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4. 22) 26-1
마가복음 8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배가 고파 기진할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면 사전이 이런 난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하시면 안 되나요? 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아무 대책도 없이 지금까지 왔습니까?
예수님이 일을 하실 때는 반드시 인간을 경유해서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드러나도록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일을 하시면 인간들이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인간에게 숙제, 또는 질문을 주셔서 예수님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한 문제가 예수님 문제가 아니고 사람 문제로 만들어요. 만약 예수님이 인간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알지 못했을 텐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아는 계기가 됩니다. 쉬운 예로, 사람이 늙으면 죽습니다. 사람이 늙어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고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자기 죽음을 인간 속에서 이루어 내심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안 죽어야 되는데 모두 죽으니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똑똑하다고 하는 공자도 죽고 석가모니도 죽으니까 원래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해지 죽음에 대해서 잘못 된 것이라는 생각을 안 갖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것 자체가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방금 제가 죽음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죽는 것이 정상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한다는 것은 죽음 외에 인생의 모든 것이 정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정상이 아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통보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출구가 있어요. 십자가가 출구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죽음이죠. 죽음이 출구가 된다는 말은 일반인들에게는 어패가 있어요. 죽으면 끝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출구가 된다는 말은, 모든 인간들이 자기 자리에 있다가 출구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딸려오는 자만 예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혜택을 받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따라가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인간들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왜냐? 죽음만 내다보고 간다는 것은 일상의 모든 생활이 다 그릇되었다는 사실을 일괄적으로 통보해 주는 셈이 돼요. 우리의 일상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일하지만 모든 일은 밥 먹고 살려는 것입니다.
죽음과 거리가 먼 부자, 젊은이는 가치 있는 자로 보고, 병자, 노인, 걸인 등 죽음에 가까이 간 자를 가치 없는 자로 봅니다. 세상의 가치는 죽음과의 거리로 결정됩니다. 그런데 죽어도 안 죽는다면 그 가치 기준을 재조정해야겠지요. 간호학과에 다니는 오단이 실습을 나간다고 하는데, 왜 실습을 합니까?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실습하는데 방해를 받으면 짜증이 나요. 왜냐?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을 받으니까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럼 밥 먹고 사는데 지장되는 것이 왜 짜증나는가? 나의 가치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질 때 가치가 높아지고, 죽음과 가까우면 내 가치가 줄어든다고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칭찬 받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삶을 보여준 자들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보세요. 그는 죽음 주변에서 살았지요. 가난과 질병에 놓여 있었지만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요. 건강하고 돈도 많고 외롭지 않은데 자살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자살하는 사람은 질병, 가난, 외로움 중 하나가 원인입니다. 특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는데 저는 믿지 않습니다. 우울증을 유발한 원인이 있어요. 그것은 어릴 때부터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호는 받았는데 사랑을 못 받았어요.
나는 I(나)인데, 남들은 나를 it(그것)으로 봅니다. 사물, 물체로 볼 때 이 사람은 분명히 밥은 먹고 사는데 사랑 받아야 한다는 욕구에는 항상 미흡해요. 이 미흡한 사랑을 채우려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은 그것을 짐스러워합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도 재롱을 부리고 제 할일 잘하면 귀여움을 받지만 아무데나 똥 싸고 계속 칭얼대면 발로 차버립니다. 그럴 때 외롭고, 자기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은 외로웠겠어요, 안 외로웠겠어요? 외롭지요. 예수님은 가난했고, 죄의 짐을 짊어졌고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잖아요. 사람들에게도 미움 받고, 오해 받고, 죽임을 당했지요. 그럼 예수님이 정상입니까, 우리가 정상입니까? 예수님이 정상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사람은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저는 비정상이네요.”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비정상입니다.’ 고백한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비정상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동안 나는 정상이고 예수님은 비정상이라고 여겼던 것은 어디에서 유입된 것이고, 누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고, 누가 그렇게 가르쳤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제일 먼저 파악되는 것이 뭔가 하면, 12 제자들이 예수님의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알았던 사고방식을 정상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속 몰아붙이니까 정상이라고 여겼던 자기 입장에서는 해결책이 없어요.
인간이 어떤 행동에 나설 때는 나름대로 해결책이 있기에 행동에 나섭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옳은 해답이고 합당한 대책인가요?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선될 자신이 있어서 나와요. 그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자신에게 대비책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 대비책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동안 살아온 경험에서 나오지요.
