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과 7년
2016년 6월 12일 본문 말씀: 신명기 15:12-18
(15: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15: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15: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15: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15: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5:17)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
(15:18) 그가 육 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면서 숨겨진 구원 프로그램이 실제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동이 됩니다. 이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늘 ‘움직임’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반발하고 반발하는 요소도 같이 내뿜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독립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그 본능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 앞에서 숙지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 어느 누구랄게 없을 정도로 모두 ‘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치적으로 애굽의 종이라는 신분을 벗겨주시면서 근원적인 ‘노예성’도 같이 들추어내십니다.
비록 정치적 상황으로서 애굽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나라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반(反)-율법적 성향이 노골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한 법’으로서 율법을 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런 현상을 통해서 정치적으로서의 속박이 아니라 ‘죄의 노예’라는 이 세상의 근본적 상황을 향하여 이스라엘을 끌어넣으시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누구의 종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돈 때문에 지금은 노예같은 대우를 당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나에게 충분한 돈만 모아지면 이 수모를 되갚아주리라”는 경제 논리 안에 여전히 잠겨서 살아가게는 마찬가지입니다. 즉 근원적으로 ‘죄의 노예’라는 의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거해서 보면, 모든 인간의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힘으로 죄를 다스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죄를 관리하고 통제해서, 죄가 없고 오로지 의와 선만 충만한 세계로의 이전을 획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여기 있음’은 곧 ‘죄가 여기 있음’입니다.
죄의 종이기에 ‘내가 있다’는 말은 무의미한 말이 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기어이 ‘내가 여기 있기에 나는 당당하고 싶다’고 합니다. 과연 그러한지는 스스로 주장한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가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즉 주인은 이러이러해야 하고, 종은 이러이러한 입장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주인의 역할은 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차지하십니다. 왜 그래야 하며는, 율법의 성취는 율법을 주신 취지를 제대로 아시는 분이어야 하기에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인으로 개입하셔서 자신이 내려주신 그 율법 안에서 ‘율법 성취’를 시도하시게 됩니다. 이는 종의 무능을 전제로 하시는 작업입니다. 종은 주인이 끄집어내어 줄기 전까지는 절대로 자유인이 못됩니다. 종은 일하 때만 주인에게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종의 신분 변화에서도 주인에게 수동적 존재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사람을 종으로 규정했다는 말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종임을 밝혀낼 능력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늘 자유인인양 살지만 이는 ‘주인없이 독립하고자 하는’ 악마의 속임수에 놀아가는 식입니다. 그리고 종이 되어보지 않는 자는 ‘자유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유인은 반드시 ‘종이 된 경력자’입니다. 주인이 개입하는 지점은 6년과 7년 사이입니다. 6년과 7년은 그냥 무내용으로 시간만 흘러보내면 도달되는 때가 아닙니다. 7년째 되는 해의 충실성을 위해 그 전에 6년 동안의 기간은 내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세계 속에 개입하실 때, 스스로 창조된 시간을 자진해서 입으시고 개입하십니다.
즉 처음 창조하신 그 원리를 포기하거나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단호함을 지니고 개입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피조물은 일체 창조원리 속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일방적인 창조적 원리대로 존재하고 기능해야만 합니다. 6년과 7년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숨겨진 창조 원리가 ‘주인과 종’의 관계로 반복되면서 실제로 재현됩니다.
6년 간 지속된 주인과 종 관계는 제 7년째는 전혀 반영되지 말아야 합니다. ‘단절’을 보이는 특이성이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종이면서도 자유인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인은 자기 집에 팔려오기 전의 자유인인 것이 아니라 고용한 주인의 자유성이 아픔을 갖고 잘려나는 내용을 품고 있는 그런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즉 자유인은 ‘종을 자유인’으로 만드는 책임자로서 종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종의 입장에서 본인이 상상한 그 자유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나 때문에 고생하시고 아파하시는 주인님’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종으로 팔려온 그 상황이 일어난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죄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그 상황도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겁니다. 그저 인간들의 정신적, 신체적 속박이 해제된 상태를 그리워하면서 고대하는 자유인은 여전히 악마 소굴입니다.
자유인이라는 상황은 종들의 의견이나 종들의 기대치를 만족하는 것으로 구성되거나 현실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종은 도무지 예상조차 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지게 됩니다. 죄의 종에서 예수님 때문에 기어이 자유인이 된 자는 생각도 못한 세계를 접한 겁니다. 예수님만 아시는 세계에 초대된 겁니다.
