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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말건넴 1603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5. 1. 09:36

2016-03-04 23:43:40 조회 : 347         
말 건넴 160304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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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85) 16-03-08 10:55 
201603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말 건넴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36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36,37,38장은 성막과 그 안에 들어있는 걸 만드는 거예요. 출애굽기를 하면서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다. 이건 굉장히 이해하기 쉬워요. 어떤 민족이 같이 섞여 있다가 분리되어서 나오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그 애굽나라가 작살이 났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나오게 된 그들이 취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자기 집 출입구에 집에서 키우던 어린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그들의 맏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탈출이 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그것이 나중에 약속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약속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의 피는 출애굽 때 처음으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고 그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가정 단위가 아니라 집단적 국가민족 단위에서는 모든 가정이 차이 없이 어린양의 피라는 일관된 그 법칙을 공통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개성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에 응집되도록, 어린양의 피로만 하나님 앞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런 쪽으로 모든 것이 모이게 되는 거죠. 핵심이, 주제가. 인간들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능력, 자질, 솜씨, 아이큐, 인격, 품위, 품격, 가정교육, 그리고 성장환경, 가정환경 등은 다 무시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능력별 격차, 또는 차이도 물론 무시되죠.

우리가 출애굽기 36장을 보고 있는데 36장은 성막 만들기, 법궤 만들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미 출애굽기 12장에서 어린양 피 바른다는 이야기에 흠뻑 젖어서 성막 만들기, 법궤 만들기는 덤인지, 안 하면 안 되는지, 왜 이걸 꼭 해야 되는지,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있는데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으면 되지 십계명은 왜 따로 또 주시는지, 십계명을 무시하면 구원이 안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도 구원이 가능한 것인지 여러 가지 복잡한 논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초반의 어린양이란 것,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대해서 계속해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했다? 그런 것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에 어떤 조치를 취했다? 그런 것도 성경에는 없어요.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어린양 피 주시고, 오늘 본문에 성막 만들기 나가시고 그 다음에 37장에서 법궤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너, 지금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새로 다시 하겠습니다. 출애굽 전체 흐름에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문장에서 액센트는 우리한테 있지요.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했구나.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출애굽 전체를 봐서 어린양의 피로 페인트칠하면 구원을 받는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이란 쉬운 방법으로, 양 잡아서 피 바르면 되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받으면, 그걸 우리가 오해한다면 그 뒤의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끝났잖아. 구원 끝났는데 십계명 왜 주시느냐 이 말이죠. 왜 자꾸 하나님께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혼동하게 하느냐 말이죠.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으면 됐지 않느냐?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았으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되지. 아, 진짜 기쁘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구나. 그게 단순히 오해인데 하나님께 그런 오해할 줄 아시고 우리에게 시비 걸듯이 성경으로 우릴 공격해대시는 겁니다.

구원받았는데 십계명 왜 주십니까? 어린양 피 믿는다 했잖아요. 믿습니다. 십계명 도로 가져가세요. 그리고 성막 만들기 싫습니다. 법궤 만들기, 그 딴 것 필요 없습니다. 어린양 피로 구원하셨으면 더 이상 우리한테 뭘 요구하지 마세요. 되돌리세요. 모세 너도 가고. 우리끼리 재미나게 진짜 막 살 테니까. 구원받았는데 막 살면 어때.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말이죠. 그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몸입니다.

출애굽기 전체를 제가 먼저 말씀드린 것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갇혔다, 어린양 피 때문에 나왔다, 홍해 건너왔다, 십계명 받았다, 시내산 밑에서 모세가 왔다갔다하면서 성막 만들기, 법궤 만들기 그 계시를 받았다. 이 전체가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란 말이죠.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 36장 1절로 설명 드릴게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약간 난해하기 때문에 제가 순서를 적어볼게요. ①사람은 무엇을 만든다. 이걸 증명해보세요. 증명하기 쉽지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계속 만들잖아요. 철 만들지요. 컴퓨터 만들고, 약간 추상적이지만 가정을 만들고, 부부를 만들고, 자식을 자식 되게 만들고. 대통령 뽑기, 뽑는다는 것은 대통령 만들기, 국회의원 뽑는 것은 국회의원 만들기. 대학 만들고, 고등학교를 만들고. 아름다운 고향을 만들고, 고향 어귀에 버드나무 심어서 동산 만들고 산을 가꾸면 산 만들기가 되고, 어장 만들고. 만들기가 별로 어렵지 않지요. 인간은 무엇을 만든다. 무엇에다 아무거나 집어넣어도 다 돼요. 건물 만든다.

그런데 일번, 이것은 신자, 불신자 관계없이 다 하는 겁니다. 이게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복음 아니지요. 약속 아닙니다. 사람은 뭘 만든다가 아닙니다.

그러면 ②하나님은 인간/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만든다. 자, 어떻습니까? 이게 복음이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번과 이번의 차이점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든다고 하면 어디서 나온 의도입니까? 본인의 계획, 본인의 의도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뭘 만든다고 할 때 만드는 인간은 왜 만들어, 하나님은 왜 시키는 거야? 이것 만들라는 것은 예상도 못했네. 궁시렁궁시렁 입이 병 나팔처럼 튀어나와서 왜 이렇게 하는 거야? 불평들을 늘어놓으면서 하나님이 하라니까 해야지.

그게 오늘 본문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성소에 쓸 모든 재료를 만드는 이 계획이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지요. 이건 하나님의 계획이죠. 그러면 일번과 이번을 비교해보자 말이죠. 인간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 필요한 걸 만들어요. 그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붙잡혀서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만들어내는 사람도 따로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36장에 나오는 브살렐과 오홀리압 뿐만 아니고 지혜로운 모든 사람, 하나님께서 총명을 받아 여기에 자발적으로 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 이번에 해당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질문이 시작됩니다. 이번으로 하면 본인이 구원받습니까? 구원 못 받지요. 예를 들면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제자 맞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가가 하는 일이 뭐냐? 그들이 본인들의 일을 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통해서 뭘 만들어요.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를 만든 겁니다. 그 중에 가룟유다가 포함돼있지요. 가룟유다는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서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열두 제자에 포함됐으니까. 그래서 열두 제자가 하늘에서 귀신이 떨어진다고 좋다고 했습니다. 가룟유다도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가룟유다가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일했는데?? 못 받지요.

히브리서 6장에 보면, 사람들이 난해구절이라고 들고 오시는데, 6장 4절에 보면, “한번 비췸을 어도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받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제가 출애굽기 강의하면서 이렇게 했지요. 어린양 피 발랐잖아요. 끝났잖아요. 그런데 십계명 왜 주고 성막 왜 만들라고 하고 법궤는 왜 만들라 하느냐 말이죠.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릴 통해서 뭘 만들고자 하신다. 그러니 열심히 일해야지, 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열심히 성령을 받아서 일했는데 뭘 모르면? 한 번 타락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열심히 일해도 타락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해요. 사도 바울 당시에도 그런 사람 많았어요. 사도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마귀한테 팔려갔다고. 그러면 타락 안 해야 구원받는 거예요. 이 말씀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그게 충족 조건이 아니고, 한 번 받은 사람은 절대로 두 번 다시 타락하지 않을 경우에만 구원이 보장된다. 이렇게 돼야 돼요. 성령의 비췸을 받고, 그게 다가 아니고 타락하지 않아야 구원을 받는데 만약에 성령의 은사를 받더라도 타락하게 되면 그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게 된단 말이죠.