인간은 나름대로 대비책이 있는데, ‘그 대비책이 과연 현실에 맞는 대비책인가’ 라고 물을 때, 그들은 자신만만합니다. 살아왔던 경험과 경윤이 있어서 ‘이런 일은 이렇게 대비하면 됩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나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대비책을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이 이런 난처한 입장을 만들지 말고, 또 제자들에게 대비책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책을 마련하시면 좋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놓고 제자들에게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행동할 때 스스로 대책을 마련했고, 그런 대비책으로 지금까지 잘 살아왔기에 자신들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난처한 상황을 만들어서 정상이라고 우기는 자들을 비정상인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본질은 인간을 경유해서 나온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아, 이런 경우에 너희들이 대책을 내놓아 봐라. 그동안 너희들이 행동할 때 다 대책이 있어서 행동했잖아? 이번 일도 대책을 한 번 내보지?”라고 하신 거예요.
인간들이 자신을 정상으로 여기는 그 사고방식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가정적으로 보면,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너는 정상이야! 너는 훌륭해!”라고 세뇌를 시켰지만, 청소년이 되어 친구들을 만나도 내가 정상이라고 하고,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 해도 남들이 나를 정상인으로 간주하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정상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난처한 상황을 만들어서 대책을 내놓으라고 하시니까 대책이 없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동행하시면서 인도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평소에 남들에게 했던 정상적인 행동으로 해결되지 않는 난처한 상황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않고 자기가 익히 알던 대비책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을 보세요.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광야가 아니고 도시 중심가에 있었다면 예수님의 지시에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았을 겁니다.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이 말은, ‘광야가 아니었다면 떡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인데 광야이기에 우리의 능력을 넘어섰네요.’ 이런 의미죠. 이것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경계선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4,000명의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4,000명이 먹을 빵을 구해야만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지시는 ‘배불리 먹이는 것’이 끝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배가 부른 후 떡을 계속 얻어먹기 위해 주님을 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결국 예수님이 그들에게 떡을 줬어요. 떡을 주실 때의 취지가 뭡니까? 사람들은 그 떡을 먹으면서 ‘예수님이 떡을 주셔서 우리가 배부르게 먹었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절에 다니다가 끊고 교회를 갔는데 교회 가면서부터 일이 잘 풀리고, 아이 성적도 오르고, 암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한계입니다.
건강한 내가 암에 걸리는 것은 재수 없는 일인데, 기도해서 암이 나았다. ‘나는 본래는 정상적인 사람인데 잠시 운이 나빠서 암에 걸렸는데 주께서 다시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육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는 그들 한계 내에서 이야기해놓고 그것을 통째로 부정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비정상이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안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요.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그들이 어떤 테두리 안에 머물러 살고 있는지 그 테두리 자체를 몽땅 다 들춰내는 것입니다.
곰이 더워서 물에 들어가서 더위를 식힙니다. 이 곰은 지금 산 속에 있습니까, 동물원에 있습니까? TV 화면으로는 곰이 산에 있는지 동물원에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화면을 넓게 비추니까 시멘트로 테두리를 해놓았어요. 이건 100% 동물원입니다. 더운 날씨에 곰은 물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음은 어떤 범위 안입니까? 동물원 우리 안입니다.
지금 인간들은 마귀가 만든 우리 안에 갇힌 것도 모르고 신나게 웃고 즐기면서 삽니다. 고급 승용차 타고 속도를 내면서 즐기고 있을 때, 진지하게 ‘당신은 우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하려면 자신은 우리 바깥에서 우리 안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됩니다. 이건 성령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생활 범위를 넓히는 것이 성령이 주신 복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대책으로 끌어당깁니다. ‘떡이 얼마만큼 있으면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 이것이 그들의 대책입니다. 이런 대책의 끝은 ‘배반 부르면 주님이 주신 축복 맞지요?’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취지가 아니지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안에 내가 원하는 해답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난처한 숙제를 안겨주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의 중간 결론을 맺어봅시다. ‘인간은 대책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대책을 세울 수 있는가?’ 라고 묻지 마세요. 대책은 없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인간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겠다는 것은 육적인 사단의 본성입니다.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아무도 구원 못 받는데 구원 받겠다고 설치니 주님 보시기에 그들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주께서 구원이 없게 했는데 구원 받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제가 가락 강의에서 이야기했는데,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했는데, 죄에서 구원은 인간에게 안 맡겼다는 것입니다. 왜냐? 본인이 본인의 죄를 모릅니다. 죄도 모르면서 죄에서 구원 받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알면 되잖아요?’ 라고 하는데, 죄를 알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구원 받겠다는 생각을 철회하면 됩니다. 구원을 포기하고 구원에 대해 절망하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속여서 자꾸 구원 받으라고 하는데, 인간은 애초에 구원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천국 못 가는데 갈 수 있다고 격려하고 희망을 불어넣는 것은 마귀의 짓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전적으로 죄인 만드는데, 그 죄 안에 구원 받겠다는 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원받겠다고 설치는 것도 죄입니다. 천체망원경으로 태양을 보면 고요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끓고 있습니다. 이 끓어오르는 것이 구원 받겠다고 교회 가는 일입니다. 구원 받겠다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이것이 바로 죄에서 나온 양상들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십니다. 이 말은 성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련회 강의에서 [우물 파기]를 말씀드렸는데, 우물을 파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구멍을 파게 되면 거기서 성도가 나오는 겁니다. 성도는 본인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언약, 말씀이 진행되면 천사가 활동해요. 천사가 활동하면서 없던 성도가 새롭게 생겨나고 교회가 됩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발생시킨 결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느 정도 엄청난 말인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어요. 제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46년 걸려 지은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하시니 말이 됩니까?
