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말 건넴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36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36,37,38장은 성막과 그 안에 들어있는 걸 만드는 거예요. 출애굽기를 하면서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다. 이건 굉장히 이해하기 쉬워요. 어떤 민족이 같이 섞여 있다가 분리되어서 나오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그 애굽나라가 작살이 났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나오게 된 그들이 취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자기 집 출입구에 집에서 키우던 어린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그들의 맏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탈출이 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그것이 나중에 약속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약속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의 피는 출애굽 때 처음으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고 그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가정 단위가 아니라 집단적 국가민족 단위에서는 모든 가정이 차이 없이 어린양의 피라는 일관된 그 법칙을 공통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개성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에 응집되도록, 어린양의 피로만 하나님 앞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런 쪽으로 모든 것이 모이게 되는 거죠. 핵심이, 주제가. 인간들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능력, 자질, 솜씨, 아이큐, 인격, 품위, 품격, 가정교육, 그리고 성장환경, 가정환경 등은 다 무시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능력별 격차, 또는 차이도 물론 무시되죠.
우리가 출애굽기 36장을 보고 있는데 36장은 성막 만들기, 법궤 만들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미 출애굽기 12장에서 어린양 피 바른다는 이야기에 흠뻑 젖어서 성막 만들기, 법궤 만들기는 덤인지, 안 하면 안 되는지, 왜 이걸 꼭 해야 되는지,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있는데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으면 되지 십계명은 왜 따로 또 주시는지, 십계명을 무시하면 구원이 안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도 구원이 가능한 것인지 여러 가지 복잡한 논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초반의 어린양이란 것,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대해서 계속해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했다? 그런 것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에 어떤 조치를 취했다? 그런 것도 성경에는 없어요.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어린양 피 주시고, 오늘 본문에 성막 만들기 나가시고 그 다음에 37장에서 법궤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너, 지금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새로 다시 하겠습니다. 출애굽 전체 흐름에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문장에서 액센트는 우리한테 있지요.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했구나.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출애굽 전체를 봐서 어린양의 피로 페인트칠하면 구원을 받는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이란 쉬운 방법으로, 양 잡아서 피 바르면 되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받으면, 그걸 우리가 오해한다면 그 뒤의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끝났잖아. 구원 끝났는데 십계명 왜 주시느냐 이 말이죠. 왜 자꾸 하나님께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혼동하게 하느냐 말이죠.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으면 됐지 않느냐?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았으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되지. 아, 진짜 기쁘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구나. 그게 단순히 오해인데 하나님께 그런 오해할 줄 아시고 우리에게 시비 걸듯이 성경으로 우릴 공격해대시는 겁니다.
구원받았는데 십계명 왜 주십니까? 어린양 피 믿는다 했잖아요. 믿습니다. 십계명 도로 가져가세요. 그리고 성막 만들기 싫습니다. 법궤 만들기, 그 딴 것 필요 없습니다. 어린양 피로 구원하셨으면 더 이상 우리한테 뭘 요구하지 마세요. 되돌리세요. 모세 너도 가고. 우리끼리 재미나게 진짜 막 살 테니까. 구원받았는데 막 살면 어때.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말이죠. 그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몸입니다.
출애굽기 전체를 제가 먼저 말씀드린 것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갇혔다, 어린양 피 때문에 나왔다, 홍해 건너왔다, 십계명 받았다, 시내산 밑에서 모세가 왔다갔다하면서 성막 만들기, 법궤 만들기 그 계시를 받았다. 이 전체가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란 말이죠.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 36장 1절로 설명 드릴게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약간 난해하기 때문에 제가 순서를 적어볼게요. ①사람은 무엇을 만든다. 이걸 증명해보세요. 증명하기 쉽지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계속 만들잖아요. 철 만들지요. 컴퓨터 만들고, 약간 추상적이지만 가정을 만들고, 부부를 만들고, 자식을 자식 되게 만들고. 대통령 뽑기, 뽑는다는 것은 대통령 만들기, 국회의원 뽑는 것은 국회의원 만들기. 대학 만들고, 고등학교를 만들고. 아름다운 고향을 만들고, 고향 어귀에 버드나무 심어서 동산 만들고 산을 가꾸면 산 만들기가 되고, 어장 만들고. 만들기가 별로 어렵지 않지요. 인간은 무엇을 만든다. 무엇에다 아무거나 집어넣어도 다 돼요. 건물 만든다.