이 이야기를 듣고 평소에 이제는 안전 단계에 들어갔다고 편안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불안하고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네요. 매일같이 타락 안 해야 돼, 타락 안 해야 돼. 그런데 여기에 보면 타락이 무엇이 타락이냐 하면, 십자가가 없는 것을 타락이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 마음이죠. 믿음이죠. 복음이 없는 사람을 타락이라 해요. 그럼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성령으로 일하게 하신다 이 말이에요. 사울이 그랬던 사람입니다. 다윗을 그렇게 핍박했던 사울도 그런 사람이고, 성경에 그런 사람이 많아요.

그러면 일번과 이번은 만족스럽다는 결론이 나왔지요. 그럼 삼번이 필요하겠습니다. ③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진다. 일번은 사람은 무엇을 만든다고 했지요. 이건 매일같이 분주하게 합니다. 가정을 만들고 토지를 개간하고 자동차를 만들고 현대중공업에서 배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요. 이건 인간이 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데 이번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뭘 하신다. 이건 아무나 하는 겁니까, 아무나 안 하는 겁니까? 참 답변하기 곤란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게 아니라 할 것이고 저렇게 이야기하면 그것도 아니라 할 것이고.

이번도 모든 인간이 하고 있습니다. 지옥 갈 사람도 주께서 지금도 부지런히 머리카락을 세시면서 마귀조차도 하나님께서 분주하게 다루시고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일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뭐냐? 현재 인간을 통해서 뭘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내요. 이게 신약에서 말하는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본인의 희망에 의해서 스스로 성도되지 않습니다. 왜 순서를 이렇게 하느냐 하면, 일번에서 이번 나올 때 일번은 뭐냐? 인간은 자기 계획에 의해서 자기 뜻에 의해서 만들고, 이번은 뭐냐 하면, 인생 이렇게 살았는데 다 헛되네.

“신이시여, 이렇게 헛된 인생, 왜 나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는 말은, 지금까지 자기 뜻대로 만들어낸다고 여겼는데 나이께나 먹다보니까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살아가는 걸 보니까 신이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고백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여, 한평생 허무한 인생, 내가 무슨 의미로 살았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럴 때도 여전히 주인공이 누구에요? 나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묻는 거예요. 그게 바로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타락이란 거예요.

이번과 삼번의 차이를 감 잡으셔야 돼요. 하나님 일한다고 자기 혼자 그렇게 된 줄 알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일을 하는데 결국 사람이 죽고 나서든지 죽기 직전이든지 어떤 사람은 알지만 나라는 것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믿는 사람도 감 잡아요. 왜 사는지 모르겠다. 이유도 모르고 살아온 거예요. 한평생 남 흉내 내면서 모방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세 번째는 그게 아닙니다. 뚜렷한 거예요. 일번, 이번은 자기를 인간/사람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삼번 경우에는 인간은 없어요. 흙에서 천국 백성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든 겁니다. 흙에서 만들든지 죄에서 만들든지. 그래서 삼번은 인간을 새롭게 만드는 게 아니고 죄인을 의인으로 새롭게 만들지요. 그러면 삼번이 되려면 일번, 이번이 뭐가 돼야 돼요? 한 마디로 죄가 돼야 되고 살아가는 것이 죄를 만드는 것, 또는 죄를 짓는 것, 죄를 발산하는, 죄를 나타내는 그런 인생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일번, 보통사람들은 방금 이야기한 삼번 체계를 안 받아들여요. 왜? 그걸 몰라요. 누가 자기한테 말을 건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사람들은 오해한 거예요. 피 바르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갈 필요 없고, 요단강 건널 필요도 없고 구원받은 채 애굽에 살면 돼요. 우리가 애굽 사람과 달리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심지어 모세까지도 하나님이 어린양의 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는 생각을 아무도 한 사람이 없어요.

쉽게 이야기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 집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선물을 줬다. 뜯어보니 맛있는 음식이 들었단 말이죠. 그러면 고맙다고 생각하고 얼른 받아들이겠지요. 그런데 며칠 뒤에 길 가던 과객이 혹시 며칠 전에 선물 받은 적 있지요? 받았습니다. 돌려드릴까요? 그런 뜻이 아니고 제가 당신한테 말을 건네는, 내가 여기 있음을 당신에게 알려주는 표시라고 이야기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나도 모르는 내가 생각했던 범위 내에 없는 외부인이 나한테 말을 건네 왔을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를 구원하려 할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렇다는 생각을 누구나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나를 근원적으로 아주 원천적으로 거덜 낸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하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 강의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시비 건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시비 걸기 위해서는 그들의 오해를 유발시켜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는 나의 구원을 위함이다. 십계명도 나의 구원을 위함이다. 법궤 만드는 것도 나의 구원을 위함이다. 나, 나, 나, 나. 그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오해가 여기서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외부에서 말을 건넨다는 것은 나한테 문제 있어서 건넨다는 생각을, 도저히 인간의 타고난 아담의 심성으론 그런 발상이 나오질 않아요. 심지어 복음 전하는 당신은 죄인이라고 하면, 그 말도 오해해요. 내가 죄인인 걸 인정하면 구원받습니까? 또 이렇게 톡 튀어나온다니까요. 어른들 이야기할 때 일곱 살짜리가 밤에 자야 되는데 “아저씨,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톡 튀어나오지요. 그걸 싸가지 없다고 이야기하죠.

주께서 말을 건넨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유 계획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본인을 죄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곧 죽어도 남보다 잘났다는 겁니다. 죽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렇게 죄 짓고 죄인이라 해도 내가 죄인이라는 걸 받아들임으로써 죄를 고백하지 않는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우수한 존재라고 또 착각들을 해요. 쉽게 말해서 자기 이익 외에는 아는 게 없어.

제 이야기는 그겁니다.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어린양 피로 끝내지 왜 십계명 주고, 왜 법궤 만들고, 오늘 본문 같이 성막 만들고 왜 자꾸 말을 건네 오느냐 그 말이죠. 처음부터 어린양 피로 구원 끝. 그러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셔요. 나중에 죽어서 봅시다. 이러면 끝날 문젠데 왜 자꾸 이스라엘을 갈구냐 말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갈랐으면 됐지 거기서 고생 많이 한 사람들에게 이제는 편들고 밥 주고 빵 주고 온갖 것 다 해줘야 되는데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시키고 홍해 건너온 사람들 중에서 두 명 빼놓고 다 죽여 버리고 왜 그렇게 하시느냐 말이죠.

