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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강의-에벨링 1604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17. 09:51

2016-04-12 16:58:38 조회 : 137         
에벨링 160412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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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85) 16-04-15 11:15 
20160412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2-에벨링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에벨링, 1912년, 이 사람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주 오래 살았는데 아마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백 살 넘었으니까. 이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왜 언급해야 되느냐? 그것은 이 사람이 본회퍼의 의견을 추종해요. 그래서 유명해졌습니다. 본회퍼가 이야기한 것을 체계 있게 잘 정리했어요. 본회퍼란 사람이 유명해진 것은 히틀러 살해계획에 가담해서 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또 그가 유명해진 것은 이 단어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세속화, 이것을 본회퍼가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으로, 행동으로 보여줘서 유명해진 거죠.

세속화라 하면 교회 좌파란 느낌이 강하죠. 교회 우파는 천당을 향하는 뉘앙스가 있는 반면에 천당을 향한 게 아니라 더러운 세속을 우리가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단어 자체가. 교회 우파의 천국 간다는 말은 하늘나라 그리운 사람만 가고 나머진 버려두자는 태도가 있다면, 세속화는 어떻게 남겨진 탕자를 우리끼리만 가느냐? 그들을 돌보고 건져서 가는 게 참된 교회의 임무고 사명이지 않느냐? 세속화로 잘라낼 게 아니라 경계선 그어놓고 나가라고 할 것이 아니고, 찾아갈게, 하면서 기독교의 세속화의 논리가 전개되겠지요.

방금 제가 기독교의 좌파, 우파만 이야기해도 어떤 사람을 전도, 선교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냐는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처럼 들려옵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은 본회퍼와 에벨링과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용어만 이용한 겁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우리는 하늘나라만 추구하고 따라오지 못하면 저리 꺼져. 가가가. 세상에 푹 잠겨.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 경건하게 거룩하게 살아서 예수님 만나고 천당 갈 거야, 라는 쪽으로 지향하게 되면 따라오지 못한 쪽과 하늘나라에 점점 가까이 가는 사람과 결정짓는 기준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기준이 뭐가 되느냐 하면, 더러운 세상과 함께 마음껏 더러워라. 나는 너희들과 상대 안 한다. 천국 간다는 사람은 세속화하는 사람과 반대니까 결국 쉽게 말해서 바르게살기, 또는 거룩하게 살기입니다. 그런데 바르게살기 해버리면, 마치 대구 마라톤대회 할 때 처음에 오천 명 출발합니다. 대구 동성로에서 처음에 출발하자마자 갑자기 어떻게 돼요? 마치 새떼가 날아가는 것처럼 엘리트 선수들 몇 명 앞에 있고 나머진 우르르 뒤따라가는데 많은 사람들은 점점 앞과 간격이 멀어지겠지요. 앞에는 케냐 선수고 한국 선수 두세 명 따라가고 나머진 쭉 퍼지겠지요.

바르게 살라 해버리면 속도의 차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교회에 전념했던 사람은 바르게살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고 방금 술 끊고, 담배 끊고, 방금 교회 온 사람이라면 속도가 안 나오겠지요. 마라톤 실력이 뒤처지겠지요. 갑자기 질서가 분산되면서 앞에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이 흩어지면서 새떼 같이 날아가는 모형을 맞이할 것이란 말이죠.

그럼 어느 선에서 끊을까요? 좀 뒤처지고 아직까지 술, 담배 못 끊어도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까지 내칠 것이냐는 그런 문제가 생기겠지요. 그럼 여기서 바르게살기란 말을 수정해야 됩니다. 어떻게? ‘나름대로’란 말을 집어넣어야죠. 나름대로 바르게 살만큼 살아보기에요. 바르게살기란 어느 수준에 도착이 될 때 합격이 되잖아요. 그러나 나름대로 살 만큼 살아보기는 테스트의 경향이 강하죠. 그냥 한 번 그렇게 살아보기로 마음은 먹어본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엘리트 선수 뒤에 오는 사람들도 엘리트 선수만큼 살지는 못하지만 어렵게 갈 것 없지요. 교회에서 대중기도를 시키니까 오랫동안 숙련된 공중기도를 했던 사람은 아무 떨림 없이 마이크 대고, 특히 장로들 주일 예배할 때 훈계하듯이 기도 노하우가 있을 것 아닙니까. 북한 핵문제부터 해서 줄줄 나오면 가뿐하게 3분 넘겨요. 그래서 얼마나 기도를 잘하냐 하는 것을 3분으로 끊을까요?

목사님들이야 3분이야 쉽지요. 그런데 평신도가 3분하겠습니까? 이 정보, 저 정보 어제 저녁에 10분짜리 적어놨는데 10초 안 돼서 다 까먹고 빨리 마무리, 수습은 해야 되겠고, 초초함은 벌써 들켰고,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아기는 울고, 기도의 흐름이 없느냐, 맥락이 없느냐 할 때 땀은 나고, 저쪽에서 예수 이름으로 끝내라고 하고, 속으로는 두 번 다시 기도하나 봐라, 하고 결심은 들고, 미운 장로 5분씩 하니까 따라잡으려고 했는데 그 노하우가 보통 노하우가 아닌 수십 년 노하우란 걸 깨닫게 되고. 자, 3분으로 끊을까요, 어떻게 끊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비록 그 사람이 세속에 여러 가지 습관들을 못 버리고 있더라도 방향을 천국 쪽으로 하게 되면, 세속화에서 벗어나는 우파 쪽으로 잡자. 아무리 산 도적 같이 해서 더러운 행세, 욕설 나오더라도 방향이 저 높은 곳을 향한다면 우파로 잡자는 겁니다.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면 되니까. 아무리 산 도적 같은 인간도 교회에서 흉내 내면 한 20년 지나서 장로 되면 그야말로 대중기도에서 김정은부터 해서 투표 잘하게 해달라고 하면서 3분 충분히 때울 수 있단 말이죠.

그러면 세속화가 좌파라면 우파에서 세속적인 사람을 무조건 끌어내리는 건 아니고 교회 방침에 협조하는 사람은 우리 편으로 넣어주는 거예요. 아무리 행동이 막 되먹어도 고분고분하고 당회에서 그런 짓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화투치고 그런 것 아닙니다, 할 때 끊을게요, 하고 자기 반성의 여지를 보이는 사람, 회개의 여지를 보이고 앞으로 엘리트처럼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자기 고분고분함을 보인다면 기존의 보수파에 해당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럼 본회퍼가 이야기하고 에벨링도 그쪽인데, 기독교의 세속화란 뭐냐? 방향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 감 잡았을 거예요. 저 높은 곳을 향하는 게 아니고 방향을 정반대로 트는 거예요.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이게 본회퍼가 이야기한 거예요. 왜 그런 주장을 했는가? 기존에 우파, 보수파를 보세요.

기독교의 세속화를 반대하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이렇게 되면 엘리트를 정점으로 해서 마라톤에서 오천 명이 한 곳으로 따라가죠. 그럼 여기서 무엇이 생기겠습니까?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갑과 을의 질서, 명령체계와 명령 받는 질서가 생기겠지요.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질서가 안정되지요. 경건과 거룩의 엘리트 집단이 있을 거고, 기도해도 떨지 않는, 그리고 광고하는 솜씨가 일반 사회자 솜씨를 능가하는 게 있겠지요.