그런데 일번, 이것은 신자, 불신자 관계없이 다 하는 겁니다. 이게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복음 아니지요. 약속 아닙니다. 사람은 뭘 만든다가 아닙니다.
그러면 ②하나님은 인간/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만든다. 자, 어떻습니까? 이게 복음이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번과 이번의 차이점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든다고 하면 어디서 나온 의도입니까? 본인의 계획, 본인의 의도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뭘 만든다고 할 때 만드는 인간은 왜 만들어, 하나님은 왜 시키는 거야? 이것 만들라는 것은 예상도 못했네. 궁시렁궁시렁 입이 병 나팔처럼 튀어나와서 왜 이렇게 하는 거야? 불평들을 늘어놓으면서 하나님이 하라니까 해야지.
그게 오늘 본문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성소에 쓸 모든 재료를 만드는 이 계획이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지요. 이건 하나님의 계획이죠. 그러면 일번과 이번을 비교해보자 말이죠. 인간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 필요한 걸 만들어요. 그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붙잡혀서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만들어내는 사람도 따로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36장에 나오는 브살렐과 오홀리압 뿐만 아니고 지혜로운 모든 사람, 하나님께서 총명을 받아 여기에 자발적으로 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 이번에 해당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질문이 시작됩니다. 이번으로 하면 본인이 구원받습니까? 구원 못 받지요. 예를 들면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제자 맞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가가 하는 일이 뭐냐? 그들이 본인들의 일을 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통해서 뭘 만들어요.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를 만든 겁니다. 그 중에 가룟유다가 포함돼있지요. 가룟유다는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서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열두 제자에 포함됐으니까. 그래서 열두 제자가 하늘에서 귀신이 떨어진다고 좋다고 했습니다. 가룟유다도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가룟유다가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일했는데?? 못 받지요.
히브리서 6장에 보면, 사람들이 난해구절이라고 들고 오시는데, 6장 4절에 보면, “한번 비췸을 어도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받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제가 출애굽기 강의하면서 이렇게 했지요. 어린양 피 발랐잖아요. 끝났잖아요. 그런데 십계명 왜 주고 성막 왜 만들라고 하고 법궤는 왜 만들라 하느냐 말이죠.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릴 통해서 뭘 만들고자 하신다. 그러니 열심히 일해야지, 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열심히 성령을 받아서 일했는데 뭘 모르면? 한 번 타락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열심히 일해도 타락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해요. 사도 바울 당시에도 그런 사람 많았어요. 사도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마귀한테 팔려갔다고. 그러면 타락 안 해야 구원받는 거예요. 이 말씀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그게 충족 조건이 아니고, 한 번 받은 사람은 절대로 두 번 다시 타락하지 않을 경우에만 구원이 보장된다. 이렇게 돼야 돼요. 성령의 비췸을 받고, 그게 다가 아니고 타락하지 않아야 구원을 받는데 만약에 성령의 은사를 받더라도 타락하게 되면 그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게 된단 말이죠.
이 이야기를 듣고 평소에 이제는 안전 단계에 들어갔다고 편안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불안하고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네요. 매일같이 타락 안 해야 돼, 타락 안 해야 돼. 그런데 여기에 보면 타락이 무엇이 타락이냐 하면, 십자가가 없는 것을 타락이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 마음이죠. 믿음이죠. 복음이 없는 사람을 타락이라 해요. 그럼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성령으로 일하게 하신다 이 말이에요. 사울이 그랬던 사람입니다. 다윗을 그렇게 핍박했던 사울도 그런 사람이고, 성경에 그런 사람이 많아요.
