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130809b-히3장1절(아들과 사환)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모세가 사환이었잖아요.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할 테니까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세요.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 사환이었다. 그렇다면 모세 다음에 바로 예수님 나타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세 다음에 선지자 사무엘 왜 등장합니까? 사환이 왜 그리 많이 필요합니까? 모세 나오고 “모세 니 수고했다. 다음 바톤은 아들인 내가 할게.” 바로 등장하지 않고 왜 사무엘, 예레미야, 이사야 왜 등장하지요? 사환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맞아요. 맞지만, 사환을 포함해서 사환내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죄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죄가 나오는데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니까 조시기 전에 후딱 하겠습니다.
‘시간은 창조를 반복한다.’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시간은 창조를 반복한다. 시간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시간이 흘러가야 될 이유는 뭐가 반복이 되는 거예요. 뭐가 반복되는가? 창조의 원리가 반복되는 겁니다. 창조의 원리가 반복될 때, 사람은 창조된 자죠. 어제 수요예배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가 원인이 아니고 우리가 결과라 했지요. 그럼 원인은 누굽니까? 하나님이 원인이고, 우리는 그 결과물이지요.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죄가 뭐냐 하면, 결과가 마치 무슨 행세한다? 원인 행세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건 니가 알 바가 아니지요. 우리는 무익한 종인데, 그건 니가 알 바가 아니지요. 요렇게 생긴 게 결과인데 결과를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고 이 결과가 지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나를 이렇게, 이렇게 개조해가지고 결과가 개조해서 또 다른 결과를 낳게 되면 그럼 그 사이에는 주님의 투입을 우리 쪽에서 거부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여, 내가 요런 생각이 있는데, 주님께서 요 뜻을 따라주려고 하면 도와주시고 내 뜻과 안 맞으면 이거 내 하는 대로 내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생각했는데 막상 정탐을 해보니까 거기에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이 뭡니까? 우리는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고 결론을 내렸지요. 무엇 때문에 못 들어간다고 한 거예요. 그 심정이 뭐예요? 평소의 행동이 우리가 원인이고 우리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어떻게 할 때는 원인의 결과가 합당하게 나온다고 생각하다보니까, 지금 요런 등치가지고서는 저쪽에 못 들어간다고 이건 결론을 내리고 울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원인이 아니고 우리는 결과야, 저 쪽 못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애굽에서 어떻게 나왔는가를,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 상상이나 했느냐 이 말이야! 못했잖아요. 그렇잖아요. 애굽에서 나온 시간은 창조를 반복하지요. 우리라는 인간 자체가 없었던 것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기적 아닙니까? 기적이죠. 이걸 제가 십자가마을에 보면 ‘불가능성’이란 글을 써놨어요.
불가능성이란 뭐냐 하면, 현재 있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건데 우리는 왜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이것을 불가능성으로 감사치 못하고 왜 불만스러우냐 이 말이죠. 현재 우리가 불만스럽다는 말은 뭐냐, 우리는 이걸 불가능성으로 보지 않고 “에이 씨, 잘만하면 가능할 수 있었는데.” 라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 불만이 늘어진 거예요. 불만이 넘치는 겁니다. 덥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우리 자체는 결과입니다. 결과인데, 우리는 마귀한테 뒤집어 씌었는지 항상 내가 원인이 되고 내 원인에 부합되는 결과가 있을 때만 신에게 감사할 용의가 돼있다는 이런 쪽으로 나간다 이 말이죠. 그걸 수요일날 죄가 된다 했지요. 그게 바로 죄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을 시키니까 사람들은 모세가 원인이고 모세가 잘해서 우리가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모세 자체가 결과인데, 그들은 모세가 있음으로서 우리가 잘됐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모세를 믿는 거예요. 모세! 모세! 모세를 믿는 거예요. 이것은 사람이 사무엘로 바뀌어도 바뀌지를 않아요. 사무엘상 7장3절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역사를 보고 신기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는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겨도 사업 잘되고 행복이 넘쳐나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상하게 조금만 다른 신을 섬기는 어떻게 돼요? 다른 신을 섬기면 재깍 재깍 주변에 있는 나라가 쳐들어와 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괴롭다고 못살겠다고 고함치지요.
우리가 시간이 몇 시 됐는지 모를 때는 뭘 봅니까? 시계 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질적인 시계, 어떻게 일하는가를 보여주는 시계는 어느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이죠. 수시로 이스라엘을 봐야 돼요. 지금 몇 시쯤인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인간은 시간을 전달하는 물질이에요. 인간 자체가.