귀에 송곳이 뚫린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주인과 한 가족이 되어 영원한 결속관계에 들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자유인 속에서 ‘종이었던 흔적’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텅빈 공간’입니다. 즉 6년이 7년으로 건너가면서 하나님만이 가능한 창조 완성에 대해서 종은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으로 감히 범접할 수가 없는 겁니다.
곧 성도들은 모두 마음 가운데 구멍이 있습니다. 이 구멍은 본인의 종교 활동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늘 비워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인되시는 예수님의 홀로 하신 공로만이 드러나야 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곧 십자가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내거나 침범이 가능한 자리가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나로 인하여 내가 구원된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증거를 의식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7강-신 15장 12-18절(6년과 7년)16060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5장 12-18절입니다. 구약성경 286페이지입니다.
“내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 그가 육 년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나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상당히 답답해하고 어려워합니다. 시대가 그쪽시대가 아니고 21세기잖아요. 21세기에 종이라는 이야기 나오면, 노예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어리둥절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종이라는 형편을, 그쪽 상황을 모르게 되면 또 무엇이 불안하냐 하면 구약성경 읽었는데 거기에 담긴 의미를 뽑아내지 못한데서 오는 불안감이 있어요. ‘성경을 보면 뭐하노? 뭐 알아야지. 이래 된다 말이죠. 성경을 볼라치면 뭐 종이 나오고, 뭐 주인이 나오니까. 지금 형편과 다르니까. 난감한 장벽처럼 느껴져 가지고 그냥 읽었으면 읽은 것으로 뛰어넘어 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읽었는데 무슨 뜻이냐?” “모르겠습니다. 그냥 봐주세요.” 이렇게 때우고 하는데.
이 구약성경을 읽게 되면 아, 그 때 그 당시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 당시 상황이나 지금 상황이나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거든요. 그 당시 종이 나오고 주인이 나오면 이것은 자유과 관련됐다고 생각하시면 뭐, 거의 백퍼센트 정답입니다. 그 당시 상황가지고 자유를 설명하고, 우리 상황가지고 자유를 설명하고. 그 당시 상황은 애굽 나라에서 빠져나오면서 자유라는 것을 설명했다면, 지금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하면 또 오해하니까, 예수님 가신 곳, 예수님이 만들어 내신 곳으로 나갔는데, 그냥 나가지 않고 빠져나온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옛날에 애굽의 종이 되었었는데,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단체로 종에서 자유인이 된 것처럼, 지금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산다고 하지만 앞에 뭐가 붙어야 돼요. 종으로 사는 겁니다. 노예로 사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게 되면 성도들은 발끈 안 하는데, 교인들은 발끈하죠. “우리가 무슨 종이냐?” 라고 하게 되면 그땐 사도바울의 편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실제상황과 문화적 상황, 정치적 상황을 가지고 설명했던 것을, 지금은 영적상황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그때는 애굽에서 빠져나와서 생활 형편이 바꾸어지는 것으로 설명했다면 지금은 죄의 종이 되려면 먼저 주인 되는 죄의 위세와 권세를 알아야 돼요. 그 당시에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학대했습니까? 지금 우리가 학대받고 있으면서도 뭐라고 우기느냐 하면 ‘나는 학대받은 적 없어. 자유자야.’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의 종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니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언제 죄의 종이 되었느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게 요한복음 8장에서 이야기를 하죠. 어쨌든 갇혀있는 겁니다.
이 점을 먼저 설명하고 오늘 본문을 설명해야 할 텐데요. 우리가 도대체 자유자라고 우기면서도 성경에서 니는 죄의 종이라고 이야기하니까, 성경이야기하고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 하고 안 맞는 거예요. 우리는 무슨 종이냐? 우리는 큰소리 칠 것 다 친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보통 자식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또는 “아버님”이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어릴 때도 불렀고 결혼해서도 부르는데, 실제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는 본인이 독립했을 때 부르는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에요. 독립했을 때.