억지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한다면, 성전을 허물어서 허물어진 벽돌을 쌓아서 3일만이 다시 성전을 짓는다? 천사를 동원하면 될 것도 같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인간들이 겨우 생각할 수 있는 대책입니다.
인간들은 그동안 살면서 자신이 세운 대책이 효과를 발휘했어요. 완전치는 않지만 그래도 살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자살합니다. 자기 힘으로 살려는 자나 자살하는 자나 다 죄인입니다. ‘자살이 죄입니까?’라고 묻는 분들이 많은데, 자살도 죄, 제 힘으로 살려는 사람도 죄인입니다.
‘자살하면 지옥 갑니까?’라고 묻는데, 자살 안 해도 지옥가요. 천국 갈사람 없습니다. 왜요? 원래 없어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상대하기 위함이 아니고 마귀와 상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마귀가 안 보여요. 그러니 기껏 세우는 대책이 빵을 사서 먹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죄인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에 대해 저항합니다. ‘주님,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부족하나마 이런 방식으로 그동안 살아왔는데, 이것만 해도 대견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이유도 목적도 모르고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해답이 없어요. 처음부터 인간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될 수 없는 자이기에 인간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그럼 답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해 오시는 분이 답을 가지고 있어요. 그럼 우리에게 답을 알려 주시는가?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답이 되게 하지요. 예수님의 질문을 받았던 제자들 자체가 답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 다 구원 받았지요. 이 제자들이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살고 있습니다. 해답도 없으면서 지금까지 살았으니까 살만한 자격이 있어서 산 것으로 자신을 위로해요. 이들이 해답을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들 자체가 답이고, 열매고, 주님 일의 성과물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제자들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답을 알면 안 돼요. 왜냐? 현재의 자기 모습과 답을 아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 공백이 남아 있어요. 이것은 마귀의 장난입니다. ‘내가 답을 아는 자리까지 이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지.’ 이것은 마귀의 신학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이 판에다 불을 질러요. 그러면 답이 아닌 것은 다 탑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불에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다 타게 만들어요. 그러면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제자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탑니다. 위에서 유황불이 내려와서 모조리 다 태웁니다.
남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들이 애써서 남는 것이 아니고 남을 만한 조건을 유황불로 드러내신 거예요. 비도 내리지 않는데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생각해 보세요.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로 방주를 만든 거예요. 주님이 지시할 때 노아도 모르는 미래를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홍수를 준비해 놓고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잖아요.
주님이 홍수를 준비하지 않았으면 방주를 만들 이유가 없어요. 그냥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살면 되잖아요. 착하게 산다고 홍수를 이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물이 차오르는데 착함은 아무 소용없어요. 주님이 내린 기준의 유일한 답은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가 답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노아가 만든 방주와 노아 식구가 답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홍수가 왔어요. 비가 900mm 와서는 안 돼요. 방주에서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 전체가 잠길 만큼의 비가 와야지요.
질문을 주신 분이 해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광야에 간 많은 사람들이 사흘을 굶었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먹어야 살지.’ 그런데 주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빵 먹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장차 주님이 오실 때, 빵이 방주입니까? 빵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어요?
보리떡 다섯, 물고기 두 마리 먹는다고 영생 얻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해야 됩니까? 주님의 답변은 ‘네가 뭔데 그 해답을 찾으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해답을 찾아서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해답을 알아서 믿겠다는 것인데, 해답을 알아서 믿겠다고 하니 구원이 안 됩니다.
