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03a 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사람과 아들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40장 17절부터 하겠습니다. 40장에 들어가면 출애굽기가 끝납니다. 출애굽기 40장에 들어가면 성막을 만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 초반기에 애굽에서 탈출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러면 애굽이란 장소에서 탈출하게 되면 구원이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지역에서 살다 다른 동네에 살면 과연 구원이 되느냐? 이런 아이디어는 오늘날 이 동네 살다가 죽어서 딴 동네 가면 구원되느냐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기서 살던 인간이 장소 바뀌어서 다른데 살아봐야 집에서 새던 바가지 밖에서도 새지요. 울산에 사는 사람이 대구에 가서 산다 해도 사람 자체가 바뀔 리가 없겠지요.
그런데 이 책이 출애굽이거든요.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겁니다. 애굽은 히브리인들이 살던 동네에요. 애굽은 세상입니다. 애굽이 사람이 사람 같이 사는 동네에요. 애굽이 제일 잘 살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나라들도 사람 같이 살려면 애굽에 와야 되잖아요. 한국에서 젊은 애들이 나중에 공부 좀 하면 서울로 가잖아요. 서울로 가야지 사람 사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강원도 갈까요? 원주 갈까요? 저 거제도 갈까요? 요샌 거제도 자랑스럽지 않습니다만. 무안 근처 섬에 산다고 자랑스러워할 사람 없지요. 지역에 있는 것이 나로 하여금 사람 사는 것 같이, 다시 말해서 내가 인간인 것을 확인해준다는 사고방식, 이것은 애굽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애굽이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애굽에서 잘 살게 하는 게 아니에요.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버리고 밖에 나가는 걸 희망으로 삼는 게 아니고 애굽 땅에서 출세하는 게 희망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왜냐 하면 살아온 것이 애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애굽 바깥의 생활에 익숙한 게 아니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기서 희망이라는 것, 꿈이라는 것, 거기서 출세라는 것, 다 어디서 배운 거예요? 애굽 안에서 나름대로 출세, 성공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애굽 안에서 얻겠지요.
울산에 고층 아파트 있다고 합시다. 난 울산에 안 살고 언양의 빌라에 살래. 그걸 출세라 하지 않습니다. 울산에 고층 아파트가 좋은 곳이라고 소문나면 은근히 주변에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난 언제 고층 아파트에 살지?” 희망을 가지겠지요. 자체적으로 조달된다 이 말이죠.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게 참된 인간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는지 자체적으로 조달돼요. 왜? 그 안에서 서로 비교가 되기 때문에. 저 사람은 고층 아파트에 살고 나는 낮은 곳에 살고. 그 안에서 비교되기 때문에 애굽에 사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것은 애굽에서 산다는 것은 애굽밖에 나가는 게 아니에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상대적으로 우열을 갖는 게 자연적 사람 사는 희망이고 목표가 되는 겁니다.
한국에 공부하는 학생들이, 네 목표가 뭐냐고 할 때 나이지리아에 가서 장사한다는 사람 없어요. 더운데 가서 뭘 할 건데? 나이지리아 가서 보코하람한테 맞아 죽을 일 있습니까. 거기 왜 가는데?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한국 자체적으로 목표가 그 안에서 정해진다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밖으로 나온 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소망도 아니고 소원도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출애굽에서 애굽에 사는 사람들이 너 앞으로 어떻게 살래, 하면 애굽에 있는 조건들 자체적으로 조달되는 거예요. 애굽밖에 살래가 아니라 애굽 나라 바로 왕처럼 살래, 애굽의 귀족처럼 살래, 그렇게 되는 것이지 나는 애굽밖에 좋은 곳에 있겠다. 애굽밖이라 해봐야 사막 밖에 없는데 뭐 좋은 게 있겠어요? 그래서 출애굽은 오늘날 우리와 똑같은 거예요. 너 뭐하고 싶나, 하면 세상 떠나고 싶어요. 이런 인간 없거든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유엔총장 했다가 내년에 대통령 해볼 랍니다. 이게 목표란 말이죠. 성을 온으로 하던 반으로 하던 그게 목표가 되는 거예요. “난 달에 가서 살래.” 이런 애는 없어요.