그런데 아버지가 니는 내 자식이라고 할 때는 그 자식은 절대로 독립했다고 눈 감을 때까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의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니는 백날 그래도 내 자식이야.” 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쪽에서의 개념설정이고. 자식들이 “아버지!” 라고 결혼하기 전에 부르는 것 하고, 결혼하고 난 뒤에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 하고 이게 뉘앙스가 다릅니다. 개그콘서트에 어떤 코너에 이런 게 나와요. 아버지가 딸을 나무라니까 뚱뚱한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제 나이 오십이에요. 이제 힘으로 안 져요.” 이렇게 하거든요. 그럴 때 부르는 아버지는 뭐냐 하면 더 이상 내가 주눅들 필요 없는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그냥 남이에요. 남인데 그냥 불러주기 뭐하니까 아버지라고 불러주고 어머니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그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간섭하지 마세요!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종이 아닙니다.” 근데 어릴 때는 같은 아버지인데 그러지를 못해요. “아버지이이~~” 이러면 수상한 거예요. “아버지이이~용돈주세요.” 이럴 때 아버지는 뭐냐 하면 아버지가 원하는 그 자식의 이미지에 철저하게 복속될, 예속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저 용돈만 주세요.” 그렇게 되죠. 같은 가족관계도 이렇게 본인이 독립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서 개념이 다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복종할 주인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니가 죄의 종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섬기거나 복종할 게 없어요. 돈만 끼어있으면 어느 가족이고 아버지고 간에 누구한테 꿇릴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내 것 가지고 내가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모토고 희망입니다. 사람이 몸이 아플 때, 몸이 아파서 괴로운 것도 있지만 몸이 아픔으로 말미암아 남한테 의지한다는 것이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뿔다귀 날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평소에 큰소리치던 가장이 몸이 아파보면 아내가 “여기 미음 좀 드시우.” 하면 “치와뿌라!” 그래가지고 치우고 밖에 놀러간 사이에 슬슬 기어서 ‘아까 미음 끓여놓은 것이 어디 있더라?’ 하면서 지가 찾아 먹죠. 그래놓고 앞에서는 큰소리치고. “치와뿌라! 내 안 죽는다.” 안 죽었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주인이 없어요. 자기가 돛대고 자기가 신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뭘 보냈느냐, 예수님을 보내신 거예요. 복종해야 될 분을 보내신 거예요. 복종해야 될 분을.
그리고 그 분은 오늘 본문 신명기 15장에 나오는 그 주인에게 할당된 율법을, 아버지로부터 온 율법을 온전히 다 이루기 위해서 오신 주인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그 분의 종은 없습니다. 주인은 등장했는데, 그 주인과 율법적 연관성을 짓는 종은 아무도 없어요. 왜? 이미 자기가 돛대고 자기가 독립자라고 주장하면서 마귀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의 종이 듣기 기분 나쁘면 죄의 종이 된 거예요.
그러면 죄의 종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죄의 종은 몇 번 선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되는 겁니다. 보통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의 종이라고 하는데, 입원했다가 나왔다고 해서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럼 이건 우리가 병원에서는 퇴원했지만 죽음의 종이 되는 겁니다. 건강하게 살아가지만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어요.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왜 죽는가에 대해서 이유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게 종의 특징입니다. 내가 왜 죽는지, 살고 싶은데 왜 죽는지. 무슨 관계가 얽혀져서, 누가 있기에 살고 싶은 소망이 있으면서 죽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살고 싶더라도 내 맘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누구의 종이 되는 겁니다. 죽음 안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실체와 그러한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셨습니다. 너희는 니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니가 죄를 벗어난 것이 아니고, 니가 기대하고 있는 그곳에 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내 소원만 들어주면 된다고 하는데,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 환경에 가보니까, 어서오너라! 이것아! 죄가 거기 기다리고 있어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예수를 믿으면 되나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이건 백퍼센트 죄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바깥에서 파고 들어와요. 내 자식, 내 새끼 어디 있나? 하고 찾아오는 거예요. 그걸 저는 특채라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특채한 사람 어디 있나? 하고 땅굴을 이렇게 파고 찾아오는 거예요. 땅굴을 파는데, 그 파면서 나타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 땅굴 파는 그 모든 원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죄 속에 있으면서 빠져나간 그 원리를 그대로 가지고 파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설교요, 목회요, 교회입니다.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섞어서는 안돼요. 오직 복음뿐이에요. ‘본인은 뭐 드라마이야기 다 해놓고.’ 드라마이야기고 뭐든 간에 복음과 연계되어야 해요. 