다음은 장로님 광고가 있겠습니다. 광고할 때 인사말 몇 분해요. 오늘 날씨도 안 좋고 추운데 여러분 감기 걸리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교회에 김 장로, 이 장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각인시키는 거예요. 본인은 교회 최정점에 있는 엘리트기 때문에. 엘리트이기 때문에 장로 됐잖아요. 로켓의 캡슐 부분이에요.

그렇게 될 때 교회가 그런 식으로 질서가 잘 잡혀온 거예요. 튀면 안 돼요. 네가 행동을 그렇게 엉뚱하게 한다는 것은 성경말씀대로 살아서 하늘에 계신 주님과 합세하세, 하나님 만나세, 라는 확정된 보수적인 체제, 질서에 네가 튀게 되면 너는 천국 안 가려고 환장한 거야, 버티는 거야. 이렇게 반발 들어오는 거예요. 네가 장립집사 주제에 그보다 급이 높은 장로에 대드는 것은 사적으로 대드는 것이 아니고 엘리트층을 감히 중간 계급에서 대든다는 것은 천국 안 가고 지옥 간다는 것과 같이 취급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중간 층, 장립집사 층에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소위 기름 부은 쪽에 있는 사람한테 지적하거나 할 때 아이들 나무라듯이 함부로 하면 교회에서 잘립니다. 그러면 교회 목사가 문제 있고, 장로가 문제 있다고 할 때는 개인적으로 시위하듯이 하지 말고 너도 힘을 모아서 장로 되어 장로회에 참석해서 정식으로 손들고 해보란 말입니다.

젊은 청년들이 사법고시 준비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 사회에 억눌리고 가난한 자 편에 서서 정의를 실천한다고 하잖아요. 그것도 공부 잘하면 판사, 검사 되지요. 검사 되어 사회정의 실천하려고 했는데 거기 검사 선배들이 있지요. 검사장 승진 앞두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에게 바르게 하자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햇검사에게 뭐라고 합니까? “까불지 마, 가만있어. 너만 검사야. 나도 수십 년 했어.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검사조직이 와해돼.” 자기는 정의 실현하겠다고 왔는데 막상 조직에 들어가 보니까 조직 내의 서열이 있고 위의 말을 들어야 할 때 거기서 사회정의하려면 자기도 빨리 승진할 수밖에 없지요. 승진하려면 윗사람의 말을 들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럼 변호사해야 되겠네? 그러나 변호사해서 사회정의 하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지금 나오는 법조인 드라마들 아닙니까. <시그널>도 마찬가지고. 나쁜 사람 잡는다고 경찰했는데 위층이 전부 돈과 관련된 범죄 집단이 됐을 때 할 수 없이 1990년대 신호 받아서 그런 식으로 정의사회 구현해야 되잖아요. 이게 목사 세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면 세속화란 뭐냐 하면, 방향을 엘리트 방향으로 틀어서는 안 되겠지요.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으로 향하는 거예요. 낮은 곳을 향하면 기존의 보수층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 그런 식으로 해선 아무리 목사라도 지옥 가.” 기존에 압력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거기서 본회퍼가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본회퍼도 목사잖아요. 우리가 목사지만 목사를 덮고 있는 게 뭔지 알아야 돼요.

목사를 덮고 있는 게 성경입니까, 전통입니까? 전통이에요. 그게 바로 노회에요. 교단이잖아요. 성경은 관계없어요. 교단은 교단법이 있고, 노회법이 있어요. 교회법이 있다니까요. 그래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간적인 법보다 성경이 더 우수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천주교에서 이야기한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개신교가 하는 거예요.

성경이 옳은 데 성경해석을 누가 하느냐? 성경은 있지만 그걸 전통적으로 해석하는데 이걸 권위라고 해요. 천주교 권위는 교황에게 있고 개신교의 권위는 노회에 있고 장로, 목사의 모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가 천주교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라니까. 천주교의 권위가 교황에 있는 게 아니에요. 교황은 상징적 자리에 불과한 겁니다.

조선건국에서 정도전이 추구한 세계는 임금의 세계가 아니에요. 엘리트 유교학자들의 나라입니다. 경국대전의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나라 같으면 헌법인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거예요. 그걸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귀족정치에요. 귀족정치가 민주주의라는 겁니다. 내일 총선은 엘리트를 뽑는 거예요. 엘리트는 뽑아놓으면 엘리트는 계급이 되고, 자기를 뽑은 대중들은 부하직원들이 되는 겁니다. 별 볼 일 없어요. 표만 쥐면 되니까. 엘리트들이 법을 만들고 법에 의해서 국가가 돌아가고, 그게 의회주의고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면 국회 없애고 다르게 민주주의하면 안 되느냐? 국회의원 없애버리고 혼자 하면 되는데, 그 사람이 뭘 해야 되느냐 하면, 국민들에게 생활비를 줘야 돼요. 이게 보루네오 왕국입니다. 보루네오 왕국은 석유를 독점한 왕이 국민들의 복지부터 생활비 다 줘요. 그래서 국민들은 다른 나라로 이민 갈 필요 없어요. 물론 이민 받지도 않고. 그러니 알아서 임금을 섬깁니다. 돈을 주니까. 돈도 안 주면서 돈 주는 행세하는 게 바로 북한이에요. 어버이 수령님 덕분에 산다는 겁니다. 무슨 국회의원이 필요합니까? 무슨 법이 필요해요. 경제를 살리는 자가 그 시대의 임금이에요. 잘 살게 하는 자가 임금이에요.

그래서 경상도, 대구, 경남은 박정희를 잊을 수 없는 겁니다. 지독한 가난한 나라를 새마을운동으로 살려냈잖아요. 그 영웅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인간이 민주주의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민주주의 필요 없어요. 자기 배고픔을 채워주고 놀아도 세상 부귀영화 누릴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무슨 정치를 원해요? 돈을 원하지. 그래서 마르크스가 정치란 경제의 확장이다. 경제란 기초에 입각해서 나온 환상에 불과한 것이 정치다. 정치꾼들은 뭐냐? 노동자를 착취한 자본가들을 위해서 국회가 있고 그들이 뽑아낸 게 대통령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나오지요. 서로 내 것이라 하지 않고 나누는 사회, 그걸 공산주의 사회라 합니다. 마르크스가 신학을 했기 때문에 그 사회를 구현한 겁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거쳐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레닌이에요. 스탈린이고 모택동이고 김일성이고. 그런데 중국 어떻게 됐습니까? 재벌 같은 사람들이 정보를 다 뒤고 있어요. 돈이 있어야 권력 쥔다는 것을 중화인민공화국이 다 보여주고 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교회의 보수파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제가 강의하면서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교회, 배부른 자의 오락 아니에요? 지금 배고픈 데 신이고, 죽어서 가면 되지, 살아서 왜 신을 섬길까요? 배부른 자들이 모이는 친목단체가 교회란 이유는, 지금 얼마나 배부르면 하늘을 쳐다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교양? 경건, 거룩, 이건 따지고 보면 여유 있는 자들의 교양 학습하는 것이란 말이죠. 부족합니다, 여러분 마음 낮추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교양 아니에요? 이웃을 사랑하고 마음을 낮추려면 그만한 인격으로 넘어올 여유가 있는 밑바닥에 경제적인 여유가 확보한 다음에 구제하듯이 저 아프리카에 우물 파주고. 우물 파주는 사람이 누굽니까? 돈 있는 연예인들 아닙니까. 만날 히말라야 찾고, 달라이 라마 찾고, 네팔 가는 사람들 누굽니까? 못 살아서 간 사람들이에요? 잘 사는데 돈 버는데 스트레스 받아서 스트레스 풀려고 히말라야 올라가는 거예요.