그러면 일번과 이번은 만족스럽다는 결론이 나왔지요. 그럼 삼번이 필요하겠습니다. ③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진다. 일번은 사람은 무엇을 만든다고 했지요. 이건 매일같이 분주하게 합니다. 가정을 만들고 토지를 개간하고 자동차를 만들고 현대중공업에서 배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요. 이건 인간이 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데 이번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뭘 하신다. 이건 아무나 하는 겁니까, 아무나 안 하는 겁니까? 참 답변하기 곤란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게 아니라 할 것이고 저렇게 이야기하면 그것도 아니라 할 것이고.
이번도 모든 인간이 하고 있습니다. 지옥 갈 사람도 주께서 지금도 부지런히 머리카락을 세시면서 마귀조차도 하나님께서 분주하게 다루시고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일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뭐냐? 현재 인간을 통해서 뭘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내요. 이게 신약에서 말하는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본인의 희망에 의해서 스스로 성도되지 않습니다. 왜 순서를 이렇게 하느냐 하면, 일번에서 이번 나올 때 일번은 뭐냐? 인간은 자기 계획에 의해서 자기 뜻에 의해서 만들고, 이번은 뭐냐 하면, 인생 이렇게 살았는데 다 헛되네.
“신이시여, 이렇게 헛된 인생, 왜 나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는 말은, 지금까지 자기 뜻대로 만들어낸다고 여겼는데 나이께나 먹다보니까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살아가는 걸 보니까 신이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고백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여, 한평생 허무한 인생, 내가 무슨 의미로 살았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럴 때도 여전히 주인공이 누구에요? 나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묻는 거예요. 그게 바로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타락이란 거예요.
이번과 삼번의 차이를 감 잡으셔야 돼요. 하나님 일한다고 자기 혼자 그렇게 된 줄 알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일을 하는데 결국 사람이 죽고 나서든지 죽기 직전이든지 어떤 사람은 알지만 나라는 것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믿는 사람도 감 잡아요. 왜 사는지 모르겠다. 이유도 모르고 살아온 거예요. 한평생 남 흉내 내면서 모방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세 번째는 그게 아닙니다. 뚜렷한 거예요. 일번, 이번은 자기를 인간/사람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삼번 경우에는 인간은 없어요. 흙에서 천국 백성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든 겁니다. 흙에서 만들든지 죄에서 만들든지. 그래서 삼번은 인간을 새롭게 만드는 게 아니고 죄인을 의인으로 새롭게 만들지요. 그러면 삼번이 되려면 일번, 이번이 뭐가 돼야 돼요? 한 마디로 죄가 돼야 되고 살아가는 것이 죄를 만드는 것, 또는 죄를 짓는 것, 죄를 발산하는, 죄를 나타내는 그런 인생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일번, 보통사람들은 방금 이야기한 삼번 체계를 안 받아들여요. 왜? 그걸 몰라요. 누가 자기한테 말을 건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사람들은 오해한 거예요. 피 바르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갈 필요 없고, 요단강 건널 필요도 없고 구원받은 채 애굽에 살면 돼요. 우리가 애굽 사람과 달리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심지어 모세까지도 하나님이 어린양의 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는 생각을 아무도 한 사람이 없어요.
쉽게 이야기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 집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선물을 줬다. 뜯어보니 맛있는 음식이 들었단 말이죠. 그러면 고맙다고 생각하고 얼른 받아들이겠지요. 그런데 며칠 뒤에 길 가던 과객이 혹시 며칠 전에 선물 받은 적 있지요? 받았습니다. 돌려드릴까요? 그런 뜻이 아니고 제가 당신한테 말을 건네는, 내가 여기 있음을 당신에게 알려주는 표시라고 이야기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나도 모르는 내가 생각했던 범위 내에 없는 외부인이 나한테 말을 건네 왔을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를 구원하려 할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렇다는 생각을 누구나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나를 근원적으로 아주 원천적으로 거덜 낸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하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 강의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시비 건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시비 걸기 위해서는 그들의 오해를 유발시켜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는 나의 구원을 위함이다. 십계명도 나의 구원을 위함이다. 법궤 만드는 것도 나의 구원을 위함이다. 나, 나, 나, 나. 그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오해가 여기서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외부에서 말을 건넨다는 것은 나한테 문제 있어서 건넨다는 생각을, 도저히 인간의 타고난 아담의 심성으론 그런 발상이 나오질 않아요. 심지어 복음 전하는 당신은 죄인이라고 하면, 그 말도 오해해요. 내가 죄인인 걸 인정하면 구원받습니까? 또 이렇게 톡 튀어나온다니까요. 어른들 이야기할 때 일곱 살짜리가 밤에 자야 되는데 “아저씨,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톡 튀어나오지요. 그걸 싸가지 없다고 이야기하죠.