적어 볼게요. ‘인간은 시간을 전달하는 물질이다.’ 물질이라 하는 것은 흙이다 이 말이죠. 물컹, 물컹한 고기 덩어리란 말이죠. 우리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내용이 없으면 그냥 물질, 고깃덩어리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재깍 재깍 현장화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오늘날 성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처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신을 섬겨버리면 재깍 재깍 현상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여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면.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신을 섬겼는지, 안 섬겼는지 어떻게 알아요?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졸음 운전할 때, 나는 지금 운전하고 있다. 나는 지금 운전하고 있다. 이러면서 조금 가보면 꿈속에서 운전하고 있는 거예요. 운전하고 있다 하면서 차 뒹구는 겁니다. 김 재성 집사님 5명태우고 졸음운전하다 차가 뒤집어졌어요. 안 다쳤어요. 주께서 결과로 안 다치게 하셨어요. 졸음운전하게 하는 것도 다 결과입니다. 모든 결과가 내 좋아라, 만든 결과가 아니고 주님께 돌아올 자는 돌아오라고 생애에 만들어 주는 결과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요.
시간은 창조를 반복하는 겁니다. 창조가 뭐냐, 우리가 원래 없었어요. 없었는데, 주님 증거 하기 위해서 결과물로 만들 낸 게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있음 자체가 창조의 사건이 응축됐다고 보면 돼요. “너는 나의 것이다.”라는 말이 뭐냐 하면, 너는 너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의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책임 있게 내가 일으킨 창조,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창조의 사역, 하나님의 언약의 사역을 너를 통해서 증거하고 말리라, 증거 해 내고 말리라, 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걸 반복하기 때문에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왜 모세 다음에 바로 주님이 안 오시느냐,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세를 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사환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모세 하는 일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오실 메시아를 상상을 하게 되면 그 것 또한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그래서 모세로 인하여 유발된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이 희생타로 등장해야 되는데, 모세 다음에 누굽니까? 여호수아, 여호수아 다음에 누구지요? 사사들, 사사다음에 누구지요? 사무엘, 사무엘 다음에 누굽니까? 다윗, 나와야 되는 거예요. 다윗 다음에 솔로몬, 아직 예수님까지 멀었어요. 그 다음에 이사야, 예레미야 계속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그 사람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에게 결과가 주어지는 줄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세웠다는 생각을 잘 안하게 돼요. 해도 순간적으로 하고 잊어버려요.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반복해야 되지요. 왜, 시간은 창조를 뭐한다? 반복한다. 반복해야 되겠지요. 시간은 창조를 반복하니까 시간에서 뭐냐 하면, 창조의 언약을 가지고 있는 분이 모세 다음에 여호수아로 여기에 등장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또 여호수아한테 완전 매진하네. 사람이 아닌데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데 자꾸 사람의 이름에다가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주의 이름이 있다~ 주의 이름이 있다~ 모세가 아니고 내 이름이다~ 모세는 주의 이름이 보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은 사람이지, 주님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게요. 예가 히브리서 11장에 죽 나오는데, 삼손 있잖아요. 물어 봅시다. 삼손이 태어난 것은 보통 평범한 출생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아니었지요. 원래 삼손이란 애기가 없었어요. 없었는데 마노아 가정에 누가 찾아옵니까? 천사가 오지요. 음식을 주니까 불 가운데 천사가 기묘자라고 알려주면서 하늘로 올라갔어요.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마노아 가정에 개입이 됐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다녀갔다. 하나님이 원인이다. 결과가 뭡니까? 삼손 출현이지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와! 하나님이 낳아준 삼손, 그러면 삼손은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삼손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성경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게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서 주신 인간 같으면 최소한 인간답게 살아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보다도 못하게 사는 거잖아요. 매일 힘자랑하면서 힘을 어디에 씁니까? 지 맘에 드는 여자 찾기,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여자 전쟁, 여자 간수하고 여성을 지키고 자기 민족보다 누굴 더 사랑해요? 지가 좋아하는 여자를 더 사랑해요. 물론 여자 입장에서는 정말 훈남이지요. 멋진 남자지요. 자기 종교와 자기가 믿는 하나님까지 포기하면서 여자까지 아끼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비밀, 힘은 어디에 있다? 머리카락에 있다는 그 비밀을 세상에 천기누설을 누구한테 합니까? 여자의 눈물, 우니까 “자기 나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것도 안 가르쳐주고.” 흑흑흑 하니까 “갈래면 가라.” 이러면 그만인데. “아이고, 미안해. 가면 안 돼!” “갈 거야, 그거 안 가르쳐주면 갈 거야.” “안 돼! 안 돼!” “하나님이 좋아, 내가 좋아” “니가 좋아” 이리 나와요. 출생부터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꼴이 그 꼴입니다. 보세요. 누구와 대비시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대비시키지요. 예수님께서 대비시킨 이유가 뭐냐, 바로 사환이 있어도 사환은 절대로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사환은.