복음이 뭔데요? 복음은 우리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해줘야 해요. 그러면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다룰 수 없는 권세와 주님의 권세하고 충돌되어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 안에 하수인으로 있는 우리가 내 권세를 어떻게 조정할 수 없듯이, 주님이 구원하겠다는 그 능력을 내 손으로 뿌리치고 도망칠 수 없어요. 도망치면 끝까지 따라옵니다. 내 다리 내놔라 하면서 끝까지 따라와서 주님의 구원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 그 테스트를 하는 것은 간단해요. 멋대로 살았는데 계속 따라올 때, 그거 성도입니다. 주님 버리겠다고 그렇게 떨쳐도 계속 십자가의 의미가 순간순간 되새겨 날 때는, 내 죄를 내 맘대로 못하듯이, 그러한 십자가 복음도 내가 다룰 수 있는, 내가 처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요. 남들, 친구만나면 전부 지 자랑하고, 돈 자랑하고, 자식자랑 하는데, 뭐 친구고 거들어줘야 한패 먹으니까 거들어주긴 주는데, 이상하게 그게 한계가 있어요. “그래. 기껏 그런 것 자랑하고 싶어? 내가 들어줄게. 들어주는데 니는 거기까지. 너는 고거까지. 니가 아는 벽지는 그거밖에 없어.” 폐쇄된 공간의 벽지는 그거밖에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성경에 대한 내막이 전혀 벽지를 뚫고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 벽지는 뭐냐, 옛날 자기가 살아오면서 남들이 부러워했던 그런 것들만 더덕더덕 붙어있는 거예요. 마치 인기 연예인이 인기를 찾는 것처럼. 그거 없이는 죽는 줄 알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뚫고 들어옵니다. 그 뚫고 들어온 것이 뭐냐, 신명기입니다. 모든 율법이고 그 중에 신명기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신명기가 포함될 때, 거기에 어떤 역할을 줍니다. “나 주인 할게. 니 종 해라.”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성경,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나 주인 할게요.” 자기가 주인 한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그거는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출애굽기를 몰라서 그래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통째로 다 종입니다. 주인 없어요. 자기들이 알아서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리 자기들이 잘났다고 해도 우리 가운데 십자가 지신 분은 아무도 없어요. 오직 십자가 지신 분은 주님밖에 없어요. “목사를 사랑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 대목 없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말로 해서 목사한테는 저주권도 없고 축복권도 없습니다. 저주권, 축복권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가시적인 것에 주눅이 드는 것은 평소에 세상에서 권력에 주눅 들던 그것이 그대로 교회 안까지 들어와서, 세상 권력에서 사장님 섬기듯이 교회 와서 목사님을 사장님이라고 착각해서 섬기는 거예요.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뭐냐,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 집단에서 사랑받는 존재.
성경에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받아야 될 존재가 못되고 우리가 미워해야 될 존재가 되는 겁니다. 자, 어떤 작용을 했기에 그 분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여기 오늘 내용에 12절에 보면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팔렸다”는 말이 나오죠. 이게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팔렸다.” 팔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부터 누가 주인의 노예로 작정된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시대상에서 “니는 노예 해!” “니는 주인 해!” 라고 그렇게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없어요.
팔렸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처음부터 당연히 노예 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의 예정된 뜻에 의해서 잠시 종이 된 거예요. 잠시 팔렸다는 말은 이게 한시적이고 계속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분이 종에서 그 다음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자유인으로 바뀌어야 해요. 그런데 종에서 자유인으로 바뀌게 되면, 그 자유인은 종을 경유하지 않는 자유인은 없습니다. 천국 간 사람 중에서 죄의 종노릇 안 해보고 천국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죄인으로 사셨던 분이에요.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 대우를 받고, 수모를 당해야 될 분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음껏, 아주 편안하게 생각해서, “아예, 죄인으로 살자!” 이래 마음먹으시면 됩니다. 첫 번째 복음입니다. 그냥 죄가 시키는 대로 살면 돼요. 왜냐하면 죄 짐은 어차피 내 쪽에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내 쪽에서 죄 짐을 해결해버리면 내가 나를 구원하는 구세주로 돌변되고 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있으나마나 돼요. 오늘날 교회 꼴이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받습니다. 본인들이 본인이 알아서 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라고 한 순간,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시험은 누가 치느냐, 예수님이 쳤어요. 승리는 누가 승리했느냐, 예수님 홀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에서 승리할 이유가 없고, 필요도 없고, 그런 겁니다. 그냥 예수님이 승리했으니까, 예수님과 관련됐으니까, 그게 감사한 거지. 독자적인 나의 승리를 자꾸 요구하게 돼요. 옆에 집사님이 기도 한 시간하니까 자기는 전에 삼 십분 하다가 한 시간 오 분으로 기록 돌파해가지고 속으로 내심 ‘꺾었다!’이래요. 그런 승리감에 도취되지 마세요. 우리는 철저하게 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죄의 종이 되어야 돼요.
