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강-신 15장 19-23절(첫 번째 것)1606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5장 19-23절입니다. 구약성경 287페이지입니다.
“너의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너와 네 가족이 매년에 여호와의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같이 할 것이요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한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원하면 간섭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구원해주면 우리는 “고맙습니다.” 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될 텐데, 구원한다고 해놓고는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지, 먹는 것도 마음대로 못 먹게 만들어요. 양의 첫 새끼는 니 집에서 먹지 말고 택하신 장소에 가서 먹어라. 그리고 이런 저런 조건들을 달아서, 이게 구원하는 건지, 괴롭히는 건지, 이게 구약에 보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사람을 못 살게 굽니다.
아내의 잔소리도 심하면 갈라서기 마련인데, 하나님의 잔소리가 이렇게 심한데 여러분들이 버티는 것을 보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을 하는, 둘 중의 하나일 게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입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내가 미리 예상하고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그거는 기독교나 종교에서 그렇게 지어낸 거예요. 이천 년 동안.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원해요. 그리고 그 구원받은, 지금 천국 가 있는 엘리야나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열 두 사도는 자기 몸으로 간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지체로서 거기 합류해서 가게 된 거예요. 이 마징가 Z 옆에 있는 부속품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몸은 두 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인정하는 몸은 오직 하나의 몸밖에는 없고, 거기에 있는 그 몸을 구성하는 지체로서 합류된 자만 그리스도에게 갈 수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 구약의 율법은 떨어낼 자를 툭툭 털어서 떨어내는 하나님의 작업이에요. “이래도 니가 율법 지켰다고 우길 수 있느냐?” 하고 다 떨어냅니다. 말짱 다 떨어내요. 그 떨어내면서 그때, 그때 남아있는 자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렘넌트remnant 남은 자라고 이야기해요. 근데 그 남은 자마저 떨어집니다. 마지막 남은 자는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수가 1로 모이고 1이 다시 확산돼서 교회라는 다수가 되는 겁니다. 그 노선, 그 과정을 놓쳐버리면 이거는 종교가 돼요. 이거는 종교가 되기 때문에 그거는 하나의 동호회고 오락입니다.
자기들끼리 구원받았다 치고, 일단 치고 난 다음에 인간들의 육적인 요소를 끄집어내서 재미나게 놀다가 그냥 지옥 가는 거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언급을 하실 때에, 이 땅에 오셔서 좋은 이야기를 그냥 좋게, 좋게 해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앞장서 오신 분이 있어요. 세례요한이에요. 세례요한은 말부터가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도끼를 언급해요. 내가 온 것은 도끼 들고 왔다. 조폭도 아니고, 도끼 들고 와서 찍어버리겠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구원의 나라인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다시 말해서 “너는 죽었다. 나 따라서 물에 다 빠지자.” 물세례입니다.