우리가 출애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희망과 얼마나 어긋나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집에 돈 좀 있고 터 있어서 50평 땅에 집을 짓겠다고 건축 설계사무소에 가서 건축비 얼마 나오겠냐고 물으니까 그것 포기하시고 다른 동네 가서 사세요, 하면 그 사람과 계약 안 합니다. 내 계획은 이 땅에서 몇 층짜리 건물 짓느냐는 거. 이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설계자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 설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출애굽을 그렇게 많이 보면서도 얼마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틀어져 있다는 것을 언제나 짐작하겠어요? 출애굽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래요. 성경 전체가 우리의 소박한 꿈마저 완전히 짓밟아버립니다. 어디서 개꿈 꾸고 있어? 인정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사람들 희망은 뭐냐? 적어도 애굽 사람들보다는 낫겠지, 라는 희망을 가지고 나온 거예요. 만약에 그것이 옳다면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보다 훨씬 좋은 옥토에다 좋은 오피스텔, 완전히 마련된 그곳에 가야 돼요. 그럴 때 애굽에서 나올 때 노래 부르면서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왔는데 광야에서 40년 동안 뺑뺑이 돌면서 다 죽었잖아요. 홍해에서도 안 죽은 인간들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죽었어요.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그렇게 하나님, 하나님을 찾는데 언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몸만 오너라. 내가 다 해줄게.” 그게 아니었어요. 애굽에서 나오면 됩니까? 그것도 아니었어요. 애굽에서 나와도 안 돼요. 왜? 그 인간이 나왔기 때문에. 애굽에서 살던 그 인간이 그대로 변동 없이 나왔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출애굽기 40장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성막 아이디어는 애굽에서 나올 때는 없었어요. 성막의 구조는 시내 산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모세와 만나서 구체적인 내용이 하달된 겁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성막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한 거예요. 성막을 왜 만들어요? 그냥 살려고 왔지 성막 만들라고 온 게 아니잖아요. 성막 만들기는 애굽에서 나올 때 그런 것은 없었던 거예요. 모세만 알았어요. “네가 시내 산에서 나를 섬기기라.”
그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져요. 간단히 해봅시다. 애굽에서 나오면 구원이냐? 아니죠. 여기가 애굽이라면 밖에 나온 걸 애굽밖이라 할 수 있지요. 애굽 바깥에 구원이 있으면 좋겠는데 자동적으로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맨날 애굽에서 나왔다 하는데 그게 뭔데? 성막을 만들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새로운 안과 밖을 준비했습니다. 성막 안이냐, 밖이냐로 구원이냐, 구원 아니냐를 확정이 돼버립니다. 신약에 오면, 성전 안이냐, 밖이냐.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냐, 밖이냐. 그걸로 결정된다고요. 광야에서 40년 동안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말은,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이 죽었어요. 애굽에서 나왔는데 성막의 정신에 못 들어가서 죽은 거예요. 애굽 밖, 성막 밖, 이건 바로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돼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구원을 생각하고 교회 나온다든지 구원을 생각하고 하나님 찾으면 애당초 잘못된 거예요. 그건 사기 당한 겁니다. 보이스피싱 당했어요. 구원을 생각해서, 누구 구원? 내 구원을 생각해서 성경을 본다든지 교회에 나온다든지 출애굽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엉뚱한 것을 쳐다본 겁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나님께서 정답부터 제시했습니다. 사실은 여기에 어떤 물음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되는데 주님께서는 정답부터 먼저 던졌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고 내 장자라. 그러면 우리는, “언제 물어왔습니까? 저 압니다. 저 인간입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저,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해줘야지요.”라고 한 거예요. 이 말은 질문을 으레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줄 의무가 있고,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려질 권리가 있다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질문을 잘못한 겁니다. 사람이 뭐냐, 부터 질문해야 돼요. 내가 과연 인간인지 먼저 질문해야 돼요. 인간을 구원하시는 건 맞아요. 과연 인간의 자리가 우리가 포함될 정도로 인간이냐는 문제는 우리가 성급하게 끼어들면 안 돼요. 우리는 인간이 아니무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 같으면 건지지요. 그런데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란 말은 제 말이고요. 성경대로 하면 우리는 아들이 아니에요.
