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강-신 15장 1-5절(7년)1605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5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285페이지입니다.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레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 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천국이 어디 있느냐? 참, 천국이 보고 싶다. 천국을 한 번 구경한다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 천국에 대한 염원 같은 것이 누구나에게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에는 그 천국을 하나님의 율법대로 이루어진 세계라고 이렇게 정의합니다. 율법대로, 하나님의 법대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럼 그 법대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법이 지켜진다면 그 현장에서 천국이 생겨난다는 논리입니다.
그럼 그 법이 뭐냐, 그 법을 우리는 오늘 15장에서 보게 되는 겁니다. 여러 가지 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의 법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율법인데,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에는 그동안, 6년 동안 있었던 빚을 모두 다 청산하고 빚이 없는 것으로 돌려라. 채권자는 남한테 돈을 빌려준 기간이 7년째가 되거든 그 빚을 탕감해서, “니 언제 나한테 돈 빌려갔는데? 나, 니 한테 돈 빌려 준 생각이 안 난다.” 이런 식으로. 아예 채무, 채권 관계가 소멸되도록 그렇게 조치하라는 법을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셨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천국은 뭐냐 하면 법이 법대로 완성될 때 그게 천국입니다. 근데 그 천국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고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나라한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다른 나라한테는. 그런 다른 나라한테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경험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참 좋겠다.’ 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법을 받았기 때문에 참 좋겠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그러나 천국의 법을 받고도 지키지 못하면 그게 또 천국의 대척점에 있는 지옥이 된다는 사실을, 저주받는 그러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고려해야 됩니다. 법을 받아놓고 그냥 안 받은 척 할 수는 없어요. 법을 받아놓고 못 지키면 지옥이요, 이게 지키게 되면 천국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갈고리, 또는낚싯대의 낚시줄처럼 엮어놓은 것이 뭐냐, 율법이에요.
그 율법에 대해서 온전함으로, 다 지킴으로써 걸려들면 그들은 천국을 맛보게 되지만, 만약에 그 율법에 위반하게 되면, 그 율법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 율법을 받은 자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호되게 저주를 받는 벌칙이 율법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방민족들은 일단은 숨통이 트입니다. 받은 적 없다고 시치미 떼면 그만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게 그들의 미래가 되고 그들의 현실이 되는 겁니다. 지키면 복 받지만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 받은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이 유효할까요? 아니면 그들이 저주받은 적이 있느냐? 라는 유효한 질문일까요? 우리가 아시다시피 인간은 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그러한 역사를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복 받은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보는 거예요. 복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기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놓아버렸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았을 때, 자기의 가치가 묵사발 될 때에, 그 현장을 다시 돌아보니까 그 현장이 은혜의 현장이요, 천국인 것을, 그때 그들은 잠시 맛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는 순간, 더 쉽게 말해서 ‘내가 참, 진짜로 죄인이라서 뭐라고 궁시렁궁시렁 할 자격도 못 되는구나’ 하고 짧은 순간이지만, 알게 된 그 짧은 순간만큼은 주어진 모든 것이 천국에서 내려온 선물인 것을, 택배로 온 선물로서 그들은 감지하죠.
그런데 그 선물을 느끼는 순간, 역시 나는 받을만하다고 다시 자기 자신을 등장시켜버리면, 그 축복은 사라지고 그게 저주의 물건들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도 그렇잖아요. 부부되기 위해서 남녀가 서로 사귈 때는 열심히 사귑니다. 그런데 일단 부부가 되게 되면 사귀는 것을 멈추는 경우들이 많아요. 특히 남자들이 그래요. 사귀어서 결혼했으니까 이제는 안 사귀어도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여자는 그 사귈 때 좋았던 감정을 계속 요청하게 됩니다. “내 마음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계속 노력을 하고 사귀려고 애를 써봐!” 이렇게 여자들은 요청하는 반면에 남자들은 ‘이미 내 것 됐는데 사귀기는 뭘 사귀냐? 사귀다가 다른 여자 사귀어야지 니를 왜 사귀어?’ 이래 돼버린다고요. ‘이미 한 건 올렸고 내 것으로 들어왔고.’
