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6a 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인간의 한계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40장 1절부터 읽어볼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정월 초일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또 증거궤를 들여 놓고 또 장으로 그 궤를 가리우고 또 상을 들여 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 등대를 들여 놓고 불을 켜고” 그리고 9절에 보면, “또 관유를 취하여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루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이것은 이해의 도를 넘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이란 하늘에 속한 것인데 어떻게 땅의 것과 결합이 되느냐? 결합되는 방법이 뭐냐?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거룩을 이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있느냐?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컵을 거룩하게 한다면 그 순간 거룩하게 되는데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아무리 요모조모 봐도 거룩하질 않아요. 전에 봤던 컵이기 때문에. 똑같은 컵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렇게 적겠습니다. [거룩이 세속에 포섭되었다.] 포섭이 됐다는 말은 섞여버렸다. 여기 1절에 나오는 정월 초일일, 이건 새로운 시간이죠. 1월 1일. 그 다음에 회막 세웠는데 이 전체가 성막이고, 성막 안에 성소가 되고 지성소가 되는 겁니다. 성막은 원단이 세마포로 돼있어요.
세마포가 거룩합니까? 거룩하지 않지요. 옷이 뭘 거룩해요. 거룩이란 하늘에서 주어져야 되는데 옷감 하나가 땅에서 나오는 열매로 실을 만들었잖아요. 어느 부분부터 거룩이 돼요? 땅부터 거룩합니까? 땅도 거룩하지 않고 세속이고, 땅에서 세마포, 쉽게 말해서 천을 만드는 식물이 거룩하지 않지요. 그럼 실을 뽑아내는 아줌마의 손톱이 거룩합니까? 안 거룩하지요.
여러분들이 뜨개질하는 손이 거룩합니까? 만약에 스웨터가 거룩하다고 했을 때 우리는 추적에 들어가는 거예요. 스웨터를 짰던 실이 거룩할 것이고, 실이 거룩하게 되면, 거룩한 실과 거룩하지 않은 실이 외형적으로 차이가 분명히 나야 되잖아요. 그런데 구분될 수 없지요. 제자장의 발톱이 거룩해요? 목사의 가방이 거룩한가요? 목사의 가방은 명품인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으로도 거룩을 대신할 수 없는 입장이 세상인 거예요. 세상은 그냥 세상입니다. 세속은 세속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속된 것을 거룩하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필히 거룩한 것이 세속에 포섭이 되고 섞인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재배치와 조립을 통해서 가능한 거예요. 여기에 상을 들여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 등대를 만들고, 이것은 원래 성막이 아니면 딴 자리에 있을 거예요. 그걸 이쪽으로 이동하니까 거룩한 공간에서 거룩한 테이블이 된 거예요.
보통 이렇습니다. 땅에 살 때는 더러운 겁니다. 그런데 죽어서 천국 가면 천사되잖아요. 천사 같이 되면 우리는 그걸 거룩이라 합니다. 천사는 날개도 있고 너무나 깔끔하고 깨끗하고 흠 없고 해 같이 빛나고 화려하고 누가 봐도 외형적으로 거룩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천국 갔는데 거기에 거지가 있더라. 자, 묻습니다. 천국 간 거지는 거룩한 거지입니까, 더러운 거지입니까? 거룩한 거지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거룩하냐, 안 하냐는 그 사람의 외형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로 결정되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그건 상식으로 괜찮은 장소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고 아는데 출애굽기 40장에 나오는 성막이 설치된 장소는 가봤자 흙, 자갈 있고 풀 나고 잡초 뽑아야 될 것이고 텐트 철거하면 다른 장소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장소에요. 어딜 봐서 거룩이냐는 말이죠. 이리보아도 저리 보아도 거룩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거룩이 아닌 것은 거룩 되게 했다는 말은 거룩이 변장해서 스며들었다는 것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증거궤가 아카시아 나무에 금박 입혔거든요. 그걸 분해해봅시다. 그럼 아카시아 나무는 전혀 거룩하지 않아요. 흔히 빠진 아카시아, 오월 되면 향기 날리는 아카시아, 그게 뭐 거룩합니까? 그냥 자생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거기에 금박을 입혔거든요. 아카시아 나무와 금, 둘 따로 놓아도 거룩하지 않아요. 그럼 아카시아에 금박하면 거룩합니까? 마찬가지로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걸 곽을 짜서 상자를 만들었어요. 거룩합니까? 전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성소에 갖다 놓으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다는 이야기한 거예요. 물론 여기 9절에 보면, 관유를 뿌리게 돼있는데 어쨌든 관유를 뿌려서 거룩한 상자가 된다 이 말이죠.