야, 이제 문제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고 사람으로 마감되고 싶어. 사람으로 살다고 사람으로 마감된다면, 우리는 충분히 고마워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뭘 원하느냐 하면,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원하거든요. 이게 우리 생각과 하나님 생각과 다른 점이에요. “저, 울산에 사는 시민입니다.” 그것 하나님이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저는 울산에 사는 아들입니다.” “그래에에?” 사람에서 아들로 바뀌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는 쉬울 거예요. 사람인 인간이 아들 되려면 어떻게 됩니까? 이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밖에 나가면 사람들 많잖아요. 그중에 아들 있습니까? 없지요. 어떤 집단에 한 무리가 있는데 그중에 아들이 있느냐는 것은 아버지가 등장해서 아들을 골라야 그게 아들이에요. 지금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 찾는 게 아닙니다. 아들을 찾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아들 되고 싶다고 해서 아들 되는 게 아니거든요. 중도에 아들 되는 법이 없어요. 출생부터 처음부터 아들이어야 돼요. 중간에 어떻게 주워온 아들 키워주는 것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처음부터 아들인 자를 아들로 건지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이냐, 아니냐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모델이 있으면 돼요. 하나님의 아들은 종말 때, 마지막 때 나타납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죠.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아들 같으면,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아버지 되는 건 아니고, 아버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예수님만 아버지를 알고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내 아들이라 할 때 예수님만 알고 있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가 있어요. 그 관계를 일찌감치 출애굽에 집어넣게 되면 집어넣게 된 장치, 시스템, 구조가 오늘 공부할 성막인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다시 할게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예수님만 알아요. 그 관계가 모세를 통해서 약간 맛보기로 예고편으로 보여주게 되면 그것이 모세 시대에 성막 구조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살다 나왔지요. 그 사람들은 출애굽,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살던 동네에서 기꺼이 나가고자 했습니까, 거절했습니까? 거부했지요. 왜냐하면 내가 평생 살아온 내 추억과 기억 전체가 내 삶의 목표가 애굽 자체적으로 조달된다 했지요. 나는 애굽의 귀족처럼 되고 싶어. 딴 희망 없어요. 서울대학 가고 싶어. 하늘나라에 서울대학 있습니까? 없지요. 나는 재벌 되고 싶어. 하늘나라에 재벌 있습니까? 없잖아요.
하늘나라에 없는 걸 왜 목표로 삼습니까? 그러고도 아들입니까? 웃음이 납니다만. 우리가 그러고도 아들이에요? 무슨 하늘나라에 수능 380점, 390점이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없는 왜 그리 찾는지 몰라요. 기도랍시고 한 내용 뜯어보면 전부 다 하늘나라 없는 것만 찾고 있어요. 기도할 때 “주여, 주의 의와 복음을 위해서 핍박받게 하옵소서.” 왜 그런 기도를 못합니까. 그게 마태복음 5장 10절에 분명히 나오잖아요. 그것도 복 중에서 제일 큰 복, 팔복 중에서 마지막 복이 그겁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데 왜 그걸 기도 제목으로 안 삼습니까? 이 연사는 정말 외치고 싶습니다. 좁은 길로 하옵소서. 억지로 끌면 가주지, 이게 아니고 “주여, 좁은 길로 가게 하옵소서.” 영생은 그 끝에 있으니까. 좁은 길로 가고 싶어 환장한 사람을 나는 지금까지 못 봤어요. 그래놓고도 기도 하지 말라고 왜 하느냐, 우린 기도해야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디모데전서에 있거든요. 그 말은 뭐냐? 말씀에 입각한 기도를 하란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에 부합된 기도를 하란 말입니다. 그게 요한일서에 나와요.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다 이루리라, 해놓고 조건이 있어요. 뭐냐? 아버지 뜻대로 구하는 것은 다 이뤄진다. 아버지 뜻이 뭡니까? 아들이잖아요. 사람에서 아들로 바뀌는 거예요.