해답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우리는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이잖아요. 죄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주님 눈에만 쓰레기통이 보이고 우리에게는 안 보입니다. 주님이 묻기를 “쓰레기통 색깔이 뭐지?” 우리 입장에서는 보여야 색을 말할 텐데 보이지 않기에 대답을 할 수가 없어요. 주님은 ‘너희들이 아는 해답을 내놓아 봐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휴지통을 보여주시면 제가 색을 말하겠습니다.” 이러지요. 도마가 이런 소리 했잖아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도마는 없었어요.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노라(요20:25).”고 하니까 도마가 하는 말이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으로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어요.
8일 후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도마에게 하시는 말씀이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했지요.
도마가 ‘못자국 창자국을 보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한 말을 후회했지요. 도마의 이런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이었겠어요? 도마의 ‘보고 믿겠나이다.’라는 것이 ‘내가 해답을 알면 그 해답에 동의하므로 구원 받겠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하는 죄라는 사실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이런 것을 알려주십니다.
해답이 없다면 없는 줄 알아야 돼요. 성도는 증발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불순물이 따 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외롭지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 사라지면 외롭지요? 내 것이 사라질 때 외롭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마귀와 단짝이 되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요? 주님 없이 독자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독립해서 살려고 합니다. 간섭받기 싫고, 잔소리 듣기 싫어서. 남편들이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잔소리는 듣기 싫어하고, 밥과 빨래는 아내가 해주기를 바라고. 독자적으로 살기를 원하면서 생활의 편리를 위해 아내는 있어야 하고.
여자에게는 사랑이 목숨과 같습니다. 그런데 남자에게 사랑은 오락이에요. 한쪽은 진지한데 한쪽은 장난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됩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즐기기 위해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은 존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은 하나의 답으로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습니다.
인간이 외롭다는 것은 주재 파악이 안 되었기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교회에 교인 수가 많으면 왜 좋은가 하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어요. 김 집사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박 집사와 지내면 됩니다.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큰 교회 가려고 합니다. 나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요.
평소에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수정하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보장해 주는 것이 큰 교회입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는 외로워요. 제가 작년에 미국에 가서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있습니다.’ 백지영의 노래 가사를 인용하면서. 고국을 떠나 멀리 있다고 외로워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평범하게 행하는 모든 것이, 남들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니고 본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내가 찾기 전에는 나에게 오지 마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사는 겁니다.’ 이런 마귀적 생각으로 차있기에 복음을 전하면 밀어내기 바빠요.
‘나는 독자적으로 살 거야. 필요하면 찾을 테니까 무작정 찾아오지 마. 지금까지도 잘 살아 왔어. 잘 살아왔는데 뭘 또 성경을 보란 말인가? 제발 내버려 둬. 나는 간섭 받기 싫어.’ 이런 마음이 강력하지요. 그런다고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지요.
10분 쉽시다.
(2016. 4. 28. 10:41 녹취 마침)
서경수
(IP:211.♡.22.20) |
16-05-18 08:13 |
광주 강의(2016. 4. 22) 26-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무엇인가 하면, 왜 딱 맞게 먹이시지 않고 남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5절에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떡 일곱 개입니다. 그런데 배고픈 사람이 4,000명 됩니다. 떡 7개, 물고기 2마리로 4,000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유발시켰지요. 왜냐? 우리에게는 답이 없음을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답도 없으면서 인간은 그럭저럭 살아왔으니까 자신의 삶이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과 인간은 대화가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을 인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구원 받을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성도가 발생되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숙제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고자 해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비정상이기에 구원해 달라는 생각도 비정상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주제로 모르고--
주님 보시기에 우리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지옥 갈 인간이 전도하고 구제했다고 자랑거리로 내놓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죽어가면서 죽는 이유도 모르고. 인간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는 곳으로 주께서 몰아넣었습니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주님이 던집니다. 왜냐? 우리가 그동안 답이라고 생각한 것이 제대로 된 답이 아니고 육적인 것이고 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체가 답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답을 알려고 할 필요 없어요. 성도답게 살 이유가 없어요. 성도답게 살려고 하면 나와 성도 사이의 갭이 생깁니다.
현재 내 모습에서 성도다운 모습으로 가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성도다운 모습이 되겠습니까? 평생을 가도 안 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완전과는 거리가 뭡니다. 나이가 들면 점점 짐승에 가까워집니다. 늙어 치매가 걸렸는데 어디서 온유와 화평이 나옵니까?