우리는 거룩이 보고 싶어서 거룩이 얼마나 다른지 보자, 해서 보게 되면, 저건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문젠데, 그러면 인간 손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거룩이 됐다면 다음에 우리가 또 만들면 되겠네. 똑같은 상자를 만들면 거룩이 될까, 안 될까? 이런 생각도 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거룩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이 것이 이 땅에 세속이란 걸 통해서 들어오면 우리 능력으로 세속과 거룩을 구분할 수 있는 그러한 기능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은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착하게 살면 거룩이고, 나쁜 짓하면 살면 세속이라는 그런 구분 자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평범하게 아카시아 나무처럼. 가끔 너무 허전하거든 손에 금가락지 껴보시든지.
세속 덩어리로 살아도 주께서 관여하시면 거룩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예수님이 거룩한 자태는 그렇게 이 땅에서 세속의 모습으로 자신의 거룩을 지탱했고 지켜냈고 그걸 유지했고 지속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은 별난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아주 놀라운 우리와 격이 다른 그런 분을 기다렸건만 정작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은 세례 주는 세례요한도 못 알아봤어요. 성령이 오니까 그분이 그분인줄 알았지 너무나 평범해서 못 알아봤어요. 심지어 세례요한 옥에 갇혔을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다 성도라고 한다면, 이 가운데 거룩한 성도가 여기 있어도 우리 능력으로 골라낼 수 없어요. “뭐 하십니까?” “장사합니다.” “에이, 세속이네.” 이렇게 판단할 수 없어요. “뭐 하십니까?” “목사입니다.” “아이고, 거룩하네.” 이런 판단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다시 새로운 문장을 적겠습니다. 세속의 창문이 거룩의 창문이 되는 겁니다. 거룩은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는데 세속적인 창문을 이용하죠. 창을 통해서 거룩이 뿜어져 나오는데 우리 보기에는 세속이 뿜어내는 모양새와 전혀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거룩이 세속을 대신하기 때문에 그래요. 대신한다는 것은 똑같은 것으로 바꿔치기, 교체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거룩한 몸이죠. 그러나 외형적인 모습은 거룩합니까? 우리는 밥 먹을 때 예수님은 이슬 잡쉈습니까? 제자들이 침대에서 잘 때 공중부양하고 그랬습니까? 그냥 똑같아요.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릴 때 튕겨 나왔어요? 때려도 흉터도 없어요? 창으로 찔렀는데 피 안 났습니까? 피 났잖아요. 제자들이 봐도,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봐도, 누가 봐도 평범 그 자체, 너무나 평범해요. 거룩할 거리가 없어요.
성도가 되어 성경을 본다. 이게 거룩한 행동일까요, 아니면 아무 때나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평가에 의하면 성경 그까짓 것 아무 때나 볼 수 있어요. 성경 보고 은혜 받는 것이 아무 때나 할 수 있어요, 안 그러면 뭔가 다른 요소가 있는 겁니까? 성경 보기만 보면 은혜 되는 겁니까? 대부분 잠만 오지요. 자다보면 침 흘려서 다 들러붙고.
좀 더 그 범위를 확대시켜봅시다. 아침에 숟가락 들고 밥을 먹는다. 이게 거룩입니까, 세속입니까?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하나님은 이렇게 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능력을 주고 은혜를 줘야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치매 걸리면 벌벌 떨면서 다 흘리고. 발걸음을 센다는 것,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센다는 것, 헤아릴 수 있으니까 아무나 할 수 있네?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은혜 줘야 숫자가 다섯 개인지, 여섯 개인지 안다는 겁니다.
이걸 아는 게 거룩이에요. 거룩은 너무나 막 살고 보통으로 살고 평범하게 사는데 그걸 거룩으로 보는 안목이 거룩이고, 그걸 세속으로 보는 사람이 세속 그대로 머무는 겁니다. 오묘하지요. 어디 천사 열댓 마리 등장하고 하늘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다니엘서처럼 손목 잘린 손이 벽에 글자 쓰면 거룩이고, 중국에서 눈 덮인 곳을 찍다 보니까 예수님 형상 나오고, 소련에서 어떤 비행사가 보니까 구름 사이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십계명을 지켜라, 이런 게 나와야 거룩이고, 아니면 시카고 어느 동방교회의 성화에서 기름이 떨어져서 만병통치가 되고, 그게 거룩일까요? 그게 바로 거룩을 위장한 악마의 작당이에요.