홍해에 잠겨 죽었던 애굽 군인들이 사람입니까, 지푸라기입니까, 악어였습니까, 오징어였습니까? 죽기 전에 서로 모여서 술 한 잔 할 때는 사람이에요. 홍해 건너기 전에 히브리인들과 애굽 사람들과 모여서 노래방에 가고 나이트클럽 가고 해보세요. 다 사람이에요. 자기는 분명히 사람이지요. 그런데 홍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 하에 아들만 홍해를 통과시키고 다 죽인 겁니다.
사람이 갈 수 없는 곳, 왜 갈 수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닮았기 때문에 못 가는 거예요. 옛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못 가는 겁니다. 새로운 아담, 마지막 아담, 예수님처럼 되지 못해서 못 가는 거예요. 천국은 사람인 고로 가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아들이 되지 못하면 갈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함부로 못 가요. 갈 수가 없습니다. 시험 쳐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돈 먹인다고 교회 섬긴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남 따라 간다고 뒤에 끼여서 가는 게 아니에요. 거름지고 장에 간다고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심지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늘나라 성공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놔도 못 갔습니다. 그런 목숨 아무 쓸데없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목숨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베드로의 목숨을 원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우리 목숨도 원하지 않습니다. 니 목숨 갖고 평생 동안 막 살아라. 그걸 막 안 살고 고이 바친다고 받으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어차피 안 받는 목숨 마음대로 사세요.
제가 지난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인간의 생명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지저분하다고. 지저분한 걸 어디다 내밉니까? 하나님이 받겠어요? 주님만 받아요. 거룩한 예수님만 받아요. 그리스도 받고 우리는 거룩함을 얻어 챙기는 겁니다. 뻔뻔스럽지만.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하나님에게 제물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합시다. 제물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시는 거예요. 자기 아들의 명예를 걸고 우리에게 그냥 주는 겁니다. 예수님 보고 줘요. 우리 보고 주는 게 아니고. 이것 이해 안 되면 답답해서 혼자 발로 차고 굴려요, 저는.
유명한 마르틴 루터가 잘못한 게 뭐냐 하면, 우리는 죄인이고 의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를 하나님의 의 되게 했지요. 의+사람, 이게 아니고 사람은 떼버리세요. 우리 자체가 하나님 의가 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21절. 우리가 죄인이든 관계없어요. 우리로 아우라를 끄집어내요. 하나님의 의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날 받으소서? 안 받습니다. 하나님은 아들만, 예수님만 받아요.
예수님이 하는 일이 바로 죄인, 탕자인 시커먼 우리에게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나님의 의를 끄집어내는 솜씨는 오직 예수님만 갖고 있고 우린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진수에요. <너에게 묻는다>(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라는 아주 짧은 시가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고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우리는 분명히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타버린 연탄재인데 연탄재를 통해서 주께서 뜨거운 용서와 은혜와 자비와 인자하심과 긍휼을 다 타버린 끄집어내시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너무 발길질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아들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관계성 때문에 아들이에요.