왜 보수파가 그렇게 교양 있느냐 하면, 돈 안 되는 인간들 다 떨어내서 그래요. 십일조 안 하면 나가. 집사 승진 안 시켜주면 나가란 뜻이에요. 십일조 안 하는 집안이 권사? 그 말은 돈 있는 집안만이 권사, 장로 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돈 있으니까 인격들이 대단하지요. 교양 있고 여유 있고 말을 해도 좋게 이야기하고. 십일조 한 달에 천 원씩 내야 백날 해도 장로 안 됩니다. 노가다를 장로 시키는 그런 교회가 어디 있어요. 당신이 될 때 얼마 냈어? 교회 교육관 지을 때 경제적인 보탬이 있어야 승진되지요. 제는 깜짝 놀랐어요. 요새는 교회에서 팀장 제도한다고. 교회가 팀장으로 돌아가 책임을 묻는다는.

그렇다면 본회퍼의 세속화는 뭘까요? 하늘나라를 쳐다보는 게 아니고 소위 떨어져나간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 돌리는 거예요. 기존에 보수적 기준으로 관심 돌리면 안 오지요. 그렇다면 기준을 바꿔야 되지요. 그 기준을 바로 본회퍼는 십자가로 본 겁니다. 에벨링이 초반에 불트만을 넘어서 루터의 영향을 받았다고 돼있는데 루터의 신학을 실제로 실천적으로 옮겼다고 소문난 누구냐 하면, 본회퍼에요. 미친놈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그걸 가만 두나? 운전대 뺏어야지. 그냥 본회퍼하면 최초의 세속화 신학의 아버지라고 보면 돼요. 그 사람이 간 곳이 교회가 아니고 감옥이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본회퍼와 에벨링은, 이런 걸 설명하는 걸 제가 감사히 여기는데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정치는 파워, 권력이 있어야 정치가 되거든요. 제가 서양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정치적 힘은 어디서 나오던가요? 식민지 정책이라든지, 금융자본주의의 초기가 유럽이잖아요. 이탈리아로부터 알프스를 넘어서 네덜란드에서 꽃이 피고 영국으로 건너가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활짝 핍니다.

정치는 경제 힘이죠. 그전에는 귀족이었는데 상공인으로 바뀌어요. 상공인은 무역과 산업을 통해서 돈/자본을 가진 거예요. 자본을 가진 자가 정치적인 힘으로 빼앗아 온 거예요. 전에는 신분제지요. 신분제도 그냥 되는 게 아니고 토지가 있어야 돼요. 토지는 고정적인 자산이잖아요. 그런데 무역은 주고받는 데서 이윤을 창출하는 거예요. 백날 토지 갈아봐야 가뭄 들면 완전히 다 망쳐요. 미국 초창기 이민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아일랜드 사람들이거든요. 왜 건너왔느냐 하면, 가뭄 들어서 감자농사가 80%가 날아가 버렸어요. 19세기 초반에. 못 사니까 약속의 땅으로 간 거예요.

그전에 1600년대에 청교도가 지금 버지니아 쪽에 내려서 올라가죠. 인디언과 협상하고. 사실은 인디언을 속인 건데. 아메리카 대륙의 경작 방법은 인디언들이 노하우를 갖고 있었지요. 옥수수 등 작물농사법을 배운 거지요. 배우고 난 뒤에 인디언들을 다 죽였지요. 이게 자본의 힘입니다.

아무리 본회퍼가 세속화해도 세속 사람들이 못 살고 어렵고 교회 안 나오고 삐지고 나간 사람들이 마음속이 순수합니까? 이 사람들은 깨끗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권력을 원해요. 그들은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생각 안 하고 내가 못 살고 몸이 아픈 것은 사회가 더러워서 내가 못 사는 거니까 어떤 위대한 영웅이 등장해서 날 잘 살게 하면 아낌없이 바칠게, 라는 노예근성, 거지근성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본회퍼가 말한 세속화할 때 대중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는 게 아니고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라고 할 때 그들이 그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게 아니고 뭐로 받아들이겠어요? 그렇지, 이렇게 가난한 자를 내칠 하나님이 아니지. 여전히 앞서서 가는 엘리트와 동일한 심보로 빨리 엘리트 자리에 부자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그야말로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메시아 같은 그런 교회, 그런 정치꾼들을 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정작 본회퍼가 이야기한 것은 그게 아니에요. 206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봅시다. [성경은 자기 스스로 해석한다.] 이게 바로 세속화에요. 인간들의 경제적 욕구, 정치적 권력 추구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성경은 자기 스스로 해석한다. 그럼 이 말에 담긴 의미가 뭐냐 하면, 그 밑에 [성경주석과 교의학 사이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긴장]이라고 나와 있지요. 그게 바로 교리에요. 본회퍼 생각은 굉장히 간단하고 명쾌합니다.

제가 이걸 구호처럼 적어볼게요. 하나님과 관련해서 정확하자.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더럽다. 너 때문에 나 이렇게 가난하다. 남 핑계대지 말고 나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정확하게 사느냐? 여기에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게 하나님 보기에 정확하게 살아가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일반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기 바빠 교회도 몇 번 못 나가고, 기도도 10초면 끝나고, 헌금도 몇 푼 못했고, 위대하신 당회장님과 노회장님, 장로님들 정확하게 살고 있는데 우리는 못 살아요.”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그게 교리란 말이죠. 그러니까 기존의 교리를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확한 게 아니에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살려고 시도하면 정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바르게 살려고 한다면 거기에 모범답안이 먼저 선점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본회퍼는 모범답안을 없애버리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데? 그 상황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은 스스로 자기가 해석한다. 성경말씀이 그런 상황을 유발했고 성경 속에서 정답이 알아서 우릴 통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에벨링의 주장이고 본회퍼의 주장입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의 모범답안을 당신은 어디서 참조했고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교회 목사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그걸 없애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환상이고 가짜에요. 저 높은 곳을 향한 그게 잘못된 거예요. 당신이 사는 현장에 정답이 거기 있어요. 그 자리를 하나님이 밟았던 자리고 그 자리가 예수님이 오셨던 자리입니다.

