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강-신 16장 1-3절(아빕월)1606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6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287페이지입니다.
“아빕 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 이는 아빕 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우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 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아빕 월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두 개의 카렌다, 달력이 있는데, 종교 달력이 있고, 세속 달력이 따로 있습니다. 아빕 월은 1월 달인데요. 종교적으로 1월 달이에요. 종교적으로 1월 달이 된 이유가, 처음 유월절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이날을 1월 달이라고 해라. 그렇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없던 나라가 새로 생겼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해서,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나온 그 달을 해에 첫 달로 삼았던 그 일이 바로 아빕 월이 되는 거죠.
그렇다면 하늘의 1월 달이 세상의 1월 달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결국 나아가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는 이게 없어요. 다른 나라는 눈에 보이는 역사가 전부인데, 이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이스라엘 속에 들어있으니까, 보이는 것이 우선적이냐, 이 보이는 것이 중요하냐,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냐, 그 투쟁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빕월에 일어날 그 절기가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을 되는 겁니다. “야! 너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이 너희 속에 있다는데 어디 있어?” 라고 누가 물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와서 우리가 이 아빕월에, 나중에 니산 월로 이름이 바뀌는데, 1월 달이죠. 그 1월 달에, 종교적인 1월 달에 어떤 행사를 벌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와서 보면 알 수 있다. 보게 되면, 그러면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그냥 유월절 제사를 드리는 거거든요. 7일 동안.
유월절 제사를 드릴 동안에는, 1월 14일부터 7일 동안 하는데, 14일 되기 전부터 이미 양을 준비해요. 어떤 양을 잡을까? 14일 전부터 해가지고 그 양을 잡아서 1월 14일에 유월절 드리고 7일 동안 유월절 절기를 이렇게 지키게 되는 겁니다. 그걸 제 3자가 봤을 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보여 달라고 했지?” 그때, 제사를 통해서 나오는 그 기능과 취지, 그것이 바로 장차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왔을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예수님이 하셔야 될 일을 그러한 제사형식으로 미리 이스라엘 안에서 일이 진행되는 겁니다.
그냥 그것이 제사로 끝날 것 같으면 하나의 이벤트가 돼버리는데, 하나의 행사가 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서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껍데기로 이스라엘을 그냥 끌고, 몰고 가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 행복하라고 주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성도를 평생 살아가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이에요. 능력. 세상적인 능력은 영웅이 되는 것이 능력인데, 성도의 능력은 본인이 죄인이고, 실패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 영웅, 그 영웅을 드러내게 합니다. 이것은 육적인 사람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예요. 한국의 영웅들은 윤봉길, 이봉창, 이봉창은 일본 천왕에게 수류탄 던진 사람, 윤봉길은 도시락 수류탄을 던진 사람, 안중근은 총을 쏜 사람, 그런 영웅들이 있고 또 올림픽에 마라톤의 영웅, 황영조가 있겠죠. 그런 영웅들이 있겠고, 또 마을의 영웅들 같으면 최씨댁 셋째 딸 드디어 3차 사법고시 합격, 이런 영웅들이 있는데, 세상은 영웅들, 어벤져스를, 지구를 구하는 영웅들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영웅들을 손꼽아 기다리죠.
그리고 영웅을 위해서 기도하고, 집안의 영웅, 우리 마을의 영웅, 교회의 영웅, 국가의 영웅을 위해서 열심히 철야하는데, 주님께서 원하는 영웅은 지극히 작은 능력, 소자입니다. 이번 여름수련회 할 때, 교재 제목이 ‘지극히 작은 능력’입니다. 겨자씨만한 영웅, 자기가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그 숨어있는 영웅들. 그 영웅을 생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그게 영웅이에요. 그게. 자식 교육에 실패한 자, 사업에 실패한 자, 신앙에 실패한 자, 그게 주께서 생산하고자 하시는 영웅들입니다. 인생낙오자. 주님 외에는 희망이 없게 만드는 그 영웅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영웅이에요.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우리 장로님 기도하신 대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제가 지금 좋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해서 딴 거 다 줄이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주님만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패해야 되죠.