말 건네시는 하나님의 취지와 주의 말을 받는 이스라엘 사이가 벌어져도 너무 벌어진 거예요.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 나는 겁니다. 자신이 만든 것과 하나님이 만드시고자 하는 것과 너무 차이 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나한테 이익 되고자 하는 버릇이 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 버릇은 죽지 않았어요.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은 내가 좋으라고 이 말씀 주셨다고 하는 거예요. 정작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요. 내가 거기에 끼어들 권한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만드시는 이스라엘 백성에 끼어들 수 있고 손들고 내세울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말은 구원받을 자격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기 위해서 십계명 주신 거예요. 이제 여러분 감 잡을 거예요. 십계명 주신 것은 다른 말로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이건 로마서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구약에 안 나와요. 그러니 구약 사람들이 알 리가 있습니까. 십계명 준 것이 멸망한 애굽이나 너나 똑같아. 이걸 누가 알겠어요. 심지어 모세도 몰랐어요. 모세도 나중에 화내고 지팡이로 막치잖아요. 박근혜 대통령께서 화날 때 치잖아요. 뉴스 보세요. 왜 경제에 관한 네 가지 법을 통과 안 시키고, 국회는 문제 있다고.

모세가 성질나서 가리키면 될 걸 지팡이로 치잖아요. 그럼 지팡이를 빼앗아 아무한테나 줘보세요. 바위 안 칠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해요. 아무도 없어요. 전부 다 욱하고 한 성질 다하는 사람들인데 같은 아담의 죄를 받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가 똑바로 해야 구원받는다고 제가 몇 번 이야기했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안 할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학급에 담임 맡았을 때 공부 좀 해. 이번에 우리 반 성적이 꼴찌야, 하고 학생들을 닦달 내겠지요. 우리 반 꼴찌인데 기분 좋지. 다음에 또 꼴찌하자. 이런 담임은 기간제 교사 아니면 내일 퇴직하는 선생이나 하지.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이야기 못하죠. 꼴찌지만 최선을 다하자. 이 정도는 이야기해야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오해라는 겁니다. 무슨 최선을 다해. 최선을 다해서 뭘 얻겠다고. 저주받으라고 준 말씀인데 뭘 최선을 다해요. 최선을 다하는 게 오히려 하나님 뜻을 가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성막 만들기에 기꺼이 헌신하고 뿐만 아니라 3절 이후에 보면 예물을 너무 많이 가져왔어요. 이제 그만 가져오라 할 정도로 넘쳐났어요. 성막 만들고, 법궤 만들기에서. 그리고 8절 보면,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이제는 성막 만들기에 나서게 됩니다.

만들면서 자기가 누군지 성막이 왜 있는지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를 제가 지금부터 해드릴 겁니다. 사람은 뭘 만든다. 여기서 벗어낫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뭘 만든다. 이번에 머물렀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 돼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이건 신약에 와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만드는 게 아니고 인간을 만든다. 하나님은 법궤를 만드는 게 아니고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신약에서야 아는 겁니다.

그걸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표적. 이적과 다른데 표적은 뭐냐? 봐도 모른다는 거예요.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보통 농담 삼아 하는데 주님께선 너를 보고 하나님 믿으란 말은, 네 모습 봐라. 그게 표적이야. 여러분 이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표적이라. 모든 게 표적이란 말이죠.

심지어 표적은 인간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을 봐라, 달을 봐라, 태양을 봐라. 거기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났다. 그게 표적인 거예요. 그게 표적인 의미를 알려면, 하나님 보니 나는 죄인이군요. 이렇게 돼야 표적인데 하나님 보고 인자하심이 발견됩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되면 표적이 아니에요. 보고도 모르는 거예요.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동주란 사람이 있어요.


서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앞에서 나는 죽어야 되고 주께서는 나 같은 인간이 아닌 새로 만들어야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을 윤동주는 몰랐어요. 그저 완벽해지기를 원했던 겁니다. 바람에 이는 잎사귀를 보고 흠 없이 완벽하게 티 없이 살기를 원했다.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오해고, 오늘날 교회가 하는 오해란 말이죠. 나는 너를 만든 게 아니고 나는 하나님 백성을 만드는데 자꾸 우리는 끼어드는 거예요. 제발 너는 빠지고 너 말고 하나님 백성 만들기를 하면서 법궤와 성막과 십계명으로 드디어 새로운 백성 만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어떻게? 기존의 인간에게 시비 걸고 싸움을 걸면서 너는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게 바로 표적의 기능입니다. 보고도 모르겠나? 모르겠습니다. 보고도 모르겠으면 꺼져라. 최고의 마지막 표적은 예수님 자신이겠지요. 예수님을 보고 알아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삼년 동안 합숙훈련해도 몰랐어요. 제자훈련의 한계가 여기 있어요. 아무리 성경공부해도 몰라요.

그 이유를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것이 뭔지 몰라요. 인간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을 욕망 때문에 알게 되는데 문제는 욕망은 있는데 내가 뭘 원하는지 본인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대체 행동, 대체물들이 투입됩니다. 그게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거예요.

사람이 먹고 입고 자고 활동하는 이것은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은 들끓고 있고 정말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대체물로 어디 맛있는 것 없나, 사우나 없나, 구경거리 없나, 앙코르와트 가 볼까, 모험을 해볼까,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에 올라가 볼까? 희망이 있는 한 갑자기 자기 욕망이 만족한 느낌이 들어요. 희열을 느끼죠.

에베레스트 올라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황사현상이 있고 골치 아프고 감기 걸렸는데. 뭐야? 어딜 다녀오고 했는데 욕망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욕망아, 도대체 네가 뭘 원하는 거야? 옷을 사 입어 줘? 멈췄나? 욕망이, 아니~ 젖 줘도 울고. 투정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우는데. 뭘 자꾸 원하는 게 있는 원하는 걸 몰라. 인간은 과정입니다. 욕망이 잃어버린 걸 찾기 위해서 잃어버렸다고 여긴 것들을 집적거리면서 해보는 데 그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잃어버리고 난 뒤에 내 것이 된 인간이, 내 것이 아닌 인간을 찾아가려고 하다보니까 결코 맛있는 음식 먹고 좋아하는 스포츠 즐겨봐야 누워 침 뱉으면 어디로 떨어집니까? 자기 얼굴로 떨어지죠. 결국 자기는 나라는 것만 욕망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라는 것은 원래 내가 아니에요. 찾을 길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히 언약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을 건네 와요. 말을 건네는 순간 그때부터 인간은 짐승처럼 먹는 것, 입는 것만 찾는 게 아니고 타인이 나에게 말을 건네 오면 그 다음부터 말을 건네 온 것에 대해서 화답을 하고 답변을 하려고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앞에 빵이 있으면 먹으면 되죠. 누구한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개나 곰이나 사슴이나 인간이나 똑같아요. 먹는 것 주고 사료 주고 먹는 것은 먹기 전의 나와 똑같이 오기 때문에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누가 어이, 하고 말을 건넬 때 빵 드릴까요, 이건 아니잖아요. 우린 왜요, 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 동물과 다른 주체, 자아가 되는 거예요. 동물에게는 자아라는 게 없어요. 꼬리를 밟으면 반응은 하지만 자아라는 게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할 아담은 말을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에요.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걸어도 우리한텐 욕망이 있지요. 이상하게 짜증나는데 맛있는 잡채를 만들어 먹을까. 아니면 등산을 갔다 올까. 뭔가 미흡한 게 있고 미진한 게 있는데 뭔가 분명히 잃어버린 게 있는데 뭔지 모르겠어. 맛있는 밥으로 때워도 그때뿐이고, 또 아니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 길러 올 때 주님께서 시비 거는 게 뭡니까? 네가 백날 물 길어도 갈증은 해소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사실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리한 요구에요. 왜? 대책이 없으니까. 인간 자체가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데 어떻게 본인이 대책을 세워요. 주님 이야기는 잃어버린 게 있다는 거예요. 제가 잃어버린 게 있다고요? 아니. 네가 잃어버린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잃어버린 것.

