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아들과 사환(히3;1) 1308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24. 08:33

2013-08-10 00:46:16 조회 : 1375         
아들과 사환 130809 이름 : 이근호 (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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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3.65) 13-08-18 17:40 
안양130809a-히3장1절(아들과 사환)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3장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성경이 다른 책들과의 차이점이 하늘과 연결돼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땅만 있으면 살잖아요. 땅만 있으면 사는 게 정상입니다. 왜냐 하면, 아담부터 하늘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렸는데 다시 하늘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좀 우리 입장과 차이나지요. 이미 우리는 하늘로서 추방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땅에서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24시간 종일 땅만 생각하는 거 당연하지요. 오히려 가끔 하늘을 생각한다는 거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 오히려 좀 더 이상해요. 왜 이상하냐 하면, 인간은 하늘이 있다면,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땅으로 내려놓고 하늘을 생각할 때는 땅의 요소를 가지고 하늘을 생각해요. 그러면 이 하늘이 뭐가 되느냐 하면, 허상이 되는 겁니다. 허상인데, 우리가 이걸 아는 이야기로 하면 ‘종교’라고 이야기하죠.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땅에 보낼 때, 도로 하늘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끝났어요. 도로 하늘로 가는 길은 끝났습니다. 에덴동산이 아니고 땅에 살 때는 우리 자신도 문제지만,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에덴동산이 아니에요. 에덴동산이 아니기 때문에, 에덴동산이 아닌 곳은 그냥 땅이 아니고 죄가 다스리는 땅이에요. 또는 마귀가 다스리는 땅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잖아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가운데서 사람은 누굽니까? 여자의 후손밖에 없지요. 사람은 다 여자의 후손은 아니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건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와요.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예수님만 사람이고 나머지는 모든 것은 짐승취급을 당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래서 요번에 수련회에서 했지만, 전도서에 보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한 곳으로 돌아간다. 인간으로 살아도, 짐승으로 살아도 가는 곳은 똑같네. 그냥 한 곳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요. 우리로 하여금. 땅만 쳐다보다가 땅만 생각하다가 땅으로 끓어 박는 식으로 그냥 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육체도 땅과 일치되기 위해서 흙으로 환원됩니다. 눈이 안 좋아도 흙이 되고, 귀가 안 좋아도 흙이 되고, 흰 머리카락이 되도 흙이 되고, 모든 것이 다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러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우리 몸만 달랑 에덴동산에서 떠났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에덴동산에 있던 혜택이 이 땅에서는 전혀 없을뿐더러 이 땅에는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거예요. 아까 집사님 덥다고 했잖아요. 에덴동산이 덮겠습니까? 안 덮겠지요. 에덴동산은 덮지를 않아요. 봄, 여름, 가을, 겨울도 없을 거고. 그만큼 우리가 지금 우리 자리가 제자리가 아닌 곳에 왔다고 이리 생각하시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두 종류로서 인생에 대해서 나눌 수 있는데, 머물고자 하는 인생과 떠나고자 하는 인생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머물고자 하는 인생은 이 땅이 천국이라고 여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잘되고 이 땅을 떠나는 게 아쉽고, “아휴, 그 사람이 그렇게 죽었단다. 아유 아까워 죽겠네. 진짜 잘 나갔는데 왜 죽었느냐.” 할 때 잘 나갈 때 죽으면 참 애통하지요. 그런데 나이 98되어서 살 것 다 살고 똥오줌 다 싸고 애먹이고 어느 날 죽으면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여! 감사합니다. 그 자식들이 얼마나 찬양하겠습니까? 아마 감사헌금 낼 거예요. 드디어 보냈다.  애 먹이는 남편 죽게 되면 얼마나 할렐루야 되는지.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이 땅 이외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어떤 자기의 인생 목표도 어디서 찾아야 되는가 하면, 이 땅에서 찾는 것이, 찾는 것 자체가 목표가 돼요. 한 예를 들면, 보험 사기범들, 차가 가는데 비틀비틀 거리면서 본네트에 엎드려서 다쳤다고 보험금 뜯어내는 그 사기꾼들 말이지요. 그 사람들은 차가 없는 곳에 가면 미칠 거예요. 차가 있어서 박아줘야 되는데. 그것처럼 세상의 희망과 모든 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보람이 여기 이 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는 계속 머물고자 하는 인생이에요. 이런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왜냐 하면, 인간은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땅과 운명을 같이 하기 때문에 땅 이외에는 다른데 희망을 가질 아이디어가 머리가 그렇게 돌아가질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땅에서 떠나고자 하는 인생,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요번 수련회에 의하면 그 사람들은 사건을 맞닥트린 사람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언약이 사건화 되어서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사건화 되어서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우리 자신도 인생도 주의 응축이 되면서 하나의 사건이 되는 거예요. 내가 인생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언약이 요런 내 인생이라는 이름의 사건을 유발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 놓여 있는 겁니다. 더운 안양에서 사는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에요. 또 겨울 되면 되게 춥지요. 그것도 하나의 사건이고. 그걸 응축시키면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 사건들을 일부러 토막 낼 필요는 없어요. 하나로 응축합시다. 욥처럼 태어나서 죽는 것까지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그걸 흔히 우리 아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이리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 이 말을 간단히 말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너는 인생자체가 언약사건이 되리라, 같은 말로 보시면 됩니다. 사건 때문에. 사건이 되게 되면, 사건이 됐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하면, 나의 역사 있잖아요. 나의 역사가 용납이 안 됩니다. 나한테 따로 역사가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뭐를 생각하게 되느냐 하면, 자기 역사가 항상 가치 있고 의미 있게 항상 요걸 다듬어야 돼요. 산에서 목동들이 나무를 해가지고 그냥 덜렁 의자 만들지 않잖아요. 이걸 대패로 다듬어야 되잖아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가지고 자꾸 다듬어요. 다듬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름대로의 예쁘게 되겠지요. 예쁘게 되는 걸 요번 수련회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규격화’라 했습니다. 곽을 짜듯이 딱 딱 짜줘야 잘라낼 것 잘라내고 짜줘야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상품’이 돼요.

상품이 되어서 인간시장에 하나의 상품으로 행세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시장 통에 감자, 옥수수 파는 아주머니들 있잖아요. 그걸 파는 것처럼 나는 오만원짜리 라고 붙이고 길바닥에 앉아 있는 셈이 된다, 이리 보면 됩니다. 인생 자체가. 여자들은 가정주부 같으면 살림하기 때문에 잘 못 느끼지만, 돈을 벌어야 하는 남자들은 항상 하루, 하루 스펙 쌓는 거 이것이 자기 가슴팍에 나는 오십만원짜리요, 나는 이백만원짜리입니다. 항상 상품을 해야 됩니다. 하기 위해서는 허점과 약점, 전과 이런 것을 잘라내야 돼요. 나쁜 친구는 안 만나야 되고. 규격화되어야 돼요. 그래야 상품화되니까.

이게 뭐냐, 머물고자 하는 인생이에요. 내가 나를 챙겨주지 않으면 챙길 분이 없어요. 왜? 땅의 사람이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땅의 사람의 이것이 정상이라는 것.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주 극극극 소수의 사람들이 떠나고자 하는 인생을 살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는지라,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불러주시는 분은 하늘에서 불러주나니, 같은 이야기거든요. 나의 생명은 내 안에 없고 하늘에 있으니, 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쪽을 찾아가게 마련입니다. 새끼가 어미 찾아가듯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잊지 못하듯이. 양이 한 마리 울고 있으면 목자가 찾아가듯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에덴동산 잊으세요. 에덴동산 없습니다. 에덴동산의 원형이 있어요. 에덴동산 원형에는 생명나무 있고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있습니다. 선악과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천국의 모형이라 이리 생각하시면 돼요.