사환마저 어디에 영향을 입는다? 죄에서 구원하라고 사환 보냈지만, 사환마저 죄를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죄의 지배가 현재 살고 있는 안양, 이 세상입니다. 어느 누구도 개과천선해서 인간되고 남한테 인간됨을 보여도 소용없습니다. 요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소용없어 빠밤빠바~ 소용없어, 소용없어, 전부 다 소용없는 거예요. 다 헛되고 헛된 거예요. 자식이 신천지에 가고 복음 알아도 소용없어요. 알아도 소용없어요. 언제까지 갈지 몰라요. 장담 못해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코스고 결과입니다.
모세 오고 바로 예수님 안 오고 왜 삼손을 줬느냐, 삼손을 본란 말이죠. 분명히 그 인간은 안돼요. 삼손 그런 식으로 여자 밝혀가지고는 구원? 지 여자 하나 간 수도 못하는 게 무슨 구원이 돼요. 안돼요. 하나님이 주신 것은 언약을 줬는데 언약을 인간이 감당을 못하네. 도무지. 왜, 죄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언약을 감당을 못해요. 따라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5장 7절에 봅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지요. 그 정도로 우리의 갖고 있는 육신이라는 게 마귀 손에 있는 육신이에요. 이 육신 내 소관 아닙니다. 사람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거든요.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뭐냐, 비합리적이에요. 감정입니다. 충동이고. 성깔이고. 욱하는 거고.
평소에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도 성질나면 이건 이성이고 합리고 없습니다. 아무도 이렇게 예수님처럼 자기의 감정조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들로 했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나는 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나는 강도였을 뿐이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천국에 초청받아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는 삼손처럼 능력 줘도 그 능력이 어디로 흘러간다? 여자 밝히고, 세상 자기 욕망, 자기 육신의 욕망을 이루는데 달성하는데 우리는 거기다가 힘을 다 소모해요. 삼손이 여자가 세 명이었습니다. 첫째여자, 둘째여자, 셋째여자, 여자하나 붙들고 놓칠 때마다 성질나서 힘을 발휘하는데 덤으로 생긴 결과가 뭐냐, 이스라엘이 블레셋에서 구원받았다 보는 거예요. 이야기 스토리가 이상하게 되지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줬는데 사자입도 쫴고 했는데, 그 능력을 이스라엘 구원에 쓰는 게 아니고 어디에 씁니까? 지는 여자 밝히는데 급해서 쓰다보니까 그 부수물로 그 부수물이 뭐냐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죽는 거예요. 한두 명이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마지막 여자를 놓치지요. 드릴라. 남자가 여자의 본심을 알 때, 실망스럽지요. 그렇게 남자 빼먹을 거 다 빼먹고 쏙 자기의 블레셋으로 돌아가요. 삼손의 출생을 알게 되면, “아이고, 그 힘이 어디서 나왔어요? 아이고, 여호와가 주셨어요. 그러면 나 이제부터 블레셋 다곤 신을 믿지 않고 여호와를 믿겠어요.” 이리 해야 되는데 그래도 그들은 여호와 안 믿고 누굴 믿어요? 힘이 현재 지배하는 쪽 어딥니까? 지배하는 쪽이 결국 마귀지요.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마귀니까. 마귀 쪽으로 돌아서잖아요. 실컷 빼먹고 마귀한테 돌아서서 많이 놀라셨지요? 많이 당황스럽지요? 돌아서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봤던 사무엘상7장3절에 우리가 다시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라는 사무엘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이것은 사무엘이 그런 잔소리 하는 그 순간뿐이지 돌아서면 다시 어디로 간다? 다른 신으로 간다. 이게 신이 두 가지가 있어요. 이걸 아셔야 돼요. 구약하면서 사람들이 이걸 잘 모르는데 신이 두 종류가 있어요.