우리는 너무 거룩을 조작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을 거룩의 가공이라 하는데 거룩을 자기가 임의대로 만들어내요. 거짓으로. 그러면 그 거룩의 출발점은 어디냐? 세속에서 출발된 거룩이기에 그 거룩도 세속과 같은 범위 안에 있어요. 그 거룩도 사실은 세속이에요. 인간은 내가 사는 지저분한 세상 말고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 상상의 극한,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천사 같은 그걸 거룩이라고 연상하고 상상을 해대요.
그래서 자기가 상상한 대로 뭔가 깨끗한 게 오게 되면 바로 내가 기다렸던 거룩이야, 라고 하는데 꿈에 그런 경우가 많아요. 꿈속에 허연 영감 나오면 예수님인 줄 알고, 꿈속에 시커먼 것 나오면 마귀인 줄 알고. 지 혼자 놀라고 지 혼자 은혜 받고 난리 나는데 우리가 설정한 그런 배열 그러한 조건에 맞아 떨어지는 것은 거룩이 아닙니다. 진정한 거룩은 내가 아무리 사전에 기대해도 기대치를 넘어선 예상 밖의 거룩이 덮칠 때만 거룩이 되는데 어떤 경우가 그러냐 하면, 숟가락 들고 미역국 떠먹는 이것마저도 주의 은혜로 된다는 그 관계성을 가질 때 거룩이 되는 거예요.
해가 뜨는 것이 거룩일까요, 아닐까요? 성경에 보면 거룩으로 돼있어요. 달이 지는 것, 별이 반짝이는 것. 하나님께서 욥에는 하는 말이, 네가 별 만들 때 있었느냐고 묻지요. 우리가 지금 거룩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 거룩은 안 보고 인공적은 높은 건물, 아파트 그런 것만 본단 말이죠. 저게 얼마나 할까? 그리고 화려한 차, 벤츠 같은 차 그런 걸 보지요. 타고 싶다.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 되어서 창고 지었는데 흐뭇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말라 할 때 주께서 그날 밤에 그 영혼 데려가면 저것이 누구 것이 될 것이냐고 했지요. 그 이야기를 주님이 우리한테 한 게 뭡니까? 창고 뭔가 쌓이더라도 또는 은행통장 잔고가 넘치더라도 그걸 거룩으로 볼 수 있는,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안목으로 통장에 돈을 모아놓으란 말이죠. 그 영혼이 거룩한 영혼이기 때문에 오늘밤 데려가도 기분 좋지요. 감사하지요. 내일 데려가면 하루 더 살면 되고.
바로 그 마음가짐 자체가 바뀌어야 된다. 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예상 밖의 모습으로 우리 인생 속에 스며들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룩이 세속이 못 하는 방식으로 이미 세속들이 있는 곳에 거룩이 들어왔단 말이죠. 누가 알아봤을까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왜 그렇게 했느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채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써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 알아챘어요. 하나님은 아무도 못 알아보는 방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아무도 못 알아보는 방식으로 우리를 건지시고 구원하신다. 심지어 구원받는 자도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서 미리 예측하거나 기대하거나 손댈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해요. 내가 나 된 것은, 그것까지만 하면 돼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다 알지만, 왜 내가 나 된 것은, 이라고 괄호를 넣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사실을 내가 믿잖아요, 라는 세속적인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가 나 된 것은, 그럼 하나님께서 그 뒤에 있는 말해 봐? 전 더 이야기 안 하렵니다. 내가 나 된 것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나 된 것은 결코 내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시작을 내가 나 된 것이란 말을 주님 앞에서 끄집어낸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나 된 것이 나라면 이걸 다시 새길 이유가 없잖아요. 봐. 내가 이만큼 잘 된 거야. 이러면 끝나는 문제지 새삼스럽게 내가 나 된 것은, 더 이상 말 안 하겠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예측한 대로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계획한 대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거룩이 이 땅에 자리 잡기 위해서 허접스러운 우리의 육신을 사용했다는 고백입니다. 네가 나한테 거룩의 폼 잡고 오지 말고 거기 있어. 내가 갈게. 내가 네가 무슨 짓을 하던 네 자리를, 네가 더럽다는 걸 알지? 하지만 더럽다는 그것마저도 거룩한 것으로 사용할 테니 그 자리에 가만있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 되기 전에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는 일을 했지요. 사도 바울이 회개하고 구원받았습니까, 반성하고 구원받았습니까, 자기 행동에 자책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사울은 한참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해요.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을 했잖아요. 그건 누가 봐도 세속적인 일이에요. 거룩을 핍박하니까. 그런데 그 일마저도 주께서 거룩한 일이 스며드는 환경으로 채택했단 말이죠. 주님이 그 일로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옛날에 그런 짓한 것은, 같은 말이죠. 예수 핍박한 짓을 한 것도 주님께서 예상하지 못한 거룩을 세속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들어 사용했습니다.