어떤 인간도 물에 수장되는 것을 경유하지 않는 자는, 물속에 자진해서 자폭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논할 자격도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노선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어떤 노선이인가? 두 개의 노선이 있는데 하나의 노선만 고집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남은 자이니까 우리의 역사, 우리의 히스토리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으면 약속대로 메시아가 구름타고 오실 것이다. 왜? 우리는 성경을 믿으니까. 그렇게 뭉쳐진 집단이 유대나라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노선을 고집했고 그 노선 사이에 계급을 형성했습니다. 제일 우두머리가 사두개인,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말씀을 실천하자. 실천 못한 사람은 내 밑에서, 내 뒤에서, 실천한 사람은 우리를 존중해.” 하나의 일곱 단계의 계급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메시아가 오든 누가 오든 간에 이 조직체를 절대로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고, 기특하구나. 대견하구나. 착하구나. 나를 기다리려고 이렇게 철저하게 말씀으로 준비했으니, 내가 어찌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리요.” 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그들은.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경건한 것은 다 동원했으니까. 율법대로 다 지켰어요. 이사야 예언대로 그들은 금식했습니다. 하여튼 예언대로 하는 것은 무조건 다 실천했습니다. 완벽한 체제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바리새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진용을 갖추었어요. 이제 남은 것은 칭찬만 남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도끼이야기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오니까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여기에 나설 자리가 아닌데 왜 나서느냐?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미쳤나? 너희들이 구원받으면 이 돌멩이도 구원받겠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그 노선은 이미 틀려먹은 노선이다.” 지금 마귀가 이끄는 대로 가는 노선이에요. 노선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노선은 어떤 노선이냐, 인간의 노선은 연속성을 유지하는 노선이었습니다. 연속성이라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행함과 노력으로 계속 가다보면 언젠가는 손 좀 벌리기만 하면 도달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거죠. 천국과 이 땅은 이음새가 없고 연결되었다는 겁니다. 노력을 못해서 그렇지, 철저하게 행하지 못해서 그렇지. 나중에 사다리로 올라가서 손만 내밀면 거기에서 시원한 공기가 손끝에 닿을 것이라고 본 겁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로역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천로역정. 노력하면 언젠가 기쁜 날을 볼 것이다. 이게 연속성입니다. 연속성은 인간에게 희망을 줍니다. 꿈을 줍니다. 소망을 줍니다. 비전을 줘요. 좌절할 때마다 일으킬 수 있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지금은 손에 안 잡히지만 언젠가는 가질 것이라는 그 소망의 힘이, 불굴의 힘으로 작용해서 우리를 질고와 어려운 가운데서 일어서게 합니다. 일어선 것, 주께서 더 밟아버립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불연속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연속성 사이에 있던 사람입니다. 옛날에 사도가 되기 전에.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어요. 완벽했어요. 최고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율법을 실천하고 그것을 현실로 전환시키는 선봉장에 섰습니다. 모든 사람은 내 뒤에 서라는 거예요. 나처럼 완벽하게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오죽 했으면 율법에 흠이 없다고 하겠어요. 그게 마귀의 덫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게 악마의 덫인 줄 몰랐어요.
사울은 자기 기분에 자기가 도취되었습니다. 경쟁해서 붙어서 승리하면 곧 천국에서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났습니다. 대뜸 하는 이야기가 “사울아! 사울아! 니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사도바울 말고 다른 노선으로 천국가자!” 라는 논리를 끄집어내면 이거는 큰일 납니다. 사도바울은 사실은 우리하고 딴 동네가 아니고 우리하고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이 자기가 율법으로 완벽하겠다는 그러한 속셈을 드러내고 그런 식으로 노력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선구자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심정으로 그 사람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어느 누구도 사도바울이 갔던 그 길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딱 하나입니다. 끊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어떤 개념을 동원해서? ‘핍박’이라는 개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협조하는 존재가 아니고, 도리어 협조한다고 생각한 자체가 계속해서 핍박에 핍박을, 핍박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각해야 할 입장에 있는 거예요. 핍박이라는 말은 원수라는 말이고, 우리는 이미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되는 겁니다. 이단, 이단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단이에요.
자기가 이단인 것을 아는 자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단 안 되려고 하지마세요. 이단 되려고 해야 해요. 왜 저는 십자가 앞에서 이단인가를 고백하는 자가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아, 이래서 이단이구나! 저래서 이단이구나!’ 이단이 아닙니다. 삼단, 사단, 오단, 막 나가죠.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는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 딱 묶어놓고 거기다가 일대일 대응을 합니다. 화목제물로, 율법 외에 한 의,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의인되고 너도 의인되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 지점이 무슨 지점이냐 하면 바로 끊어진 지점입니다. 건너 설 수 없는, 건너 갈 수 없는 지점이에요.