사라지는 신이 있습니다. 사라지는 신인데 이게 엘이에요. 신은 은퇴를 해버려요. 신은 만들어놓고 은퇴해 버리고 그 남아있는 창조물은 누가 관리하느냐 하면, 실용적 신이 담당해요. 실용적 신의 대표자가 바알입니다. 전에 강의할 때는 CEO라 했지요. 전문 경영인. 가나안 땅의 신은 두 종류에요. 하나는 천지창조를 해놓고 떠나버려요. 떠나버리면 제사도 안 받고 아무것도 안 받아요. 안 받고 실용적인 신으로 하여금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대지와 땅을 관리하는 데미우르고스 신이 나와요. 플라톤의 저서에 보면. 그 관리자에게 맡기는 겁니다. 관리자는 뭐냐 하면, 실용적인 신인데, 곡물의 신, 바다에 가면 풍어제가 있어서 풍랑을 제어하는 신, 고거 담당이 바로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보면 여러 가지 신이 있잖아요. 태양신 아폴로 있고, 바다의 신, 사랑의 신, 불의 신, 결혼과 가정의 신, 달의 신, 지혜와 예술을 담당하는 신 그런 것처럼 전공분야 따라 신이 분류되어 있어요.
이것은 기독교 오기 전에 우리나라에 토속신앙도 그렇지요. 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언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소에는 기존 신을 섬겨요. 섬기다가 안 될 때는 안 보여 줄 때는 마지막 보이지 않는 신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 등장한 게 여호와에요. 여호와는 잔챙이들 신하고 상대를 안 해요. 그 보이지 않는 신하고 불러내는데. 보이지 않는 신이 뭐냐, 여호와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언약이 없는 신은 악마고, 언약을 타고 내려온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여호와고, 여호와는 언약을 이루러 오는 하나님이 여호와에요.
그래서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상숭배 자에요. 기존교회에서 언약을 모르는 사람은 우상숭배 자입니다. 실용적인 신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 우리 애가 고3인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된다” 하는 거예요. 실용적인 신. 이런 이야기 하니까 확실히 눈에 들어오지요.
세상 사람들은 신앙에 관심 없어요. 궁극적으로 신이 있느냐, 관심이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사할 때 적당한 거, 결혼할 때 서로 궁합이 맞는지 그런 신, 실용적인 신을 원하는 거예요. 사업할 때, 영화 찍을 때, 공장 신축할 때, 그래서 그런 신들은 어떻게 차이 나느냐 하면, 제사방법에서 인간들이 차등을 둬요. 어떤 신은 떡을 좋아하는 신, 앙꼬 말고 시루떡을 좋아하는 신이 있고, 돼지머리를 좋아하는 신, 항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할 때만 좋은 신이고, 그게 뭐냐 이 육신을 삼손이 이겨낸다? 못 이겨낸다? 못 이겨내는 거예요. 그러면 삼손에게 그 여자를 붙여준 그 결과물, 삼손이란 결과물과 여자에게 뿅 가도록 만든 결과 이 모든 결과는 결국, 원인이 누굽니까? 주님이죠.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삼손은 그냥 일군이지요.
그런데 삼손이 태어날 때 조건이 있습니다. 나실 인으로 태어나야 돼요. 나실 인이라 하는 것은 지가 하고 싶어 나실 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점지해 줘야 돼요. 일종의 신탁. “너 말이야.” “예” “너는 이제 태어나서 너의 인생은 몇 년 동안 몇 년 기간만큼은 몽땅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하고 고 행동한 그것은 거룩한 것으로 간주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니가 수고한 만큼은 니가 수고한 니한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니는 일종의 중보자, 대리자, 희생자 역할만 할 뿐이고 니가 희생해서 남이 사는 식으로 나는 너를 사용 좀 해야겠다.” 이게 나실 인입니다. 다시 설명 안 해도 되겠지요.
