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510b-히2장12절(형제와 소자)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입니다. 문제는 그거예요. 현실은 이거다. 문제는 그게 해답이 아니거든요. 해답은 이겁니다. 뭐냐 하면, 형제가 그 뒤에 있으니까 말씀이 무효 될 수 없는 거고 분명히 예수님께서 니는 형제라고 했다 말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형제라고 해도 아무런 관계없이 니가 나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이 나는 너를 형제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형제라고 이미 돼 버렸을 경우에 그것은 어떤 논리에 의해서, 어떤 작용에 의해서 그렇게 되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이걸 알아야 되잖아요.
여기에서 아까 이삭 옆에 수양이 있지요. 아까 이삭을 육이라 했습니다. 육이니까 옛 야곱과 에서가 다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야곱이 구원받았다 했으면 그냥 구원받은 게 아니고 야곱이 뭐로 바뀌는가 하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구원받았어요.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그 안에 뭐가 타느냐 하면, 언약이 그 속에 삽입이 되는 겁니다. 언약이 담깁니다.
그러면 야곱의 인생은 끝나고 이제는 무슨 인생으로 다루어지느냐, 이스라엘 되어야만 하는 그런 인생으로 바뀌어 지는데 그 작업은 야곱이 한 작업이 아니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었던 그 하나님이 떠나지 않음으로서 계속해서 엉겨붙어가지고 기어이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되게 만드시는 그 작업을 하는 겁니다.
시편134편에 나오거든요. 이스라엘은 내가 택했다. 네가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택하여 내 백성이다. 이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언이고, 그것은 누구도 취소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옥입구에 가더라도 지옥은 들어가질 못해요. 심지어 지옥 가더라도 지옥에 살 수가 없어요. 끄집어내시는 강력한 힘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 자신의 무능함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게 그게 신자의 특징입니다. 신자는 두 개가 다 있어야 돼요. “나, 예수 잘 믿는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나는 예수를 늘 믿는데, 늘 실패해. 그 실패한 것을 주워 다가 늘 성공케 하셔.” 이렇게 해서 모든 주인공을 예수님께 돌려드리는 거예요.
제가 방금 무능성이라 했는데, 인간의 무능성,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부자연스러움이 되겠지요.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다른 교회 보면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 이야기하고, 예수님 영광만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부자연스러워요 뭔가. 옷이 제 옷이 아니라. 누가 입던 옷을 주워 다가 입어 놓으니까 옷은 예쁜데 안 맞아.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아.
인생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자연스럽지를 못해요. 얼마나 부자연스러웠으면 철야하면서 울부짖겠습니까? 얼마나 옷에 안 맞았으면, 품이 안 맞으면 얼마나 주여! 주여! 부르겠어요. 정말 몸에 딱 맞아버리면 부르짖을 이유도 없고 그냥 밥 먹고 살아가고 잠자고 자연스러운 신앙생활인데 따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 그것도 시간대가 과외 받듯이 따로 해야 된다는 자체가 안 맞아요. 너무 안 맞아.
자기 현실은 자기가 주인공인데, 성경말씀의 현실은 예수님이 주인공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안 맞는 거예요. 맞질 않는 거예요. 맞추려고 애는 쓰는데, 대표적인 것이 청교도예요. 청교도 특징이 안 맞아요. 젊을 때 청교도 믿어놓고 늙어서 다 버립니다. 젊을 때는 취직도 안했지 대학공부도 아직 안 끝났지,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래요. 그런데 끝나고 취직해서 회사 가버리면 청교도가 도움 되던가요? 택도 없는 소리. 청교도하면 애들 성적 오릅니까? 안 되거든요. 그 때는 다시 전보다 더욱 위선자로 달라지지요.
그래서 아까 제가 분명히 이삭은 육이라 했는데, 여기서 육을, 이삭을, 육 말고 다른 의미로 씁니다. 아~ 유명한 말 나온다. ‘유일자’에요. 이것은 유일자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무한에서 나왔어요. 모든 유한은 전부 다 개체 자 돼요. 무한은 이러한 개체 자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나는 니 없이는 일 못하겠어.” 이런 거 없어요. 이것은 유일자예요. 특히 증거가 뭐냐 하면, 이삭 이전에 아브라함이 자식이라고 생긴 자식이 있었어요. 누구지요? 이스마엘 이지요. 이스마엘과 대비되면서 이삭입니다.
이삭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없는데서 나왔어요. 없는데서 나왔고 창세기22장에서는 거기다가 속성이 하나 붙습니다. 없는데서 나왔다는 증거가 뭐냐, 죽은 데서 살아났다는 거예요. 없는 데서 나왔다는 걸 가지고 실체라 하고 실체에 대한 속성이 뭐냐 하면, 죽은 데서 살아났다. 죽은 데서 살아났다 하는 것은 니가 아무리 따라와도 인간은 아무리 따라 붙여도 사람이 살아있을 때만 따라 붙이지, 죽고 난 뒤에는 무슨 따라 붙일 게 있어요? 운동하고 뛸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따라 오려면 따라와!” 하고 죽어서 들어가니까, 죽음 속까지는 따라오지를 못해요. 왜? 죽음이 끝이니까. 삶의 끝은 죽음이 끝입니다.
