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강-신 15장 7-11절(가난한 자)1606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5장 7-11절입니다. 구약성경 286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네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 지니라”
분실센터가 있습니다. 분실센터에 있는 직원은 사무실 창고에 있는 그 물건들이 어느 것 하나 자기 것이 없습니다. 누가 잃어버린 것을 거기다가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실센터에 있는 직원들은 그 물건이 들어오면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주인을 찾아줘야 되죠. 그 물건은 잠시 자기 눈앞에 보였고, 잠시 자기 곁에 있더라도 그걸 탐을 내면 안 됩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 왔다가 언젠가는 주인을 찾아가야 되겠죠.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입니다. 모든 자가. 가난한 자라는 것은 주인을 발견하지 못해서, 주인을 찾아가지 못해서, 주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의 특징은 자립성이 없어요.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지 않고 보태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처지가 가난한 자입니다. 만약에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자신을 가난한 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느냐, 없느냐로 이렇게 구분이 되죠.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가난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가난을 말하지만, 구약에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 없이도 버틸 수 있는지를,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사람들과 비교해서도 물론 가난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로 그렇게 일괄적으로 다루어서 나온 겁니다. 가난한 자,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가진 것으로 스스로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은 든든한 분이 동행하신다는 뜻이잖아요. 그 든든함을 동행하는 자가 모독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니는 내가 있어 참 든든하지?” 이럴 때, 우리는 “네 든든합니다.” 이러면 되는데, “뭐 이 사람이 제 살림살이에 보태준 것이 있습니까?” 이래 나와 버리면 주님이 든든하신 분이 아니잖아요. 귀찮은 분이죠. 장성해서 결혼한 자식들에게 촌에 있는 부모들이 올라오면서 잘못된 선입관들이 꼭 있어요. 내가 가게 되면 자식들이 얼마나 든든하게 여기고 참 도움 많이 받는다고 고마워하겠느냐.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습니다. 엄청난 착각이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에게는 살던 가락이 있습니다. 오직 있는 것 가지고 항상 현실을 조정하게 되어 있거든요. 조정하고 있는데, 지금 내 현재에 맞춰서 살도록 되어 있는, 하루 스케줄이 딱 맞춰져있는데, 거기에 불쑥 들어와 버리면 리듬이 다 깨지잖아요. 그럼 내가 해야 될 것을 못하게 되면 그건 자기 세계가 파괴되죠. 그래놓고 촌에서 올라온 어른들은 “야야, 내가 올라오니까 참 좋제? 많이 도와주제?” 근데 일상적인 생각입니다.
부모들이 자식 결혼하는데 관여해가지고 니는 그 남자하고 헤어지고 내가 추천하는 골프선수하고 결혼하라고 그렇게 해봤자 딸은 술 마시고 엄마보고 아줌마라고 하고 아버지보고 아저씨라고 합니다. 아이가 다섯에 나오는 드라마이야기입니다. 엄마, 아빠 때문에 내가 지금 태민이랑 헤어져서 못살겠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꼭 부모는 이런 이야기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걔가 중요하냐? 내가 중요하냐?” 이래 나와요. 그 말이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자식이 부모를 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정말 부모가 자식을 귀하게 여긴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는데 동의를 해줘야 진짜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이거는 부모가 자기 라이벌관계가 돼버리면 그거는 자식으로 하여금 더 힘들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을 부모의 욕망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거 참 위험한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부하게 될 것인가 하는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있음이 든든하냐? 라는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부자가 있잖아요. 돈이 많은 사람이 있다 말이죠. 많은 사람이 있으면 필시 하나님 대신 돈을 든든하게 여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라이벌을 뭘로 치느냐 하면 재물로 쳤습니다. 하나님과 재물, 둘 다를 섬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를 중히 여기면 반드시 하나를 경히 여기고, 천하게 여기게 된다.