이것을 저는 설교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그걸 가지고 구멍이라고 했습니다. 그 구멍을 오늘 본문에서는 맏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맏아들 앞에서 둘째, 셋째, 의미 없습니다.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전부 다를 합쳐서 맏아들과 일대일 대치관계에 놓여있습니다. 맏아들 아니기는 마찬가지잖아요. 둘째든, 셋째든 의미 없습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율법이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것이 동원됩니다. 맏이가 결혼해서 애를 못 낳았을 때는 둘째아들, 셋째아들, 넷째아들, 단서가 있어요. 총각이어야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총각인데 둘째, 셋째, 넷째아들은 반드시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지 말고, 반드시 형수하고 결혼하라는 뜻이에요. 중고죠. 중고.
형수하고 결혼해서 애를 놓되, 그 애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그냥 삼촌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 자식은 맏이 아들로, 양자로 입양됩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이스라엘은 육을 초월해야 될 특수국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이라는 것을 통해서 영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주께서 없는데서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의 모든 좌우로, 수직적으로, 또는 수평적으로 교차하는 모든 교차의 그물망은 율법이라는 그물망이에요. 그 교차지점에 유대인이 하나, 하나씩 거기에 전부 다 놓여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장기가 아니고 바둑이에요. 장기는 고유의 차, 상, 마, 사, 졸, 정해진 코드가 있어서 가는 길로 가지만 바둑은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정해진 판도가 달라져요. 뭐 바둑을 둘 줄 알아야 무슨 이야기가 되지요.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전에 있던 것이 새로운 의미가 계속 부가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침에 이야기했잖아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한 발짝, 한 발짝 나갈 때마다 내 노선은 전체 보기에 나는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기능을 발휘하느냐, 이게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의 차이점이에요.
그 이스라엘 내부에서 내가 낳은 자식인데 아버지라고 말을 못하고 삼촌이라고 해야 하느냐,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하면 너를 위한 하나님은 없다는 조로 답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너를 이 땅에 이스라엘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겁니다. 하나의 바둑알로써. 주객이 전도가 되면 안돼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계시면 안 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을 노출시키고, 그 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창세전부터 예정되어서 태어 난 거예요.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충돌되는 겁니다.
육적인 내 모습과 그리고 거기에 투입하시고 개입하셔서 틀어지게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모습과 이게 우리 내부적으로 서로 대치되는 관계에 있습니다.
내 쪽에서 행함으로, 말씀을 지킴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구멍이 있고 그 구멍 속에서 솟아나오는 예수님의 의,
하나님의 화목제물, 십자가의 그 공로로 말미암아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의 육적인 요소를 앞장세워서 증거케 하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아닙니다.” 라는 말. 이것을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자기를 부인한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는 아닙니다. 내가 어떤 것을 해도 그 끊어진 다리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나의 찬양, 나의 헌금, 기도, 나의 전도, 나의 예배참석, 교회봉사, 목사섬기기, 어떤 짓거리를 해도 이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라는 고백을 내놓아야 해요. 그거 하라고 성령 주셨고 이미 구원된 거예요. 어떤 것도. 따라서 아들의 위치는 뭐냐 하면, 오늘 본문 같으면 음식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다른 데는 음식을 가지고 안 하고 성전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음식가지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처음 태어난 양 새끼는 그냥 집에 가서 맛있다고 먹지 말고 오직 택한 자리에서만 먹을 수 있다. 이렇게 돼요. 그럼 여기서 양의 첫 새끼와 그 다음에 요건이 결합이 돼요. 택한 장소, 그 다음에 결합이 되는 것이, 세 번째 뭐냐 하면 피를 먹지 먹지말고, 이 세 가지 요건을 하나로 연결시켜 봅시다. 맏아들, 택한 장소, 피 쏟음. 이 세 가지를 결합시켜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세 가지가 율법의 바탕에서 핵심으로, 계속 다음시간으로, 그리스도까지 이끌고 가게 되어 있어요. 계속 끌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맏이부터 이야기합시다. 일단은 맏이, 맏이 앞에서 맏이가 어떤 존재냐고 물을 때는, “맏이가 어떻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니에요. “둘째하고 맏이의 차이점이 뭡니까?” 이렇게 물어야 해요. 둘째, 셋째, 넷째...어떤 아들을 따르던 간에 맏이에게는 이게 노예가 되고 종이 됩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유산을 남길 때는 맏이에게 몽땅 다 갑니다. 맏이 된 사람은 율법대로 하면 기분 좋을 거예요. N분의 1로 나누지 않습니다. 몽땅 다 갑니다. 둘째는 손가락 빨아야 되고, 둘째는 자기가 가진 재산마저 형의 재산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축복이라는 것은 분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모아지면서 복의 실상과 본질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축복은, 저주 없는 곳에는 축복이 없습니다. 