그래야 죄의 종인데도, 백퍼센트 우리는 죄의 종이었는데,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인 쪽에서 개입되신 거예요. 그러면 죄의 종인데 주인 되신 분은 우리에게 무슨 역할을 해주셨는가? 여기 주인은 이렇게 하십니다. 너가 팔렸다는 말은 원래 종이 아니고 돈 때문에 팔린 거예요. 가난해서. 이자를 많이 받아서 갚을 길이 없어 신체포기각서 쓰고 종이 된 겁니다. 그러면 종이 되었으니까 종에게 품삯을 주고 하면서 6년 동안 일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인 입장에서는 일한대로 삯을 주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사람이 6년 동안은 밥 빌어먹고 살았는데 7년째 그냥 나가버리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또 이집이나 다른 집이나 종이 되어야 해요. 자유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인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팔려온 사람을 종으로 받되, 너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그 안에 언젠가는 자유 해야 될 사람이라는 그 잠재적인 요소를 보고 니가 그 종에게 대하라.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여기서 그 자유자가 누구냐 하면 종을 부리고 있는 주인이 종은 아니니까 자유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예를 부릴 때에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신이나 내나 똑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을 노예로 삼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의 사람인데 내가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뭐 있느냐 이렇게 하는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인 된 입장은, 그 종이 한 달에 오만 원짜리 일을 했다면 나갈 때는 십만 원으로 쳐주고 보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소리를 들은 주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고 그러면 우리 집에 팔려온 사람은 나만 손해 게요?” 그래, 그게 주인이 손해 본 폭만큼 종이 자유자가 되는 그런 영역이 새로 생기는 거예요.
주인의 것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주인이 겪어야 그 아픔 속에서 종이 되었던 자가 자유자가 되는 그러한 여분의 사랑이 얻어지는 겁니다. 이 세상 어떤 일도 공짜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구원받는 우리 입장에서는 공짜지만, 공짜가 공짜 되기 위해서는 공짜 아닌 근거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값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값없음을 생산하기 위해서 값있는 주님이 자기 것을 내놓으신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는 돈에 관한 문제거든요. 돈 없어서 팔렸던 문제잖아요. 돈에 팔리면서, 이게 시한이 뭐냐, 하나님께서 6년 동안 그렇게 하되 7년째는 면제를 만들어서 그에게 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6년이고 하필이면 7년이냐, 123456은 세월가면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6년에서 7년 넘어가게 되는 것은 이게 세월 넘어간다고 해서 7년 되는 것이 아닙니다. 6년 동안 숙성될 것이 있어요.
그냥 일반적인 6년 되고 7년 되 봐야 도로 노예 돼요. 비행기가 뜨려면 활주로에 비행기가 그냥 가만있으면 비행기가 뜨지 않아요. 달리고 마지막 끝지점에서 공중에서 날아야 되듯이 이 6년은 그냥 6년이 아니고 7년째를 내다보면서 뛰어야 되고 날아야 될 6년을 보내야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해놓으시고 창조물에게 혼자 그냥 맡긴 것이 아니라 창조물 속에 주께서 들어와 버리고, 그 창조물 전체를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 되시고 주가 되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6일 동안 만든 모든 창조세계 활동력 속에 개입하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놀아도 주님은 안 논다는 그런 이야기에요. 뭐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놀아도 주님은 놀지를 안했어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이 일하신다고 하셨거든요. 모든 것, 우리가 숨 쉬는 것도 주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닙니다. 숨 쉬자, 숨 쉬자한다고 해서 숨 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살아도 주께서는 숨 쉬게 만드는 주의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 주의 일이 열매를 맺으려면, 6일과 7일이 차이 나는 것처럼, 6년과 7년이 차이 나는 것처럼, 이 땅에 우리가 사는 것과 이 땅에 모든 세월과 주님의 묵시적 시간과 천국의 시간과 단절이 되어야 하고 이게 끊어져야 해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닭 좇던 개가 되어야 해요. 주님! 주님! 하다가 ‘역시 구원받는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서 믿고 선교한다고 그것으로 내가 나를 천국에 보내주는 것이 아니군요.’ 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6년에서 7년째 완성되는 것은 이거는 주님이 결정적으로 개입해야 될 문제입니다. 결정적으로. 사람이 살아봐야 하나의 열매거든요. 열매가 뿌리를 흔들 수 없어요. 뿌리가 열매를 좌우하고 결정짓잖아요. 근데 열매가 뿌리보고 간섭하고 지시하고 이것대로 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열매에 불과할 것 같으면 열매 속에서 진짜 뿌리가 있어야 돼요.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속에 알맹이가 있는데, 그 알맹이는 우리가 손으로 어쩔 수가 없어요. 태어난 알맹이는 각자 갈 길로 갈 뿐입니다. 우리 힘으로 어떻게 안돼요. 그러면 이 단절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 16절을 봅시다.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송곳으로 뚫는다는 것은 영원히 종이 되는 겁니다.