우리에게는 답이 없는데 주께서 질문을 통해서 결국 답이 되게 하시잖아요. 이 과정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털어내야 돼요. 우리가 정답이라고 우긴 것을 쏟아내야 됩니다. 책받침 위에 쓰레기가 담겨 있는데 책받침을 기울이면 쓰레기가 쏟아져 내립니다. 우리가 쓰레기인데 주님이 책받침을 기울이면 우리는 죽는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털어낼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작 다 털려야 한다는 것을 주님 쪽에서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채워지면 우리는 빈 공간을 채우게 되잖아요. 그러면 기존의 ‘내가 비어있습니다.’ 라는 것도 정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여, 집을 사야하는데 돈 700만원이 필요합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정답입니까? 아니죠. 이것은 잘못 살아온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700만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려고 했던 집보다 더 넓고 좋은 집을 공짜로 주신다면,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입니까, 여분의 것입니까? 여분의 것이지요.
여분의 것이 있다면 ‘700만원만 있으면 내 집 마련한다.’는 생각은 포기해도 괜찮지요. 내가 700만원을 채워서 살 집보다 거저 주시는 집이 더 좋다면 내가 생각한 그 계획을 포기할 수 있지요? 내 계획을 포기하면 공짜로 주시는 것이 남겠지요. 그러면 공짜로 주신 집에 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혹시 누가 “집이 참 좋은데, 이 집 마련한다고 고생 많이 했지요?”라고 한다면, “아닙니다. 주님이 공짜로 주셨습니다.”라고 하겠지요. 이게 성도가 사는 모습이고 천국의 삶입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박이 먹고 싶어요. 그런데 집사님이 내놓은 것은 오렌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수박이 먹고 싶다는 내 뜻은 접어야지요.
내 뜻을 접을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오렌지를 먹어보니 수박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맛있고 행복합니다. 이 순간 내가 수박 먹겠다는 생각은 털려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과 주님이 준비하신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께서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것을 일곱 광주리 거두었다는 말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주님의 고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고발(지적)로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는데 복이 왔습니까, 아니면 뭔가 설쳤습니까? 설쳤어요. 왜 설칩니까? 나는 평소에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거예요.
인간은 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왔기에 그런 삶에 별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을 주기 전에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나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마엘은 저주를 받지요. 이스마엘이 저주 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저주 받는다는 뜻입니다. 왜냐? 저주 받는 자식이 누구에게서 나왔어요? 아브라함과 하갈에게서 나왔잖아요. 2개(아브라함, 하갈)의 저주가 1개(이스마엘)의 저주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저주가 발생되었다는 말은 복 받을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그 결과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이스마엘은 저주 받는 자녀라면 그들이 기대한 축복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복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살면 주님이 택한 백성이라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복으로 주면서 우리의 삶은 ‘막 사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기능도 함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만약 우리가 막 살지 않고 조심해서 살면 그 조심함이 내 기억 속에 누적되겠지요. 그 기억의 총체가 자아입니다.
자아를 깨보면 기억이 나와요. 기억의 중첩이지요. “내가 누구다.”라고 하면, 그 다음 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알아요. ‘20살 때 무엇을 했고, 30살에 무엇을 했고 --’ 기억의 중첩이에요. 그게 모여서 ‘나’가 된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조심하고 경건하게 살면 그것이 누적이 되어 괜찮은 내가 되고, 그 괜찮은 것은 아까워서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껴안고 살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독자적으로 사는 겁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4,000명을 어떻게 먹일까 고민할 때, ‘우리는 사단의 자식이기에 못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평소에 자신이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이것은 결국 그들이 마귀와 단짝이 되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돈만 있으면 떡을 사 오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독자적으로 살 수 있으면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4,000명을 맡기면 남게 하겠습니까, 알맞게 사오겠습니까? 알맞게 사오겠지요. 영화관에 많은 영화들이 상영되는데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영웅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영웅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다 해결하지 못해요. 연약해서. 독자적으로 살고 싶은데 힘이 뒷받침되지 않아요.
그런데 영웅들은 무한한 힘을 가졌어요. 그러니 사람들은 영웅을 부러워합니다. 영웅들이 영웅답게 되려면 인간들이 해결 못하는 악인이 등장해야 합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동네 변호사 조들호’가 있는데, 조들호는 영웅입니다. 불의한 재벌에 맞서서 법을 잘 알고 용감한 변호사 조들호가 약한 사람을 지켜주지요. 우리에게 이런 영웅들이 있으면 좋은 사회가 되는 거예요.
