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여름수련회 8강
이번 시간에는 ‘내부 충돌’이란 제목으로 강의하겠습니다.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을 유지했는데, 그들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자체, 갈 곳을 잃었다는 자체, 12토막 사건뿐만 아니고,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미가 집안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안의 저주를 해소하기 위해서 신상을 만들고 레위 지파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지요. 이전에 미가 아들은 레위 지파도 아니면서 제사장 노릇을 했어요. 아들이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어요.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베들레헴에서 떠나온 어떤 레위 소년이 갈 곳이 없어 떠돌아 다녔는데 미가 가정에서 그 소년을 초빙합니다.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이렇게 해서 연봉 협상이 되었고, 레위인은 그 집에 들어간 것을 만족했습니다. 일단 숙식이 해결되었으니까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할 필요가 없지요.
다 좋습니다. 레위 사람이 그 가정에 갔으면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해야 하는데, 연봉을 받고 취직을 했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못합니다. 결국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데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그런 과도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이야기와 베냐민 지파가 작살나는 것이 사사시대 초반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레위 지파를 의지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이미 자기 땅을 확보한 이상은 과거 이야기는 과거와 함께 흘러가 버렸고, 지금 이 땅을 어떻게 넓힐 것인가? 애굽적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 대해 조치를 했습니다. 이방 나라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는데, 힘으로 버티려 하다가 결국 심각한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 참 안 됐네요.”라고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관람객입니다. ‘아, 저런 신비로운 일이 있었구나. 하나님은 자기 원칙을 포기할 줄 모르네. 끝까지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위해서 피조물을 가지고 노시는구나.’하는 것을 발견하면 되지요. 안 됐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들 전부다 죽더라도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여튼 제사장을 뽑아 세웠는데, 18장 1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을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 지파는 아래쪽에 있습니다. 이들이 땅을 찾아 저 위쪽까지 올라갔어요. 올라가면서 그냥 올라간 것이 아니고 누구를 납치하는가 하면 미가의 집에 근무하는 레위 소년을 납치해서 연봉을 더 주겠다는 조건하에 데려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언약에 신경 쓰거나 관심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자가 상주한다든지 구원자가 되겠다는 사람도 없어요. 이건 남의 이야기니까 우리는 괜찮아요. 우리가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철조망 건너에서 구경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도 없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있으나마나 한 분이 되었고, 여호와 이름은 자기 세속의 소유를 지켜주는 우상으로 둔갑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면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꼭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데’라는 생각을 가질 만해요. 하나님 없어도 행복하게 살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무 이의가 없잖아요. 우리는 상관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상관이 있어요. 왜냐? 그 땅은 주님의 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판치는 가나안 땅, 이게 천국입니까? 약속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약속의 땅입니까? 약속이 약속답게 되려면 말씀을 어겼을 때는 저주가 임해야 되고, 말씀 지키면 복이 임해야 엄연히 살아있는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지 제각기 자기 부동산 소유해서 동네 만들어서 살고, 그곳에 사사라고 보냈더니만 처음에는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싸우긴 싸워요. 끝나고 난 뒤에 주변에 있는 장로들이 사사에게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시니 계속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서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어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와요.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도 결국은 우리 가장,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분이라는 식의 이방 종교로 돌변하고, 그에 대해 ‘그런 대우를 해주신다면 제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면서 둘이 짝짜꿍이 되어서 다음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는 겁니다. 질서가 잡힌 시절을 보내는 거예요.
사사기 말씀을 기존 교회에서 강해 설교하는 것은 상당히 유험한 일입니다. 그 교회를 곧 떠날 사람 아니면 사사기를 설교 못합니다. 사사기 3장에는 에훗이 나옵니다. 에훗은 자기를 지배하는 모압 왕 에글론을 암살하지요. 오른손잡이 인줄 알다가 긴장을 늦춘 틈에 왼손으로 찔러서 죽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다고 했는데, 이처럼 사사들이 하는 일이 지저분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죄인의 수준에 맞다고 생각해서 이런 지저분한 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4장에는 여자 사사 드보라가 나옵니다. 드보라는 여자인지라 남자 바락을 불러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바락은 혼자 가기를 겁내서 여자 드보라가 함께 가면 자신도 가겠다고 합니다. 그 때 드보라의 말이 ‘내가 너와 함께 가겠는데 가는 일로는 네가 영광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관계를 무엇으로 전환시키는가 하면, 남자와 여자를 대표하는 관계로 이것을 바꾸어요. 남자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그 희망이 이제 끝났습니다. 남자가 구원하는 일은 이제 없고 여자가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하는 여자는 드보라가 아니고 야일입니다. 4장 21절에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이 여자가 역도 선수입니까? 하여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법이 아주 저저분합니다. 구원이 지저분하다는 말은 적들의 수준이 지저분하다는 뜻이에요. 멋있는 적들이 아니고 꼴값 떠는 적들이 왔는데 이들에게서 맥을 못추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지킬 능력도 없는 자들입니다. 어중이떠중이가 덤벼들어도 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왜? 레위 언약의 관계가 이미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데 하나님이 레위 지파, 제사장을 통해서 복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뭔가 된 줄 알고, 이 땅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착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까 이스라엘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3장에 에훗이 죽인 적장은 배에 기름이 끼어 칼날에 엉길 정도로 뚱뚱한 사람이었어요. 별 볼일 없는 적이지요. 그래도 이스라엘은 그런 자들에게 항상 당하면서 벌벌 떨며 살았어요. 4장에 나오는 시스라도 보면 어설픈 장군입니다. 전쟁 중 쫓기다가 야일의 장막에 들어가 숨습니다. 평소에 이 집안과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런데 그 집 여인이 시스라가 잠들었을 때 말뚝을 박아 적장을 죽였어요. 죽이는 방법도 무지막지합니다. 여기에는 절제의 미(美)가 없어요. 죽이는 사람이나 죽는 사람이나 다 짐승 같아요.