나를 구원한다?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지요. 동행하시는 분에 속하지요. 왜냐하면 그분만이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고 탕자 내지는 그냥 양자. 양자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데 조건이 있어요. 성령이 임할 때,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영이 임한다고 보면 됩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협약, 계약이 있어요. 그 계약이 완료됐기 때문에 주어진 영, 쉽게 말해서 계약서가 바람에 날려서 두 바퀴 반 날려서 우리 가슴에 붙은 거예요. 출애굽기 12장에서 문설주에 피 바르지요. 그게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계약서 내용이에요. “피만 발라라. 구원해줄게.” 우리는 그 계약서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은 그 계약이 유효하기 때문에 살아주는 거예요.
오늘 낮에 어떤 전도사님이 제게 질문을 했어요.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주옵소서, 라고 요구하는데 이것이 이미 성령 받은 성도라면 주기도문 대로 기도해야 되고, 두 번째,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형제를 사랑해야 되고, 그런 조건 하에서만 우리가 구원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네게 죄를 지은 자에게 죄를 사해주는 조건 하에 하나님이여, 저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라고 돼있는데 그 절차를 우리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게 반복해야 되지 않느냐는 조로 저한테 질문한 거예요.
그 질문에 답변에 제가 가스펠펠로우십 교회에서 이년 전에 주기도문란 설교해서 이미 했습니다, 라고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하면서 앞서 설명해줬어요. 예수님께서 그 기도하기 전에 인간이 한 두 가지 기도를 거부했습니다. 바리새인 한 기도를 거부했잖아요. 그들은 티 나도록 기도했고. 두 번째, 이방인들이 한 기도도 배격했어요. 많이 하면 응답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사고방식.
뭐가 문제입니까? 유대인 바리새인이나 이방인이 뭐가 문제냐 하면,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자라고 전제하고 들어간 게 문제된 거예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아버지가 아들 기도를 안 들어줄 리가 없지. 집안에서도 아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데. 그리고 난 뒤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거기에 우리란 말이 나와요. ‘우리’는 아들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을 때 파생되어 번져서 새롭게 발생된 집단이에요. 기존에 우리는 기껏 바리새인이나 이방인밖에 안 돼요. 그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아들이라고 자처하지요. 자처하지만 아들은 아니에요. 그들은 아들도 아니면서 천국 간다고 우기고, 아버지도 아닌 것을 아버지라고 섬기는데 그들의 아비는 악마입니다. 그들은 지금 마귀를 섬기고 있어요.
진짜 아들은 직접 아버지가 아니에요. 반드시 예수님과 공유의 자리, 공유란 말도 참 건방진 말이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고 변두리로 나가야 됩니다.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지만 솜사탕 만들 때 페달을 밟으면 둥그런 통 안에 중심에 설탕 한 컵 넣으니까 뭉실뭉실 구름 같은 것이 피어나면서 솜사탕 하나 되잖아요.
예수님이 중심에 있고 예수님이 아버지와 뭘 하니까 주변에 없던 것에서 새로 생긴 자가 누구냐 하면, we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게 창조에요.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하는 창조입니다. 처음 창조는 흙에서 만들었지요. 두 번째 창조는 예수의 피에서 만들어져요. 예수님의 계약서가 그래요. 어린양의 피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만이 천국에 갑니다. 그래서 피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항상 성도는 무엇이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의 피 중심인데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만 아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계약된 모든 계약서가 응축되면 피가 되고 그 피가 우리한테 묻히면 우리 인생은 예수님이 원하는 인생으로 현실화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우리가 집 나갔다 돌아온 탕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 기억하시죠. 집 나갔다 돌아온 탕자, 다 털어먹고 오는 것. 헌금은 큰 교회에 다 바치고 다 떨어지니까 작은 교회 오고. 탕자 아닙니까. 장로 시켜주고 하니까 대단한 줄 알고 조희팔한테 걸려서 돈 다 날리고. 헌금 안 해도 된다니까 오잖아요.