나실 인이라 하는 것은 내 한 몸 죽어 남 살리는 것!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하겠습니다.” 할 사람 없지요. 원래 목사가 보통 신학교 가기 전까지는 기도원에서 기도할 때는 다 그렇게 시작해요. “주여 이 한 몸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하나 들고 가겠습니다.” 기껏 가는 것은 사창 골에 가서 복음 전하다고 하면. 그거 아골 골짜기 아니거든요. 교회가 아골 골짜기인데. 창녀들이 웃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거에요. 나실인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 그럼 삼손이 여자 밝히면 이게 깨집니까? 안 깨집니까? 바로 삼손이야기가 그거에요. 삼손으로 하여금 이것은 완전히 바람쟁이로 살고 날라리로 살게 만들면서도 나실인이란 본래의 계획은 차질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 없었으니까 삼손은 사환이었다. 그냥 하나의 오실 아들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전혀 아들 아닌 구석으로 살아야 될 그런 역할을 한 겁니다. 마지막 삼손이 머리카락도 잘리고 눈도 한 짝 빼앗기고 이제는 찾아올 여자는 한 사람도 없어요. 여자 밝힌 인간들 나중에 보면 더 서럽지요. 왜, 서러워서 어디 가느냐 하면, 탑골공원에 가 있어봐야 아무도 안 옵니다. 오긴 와요. 사기꾼들. 아니면 커피 팔아먹는 아주머니들. 아무도 안와요. 장기 팔아 먹으려는 사람오지 아무도 안 옵니다. 몽땅 남자의 매력은 다 뺏어요. 눈 뺐지요. 눈 빼는 것은 모든 걸 다 빼앗는 거예요. 머리카락 잘렸지요. 볼품도 없지요.
그런데 그 때 유일하게 나실인 역할은 다 합니다. 나 하나 죽어 이스라엘 백성 살린다.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진주의 논개처럼. 그렇게 일장 몸 붙들고 죽잖아요. 논개가 결과인가, 그건 이스라엘 아닌 것은 갔다 붙이지 맙시다. 언약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언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삼손도 언약에서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새언약을 믿게 되면 언약 안에 주어졌고 언약대로 움직입니다.
3장 7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나가 누구지요? 여기 분명히 모세밖에 없었는데 모세 말고 나가 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말하지요. 하나님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음성을 통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아, 아, 여기는 하늘나라, 여러분들 잘 들으세요. 나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내 말 들으세요. 원망하지 말고 내가 양식주고 물 줄 테니까 40년 동안 원망하지 마세요. 아, 아, 여기는 하나님, 다음시간에 봅시다.“ 하고 마이크 대고 이리 안하고 왜 모세를 통해서 하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는 지금 안양의 하늘에 “아, 아, 여기는 하늘나라, 두 번째 천사입니다. 잘들 들으세요.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그러면 이 더운데 전도할 필요 없잖아요. 이런 생각 안 해봤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되면 다 믿어요. 다 믿으면 지옥이 필요치 않아요. 인간들이 가장 무시하고 가장 말 안 듣고 가장 모독하고 싶은 모양새로 주님이 오셔야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인간을 그냥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죄에서 건져내는 방식으로만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언약이 목적입니다. 새언약, 언약 완성이 목적이기 때문에 십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십자가 안다 소리를 아무도 할 수 없어야 돼요. 심지어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잖아요. 그래야 돼요. 십자가 지신 그 당사자 외엔 아무도 없어야 되는 겁니다.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한 사람만 남긴다.’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달랑 한 사람만 남아요. 모든 인간은 아담에 속했으면 이제 구원자는 새로운 아담, 두 번째 아담 달랑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 매직으로 지워 나갑니다. 달랑 한 사람. 이걸 하나교회에서 요한 계시록 할 때, 1이라고 했어요. 1에서 144,000명 파생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1에서 7이 나오고, 666이라고 세 번씩 강조한 것은 짐승수가 666이란 뜻이 아니고 7이란 것은 천지를 창조할 때, 창조에 근거해서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하는 권한은 7에 있고 7이외에는 7에 의해서 다 심판을 받아야 돼요.
그러니까 악마는 인간의 이마에 손목에 인을 박잖아요. 박아야 될 이유가 심판받게 하기 위해서 받는 거예요. 받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한 거예요. 왜냐 하면 생명책의 인을 받은 사람이 이마에 그리스도인을 받잖아요. 그러니까 악마의 존재는 악마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악마가 꼭 있어야 돼요. 빛이,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두움이 있어야 돼요.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빛이 나요.
천국 갈 사람에게 도장이 있다는 것은 그 외에도 도장이 있어야 돼요. 천국 갈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을 받지만, 하나님 이외에는 악마의 도장을 반드시 받아야 돼요. 받아 놓고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 받는 숫자가 6이고, 7이 아니고 온전한 창조는 7일 만에 창조했기 때문에 6이라는 것은 창조에 못 미치는 겁니다. 완전히 못 미치는 거예요.