드보라 시절 적을 죽인 주인공은 사사 드보라도 아니고 적과 직접 싸운 바락도 아니고 자기 집에 머물러 있었던 여인 야일이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5장에 보면 찬양이 나오는데, 찬양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번 승리는 모세 언약의 승리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왕이 있고, 그들의 신이 있지만 이 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여호와신데, 여호와는 철저히 자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데, 그 약속 덕분에 우리는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12지파들이 승리의 혜택을 지금도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찬양을 합니다.
6장부터는 기드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7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주님이 유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증명을 하는데 있어 인간의 노력이 가미되지 않는 조건 하에 이번 전쟁을 실시하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힘의 논리에 의해 모든 것을 바라보기에 가능하면 전쟁에서 더 많은 군사와 무기가 있으면 승리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 더 큰 힘을 모으려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부하십니다. 처음 군사를 모집했을 때 22,000명이 모였지만 하나님은 다 보내고 300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적들과 전쟁하기 전에 자기 백성과 먼저 전쟁을 치르십니다. 처음부터 300명만 뽑은 것이 아니고, 전쟁에 나가 싸울 사람을 인원 제한 없이 모집해놓고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담고 있는 취지를 기드온에게 전달하신 겁니다.
철조망 건너편에서 이런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300명도 다 돌려보내지 그들은 왜 남겨 두었는가?’ 300명도 돌려보내고 기드온마저 돌려보낸 후 하나님 혼자 다 하시면 좋지 않겠어요? 천사를 시켜 전쟁을 하면 되는데 왜 300명은 남겨 두었습니까?
우리가 울타리 밖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신약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천사가 알아서 다 해줍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2제자가 구원 받는데 그들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그들은 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방법입니다.
주와 함께 있는 신앙의 증거가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고, 앉은뱅이는 걸어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놀라 베드로에게 주목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왜 나를 주목합니까? 마치 내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처럼.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주가 하셨습니다.”라고 하지요. 앉은뱅이는 예수님을 주로 믿음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준 믿음을 주님이 회수하는 과정에서 앉은뱅이는 걷게 되었습니다.
걷든지 아니 걷든지, 눈을 뜨든지 아니 뜨든지, 건강하든지 아니 하든지 관계없이 지금도 여전히 주님이 활동하고 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들은 이런 취지에서 복음의 증인 노릇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취지에서 “왜 나를 주목합니까?”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바울의 손수건이 특별한 손수건입니까? 아니죠. 만약 손수건 자체가 특별해서 병이 나았다면 그 손수건은 대단한 히트 상품입니다. 그 손수건만 있으면 병원에 있는 사람 모두를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에서 더 아이디어를 추가한다면 수건을 던지는 것이 아니고 흔들기만 해도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죽은 자가 살고. 만약 이렇게 해서 병이 낫게 되면 사람은 자기 관심에서 못 벗어나요. ‘역시 나는 주님 덕분으로 나았다.’ 나로부터 출발한 관심사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니까 예수님은 우상이 되고 말아요.
이렇게 되면 내가 주님의 것이 되지 않고 주님이 나의 필요를 위한 존재가 되고 말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굉장히 위험합니다. 사실은 금지곡에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효과를 본다는 것은 마귀적 발상입니다. ‘예수 믿어도 효과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이 됩니다. 요란스럽게 살지 않아도 구원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강도가 되어도, 세리가 되어도, 창기가 되어도 구원 되면 되잖아요.’ 이게 복음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꼭 유난을 떨어요. 타인의 시선 때문입니다. 사사기처럼 32,000명 모았다가 300명 제외하고 다 빼버렸는데, 그 빼는 작업이 중요해요.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원리가 빼는 작업에서 나옵니다.