결혼은 그게 아니에요. 계속 사귀는 거예요. 아마 사귐의 강도를 증강해야 될 거예요. 그러나 남자들은 왜 했나 싶죠. 빼도 박도 못하고. 셰퍼드한테 물린 식이 된 거죠.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잠깐 주례합시다. 결혼이라는 것은 본인이 사라지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는 면제라는 거예요. 면제. 율법 속에는 면제요소가 있을 때, 그 면제 당함, 당함에 합류하지 아니하면 율법이 주는 천국의 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복을 내가 소유하라고 율법을 준 게 아니고, 그 율법에 의해서 복 받을까, 말까 하는 나의 그 자체가, 면제되는 요소에 함께 휩쓸려 가버리는 거예요.
“니 나한테 십억 빚 졌잖아? 십억 내놔!” 하다가 제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에는 “당신이 나한테 십억 빚졌는데 나한테 갚을 필요 없어.” 왜? 나는 없어졌으니까. “내가 언제 당신한테 돈 빌려 준 적 있어? 나는 없어.” 왜? 나는 없으니까. 이게 일곱 번째 돌아오는 끝에는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라 말이죠. 이 말은 6년 동안 다 면제하라는 말이 아니고 일곱 번째 돌아오는 그 해에 빌려준 돈은 다 면제하라 그 말입니다. 몽땅 면제하는 것은 7×7=49년 다음 희년(50년)에 다 면제해야 해요. 그때는 다 면제해야 해요. 희년 되기 이전에, 50년 되기 이전에 그러한 7년째 빌려 준 것은 그 해에 면제해야 해요.
그러니까 돈 빌리더라도 6년 동안 참았다가 7년째에 빌려야 하는데, 문제는 7년 째 돈 빌리려면 1년부터 6년까지 빌리려 와야 할 그 대상자에 한에서 빌려주기 때문에 어떤 수를 쓸 수가 없습니다. 일곱 번째 빌린 돈은 그 해에 면제해줘라. 그렇게 되는 거죠. 이 면제의 율법을 인간인 이상은 왜 못 지킬까? 첫 해에 10억 빌려가고 6년 째 60억 빌려가고 했으면 7번째 70억 빌려갔는데, 일곱 번째 10억은 빼주고 60억만 갚으라고 한다면 나도 지킬 수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시겠는데, 그 율법은 인간들이 그렇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 그것을 면제하라는 그 이유도 모르면서 형식적으로 그냥 기계적으로 면제해주는 것은 율법 지킨 게 아닌 게 됩니다. 율법의 정신 바깥에서 형식적으로 지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거는 율법을 못 지킨 게 돼요. 십일조도 마찬가지에요. 십분의 일 낸다고 해서 십일조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 날에는 이렇게 빚을 탕감해주라고 하느냐,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땅이 있는데 그 땅과 모든 이스라엘 소유권자가 인간이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개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소유권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모든 채무권을, 채권을 갖고 있어요. 모든 원리를 하나님이 홀로 갖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처음에 천국이 보고 싶으냐고 물었죠. 천국은 뭐냐 하면 모든 권리가 나에게 없고 하나님에게 모든 권리가 있는 그 상태가 그게 천국입니다. 그것을 만약에 거부한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에요. 왜 지옥이냐 하면 권리자가 이미 땅! 땅! 땅! 확정이 되어 있는데 그 틈새에 지가 끼어들어서 “이거는 내겁니다.” 라고 하면 “맞을래?” 그 맞는 것이 저주가 되거든요. 아예 저주를 사요. 저주를 샀어요. 인간들이. 자꾸 내거라고.