모형이니까 그야말로 모형이에요. 모형의 가치는 모형이 깨어지면서 비로소 모형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수련회 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진리라 하는 것은 위반하면서 진가가 나온다, 그런 이야기 했지요. 그냥 진리 있을 때는 몰라요. 위반하면서 아는 거예요. 우리가 건강이라는 것을 언제 느끼는가 하면, 병원에 가봐야 알아요. 애가 다리가 아프다. 평소 다리가 안 아플 때는 애는 다라 안 아프다고 생각하는데 원래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아프고 보니까 아, 그 전에 건강했었구나! 아는 거죠.

그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다는 것은 그게 하나님의 뜻이 종결 났다는 말입니까? 하나의 개시가 됐다는 이 말입니까? 개시지요. 왜냐 하면, 선악과나무는 잠깐 있다가 없어져야 될 나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인간들도 몰랐지요. 천국에는 선악과나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없어요. 요번에 수련회 때 뭐라 했느냐 하면, 인간은 실험실의 쥐라 했지요. 35도까지 올려봤다가 가시로 찔러 봤다가 주님께서 살았니? 죽었니? 하는 것처럼 쑤셔보는 거예요. 쑤셔보면 우리는 발작을 일으키지요. 주께서 바늘로 콕콕 쑤실 때, 우리가 아픔을 느끼거든요. 아픔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보면 돼요. 아픔을 느낀다면.

“나 이런 인간 아닙니다. 하나님 이리 나오시면 참 곤란하지요. 내 평생 내 역사가운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정말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많이 놀랐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습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대우하십니까?” 이게 뭐냐 하면, 역사거든요. 그런데 사건은 역사가 깨질 때, 그 때 사건이 되는 거예요. 역사를 깨뜨린 그것이 사건이 되는 거예요.

노아가 태어날 때부터 노아 홍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몰랐을까요? 몰랐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주 만들라 할 때부터 그 때 알았지요. 그러면 노아는 이 땅에 왜 태어난 거예요?
뚝딱! 뚝딱! 뭐 만들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까? 방주 만들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오늘 본문 봅시다. 히브리서 3장 5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온 집에서 그 다음에 뭐죠? 사환 종이지요. 종은 그 집의 주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에요. 그냥 일군이지요. 오늘 지금 본문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원형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원형이 따로 있는데, 그러면 이 세상은 왜 만들어 놨습니까? 그 다음 질문이 성급해서 빨리 질문하려고 하는 게 천국이 있으면 빨리 보내주지, 이 땅은 왜 있습니까? 라고 이야기하고 싶잖아요.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 있어야 될 이유는 주님께서 이 땅을 거치지 아니하면 천국이 안 만들어지니까 그렇게 하신 거예요. 여러분, 천국은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가 아닌 이상 천국은 아닙니다. 부채표가 아닌 것은 활명수가 아니에요. 아들의 나라가 아니면 천국이 아니에요. 아까 말한 땅에서 생각하는 허상은 내가 편하게 살면 그것이 천국이고 에덴동산인 줄 아는 거예요. 그럼 뭐가 빠진 거예요? 인간들은 내 편하면 최고다! 그래서 천국이라고 하고, 주님께서는 천국을 무슨 나라? 아들의 나라. 그러면 차이가 뭐예요? 둘 사이의 차이가 뭐가 없고 뭐가 있습니까? 아들이 있고 없고 차이지요. 에덴동산은 선악과 빠지면서 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버립니다. 그러면 그 에덴동산 자체가 모형이에요. 이제 이해되시겠습니까?

에덴동산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임시적인 나라에요. 거기에 있는 아담과 하와도 임시적인 존재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건이 되어야 돼요. 아담과 하와는 역사를 만들면 안 됩니다. 그게 창세기 5장에 나와요. 아담은 얼마까지 살다가 셋을 낳고 죽었더라, 아담이 태어났는데 뭐하다가 죽었더라,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 3장 5절에 보면, 모세는 장차, 장차입니다.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온 집에서 잠시, 잠시 일군이 되었더라, 그거나 아브라함은 이렇더라, 아담은 이렇더라, 노아는 이렇더라, 모세는 이렇더라, 다 같은 이야기에요.

노아가 방주 만들기 위해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방주 만들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역사가 있기는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역사를 뭐에 집어넣느냐, 노아언약 사건 속에 사건의 일부로서 노아를 거기다가 응축을 해버려요. 우리는 지금 새 언약 안에 녹아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이스크림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붙어있는 땅콩부스러기입니다. 어쨌든 아이스크림 되면 되잖아요.

큰 암벽 타는데 암벽 타는 사람이 기어 올라가면 멀리서 보게 되면 안 보입니다. 그냥 암벽덩어리에요.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까 개미하나 올라가는 것처럼, 사람하나 올라가는구나, 시커먼 사람이 머리 묶고 올라가더라, 오! 붙어있구나. 그런데 멀리서 보면 암벽만 남고 붙어있는 인간은 안 보이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어디에 붙어있는가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어디에 붙어있는가?

십자가 옆에 십자가 두 개가 있잖아요. 양 날개처럼. 인류 모든 인간들을 수백억이 태어났다, 죽었다 해도 그걸 딱 종합 정리해 보면, 십자가 옆에 있는 양쪽의 십자가 셋의 3명으로 다 그림은 끝납니다. 오늘밤에 낙원에 갈 사람과 그리고 예수님이 뭔데? 하는 사람과 딱 두 사람밖에 없어요. 그러면 뭐냐, 온 인류 역사는 십자가 사건 안에 응축이 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십자가로만 그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결론에 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이 다 불러내지, 왜 이렇게 하느냐? 바로 십자가사건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모형에 합류될 사람을 오늘 본문 3장 5절에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사환이라, 종이라 그렇게 언급하시는 겁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제가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주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사환인데, 누구를 증거 하기 위한 종에 불과한데 자꾸 성경에서 눈 돌려버리면 누가 주인공입니까?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그런 입장이 되어서 주인공이 되면 그 다음에 뭘 하는가 하면, 나만의 역사를 행세하거든요. 수련회 때, 역사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동일화’라고 했지요. X=Y 그래프에서 죽 동일하게 간다는 것. 지금 내가 이 지점에 있는데, 내가 5년 뒤에는 B지점이라고 여길 때 그 사이가 바로 나의 자아가 된다는 겁니다. 나의 자아.

그러니까 “너, 누구야?” 하면 지금은 요 정도인데 5년 뒤에는 이렇게 될 겁니다, 라고 소개하는 거 이게 하나의 자아다 이 말입니다. 딸이 있는데, 사위감이 왔다 말이지요. 그 때, 장인, 장모 될 사람이 제일 먼저 묻는 게 뭐예요? 사랑하느냐 그걸 묻는 게 아니지요. 지가 데리고 살 사람이 아니니까. 지그 둘이 좋아서 붙어 다니는데. 묻는 건 다른 게 아니에요. 처음이요, 중간, 끝도 뭐예요? “자네 지금 무슨 일하고 있지? 앞으로 자네 포부가 뭐지?” 그거 물어요. 왜? 묻는 본인이 X=Y이기 때문에. 자기가 평소에 그렇게 그런 식으로 자아를 형성하기 때문에 사위감 될 사람에게도 그렇게 묻는 거예요. “사위감 앞으로 뭐할 거야? 세무사할거야? 앞으로 진급할거야? 5급으로. 이렇게 묻는 거예요. 본인이 그걸 기대하니까. 그러면 사위가 5급공무원 승진하게 되면 나는 뭐가 되냐, 5급 공무원의 장모가 되는 거예요. A부터 시작해서 B까지 쫙 나가잖아요. 이게 내 모습이에요. 무시하지 마! 앞으로 5급 공무원 장모야! 하고 친구만나면  자랑 질 해된다 말이지요.