그 뒤에 봅시다. [에벨링은 기독교 신앙이 지니는 세계적 현실의 연관성을 본회퍼로부터 이어받고 있다.] 신앙이 무엇과 연관돼있다? 세계적 현실의 연관성, 현실과 연관돼있다는 겁니다. 그럼 현실은 뭐냐? 신앙이란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돼있지요. 이 말은, 그럼 신앙을 유발하는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까, 말씀이란 말입니까? 말씀이죠. 인간은 반응물에 불과하니까. 말씀이 스스로 움직이는 반응 결과물이 신앙인이란 겁니다. 이게 본회퍼고 에벨링이에요.

그게 그 당시나 모든 시대에 새롭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그만큼 우리는 교리에 둘러싸인 거예요. 보수파 교회에서 교리가 권위지요. 성경말씀이 교리를 만드는 게 아니고 성경말씀의 권위 있는 해석자들의 전통과 내려오는 신학체제, 교리들이 그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어긋나는 쪽으로 자기들만의 엘리트 단체를 만들어왔다. 그 단체가 바로 히틀러한테 투표한 거예요. 히틀러가 쿠데타 일으킨 게 아닙니다. 투표로 당첨되어 그 다음에 자기를 반대하는 야당들을 수용소로 보낸 겁니다. 친위 쿠데타지요.

그렇데 자신만만하게 야당들을 없앨 수 있는 이유는 일반 대중의 용인과 묵인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51%를 가지면 모든 걸 다 가진 게 되지요. 다수당의 횡포. 지금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이슈가 뭡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했던 모든 경제법이 다툼 때문에 실효성이 없어서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으니까 제발 새누리당에 표를 몰아줘서 과반수이상의 의석을 차지해서 나라가 잘되게 해달라고 지금 읍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히틀러는 이미 그것을 실현에 옮긴 거예요. 그 당시 독일국민들이 히틀러 말만 믿고 표를 던졌겠어요, 아니면 히틀러에게 무슨 실적이 있어서였어요? 실적이 있었지요. 그게 바로 전쟁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본회퍼가 반발하는 거예요. 저 높은 곳이 아니고 오히려 좌파를 자처해서 저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은 대중들이 날 호응해서 기대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히틀러나 대중들이나 똑같아요. 세상 전반에 대해서 너희들은 하나님이 정확하게 이야기한 바를 모르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을 정확하게 반응을 나타내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그 정확한 게 뭐냐? 정확한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없는 기독교. 신이 없다는 말은 본회퍼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냥 계시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돼요.

208페이지 봅시다. [기독자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속하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이 세계에 속한다. 그리스도는 이 세계의 주이시며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의 주도 되신다.] 신이 없는 기독교를 외쳤던 이유가, 그동안 하나님이 뭘 제거해버린 거예요? 실제로 정확하게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성을 인간들의 교리에 속한 하나님이 그걸 감추고 덮어버리고 삭제시켜 버린 거예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동안 덮어왔던 뭘 벗겨내야 돼요? 신을 믿는 신 있는 기독교를(삼위일체 하나님이죠) 있음을 없음으로 바꿔야지요.

제가 예를 들 테니까 본회퍼의 취지가 어떤 내용인지 여러분 아시기 바랍니다. 총신에서 배웠던 개혁주의를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한국교회는 썩었다. 목사들이 돈 밝히고 바람피우고 목사들이 섬기지 않고 갑 질해서 교회 키우려고 했으니까 그런 목사들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잘못됐다. 그래서 교회는 개혁돼야 된다. 교회가 주의 말씀대로 개혁주의신학으로 돌아가서 목사는 바른 말씀 전하고 장로는 섬김이 있어야 된다고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주장이 본회퍼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지요.

방금 이야기한 총신 나와서 개혁주의 했다고 했을 때 이상적인 교회를 버린 거예요, 추구하는 거예요? 추구하죠. 본회퍼는 그게 아니라니까요. 이제 본회퍼의 사상을 알겠습니까? 이상적인 교회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 이상적인 교회를 이상화시키기 위해서 뭘 내치겠습니까? 이상적인 교회 상 자체가 교리가 돼버려요. 교리가 되면 소위 정말 제대로 한 사람이 전통과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 기존에 하는 것이 이상적인 교회를 추구하는 엘리트들이 모였기 때문에 거기에 안 맞는 것은 제거해야 되는 거예요. 질서 위반자로 간주해서.

총신 나와서 개혁주의 공부 잘해서 한국교회는 썩어서 개혁해야 돼. 그래서 바른 교회해야 돼, 하는 생각이 본회퍼 생각과 같습니까? 다르지요. 본회퍼는 교회가 중심이 아니고 말씀이 중심인 거예요. 말씀이란 본회퍼 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말씀이 현실 세계에서 구체화되게 되면, 바로 이 세상에 불경건한 자와 경건한 자 모두의 주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미움 받아, 상처받아 배척받으신 그분의 말씀의 활동성, 지금 활동성이 말씀의 활동성과 일치되고 어떤 이상화된 교회가 아니라 우리 삶 속에 구석구석 십자가 정신이 살아서 파급을 일으키고 그 반응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성도라는 것이 본회퍼와 에벨링의 사상입니다.

208페이지 중간 이후에 [이 양자가 만나는 장소는 ‘양심’이다. 양심 때문에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 없이 신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양심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양심대로 측정하거나 판단하거나 남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본회퍼의 히틀러 제거작전이 일반적인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는 기준 자체를 본회퍼는 거부하지요. 왜? 쉽게 말해서 본회퍼가 기존의 목사들아 나도 한 양심하거든요. 너희들이 말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나도 알거든. 하지만 미친 인간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빼내야지 거기에 자기 착한 양심을 유지하면서 저러면 안 되는데, 하고 말만 해야 되겠어, 아니면 직접 폭력을 써서 히틀러를 그 자리에서 내려야 하는지, 그 당시 독일교회에 묻는 거예요.

여러분 답변 듣고 쉽시다. 그냥 말만 할까요, 안 그러면 폭력과 테러를 하더라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야 그 상황에 맞는 주의 뜻인지? 말만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지 양심 자랑하는 게 옳으냐 이 말입니다. 답변 없으면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4.♡.134.85) 16-04-15 11:16 

201604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2-에벨링
(강의:이근호 목사)


208페이지 봅시다. [신을 세계적 존재의 보완 내지 초월, 보험 내지 확증으로 이해하는 것도 신에 관한 이상적인 사고이다.] 이상적 사고가 잘못됐다, 이건 보수적 사고란 말이거든요. [신을 보증하는 수간이 되어 버리는 가장 경건한 작업은 가장 신에 관한 불경건한 사고이다.] 경건한 것이 가장 불경한 사고방식이다. 왜 그럴까요? 신이 있어야 된다는 그것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본회퍼와 에벨링은 신을 벗겨내려는 거예요. 인간들이 만든 가상 신에 의해서 진짜 신이 질식당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데 인간은 경건을 표방하면서 보수적인 신으로 거짓 질서체제를 만들어냈으니까 이걸 뜯어내려고 하니까 더욱 더 경건하겠지요. 그럼 가장 경건한 것이 가장 불경스러운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벨링은 다음 결론에 도달한다. 신에 관한 모든 진술은 신에 관한 세속적 진술이다.] 이 말은 신이 엉터리란 말이 아니고 정말 제대로 신을 이야기하려면 신이 없는 세속 이야기를 해줘야 그것이 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 다음에 209페이지. 그러면 이것을 체계화시킬 수 없는가? [에벨링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신에 관한 세속적 진술을 구체화시킨다. 첫째, 신에 관한 진술은 내면성, 곧 양심을 향해서 말한다. 양심은 세계와 신이 만나는 처소이다. 여기서 죄와 용서의 체험이 구체적으로 일어난다.]