그러면 권리가 나한테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하면 되겠네?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권리에 따라서 그것을 지시대로 움직여야 돼요.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사람의 죽은 영혼들이 산다고 했는데 그 죽은 영혼들이 어떤 영혼이냐 하면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죽었던 영혼들입니다.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죽게 되게 되면, 자기의 지시에 따라서 죽었던 사람은 주께서 “자, 일어나! 일어나! 빨리 일어나! 부활세계야 일어나!” 하고 다시 부활시켜주는 거예요. 혼자 지가 자살한다고 일어나! 하지 않습니다. 살고 싶더라도 주의 지시가 따르면 죽어야 되고, 죽고 싶더라도 주의 지시가 따르면 계속 살아남아야 돼요. 왜? 그 주도권이 오직 주님에게만, 신약에는 예수님에게만 모든 주도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빚이든, 땅이든, 돈이든, 주님이 일곱 번째 빌려준 것은 받지마! 하고 주인이 자기 주도권 행세를 해버리면 그 시킨 대로 안 하면 되거든요. 그게 율법 지키는 거예요.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시킨 대로 할 뿐이지 제가 저한테 하는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은 이래요. 그럼 처음부터 일곱 번째 돌아오는 날, 1월4일에 돈 빌려 도! 라는 그런 일까지 깔끔하게 없었으면 좋겠다. 돈 빌려 도! 라는 것이 생겨버리고 연말에 가서 돈 빌려 준 적 없다. 티내지 마라. 이럴 바에 처음부터 나한테 돈 빌리러오는 그런 사건조차도 안 일어났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리는 또 이렇게 머리써가지고 생각하거든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돈 빌려줬는데, “안 갚아도 돼.” 라는 말을 우리가 돈 빌려 간 사람에게 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채무, 채권 관계로서 지금 주님과 나의 관계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 돼버려요. 주님이 오늘도 살리는 것은 주님의 권리며, 주님의 권리 안에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돈 빌린 자의 입장에서 주님한테 예속되어 있고 종속되어 있는 삶을 삽니다. 이제는 죽든 살든 그거는, 모든 권한은 주님한테 있습니다. 그런 고백을 우리가 채무, 채권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이 율법을 통해서, 7년째 면제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거죠.
자, 그러면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참, 보고 싶습니다.” 하는 조로 이야기했죠? 그러면 그 이야기를 확대해봅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기만 하면 내가 믿고 따르겠는데, 하나님이 뭐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없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과 오늘 본문이 관련성이 있어요. 어떻게 관련성이 있느냐 하면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 칠 년. 오늘 설교 제목이 7입니다. 숫자로 7이라 되어 있는데, 이 7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7일 만에 하셨다는 그 취지가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조금도 없어지지 않고 달라지지도 않고 계속 반복해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는 거예요.
7을 거론한다는 것은 “7의 원칙 따라 니가 살았냐?” 라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그럼 7은 창조의 원리를 숫자로 표기한 건데, 자 이제 설명이 좀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숫자라는 것은 반드시 숫자 헤아리는 사람에게 의미가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숫자라는 것이. 나는 자식이 세 명이야.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은, 그 헤아림을 당하는 자식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데 내가 그 권리를 가졌다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애가 세 명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보통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부모 된 자가 애가 세 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애가 세 명이다, 또는 네 명이다, 숫자를 헤아리죠.
만약에 그 사람이 부모도 아닌데, “아이구, 애가 다섯 명이 있네.” 라고 하면 지나가는 사람이 “혹시 부모 되십니까?” 이렇게 물어볼 수가 있어요. 평소에 철이, 철수 이렇게 이름을 불러줄 수 있지만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은 그걸 통합해서, 나에게 속한 부분으로서 통합적으로 숫자를 헤아리는 겁니다. 이름이 철이가 있고 철수가 있지만 이름 빼고, 아이구 내 새끼 셋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헤아리는 나만 통합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은 헤아림 당한 너희들은 너희 고유의 어떤 권리가 없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사실은 잘못된 말이에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숫자일 수밖에 없는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앞에 숫자로 헤아림을 당할 그런 입장에 있고 그런 위치에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함으로 말미암아 너의 고유의, 너 자신만의 이름을 너한테 붙일 자격이 아예 없는 거예요. 결국은 너는 나에게 속한 일부로서, 숫자로만 평가되고, 숫자로만 판단될 대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숫자로 판단된 그 모든 사람은 일괄적으로 움직여요. 일괄적으로. 열두지파,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이 야곱 언약에 내려주신 그 표현방법이거든요.