주께서 말을 건넨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유 계획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본인을 죄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곧 죽어도 남보다 잘났다는 겁니다. 죽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렇게 죄 짓고 죄인이라 해도 내가 죄인이라는 걸 받아들임으로써 죄를 고백하지 않는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우수한 존재라고 또 착각들을 해요. 쉽게 말해서 자기 이익 외에는 아는 게 없어.
제 이야기는 그겁니다.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어린양 피로 끝내지 왜 십계명 주고, 왜 법궤 만들고, 오늘 본문 같이 성막 만들고 왜 자꾸 말을 건네 오느냐 그 말이죠. 처음부터 어린양 피로 구원 끝. 그러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셔요. 나중에 죽어서 봅시다. 이러면 끝날 문젠데 왜 자꾸 이스라엘을 갈구냐 말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갈랐으면 됐지 거기서 고생 많이 한 사람들에게 이제는 편들고 밥 주고 빵 주고 온갖 것 다 해줘야 되는데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시키고 홍해 건너온 사람들 중에서 두 명 빼놓고 다 죽여 버리고 왜 그렇게 하시느냐 말이죠.
말 건네시는 하나님의 취지와 주의 말을 받는 이스라엘 사이가 벌어져도 너무 벌어진 거예요.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 나는 겁니다. 자신이 만든 것과 하나님이 만드시고자 하는 것과 너무 차이 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나한테 이익 되고자 하는 버릇이 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 버릇은 죽지 않았어요.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은 내가 좋으라고 이 말씀 주셨다고 하는 거예요. 정작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요. 내가 거기에 끼어들 권한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만드시는 이스라엘 백성에 끼어들 수 있고 손들고 내세울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말은 구원받을 자격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기 위해서 십계명 주신 거예요. 이제 여러분 감 잡을 거예요. 십계명 주신 것은 다른 말로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이건 로마서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구약에 안 나와요. 그러니 구약 사람들이 알 리가 있습니까. 십계명 준 것이 멸망한 애굽이나 너나 똑같아. 이걸 누가 알겠어요. 심지어 모세도 몰랐어요. 모세도 나중에 화내고 지팡이로 막치잖아요. 박근혜 대통령께서 화날 때 치잖아요. 뉴스 보세요. 왜 경제에 관한 네 가지 법을 통과 안 시키고, 국회는 문제 있다고.
모세가 성질나서 가리키면 될 걸 지팡이로 치잖아요. 그럼 지팡이를 빼앗아 아무한테나 줘보세요. 바위 안 칠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해요. 아무도 없어요. 전부 다 욱하고 한 성질 다하는 사람들인데 같은 아담의 죄를 받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가 똑바로 해야 구원받는다고 제가 몇 번 이야기했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안 할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학급에 담임 맡았을 때 공부 좀 해. 이번에 우리 반 성적이 꼴찌야, 하고 학생들을 닦달 내겠지요. 우리 반 꼴찌인데 기분 좋지. 다음에 또 꼴찌하자. 이런 담임은 기간제 교사 아니면 내일 퇴직하는 선생이나 하지.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이야기 못하죠. 꼴찌지만 최선을 다하자. 이 정도는 이야기해야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오해라는 겁니다. 무슨 최선을 다해. 최선을 다해서 뭘 얻겠다고. 저주받으라고 준 말씀인데 뭘 최선을 다해요. 최선을 다하는 게 오히려 하나님 뜻을 가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성막 만들기에 기꺼이 헌신하고 뿐만 아니라 3절 이후에 보면 예물을 너무 많이 가져왔어요. 이제 그만 가져오라 할 정도로 넘쳐났어요. 성막 만들고, 법궤 만들기에서. 그리고 8절 보면,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이제는 성막 만들기에 나서게 됩니다.