더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하던 대로 사세요. 성경 안 본다고요? 보지 마세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감당도 못할 걸 보다 침 흘리고 하지 마시고 하던 대로 하세요. 지금 내가 하는 것조차 나 된 것은 주의 은혜 속에 포함시켜버리세요. 라디오를 틀면 우리 젊을 때는 <별이 빛나는 밤에>, <꿈과 음악 사이에> 할 때 디제이가 음악 틀어주고 사연 읽고 하잖아요. 그런데 디제이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뒤에 스텝들이 있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안 들려요. 별이 빛나는 밤에서 들리는 것은 이문세 소리밖에 안 들려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주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스스로 뽑아내는 음성, 모양새만 드러내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 보기에는 세속적인데 주님의 고유 권한으로 뽑아내는 겁니다. 주님께서 별이 빛나는 밤에, 듣고 계시는 거예요. 우리 보기에는 울산 꼬라지가 전혀 거룩한 게 없는데 주님께서는 자기 거룩을 모든 움직임 속에서 충분하게 실패 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서 뽑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안목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어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오케이가 돼요. 영화 촬영할 때 감독이 마음에 들면 오케이 하잖아요. 그렇게 주께서 오케이 하는 거예요. 예수님 태어날 때 빈들이 있었고, 거기에 목자가 있었고, 천사가 와서 찬송가 불렀고 조명이 환하게 비췄고. 목자가 한 게 뭡니까? 그냥 새로운 환경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케이 싸인 낸 겁니다.
열왕기상 17장, 구약성경 545페이지에요. 길르앗 우거하는 중에 엘리야 그 당시 북쪽 왕 아합한테 쫓기는 그 대목입니다. 쫓기며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데 참 세속되지요. 여기에 거룩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의 오케이 싸인을 어떻게 내는지 보세요.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라히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가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기 시냇물을 마셨더니”
이 장면을 다른 사람이 봤다면 엘리야 신세가 속 편하게 호강한다고 봤겠습니까? 엘리야 입장에서 어제까지 까마귀가 떡을 물고 왔잖아요. 기적이라고 합시다. 기적의 문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한 번 오면 또 온다는 보장이 없는 게 기적이에요. 그러면 한 번 기적을 맛보고 그 다음에 또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기적이 열 번, 스무 번 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불안도가 더 심하지요. 사람이 기적만 기다리는 가장 끝장난 삶의 환경을 상상해보세요. 비참합니다. 차라리 내가 나서고 말지. 까마귀 저게 뭘 안다고? 울산에 까마귀 몰려올 때 엘리야 같이 기다리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사람은 절대로 기적은 고마워하지만 두 번, 세 번 기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나서는 것이 속 편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속 편한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엘리야는 북쪽 이스라엘이 완전히 가뭄이 든 그 이후 상황을 미리 앞당겨서 엘리야에게 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뭄이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엘리야에게는 벌써 찾아왔어요. 그러면 가뭄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전혀 못 산다는 것을 엘리야 선지자가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게 거룩한 삶이에요.
그러면 반대말이 뭡니까? 자력으로 내가 날 살리는 것이 세속적인 거예요. 아까 그냥 사는 대로 살라고 했는데 그건 거룩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귀 담아 들었으면 이런 의문이 생길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매일 나 하는 대로 해도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걸 준 것처럼 나에게 힘주신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절대로 내 힘대로 살 수 없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미리 앞당겨서 대외적으로 증인으로 보여주는 삶을 주께서 거룩한 관계 속에서 실시하는 거예요. 그러면 울산의 엘리야가 여러분입니다. 오늘 제목을 울산의 엘리야들이라고 할까. 참 제목이 부끄럽다만 하여튼. 자력으로 내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세속밖에 없기 때문에 거룩은 어림도 없지요. 아무리 천국이라 해도 그 천국마저 세속이고, 아무리 천사를 그려도 그 천사마저 세속이고,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세속입니다. 그런데 뭐가 거룩이냐? 내가 거룩을 상정해도 세속이 된다면 우리 힘으로 거룩을 상상해도 가짜가 돼요. 가뭄 된 거고 엉터리고.