12×12×1000=144,000입니다. 그 속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만이 너희들을 천국 백성이 되게 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12라는 숫자를 표기하면서 집어넣은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사적인 노력과 개인적인 역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 안에 같이 담겨있는 거예요. 12로, 또는 7로. 애들이 학교에서 명찰을 달죠. 그러나 교도소에 가게 되면 명찰을 다는 것이 아니고 숫자로 채워집니다. 이 말은 여기 너희들이 있든, 나가든 하는 그 권한은 당신네들에게 있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가 숫자를 호명할 때 그 숫자에 의해서 당신은 이제는 밖에 나갈 수 있고 들어 올 수 있고 이 말이에요. 이 바닥에서는 니 이름은 없고 숫자로만 이야기된다는 겁니다. 3117839 제 군번이거든요. 죽음은 이름이 아니고 군번으로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축복받든지, 아니면 저주받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이 강요당한, 강요당한 선택에 의해서 점점 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계획으로 우리가 닮아갈 것이에요. 그러나 이 숫자로 지목되면, 그 숫자 속에서 뭐냐 하면 하나님만이 주가 되시고 모든 권리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내용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될 때에 인간의 자존심은 거기에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거기에 반발합니다. “이 법은 나도 지켰습니다. 7번째 있는 해에 탕감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만의 고유권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십일조하고도 지옥가고 일곱 번째 해에 면제해주고도 지옥가요. 하나님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스라엘이라는 위치를 일반사람과 혼동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기 3절에 보면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곱 번째 해에 면제하라는 것은 이방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속에서 나는 나 혼자 산다는 말을 이스라엘 속에서는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니가 이스라엘 백성 같으면 하나님 때문에 산다고 이렇게 해야지, 나는 내가 노력해서 니보다 낫다는 것을 해서는 안돼요. 너는 가난하고 내가 부자 된 것은 너를 지으신 하나님 때문이지, 나 때문에 내가 잘나서, 훌륭해서 부자 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돼요. 가만 듣고 보면 약 올리는 이야기가 되죠. 니는 가난이 팔자라서 가난하고 나는 부자 될 팔자라서 부자가 되었어. 그러니까 나한테 질투하지마. 빌붙지마. 나도 부자 된 것도 힘들어 죽겠어. 나도 내 맘대로 안 돼. 이게 약을 올리는 건지, 자랑질 하는 건지, 들어보면 참 이상하게 구분이 안 되죠.
이스라엘 특징은 그렇습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모든 사람은 율법에 일괄적으로 혜택을 입게 되어 있는데, 왜 이스라엘이 망했느냐, 망한 이유가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고, 그 우상을 섬기게 되면 안에 계급이 생겨버려요. 소위 내가 열심히 신에게 잘 했기 때문에 부자 되었다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리가 돼버리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에 위치가 되면서 내부적으로 가난한 자의 권리를 부자가 다 뺏어가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사실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고 주님 편에 서서 가난한 자를 돕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부자들은 망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원리를 율법으로 유지를 하려는 거예요. 자 그렇게 된다면, 제가 처음에 설교할 때, 천국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보고 싶습니다. 이 보고 싶다는, 죄지으면 죄지을수록 그 보고 싶다는 것이 점점 더 가까이 내왕하고 있다는 것으로 여러분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덕으로 내가 잘났기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 내에서 가난한 자는 개무시하고 살겠다. 이렇게 할 때에 그것은 일종의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신이시여, 이건 내거니까 손대지 마시고 가난한 자의 어떤 언급은 내가 밀치겠습니다.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게 되면 밀린 쪽과 밀친 쪽의 경계선이 생기게 됩니다. 자, 천국은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겠지. 주님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밖으로 밀려갑니다. 성문 밖이 뭐냐, 쓰레기장입니다. 그 쓰레기장으로 밀려갑니다. 그걸 바로 게헨나, 지옥이라는 곳에 주님이 거기에 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미는 곳에 주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사실은 떠밀린 거예요.