그걸 세 번씩이나 강조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독수리가 세 번 강조하지요. 이건 철저하게 심판하고 말리라는 뜻입니다. 절대로 심판에서 빼주는 법 없다는 뜻이에요. 심판에서 절대로 면제해 주지 않는 자들의 집합, 짐승의 숫자를 받은 사람 그 사람이 666이에요. 몇 명이고 관계없어요. 전체 모아 놓으면 전체가 666이에요. 곧 짐승의 숫자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니 지혜 있는 자는, 지혜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만이 지혜 있는 자에요. 보통 인간들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닙니다. “어? 도장을 왜 받았지? 어! 저쪽에도 도장 있구나.” 이 쪽 도장이 있다는 것은 저 쪽에도 도장이 있다는 거예요. 이건 천국 가는 도장이고, 저건 지옥 가는 도장이고. 도장 없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이죠. 이 모든 것은 바로 한 사람만 남기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달랑 한 사람만 남기는.
히브리서1장 13절에 보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여기서 누구라는 말은 모든 인간을 다 불러 세워놓고 “누구야? 너희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대접받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바로 우리를 제켜 놓기 위한 오직 한 사람만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죠. 그런데 그 한사람이 뭐냐 하면, 내 원수지요. 원수.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서 이기지 아니하면 그 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더위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세상은 죄와의 싸움이고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마찬가지로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죄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에서 못 벗어나게 합니다. 일부러 못 벗어나게 만들고 그래놓고 모세를 보내놓고 모세는 사환이기 때문에 나는 못합니다. 매일 나는 못합니다. 나는 이 백성하고 성질 더러워서 이 백성 감당 못 하겠습니다. 에이 씨, 바위도 두 번 치고. 매일 사환은 이래요. 그렇지만 삼손은 어설퍼도 뭐는 구원받는다? 이스라엘은 구원되듯이 모세는 어설퍼도 누구는 구원됩니까? 이스라엘이 계속 구원되는 거예요.
그 모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 별세에 대해서 언급했잖아요.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삼손도 모세도 전부 다 그리스도로 구원받거든요. 그러니까 옛날 선배들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들이나 우리들이나 예수님 십자가 지면 다 이룬 거예요. 어떤 부흥사는 아브라함이 별미를 갔다 바치고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복 받았다, 하는데 별미 안 갔다 바쳐도 복 받게 돼 있어요. 별미 같은 거 없어도 괜찮아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 받게 돼 있고,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돼 있습니다. 비록 삼손이고 못 났고 우리는 세상에 돈에 끌려가지만 주께서는 나실인은 반드시 주님의 그리스도를 증거 해 내고야 마는 그 뿐으로 이끄시는 거예요. 이끌어 가면서 우리는 누구만 증거 하면 돼요? 주님만 증거 하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강의하는 3장은 뭐냐, 광야입니다. 광야 생활하면서 누구만 바라봐라? 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내라, 그게 믿음이라 하는 것이 그 뒤에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환이야기하고 아들이야기 한 거예요.
제발 아들도 아닌 주제에 지가 아들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말이지요. 내가 스스로 원인이 되어서 내가 구원받는 그런 사고방식은 가지지 말라 말이지요. 우리는 그냥 아들에 대한 결과물이에요. 아들을 보여주는 결과물입니다.
13절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오늘 나오네. 아까 한 거 잊어버렸지요. 시간은 뭘 반복한다? 창조. 매일같이 우리는 그래서 다음이야기 4장 이야기를 미리하게 되면, 사람들이 한 번 죽 나오더라도 그 다음은 헤헤 거리면서 또 믿는다고 했는데 돌아서면 믿는 것도 아니고 원망만 하다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지요. 그 뒤에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라고 하는 것은 내 자체를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이 말이에요. 내가 나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나중에 11장에 믿음 장에 나옵니다.
내가 나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내가 원인이 되어버리면 내 자존심과 내 위신을 위해서 시나리오를 그런 식으로 짜요. 나이 많지만 늦둥이 낳았는데 애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고 애가 천재가 돼 가지고 인류의 공헌을 해서 에디슨처럼 됐다. 이런 시나리오를 짜요. 지가 실수해서 늦둥이 낳아놓고 이게 하나님 뜻인지 어떻게 천재가 돼가지고...지가 시나리오를 짜요. 꼭 인간은 돌아서면 자기가 원인자고 거기에 부합되는 어떤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거예요. 사람이 보고 믿는 것은 믿는 게 아닙니다. 실망해요. 주께서는 일부러 실망과 실망을 유도해요. 광야기 때문에.