산에 주인이 하나밖에 없듯이 우리가 섬겨야 될 것도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그 대목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이런 거예요. “니가 홀로 선다고 생각을 하느냐? 그런 경우는 인간에게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안 섬기면 마치 자기 자신을 섬기는 같지만, 아니야 너는 돈을 섬기게 되어 있어.” 세상이 니가 생각하는 그런 진공상태가 아니고 하나님 아니면 악마를 섬기게 되어 있는 그런 성질을 우리 피조 된 인간이 갖고 있는 겁니다. 하여튼 뭐든지 섬기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에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오늘날에 인간도 말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끌어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그거는 잠을 잘 때도 꿈속까지 찾아오죠. 나가라고 한다고 해도 나가지도 않아요. 몇 년 뒤에는 내가 어떻게 되겠는가? 이 불안과 공포, 불안정, 이거는 사람이 홀로 있을 때는 늘 그렇게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온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중지돼야 돼요. 불안과 공포와 이런 것이 중지가 되어야 됩니다. ‘든든하신 분이 계시기에 더 이상 나는 걱정 없다.’ 이렇게 돼야 돼요. 자, 오늘 본문의 내용이 상당히 복잡한데, 간단하게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하나의 연극을 해보는 거예요. 내가 남편하고 살았는데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 그래서 나 혼자 남았다. 근데 토지가 있어서 농사를 짓는데 힘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고, 지어봤자 몇 푼 안 되어 다른 사람에게 그걸 맡겼다. 맡겼는데, 그 사람이 사기를 쳐서 농토를 다 팔아먹었다. 애는 셋이나 되는데, 이제 나한테는 농토도 없고 힘도 없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여 나한테 왜 이런 일을 시킵니까?” 라는 이야기를 할 때 오늘 본문 신명기 15장이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돈 빌려라. 돈 빌리고 약간의 일을 해서 갚아라. 돈을 빌리되 제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에 돈을 빌려라. 그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는 안 갚아도 돼!” 라고 하나님께서 신명기 15장 9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면, 이 이야기를 들은 홀로 사는 그 여인은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아, 하나님이 이렇게 일곱 번째 해에는 돈을 안 갚아도 될 정도로, 돈을 갚으려면 노동이 필요하니까 그 해는 온전히 쉬게 하는구나. 아이구, 감사합니다.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자기 신세가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으면 든든한 게 아니고 남들보다 더욱더 불안하겠죠. 걱정되겠죠. 그렇다면 이거는 돈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애당초 믿음이 없었던 거예요. 재산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 들통이 나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거예요. 자기 힘으로 살만하니까 신명기 15장의 말씀이 나오면, 만약에 나에게 어떤 사람이 돈을 빌려갔는데 가난하니까 일곱 번째 해가 돌아오면, 아주머니 그 돈 안 갚아도 된다고 하면서 여유를 부리면서, 하나님 보세요. 사진 찍어놓으세요.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신명기는 그렇게 접근해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든든한 가운데서 참고로 보는 책이 아니고, 현재 여기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될 경우에, 정작 우리는 전혀 믿음 없음이 발각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신명기 말씀을 준 거예요. 어떤 사람도 여유 있는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그렇게 불편을 주지 않고 부담을 주지 않지만, 정말 성경에서 도와주라는, 그 도움을 받아야 될 처지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여 이런 것 좀 주지 말고 그냥 돈이나 주세요. 성경 주지 말고 돈이나 주세요. 알아서 살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 돼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 가운데 뭘 섬기느냐 하면 재물을 평소부터 사모해왔고 선망해왔다는 것이 들통나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본문이 우리가 되기 전부터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그 자리에서 이동을 시켜요. 바로 아무것도 없는 자리로 이동시켜서 이 성경 말씀과 딱 대면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그런 조치를 하게 되면 무엇이 드러나게 되느냐 하면 처음에 우리가 볼 때는 내가 가난하다. 근데 하나님이 내가 가난하니까 법대로 실시해서 내 이웃사람이 나에게 도움 주도록 하나님이 부자 된 그 사람의 정신을 장악해서, 약간 혼미하게 하든지 해서 나한테 돈 빌려줘 놓고 돈 갚지 말라는 이런 멋들어진 그런 스토리가 전개되도록 해달라는 식으로 우리는 이렇게 상상을 하거든요.
그런 상상은 있지도 않는, 그거는 현실이 아닙니다. 진짜 현실은 우리 개인적으로 잘 먹고 잘 살면 개인으로 만족하는 그 세상이지만, 일단 하나님의 네트워크, 하나님의 체계에 들어가게 되면 이게 개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그제야 밝혀집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나는, 나는 여기 있는데 막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가니까 나는 작아지고 나 사이에 어떤 스파이더맨에게서 나오는, 스파이더맨 알죠? 거미줄. 아까 예배 전에 보니까 이봉창 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두 사람이 모른다고 하는데, 지금 한국교회 문제 있어요. 안중근 의사는 알면서 이봉창은 모른다고. 이봉창 때문에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보호를 받게 되었어요. 안중근 가지고는 되지 않아요. 이봉창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역사적으로.