그런데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안 찾아오면 물만 길어요. 물은 개도 마시고 닭도 마시고 소도  마시고 다 마셔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그 여인은 예수님께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큽니까, 라고 무슨 답변을 하잖아요. 답변을 하는 순간 그 여인은 뭘 아느냐 하면, 나는 물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언어를 토해내면서 잃어버린 것을 언어의 방식으로 도로 내 것으로 가져와야 만족하는 저 동물과 다른 특수한 존재라고 감잡지요.

아이큐가 50도 안 되는 아이들은 빵 주면 그냥 빵 먹어요. 아이큐가 120만 되도 선생님, 이 빵 무슨 의도 주십니까? 빵을 빵만으로 보지 않고, 빵 안에 당신의 의도 담겨 있지요? 그럼 선생님이, 빵은 그냥 빵으로 봐라. 보통 드라마에서 상견례하면서 이번 결혼 우리 쪽에서 다 할게요. 신부 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처럼 두 말할 틈도 안 주고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해요. 무슨 의도로 우릴 깔보십니까? 좀 깔보면 어때 받아 챙기면 되지.

이건 동물 싸움이 아니지요. 소위 자칭 인간끼리 싸움에서 동물에 없는 요소가 주고받고 하지요. 북한은 미사일로 주고받고 하지만. 언어로 주고받고 하지요. 언어로 주고받으면서 인간은 어디에 말려드는가? 드디어 죄인 되는 겁니다. 말씀이 없으면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되는 거예요. 이 비밀이 언어가 표적인데, 이 표적이 신약에서 밝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되지 않으면 인간은 죄인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뭘 만들어요. 가정을 만들고 토지를 만들고 건물 만들어요. 기껏 교회 나가면 하나님이 날 통해서 일했다. 이 정도에 머무는 겁니다. 끝까지 남은 몰라도 나는 구원받아야 돼, 나는 천당 가야 돼. 이것, 가짜입니다. 어린양 피 바를 때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착각했어요. 전혀 그것, 아니거든요.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양만 구원했지요. 피 흘리고 죽은 어린양을 구원한 거예요. 어린양의 피는 표적이었어요. 아무도 표적을 이해 못했어요. 왜? 인간은 잃어버린 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수요일에 언양에 개척교회 하시는 여자 목사님이 질문했어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했는데 그 죄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죄가 문밖에 엎드리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리라는 그 순간부터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추궁당할 것을 부여받은 겁니다. 끝까지. 너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한테 덮친 죄를 다스리라는 계명을 네가 못 지킬 경우에는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을 건넨 거예요. 가인은 죄를 다스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말은 뭡니까? 동생을 살해하지요.

그래서 죄를 안 짓겠다는 노력이 살인죄를 유발시킨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긴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는 원칙입니다. 착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바로 그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어로 인한 말의 건넴이에요.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살다가 지옥 갑니다. 그게 언약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지요. 그 언약은 말씀, 언어로 돼있어요. 그 언어가 건네 왔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대해 답변하듯이 행동에 나서겠지요. 지혜롭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성막과 법궤를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많은 예물을 했어요.

여러분 알다시피 그들의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지요. 하나님이 건네는 그 말에 대해서 그들은 나름대로 응답을 했어요. 제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게 아까 일번에서 이번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한 패다. 그게 잘못이에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그것으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그럼 일하는 의미는 뭐냐? 일해도 망했다는 걸 시범조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있는데 전에 가인은 살인마가 아니라고 했지요. 가인은 사람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에요. 그냥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과 아무 감정 없어요. 약간 기분 나쁘다는 정도지 죽일 마음은 없단 말이죠. 가인을 살인자로 만들려면 필히 하나님이 개입해야 돼요. 하나님의 말 건넴이 있어야 돼요. 죄가 문에 엎드려졌다는 말은, 문을 여니까 커다란 세퍼트가 있는 상태거든요. 죄가 문 앞에 있는 거예요. 가인이 빨리 기어 나오도록 기다리는 거예요. 가인이 나오면 죄가 덮치는 거예요. 죄가 덮치는 것은 가인의 생각이에요, 하나님 생각이에요? 하나님 생각이지요.

지금 출애굽기 36장에서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건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을 건네는 거예요. 똑같은 원리에요. 하나님이 죄가 문에 엎드렸다는 계획을 가인에게 주니까 가인이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죄가 가인을 다스리게 되는 거예요. 그 과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결과가 동생을 죽였잖아요. 그럼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단 말이죠. 죄를 다스리지 못한 상태가 보통 살인하면 사람을 죽여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동생을 죽였으니까 너도 죽어야 돼, 라는 징벌을 내리신 게 아니고 가인아, 너는 많은 자손을 퍼뜨려라.

그게 뭐냐 하면, 결국 가인의 자손이 퍼지면서 각자 모든 인간들은 죄가 인간을 덮쳤는데 인간은 그 죄를 이겨야 된다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긴 원리가 모든 인류에게 덮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살인자가 되도록 이미 하나님이 계획을 정해놓은 거예요. 그럼 우리가 언제 죽였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살인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말려든 거예요. 그래놓고 무슨 구원을 받아요. 하늘나라 함부로 가는 줄 알아요.

이 말이 뭐냐? 착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살인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호리라도 남기지 않고 다 해결보지 못하면 너희는 지옥 간다. 율법의 하나라도 그것도 늘 지키지 못하면 지옥 가도록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 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계명 보고 바빠서 나중에 지키고 이건 이만큼 지켰으니까 잘했다고 칭찬해주세요. 남보다 낫습니다. 이건 최선을 다해 노력중이고, 이건 나중에 하겠습니다.

주께서 말을 건넨 취지를 모르고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그것이 이미 신약에 답이 와버렸어요. 십자가로써 모든 인간은 살인자로 규정받아 죽었다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안 보고 자꾸 자기를 바라보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분을 품되 해지도록 하지 않고 술 취하지 않고 자꾸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표적이에요. 보고도 못 믿는 거예요. 마지막 표적이 뭡니까? 십자가에요.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4.♡.134.85) 16-03-08 10:56 
201603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말 건넴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한 것은 표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표적은 만드는 종사자도 보고도 몰랐다는 말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성막 만들고 법궤를 왜 만드느냐 말이죠. 그게 자신의 구원의 기쁨으로 만들었으면 자기 아이디어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이 뭘 좋아하실까? 미역국을 좋아하실까? 미역국 끓어드려야지. 이렇게 되면 본인이 의미를 알고 하나님, 저한테 미역국이 맛있는데 주님도 잡사보세요, 라고 드린 셈이 돼요.

이게 토속종교잖아요. 모든 종교가 그렇지요. 사람에게 귀한 것들을 놓잖아요. 요새 제사상에 피자 올라오고 햄버거 올라오는 이유가 제사 빨리 끝내고 자기가 먹고자 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납득이 되는 중요한 이유를 우리가 좋은데 우리가 좋으니까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시겠지. 받으소서, 하고 드리는 거예요.