이게 선악과도 모르고 생명나무도 모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실도 모르고 모든 주변의 사건, 노아 방주, 십자가 강도이야기, 전부 다 날아가 버리고 달랑 남는 것은 지 역사만 현실이라고 여기는 이 거, 이런 사람들은 뭐가 아닙니까? 주님의 사환이 아니지요. 주님의 사환이 아니면 뭘 공격하게 돼 있느냐 하면, 주님의 아들 됨을 공격하는 그런 역할도 하게 돼 있어요. 사람은 그냥 늘 중립지대에 있는 게 아니고 지 거 챙기면 주님 모독하게 돼 있어요. 지 거 챙기면.

점 점 이야기가 어려워지지요.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해봅시다. 6절,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의도적으로 모세를 사환이라고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 아들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환노릇 오래했다고 아들인체는 하라, 하지 마라?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히브리서 1장 첫 째는 뭐냐 하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아들로 이야기했지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노아, 모세, 아브라함 이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위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을 위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을 위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아들과의 차이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운 거예요. 노아와 모세 이런 사람들. 많이 차별대우해서 섭섭하십니까? 우리는 백날 해야 사환이고 아들은 예수님만 영원한 하나님이 세우신 아들이에요. 영원한 아들이에요.

그리고 세상만사는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느냐 하면, 내 중심이 아니고 아들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게 된 이유는 아드님을 아드님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따먹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어요. 이제 실상이 그 비밀이 툭툭 털리듯이 알게 되지요. 예수님을 위하여 선악과를 따 먹은 거예요. 선악과 없애버리려고. 이 사실을 누가 알까. 듣는다고 알까.

아담이 하는 모든 저지른 짓은 아들을 보여주기 위한 사환의 짓을 한 거예요. 아들은 너희들이 못 따먹은 생명나무라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놓쳐버린 그 생명나무가 아들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아들을 위하여 아들 때문에 너희들이 연관돼 있다면 그것은 너희들이 생명나무를 따먹어서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영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집이 이 세상 천국 집이 아들을 위한 집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모세가 그 집에 종으로 일했다면 시다로 일했다면 집이 아들 집에서 일했다면 그 사람도 아들의 영생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논리입니다. 아!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받고 예수님과 관련된 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혜택을 입는 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구나! 라고 하면 되지요.

이 말은 내가 일한다고 구원된다? 안 된다? 일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과 우리일과의 차이를 둠으로서 주님의 일하심 때문에 구원 받는데, 주님의 일한다는 것은 뭐냐, 우리가 지금 어슬프게 일하는 이 모든 일을 어설프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는 제대로 일하신 분입니다.

어렵게 됐는데 하나의 예를 들면, 1절에 봅시다. 우리를 믿는 도리의 사도며 그 다음에 뭐지요? 대제사장이신 예수지요. 그러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대제사장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있었지만, 그들은 어설펐다 이 말입니다. 그들의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을 해도 아들이 일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아들을 높이는 나라가 천국이고 그래서 천국은 누구의 나라다? 아들의 나라라는 말이지요. 그 아들의 나라라는 것을 자기의 어설픔을 통해서 믿는 사람은 그 아들의 나라에 합류해서 아들만 높이니까 구원받는 거예요.

그 중에 예가 바로 아담이라 했지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것이 어설프잖아요.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따먹으려하니까 아서라 말아라, 생명은 그래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고 못 따먹게 만들고 추방시켜서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잖아요. 돌아가는 그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줘버리니까 하나의 사건 되잖아요. 사건,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죽잖아요. 그 아담의 후손가운데 언약이 나왔지요. 노아 언약. 노아가 아담후손 아닙니까? 아담계통이잖아요. 그 노아언약을 통해서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나오니까 아담은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소급해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 일에 니가 참여된 거예요. 이 사실을 아담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왜냐 하면, 창세기 3장에서 자기가 둘 다 늙어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아내 이름을 뭐라 지었습니까? 

여자의 후손 이야기 나오고부터 자기 아내 이름을 여자가 아니라 하와를 지었어요. 여자여~ 여자여~ 한 것이 아니고 하와여~ 하와여~ 하와로 생명은 생명 앞으로 온 거예요. 생명아~ 생명아~ 부르면서 이것은 아담이 있던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아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건을 유발시키는데 맏이를 낳았잖아요. 그 때는 맏이는 몰랐지요. 아들이 나왔지요. 이름이 가인, 드디어 하나님께서 약속을 위해서 창세기3장15절을 위해서 우리에게 기적적으로 자식을 주셨구나, 하고 주셨다. 얻었다. 좋아들 했는데 그 동생이 등장하면서 거기에 반전이 일어나는 거예요. 역전되지요. 동생이름이 아벨, 아벨이 무슨 뜻이라 했습니까? 허무지요. 허무.

허무란 애가 태어나요. 애를 허무라 지었어요. 그러면 생명은 가인에서 얻었다 에서 주어지는 겁니까? 헛되고 헛되니 헛된 것에서 나온 겁니까? 생명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아벨, 헛됨에 있지요. 이 땅에서 헛되게 사시면 생명을 얻는다 이 말입니다. 이 땅에서. 이 땅에서 가장 헛되게 사신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다른 말로 하면, 니 십자가 지고 헛된 인생, 헛되게 살다보면 생명을 얻는다 이 말이에요.

소위 이 땅에서 머물고자 하는 인간은 오늘도 안 헛되려고 어찌하면 안 헛된 방법으로 사는 방면에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아이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헛되니 훌쩍 뛰는 거예요. 헛됨이니까 마음의 무게가 나가지를 않아요. 35Kg나가니까. 마음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어요. 떠나고자 하니까. 히브리서 읽을 때, 답답하게 읽지 마세요. 속 시원 하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괴로워서 이거 모르면 지옥 갈까 싶어서 긴장되게 읽지 마시고 홀가분하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일은 누가했다? 예수님이 다 했다. 우리는 뭐냐? 우리 하는 일은 어설프다. 어설프지만 왜 어설프냐, 어설프지 않는 분을 믿으라고 우리 하는 일에 하나같이 어설퍼요. 안 어설픈 게 없어요. 금요일날 하는데 목요일날 미리와 버리고.

1절 다시 봅시다.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 이야기 듣고 우리에게 제사장이 있는데 제사장이 또 오지? 이렇게 할 때, 모세가 이야기하면서 하나는 사환이고 한 쪽은 아들이니까 천사가 사환을 받드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누굴 받드러요? 아들을 받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들이 천사들을 전부 다 굴복시키지요. 왜? 마지막 때는 사환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통해서 일하기 때문에. 그 아들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바로 그 분이 아들이에요. 그 아들 때문에 세상은 모든 것은 게임오버, 게임 끝났어요. 도박하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끝난 것을 모르고 계속 도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생 자체가 도박인데. 인생자체가 도박인데 새삼스레 왜 도박을 또 합니까? 그게 얼마나 무지몽매한 자들이에요. 지 인생도 도박인데 큰 도박이 있는데 왜 작은 도박에 빠져 있어요? 취미에 몰두하는 사람은 인생자체가 취미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부도 취미입니다.

3절에 봅시다.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 지은 사람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집 지은 사람입니다. 거기에 몰래 들어와 가지고 쥐새끼처럼 몰래 사는 그 사람은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면 안 되지요. 이 육신은 집입니다. 이 집은 예수님 살려고 온 집이에요. 그런데 이 집을 우리가 나 살려고 덜렁 등기를 일방적으로 해서 내 몸이라 하니까 주님보기에는 가찬지도 않지요.