천국이 보고 싶다. 지옥이 보고 싶다. 그걸 달리 하면 율법의 완성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다. 같은 말이에요. 율법의 완성이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욕심으로 떠밀린 현상과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 바로 그쪽이, 천국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가까이 천국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숫자가 모든 것을 소멸한다고 했죠. 베드로전서 5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동일한 고난, 고난을 동일하게 받는데, 그 고난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세상으로부터 떠밀리는 고난이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이고, 예수님은 누구냐, 율법의 완성이고, 결국은 이 땅에서 천국을 보고 싶다고 하면서 사실은 천국을 떠밀고 있는 자는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들이 천국을 떠밀고 있는 셈이에요. 그래놓고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하늘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걸 오늘날 사도바울의 복음에 적용시키면 내가 나를 못살게 굴어요. 내가.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왜 또 그런 말썽을 일으켜? 나는 나 때문에 못살겠다. 주님이 은혜로 집어준 나와 기존의 애굽적인 생활, 돈만 있으면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나와, 이게 내 안에서 계속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자꾸 나가라고 하느냐 하면 옛날에 살던, 돈만 있으면 최고라는 그것이 나는 주님의 용서받아서 산다는 그것을 계속해서 내가 구박하는 거예요. 내가 시어머니 짓을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순진무구한, 주님 쪽에서 밀어준 내 모습을, 힘만 의지하고자 하는 육적인 욕심을 가진 내가 나를 구박하는 거예요.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로마서 7장의 내용이 바로 성도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돈 빌린 것은, 그거는 갚으라고 닦달내지 마라. 그러면 그 돈도 내가 얼마나 애써서 벌은 돈인데 그걸 갚지 말라고 하면 나만 손해이게? 이게 또 나한테서 소리가 나와요. 지킬과 하이드에요. 천사냐, 악마냐, 이게 내 속에서 계속 둘이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게 내 돈인데? 받지 말라는데? 그럼 형식적으로 7년째 탕감해준다고 해놓고 다음해에 그때 탕감해준 거 반 만 돌려 도! 이렇게 온갖 생각을 다하고. 내가 또 이걸 갚으라고 하지 않으면 주께서 30배, 60배, 100배, 갚아준다니까, 돈만 있으면 산다는 내 본색에 맞도록 또 30배 채워줄 수도 있지. 또 혼자 온갖 생각을 다 하는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바로 그와 같은 꼼수 때문에 주께서는 십자가를 영문밖에 나가서 졌어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이 싫어하는 쓰레기장에서 고난을 받았고, 니가 그 고난의 자리에 와야, 비로소 주의 재림이 보인다. 하늘이 보인다. 아까 히브리서 13장14절에 “우리가 여기는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천국 가는 길이 몹시 기대되지만 막상 이미 우리와 함께 있어요. 이미 우리와 함께 있는데 우리가 너무 세상에 독하게 집착하다보니까 천국이 콱콱 숨이 다 막힐 것 같아요. 천국이.
길가의 민들레가 아름답죠. 그 민들레 꺾어서 집에 놔두면 집안 식구들이 싫어합니다. 거기 가만 놔두지. 왜 꺾어왔느냐? 또 어떤 여자가 나는 민들레가 참 좋다고 해서 민들레를 이만큼 꺾어서 프러포즈하면, 누가 민들레 달라고 했어요? 돈 달라고 했지요. 그것도 모르고 눈치도 없이 민들레만 꺾어오면 뭐, 민들레 먹고 살까요? 저는 남자들이 여자한테 프러포즈한다고 장미 꺾는데, 아휴! 저는 진짜 싫어요. 장미 백 송이에 얼만데? 그걸 돈으로 주면 좋지. 장미를 왜 갖고 옵니까? 돈은 시들지 않습니다. 장미는 시들어버립니다. 현찰은 오래가지만 장미는 곧장 가요.
우리의 육은 죽을 때까지 천국을 싫어할 거예요. 미워할 거예요. 그런데 끈질긴 주님께서 계속 천국을 들이댈 거예요. 니가 가야 될 세계는 니한테 핍박받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온 예수님과 니가 영원히 살 거야. 왜? 너는 숫자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킬 수 없는 율법, 그러나 대신 지켰다는 소식을 품에 안고 계속 끈질기게 우리에게 다가오니 우리들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산다는 우리 앞에 말씀으로 산다는 주님과 대결할 때에 주님을 배반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찬미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