지금 이 사람들이 법궤 만들고 성막 만들면 하나님께서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은 우리도 성막 만드는데 기분 좋기 때문에 하나님과 한 뜻이 되리라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걸 표적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 건넴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증거가 있어야 될 것 아니에요. 이건 인간들이 자기 구원을 담아놓는 그릇으로 사용하기에 아무 쓸모없는 것들이 성막이고 법궤고 성막에 있는 모든 기구들이에요.

만약에 오년 전에 어느 기도원에서 소나무 뿌리 뽑다가 은혜 받았다면 그 뿌리를 기념수로 심어놓잖아요. 우리는 법궤와 성막을 그런 식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양으로 홍해를 건너 와서 공작시간에 만든 이 귀한 것을 귀히 간직하세. 하지만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에 보면 그 성막, 성전, 법궤 불타버립니다. 없애버립니다. 그건 그림자고 실체가 아니란 거죠. 그리고 그것이 불타버릴 이유가 있어요. 표적을 보고도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들었던 놋 뱀도 같이 불태워지고 심지어 기드온이 승리하고 난 뒤에 기념물 삼아 금으로 만든 에봇도 없앤 것은 이스라엘이 음란하게 섬겼다는 거예요. 그런 걸 음란하게 섬겼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가 구원받을 것을 티내는 기념물들을 수집하고 만들어서 본인의 역사와 가치를 하늘나라, 저쪽 세계까지 가고자 시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의 실상을 생각해봅시다. 십자가가 여기 있을 때 사람들은 십자가 뒤에 뭐가 있는지 궁금한 거예요. 십자가 통고하고 나면 뭐가 있는지 궁금한 거예요.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만 십자가 뒤가 뭐로 구성돼 있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 있는 것으로 구성돼있어요.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십자가에 행한 대로 갚는 사건만 십자가 뒤에 남겨져 있어요. 심판이 있단 말이죠.

십자가 뒤에 심판이 있어요. 심판의 기준은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에 대한 견해, 태도, 의견들로 결정되는 겁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십자가를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바로 지옥 갈 사고방식이란 말이죠. 십자가는 못 믿게 돼있는 게 십자가에요. 내가 십자가를 믿겠다는 말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표적이 납득이 되고 이해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오늘 강의가 어려워지는데 할 수 없지요. 이해해주시고 어려운 것도 해야지요.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 나옵니다. 저쪽은 예수님, 모세, 엘리야 세 명, 이쪽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 3:3으로 변화산에서 만나지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베드로가 하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오해했습니다. 이것도 표적인데 표적은 반드시 오해를 유발하게 돼있어요. 왜? 주님은 표적으로 시비 거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말을 건넴인데 그것은 우리를 파괴시키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생각을 거꾸로 트리기 위해서 오시거든요.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반기고 뽀뽀하고 얼싸안으면 구원되는지 아는데 반대입니다. 주께서 시비 걸기 위해서 말씀 준 거예요.

그런 식으로 말이 건너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게 되고 언약 중에 최고의 언약이 바로 새 언약, 십자가의 피를 얼굴에 튀기는 거예요. 이 피를 보고 주제 파악을 하라고 튀기는 거란 말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세 번씩 확인받잖아요. 예수님 죽고 난 뒤에.

그럴 때 여기 변화산에서 궁금한 게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대화를 한 거예요. 십자가 뒤의 모습과 십자가 앞의 모습을 반복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뭐냐는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는 중이에요. 가만있는 게 아니고 뭔가 이야기를 하더란 말이죠. 이야기한 것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나오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안 나오지만 예수님이 산에서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산 밑에 내려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막9:9)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핵심을 잡았어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게 무엇일까, 라고 돼있어요. 제자들이 웅성웅성. 우리가 이 말 들으면 뭘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제대로 성령 받아서 표적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우리가 진즉에 죽은 자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돼요. 예수님이 죽은 데서 살아났다는 그걸 통해서 그게 표적이니까 죽을 자는 사실은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표적을 이해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그 대화를 했어요. 우리는 진즉에 죽어 마땅한데 주께서 우리 대신 죽지 않습니까? 그 별세가 언제인지 그걸 물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답변하기를 산에서 내려가면 곧 실시할게. 이런 이야기 했을 거예요. 모세와 엘리야와 했던 말 건네는 테마가 그대로 산 밑에 내려와서 질주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표적이거든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한테 말 건넴이란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거든요. 예수님이 나귀 하나 몰고 오너라, 할 때 제자들이 나귀를 몰고 왔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법궤 만드는데 금가락지가 필요하다. 금가락지 빼드리는 거예요. 성막 만드는데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목수가 필요하다. 목수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손 기술 있는 사람들이 하면 되잖아요. 열두 제자가 그런 일을 한 사람이란 말이죠.

그런데 하면서도 결국은 다 도망갔지요. 왜 도망갔습니까? 주님은 같이 죽자고 열두 명 모았는데 제자들은 걸음아, 날 살리라고 살기 위해서 다 도망가 버렸지요. 사실은 그렇게 해서 표적은 오직 예수님과 인간이 합쳐서 표적이 아니고 다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말 건네주십니다. 그러니까 네 실력이라면 내가 너에게 찾아가도 너는 도망치고 내뺄 위인이 너야, 라고 말을 건네시면서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표적이란 결국 아까 일번, 사람들이 뭘 만든다. 이번,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뭘 하신다. 결국 우리 같은 죄인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게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란 걸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번에서 이번, 삼번으로 내려갔는데 표적이 되게 되면, 삼번에서 이미 죄인인 걸 안 사람은 이번을 경유해서 일번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천막을 만들었지요. 천막을 왜 만듭니까? 사도 바울이 천막을 만들어서 구원받았어요? 아니지요. 이미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인 줄 알고 죄인 입장에서 천막을 만드는 거예요. 자비량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가 벤츠를 타든지 아파트를 열 채 갖고 있든지 호화 요트를 갖고 여행을 하든지 뭘 하든지 관계없이 내가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나에게 말 건넨 사실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실 같으면 좀 견딜만하지요. 지지리 못나서 죄인이라 하는 것보다 풍족하게 살면서 “주여, 저 쓰레기입니다.” 그것도 괜찮지요.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벤츠 타시기 바랍니다. 저 쓰레기 같은 벤츠 또 타야 되나. 이런 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타도 쓰레기고 경운긴데, 이런 마음으로 타시기 바랍니다. 첫째 아들에 이어서 둘째 아들이 또 사법고시 합격했네. 저 쓰레기 같은 인간, 뭐 되려고 저 길로 가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란 말이죠. 그게 표적이니까. 아들이 시험에 합격한 게 표적이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말 건네는 표적. 우리는 삼번부터 올라가야 돼요. 우리는 죄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죄인 되도록 아들로 하여금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는 이번을 거쳐서 결국 일번은 뭐냐? 내 아들이 판사 일을 행한다는, 사람이 재판을 만든다. 그 일에 종사하는 거예요.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어요. 결국 내가 표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표적인데 그리스도 몸에 합쳐 지체가 되면 우리는 뭘 해도 우리 자신은 주님을 증거하는 표적이 되는 겁니다. 이번에 아들이 사법고시 합격했다면서? 그것도 쓰레기라고 할 때는 그들은 내 아들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내 입을 통해서 분명히 우리 아들은 쓰레기라는 말을 건네받음에도 불구하고 그쪽은 그 표적의 의미를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그게 전도입니다. 전도하기 참 쉽지요. 땅을 사놨는데 열 배 올랐어요. 저 쓰레기 같은 땅 어떻게 처분할지 몰라. 이게 선교라니까. 그냥 살아가면 선교가 돼요. 삶 자체가 선교가 돼요. 전도고. 어차피 주께서 날 통해서 말 건네주거든요.