인간의 행함과 노력과 성과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맏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 니가 꼽냐? 이래 나와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몽땅 다 가져가게 하신 것에 대해서 "나도 같은 인간입니다." 하면 "니도 같은 자식이라고 대들래? 그러면 니는 이스라엘이 아니야. 니는 택한 백성이 아니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육적인 인간들 사이에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 대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너만 인간이냐? 나도 인간이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니에요.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죄인과 죄인으로 만들어 버려놓고 그 가운데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을 띤 유일한 분이 계시는데, 바로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부터는 모든 인간은 인간일 수가 없어요. 하나의 먼지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사람이에요. 이름 자체가 아담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상당히 낯설어하시는데, 이게 구약부터 차고 올라올 때 그렇게 되는 거예요. 탕자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탕자 됨의 가치는 그냥 홀로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요. 맏이가 있어야 해요. 맏이는 한 번도 가출한적 없습니다. 모범생입니다. 내신등급으로 하면 우수한 효자죠. 근데 효자한테는 금가락지가 없어요. 효자는 효잔데, 본인만 효자지 아버지는 그걸 아들로 취급을 안 합니다. 왜? 아들은 잃어버렸다가 찾는 그러한 과정이 꼭 필요해요.
잃어버렸다가 찾아줘야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천국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노출되기 때문에, 그 사실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발 막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착해지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그거는 되지도 않는 효자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그거는 개별구원이에요. 개별구원은 천국 가서 자기 의를 자랑할 거예요. 그거는 용납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지옥에 쳐 박힙니다.
맏이의 특성,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요한복음 10장 15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쉽게 말해서 “니들이 아버지를 알아? 니들이 게 맛을 알아? 니가 아버지를 알아? 니가 아버지의 아들들이야? 니들이?” 뒤에 말씀을 보면 “나는 누가 내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고 나는 스스로 죽노라. 니가 스스로 자폭할 그런 용기가 있어? 그럴 용기가 있어? 나는 스스로 죽노라.” 내가 아버지를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를 아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제대로 알기에,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이 그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가장 아들다운 그 모습을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사람이 태어났으면 악착같이 살아야지. 못 죽어서 환장하셨습니다. 못 죽어서. 베드로가 와서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나는 죽어야 한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제가 있잖아요. 제가 보디가드 하겠습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댓바람에 하는 말이 “마귀야 물러가라. 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니가 사람의 아이디어안에 멈추어있구나.” 마귀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주님을 핍박을 해야 해요.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주님은 그 핍박을 받아서 죽으면서, 사람한테 죽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아버지와 나만이 아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는 은밀하고 내밀한 약속을 아들이 아니기에 모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문제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있어서의 맏이의 조항이 떴다하면, ‘우리는 맏이 아니구나. 우리는 맏이가 될 수 없구나.’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구나.’ 그렇게 인정을 하면 돼요.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는 죽노라” 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에, 죽음사건 속에만 아버지가 담겨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있고 내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안에 아버지가 있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내 안에 아버지가. 이 말은 뭐냐 너희들은 아무리 훑어봐도 아버지를 모르는 자리에, 영역에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버지께 간다고 하니까 자기도 끼어들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예수님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제가 뭐 염치없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내 목숨을 내놓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주님의 말씀은 참 섭섭합니다. “니 목숨 내놓아도 갈 수 없는 곳이다. 뭐, 니 목숨이 니한테 대단해 보이냐? 니 목숨 원래부터 쓰레기였어. 주님은 쓰레기장이 아니야. 니 같은 것 안 받아.”
