고, 참석하면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그 목사의 성과주의 사고방식, 바로 그것이 평소에 숨어있던 자신의 뜻이었던 겁니다. 그 뜻을 우리가 주의 뜻이라고 시도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주의 뜻을 빙자한 실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자기 뜻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마는 겁니다.


사람은 그저 고상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멋지게 하는 것도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기 뜻 이예요. 하나님께서의 뜻은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숨어있는 자기의 욕심과 욕망, 목표란 이름의 욕망, 주의 영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가식화된 그런 욕망을 다 끄집어내놓고 바로 그 가운데서 주의 복음만 전파되었다면 그 자체가 바로 주의 뜻입니다. 그 예가 스데반집사가 설교하고 난 뒤에 오래 산 게 아닙니다. 스데반집사는 설교하는 동시에 그는 죽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바로 말씀이 우선이고 자기는 나중이라는 것, 자기가 살아서 자기 눈으로 어떤 결과를 보는 이것은 주의 뜻이 아니고 그저 나의 욕망에서 나온 나의 뜻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그야말로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이 땅에 살다 가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