디오게네스란 철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좀 별나요. 이 사람은 대낮에 등불 들고 번잡한 거리를 헤맵니다. 사람 찾습니다! 어디 사람 있으면 알려주세요, 라고 외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후대 철학자들이 분석했어요. 인간 같은 인간을 자기가 찾겠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나를 찾습니다. 진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에게 말 건네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 등불을 어두운 내 쪽에 비췄던 거예요. 조명을 비춥니다. 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있으니 누가 나에 대해서 일러줄 말이 있고 내가 누군지 알려줄 말이 있다면 오셔서 내가 누군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그리스 철학이에요. 네 자신을 알라. 문제는 던져놨는데 아무도 답변이 없었어요. 왜 그럴까요?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인 것을 그들은 그걸 문제로 오인했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되지? 이게 답인지. 어떻게 살면 되느냐고 불만과 걱정거리가 나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자기에게 자기가 절망하도록. 왜? 절망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뭐냐? 나는 절망 안 해야 돼. 절망 안 할 때 내 욕망은 만족스럽다고 하잖아요. 절망하지 않으면 만족스럽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뭘 잃어버렸는지 몰라요. 욕망은 잃어버린 걸 지향하고 찾아가는데 도대체 뭘 잃어버렸는지 모른다니까요. 그러니까 골프 쳐보고 테니스도 치다가 이런 직업, 저런 사업, 온갖 것 다 해보지만 욕망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고 계속 다른 데로 얼굴 돌리고. 그것 아니거든요. 그것 말고. 난 어떡하면 좋아. 죽을 때까지 해봐야 내가 뭘 원하는지 뭘 잃어버렸는지 몰라요. 그러나 성도는 압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하신 표적이란 것, 이 땅에 성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게 마땅하다는 것, 나 아닌 주님이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자, 이번 시간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해봅시다. 8절 봅시다.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앙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배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지요? “그룹들을 무늬 놓아”

보통 커튼이나 벽지에는 인간 세계에서 익히 정이 가는 무늬들로 수놓아 있습니다. 여자들이 십자수 놓는다든지 반복해서 수놓을 때 테마가 익히 아는 문양이죠. 그런데 성막의 문양이 뭡니까? 그룹, 천사란 말이죠.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성취성을 이야기해요. 이미 완성, 성취됨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러면 굉장히 쉬워져요. 성취된 것은 따로 마련돼 있는데 성막 자체가 모였다. 표적이었다. 표적 속에 이미 성취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지금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수놓으라니까 무조건 수놓았는데 하나님이 시킨 대로 수놓는다고 그 사람이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표적에서 진짜 진리를 뽑아낼 줄 알아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백날 수놓고 지옥 가는 수가 있단 말이죠. 지금 뽑아낸 의미를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룹이 성취성 또 완성이에요. 언약 완성. 천사가 새겨져있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손은 소용이 없다. 나는 죄인을 필요로 하지 죄인의 도움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한번 물어봅시다. 아벨이 양 새끼로 제사 드려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로 피로 구원받은 겁니까?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죠. 그렇다면 아벨의 제사는 아벨의 양 새끼 받은 걸로 끝나지 않고 양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쳐야 되느냐 하면, 아벨은 사람 몸이고 양 새끼는 양의 몸이죠. 양의 몸의 의미가 어디까지 번져가야 되느냐? 양을 바친 아벨의 몸까지 바쳐서 아벨의 몸이 제물이 될 때 그 기능은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양을 바친 게 아니고 아벨은 예수님 안에서 자기 몸을 바치도록 주변 상황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렇게 몰아가신 거예요.

가인 또는 가인들(가인의 복수) 그들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죄를 다스리는 일을 하죠. 그 죄를 다스리는 일을 하면 할수록 그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거저 건져주시는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 쓰고 죄를 다스리는 착한 짓하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서 오해받아 살해당하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어나겠지요. 수요일 설교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벨이 본인 구원에 한 게 뭐냔 말이죠. 한 게 없지요. 아벨이 온전한 제사 드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치는데 자살했습니까? 형한테 맞아 죽었지요. 그러면 아벨이 온전한 제사 드리는데 자기를 때려죽이는 형이 도움이 된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평소에 갖고 있던 스데반의 본질은 누가 도와줬느냐 하면 짱돌 들고 덤벼들었던 유대인들 때문에 스데반이 품고 있던 성령충만의 내용이 드러난 겁니다.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달라고 하지요.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성도 자체가 표적이죠. 이 표적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성도 아닌 자들의 막강한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이단들이 필요하고 마귀 들린 자들이 필요하고 복음 모르는 자들이 필요하고. 그들의 공통점은 자기 속에 죄를 착함으로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살인강도도 돈 벌면(?) 도망치면서 거지한테 동냥할 줄 알아요. 금은방에서 보석을 훔쳐 나오면서 불쌍한 사람 있으면 금시계 하나 던져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가치를 나쁜 쪽으로 몰아가지 않고 자기 판단과 선택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아직도 나는 가치 있다. 그게 모든 인간의 선택을 결정짓는 동기에요.

내가 나의 가치를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행동에 나서고 생각하게 돼있어요. 선을 많이 해서 죄를 다스리겠다는 거예요. 그 원리는 선악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주께서 추가적으로 창세기 4장에서 가인에게 너는 죄를 다스려야 된다는 숙제를 줬지요. 그런데 착한 일하면 죄가 없어집니까? 그게 인간의 딜레마에요. 착한 일하면 할수록 없던 죄가 자꾸 발생돼요. 죄 항목이 늘어나요.

예를 들면 기도를 안 하면 죄고 기도하면 의가 되겠지요. 기도하게 되면 기도하면서 새롭게 늘어나는 조항이 있어요. 꿇어앉아서 해야 되느냐, 양반다리로 해야 되느냐? 꿇어앉아서 하면 선인 것 같고 양반다리로 하면 악인 것 같아요.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꿇어앉을 때 손을 모을 것인가, 손을 펼 것인가? 손을 모아야지. 소녀의 기도도 있으니까. 옥색 드레스 입고, 오늘도 무사히. 문제는 깍지 낄 때 결혼반지 뺄 것이냐, 하는 새로운 조항이 생겨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가인에게 개입했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선을 행해봐라. 선을 행하는 순간 네가 예상치 못한 다스려야 될 죄가 또 발생시켜지는 하나님의 방식, 누가 당해낼까요? 아무도 당해낼 위인이 없어요. never. nobody. 아무도 없어요. 누가 그걸 당해냅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마귀를 사용하시는 방식이에요. 마귀는 반드시 너는 가치 있어. 네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지 마라. 네가 그런 행동하면 안 되잖아요. 너는 의로워야 되잖아요. 이게 마귀의 목소리에요. 마귀는 누구의 지배 아래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준 법칙, 너는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너는 끝까지 추궁 받을 거야. 지옥 가서 추궁당할 거야. 그 원리원칙 아래 이미 인간은 갇혀버렸어요. 이제는 큰일 났어. 빼도 박도 못해요. 날마다 착해야 돼요. 변명해야 되고 자기를 옹호해야 되고 자기 의를 사수해야 되고. 무슨 수로 나옵니까?