좋은 사회가 되면 좋은 사회 속에 있는 내가 좋은 거지요. 즉 내가 살기 위해서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하고, 좋은 사회가 되려면 나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한 영웅들이 많이 등장할 때 내가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요.
우리 집안에 영웅이 등장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친척들이 기가 살지요. 그래서 기도할 때도 영웅이 등장하기를 기도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덕담을 합니다. 큰 인물이 뭡니까? 영웅이 되는 거지요.
광야에 굶주린 4,000명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라곤 떡 7개, 생선 2마리가 전부입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먹고 남은 것이 7광주리입니다. 그렇다면 7광주리 안에는 4,000명을 다 먹이고 남았다는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떡 먹은 사람들은 “야, 배부르다.”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이해 못한 것입니까? 떡 7개, 생선 2마리로 4,000명을 먹이고 7광주리가 남은 것은 예수님의 기능과 역할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4,000명이 ‘배부르게 잘 먹었다.’라고 하면 안 돼요. 뭘 봐야 됩니까? 7광주리가 어디서 생겼느냐는 것. 주님에게서 바로 생긴 것이 아니고 배고픈 우리를 경유한 거예요.
이게 뭔가 하면, 죄인을 경유해서 죄인의 문제를 다 해결했음을 보여주는 의로운 축복의 모습이 7광주리가 되는 겁니다. 이 죄인의 대표자들이 누구냐? 12제자지요. 왜? 그들의 해결책은 4,000명의 해결책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는 반드시 인간을 경유해서 예수님 자신의 기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맡겨놓았으면 남는 것 없이 4,000명이 알맞게 먹을 수 있게 했을 거예요. 내가 배부르고, 내가 행복하고, 내가 구원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너도 구원 받고, 저 사람도 구원 받았다.’고 하면 ‘저 사람이 구원 받든지 말든지 그것은 관심 없고 내가 구원 받은 것만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십자가마을에 올려놓은 ‘참소리 선교회 목사의 간증’을 읽어보셨어요? 제가 ‘구원론 중심의 간증의 결정판’이라고 했지요. 그 사람의 글을 보면 ‘나처럼 하면 복(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문제는 ‘여러분들도 구원 받고 싶지요?’라고 묻는 게 잘못입니다. ‘저는 지옥가야 하지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돼. 기어이 천국 가야 해.’라는 자체가 천국, 지옥의 존재 의미를 자기 자신이 잘 되느냐, 못 되느냐는 것과 관련 시켰지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만든 천국, 지옥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끝은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로 끝이 납니다. 구원론에서 시작해서 구원론으로 끝납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본인이 구원 받기를 원해서 구원 받았으니 그것으로 끝이잖아요.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런 주장은 기존 교회에서 배운 것이지요.
부산에 ‘백파’라는 교회가 있어요. 이 사람이 백파의 교리를 설명해 놓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고 백파교회에서 말했어요. 이것의 반대말은 ‘구원 안 받으면 되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구원 안 받으면 된다.’라고 하지 못하고 ‘나는 회개해서 반드시 구원 받고 말리라.’ 이렇게 나오도록 유혹해서 큰 교회를 만들었어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누가누가 잘하나?’ 또는 ‘복면 가왕’에 나선 겁니다. 노래 잘하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이겨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없고 무조건 이기겠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이긴 것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 중 누가 이겼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 받는 것’이라고. 오단 군은 실습에 가서 칭찬도 받고 높임을 받았지요? 그러면 주의해야 돼요. 남은 것이 없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는 남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남은 것이 있다는 것은 주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받은 숙제를 인간들을 활용해서 실시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빼앗겨야 됩니다. 그럼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처분해야 합니까? 그 집을 주께서 남긴 것으로 보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 집에서 떠날 준비를 하면 됩니다. 떠나기 전에 그 집마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이 말을 확대시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희생 위에서 제공된 것입니다. 이 귤도 햇볕이 없이는 생길 수 없잖아요. 모든 과일, 우리의 목숨, 우리의 잠자리 등등. 주께서 허락지 않으면 밤이라도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주께서 잠을 허락하셔야 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날짜 개념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라.’ 반드시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저녁은 無(무)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남는 것’이지요. 떡 일곱 개 생선 두 마리로 사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였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일곱이로소이다.” 그 일곱 개를 인간이 가지고 있으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지고 축사하신 후 떼어 주었을 때 몇 광주가 남았습니까?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러면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은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그들이 떡을 먹고 배가 불러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남은 자 되게 한 것이 바로 우리네요.’라고 한다면 그가 진정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런 것까지 가지를 못해요. 마가복음 8장이 왜 기록되어 있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4,000명 먹이는 것을 예수님을 경유해서 “야, 우리도 잘하면 예수님께 떡 얻어먹겠다.” 이런 사고방식이 아니라 “주여, 나를 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을 떨쳐버리게 하옵소서. 4,000명을 먹이신 것처럼 저희를 떨쳐버리고 없애주세요. 그리고 그 현장의 남은 것이 내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겠지요.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성도이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은 것이 전부이지만 남은 것이 생기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입니다.