이번 수련회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손톱이 자란다는 이야기했지요. 자라나라, 자라나라, 하면 손톱이 자랍니까? 손톱아 제발 자라지 마라, 귀찮다. 이러면 안자랍니까? 육신은 내 말 안 들어요. 내 몸이 육신이 내게 아니기 때문에 내 말 안 들어요. 육신은 우리 주님 말 듣습니다. 잠자라, 잠자라, 해서 잠 오는 게 아니에요. 피곤하면 잠이 오게 돼 있고, 진짜 아침 12시까지 자고 싶어도 잠자는 것조차 싫어요. 아침 되면 길거리에서 소리 나고 바깥에서 소리 나면 자기 싫어요. 눈 뜨고 싶어요. 그러니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니가 걱정한다고 키가 한 자 자라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먹는 거, 입는 거, 마시는 거, 이 모든 거, 투수가 홈런 맞고 팔 비틀어지는 거, 전부 다 모든 것이 다 누가 하신 거예요? 주님이 하신 거예요.

그런지 한 번 봅시다. 시편104편 29절,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그들이(저희가) 뭐냐 하면, 25절에 보세요.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세상 모든 만물이 주님께서 호흡을 주니까 팔딱거리고 주께서 거두어가니까 그들은 뭐가 된다? 흙이 되었다 말이지요.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자기 집이라고 여기시고 만드시는 거예요.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모든 피조물이 썩어가거든요. 썩어가니까 이건 고물이잖아요. 하나님의 아들건지고 나머지는 그냥 불태워버리고 폐기처분하겠다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명백한 뜻입니다. 더 이상 골치 아플 스토리가 없어요. 간단해요.

하나님이 세상 멸망할 때, 유황불에 마귀와 이 세상 지배자 악마와 이세상과 죄와 전부다 몽땅 다 귀신들과 전부 다 이 세상 유황불로 보내버리고 천국 새 하늘과 새 땅 만들어서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은 거기다가 따로 한데 모아놓고 그 모아놓은 하나님의 성과, 우리가 하나님의 전리품이거든요. 전리품가운데서 하나님이 영광과 찬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영원히 살겠다. 이게 천국이고 그를 위하여 미리 에덴동산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일부러 심어놓은 거예요.

따먹지 말라하는 나무 심어 놓고 결국은 마귀로 하여금 따먹도록 유혹하도록 허락해 놓고 따먹게 해놓고 왜 따먹느냐, 또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찾아와서 결국은 선악과 따먹은 그대로 우리는 죽어가면서 살리고. 그 작업을 꾸준히 지금 해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거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성경의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어떤 하나님이냐, 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여기 땅입니다. 땅에서 신으로 가는 방법이 세 가지 있어요.

첫 째는 신탁입니다. 그리스의 여신, 성화할 때 여신들 있지요. 긴 롱 드레스입고 페인 거 입고, 그리스 로마에 보면 이방종교에는 그런 여자들이 있어가지고 신탁을 받아요. 신탁이 뭔 줄 아시지요. 신으로부터 즉석 신탁을 받는데, 신탁이 잘 안 오기 때문에 마약을 많이 해요. 구약에 있는 바알종교에 있는 남자무당과 여자 무당들이 마약을 많이 해요. 그래서 헤롱, 헤롱 헛소리 하는 겁니다. 신자들이 와가지고 아우! 신이시여, 하고 약 먹고 지금 헛소리하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지가 성전 찾아 나올 때 기대했던 내용이 나오면 그래, 저거야, 하고 지가 알아서 골라 가면 되는 거예요. 우리 동네에 있는 갑바에는 신탁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지가 신탁자라, 지가 올라와서 절하다가 108절하다가 뭔가 한 번 떴다 하면 그게 신탁이에요. 이 땅에서 신탁으로 가는 게 있습니다.

지금도 기존 교회에서는 소위 이상한 권사들, 기도 많이 하는 권사들, 기도원에서 살듯이 와서 하는 권사들 예언하는 권사들 많아요. 성령의 은사라 해서. 성령의 은사를 소멸치 말라는 말씀대로 지가 신탁을 한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문서로 하는 게 있어요. 문서라 하는 것은 법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책으로 신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코란, 또는 몰몬경 그런 것들. 성경도 해당되겠지요. 이거는 문서 또는 법이라 할 수 있어요.  십계명도 법으로 되어 있잖아요. 지켜라, 하라, 하지 말라.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하면, 제사가 있어요. 이 세 가지 중에서 제일 먼저 한 게 뭘까요? 인간이 신을 통하여 올라간 것이 제일 먼저 한 게 뭘까요? 제사지요.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신에게 제사했잖아요. 사실은 제사가 먼저 나왔지만, 사실은 세 개 다 같이 갑니다. 함무라비법전해서 신이 만든 법이 있어요. 함무라비법전은 BC2300년경에 현재 이라크지방에 있는 수메르왕국 그 다음에 구바벨론나라에서 만든 법전입니다. 함무라비법전이 있어요. 이 법으로 신의 계명을 만든 거예요.

우파니샤드라는 게 있어요. 인도 종교에 보면 우파니샤드가 있어가지고 그 브라만신으로부터 신탁 받은 걸 적어놓은 게 있어요. 큰 종교는 전부 다 계시 책이 있어야 돼요. 신탁은 우후죽순처럼 개나 쥐나 신탁을 다 받으면 혼란스러워요. 표준 찾기가 곤란해요. 요거는 정경화 표준으로 되어 있어요. 신탁, 제사를 통해서 올라가는 겁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 갈 때, 이런 종교행사로 해서 주로 나오는 조형물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탑’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대표적인 탑이 무슨 탑이지요? 바벨탑이지요. 직결되어 있으니까. 바벨탑이 되려면 공간적으로 바벨탑 크기의 대지가 있어야 돼요. 그게 옴파로스, 우주의 중심입니다. 대지의 중심. 그러니까 인간이 대지로 쫓겨난 뒤에는 이 대지에는 우리가 신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은 우리하고 뭔가 이렇게 ET처럼 손가락가지고 연결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레오나르도다빈치 영화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할 때, 손가락가지고 찌지직하는 게 있지요. 뭔가 그 공간지점이 옴파로스, 거기에 제단을 쌓는 지점이에요. 그래서 세상의 각 민족마다 각자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 여기고 중심에다가 제단을 쌓아요.

공간적으로 중심만 있는 게 아니고 시간대로 원초적인 시간이 있어요. 원초적인 시간은 신기한 기적이 일어났던 그 시각을 처음 창조시간이 반복한다고 생각해서 고 시간대를 특별히 비워놓고 그 시간대에는 제사를 드리는 그런 원초적인 시간이 있어요. 얼른 보니까 창세기 2장 2절에 나오는 안식일하고 비슷하지요. 그런 것처럼 모든 민족에게 다 이게 있어요. 공간적으로 특수한 지점이 있는 거예요. 벧엘이 뭡니까?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그 지점에 뭐가 일어났지요? 야곱이 하나님과 말씀하시던 곳, 돌기둥을 쌓지요. 돌기둥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하늘로 가려면 여기에 문턱이 있다는 거예요. 문턱에 사다리가 내려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문턱을 넘으면 천국이고 넘지 못하면 지옥이라는 겁니다. 이게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요.

그렇다면 성경은 뭡니까? 문턱이고 뭐고 없어요. 여러분들이 여호수아5장에 보면, 블레셋의 신, 다곤 신이 문지방에서 어떻게 돼요? 바짝 엎어져서 목이란 목은 다 부서지지요. 그 문턱이 무슨 문턱이냐, 문지방 문턱이 뭐냐 하면, 요기서 요기까지는 세속적인 공간이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거룩한 공간이고, 거룩한 공간에 가게 되어 있으면 그 정해진 시간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접선을 시도하기 위해서 우리를 만나러 나온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 여러분,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듣고 오해할만하지요? 기존의 인간들의 종교심에다가 율법이 딱 주어지니까 “그래,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상황은 문제될 게 없고, 정상적이고 거기다가 추가해서 하나님의 계시만 추가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된다.”라고 오해할 만하지요. 오해입니다. 그거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건 뭐냐,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이용한 모형입니다. 모형이지롱!! 율법은 모형이지롱! 십계명도 모형이지롱! 주님이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오셨거든요. 율법이 모형이지롱! 율법 지켜서 구원 못 받지롱!