그래도 하나님 형상을 본받으면 되잖아요. 에베소서 5장에 나오잖아요. 주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본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라고 했을 때 인간이 어떤 행동할 때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신 분에게 행동하게 돼있거든요. 가인에게 말 건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4장 1절에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인이 태어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말을 건넬 때는 이미 여호와가 천사를 통해서 완성을 봤잖아요. 그러면 여호와가 이 땅에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거룩한 모습이었어요? 십자가에 죽는 모습이었지요. 결국 정리해보면, 십자가 죽으신 분 앞에서 마귀에 속한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나를 다스리기 위해서 이 정도로 착하게 살았다고 말하겠지요.

그런 말을 베드로가 한 거예요.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를 썼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어디로 몰아넣습니까? 아무리 해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배반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뭡니까? 누구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 당신보다도 내 가치가 우선이라는 거예요.

정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가면 갈수록 느끼는 게 그 점이에요. 까놓고 말해서 내 가치를 위해서 예수님을 도용하고 이용한 거예요. 내 가치를 포기하기에는 내가 너무 아까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도 십자가 나는 알잖아. 그러나 그 십자가 아는 것은 내가 이 정도로 악하다는 것으로 출발해야 표적의 의미가 완성이 되는데 내 가치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 십자가 이용하면 전혀 표적을 이해 못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십자가는 그냥 곁다리라. 없으나 있으나 그만인. 그냥 부록이에요. 다급한 것도 아니고 시급한 일도 아니란 거죠. 내가 다급하고 시급하니까. 내 가치 유지하니까.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리포터로 마이크 들이대고 묻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당신의 인생 가운데 어떤 걸 만회하기 위해서 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인간의 행동은 자기 가치를 만회하는 노림수 없이는 그 행동 안 하게 돼있어요. 모든 행동은 단 시간에 잃어버린 구겨진 자존심을 교회 가서 주님께 기도해서 빨리 보상받고 원상복귀하려는 시도로 온단 말이죠.

그게 왜 그러냐? 결핍 때문에 생긴 거예요.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인간이 에덴동산 나오면서 뭘 잃어버렸어요. 뭘 잃어버렸는지 아직도 몰라요. 주님께서 이야기해줍니다. 그룹, 그룹이 천사인데 완성, 하나님께서 인간 손 빌리지 않고 성령과 천사, 묵시적 존재를 통해서 완성시키는 그 무엇 안에 잃어버린 게 들어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게 처음에 창조할 때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었잖아요. 그 형상이 누구냐? 골로새서 1장에서 바로 예수님이 형상이에요. 쉽게 말해서 본래 있는 예수님 안에 있던 자리를 잃어버린 거예요. 주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거예요.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표적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자기 양입니다.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요. 잃어버린 양은 언약이 투입돼야 되고 언약 안에는 그룹, 천사가 새겨져 있어요. 천사가 새겨져 있다는 말은, 네가 구원되거든 네가 구원되는데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바쳐서 뭘 하느냐? 그룹이 새겨져 있는 성막을 만들어요. 그러면 그 성막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인간은 빠져야 되는 겁니다. 만들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서 만들었지요. 만들었지만 그것조차도 행한 것이 안 돼요. 그룹이 새겨진 성막을 만듦으로써 성막은 자동적으로 자체적인 기능에 나서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아, 너는 가만있어. 죄인 주제에 어디서 완성도에 끼어들어. 끼지 마, 하고 발로 차는 작업이 계속되는 겁니다.

시편 89편 1절부터 읽어볼게요.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여호와란 언약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들은 몰라요. 이스라엘만 아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하면서 아는 하나님이에요. 그들이 귀에 들었던 여호와가 아니고 실제로 그들에게 말 건네 온 십계명으로 성막 만들기로, 그리고 징계하는 식으로 그들 인생을 관장했던 그 하나님을 말합니다. 언약이란 지키는 게 아니고 언약이 지키기 이전에 이미 우리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 증거가 뭐냐? 모든 게 우리 뜻대로 안 됩니다.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놓고 인자하심이라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인지.

“주의 성실하심” 성실히 기도해봤어요? 응답 안 됩니다. 그게 주님의 성실이에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상대하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 뜻대로 안 해줍니다. 원리상 간단합니다. 우린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 뜻대로 안 해줘요.

인터넷 보면 저에 대해서 비난한 글이 있어요.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근호 목사의 주장은 인간은 죄인이란 거다. 그런데 이근호 목사의 잘못은 뭘 해도 죄라는 그게 잘못이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반박하겠습니까? 인간은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 말은 맞지요. 그럼 당신이 날 비난하는 것은 죄입니까, 아닙니까? 그 사람 할 말 없지요. 인간은 죄인이라는 순간 더 이상 죄도 있지만 의도 나온다는 소리를 해선 돼요, 안 돼요? 안 되는데 그 말이 나오지요. 그게 바로 죄에요. 내가 이야기한. 인간은 전적 죄인이 아니고 의롭게 할 수 있다는 그게 성경에 있더라 하는 게 바로 주께서 고대했던 죄에요. 그 음흉한 죄를 나는 죄인입니다. 부족합니다. 이걸로 가린 거예요. 위장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고난 받을 때 취지가 뭡니까?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고난 받았잖아요. 주께선 역설적으로 나갔지요. 술 먹으러 가자. 왜 그렇게 행동하십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 부르러 왔다. 다시 말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은 아무도 새 부대가 아니에요. 새 술이 마련돼야 새 부대가 알아보는데 그 새 술 마련은 예수님 본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몇 년 전입니다만 당당뉴스인지 그 인간이 그런 이야기할 때 자기 말은 자기가 스스로 부정하는 거예요. 인간은 죄인 맞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착한 일해야지. 이런 논조에요. 앞에 있는 죄인이란 결국 꼼수 쓴 건데 주님이여, 죄인이라 이야기하니까 저 착하지요? 이런 셈이 돼버려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을 몰라서 그래요. 바리새인이 그런 짓한 사람이에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죄인이면 바짝 마른 뼈다귀기 때문에 구원이란 말이 입에서 나와선 안 돼요. 바짝 뼈다귀를 개가 물어가도 아무 소리하지 말아야지. 구원해달라는 소리가 왜 튀어나옵니까? 그런 소리 나오면 안 돼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면 구원받을 거야. 그런 계산을 예단을 내릴 수 없었어요. 그냥 무작정 했는데 누가 말을 건넸잖아요.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먼저 말을 건네줘야 돼요. 그때 주님의 답변이, 주님이 자기 일로 회수해버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예수님이 사실은 사울에게 말을 건넨 게 아니고 예수님이 본인에게 한 거예요. 거기에 사울이 말려든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님의 증인 된 거예요.