여러분, 광야에서 만나 줘서 산 거 알지요. 그런데 광야에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분명이 매일같이 만나를 준다고 약속했는데, 어떤 아줌마는 곱빼기로 줍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하나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시험에 걸렸다.’ ‘테스트에 딱 걸렸다.’ 마귀를 테스트하는 그 테스트에 니도 딱 걸렸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시험케 하는 것은 누구를 채 썰 듯이, 탈락자를 골라내는 방법이 하나님 말씀이고 사람은 그 말씀에 대해서 믿게 되어있어요? 안 믿게 되어있어요? 안 믿게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 털어내면 달랑 누구만 남아요? 예수님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탈락자지요.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 믿는 자가 되는 거예요.
아! 말 어렵지요? 믿는 자 설명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요. 왜냐 하면, 그냥 믿으라하면 “예, 믿습니다.”하고 손들고 나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요. 너는 탈라자인데, 탈락자를 아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에요. 왜?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주여, 구원은 이미 끝났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짐으로 구원이 된 거예요.’ 라고 생각하라고 이 땅에서 이렇게 힘든 생활을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십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우리를 죽이지 왜 살게 하느냐, 우리는 사환이라니까요. 사환이 일을 하는 겁니다.
14절 봅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미 우리가 시작하는 지점이 뭐냐 하면, 죄를 지으라는 지점이 아니고 이미 죄를 지었다고 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가 죄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이미 죄 속에 있는 겁니다. 죄 속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나는 죄에서 시작했고 내가 나올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라는 것을 늘 인정하면, 시간은 창조를 반복한다. 그 원칙에 우리가 해당이 되어서 반복적으로 우리는 죄 용서를 반복적으로 받게 되는 그런 사건이 되는 겁니다. 들어보면 굉장히 쉽지요?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아예 날 죄 짓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아니라 지금도 주님께서 이 세상 속에 어떻게 밀어 넣고 굴리게 만들고 어떻게 다루게 되느냐, 다루게 되면 거기서 뭐가 나온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나온다. 그 방식이 뭐냐, 니가 원인이 아니고 니 자체가 결과라는 사실, 따로 있는 원인을 우리가 느끼고 믿어지도록 조치를 한다는 그 놀라운 사실, 그게 바로 확실한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을 잡으면, 이리 되는 거예요.
만약에 저처럼 설명하지 않고 이렇게 설명하면, 이런 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유혹을 받습니다. 아담은 유혹에 저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면 우리는 절대로 유혹을 이겨야 됩니다. 오늘도 이겼지만, 내일도 이겨야 되고 내일 지나면 모레도 이겨야 됩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뭘 모르는가 하면, 자기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자기를 구원하는 방식이 돼요.
그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원인자 되신 예수님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이유가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모릅니다.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판정을 누가 해요? 내가 판정 내리는데 죄를 모르면서 판정을 내리면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원인자 되는 그 죄, 그 씨앗, 원인자 되는 우리 성도는 주님과 동일한 유혹을 받아가면서 주님이 우리가 함께 있음을 느끼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시는 거예요. “아, 인생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더불어서 사는구나!” 광야에서 누구하고 있었어요? 광야에서 시험에 들지 말라고 이야기한 분이 함께 있었잖아요. 누굽니까? 모세정도가 아니고 주의 이름이 함께 있었잖아요. 그것처럼 우리도 광야에서 주께서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어서 이미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을 날마다 우리에게 새겨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항상 살아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야, 참 주님이 이끌지 아니하면 나는 천국 쪽으로 방향을 돌릴 위인이 아니구나!’ 라는 것. 하늘나라 생각할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늘 느끼며 살아가는 그것이 성도의 삶의 이유요, 목적이고, 보람이고, 행복입니다. 살아가면서. 돈 좀 벌었다고 헤헤거리는 거 그거 소용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 광야 같은 세월을 주시고 계속해서 어려움과 시험이 덮치는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결과로서 결과물로서 살아가면서 하루, 하루 주님의 은혜로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천국 가는 생활을 지금부터 시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