실패 없는 바라봄은 없습니다. 만약에 실패를 안 하게 되면 키워달라고 하죠. 확장하려고 하죠. 롯데그룹 되려고 이렇게 되겠죠. 그런 영웅은 정말 천국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결국 이스라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이 유월절의 의미가, 결국 유월절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런다고 했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왜 너희들은 유월절을 지키느냐?”가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주일성수를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너희들은 왜 십일조를 하느냐?” 이 말이에요. 돈 10퍼센트, 20퍼센트 내면 좋은데, 그냥 10퍼센트, 20퍼센트지, 거기에다가 유월절과 십일조를 결부시키느냐 이 말입니다. 고맙다고 헌금 내는 것은 좋은데 그걸 감사헌금과 결부시키는 이유가 뭐냐? 그게 바로 너희들이 은근히 이 땅에서 영웅이 되고자 하는 그 더러운 속성을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유월절이 어디서 나왔는가, 유월절을 언급을 하려면 열 가지 재앙부터 이야기해야 해요. 열 가지 재앙이 뭡니까? 목사님. 열 가지 재앙이 가지는 의미가 뭡니까? 라고 물으면 저는 하나의 막국수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메밀국수. 국수는 국물이 있어야 돼요. 국물 없는 것은 파스타지 그건 국수가 아니잖아요. 국물이 그 면에 푹 젖어있는 겁니다. 이 국물, 국수 하나로 하나님의 성경책 전체를 설명할 수 있어요. 성경 전체의 내막을 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개체가 아니고 죄 속에 푹, 국수의 면처럼 젖어있어요. 죄라는 국물 속에 아담이 젖은 것처럼, 나중에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젖어있는 사람만이 천국의 필터를 통과해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죄 짓는 것이 아니고 죄에 젖어있는 거예요. 시원한 국수 국물에 면이 푹 젖어있듯이, 젖어서 어떤 면을 집어 들어도 전부 다 죄가 철퍽철퍽하게 묻어서 나오죠. 대통령이든, 뭐 목사든, 집사든 관계없이 뭐 젓가락으로 집어서 들었다 하면 두드득 떨어지는 것이 뭐냐, 묻어왔던 죄가 두드득 떨어지는 거예요. 열 가지 재앙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도 이 죄에 합당해서 조치 내려진 재앙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뭐냐 하면 혈족 자체를 치는 것이 마지막 재앙이었어요.
맏이를 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맏이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이 있어요. 맏이에 대해서. 둘째는 안중에도 없어요. 그래서 둘째, 셋째가 성공하는 것 같아요. ‘아이고, 내가 알아서 챙겨야 되겠다.’ 이래 되는데, 첫째는 뭐 부모가 왕창 밀어주니까 성공해야 된다는 힘이 들어가니까 오히려 그게 부담이 되어서 너무 눈치를 보게 되면 성공 확률이 떨어질 수 있잖아요. ‘성공해야지..또 부모님 내가 모셔야지.’ 요새 부모는 자기 연금 타서 잘 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장남은 ‘부모님 내가 모셔야지.’ 장남은 부모한테 결혼해서도 독립을 안 해요. 부모와 같이 있다는 의식이 항상 남아 있어요. 장남은 부모편이지만 둘째, 셋째 지 뿐이에요. 부모는 나는 몰라라 하죠. 그런 경향이 많은데, 그 장남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부모입장에서는, 장남에게 그렇게 계속 의식하는 것이 성경에도 나와요. 내 기력의 시작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 존재의 시원始原, 또 내 존재의 오리지널, 내 존재의 기원, 또 나를 빼다박은 첫 번째 기업, 기업의 소산물, 이렇게 보면 되거든요. 나는 죽어도 살아있다. 왜? 맏이가 있으니까. 이런 쪽이다 말이죠. 우리나라 같으면 맏이의 임무는 제사 드려야 해요. 요즘은 N분의 1로 깔끔하게 끝났지만, 옛날에는 제사 드리는 이유 때문에 막대한 재산이, 유산이 넘어갔거든요. 그런데 그 맏이를 짜른다는 것은 아버지의 목을 치는 것과 똑같아요. 그 맏이를 죽인다는 것은, 차라리 살아있는 나를 죽이지 맏이를 왜 죽입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아빕 월에 세속의 모든 역사가 바꿔치기 한 것을, 실제 세상에서는 마지막이 현재 것으로 바꿔치기 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시간을 거꾸로 보는 거예요. 내가 있고 맏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맏이를 치는 그 비극을 목격하라고 내가 아버지로서 그 맏이를 낳아버린 것이 돼요. 