막상 거기에 가게 되면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어요. 말씀의 교차로 위에 우리가 하나의 작은 지점으로 서 있는 겁니다. 이제는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나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가난하게 만들어서 네트워크에, 말씀에, 하나님의 율법에, 하나님의 언약, 말씀의 시스템, 체계 속에 집어넣게 된 하나님이 이러한 관계망, 고리망을 형성하는 겁니다. 왜 그러 하느냐, 그게 바로 하나님의 동행방법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하나님은 내 옆에 있다, 든든한 아저씨 붙여줬다, 어려울 때마다 도와준다, 이런데, 하나님은 돈을 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말씀을 주셔요. 참 이걸 보면 금요철야기도 참 문제 있어요. 교회에서 금요철야기도 드릴 때, 자꾸 자기 필요한 것을 달라고 밤새 기도하는데, 커피 석잔 마셔가면서,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뭐든지 들어준다고 하면서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준다. 그 뜻이 뭐냐 하면 니가 만약에 일하고 난 뒤에 품삯을 못 받았거든 하나님께 기도해라. 기도하면 받아줍니까?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기도한다고 안 받아줘요. 그러면 뭐냐, 참아라! 왜? 심판 주이신 주님이 문 앞에 있기 때문에. 이거 주는 거예요. 개인이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아쉽고 실망케 해서 실망한 나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 안에 들어가게 되면 실망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도해온 거예요. 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부터 살아야 되니까. 뭐,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살겠습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네트워크가 아니에요. 개인적인 네트워크는.
하나님의 네트워크에 들어가게 되면 개인을 위한 개인은 없고 말씀이 현실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에 말려든 거예요. 말씀의 그 촘촘한 그물망에, 거미줄 같은 그물망에 우리가 말려들어서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현실화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이렇게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땡겼다, 밀었다, 밀당을 하면서 가지고 노는 거예요. 내 팔자, 내 인생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던 겁니다. 앞에 나라는 것을 못 집어넣어요. 주님이 만들어준 팔자, 주님이 만들어준 인생이지, 팔자가 따로 없는 겁니다.
근데 그쪽세계가 아니고 이쪽세계에 와버리면 각자 자기 주먹 흔들고 나만 살면 그만이에요. 사적인, 개인주의 사회로 다시 와버립니다. 품삯 못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노동조합 차려서 품삯 받아주는 것이 아니고, 뭐, 대충 살다 죽어라. 그러면 품삯 못 받은 거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몇 푼 안 되는 거 못 받아도 천국 온 것이 웬 횡재입니까? 하면서 그렇게 좋아할 껄? 그리고 나한테 감사 할 껄? 그 세계가 바로 문 앞에 와 있다는 겁니다. 그 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실망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태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더러버서 못살겠다. 이런 경우가 생생하게 현실감 있게 고백되어져야 하고 이게 자백되어야 해요. 더러워서 못살겠다. 주께서 언제 니더러 살라고 했나? 니만 더러워서 못살겠나? 나도 더러워서 못살겠다.
12제자 보세요. 그분들 다 성령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이 땅에서 터 잡고 산 사람 없어요.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간다. 바이바이하고 그냥 이 세상을 관통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 보세요. 총회장 안 했습니다. 당회장 안 했습니다. 그냥 맞아 죽었어요. 집사로 시작해서 집사로 끝났습니다. 장립집사로 승진한적 없고 장로 된 적 없어요. 집사 됐다가 집사로 끝난 사람이에요. 근데 주님께서 계급 묻지 않고 그냥 받아 준 겁니다.
이러한 신명기의 이야기를 할 때 얼마나 부자들이 그렇게 안타까운지. 부자들이 안타까운 이유가 그 네트워크가 돈에 얽힌 네트워크, 자본에 얽힌 네트워크 속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말은 이렇게 해도 그렇게 되고 싶죠. 주체를 못해서, 돈 처리를 못해서 살고 싶은데... 희망은 있어요. 상대적으로 돈 많고 적고를 따지지 말고 예수님하고 비교해봤을 때 예수님만이 진짜 부자에요.
그리고 사도바울도 똑같은 고백을 고린도후서6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거는 뭐냐 하면 뿌리입니다. 뿌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발 기초를 하늘에 두고 거꾸로 세상을, 그야말로 고공낙하 하듯이, 레펠 훈련하듯이, 머리를 거꾸로 땅을 보듯이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딱 세자로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서비스에요. 서비스. 성도는 이 땅에서 서비스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대가를 바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대가라 하는 것은 이거 얻어서 나만의 독자적인 세상을 형성할 거면 이게 서비스가 안 돼요.
하지만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분실물센터 직원이 뭔가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이거는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주인을 찾아주는 겁니다. “당신 주인은 당신이 아니야. 창조자가 따로 있는데 그 분이 주인이야.” 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늘 평소에 주님이 든든해야 해요. 니들이 믿는 그거 의지 않고 나는 주님만 믿고 살아가기 때문에 아낌없이 이런 주인 찾아주는 그런 서비스에 대해서는 내가 아낌없이 없이 해 줄 용의가 되어 있다.