그런데 엉터리인 그 세속이 주께서 거룩으로 바꿔준다면 우리는 예상 밖의 상황을 맞이한 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세속인데 그걸 거룩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게 대신하심입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너의 죄를 대신하심이거든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우리가 사는 현장 속에 뛰어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살면 아파트에 뛰어들고 전세방에 살면 전세방에 뛰어들고, 월세 살면 월세에 뛰어들고 오두막에 살면 오두막집에 뛰어들어요. 주여,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부엌도 없고 너무 허름한데 어찌 오신다 하십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보기엔 세속이지만 내가 보기엔 거룩이야. 그냥 뛰어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궤고 성막이고 성소고 그런 거란 거죠. 40장 이야기가.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메커니즘, 어떻게 세속이 거룩으로 바꿔지는지 이야기 안 하고 미루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가 세속으로 보는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거룩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속 따로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을 주께선 거룩으로 간주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기도할 때는 거룩이고 기도 안 하면 세속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헌금하면 착한 일이고 헌금 안 하면 나쁜 일로 생각하지 마시라고요. 우리가 교회 오면 성령 받고 교회 안 오면 성령 못 받는 걸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또 말씀드릴게요. 대체했기 때문에. 표정들 보니까 이해 안 되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지금 인간들이 세속적인 더러운 냄새를 풍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선 거룩을 따로 만든 게 아니고 땅의 세속적인 것이 거룩의 재료가 되는 거예요. 아까 법궤 만들 때 흔히 있는 아카시아 나무고, 금이야 땅 파면 나오는 것이고. 그런데 아카시아 나무와 금으로 언약궤를 만드니까 하나님이 그걸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 되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거룩은 따로 없어요. 세속을 조립하고 재배치해서 거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방법이 대신하심이에요. 다른 말로 대체, 바꿔치기하는 것. 대체가 어렵습니까? 바꾸는 것, 바꾸는 거예요. 너는 내 것이라고 바꾸는 게 아니고 내가 네 것이 되어 네 것 속에서 거룩을 유발시키면 주님이 세속에 들어와서,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서, 같은 말이에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울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같은 말이에요. 들어오셔서 세속 가지고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세속에다 거룩을 담으면 이 전체가 거룩이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서 마지막에 어딜 가시느냐 하면, 십자가 지고 가셨단 말이죠. 십자가는 죄인으로 죽어서 아버지로부터 부활의 영으로 말미암아 의인되는 그 내용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께서 그렇게 마무리 지은 거예요. 그 마무리 되는 그 일을 앞당겨서 구약에 집어넣은 겁니다. 오늘날은 이미 완성된 것을 우리에게 집어넣고. 그러면 더러운 우리 속에서 교환, 교체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더러운 것도 그리스도가 손대면 거룩이 된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작업을 구약 이스라엘에게 앞당겨서 오늘 출애굽기 40장에서 성소 만들기, 성막 만들기를 실시한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이고, 꼬라지하고는? 이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지. 성경 한 장도 안 보고. 내가 한가하면 기도 좀 해야지.” 이렇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는 더러운 일이 되고 조용하게 말씀 듣고 하면 그건 거룩하다고 구분 짓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대체함이 빠져요. 이건 상상한 가운데 가짜 예수지 진짜 예수님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의를 표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시간 내서 성경 보고 하면 아무리 성경 봐도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저도 좀 했습니다. 나 같이 나름대로 생각해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저니까 주님 생각해서 성경 보고 기도하고 헌금하지요.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한 것 알아주세요.” 그게 바리새인이잖아요. 뭐가 빠졌어요? 대체함이 빠진 거예요.