어떤 교회가 전도대회를 하면서 100명 전도할 것을 목표했는데 500명이 왔다면 남은 것이 몇 명입니까? 1) 500명. 2) 400명. 3) 0명. 정답은 3번입니다. 왜? 주님은 인간에게 전도를 맡긴 적이 없습니다. 전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전도 담당자인 주님께 드릴 게 전도입니다.
우리가 주님 것이라고 드릴 때 이미 그것이 전도의 시작입니다. 내가 따로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전도를 하시는데 우리를 경유해서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를 제쳐두고 주님 홀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광야에 굶주린 4,000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개입했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기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개입하시니 4,000명 더하기 1(예수님)이 되겠지요. 만약 사람들이 제대로 안다면 4,000명은 없고 예수님만 여기 계십니다. ‘예수님 + 예수님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예수님의 것으로만 천국 갑니다. 내 이름은 없고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동행이란 내가 있고 예수님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고, 동행이 되면 주체에 변화가 일어나서 예수님이 I가 되고 나는 그분의 것(it)이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될 때 ‘남은 것’이 됩니다. 남은 일곱 광주리에 해당되는 거지요.
지금까지 요한복음 8장에서 말한 복음의 핵심은 뭔가? 전에는 마귀의 것이었는데 이제 주님의 것이 되면 됩니까? 그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주님의 것으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뒤돌아보면서 소급해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자.’ 이렇게 되면 독자적이 됩니다.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원하시는 어떤 일이 있다면, 나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현재 내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내가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은혜로 남은 것, 주님의 희생으로 얻어진 생산물이란 사실을 늘 인식하면서 주어진 일에 대해서 내 것이라 하지 말고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막 살면 됩니다.
‘막 산다.’는 표현에서 왜 앞에 ‘막’이란 말을 했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이라고 여기기에 ‘막’을 집어넣었어요. ‘막 살아라.’는 말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왜 하나? 이건 성경에 숨어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육으로 가면 안 돼요. 영을 경유해서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경유해서 성경을 보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막 살고 있다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 막 사는 것입니다. 막 사는 인간이 스스로 막 사는 것에 의지하면 그는 지옥 갑니다. 자신이 ‘막 산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독자적으로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음을 늘 인정하자는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살도록 했다는 거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지요. 제가 분명히 이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라고 물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 소관이 아니고, 지금이 바로 ‘앞으로’에 푹 젖어 있어요. 앞으로 산다는 것은 천국 가서 사는 것을 말하잖아요. 천국에 사는 것은 오래 살았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간이 몇 년 남아서 천국 가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묻습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 갈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이것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살렸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 이게 오늘 밤 죽더라고 천국 가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잖아요.’ 라고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면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
자꾸 우리는 몇 년 더 살다 가려고 합니다. 아들 결혼은 시키고 천국 갔으면 좋겠다고요? 그것은 주님의 남은 자가 아니고 나의 남은 자지요. 나의 공로를 삽입하지 마세요. 천국 가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빼앗겨야 됩니다.
내 것은 나의 희생이 강조되지만 주의 것은 주님의 희생이 강조됩니다. 내 딸이 손녀의 동영상을 보내주는데 그것을 보면 아직 어려서 누워만 있지 뒤집지를 못해요. 그러나 조금씩 변화가 보여요. 전에는 웃지 않았는데 지금은 웃고, 몸을 파닥거립니다. 제 손녀가 몸을 움직인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아니죠.
그러면 해답은 간단합니다. ‘주께서 파닥거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장한 후 내가 파닥거리므로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면 행동한 것만큼 변화가 오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심껏 살았다.’ 이런 말이 굉장히 수상해요.
양심껏 살았으면 됐지 뭘 바랍니까? 양심껏 살았으니까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양심’입니까? 세상은 주님의 희생으로 유지되는데 왜 내 희생을 첨가하려고 합니까? 이게 마귀 짓이 아니고 뭡니까? ‘기도했다.’ 뭘 어쩌라고요? ‘헌금했습니다.’ 뭘 어쩌라고요? ‘헌금했으니까 아이 성적 올라야지요.’ 이것이 언약입니까?