사사기 8장에 보면 ‘왜 승리의 영광을 혼자 독차지하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건 완전히 막장드라마 같아요. ‘전쟁에서 승리할 때 왜 나를 안 데려갔는가?’ 세상이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기드온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영광 받기 위해 참여한 것입니까? 아니에요.
기드온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상황입니다. 스타가 되었기에 악플이 달리는 것과 같아요. 기드온이 혼자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32,000명 중 300명만 남기도 다 돌려보낸 것입니까? 아니죠. 그리고 전행할 때 밤에 몰래 횃불과 항아리를 들고 갔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입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는 미디안 군사 13만 5천명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전쟁 같지도 않은 전쟁입니다. 왜 그런가? 약속의 땅에서는 인간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살 자격이 없는 자는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을 천국 데려가려고 애쓰지 마시고, 미운 사람 지옥 가라고 저주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만히 있어도 지옥 갈 사람들은 천국을 싫어하게 되어 있고, 천국 갈 사람은 지옥 바닥에 가도 주께서 반드시 끄집어내십니다.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우리가 용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왜 주님 혼자 다 일하시고 저는 그 일에 참여시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사기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끼어들 필요는 없고 구경만 하면 됩니다.
에브라임 사라들의 불평에 대해 기드온이 답변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이 말의 의미는, 기드온의 아버지 이름이 아비에셀인데, 우리 집안보다 에브라임 집안이 훨씬 큰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의 이 말을 듣고는 흡족해 하며 화가 풀렸어요. 레위 지파와 끈이 끊기니까 이스라엘은 각자 잘난 척하는 양아치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역 싸움만 합니다.
8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요청하기를 ‘당신과 당신의 아들,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신다면 다른 나라가 함부로 우리를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 섬기는 버릇입니다.
‘유능한 당신이 우리 당에 온다면 우리 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다.’ 라고 유혹하는데 안철수는 계속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내버려 두세요. 사사기는 세상 정치판과 똑같습니다. 이런 소리를 설교 시간에 설교자가 노골적으로 말하면 교회 분위기는 싸늘해집니다.
만약 부목사가 담임 목사가 듣는데 사사기 본문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목사도 아닌 것이 목사라고 설치니 교회 꼴이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담임목사가 정말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는 목사 맞습니까? 여러분이 투표하고 뽑은 목사가 여러분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면 교인들 반응은 어떨까요?
‘우리의 왕이 되어주세요.’라는 요청에 대해 기도온의 대답은 ‘나도 내 아들도 당신들을 다스리지 않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요구가 묵살되자 차선책이 등장했습니다. 백성들은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기게 되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드온의 힘이 우리 자식들을 보호해 주시옵소서.’
사람들은 뭔가 신비한 일이 있고,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대상에 대해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그 앞에 지극 정성을 드리면서 빕니다. ‘우리 아들도 기도온처럼 영웅이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것은 결국 내 땅, 내 가족은 내가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레위 지파와 연결 고리가 끊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9장 1절에 여룹바알이 나오는데 이는 기드온을 일컫는 말입니다. 기드온이 유명 인사가 되니까 아들 아비멜렉이 있는데 이 이름의 뜻은 ‘우리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왕으로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비멜렉은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그 일을 위해 외가에 가서 자기를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내 형제 70인이 다 당신들을 다스리는 것과 여러분의 핏줄인 내가 다스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좋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결국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유리하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사람들을 모집해서 자기 형제 70명을 살해하고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때 막내 동생 요담은 몰래 숨어 살아 남았습니다. 이 막내가 결국 복수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심 산꼭대기로 가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니까 싫다고 하고,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니까 거절하고, 감람나무 역시 거절했는데, 전혀 자격도 안 되는 가시나무가 왕이 되겠다고 나섰으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그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3년 동안은 잘 지내다가 반역이 일어납니다.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어떻게 듣겠습니까? 장로들이 투표해서 목사를 뽑아 3년은 잘 지냈는데 그 후에 지분 싸움이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지분 싸움은 목사 편과 장로 편이 나눠 싸우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지요.’ 라고 하는데, ‘교회에 그런 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교회 다닙니까?’ 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사 투표하는데 장로 편과 목사 편이 나눠졌는데, 목사가 지지하는 사람은 되고 장로가 지지하는 사람이 떨어진다면 장로와 권사 투표에서 떨어진 분들이 교회를 떠나 젊은 목사 불러서 새로운 교회를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는 교회의 분열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지만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을 재미로 삼으며 교회 다닙니다.