그럼 여러분에게 문제 하나 나갑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요. 그런데 그걸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 하면 우리도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자고 하잖아요. 뭐가 빠졌습니까? 대체함이 빠졌지요. 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웃사랑, 내가 예수님이 하신 말을 통해서 감 잡았어. 이웃사랑이란 내가 이웃을 돌봐주는 것이 사랑이구나. 착한 사마이라 사람처럼 우리가 착하게 자기 여비까지 바쳐서 살리는 게 이웃사랑이구나. 감 잡았어. 이것 내가 할 수 있다고 독자적으로 어떤 행동으로 나서는 순간 대신하심, 대체, 십자가 복음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게 사랑일까요, 자기 의로움일까요? 그게 자기 의로움이고 세속의 극단, 극치입니다. 나 잘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이 널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할 때 그 사마리아 사람과 연결시켜서 우리도 낯짝이 있지 사랑을 그만큼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지. 그게 인간된 도리지. 그래야 성도된 도리 맞지. 은혜 받았으니까 충성해야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럼 은혜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충성하고,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충성해야 됩니까? 도대체 얼마나 충성해야 십자가 은혜와 비슷하게 할 수 있겠어요? 뭔가 보답한다는 것보다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은 없어요.
십자가는 보답하라고 우리에게 나타난 게 아니고 너는 뭘 해도 세속이었다(과거형). 앞으로 뭘 해도 너는 세속이었다, 과거완료에 포함되는 거예요. 앞으로 네가 미래에 뭘 해도 그게 세속이었다는 과거완료에 포함돼있는 미래를 펼치게 돼있는 거예요. 이제 예수 믿고 정신 바짝 차리고 착한 일 해야지. 그게 바로 죄의 또 다른 모습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행할 것은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미리 챙기면 그 죄마저도 주께서 바꿔치기한 이 사랑을 어찌 우리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사랑을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게 되면 그게 바로 이웃사랑이 되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에 있어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고 착한 일을 했다는 그게 이웃사랑이라고 할 때 그 이웃사랑의 진짜 의미는 낯설다는 겁니다. 예상 밖이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강도 만난 사람 곁을 제사장이 지나갔고 그 다음에 레위 사람이 지나갔지요. 물론 강도는 뺑소니쳤고. 이 말은 집사가 오고 장로가 와도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는 사태를 주께서는 예를 든 거예요. 그러면 강도 만난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그 현장에 예수님의 죽으심, 십자가 의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인간이 열두 제자가 지나가도 십자가를 믿겠어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안 믿겠지요. 믿을 수 없겠지요.
강도 만난 사람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조합은 어느 누구도 이해 못해요. 다른 말로 해서 주님이 제시한 사랑은 낯선 거예요. 우리가 예상한 사랑을 전부 비껴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주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말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랑이라고 해봤자 그건 또 죄의 한 면에 불과해요.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에요. 세속입니다. 철저한 세속이에요.
그런데 세속을 바꿔치기한 거예요. 어떤 경우에? 우리가 좀 가능성을 보일 때, 우리가 착할만한 기미가 보일 때? 아니요. 전적으로 세속 되었을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 되었을 때 주께서 우리 대신 죽을 때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이게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게 복음이에요. 일말의 가치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복음을 안 듣고 안 보고 그냥 가버려요. 왜? 자기가 낯설지 않은 예상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내가 피해 본 인생을 빨리 만회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고상한 일을 동원시켜서 내가 거룩한 일을 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내가 기대한 괜찮은 것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내 행동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게 마련이에요. 내가 기도해서 이만큼 우리 가정을 일으켰잖아요. 그때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자기 자신이 뿌듯하지요. 여기에 무슨 대신하심이 있습니까? 잘났는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것을 들으시고, 너는 광야에 왜 나갔느냐 묻는 대목이 나와요. 하는 말씀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누가복음 7장 24절)
여러분이 현재 이 세상, 울산바닥에 살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내 인생 만회해보려고, 팔자 한 번 고쳐보려고요? 무엇을 보려고 나왔습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이, 화려하게 사치하게 고급 옷 입은 그런 사람은 여기 광야에는 없다는 거예요. 그럼 광야는 뭐냐? 너희들이 기대한 것과 어긋나는 분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예상하고 고대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분이 너희를 기다릴 것이다. 그게 누구냐? 세례요한이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그 선지자보다 더 나은 분이 누구냐? 바로 나니라.
그럼 선지자도 예상 못한다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이 자리에 함께 있어도 더욱 더 우리의 예상치를 벗어나신 분이에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몽땅 바꿔치기하기 위해서. 네가 예상한 것에 공통점이 없어요. 이럴 줄 알았어?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살아. 깜짝 놀랄 정도로 완전히 바꿔치기해서 이건 내가 생각한 내 인생 아닌데, 그렇게 교체될 때 그게 바로 거룩한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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