그래야 이게 시간이 없어진 상태, 다시 말해서 국수 상태, 막국수 상태가 되거든요. 그릇에 담긴 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뱅뱅 돌 뿐이에요. 나중된 것이 처음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맏이를 친 것은 나의 본래의 근원을 미리 쳐버린 거예요. 마지막이라 하는 것, 나의 처음은 과거에 생긴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 처음이 나타난다는 것, 이게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성경을 본다는 것은,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뭘 알아야 구원을 받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줬는데, 어떻게 눈치 코치 다해 내가 알아서 내 능력으로 구원을 받겠어요? 성경 자체는 뭐냐 하면 우리를 미워하는 주의 뜻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자식이 미울 때는 아주 면전에서 구박을 해버려요. 자식이 미울 때는 아버지도 못 참아요. 자식이 무슨 말을 하면 그 말 꼬리를 잡아서 다른 형제들이 있는 면전에서 그 자식을 왕따 시키고 공격하죠. “나는 니 때문에 실망스럽다. 나는 니 낳을 것을 후회한다." 아주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아버지 같으면 그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적극적 성질 날 때는 절대로 주저하지 않죠. 속 좁은 사람 같으면 절대로 그런 말을 않죠. 적극적인 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서 이야기해버리죠. 아주 속 시원합니다. 시원한 냉면이나 막국수가 갑자기 땡기는데.
주께서 일을 하실 때 속 시원하게 해버려요. “니 맏이한테 희망 걸지? 그 맏이, 내가 죽일게.” 그 희망 날아가 버리면 현재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고요. 그런데 맏이를 죽이는데 다 죽여요. 히브리인이고, 뭐 애굽인이고 관계없이 다 죽여요. 다 죽여 버립니다. 그 시간에 다 죽여 버리죠.
그래서 아까 했던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너네 이스라엘 하나님이 동행한다는데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와봐! 보여줄게.” “그래. 가 볼게. 어? 제사 드리네?” “이 제사의 의미를 알아?” “뭔데? 그냥 제사 드리는 거잖아?” 모든 인간은 그 날 밤 다 죽여 버려요. 피를 바른다는 의미는 바꿔치기 하라는 겁니다. 죽은 양과 합류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매서운 칼날을 벗어날 위인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월절 행사를 하면서 이 사람들이 뭘 느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를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어떻게 힘든 삶을 공유하십니까?” 이것을 드러내는 제사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3절에 나오는 “고난의 떡”이라는 겁니다. “7일 동안 유월절 고난의 떡과 그것을 아울러 먹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고난의 떡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인생 자체가 이게 고생을 하라고 주신 인생이에요. 우리의 인생이. ‘야!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부터 형편 핀다.’ 이런 것 없어요.
예수 믿었다는 말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다는 말이고,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살렸다는 그 결과물로써 인생을 살게 된 것이 우리 성도의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이 땅에서 고생하셨습니까? 그 고생이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제자들까지 계속해서 연장이 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구원받지 못하듯이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역시 구원받지 못하게 할 것이고, 앞으로는 지극히 작은 소자, 우리들, 성령 받은 성도를 나쁘게 보고 뭔가 안 좋게 하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들통 나게 되어 있는 그런 체계를, 그런 시스템을 주께서는 가동시킵니다.