만들면서 자기가 누군지 성막이 왜 있는지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를 제가 지금부터 해드릴 겁니다. 사람은 뭘 만든다. 여기서 벗어낫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뭘 만든다. 이번에 머물렀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 돼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이건 신약에 와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만드는 게 아니고 인간을 만든다. 하나님은 법궤를 만드는 게 아니고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신약에서야 아는 겁니다.
그걸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표적. 이적과 다른데 표적은 뭐냐? 봐도 모른다는 거예요.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보통 농담 삼아 하는데 주님께선 너를 보고 하나님 믿으란 말은, 네 모습 봐라. 그게 표적이야. 여러분 이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표적이라. 모든 게 표적이란 말이죠.
심지어 표적은 인간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을 봐라, 달을 봐라, 태양을 봐라. 거기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났다. 그게 표적인 거예요. 그게 표적인 의미를 알려면, 하나님 보니 나는 죄인이군요. 이렇게 돼야 표적인데 하나님 보고 인자하심이 발견됩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되면 표적이 아니에요. 보고도 모르는 거예요.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동주란 사람이 있어요.
서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앞에서 나는 죽어야 되고 주께서는 나 같은 인간이 아닌 새로 만들어야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을 윤동주는 몰랐어요. 그저 완벽해지기를 원했던 겁니다. 바람에 이는 잎사귀를 보고 흠 없이 완벽하게 티 없이 살기를 원했다.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오해고, 오늘날 교회가 하는 오해란 말이죠. 나는 너를 만든 게 아니고 나는 하나님 백성을 만드는데 자꾸 우리는 끼어드는 거예요. 제발 너는 빠지고 너 말고 하나님 백성 만들기를 하면서 법궤와 성막과 십계명으로 드디어 새로운 백성 만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어떻게? 기존의 인간에게 시비 걸고 싸움을 걸면서 너는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게 바로 표적의 기능입니다. 보고도 모르겠나? 모르겠습니다. 보고도 모르겠으면 꺼져라. 최고의 마지막 표적은 예수님 자신이겠지요. 예수님을 보고 알아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삼년 동안 합숙훈련해도 몰랐어요. 제자훈련의 한계가 여기 있어요. 아무리 성경공부해도 몰라요.
그 이유를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에게는 잃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것이 뭔지 몰라요. 인간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을 욕망 때문에 알게 되는데 문제는 욕망은 있는데 내가 뭘 원하는지 본인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대체 행동, 대체물들이 투입됩니다. 그게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거예요.
사람이 먹고 입고 자고 활동하는 이것은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은 들끓고 있고 정말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대체물로 어디 맛있는 것 없나, 사우나 없나, 구경거리 없나, 앙코르와트 가 볼까, 모험을 해볼까,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에 올라가 볼까? 희망이 있는 한 갑자기 자기 욕망이 만족한 느낌이 들어요. 희열을 느끼죠.