광야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배불리 먹는 거예요. 그런데 배불리 먹고 일곱 광주리 남았어요. 이것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님 아이디어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생각대로 배불리 먹어도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입니다. 진짜 사는 것은 주가 개입하셔서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이기주의며 나밖에 모르는 자인지 폭로시키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는 자가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주님의 개입을 싫어합니다. 왜냐? 그냥 내 방식대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 나의 것을 빼앗기기 싫은 거예요.
11절을 봅시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 구하는 것을 예수님이 왜 탄식하십니까?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 못한 신기한 것을 원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이 기대하는 신기한 것과 신기하지 않은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습니까? 신기하지 않은 것은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것, 가능성이 있는 것은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문둥병이 치료도 되고, 예방도 됩니다. 그런데 옛날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문둥병이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둥병이 낫게 된다면 그것은 신기한 일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목적이 뭡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대충 해놓고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을 기도해서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당’이 하는 짓입니다.
무당은 세상 질서를 본인이 조절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아니까 내가 원하는 식으로 제물을 바치고 정성껏 기도하면 하늘은 반드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십니다.’라고 사기 치는 자들이 무당입니다. 그럼 구약에 나오는 모세, 아브라함, 사무엘 이런 사람은 무당입니까?
무당이 아니라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무당과 선지자의 차이점은 뭡니까? 남는 것은 예상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경유해서 남깁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다 배불리 먹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바라는 것의 끝입니다. 그런데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인간이 생각 못하는 것이 나왔다는 것은 인간들의 한계를 고발하고 지적하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기적 이 모든 것은 죄를 더욱 드러내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 ‘얼마나 너는 네 생각에 빠져있는가?’를 고발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는데 기도하므로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기적입니까? 15년 더 살아서 한 짓이 뭔가 하면 적국 사람들에게 무기고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 후 그 무기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었어요. 적군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그 무기를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15년 더 살아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내가 기대한 것이 주님을 더욱 희생케 만드는 죄로 작용하고 있음을 성도는 뒤늦게 인정합니다. 우리가 막 사는 것이 주님의 희생으로 사는 것을 훼방하는 짓이 됨을 우리는 기쁨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막 살지 않고 조심해서 살면 ‘내가 인생을 잘 사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이해합니다. 내 행동이 내 결과의 원인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내가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결과가 될 뿐 원인은 숨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은 십자가 죽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환상이 있고 이전에는 역사가 있다면, 환상을 위해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아무리 유추해도 십자가에 막혀서 환상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환상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보며 예수님이 탄식하시는 이유가 뭔가 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기적은, 내 잘남과 나의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기적을 보기 원했고, 그런 기적을 주님이 행할 수 있다면 그 주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탄식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4-35절을 보겠습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하나님이 세우신 아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흥함과 패함의 기준이 되는데 그 기능이 뭔가? 사람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식으로 기준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칼에 찔리면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주여 기도 열심히 할 테니 제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평소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처럼 주님의 탄식 소리가 들릴 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늘 우리는 지적당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추석에 친척들과 장난삼아 화투를 쳤는데 100판 쳐서 100판 다 지고 잃은 돈이 16만원이었다면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화나지요. 그런데 처음에 화투를 칠 때 뭐라고 합니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하지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왜 화를 냅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도 여긴 것이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잠복되어 있는 십자가를 저항하는 다른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그동안 힘들게 살게 했어요.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힘써 전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거지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그 중 진짜 거지는 잘 없고 대부분은 자신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거지라고 위장하는 거예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체 사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이 말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이렇게 해 주실 겁니다.
‘왜 사소한 것이 목숨 거느냐?’고 이야기할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책 중에 [미움 받을 용기]라는 제목의 책이 있어요. 이 시대에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미쳤습니까? 미움 받게. 미움 받을 용기가 없어요. 왜? 어릴 때부터 우리는 칭찬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칭찬에 익숙하지 미움 받는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보면,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늘날 우리에 의해 싫어 버린바 되어서 돌아가신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우리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찾아올 때 우리는 주님의 남은 자,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다 털릴 때 아찔하고, 조마조마하고 불안하고, 앞이 캄캄하고-- 평소에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삽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불안감과 공포심. 이것을 이미 거쳤던 것이 십자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5. 17. 08:49 녹취 마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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