그럼 뭐로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으로 구원받지, 진짜 살아계신 분으로 구원받지, 모형 지켜서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3.65) 13-08-21 21:58 
안양130809b-히3장1절(아들과 사환)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모세가 사환이었잖아요.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할 테니까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세요.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 사환이었다. 그렇다면 모세 다음에 바로 예수님 나타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세 다음에 선지자 사무엘 왜 등장합니까? 사환이 왜 그리 많이 필요합니까? 모세 나오고 “모세 니 수고했다. 다음 바톤은 아들인 내가 할게.” 바로 등장하지 않고 왜 사무엘, 예레미야, 이사야 왜 등장하지요? 사환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맞아요. 맞지만, 사환을 포함해서 사환내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죄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죄가 나오는데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니까 조시기 전에 후딱 하겠습니다.

‘시간은 창조를 반복한다.’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시간은 창조를 반복한다. 시간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시간이 흘러가야 될 이유는 뭐가 반복이 되는 거예요. 뭐가 반복되는가? 창조의 원리가 반복되는 겁니다. 창조의 원리가 반복될 때, 사람은 창조된 자죠. 어제 수요예배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가 원인이 아니고 우리가 결과라 했지요. 그럼 원인은 누굽니까? 하나님이 원인이고, 우리는 그 결과물이지요.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죄가 뭐냐 하면, 결과가 마치 무슨 행세한다? 원인 행세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건 니가 알 바가 아니지요. 우리는 무익한 종인데, 그건 니가 알 바가 아니지요. 요렇게 생긴 게 결과인데 결과를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고 이 결과가 지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나를 이렇게, 이렇게 개조해가지고 결과가 개조해서 또 다른 결과를 낳게 되면 그럼 그 사이에는 주님의 투입을 우리 쪽에서 거부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여, 내가 요런 생각이 있는데, 주님께서 요 뜻을 따라주려고 하면 도와주시고 내 뜻과 안 맞으면 이거 내 하는 대로 내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생각했는데 막상 정탐을 해보니까 거기에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이 뭡니까? 우리는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고 결론을 내렸지요. 무엇 때문에 못 들어간다고 한 거예요. 그 심정이 뭐예요? 평소의 행동이 우리가 원인이고 우리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어떻게 할 때는 원인의 결과가 합당하게 나온다고 생각하다보니까, 지금 요런 등치가지고서는 저쪽에 못 들어간다고 이건 결론을 내리고 울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원인이 아니고 우리는 결과야, 저 쪽 못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애굽에서 어떻게 나왔는가를,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 상상이나 했느냐 이 말이야! 못했잖아요. 그렇잖아요. 애굽에서 나온 시간은 창조를 반복하지요. 우리라는 인간 자체가 없었던 것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기적 아닙니까? 기적이죠. 이걸 제가 십자가마을에 보면 ‘불가능성’이란 글을 써놨어요.

불가능성이란 뭐냐 하면, 현재 있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건데 우리는 왜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이것을 불가능성으로 감사치 못하고 왜 불만스러우냐 이 말이죠. 현재 우리가 불만스럽다는 말은 뭐냐, 우리는 이걸 불가능성으로 보지 않고 “에이 씨, 잘만하면 가능할 수 있었는데.” 라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 불만이 늘어진 거예요. 불만이 넘치는 겁니다. 덥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우리 자체는 결과입니다. 결과인데, 우리는 마귀한테 뒤집어 씌었는지 항상 내가 원인이 되고 내 원인에 부합되는 결과가 있을 때만 신에게 감사할 용의가 돼있다는 이런 쪽으로 나간다 이 말이죠. 그걸 수요일날 죄가 된다 했지요. 그게 바로 죄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을 시키니까 사람들은 모세가 원인이고 모세가 잘해서 우리가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모세 자체가 결과인데, 그들은 모세가 있음으로서 우리가 잘됐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모세를 믿는 거예요. 모세! 모세! 모세를 믿는 거예요. 이것은 사람이 사무엘로 바뀌어도 바뀌지를 않아요. 사무엘상 7장3절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역사를 보고 신기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는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겨도 사업 잘되고 행복이 넘쳐나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상하게 조금만 다른 신을 섬기는 어떻게 돼요? 다른 신을 섬기면 재깍 재깍 주변에 있는 나라가 쳐들어와 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괴롭다고 못살겠다고 고함치지요.

우리가 시간이 몇 시 됐는지 모를 때는 뭘 봅니까? 시계 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질적인 시계, 어떻게 일하는가를 보여주는 시계는 어느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이죠. 수시로 이스라엘을 봐야 돼요. 지금 몇 시쯤인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인간은 시간을 전달하는 물질이에요. 인간 자체가.

적어 볼게요. ‘인간은 시간을 전달하는 물질이다.’ 물질이라 하는 것은 흙이다 이 말이죠. 물컹, 물컹한 고기 덩어리란 말이죠. 우리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내용이 없으면 그냥 물질, 고깃덩어리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재깍 재깍 현장화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오늘날 성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처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신을 섬겨버리면 재깍 재깍 현상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여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면.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신을 섬겼는지, 안 섬겼는지 어떻게 알아요?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졸음 운전할 때, 나는 지금 운전하고 있다. 나는 지금 운전하고 있다. 이러면서 조금 가보면 꿈속에서 운전하고 있는 거예요. 운전하고 있다 하면서 차 뒹구는 겁니다. 김 재성 집사님 5명태우고 졸음운전하다 차가 뒤집어졌어요. 안 다쳤어요. 주께서 결과로 안 다치게 하셨어요. 졸음운전하게 하는 것도 다 결과입니다. 모든 결과가 내 좋아라, 만든 결과가 아니고 주님께 돌아올 자는 돌아오라고 생애에 만들어 주는 결과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요.