첫 번째를 에벨링은 상당히 중요시여깁니다. 하여튼 에벨링을 이해하고 본회퍼를 이해하려면 기존 것부터 먼저 이해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결단을 내려요. 무슨 결단이냐 하면,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겠습니다. 결단을 내리고 난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는 게 있다는 겁니다. 너는 이제부터 새로운 피조물이다. 결단 내리고 받을 것 받아 챙기면 이익이죠. 이런 흥정은 괜찮은 장사 아닙니까.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면 새로운 피조물답게 앞으로 살면 되지요. 양심껏 바르게 살면 되지요.

성경 자체가 두껍잖아요. 그 안에 지시와 명령으로 가득 차있지 않습니까. 그전에는 신에게 결단을 내리지 않고 신을 주라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 몰라라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한 이상은 무시할 수 없고 그걸 지킬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로 받았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양심껏 그것을 지키면 되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기존 세계에서 양심이란 바르게살기 위한 준비단계가 되는데 에벨링은 이것을 거부하고 소위 바르게살기 위해서 갖췄다는 양심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양심 자체가.

그럼 하나님이여, 제가 바르게 살겠습니다. 결단 내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위해 살겠습니다, 라는 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에벨링이 이러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반대하겠어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 살래요? 그래도 되겠네? 비꼬듯이 말하겠지요. 그것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럼 결국 에벨링 입장에서는 결단하나 안 하나 전부 죈데 사람들은 교리나 자기 양심에 따라 결단을 내림으로써 자기가 알아서 죄에서 의가 된 것처럼 그렇게 갖추어진 양심이 돼버리죠. 그러면 이 양심은 이미 양심 만들기부터 괜찮은 양심 만들기 작업에 본인의 결단이니까 본인의 손길이 가있지요. 그러면 이런 양심으로 바르게 산다 할 때 여전히 무엇이 작용하겠습니까? 자신의 결단력과 결심과 의지, 지식과 실천력, 이것이 계속해서 투입된단 말이죠.

그러면 성경은 들러리가 되지요. 자기가 잘났음을 증명해주는 들러리밖에 더 되겠어요? 나 이만큼 훌륭하다, 이만큼 착하다, 이만큼 대단하다는 그것을 뒷북치듯이 그걸 증명해주는 들러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제가 첫째 시간에 말했듯이 성경 스스로가 해석자고 스스로 활동한다는 그것은 기존의 교회에서는 없는 거예요.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여행 가서 바르게 살지. 이게 기존의 인간들 세상이라면, 에벨링이 볼 때 반대하는 쪽이라면, 여행 보내주셨네. 이게 바로 에벨링적 사고방식이에요. 확실하게 차이 나지요. 눈이 나쁘다. 그러면 내가 죄를 지어서 눈이 나쁘구나. 이건 기존의 교회라면, 눈 나쁘게 하면 나쁘지, 뭐. 이게 에벨링이라니까. 왜 그러냐 하면, 그런 자세가 용서를 말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첫째 양심인데 양심은 죄와 용서의 체험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그러면 한 번 일어나면 끝나겠습니까? 계속해서 용서가 일어나고, 계속해서 용서가 일어나려면 계속 죄가 일어나야 되겠지요.

그러면 죄 짓기 위해서 우리가 죄를 지어야 되겠네? 수백 번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막 살아서 죄 지으면 용서가 되니까 막 살아도 되겠네?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막 비비 꼬듯이. 거기에 대해서 에벨링은 말씀 자체가 이 세상을 전면적으로 죄 된 세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지금도 쉬지 않고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비꼬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의 활동을 안 믿는 거예요? 자기 활동만 믿지 현재 작용하는 주의 살아있는 말씀을 배격하고 안 믿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요리해서 구원받은 자로 확인하려는 죄를 또 짓게 되는 거예요.

[둘째, 신에 관한 명료한 진술이다(명료하다는 말은 정확하게). 양심과 함께 그것은 신앙과 관계한다. 신앙은 이성을 조종하지 않고, 이성을 냉철한 고백 아래에서 자유하게 한다. 이 신앙의 자유는 신을 신 되게, 세상을 세상 되게 하며 양자를 혼동하거나 분리시키지 않는다. 신에 관한 세계적 진술은 세계에 대한 경건한 진술이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이 벌이고 있는 일을 네가 나서서 막지 말란 말입니다. 이랬으면 좋겠네, 나는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네, 라는 그 말이 지금 벌이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짓이 된다. 고백이란 그런 고백이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고백이 나와야지 나는 이렇게 해서 내가 이렇게 훌륭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고백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에벨링이 두 번째 이야기해요.

[신앙은 이성을 조종하지 않고, 이성을 냉철한 고백 아래에서 장하게 한다.] 참 말이 어렵지요. 제가 어떻게 하며 살까요? 이렇게 하며 살까요, 라고 조종하는 게 아니고 네가 어떻게 하든 그걸 사후에 찾아가서 거기서 믿음을 요구한다 이 말입니다. 네가 한 것이 네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한 것으로 믿느냐, 주께서 벌이시는 일인 것을 네가 인정하느냐고 고백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 뜻이에요.

세 번째, 세 번째 하니까 첫 번째 것 잊어버렸지요. 첫 번째는 죄와 용서는 계속 돼야 된다. 한 번 결심해서 죄 문제 해결하고 이제는 바르게살기가 아니고 계속 돼야 된다. 두 번째는 주께서 이 현실 속에 침투해서 말씀이 움직인다. 세 번째는 신에 관한 사건적인 진술이다. 세계와 신을 연결시키는 것은 말씀이다. 이 말씀은 추상적 진술이 아니라 구체적 말씀 사건이다.]

에벨링의 신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건입니다.
에벨링 신학의 문제점은 끝날 때쯤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건이란 수직적인 만남이에요. 인간의 자아의식은 과거, 현재를 거쳐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 이런 직선적 사고방식 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시간 자체가. 이 좁은 폭 외에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요. 묵시적 안목이란 인간에게 나올 수 없어요. 오직 인간은 직선적 사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끔 천국을 상상하는 것은 직선적 사고방식에서 유발된 효과에 불과한 거예요. 역시 핵심은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는 과거 기억의 집합체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나라는 것은 어디 있느냐? 서랍장을 정열하면서 ‘나’가 있어요. 서랍장에 양말 넣고, 속옷 넣고. 서랍장은 질서체제지요. 나는 이런 경우에 분노하고 이런 경우에는 감동한다. 그것이 내 안에 서랍장처럼 정리돼있어요. 그래서 누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다면 난 감동 먹어요. 그리고 어떤 죄인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는데 훌륭한 변호사의 변호로 무죄로 판결나면 우리는 감동 먹습니다. 그런데 돈 있는 재벌3세가 여자와 놀고 패악 질하면 우린 분노해요.