그럴 때 이 탕자가 아버지 집에 와서 끝났습니까?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탕자이어야 합니까? 계속 탕자이어야 아버지의 사랑이 계속 나오지요. “너, 오년 전에 집 나갔다 돌아왔다면서? 이제 오년 지났으니까 괜찮겠네.” 그러면 탕자가 뭐라고 합니까? “무슨 소리고. 진짜 지금까지 오년이나 산 것도 은혜야.” 이렇게 나와야지, 오년 전에 실수였고 이제는 다 내 거야. 이렇게 건방 떨면 피라는 계약서를 찢어버린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 속에 계약서, 예수님의 피가 온다면 계약서에 담긴 내용, 내용 중에 탕자도 포함되었잖아요. 그 내용대로 멀쩡한 우리, 잘난 우리, 공부 좀 한 우리, 살만큼 산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천하에 탕자가 나 말고 또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점점 더 그런 마음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말이죠. 죄인 오라 하실 대 날 부르소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성령을 안 받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필요하지. 하지만 십자가 지나고 그 다음에 다른 것도 해야지. 맨날 십자가에 머물면 되겠느냐. 십자가 이후에 성령의 열매 맺고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해야지. 이렇게 나와요. 그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약서가 언약의 피로써 모든 구원에 관한 문제가 끝나버렸어요. 뭐로? 피로. 피로써 죄를 씻는 게 아니고 피로써 의 된다니까요.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무죄 상태가 되는 아니고요. 무죄 상태 돼봐야 또 죄 지으면 죄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의 됐잖아요. 그러면 구원 받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죄인 돼야지요. 왜? 죄인 되고 예수님의 화목제물과 결합해서 우리가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야구하는데 타자가 하도 잘 치니까 투수가 위협구를 던집니다. 그래서 몸에 맞는 볼로 출루합니다. 그러면 기분 되게 나빠요. 그래서 화난다고 야구 방망이로 투수를 패면 돼요, 안 돼요? 투수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야구 방망이로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면 뭐가 안 돼요? 사적인 감정을 풀면 야구 자체가 안 되지요. 개인의 원통함을 푸는 건 좋은데 전체 야구가 안 되잖아요. 우리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전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누가 찾아보세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울산이나 대구나 애굽에 살 때 우리의 목표가 뭐냐 하면, 내가 사는 고향땅에서 출세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 뜻이 아니죠. 내 뜻이잖아요. 우리는 왜 자꾸 출세하는 데 관심 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내 욕망과 내 욕구대로 살 뿐이에요. 그런 것을 두 자로 사람 또는 인간이라 했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선 사람과 인간을 천국에 안 받지요. 하나님은 아들만 받잖아요. 그런데 요단강에 오셨을 때 아들은 의인이에요. 예수님의 의가 우리한테 없으면 예수님과 합력하여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약 올리려는 게 아니고 정답이에요. 정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 삼성그룹에 가서 이런 이야기하고 재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람 소용없어요. 돈 많은 사람 소용없고.