시간은 창조를 반복하는 겁니다. 창조가 뭐냐, 우리가 원래 없었어요. 없었는데, 주님 증거 하기 위해서 결과물로 만들 낸 게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있음 자체가 창조의 사건이 응축됐다고 보면 돼요. “너는 나의 것이다.”라는 말이 뭐냐 하면, 너는 너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의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책임 있게 내가 일으킨 창조,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창조의 사역, 하나님의 언약의 사역을 너를 통해서 증거하고 말리라, 증거 해 내고 말리라, 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걸 반복하기 때문에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왜 모세 다음에 바로 주님이 안 오시느냐,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세를 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사환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모세 하는 일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오실 메시아를 상상을 하게 되면 그 것 또한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그래서 모세로 인하여 유발된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이 희생타로 등장해야 되는데, 모세 다음에 누굽니까? 여호수아, 여호수아 다음에 누구지요? 사사들, 사사다음에 누구지요? 사무엘, 사무엘 다음에 누굽니까? 다윗, 나와야 되는 거예요. 다윗 다음에 솔로몬, 아직 예수님까지 멀었어요. 그 다음에 이사야, 예레미야 계속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그 사람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에게 결과가 주어지는 줄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세웠다는 생각을 잘 안하게 돼요. 해도 순간적으로 하고 잊어버려요.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반복해야 되지요. 왜, 시간은 창조를 뭐한다? 반복한다. 반복해야 되겠지요. 시간은 창조를 반복하니까 시간에서 뭐냐 하면, 창조의 언약을 가지고 있는 분이 모세 다음에 여호수아로 여기에 등장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또 여호수아한테 완전 매진하네. 사람이 아닌데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데 자꾸 사람의 이름에다가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주의 이름이 있다~ 주의 이름이 있다~ 모세가 아니고 내 이름이다~ 모세는 주의 이름이 보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은 사람이지, 주님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게요. 예가 히브리서 11장에 죽 나오는데, 삼손 있잖아요. 물어 봅시다. 삼손이 태어난 것은 보통 평범한 출생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아니었지요. 원래 삼손이란 애기가 없었어요. 없었는데 마노아 가정에 누가 찾아옵니까? 천사가 오지요. 음식을 주니까 불 가운데 천사가 기묘자라고 알려주면서 하늘로 올라갔어요.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마노아 가정에 개입이 됐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다녀갔다. 하나님이 원인이다. 결과가 뭡니까? 삼손 출현이지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와! 하나님이 낳아준 삼손, 그러면 삼손은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삼손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성경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게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서 주신 인간 같으면 최소한 인간답게 살아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보다도 못하게 사는 거잖아요. 매일 힘자랑하면서 힘을 어디에 씁니까? 지 맘에 드는 여자 찾기,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여자 전쟁, 여자 간수하고 여성을 지키고 자기 민족보다 누굴 더 사랑해요? 지가 좋아하는 여자를 더 사랑해요. 물론 여자 입장에서는 정말 훈남이지요. 멋진 남자지요. 자기 종교와 자기가 믿는 하나님까지 포기하면서 여자까지 아끼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비밀, 힘은 어디에 있다? 머리카락에 있다는 그 비밀을 세상에 천기누설을 누구한테 합니까? 여자의 눈물, 우니까 “자기 나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것도 안 가르쳐주고.” 흑흑흑 하니까 “갈래면 가라.” 이러면 그만인데. “아이고, 미안해. 가면 안 돼!” “갈 거야, 그거 안 가르쳐주면 갈 거야.” “안 돼! 안 돼!” “하나님이 좋아, 내가 좋아” “니가 좋아” 이리 나와요. 출생부터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꼴이 그 꼴입니다. 보세요. 누구와 대비시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대비시키지요. 예수님께서 대비시킨 이유가 뭐냐, 바로 사환이 있어도 사환은 절대로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사환은.

사환마저 어디에 영향을 입는다? 죄에서 구원하라고 사환 보냈지만, 사환마저 죄를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죄의 지배가 현재 살고 있는 안양, 이 세상입니다. 어느 누구도 개과천선해서 인간되고 남한테 인간됨을 보여도 소용없습니다. 요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소용없어 빠밤빠바~ 소용없어, 소용없어, 전부 다 소용없는 거예요. 다 헛되고 헛된 거예요. 자식이 신천지에 가고 복음 알아도 소용없어요. 알아도 소용없어요. 언제까지 갈지 몰라요. 장담 못해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코스고 결과입니다.

모세 오고 바로 예수님 안 오고 왜 삼손을 줬느냐, 삼손을 본란 말이죠. 분명히 그 인간은 안돼요. 삼손 그런 식으로 여자 밝혀가지고는 구원? 지 여자 하나 간 수도 못하는 게 무슨 구원이 돼요. 안돼요. 하나님이 주신 것은 언약을 줬는데 언약을 인간이 감당을 못하네. 도무지. 왜, 죄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언약을 감당을 못해요. 따라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5장 7절에 봅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지요. 그 정도로 우리의 갖고 있는 육신이라는 게 마귀 손에 있는 육신이에요. 이 육신 내 소관 아닙니다. 사람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거든요.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뭐냐, 비합리적이에요. 감정입니다. 충동이고. 성깔이고. 욱하는 거고.

평소에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도 성질나면 이건 이성이고 합리고 없습니다. 아무도 이렇게 예수님처럼 자기의 감정조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들로 했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나는 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나는 강도였을 뿐이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천국에 초청받아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는 삼손처럼 능력 줘도 그 능력이 어디로 흘러간다? 여자 밝히고, 세상 자기 욕망, 자기 육신의 욕망을 이루는데 달성하는데 우리는 거기다가 힘을 다 소모해요. 삼손이 여자가 세 명이었습니다. 첫째여자, 둘째여자, 셋째여자, 여자하나 붙들고 놓칠 때마다 성질나서 힘을 발휘하는데 덤으로 생긴 결과가 뭐냐, 이스라엘이 블레셋에서 구원받았다 보는 거예요. 이야기 스토리가 이상하게 되지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줬는데 사자입도 쫴고 했는데, 그 능력을 이스라엘 구원에 쓰는 게 아니고 어디에 씁니까? 지는 여자 밝히는데 급해서 쓰다보니까 그 부수물로 그 부수물이 뭐냐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죽는 거예요. 한두 명이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마지막 여자를 놓치지요. 드릴라. 남자가 여자의 본심을 알 때, 실망스럽지요. 그렇게 남자 빼먹을 거 다 빼먹고 쏙 자기의 블레셋으로 돌아가요. 삼손의 출생을 알게 되면, “아이고, 그 힘이 어디서 나왔어요? 아이고, 여호와가 주셨어요. 그러면 나 이제부터 블레셋 다곤 신을 믿지 않고 여호와를 믿겠어요.” 이리 해야 되는데 그래도 그들은 여호와 안 믿고 누굴 믿어요? 힘이 현재 지배하는 쪽 어딥니까? 지배하는 쪽이 결국 마귀지요.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마귀니까. 마귀 쪽으로 돌아서잖아요. 실컷 빼먹고 마귀한테 돌아서서 많이 놀라셨지요? 많이 당황스럽지요? 돌아서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봤던 사무엘상7장3절에 우리가 다시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라는 사무엘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이것은 사무엘이 그런 잔소리 하는 그 순간뿐이지 돌아서면 다시 어디로 간다? 다른 신으로 간다. 이게 신이 두 가지가 있어요. 이걸 아셔야 돼요. 구약하면서 사람들이 이걸 잘 모르는데 신이 두 종류가 있어요.

사라지는 신이 있습니다. 사라지는 신인데 이게 엘이에요. 신은 은퇴를 해버려요. 신은 만들어놓고 은퇴해 버리고 그 남아있는 창조물은 누가 관리하느냐 하면, 실용적 신이 담당해요. 실용적 신의 대표자가 바알입니다. 전에 강의할 때는 CEO라 했지요. 전문 경영인. 가나안 땅의 신은 두 종류에요. 하나는 천지창조를 해놓고 떠나버려요. 떠나버리면 제사도 안 받고 아무것도 안 받아요. 안 받고 실용적인 신으로 하여금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대지와 땅을 관리하는 데미우르고스 신이 나와요. 플라톤의 저서에 보면. 그 관리자에게 맡기는 겁니다. 관리자는 뭐냐 하면, 실용적인 신인데, 곡물의 신, 바다에 가면 풍어제가 있어서 풍랑을 제어하는 신, 고거 담당이 바로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보면 여러 가지 신이 있잖아요. 태양신 아폴로 있고, 바다의 신, 사랑의 신, 불의 신, 결혼과 가정의 신, 달의 신, 지혜와 예술을 담당하는 신 그런 것처럼 전공분야 따라 신이 분류되어 있어요.

이것은 기독교 오기 전에 우리나라에 토속신앙도 그렇지요. 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언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소에는 기존 신을 섬겨요. 섬기다가 안 될 때는 안 보여 줄 때는 마지막 보이지 않는 신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 등장한 게 여호와에요. 여호와는 잔챙이들 신하고 상대를 안 해요. 그 보이지 않는 신하고 불러내는데. 보이지 않는 신이 뭐냐, 여호와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언약이 없는 신은 악마고, 언약을 타고 내려온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여호와고, 여호와는 언약을 이루러 오는 하나님이 여호와에요.