그러면 자아는 어디 있습니까? 이런 건 감동 먹고, 이럴 땐 분노한다는 그런 감정이 나타날 때 비로소 같이 등장하는 게 뭐냐? 누가 그렇게 한다고 할 때 주체, 자아가 등장해요. 자아가 먼저 있기 전에 서랍장, 질서부터 먼저 있는 거예요. 질서는 과거의 체험에서 나와요. 체험들의 정리정돈 되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혼자 살 수 있겠어요? 같이 사는 것이 좋습니까, 혼자 사는 게 좋습니까? 같이 사는 게 좋아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같이 살면 좋지요. 마음이 맞는다는 말은 서랍장 구조가 동일하다는 뜻이에요. 그걸 맞장구쳐준다고 해요. 맞장구쳐줄 때 아이들은 말을 하기 전에 엄마 품 안에서 엄마의 시선을 응시하면서 맞장구를 배우게 돼요. “어이구, 잘한다.” 이것을 말은 못해도 감을 받게 돼요. “그건 안 돼.” 이러면서 아이들 마음속에 서랍장이 만들어져요.

그걸 프로이트는 초자아라고 해요.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 어릴 때부터 엄마로부터 그걸 들었기 때문에 나는 늘 칭찬받아야 돼, 라는 것을 계속 견지하고 유지해야 돼요. 그게 세상사는 보람이 되고 희망입니다. 나를 유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잘한다, 너는 그걸 가질 자격 돼. 박수 쳐줄게.” 어릴 때 잘한다는 나에 대한 독려와 협조와 후원이 나의 자아가 되어 그렇게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을 여전히 또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선 볼 때 취미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이, 나는 개구리 잡는 게 취미입니다, 이럴 때 말을 잘해야 돼요. 나는 개구리 잡아 죽이는 게 취미입니다. 이러면 서랍장이 안 맞아요.

당신이 분노할 때 같이 분노하고, 감동 먹을 때 같이 감동할 때 어릴 때 나를 잘했다고 칭찬하던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빠, 엄마를 커서도 벗어난 적이 없어요. 아빠, 엄마의 아우라에서. 그게 나니까. 잘한다는 잘난 자식이 나니까. 나는 절대로 못난 자식이 아니에요. 아무리 세상에서 나쁜 짓해도 집구석에 들어가면, “내 자식 왔나, 누가 너를 욕해, 내가 대신 돈 물어줄게.” 이렇게 나를 반겨주고 품어주고 어릴 때 낭만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그래서 부모 죽으면 그렇게 울어요. 부모의 죽음과 동시에 나도 같이 죽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가 고독입니다. 왜? ‘나’가 없으니까. 내가 없는데 죽으면 어때요. 죽어도 괜찮아요. 내가 없는데. 나라는 것은 누가 물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내가 등장하거든요. 뭔가 주고받는 상대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도 나한테 물어본 사람이 없어요. 이건 내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에벨링은 단선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이런 세계가 동일한 서랍장을 만나면 집단이 되고 교회가 되고 국가가 되고 마을이 돼버리죠. 집안이 되고. 에벨링이나 본회퍼는 말합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조성된 집단 양심이죠. 집단 양심은 여기서 도덕이 생기고 옳고 그름이 이미 판정 나버려요. 이게 권위가 되고 통제 받아야 되고 강제로 윤리도덕에 소속되지 않으면, 너는 우리 사람 아니네, 라고 추방되면 외로워져요. 외로워지면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없어요. 그럼 사나죽으나 아무 의미 없으니까. 어쨌든 집단에 머물려면 서랍장 정리를 잘해야 돼요. 정리를 잘하려면 동일성으로 갖추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에벨링이나 본회퍼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왔을 때, 예수님이 버림받았지요. 버림받으면서 직선적 선에서 버림받으면 구멍이 생기겠지요. 빠져나온 구멍에서 다시 성령이 오게 되면 이건 우발적인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왜 우발적인 사건이냐 하면, 우리는 개인이 아니에요. 단체에 속한 개인이에요. 집단의 일부로써 개인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옛날 예수님을 추방했던 그 세력과 한 통 속인데 우리가 받아줄 수 있는 여지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이것 마귀 아냐? 우리 입에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나의 정체성은 이미 기존의 동일성에 포함돼있기 때문에 나만의 개성이 아니거든요. 나를 잘했다고 칭찬하는 그쪽 윤리도덕으로 무장돼있단 말이죠. 그쪽 윤리도덕이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살해당한 분이 들어올 때 우리한테 결단, 판정받음이 필요할리 없단 말입니다.

여기서 에벨링은 이야기합니다. 기존의 모든 기독교가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의 동의를 받고 들어왔단 말이죠. “그렇지, 이렇게 훌륭한 분이구나. 나를 천국 보내려고 이렇게 애를 썼구나. 저렇게 십자가에 희생하다니. 저런 분이 어디 있어?” 이게 전부 다 가짜에요. 조작된 거란 말이죠. 내가 나를 조작한 거예요. 예수님과 관계없고 내가 원했던 메시아 상을 일방적으로 그동안 구축된 사고방식으로 조작된 거예요.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예요.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거기다가 성경 전체를 외우고 맨날 이야기해봐야 우리는 이걸 왜곡되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에벨링은 말했잖아요. 인간이 해석해서 받아들인 게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해석해요. 이 말은 인간의 양심에 의해서 해석한 모든 것에 구멍을 뚫는단 말이죠. 이걸 찢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총신 나왔다. 개혁주의신학했다. 아무리 따져봐도 이것보다 완벽한 신학은 없다.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너희 힘으로 천국 못 가. 내 힘으로만 갈 수 있어. 십자가 사랑으로 오셔서 하나님 형상 집어넣어서 그동안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서 말씀 못 지켰는데 이제는 성령으로 하나님 형상을 본받아서 바르게 살아서 훌륭한 사람 되는 이것이 진리고, 이 진리를 천주교한테 빼앗겼는데 천주교에서 벗어나서 전통적으로 권위 있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그대로 우리한테 주어졌으니까 이렇게 완전한 교리를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랴.

그래서 에벨링의 이야기를 안 들으면 그동안 우리 신학의 오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요. 그걸 저는 한 통 속이라 했고, 다만 문제는 이게 옳은데 너무 목사가 돈 밝히고, 갑 질하고, 교회를 사업체로 만드는 이건 고쳐서 교회 부흥 위주가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야 된다, 라는 말씀운동을 개혁주의에서 말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심지어 이단도 그런 소리해요.

젊은 목사가 큰 교회에 부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외치는 게 교회가 교회다워야 된다고 외치잖아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한 게 삼청교육대 만들어서 문신한 사람 다 잡아넣었잖아요.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가 뭡니까? 내가 당신들이 원한 깡패들을 잡았으니까 나는 정의로운 대통령이라는 걸 부각시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인류역사가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다 그런 줄 알았는데 본회퍼가 등장했고 에벨링이 등장했단 말이죠. 에벨링이 사건을 주장했지요. 에벨링의 주장이 왜 독특하고 획기적이냐 하면, 기존에 바르게살기는 바르게 살아서 미래지향적이었어요. 아무리 개혁해야 바르게 해서 아름다운 미래를 꾸미세,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런데 에벨링은 아름다운 미래가 아니에요. 직선적, 과거-현재-미래에 구멍을 뚫는다니까. 역사가 아니라 사건, 사건의 반복이에요. 미래를 미리 내다보면 미래 그 자체도 우상이 된다. 또 괜찮은 미래를 쥐려는 우상이 되는 거죠.