영원한 종은 뭐냐, 다른 말로 가족이에요. 종에서 아들처럼 대우받는 겁니다. 일만 잘하면 종도 아들처럼 대우받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바로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서에서 우리가 죄의 종이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뚫는다는 것은 소유를 말하고 주의 앞에 소유당한 것을 말하는 겁니다. 소유당함으로써,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그 다음이 도약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듭니다. 제가 서울 가락강의에 갈 때 그 다음에 신월동에 갑니다. 지금 신월동에 재개발한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래서 의존교회도 거기서 나왔지만. 거기에 보상금 받고 이사를 쫙 나왔잖아요. 그러면 거기가 온갖 우범지역이 돼요. 구청에서 뭐라고 붙여놨느냐 하면, 제가 가봤어요. 제가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공가>, 저는 처음 듣는 단어입니다. <공가>해놓고 “누구든지 무단으로 침입하면 형사처벌을 받습니다.” 라고 빨간 글씨로 써놓았어요. <공가>가 뭐냐, ‘비어있는 집’이라는 뜻이에요. 신월동 온 동네가 지금 <공가>, <공가>, 붙여놨어요. 사람은 살지 않아요.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재개발지역이니까.
6년에서 7년까지 <공가>가 됩니다. 들어오면 안돼요. 왜 들어오면 안 되느냐 하면 알갱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형체가하기 때문에, 형체가 나대기 때문에 문제에요. “주여, 헌금하겠습니다.” “주여, 전도하겠습니다.” “주여,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박사해서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목숨 받쳐서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나대지 말란 말이죠. 백날 해봐야 거울에 비친 니 모습이잖아요. 내 모습가지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구원이 안돼요. 지금 이러한 형체, 이러한 모습, 이러한 인생을 살게 하신 알갱이는 누가 잡고 있느냐 하면 우리의 주인 되시는 주님이 잡고 계십니다. 그 분이 도약하지 않으면 우리가 백날해도 도약될 수 없어요.
6년에서 7년으로, 다시 말씀드리면 준비된 말씀에서 완성된 말씀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겁니다. 신명기 노예이야기가, 여러분들 혹시, 지금은 그런 용어를 쓰지 않지만 옛날에는 그런 용어를 썼어요. “식모 있거든 7년째 시집보내서 나가게 해라.” 그런 것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종이 아니고 지금은 죄의 종이에요. 죄의 종은 어떤 식으로든 벗을 수가 없습니다. 이거는 교회 가서 봉사하고 백날 설친다고 해서 이게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그걸 자꾸 하게 되거든요. 하고 싶게 되게 되면 우리는 주님, 주님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자꾸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 본인이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찬양을 하면서 ‘오늘 왜 이렇게 소프라노가 잘 되는 줄 몰라.’ 당연히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반주하면서 ‘오늘 반주 괜찮게 됐지.’ 이게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몸이 피곤한지 엉뚱한 것 쳐가지고 본인이 본인한테 짜증이 나고.
이게 인간이 주인도 아니면서 스스로에게 주인행세 하는 이 못된 버릇을 죽을 때까지 계속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약이 필요한데, 이거 <공가>, ‘비어있는 집’에 우리가 들어설 수 없어요. 주께서 우리 안에다가 뭘 하느냐, <공가>를 만들어놓고 이렇게 합니다. “누구든지 무단침입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니가 안 졌잖아? 너가 십자가 안 졌잖아?” 이런 <공가>가 우리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완성에서 나온, 그 주님의 알갱이에서 나온 형체가 오늘날 우리입니다. 성도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대로 완성하신 분은 따로 있는데, 어설프게 따라잡겠다고, 그래서 행운이나 얻겠다고 꼼수를 쓰는 우리들을, 하지만 우리 하나하나가 잠재되어 있는 주의 일의 열매인 것을 늘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