그게 일번에서 이번, 삼번이 아니고 삼번에 가버리면 일번을 해도 주의 일이 되고. 벤츠 모는 것도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벤츠 모는 주의 일 해보세요. 사우나에 있어도 주의 일이 되거든요. 이걸 버리고 나쁜 일이고 하는 그건 지가 골라낼 문제가 나이에요. 처음부터 죄인이라면 뭘 해도 죄인 되니 이게 바로 천사가 완성하고 성령께서 완성한 그것이 덮치니까 내가 내 구원에 손톱만큼도 보탠 것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서 남한테 발산하게 되는데 이걸 성령이 임하면 네가 주의 증인 되리라.

그래서 아까 히브리서 6장 4절에 한 번 비췸을 얻고 열심히 일하지만 일번이 아니고 이번이죠. 하지만 삼번이 안 되면 이번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저주받은 거예요. 이번에서 삼번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그래, 십자가 알아야지.”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미 출발자체가 삼번부터 출발한 자는 이런 자들과 구별되기 위해서 한번 비췸을 얻고 해서, 십자가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거예요. 아무리 성령의 일을 하더라도 십자가 모르게 되면 그것은 타락이라는 의미에서 히브리서 6장 4절이 된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게 아니고 내가 주님의 표적 안에 이미 포함이 된 내 자체가 답이란 사실, 내 자체가 이 땅에 표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성령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그룹들의 무늬를 놓았는데 그룹은 완성이죠. 결국 이렇게 성막이 만들어짐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다가올 세계가 이미 중첩돼있지요.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세상 끝 날에 있을 그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 민족이 맞닥뜨려야 될 모든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꼭 필요한 상황들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다. 양식도 없다. 이건 어떤 경우에는 별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갔습니다. 양식이나 음료수 가져갔습니까? 올라갔더니만 양식 있었어요? 없었지요. 이 말은 주께서 완성된 세계에서는 지상에 필요한 오곡백과가 필요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밥 먹는 이유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러면 우리의 목숨은 하늘나라에서 필요 없는 거예요. 우리 목숨이 필요 없으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죽은 자가 돼야 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오곡백과 농사짓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밀가루 한 되에 얼마냐고 물으면 안 돼요. 왜냐? 목숨이 없으니까. 목숨에 필요한 것도 없어야 되지요. 하늘라에는 목숨 대신 생명이 있지요. 이 생명은 어디서 온 거예요? 예수님 생명 얻기 위해서 하늘나라에서 텃밭 가꿨습니까? 주님의 목숨은 어디서 왔는가? 십자가 이전 앞에 이 땅에서 가져온 거예요. 이 땅의 죄를 언약대로 했더니만 의가 되고 생명이 된 거예요. 하늘나라는 농사지을 필요 없이 십자가의 은혜, 용서하심만 있으면 목숨은 없는데 생명은 있어요. 이게 성도한테는 성령을 통해서 미리 당겨서 중첩이 됐단 말이죠.

우리교회에 의사분이 있는데 평소의 행동은 굉장히 정의로워요. 잘못된 것은 양보도 없고 타협도 없는 분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자꾸 병원을 옮겨요. 불안, 불안해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뭘 요구합니까? 이러면 네 목숨 보장해줄게. 보험도 그렇고. 하여튼 이 세상에서 돈이 왜 있느냐 하면, 우리 목숨을 보장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존 로크가 그런 이야기했는가, 곡식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돈을 가지고 있는 게 낫다. 곡식은 썩지만 돈은 안 썩는다. 그 당시 돈은 금이거든요. 금속은 오래 가잖아요. 모든 상품을 돈으로 바꿔야 된다. 그래야 소유하기 좋다. 일리 있는 말이에요. 그래서 돈으로 다 바꿨잖아요. 돈도 녹슬면 다른 것으로 바꾸든지 하여튼 재물로 바꾸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내 말만 들으면 네 목숨 부지할 돈 줄게, 했을 때 특히 사도 바울에게 돈 줄게 성령 달라고 한 사람 있지요. 이게 그 중앙에 뭘 포기 못하겠다는 말입니까? 목숨을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이 목숨을 그대로 천국까지 가져가겠다는 뜻이거든요. 천국에 대해서 얼마나 큰 오해인지 천국은 십자가로 가로막아서 목숨은 못 가져가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대부분 사람들이지만) 목숨을 다시 살리려 하는 겁니다. 그 목숨을 살리게 되면 하늘나라에서 주님께 영광 못 돌려요.

왜냐하면 그동안 내 목숨 살렸던 마누라 목숨도 같이 신경 써줘야 돼요. 그동안 내 빨래 해주고 단추 떨어졌을 때 달아주고 다리미 질해준 그걸 개 무시하면 안 되잖아요. 천국 가서. 그러나 천국 가서 그것 개 무시해야 돼요. 왜? 그걸 해봐야 내 목숨 부지하는 데 도움 줬는데 생명 주시는 것은 천사와 성령,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 잃음으로 그 대가로 우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께만 면류관 던지지 지 마누라 앞에 면류관 던지는 이런 짓하면 안 됩니다.

그럼 마누라 무시할까요? 아니지요. 마누라 사랑이 희생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부부는 장차올 천국의 모델로 서로 사랑해주고 하는 겁니다. 그저 무상으로 서로 예뻐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저 주께서 교회를 보호하는 그 사랑을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받아내야 되거든요.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받아낼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라도 큰 거지만 보호입니다. 끝까지 보호해야 돼요.

그래서 부부 간에 싸움할 때 남자들은 논리로 따지는데 논리를 따지더라도 여자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더라도 날 지켜줄 거야, 날 예뻐해 줄 거야,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데 남자는 가만있어봐. 이렇게 따지는 것은 여자의 본심을 이해 못해서 그래요. 내 입에서 무슨 되지도 않은 소리가 나오더라도 감싸줄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이게 보호거든요. 강자가 약한 자를 보호해야 되니까. 그것 때문에 부부가 있단 말이죠. 부부는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 사랑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물론 성도한테만 해당되는 거예요.

지금 4월 2일, 9일 주례 있어서 주례사 신경 많이 쓰고 있어요. 어떤 컨셉을 잡아야 될지. 또 복음 전하지 않으면, 김을수 집사님 왜 주례에 복음 안 들어갔느냐고 시비 걸 게 뻔하고.

결론 맺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표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몰라요. 목숨에 연연하기 때문에 주께서 주시는 것은 천사를 수놓으면 구원은 내 소관이 아니구나. 주님이 거저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수놓아 될 텐데 나는 천사의 수놓았다. 그 수, 내가 바친 거다. 이건 아니거든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시키되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만듭니다. 내가 했다고 할 까봐 내가 이만큼 보탰다는 말 나올까 싶어서 모든 일을 우리 뜻대로 하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그걸 통해서 우리는 삼번부터 출발합시다. 주여, 내가 뭘 해도 쓰레기입니다. 이 쓰레기를 주께서 백성 만드는 작업에 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보다 더 낮은 쓰레기(빌2:8) 십자가에 죽기까지 쓰레기 됐는데 그 십자가와 함께 가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고백입니다. 무슨 쓰레기가 돈 많은 쓰레기가 있는지 하여튼 그것도 맞아요. 돈 많더라도 십자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목숨이 무서워도 마귀의 종노릇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우리는 생명보다 목숨에 먼저 손이 갔습니다. 이제는 목숨은 생명의 표상인 것을 생명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남한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