세 번째 구체적 말씀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말씀이라 하면 개혁주의 전체가 우리는 교회 위주가 아니고 말씀 위주다. 루터, 캘빈도 그런 이야기했으니까. 그건 너무나 상투적인 거고. 사건이에요. 사건은 시간에 관한 진술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진술.

[이 말씀 사건 속에서 신은 세계의 주가 되시고, 세계는 신에 속하는 신의 창조물이 되낟. 이 세속적 신 진술을 에벨링은 기독론적으로 정초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 속하는 자로서 기독자는 이 세계 속의 삶이 신에 관한 세속적 진술에 대한 본래적 수련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진술은 경험으로 나아가며 신앙의 처소, 곧 세계 속의 경험 속에서 완숙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시간을 드릴로 뚫는 거예요. 그동안 인간들은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를 보기 때문에 눈이 미래로 가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십자가 사건으로 뚫어버렸지요. 뚫린 구멍으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현재 주님을 배격했던 세상 모두가 죄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로 살해한 동기가 나왔던 원천지가 되는 겁니다. 전체가. 구멍을 뚫고 성령께서 십자가로 온다는 말은 잘해보자는 게 아니고 전체가 죄인 것을 한꺼번에 다 알게 되지요. 이것도 사건이에요. 미래, 10년, 20년 기대해봐야 같은 우물이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이걸 제가 방금 죄라 했지만 여기선 세속적이라 했어요. 세속적인 삶/세상에 사건이 터지면 이 세속적인 사건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서 보다 깊이 있는 내용을 쏟아내는 수련, 정보, 체험을 반복적으로 내놓아야 합당하다. 별로 어렵지 않지요.

209페이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에도 의미를 전환시키는 근본 해석학적 작업이, 불트만에 의해 근본적으로 신화시대의 문화로부터 계몽을 통한 신화 이후의 세계로의 전환된 견지에서 수행된 것과 달리, 에벨링은 이 해석학의 작업을 신학의 전분야로 전개시켰다.]

불트만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단어 뒤에는 개념이 붙어있어요. 신화적 개념, 비과학적 개념이란 말이죠. 비과학적 개념은 세 토막으로 나누는데 땅 밑, 땅, 하늘, 세 개의 세계관이에요. 땅은 현재 우리가 보는 세계고, 땅 밑은 죽은 자들이 집합하는 곳이고, 하늘은 하나님 계신 곳이다. 그러한 세계관에 의해서 성경 단어들이 뽑혀 나왔단 말입니다. 단어 뒤에는 신화시대의 사고방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화투를 보면 요새 그림입니까? 19세기 일본의 세계관을 반영해주죠. 거기에 비닐우산은 안 등장하죠. 11월, 비를 보면 어떤 노인이 종이우산 들고 있잖아요. 개구리 나오고. 19세기, 20세기 초반에 비근대화 시대에 나오는 일본 그림들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신화의 글자를 해석을 과학 식으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불트만은. 땅 위에 전리층이 있고 우주가 있지요.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현대인들에게 먹혀들기 위해서 신화적 해석을 비 신화적 해석으로 바꿔서 설교해야지요. 이게 바로 불트만의 생각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다르게 한다는 거예요. 불트만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성경이 납득이 되도록 일치되도록 서랍장이 같은 서랍장이 되도록 설득하는 쪽이라면, 에벨링은 설득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이 스스로 드릴처럼 뚫고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들이 등장하면 우리는 죽었던 이유를 더 깊이 아는 그것으로 성도로서 자기 할 일을 끝내면 된다는 겁니다. 평생 동안.

우리가 어떤 것을 이성적으로 납득하면 또 하나 나의 세계의 시작이에요. 나의 서랍장의 시작이로 주체성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조작한 내 입맛에 맞는 예수, 하나님을 믿는 셈이 되기에 잘못됐다는 것이 에벨링의 생각입니다. 아시겠지요?

210페이지 봅시다. 세 번째 단락을 보면,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의 본질은 로고스]라고 돼있지요. 이것을 제가 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에벨링이 언어에 대해서 언급할 때 말씀 사건이니까 언어 사건이에요. 언어를 통해서 사건이 나온다는 것은 하이데거가 먼저 이야기했거든요. 하이데거는 언어의 본질은 로고스인데 로고스가 스스로 자기를 출현시킨다, 열어젖힌다. ‘까꿍’이죠. 숨겨져 있는 진리가 언어라는 형식으로 등장하게 되면 그게 구체적 세계에요. 그것을 하이데거는 계시라 했어요. 밝히 열어줌.

에벨링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이데거의 언어 사건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말씀이 스스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말씀에다 주도적인 활동성을 부여하는데 거기에 합당한 논리는 하이데거가 계시란 개념으로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 말고 모든 해석은 잡담이 된다. 210페이지 중간에 나옵니다.

에벨링이 했던 마지막 문장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언어를 인간의 존재를 넘어서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도 않은 신비와의 만남을 향하여 열어놓았다.] 이게 에벨링이 하이데거의 언어관을 채택한 이유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다 해석할 수 없고 점령할 수 없고 접수할 수 없고 접수해서도 안 된다. 왜? 말씀이 스스로 해석하고 해석한 결과가 오늘날 이 세상이기 때문에. 물론 하이데거가 세계 내 삶을 넘어있는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지만 에벨링은 인간의 존재를 넘어서서 객관적인, 주관적인 신비한 세계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왜냐하면 목회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신학자고 성경해석자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본회퍼와 하이데거와 연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에벨링이 이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신학적 환경, 교리적인 전통과 역사를 놓치면 에벨링이 이렇게 이야기한 취지를 우리가 모르게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에벨링의 신학/사상이 하나님과 정확하게 맞습니까? 이게 복음이냐는 질문이에요.

에벨링은 말씀이 스스로 해석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 거기에 대해서 말씀의 주 되신 주님이 흔쾌히 동의하겠습니까? 질문 자체가 어렵지요. 제 질문 취지가 뭐냐 하면, 에벨링의 신학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신학이 악마를 이깁니까? 직선적 시간의 역사로써 사건을 뚫었다는 이 논리가, 이 논리 듣고 마귀가 무섭다고 도망갈까요? 안 가겠지요.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하기 위해서 출애굽기를 잠시 보겠습니다. 35장 11절, “곧 성막과 그 막과 그 덮개와” 그만큼 해놓고 23절도 읽어보세요. “무릇 청색 자색과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가져와서 그 다음에 보니까 이걸 짜서 성막의 덮개를 만들었지요.