그런 시스템을 가동하면서 골로새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들을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상당히 어렵죠. 유월절을 하라고 하면 지키면 되잖아요. 그래 이걸 지켜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지키면서 남한테 보여줘라. 그리고 스스로 알라는 겁니다. 유월절을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함께 동행 하고 있는, 보이지는 않지만 동행하시는 분이 유월절의 내용으로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를 살려내신다는 것을 고백하라고 유월절을 지키는 거예요.
우리가 고난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내가 고난의 떡을 먹음으로써 이쁨 받는 것이 아니고 동행하시는 분이 이미 우리와 함께 고난 받고 있음을, 그걸 우리가 느끼고 알려주라고 우리에게 그 고난의 떡을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광주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오는데, 보게 되면 여기 서대구 터미널 근처에 야외 광고판이 있어요.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밑에 “졸음운전” 졸음운전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뭐냐, 모든 것을 잃어버리라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면 자꾸 살려고 애를 써요. 그렇게 되면 유월절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럼 그건 실패에요. 유월절을 지키려고 하면 실패에요. 율법을 지키면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국수 국물이 끝내줘요. 국물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행함이 시커먼 먹물 같은 죄의 국물을 형성하는 거예요. 우리는 뭘 해도 젓가락 가지고 건지면 죄가 되기 때문에. 그런데 동행하시는 분이 그 국물을 뭘로 바꾸느냐 하면 피로 인하여 의의 국물로 바꿔놨잖아요. 그렇다면 성도의 존재이유는, 성도를 젓가락으로 끄집어내게 되면 한결같이, “국물이 끝내줘요! 주님의 의가 끝내줘요!” 따라서 유월절이고, 안식일이고, 십일조고, 뭐가 어떻고, 이 모든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이 마땅한 겁니다.
자,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그리스도의 못 박힌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장 17절, 18절에 보면 율법으로서는 의로울 수가 없다고, 인간이 율법으로서는 절대로 의로울 수가 없다. 만약 율법으로 의로울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그동안 너희가 이정도로 죄인이라는 것을 들통 내도록 다 하셨다는 거죠.
율법의 핵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게 율법을 요약하면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미 들통 나 입장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냥 우리를 올라오라고 건지시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뛰어드신 거예요. 이 땅에 뛰어드셨다는 것은 율법의 죄에서 어떤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의인이지만 율법의 죄 속에 뛰어드신 겁니다.
국물 맛 좀 보자 이 말이죠. 인간이 퍼트려놓은 그 국물 맛! 그 국물은 율법이 있음으로서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모든 권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 내가 나를 구원할까? 하는 그 심보가 감출 수 없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에 나와 있는데 안 지킬 거예요? 지킬 거잖아요. 무시로 기도하라, 서로 사랑하라 하면 이걸 지키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요. 한 오지랖도 보통 오지랖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선교한다고 하면 자기도 선교헌금내고 선교하려고 하고, 사실 선교한다는 것은 딱 깨놓고 말해서 취직 안 되고 시집 못가서 선교한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아침에 이야기했잖아요.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움직인다고. 이것도 막히고 저것도 막히니까 선교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 의미 없어요.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동행이 아니고 본인 혼자서 본인이 살라고 하니까 만날 자기하는 행동에 대해서 자기 정당화만 더 나옵니까? 주의 은혜로 선교사 한다고. 주의 은혜로 선교사하는 것 맞아요. 그런데 그 주의 은혜가 뭐냐 하면 니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라고 주신 은혜에요. 내가 살아보니까 죄인 맞구나! 하는 것을. 세상에 그런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응애~응애~하고 태어나자마자 달랑 십자가 만들어서 십자가 지고 돌아가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사신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다 사셨어요. 그리고 그 마지막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이야기입니다. 아니 이게 어려워요? 저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어떻게 한의대 나와서 한의사 하십니까? 그거 죄지으라고 한의사하게 하신 거예요. 목사입니까? 죄지으라고 목사하게 한 거예요. 왜? 이유가 뭐냐 하면 동행하시는 분이 같이 속도를 내서, 우리는 고작 시속 30킬로미터로 가고, 가다가 고장 나서 고치고 하지만, 신속하게 우리와 함께 동행 하셔서 먼저 가신 분이 십자가로 갔잖아요. 우리는 그 닦아놓은 길로 가고.