에베레스트 올라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황사현상이 있고 골치 아프고 감기 걸렸는데. 뭐야? 어딜 다녀오고 했는데 욕망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욕망아, 도대체 네가 뭘 원하는 거야? 옷을 사 입어 줘? 멈췄나? 욕망이, 아니~ 젖 줘도 울고. 투정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우는데. 뭘 자꾸 원하는 게 있는 원하는 걸 몰라. 인간은 과정입니다. 욕망이 잃어버린 걸 찾기 위해서 잃어버렸다고 여긴 것들을 집적거리면서 해보는 데 그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잃어버리고 난 뒤에 내 것이 된 인간이, 내 것이 아닌 인간을 찾아가려고 하다보니까 결코 맛있는 음식 먹고 좋아하는 스포츠 즐겨봐야 누워 침 뱉으면 어디로 떨어집니까? 자기 얼굴로 떨어지죠. 결국 자기는 나라는 것만 욕망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라는 것은 원래 내가 아니에요. 찾을 길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히 언약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을 건네 와요. 말을 건네는 순간 그때부터 인간은 짐승처럼 먹는 것, 입는 것만 찾는 게 아니고 타인이 나에게 말을 건네 오면 그 다음부터 말을 건네 온 것에 대해서 화답을 하고 답변을 하려고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앞에 빵이 있으면 먹으면 되죠. 누구한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개나 곰이나 사슴이나 인간이나 똑같아요. 먹는 것 주고 사료 주고 먹는 것은 먹기 전의 나와 똑같이 오기 때문에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누가 어이, 하고 말을 건넬 때 빵 드릴까요, 이건 아니잖아요. 우린 왜요, 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 동물과 다른 주체, 자아가 되는 거예요. 동물에게는 자아라는 게 없어요. 꼬리를 밟으면 반응은 하지만 자아라는 게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할 아담은 말을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에요.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걸어도 우리한텐 욕망이 있지요. 이상하게 짜증나는데 맛있는 잡채를 만들어 먹을까. 아니면 등산을 갔다 올까. 뭔가 미흡한 게 있고 미진한 게 있는데 뭔가 분명히 잃어버린 게 있는데 뭔지 모르겠어. 맛있는 밥으로 때워도 그때뿐이고, 또 아니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 길러 올 때 주님께서 시비 거는 게 뭡니까? 네가 백날 물 길어도 갈증은 해소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사실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리한 요구에요. 왜? 대책이 없으니까. 인간 자체가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데 어떻게 본인이 대책을 세워요. 주님 이야기는 잃어버린 게 있다는 거예요. 제가 잃어버린 게 있다고요? 아니. 네가 잃어버린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잃어버린 것.
그런데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안 찾아오면 물만 길어요. 물은 개도 마시고 닭도 마시고 소도 마시고 다 마셔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그 여인은 예수님께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큽니까, 라고 무슨 답변을 하잖아요. 답변을 하는 순간 그 여인은 뭘 아느냐 하면, 나는 물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언어를 토해내면서 잃어버린 것을 언어의 방식으로 도로 내 것으로 가져와야 만족하는 저 동물과 다른 특수한 존재라고 감잡지요.
아이큐가 50도 안 되는 아이들은 빵 주면 그냥 빵 먹어요. 아이큐가 120만 되도 선생님, 이 빵 무슨 의도 주십니까? 빵을 빵만으로 보지 않고, 빵 안에 당신의 의도 담겨 있지요? 그럼 선생님이, 빵은 그냥 빵으로 봐라. 보통 드라마에서 상견례하면서 이번 결혼 우리 쪽에서 다 할게요. 신부 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처럼 두 말할 틈도 안 주고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해요. 무슨 의도로 우릴 깔보십니까? 좀 깔보면 어때 받아 챙기면 되지.
이건 동물 싸움이 아니지요. 소위 자칭 인간끼리 싸움에서 동물에 없는 요소가 주고받고 하지요. 북한은 미사일로 주고받고 하지만. 언어로 주고받고 하지요. 언어로 주고받으면서 인간은 어디에 말려드는가? 드디어 죄인 되는 겁니다. 말씀이 없으면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되는 거예요. 이 비밀이 언어가 표적인데, 이 표적이 신약에서 밝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되지 않으면 인간은 죄인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뭘 만들어요. 가정을 만들고 토지를 만들고 건물 만들어요. 기껏 교회 나가면 하나님이 날 통해서 일했다. 이 정도에 머무는 겁니다. 끝까지 남은 몰라도 나는 구원받아야 돼, 나는 천당 가야 돼. 이것, 가짜입니다. 어린양 피 바를 때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착각했어요. 전혀 그것, 아니거든요.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양만 구원했지요. 피 흘리고 죽은 어린양을 구원한 거예요. 어린양의 피는 표적이었어요. 아무도 표적을 이해 못했어요. 왜? 인간은 잃어버린 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수요일에 언양에 개척교회 하시는 여자 목사님이 질문했어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했는데 그 죄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죄가 문밖에 엎드리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리라는 그 순간부터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추궁당할 것을 부여받은 겁니다. 끝까지. 너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한테 덮친 죄를 다스리라는 계명을 네가 못 지킬 경우에는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을 건넨 거예요. 가인은 죄를 다스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말은 뭡니까? 동생을 살해하지요.