그래서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상숭배 자에요. 기존교회에서 언약을 모르는 사람은 우상숭배 자입니다. 실용적인 신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 우리 애가 고3인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된다” 하는 거예요. 실용적인 신. 이런 이야기 하니까 확실히 눈에 들어오지요.

세상 사람들은 신앙에 관심 없어요. 궁극적으로 신이 있느냐, 관심이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사할 때 적당한 거, 결혼할 때 서로 궁합이 맞는지 그런 신, 실용적인 신을 원하는 거예요. 사업할 때, 영화 찍을 때, 공장 신축할 때, 그래서 그런 신들은 어떻게 차이 나느냐 하면, 제사방법에서 인간들이 차등을 둬요. 어떤 신은 떡을 좋아하는 신, 앙꼬 말고 시루떡을 좋아하는 신이 있고, 돼지머리를 좋아하는 신, 항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할 때만 좋은 신이고, 그게 뭐냐 이 육신을 삼손이 이겨낸다? 못 이겨낸다? 못 이겨내는 거예요. 그러면 삼손에게 그 여자를 붙여준 그 결과물, 삼손이란 결과물과 여자에게 뿅 가도록 만든 결과 이 모든 결과는 결국,  원인이 누굽니까? 주님이죠.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삼손은 그냥 일군이지요.

그런데 삼손이 태어날 때 조건이 있습니다. 나실 인으로 태어나야 돼요. 나실 인이라 하는 것은 지가 하고 싶어 나실 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점지해 줘야 돼요. 일종의 신탁. “너 말이야.” “예” “너는 이제 태어나서 너의 인생은 몇 년 동안 몇 년 기간만큼은 몽땅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하고 고 행동한 그것은 거룩한 것으로 간주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니가 수고한 만큼은 니가 수고한 니한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니는 일종의 중보자, 대리자, 희생자 역할만 할 뿐이고 니가 희생해서 남이 사는 식으로 나는 너를 사용 좀 해야겠다.” 이게 나실 인입니다. 다시 설명 안 해도 되겠지요.

나실 인이라 하는 것은 내 한 몸 죽어 남 살리는 것!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하겠습니다.” 할 사람 없지요. 원래 목사가 보통 신학교 가기 전까지는 기도원에서 기도할 때는 다 그렇게 시작해요. “주여 이 한 몸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하나 들고 가겠습니다.” 기껏 가는 것은 사창 골에 가서 복음 전하다고 하면. 그거 아골 골짜기 아니거든요. 교회가 아골 골짜기인데. 창녀들이 웃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거에요.  나실인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 그럼 삼손이 여자 밝히면 이게 깨집니까? 안 깨집니까? 바로 삼손이야기가 그거에요. 삼손으로 하여금 이것은 완전히 바람쟁이로 살고 날라리로 살게 만들면서도 나실인이란 본래의 계획은 차질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 없었으니까 삼손은 사환이었다. 그냥 하나의 오실 아들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전혀 아들 아닌 구석으로 살아야 될 그런 역할을 한 겁니다. 마지막 삼손이 머리카락도 잘리고 눈도 한 짝 빼앗기고 이제는 찾아올 여자는 한 사람도 없어요. 여자 밝힌 인간들 나중에 보면 더 서럽지요. 왜, 서러워서 어디 가느냐 하면, 탑골공원에 가 있어봐야 아무도 안 옵니다. 오긴 와요. 사기꾼들. 아니면 커피 팔아먹는 아주머니들. 아무도 안와요. 장기 팔아  먹으려는 사람오지 아무도 안 옵니다. 몽땅 남자의 매력은 다 뺏어요. 눈 뺐지요. 눈 빼는 것은 모든 걸 다 빼앗는 거예요. 머리카락 잘렸지요. 볼품도 없지요.

그런데 그 때 유일하게 나실인 역할은 다 합니다. 나 하나 죽어 이스라엘 백성 살린다.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진주의 논개처럼. 그렇게 일장 몸 붙들고 죽잖아요. 논개가 결과인가, 그건 이스라엘 아닌 것은 갔다 붙이지 맙시다. 언약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언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삼손도 언약에서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새언약을 믿게 되면 언약 안에 주어졌고 언약대로 움직입니다.

3장 7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나가 누구지요? 여기 분명히 모세밖에 없었는데 모세 말고 나가 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말하지요. 하나님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음성을 통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아, 아, 여기는 하늘나라, 여러분들 잘 들으세요. 나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내 말 들으세요. 원망하지 말고 내가 양식주고 물 줄 테니까 40년 동안 원망하지 마세요. 아, 아, 여기는 하나님, 다음시간에 봅시다.“ 하고 마이크 대고 이리 안하고 왜 모세를 통해서 하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는 지금 안양의 하늘에 “아, 아, 여기는 하늘나라, 두 번째 천사입니다. 잘들 들으세요.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그러면 이 더운데 전도할 필요 없잖아요. 이런 생각 안 해봤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되면 다 믿어요. 다 믿으면 지옥이 필요치 않아요. 인간들이 가장 무시하고 가장 말 안 듣고 가장 모독하고 싶은 모양새로 주님이 오셔야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인간을 그냥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죄에서 건져내는 방식으로만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언약이 목적입니다. 새언약, 언약 완성이 목적이기 때문에 십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십자가 안다 소리를 아무도 할 수 없어야 돼요. 심지어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잖아요. 그래야 돼요. 십자가 지신 그 당사자 외엔 아무도 없어야 되는 겁니다.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한 사람만 남긴다.’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달랑 한 사람만 남아요. 모든 인간은 아담에 속했으면 이제 구원자는 새로운 아담, 두 번째 아담 달랑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 매직으로 지워 나갑니다. 달랑 한 사람. 이걸 하나교회에서 요한 계시록 할 때, 1이라고 했어요. 1에서 144,000명 파생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1에서 7이 나오고, 666이라고 세 번씩 강조한 것은 짐승수가 666이란 뜻이 아니고 7이란 것은 천지를 창조할 때, 창조에 근거해서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하는 권한은 7에 있고 7이외에는 7에 의해서 다 심판을 받아야 돼요.

그러니까 악마는 인간의 이마에 손목에 인을 박잖아요. 박아야 될 이유가 심판받게 하기 위해서 받는 거예요. 받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한 거예요. 왜냐 하면 생명책의 인을 받은 사람이 이마에 그리스도인을 받잖아요. 그러니까 악마의 존재는 악마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악마가 꼭 있어야 돼요. 빛이,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두움이 있어야 돼요.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빛이 나요.

천국 갈 사람에게 도장이 있다는 것은 그 외에도 도장이 있어야 돼요. 천국 갈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을 받지만, 하나님 이외에는 악마의 도장을 반드시 받아야 돼요. 받아 놓고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 받는 숫자가 6이고, 7이 아니고 온전한 창조는 7일 만에 창조했기 때문에 6이라는 것은 창조에 못 미치는 겁니다. 완전히 못 미치는 거예요.

그걸 세 번씩이나 강조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독수리가 세 번 강조하지요. 이건 철저하게 심판하고 말리라는 뜻입니다. 절대로 심판에서 빼주는 법 없다는 뜻이에요. 심판에서 절대로 면제해 주지 않는 자들의 집합, 짐승의 숫자를 받은 사람 그 사람이 666이에요. 몇 명이고 관계없어요. 전체 모아 놓으면 전체가 666이에요. 곧  짐승의 숫자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니 지혜 있는 자는, 지혜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만이 지혜 있는 자에요. 보통 인간들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닙니다. “어? 도장을 왜 받았지? 어! 저쪽에도 도장 있구나.” 이 쪽 도장이 있다는 것은 저 쪽에도 도장이 있다는 거예요. 이건 천국 가는 도장이고, 저건 지옥 가는 도장이고. 도장 없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이죠. 이 모든 것은 바로 한 사람만 남기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달랑 한 사람만 남기는.