그 가신 길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게 바로 저주거든요. 유월절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라는 그 내용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뭘로 바꾸느냐 하면, 유월절 지키면 하나님이 지켜 주셔가지고 우리가 오래 잘 먹고 잘 살도록 지켜주시겠죠? 이렇게 나오니까 그게 이단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아직도 안산홍 집단에서는 유월절 지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집단이 교인수가 수 만 명이라는 거예요. 수십만이라고 하는 것은 10분의 1로 자르면 돼요. 전부 다 구라니까. 수 만 명도 많잖아요.
왜? 그 수 만 명이 유월절 지키라는 것에 현혹됩니까? 주님 좋아하라고요? 아니에요. 이거 했으니까 살랴달라는 거예요. 죽어서 천국가게 해달라고. 그러니까 안산홍 집단이나 한국교회나 성당이나 전부 다 똑같아요. 은혜는 좋은데 뒤가 이상해요. 은혜 받아 살겠다는 겁니다. 은혜 받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작업은 실패했어요. 이스라엘도 실패한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10절, 11절에 보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 날 속에 뭐가 포함이 되었느냐 하면 유월절도 포함이 된 겁니다. 참 쉽죠~ 그리고 사도바울의 권면도 포함이 된 거예요.
사도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거합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라. 나그네를 대접하라. 히브리서에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거 받아들이세요.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냥, ‘이거 받아들이면 저를 더 살게 하죠?’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아! 내가 얼마나 못돼먹은 인간인 것을 또 알게 하시는구나.’ 국물이 끝내줘요!! 따라서 이 죄가 더덕더덕 붙어있는 이 면을 국물이, 하나님의 의로, 피로 만든 그 국물이, 이런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 그 의가 끝내주는 거예요. 끝내준다는 것을 두 자로 하면 그게 능력이에요. 우리의 존재자체가 능력이에요.
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매료되지 않아요. 매료되지 않는다는 이 말이 참 부끄럽다 만은, 또 누구 잘 되면 시기해서 우리 집은요?뭐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주님의 피와 의에 매료되어 버리면 그 까짓것 아무 의미 없어요. 재산 가진다고 천국 넣어줍니까? 예수님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해요.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불가능하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큰 교회 교인들이 천당 가기 힘들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셔서, 유월절을 주셔서, 지옥가지 마라, 천당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우리가 있는 곳을 지옥으로 만들어요. 가라, 안 가라를 우리보고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줘요. 내가 좋다는 내가 사는 이 세상이 드디어 성령 받게 되면 지옥이 따로 없어요. 이게 지옥이에요. 지 팔 지가 흔들고, 지밖에 모르고, 하나님 이용해먹기 바쁘고, 결국은 자기 가치만 챙기고.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같은 현실인데 다른 역사를 구성하고 있고. 이 세상은 아무리 이렇게 성공을 해도 강물 뜨기에요. 마치 강물을 국자로 떠야 됩니까? 아니면 사발로 떠야 됩니까? 어느 것이 낫습니까?
이거는, 강물은 국자로 뜨나 사발로 뜨나 양의 문제이지. 그 강물은 그 강물이에요.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했다는 말은, 그건 사발로 뜬 것 뿐이에요. 세상에서 실패했다는 말은, 그건 국자로 뜬 거예요. 그 물이 맨 시커먼 그 물이에요. 오늘 설교에서 딱 하나만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 국수 잡수시기 바랍니다. 국수에요. 그냥. 국물에 의해서 결정되는 국수.
아담 때문에 죄의 국물이었다가, 예수님 때문에 의의 국물이 된 거예요. 그 분이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동행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유월절을 지키라고 해서 지켰다고 은근히 행운을 기대하는 이 더러운 국물, 더러운 본성, 오늘 또 다시 노출되었습니다. 교회 나오면 복 주십니까? 헌금하면 복 주십니까? 기도하면 복 주십니까? 주여, 그 더러운 국물이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처음부터 죄인인 것을 오히려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