출세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누가 실시했어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이 모든 일이 누구 아이디어고 누구 계획입니까? 하나님 쪽에서 손을 내밀었잖아요. 우리가 발견하는 게 아니에요. 실시한 것을 우리가 감지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그걸로 감지될 뿐이에요. 숨어있는 독생자가 지상에 나타났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가 나타난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건 도 닦는 게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서 이웃사랑하자. 그거 아니에요. 그건 유대인들, 절에서 많이 한 거예요. 이렇게 해서 구원받자. 그것도 아니라니까요. 독생자가 나타났다는 말은 믿자가 아니라 그분께서 믿도록 조치한다 이 말입니다. 왜 나는 조치 안 하느냐? 네가 지금 앉자 있는 그게 주님의 조치에요. 펑퍼짐하게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게 주님의 힘으로 앉아 있는 거예요.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벌인 야구가 되게 함이라. 사적인 감정 풀지 말란 말이죠. 네 야구가 아니고 내 야구란 말이죠. 돌아가는 모든 것이.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란 거예요. 돈 좀 벌고 부흥사 온다고 감사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자체로 감사해야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 감사하지 말고 인간이어야 되는데 아들로 바꾼 것에 대해 감사하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아까 주기도문에서 용서하란 말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다 조치하신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우리는 걸어 다니는 주기도문이 되는 겁니다. 우리로 주기도문을 외우란 말이 아니고 그대로 실천하란 말이 아니고 성도는, 성령이 있는 사람은 뭘 해도 그 자체로 주기도문의 내용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띠고 있는 겁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했지요. 재산이 30억 있어도 그게 일용할 양식이에요. 남은 30억 있어서 좋겠다고 하지만 난 일용할 양식밖에 없어, 저쪽에서 무슨 일용할 양식이 30억이나 되느냐, 30억을 하루 만에 다 쓰느냐 해도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자도 하나님이요. 그게 바로 재산이 얼마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이란 말이죠. 너, 착하다, 하면 나 안 착해. 죄인이야. 죄인과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의되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우리도 의인되게 하신 거예요. 합쳐서 의가 된다고.
이걸 출애굽을 통해서 나타낸 거예요. 애굽에서 살던 사람 나왔다. 자칭 인간이라 여겼다. 그러나 홍해에서 원망한 사람이 누구였어요? 애굽 군대였어요, 히브리인들이에요?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원망한 거예요. 우리가 물고기냐, 어떻게 인간이 물을 건너갈 수 있느냐? 주께서는 너는 왜 자칭 잘난 인간으로 보느냐? 죽으려고 이곳에 온 거예요. 인간으로 죽어서 아들로 태어나는 겁니다. 어떻게? 피를 바름으로써.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길에서 모세를 죽이는 거예요. 누가요? 하나님이 모세를. 우리 같으면 하청업자 죽여서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고 하지만 하청업자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아들을 원하지 모세를 원한 게 아닙니다. 아들이 된 모세를 원하지요. 모세를 누가 살립니까? 모세 아내가 할례를 행했지요. 피를 냈지요. 피 남편이라 했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피를 생산하는 일을 해놓고 그 일, 할례가 완성됐을 때 베어낸 양피를 모세의 사타구니에 던졌어요. 그래서 모세가 살아났어요. 희한하죠.
그것을 때마다 하는 게 아니고 이벤트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고정된 장소에서 행사하라고 고정된 장치를 만든 게 성막입니다. 성막 안에 언약궤가 고정돼있습니다. 언약궤의 특징은 고정성이에요. 영원히 불변한다. 완료성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끝났다. 시간적으로 끝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원칙은 끝났다. 원칙의 완료성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궤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고정돼있지요. 그리고 난 뒤에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하나님의 언약궤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막을 세운 날자가 오늘 본문에 언제로 돼있습니까? 정월 초일일, 1월 1일. 카운트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잊어라. 이제는 성막이 그 영원함을 찾아가는 미래만 남아있는 거예요. 성막의 완성을 보는 미리의 시간만 남아있습니다. 카운트에 들어갔어요.
이 앞에 책이 있지요. [생명의 신호]라는 이 책에 보면, 고정성에 대해서 제가 언급한 대목이 나옵니다. 영원히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을 전기밥솥으로 본 거예요. 기억나지요. 손대지 않더라도 전기밥솥이 때가 되면 밥을 하지요. 이미 전기밥솥을 눌렀다는 자체가 완성됨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킬까요,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시작할까요? 그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밥솥으로 삼는 거예요. 우리 머리 위에 스위치가 있어서 주께서 누르면 우리는 울산 바닥에서 시한폭탄을 두른 채 채깍채깍 너희들이 모르는 다른 시간대가 흐르는 거예요. 마지막 때를 향하여. 이건 우리 손으로 풀 수 없어요. 타이머에 장착된 하나님의 계약서가 움직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움직여요. 이게 바로 아들입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