지분 싸움은 결국 돈 싸움으로 귀결 됩니다. “얼마 주면 나갈래?” 하고 흥정을 하지요. 이런 이야기가 사사기에 나옵니다. 이것은 지분, 소유를 지키기 위한 힘과 그것을 정당화 시키는 종교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이런 일이 다른 나라 땅에 가면 괜찮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다스려지는 가나안 땅에서 벌어지고 있으니까 이들은 모진 매를 맞고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악신이 그들에게 찾아와서 세겜 사람과 아비멜렉 모두 망하게 하는데, 아비멜렉은 이름 모를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두개골이 깨어져 죽어가면서, 여자에게 죽었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소년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해서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여자에게 죽으면 안 됩니까? 옛날에는 여자를 남자의 보조자 정도로 여겼습니다. 보조자에게 맞아 죽게 되었다는 말은 남자가 남자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1장을 보면 입다가 나옵니다. 입다는 조폭입니다. 잡류가 그에게 모여왔어요. 음지의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때 암몬 자손의 공격을 받았는데 입나가 나섭니다. 장로들이 계약을 하러 왔습니다. ‘우리교회 200명 모이는데 임시직으로 오셔서 300명으로 만들어주면 정직원(위임목사) 되게 해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입다와 계약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입다는 처음부터 정식 직원으로 해달라고 했어요. 장로들이 입다의 제안을 승낙하고 그를 지도자로 세웠어요. 입다는 엄마가 청녀 출신이었는데, 이 사실을 왜 말하는가 하면, 이 정도로 이스라엘은 인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것을 지키려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 하신다.’는 것은 이미 물건너 간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떨고 있습니다. 입다는 그모스 신을 섬기던 지역 사람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전쟁에 나갈 때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것을 바치면 효과를 본다는 것이 검정 된 사회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사주팔자, 손금, 관상을 보는 것을 미신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뭐라고 항변하는가 하면 ‘이것은 역사적으로 수천년 동안 검정 된 것’이라고 합니다. 검정 된 것이면 미신 아닙니까? 왜 그 당시 사람들이 우상을 섬겼는가? 섬겨보니까 효과가 있었어요. 왜 효과가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효과를 준겁니다. 주님께서 귀신도 다루시니 까요.
우상을 섬기면 일이 잘 풀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그들을 지옥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절대로 좁은 길로 오면 안 되고 넓은 길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천국 갈 사람은 넓은 길로 가고 싶어도 못가도록 주께서 막으십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 내 뜻을 이기는 쪽으로 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입다는 전쟁에 출전하면서 장담을 합니다. ‘내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자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그런데 딸이 제일 먼저 나올 줄은 몰랐지요. 여호와의 사사로 전쟁에 출전하면서 그모스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제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광경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하지 마세요. 당신 딸이 죽어요.’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지켜보고 계실 뿐 그가 하는 일을 막지 않습니다. ‘가만히 버려둬. 그것이 내 뜻이야. 소중한 것을 잃어야 정신을 차리는 거야.’ 이런 식입니다.
승전하고 집으로 귀가할 때 닭이나 소가 나와야 하는데 이것들보다 딸이 먼저 나왔습니다. 이 장면에 입다는 기겁을 했을 거예요.
이것은 입다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적인 문제인데 이것이 우리의 철없음을 인하여 대신 희생해야 될 어린양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어요. 입다의 가정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주를 주저앉게 만들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계기가 되고, 그 당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을 누가 아는가? 입다의 딸이 압니다. ‘나 하나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나는 기꺼이 제물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사무엘하 6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다윗이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춤을 추는데 그 광경을 아내 미갈이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고, 나중에 남편에게 ‘왕이 백성들 앞에 품위도 지키지 못하고 염치없이 몸을 드러내셨소.’라고 비난했습니다.
미갈은 사적인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혀 다른 시각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낮아져도 상관없다.’고. 이 일로 인해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을 단순히 자기 남편으로만 여기고 말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처럼 입다의 무남독녀가 춤을 추며 아버지를 맞이하니 입다는 옷을 찢고 절망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에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딸은 웃으며 아버지를 맞이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웃을 찢고 절망하는 이 광경은 도대체 뭡니까?
이것이 바로 B층이 A층에 충동을 일으키는 상황입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주님은 죽고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웃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이라고 말하지 맙시다.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입다의 무남독녀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딸이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합니다. ‘아버지여, 걱정하지 마세요. 대적 암몬에게 원수를 갚으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말씀대로 저를 제물로 바치세요. 하지만 두 달만 친구들과 함께 할 시간을 허락하소서.’
입다는 딸의 요청을 허락했지만 이 두 달이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짧은 시간으로 여겨졌겠지요. 딸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런데 왜 딸이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까? 우상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 입다의 우상 섬기는 속성 때문에 하나님의 레위 율법은 사라지고 개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 억울한 죽음을 생산해 낸 땅이 되었는데, 그 땅이 언약이 이루어진 땅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이 예수님이 피 흘린 땅임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