목숨 안 받으면 헌금 안 받습니다. 십일조 안 받습니다. 주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에요. 주시는 분이에요. 사람은 주게 되게 되면 꼭 행세하게 되어 있어요. 티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격 더러워져요. 인간은. 인간의 기억은 자기의 착한 것을 못 잊게 마련이에요. 그걸 나중에 행세깨나 하려고 나섭니다. 교회 지분, 니 지분 얼마고? 이렇게 나와요. 천국 가서 그런 짓 할랍니까? 면류관도 반납할 판인데 어디 자기 것 하렵니까? 그런데 인간은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고 해도 끊을 수가 없어요.
오늘 찬양대 봉사하잖아요? 가시고 난 뒤에 한 6개월 동안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착한 일 했다고. 한 3년 가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죽고 난 뒤에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신 게 아니고 주께서 보내신 거예요. 주께서 보내신 겁니다. 피동적이 아니고 수동적이에요. 찬양하면서 죄지으라고. 그게 연속성을 뛰어넘을 수 없는 요소라고. 십자가 피를 대신할, 예수님의 죽음을 대신 할 어떤 찬양도 없는 겁니다. 구원받았으니까 보답한다는 그런 법은 없어요.
구원받았으면 보답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으면, 왜 내가 착하디 착하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십자가 앞에서 더러운 배설물이냐?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겁니다. 항상 해놓고 난 뒤에 실적과 이거 했으니까 괜찮은 행운으로 보답해달라는 인간의 요구가 있어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을 핍박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맏이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맏이가 될 수 없고 천국가도 뭐 되느냐, 양자로 갈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맏이시기 때문에 건너 갈 수 없는 곳을 혼자서, 혼자서 건너갑니다. 그게 뭐냐 하면 “따라 오지 마!” 아무도 갈 수 없어요. 어디 속으로 뛰어드느냐? 저주 속으로 뛰어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사도바울은 이것을 가지고 뭐냐, 이 십자가만을 복음이라고 했어요. 사도바울은 부활을 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만을 복음이라고 해요. 부활은 복음이 아니에요. 십자가를 복음이라고 했어요.
그 의미가 뭘까요? 인간의 연속성으로 십자가 건너뛰어서 부활까지 내다보지 말라 말이에요. 십자가로 모든 것은 종결된 거예요. 십자가는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저주에 자진해서 갈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성령이 아니고서야, “주여! 저 저주해주세요.” 라고 나설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이런 인간은 있어요. “저주받을 테니까 저주 뒤에...아시죠? 주님. 자진해서 내놓았으니까 그걸 밑천으로 해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좀 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돼버리면 자기의식이 저주를 임의로 통과한 후에까지 처음부터 시작이 되는 셈이 돼요.
그걸 두 자로 꼼수라고 합니다. 꼼수. 인간이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내 쪽에서 시작한 것은 그 개입을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선물로 받게 되면 내가 나부터 시작하는 그 믿음과 주신 선물과 얼마나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지를 나타나게 해주실 겁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기억하기 때문에 이게 성과와 괜찮은 내가 기대하는 예상된 행운으로 찾아올 것을 기대하게 하는 모든 것은 바로 나의 조작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선물의 믿음은 어느 정도로 대단 하느냐 하면, 참 이런 말, 하기 힘들지만 해야 되겠어요. 어느 정도 대단 하느냐 하면,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들이댑니다. “대충 떨어져 나가지 고만. 그래, 니 봉사한 거 아는데, 그래 많이 묵읐다 아이가? 니가 가라 하와이! 고만 해라. 많이 했다. 이제는 고만 떨어지지. 고만 믿어라. 이정도로 했는데 안 떨어져? 제발 좀 계속해서 니가 가짜인 것을 뜯어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이런 가운데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사랑으로 말미암아 끊어지지 않는다는 고백이 나오죠. 이것은 선물입니다. 이것은 특채입니다. 요거 땡잡은 거예요.