지금 사탄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사탄이 에벨링 신학과 만났을 때 무섭다고 도망치겠느냐고 제가 물었는데 말씀이 말씀대로 해석한다고 하니 하는 이야기인데 성경말씀에서 사탄이 등장하는 시점이 바로 언약입니다. 약속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등장함과 병행해서 뱀의 정체가 드러나요. 그러면 방금 읽었던 출애굽기 35장의 이야기가 언약 안에 포함돼있습니다. 35장, 36장은 성막과 그 부속 만들기에요.

35장 11절에 있는 말씀처럼 널빤지와 여러 가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수양의 가죽을 가져왔고 해달의 가죽을 가져왔단 말이죠. 이것으로 금박 입힌 기둥에 덮개를 덮으면 성막 덮개가 돼요. 지금 뭘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원래 성막이 벌판입니다. 아침 이슬 다 맞고 그냥 아무것도 없어요. 무죠. 언약이 주어졌고 언약대로 성막 뜰에 치수 재서 성막 만들고 제일 안쪽 덮개에 천사들이 수놓아 있어요. 제일 위의 덮개는 해달의 가죽이 덮어져있고.

이건 없는데서 성막 등장하면서 성막 안의 이쪽 세계와 바깥의 세계를 차단하기 위해서 성막 덮개가 동원되는 겁니다. 성막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갖춰져 있고요. 그렇다면 천사가 수놓아 있는 이 안의 세계는 천사에 의해서 지배받는 갇힌 세계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바깥은 세속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언약이 없는 세계로 보는 거죠. 이 안은 언약이 구체화된 세계죠. 그리고 바깥의 세계는 악마가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방금 언약에 의해서만 사탄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실제 이야기할 때는 말씀의 구체화가 언약의 구체화로 반드시 등장돼야 되겠지요. 뭐가 빠졌어요? 말씀에서 세상과 바로 연결되는 게 아니고 중간에 언약에 의해서 다시 재조정되는 작업이 일어나야 되겠지요. 언약이 구체화되면 마지막 새 언약이 십자가로 조종돼야 되고.

사도 바울이, 에벨링의 역사 속의 사건이 복음입니까? 아니지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피, 십자가밖에 없다고 했지요. 사도 바울은 구약의 언약과 연결된 거죠. 에벨링이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까? 아니면 논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까? 아까 1번, 2번, 3번이 언약입니까? 언약이 아니죠. 언약을 묘사한 인간들의 이성적 논리적 구체적인 형식에 대해서 말한 거죠. 형식에 대해서 마귀가 놀래서 자빠집니까? 십자가 이야기를 해야 되지요. 그때 사탄이 등장하니까. 에벨링 신학 한다고 마귀가 놀래서 물러가고 그래서 구원받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구체적인 복음이 전파돼야 돼요. 사도 바울처럼.

그럼 에벨링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해하라고 한 거잖아요. 그런데 저의 주장은 절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에벨링 안에 들어있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학자 이야기할 때마다 한 거지만 어떤 신학과 논리체계 안에서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되지 말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사는 사람 외에는 절대로 이해 되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에벨링이 과연 했는지 따져봐야 돼요.

마태복음 7장을 볼게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절)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이 누구로부터 대접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권리가 있습니까? 권리 없어요. 이게 바로 십자가 복음 안에서 인간은 누구한테 대접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대접 이야기가 나왔단 말이죠. 결국 이 이야기는 이렇게 대접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대접 받을 분은 예수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이 있는데 말씀이 사건으로 뚫고 들어왔다. 이 이야기에서 인간이 있다는 논리가 사건에서는 병행해서 거론되기 때문에 이것이 부정당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이 긍정적 가치를 갖고 들어가는 셈이 돼버려요. 쉽게 말해서 나 여기 있으니까 주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나를 때려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과 비교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이야기해도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고 했잖아요. 이것은 십자가를 경유할 때만 다시 말해서 사탄의 지배를 전제로 할 때만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무지하다. 이러면 이사야 본문이 안 맞게 돼있어요. 인간은 무지해서 그런 게 아니고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권리도 없는 주제에 날 구원하라는 권리를 사탄의 조종에 의해서 하게끔 돼있단 말이죠. 언약 자체에 의해서.

지금 에벨링이 뭐냐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데 말씀이 오시면 구원받는단 말이거든요. 내 말은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귀한테 속해 있는데 언약이 주어지니까 우리는 구원받을 권리도 없으면 날 구원해 주세요. 쪼개든지 없애든지 이야기하게 된다는 거예요. 제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언약에서 와서 모든 구원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자신의 업무로 돌아가야 된다. 구체적으로 십자가 달린 예수님 업무로.

그런데 에벨링은 말씀이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비슷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에벨링의 말씀은 하이데거 논리에서 나온 거예요. 기존에 인간들이 생각했던 언어에서 나온 거예요. 저는 언어가 아니고 언약이란 겁니다. 언어는 기껏 형식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가 어디로 놀러가는 것도 아까 에벨링에 의하면 그것은 말씀에 의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제 주장과 논리는 어디 가는 것은 언약에 의해서 복음 전파하라고 하게 하신 거예요. 어딜 가든 안 가든 집에 있어도 언약이 작용해요.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하는 모든 활동도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학자든, 목사든, 평신도라도 우리가 외칠 것은 결국은 말씀 사건을 외칠 게 아니고 십자가 복음을 외쳐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으로 십자가를 전해야 돼요. 왜 그래야 되는데? 그래야 악마의 존재가 겸해서 등장하는 그것이 언약이 그렇게 하게 한 겁니다.

에벨링은 기존의 신학과 비교해서 그렇게 했는데 제가 에벨링 쯤 된다면 세속화 신학이란 것, 본회퍼 신학,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있는 사탄의 세계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이 세상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은 신학일 수 있고 그것마저 사탄의 장난이고 사탄의 짓이 된다고 그렇게 십자가만 증거했으면 좋았지 않았느냐 하는 겁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왜 에벨링에 대해서 억지를 부리면서 허점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쓰냐고 한다면, 에벨링을 흡수해서 참 좋은 신학이라고 받아들인 것이 개혁주의신학이에요. 개혁주의신학 자체가 에벨링의 신학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에벨링 신학이 미래의 아름다운 교회 만들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에벨링 신학에서 끄집어내었고, 에벨링 신학에 그런 분위기 있었다는 이야기에요. 아예 너와 이야기 안 해, 이게 아니고 이런 것은 쓸 만하네, 라고 끄집어낼만한 여지가 있었단 거예요. 개혁주의신학자들에게. 내가 그게 미운 거예요. 그런 여지를 둔 게 미웠단 말이지요.

에벨링은 말씀이 사건으로 온다. 끝. 끝났어요. 성경으로 구체적인 복음을 이야기 안 했다니까요. 목사가 됐으면 성경을 이야기해야지 어떤 논리체제 그걸 이야기하면 마귀가 무서워 벌벌 떱니까? 말씀으로 십자가와 연결시킨 이것이 마가복음 끝에도 나오고 사도행전에도 나오고, 사도 바울은 말씀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게 성경이야기잖아요. 에벨링이 성령을 받았다면 구체적으로 말씀으로 이야기해야지 이런 신학은 아마 괜찮게 써먹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벌이신 결과가 오늘 우리 모습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냥 내가 존재하는 게 주의 말씀이라고 끝나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환경으로 인도하고 있음까지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