히브리서1장 13절에 보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여기서 누구라는 말은 모든 인간을 다 불러 세워놓고 “누구야? 너희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대접받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바로 우리를 제켜 놓기 위한 오직 한 사람만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죠. 그런데 그 한사람이 뭐냐 하면, 내 원수지요. 원수.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서 이기지 아니하면 그 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더위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세상은 죄와의 싸움이고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마찬가지로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죄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에서 못 벗어나게 합니다. 일부러 못 벗어나게 만들고 그래놓고 모세를 보내놓고 모세는 사환이기 때문에 나는 못합니다. 매일 나는 못합니다. 나는 이 백성하고 성질 더러워서 이 백성 감당 못 하겠습니다. 에이 씨, 바위도 두 번 치고. 매일 사환은 이래요. 그렇지만 삼손은 어설퍼도 뭐는 구원받는다? 이스라엘은 구원되듯이 모세는 어설퍼도 누구는 구원됩니까? 이스라엘이 계속 구원되는 거예요.

그 모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 별세에 대해서 언급했잖아요.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삼손도 모세도 전부 다 그리스도로 구원받거든요. 그러니까 옛날 선배들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들이나 우리들이나 예수님 십자가 지면 다 이룬 거예요. 어떤 부흥사는 아브라함이 별미를 갔다 바치고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복 받았다, 하는데 별미 안 갔다 바쳐도 복 받게 돼 있어요. 별미 같은 거 없어도 괜찮아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 받게 돼 있고,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돼 있습니다. 비록 삼손이고 못 났고 우리는 세상에 돈에 끌려가지만 주께서는 나실인은 반드시 주님의 그리스도를 증거 해 내고야 마는 그 뿐으로 이끄시는 거예요. 이끌어 가면서 우리는 누구만 증거 하면 돼요? 주님만 증거 하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강의하는 3장은 뭐냐, 광야입니다. 광야 생활하면서 누구만 바라봐라? 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내라, 그게 믿음이라 하는 것이 그 뒤에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환이야기하고 아들이야기 한 거예요.

제발 아들도 아닌 주제에 지가 아들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말이지요. 내가 스스로 원인이 되어서 내가 구원받는 그런 사고방식은 가지지 말라 말이지요. 우리는 그냥 아들에 대한 결과물이에요. 아들을 보여주는 결과물입니다.

13절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오늘 나오네. 아까 한 거 잊어버렸지요. 시간은 뭘 반복한다? 창조. 매일같이 우리는 그래서 다음이야기 4장 이야기를 미리하게 되면, 사람들이 한 번 죽 나오더라도 그 다음은 헤헤 거리면서 또 믿는다고 했는데 돌아서면 믿는 것도 아니고 원망만 하다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지요. 그 뒤에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라고 하는 것은 내 자체를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이 말이에요. 내가 나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나중에 11장에 믿음 장에 나옵니다.

내가 나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내가 원인이 되어버리면 내 자존심과 내 위신을 위해서 시나리오를 그런 식으로 짜요. 나이 많지만 늦둥이 낳았는데 애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고 애가 천재가 돼 가지고 인류의 공헌을 해서 에디슨처럼 됐다. 이런 시나리오를 짜요. 지가 실수해서 늦둥이 낳아놓고 이게 하나님 뜻인지 어떻게 천재가 돼가지고...지가 시나리오를 짜요. 꼭 인간은 돌아서면 자기가 원인자고 거기에 부합되는 어떤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거예요. 사람이 보고 믿는 것은 믿는 게 아닙니다. 실망해요. 주께서는 일부러 실망과 실망을 유도해요. 광야기 때문에.

여러분, 광야에서 만나 줘서 산 거 알지요. 그런데 광야에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분명이 매일같이 만나를 준다고 약속했는데, 어떤 아줌마는 곱빼기로 줍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하나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시험에 걸렸다.’ ‘테스트에 딱 걸렸다.’ 마귀를 테스트하는 그 테스트에 니도 딱 걸렸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시험케 하는 것은 누구를 채 썰 듯이, 탈락자를 골라내는 방법이 하나님 말씀이고 사람은 그 말씀에 대해서 믿게 되어있어요? 안 믿게 되어있어요? 안 믿게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 털어내면 달랑 누구만 남아요? 예수님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탈락자지요.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 믿는 자가 되는 거예요.

아! 말 어렵지요? 믿는 자 설명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요. 왜냐 하면, 그냥 믿으라하면 “예, 믿습니다.”하고 손들고 나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요. 너는 탈라자인데, 탈락자를 아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에요. 왜?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주여, 구원은 이미 끝났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짐으로 구원이 된 거예요.’ 라고 생각하라고 이 땅에서 이렇게 힘든 생활을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십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우리를 죽이지 왜 살게 하느냐, 우리는 사환이라니까요. 사환이 일을 하는 겁니다.

14절 봅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미 우리가 시작하는 지점이 뭐냐 하면, 죄를 지으라는 지점이 아니고 이미 죄를 지었다고 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가 죄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이미 죄 속에 있는 겁니다. 죄 속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나는 죄에서 시작했고 내가 나올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라는 것을 늘 인정하면, 시간은 창조를 반복한다. 그 원칙에 우리가 해당이 되어서 반복적으로 우리는 죄 용서를 반복적으로 받게 되는 그런 사건이 되는 겁니다. 들어보면 굉장히 쉽지요?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아예 날 죄 짓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아니라 지금도 주님께서 이 세상 속에 어떻게 밀어 넣고 굴리게 만들고 어떻게 다루게 되느냐, 다루게 되면 거기서 뭐가 나온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나온다. 그 방식이 뭐냐, 니가 원인이 아니고 니 자체가 결과라는 사실, 따로 있는 원인을 우리가 느끼고 믿어지도록 조치를 한다는 그 놀라운 사실, 그게 바로 확실한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을 잡으면, 이리 되는 거예요.

만약에 저처럼 설명하지 않고 이렇게 설명하면, 이런 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유혹을 받습니다. 아담은 유혹에 저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면 우리는 절대로 유혹을 이겨야 됩니다. 오늘도 이겼지만, 내일도 이겨야 되고 내일 지나면 모레도 이겨야 됩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뭘 모르는가 하면, 자기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자기를 구원하는 방식이 돼요.

그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원인자 되신 예수님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이유가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모릅니다.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판정을 누가 해요? 내가 판정 내리는데 죄를 모르면서 판정을 내리면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원인자 되는 그 죄, 그 씨앗, 원인자 되는 우리 성도는 주님과 동일한 유혹을 받아가면서 주님이 우리가 함께 있음을 느끼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시는 거예요. “아, 인생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더불어서 사는구나!” 광야에서 누구하고 있었어요? 광야에서 시험에 들지 말라고 이야기한 분이 함께 있었잖아요. 누굽니까? 모세정도가 아니고 주의 이름이 함께 있었잖아요. 그것처럼 우리도 광야에서 주께서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어서 이미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을 날마다 우리에게 새겨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항상 살아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야, 참 주님이 이끌지 아니하면 나는 천국 쪽으로 방향을 돌릴 위인이 아니구나!’ 라는 것. 하늘나라 생각할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늘 느끼며 살아가는 그것이 성도의 삶의 이유요, 목적이고, 보람이고, 행복입니다. 살아가면서. 돈 좀 벌었다고 헤헤거리는 거 그거 소용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 광야 같은 세월을 주시고 계속해서 어려움과 시험이 덮치는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결과로서 결과물로서 살아가면서 하루, 하루 주님의 은혜로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천국 가는 생활을 지금부터 시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