그 하나님이 숨어있는, 주님이 주신 선물을 위해서 우리는 이상스럽게 교회에 봉사하면 봉사할수록 집안일이 더 안 되고, 헌금하면 할수록 십일조는 마이너스 30배가 되고, 모든 것이 꼬이게 만드는 이유는, 내가 행함에 수상한 결과물을 노리는 악마적인 본성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맏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손을 떼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로마서 8장 27절에 보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 앞에 26절에 보면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는 기도를 해도 마땅히 빌 바를 몰라요. 기도를 백날해도 그게 엉터리 기도가 될 수밖에 없어요.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데, 그 목적이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의 맏아들로 인하여 이미 구원되었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우리를 끌고 가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형입니다. 이게 맏아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게 되면, 내가 기도한 것이 빌 바를 알지 못하고 기도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육신 때문에 계속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냥 우리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맏아들이, 예수님의 피를 마지막으로 냄으로 말미암아 살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이, 맏아들이 될 수 없는 이유로써 작용하는 그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맏아들만 쳐다보면서, 둘째, 셋째, 넷째...양자라도, 맏아들이 우리가 못한 것을 대신 다 하셨음에 저는 그 맏아들만 쳐다본다는 것. 그리고 맏아들이 이 땅에서 남긴 것은 바로 십자가만 남겼어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로써 낮아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느긋한 마음으로, 뭘 해도 어차피 죄가 되니까, 어차피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니까, 마음대로 뭐든지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뭐든지 죄가 되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이거는 성령이 주는 자유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 자유를 만끽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제가 예를 들게요. 헌금을 했다, 헌금한 것도 죄거든요. 헌금한 죄를 지었으면 이번주 안에 한 이백만원 사기당해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왜냐 이 말이죠. 주님의 맏아들의 은사고, 공로고, 혜택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맏아들 되신 분이 함께 계서서 주신 은혜 속에 만끽하고 있으니 구태여 따로 나만의 영광을 추구할 일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고, 인간에게 속아 넘어가고, 교회에 속아 넘어간 모든 것은 사실은 속이는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고 내가 나빠요. 내가.
예수님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나는 예수님 이용하고 하나님 이용해서, 나만의 괜찮은 미래상을, 미래 이미지를 딱 이렇게 쟁취해서, “그 봐 나 잘 믿는 사람이잖아? 거 봐 나 인간답게 살잖아? 나 봐 하나님께 가치 인정받았잖아?” 남한테 자랑질 하려고 교회 다닌 거예요. 경쟁하면서 이기려고. 맏이도 아니면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 맏이의 입으로 들어가는데. 그런 구약 보지도 않았으니까 모르죠.
마지막으로 우리 속에 구멍이 있어야 돼요. 제일 소중한 것, 자식보다 소중한 것, 그것은 텅 비어 있어야 됩니다. 그 텅 빈 자리를 두 자로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은 비어있는 자리에요. 거룩한 자리는 비어있는 자리입니다. 그 비어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고 싸움 할 필요 없어요. 그 비어있는 그것만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모닥불이라고 하는데, 옛날 노래 모닥불 가사를 보면서 제가 기억나는 것은 그겁니다. 인생은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박인희가 부른 거예요.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꺼지기까지 우리 속에서 주님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는. 맏아들만 인정하시는 이게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구멍이 뚫려서 바람이 휙 불게 하옵소서.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옵소서.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이 노력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있는 하나의 선물이고 은혜인 것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립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너무 쉽게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