베드로, 요한이 성령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베드로, 요한의 뿌리, 근본을 모르고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거예요. 돈 달라고. 참, 이거 우리교회 거지가 오지도 않지만, 교회 보고 안 오겠지만, 혹시 자주 온다면 표어를 아주 크게 붙이는 제안을 하나 하겠어요. “금과 은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주는데, 당신은 금과 은을 원하면서 살아가지만, 사도베드로나 요한은 금과 은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삽니다. 그거 줄까요? 말까요?” 사실은 돈을 쟁여놓고 살면 그거 참 얄밉죠. 돈 한 푼 주는 것이 아까워서 괜히 예수 핑계 대는 것을 느끼지만 그래도 완전히 배짱 튕겨야 해요. 금과 은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을 주노라.
쉽게 말해서 너가 남들 보기에 가난하기 때문에 돈을 원하지만 니 주인이 볼 때 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얼개, 얽히고설킨 말씀 때문에 가난해야 하고 앉은뱅이 되어야 하는데 때가 되면 이제는 너를 앉은뱅이에서 일어나게 하셔서 지금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당신의 인생을 그렇게 꼬이도록 인생을 살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뭐 꼬인 것도 아니에요.
이러한 것은 바로 가난과 부자에 대한 우리의 전면적인 개념 교체를 이야기한 거예요. 주일학교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거든요. 제자들도 봤습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이 정상이냐, 아니면 물에 빠지는 것이 정상이냐, 사람들은 물에 빠지는 것이 정상이라고 보죠. 그러나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왔습니다. 완전히 우리의 개념을 바꿔버려요. 베드로가 뭣도 모르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갑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기가 찬 거예요. 예수님을 그렇다 치고 어떻게 같은 신입사원인데, 같은 제자인데 왜 이렇게 물 위를 걷느냐 이 말이죠. 엑스맨 아포칼립스 같이, 그야말로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가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뭔가 문제 있다는. 근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가다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지금 물 위인지 땅인지 모르고 그냥 주님만 바라보고 걷다가 밑을 보고는, 본인 스스로 내가 지금 이래서는 안 되는데 했을 때에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이 이야기해요. “니는 왜 니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느냐? 현재 니가 물 위를 걷든 땅 위를 걷든 니 자체가 나만 바라본다면 니 자체는 내가 일부러 설치한 장치였다.” 의도적으로 설정한 거예요. 뭔가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면 그게 정상이라는 것을 위해 잠시 베드로를 물 위를 걷게 한 겁니다.
지금 우리의 주어진 모든 입장이 다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물 위를 걷는 입장이에요. 근데 우리가 ‘인생 이래 살면 안 되는데..이래 꼬이면 안 되는데..’ 하는 동시에 주님을 놓쳐버리면 그때부터 스스로 공포와 불안감속에서, 물속에서 죽는 게 무서워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은 무엇과 가까우냐 하면 바로 뒤에 죽음과 가까워요. 부자는 뭐와 가깝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영생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돈 많으면 하나님과 가깝고 가난하게 되면 지옥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바꿉니다. 어떤 식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분으로 이 땅에 오신 방식으로 신명기 15장을 이루어버립니다. 나는 가난해도 아버지가 든든하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마귀가 시험했던 그 원리원칙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니가 얼마나 가졌는지, 또 얼마나 도와줬는지 관계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이 모든 형편이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작된 그런 상황인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 자체가 주님과 더불어서, 가난하나 부한 자요, 없으나 있는 자요, 죽은 자나 산 자로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자와 가난이 이렇게 상쇄되는 것이 아니에요. 더 쉽게 말해서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상태에서 돈이 생기면 부자가 되는 그런 관계로 부자와 가난이 엮어지지 않습니다. 가난은 어떤 경우에도 가난은 없어요. 왜냐하면 부자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이상 가난은 없습니다. 가난은 부자하고 만나는 것이 아니고 부자 위에 숨어 있는 부자로서 이 땅에 가난한 게 있는 겁니다.
따라서 항상 예수님 앞에서 “이 모든 돈은 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돈입니다.” 라고 가난한 모습을 띄게 되면 그 모습이 바로 예수 안에서 부요한 자입니다. 걱정되어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만, 혹시 누가 여러분 보고 돈을 빌려달라고 하거든, 아까 여러분이 잊을 수 없는 말을 했지요. “내게는 금과 은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그냥 가난한 채로 사세요.” 라고 하는 것이 그게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남한테 하지 말고 매일같이 본인에게 해서 “주여, 이 돈 다 날아가도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는 말로 전환시키기 바랍니다. 이거 반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생각 안 하고 돈 많은 사람 쳐다보면서 짜증내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힘들고 제자들이 무엇을 위해서 살았는지 이제는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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