그래서 죄를 안 짓겠다는 노력이 살인죄를 유발시킨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긴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는 원칙입니다. 착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바로 그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어로 인한 말의 건넴이에요.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살다가 지옥 갑니다. 그게 언약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지요. 그 언약은 말씀, 언어로 돼있어요. 그 언어가 건네 왔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대해 답변하듯이 행동에 나서겠지요. 지혜롭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성막과 법궤를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많은 예물을 했어요.
여러분 알다시피 그들의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지요. 하나님이 건네는 그 말에 대해서 그들은 나름대로 응답을 했어요. 제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게 아까 일번에서 이번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한 패다. 그게 잘못이에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그것으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그럼 일하는 의미는 뭐냐? 일해도 망했다는 걸 시범조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있는데 전에 가인은 살인마가 아니라고 했지요. 가인은 사람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에요. 그냥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과 아무 감정 없어요. 약간 기분 나쁘다는 정도지 죽일 마음은 없단 말이죠. 가인을 살인자로 만들려면 필히 하나님이 개입해야 돼요. 하나님의 말 건넴이 있어야 돼요. 죄가 문에 엎드려졌다는 말은, 문을 여니까 커다란 세퍼트가 있는 상태거든요. 죄가 문 앞에 있는 거예요. 가인이 빨리 기어 나오도록 기다리는 거예요. 가인이 나오면 죄가 덮치는 거예요. 죄가 덮치는 것은 가인의 생각이에요, 하나님 생각이에요? 하나님 생각이지요.
지금 출애굽기 36장에서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건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을 건네는 거예요. 똑같은 원리에요. 하나님이 죄가 문에 엎드렸다는 계획을 가인에게 주니까 가인이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죄가 가인을 다스리게 되는 거예요. 그 과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결과가 동생을 죽였잖아요. 그럼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단 말이죠. 죄를 다스리지 못한 상태가 보통 살인하면 사람을 죽여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동생을 죽였으니까 너도 죽어야 돼, 라는 징벌을 내리신 게 아니고 가인아, 너는 많은 자손을 퍼뜨려라.
그게 뭐냐 하면, 결국 가인의 자손이 퍼지면서 각자 모든 인간들은 죄가 인간을 덮쳤는데 인간은 그 죄를 이겨야 된다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긴 원리가 모든 인류에게 덮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살인자가 되도록 이미 하나님이 계획을 정해놓은 거예요. 그럼 우리가 언제 죽였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살인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말려든 거예요. 그래놓고 무슨 구원을 받아요. 하늘나라 함부로 가는 줄 알아요.
이 말이 뭐냐? 착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살인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호리라도 남기지 않고 다 해결보지 못하면 너희는 지옥 간다. 율법의 하나라도 그것도 늘 지키지 못하면 지옥 가도록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 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계명 보고 바빠서 나중에 지키고 이건 이만큼 지켰으니까 잘했다고 칭찬해주세요. 남보다 낫습니다. 이건 최선을 다해 노력중이고, 이건 나중에 하겠습니다.
주께서 말을 건넨 취지를 모르고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그것이 이미 신약에 답이 와버렸어요. 십자가로써 모든 인간은 살인자로 규정받아 죽었다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안 보고 자꾸 자기를 바라보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분을 품되 해지도록 하지 않고 술 취하지 않고 자꾸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표적이에요. 보고도 못 믿는 거예요. 마지막 표적이 뭡니까? 십자가에요.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