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으로 모든 걸 종결시켜 놓고 그 다음에 천국 가는 사람은 뭐냐, 죽음과 이 쪽 죽음과 터널을 뚫어요. 공사를 한다고요. 터널을 뚫어가지고 이 쪽 죽음을 재료로 사용해서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죽음이 덧붙여져 버리면 이것이 죽은 목숨이 아니라 영생의 목숨으로서 천국에 합류시켜 줍니다. 개구멍이라~ 죽음이란 터널로 가는 거예요.
누구든지 날 따라오려거든 어떻게 오라? 날 따라오려거든 살 준비해서 따라오는 게 아니고 뭘 지고 따라오라? 자기 십자가가 뭡니까? 옛날의 십자가는 뭐예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죄인으로서 죽는 게 십자가예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니는 뭘 해도 니는 죄야! 인턴 대학생 엉덩이를 쥐든 뭘 하든 쥐기 전부터 니는 죄인이었어. 이리 된다 말이지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냥 십자가 지고 가면 안돼요. 예수님을 따라 가야 돼요. 그러면 합류가 되지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과 우리의 합류,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합류의 조건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언약적인 죽음’ 그냥 죽음이 아니고 자살하면 안돼요. 베드로가 자살해서 주님 따라 간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말렸잖아요. 오지 마라, 그런 식으로 안 간다 했지요. 베드로가 닭이 울 때 유명하잖아요. 유럽에 성당에 보면 닭 우는 게 있어요. 베드로가 닭이 울 때, 회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그 전까지는 개별자였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목숨 바쳐서 따라가겠습니다.” 개별자였습니다.
여러분, 닭이 우리가 보기에는 개별자지요. 닭은 닭이고, 개는 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닭이 울기 전에 3번 부인하는 그 말씀 속에 볼 때, 그 닭은 개별자가 아니고 어느 속에 담깁니까? 닭장속의 닭이 아니고, 말씀 속의 닭이지요. 말씀 속의 닭이니까 닭은 울어야 돼요. 그것처럼 베드로가 구원받으려면 베드로가 개별자를 떠나서 어느 속에 들어가야 돼요? 말씀 속에, 언약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 언약 속에 들어가는 방법이 뭐냐,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주께서 죽여주는 죽음 속에 들어가야 돼요. 이걸 구약에서는 레위기에서는 그 방법이 뭐냐, ‘제사’라는 겁니다. 그게 제사에요. 레위기 17장 14절,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끊어진다 했지요. 여러분들이 이 레위기 보면서 이상한 생각 안 듭니까? 우리는 성경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있는 성경이라 하잖아요.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부분이니까 잘 들어보세요.
지금 우리의 생각은 뭐냐,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영생 주시려고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새삼스럽게 끊어진다는 것이 필요치 않지요. 끊어진다는 것은 언제 쓰이는 경우냐 하면, 일단은 불러놓고 일단은 살려 줄게, 해 놓고 다음에 뭡니까? 너는 아니였었어, 하고 내놓을 때 끊어지는 거죠. 그러면 우리 주께서 우리 부를 때는 합격된 줄 알고 있잖아요. 우리 몸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말이지요. 우리 몸은 서울대라 생각했는데, 서울대학 총장이 하는 말이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 하면 서울 대학은 우리의 몸을 요구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몸을 요구했으면 다 구원해야 되니까 몸을 요구한 게 아니고 피의 언약을 인정안하면 추방이다. 결국은 피의 언약 하나를 모으기 위해서 여러 몸들을 서울대학으로 모으는 셈이 된 거죠.
결국 주님께서는 끊어지리라, 말을 쓴 것은 뭘 하나 남기려고? 다시 하면, 너희들을 구원시켜주려고 구원한 건 아니다. 너희들 구원의 요지가, 네 하나님 존재하는 이유가, 너희들을 구원하는 게 하나님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잠시 사용했다가 갔다 버리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나무젓가락 꽂아놓고 모래로 덮잖아요. 돌아가면서 모래를 헤쳐가지고 제일 마지막에 안 넘어지는 사람이 1등하기 했잖아요. 주께서는 이거 하나 세우기 위해서 나무젓가락 세우기 위해서 계속 파헤치는 거예요. 이미 애굽에서 홍해 건너온 사람들 모아 놓고 계속해서 뭔가 추방해서 끝으로 보내지요. 안식일 남아 있어, 안 돼! 안 돼! 너는 안 돼! 결국 남고자 하는 게 뭐냐, 최종적으로 뭡니까? 생명은 어디에 있다? 피에 있기 때문에 이 생명은 너희들이 요구한 대로 줄 수 없고 내가 요구한 자리, 하나의 자리, 자리가 결정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가 거기서 구원의 효과가 비로소 주어지는 겁니다. 받고자 하는 사람은 내 몸이 가면 안 되고 내가 어떤 자리에 가야 돼요. 우리는 주님만 쳐다보고 가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왔던 그 자리가 뭐냐, 옆에 강도 바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의 자리인데, 주께서 죄인 되게 하는 언약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생소하게 죄인임을 근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 자리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했지만, 나는 사람에게 죄지은 것이 아니라는 건방진 고백을 해요. 나는 사람에게 죄지은 게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죄지었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이야기해요. 나는 하나님께 죄지었다. 이 말은 뭡니까? 나는 죄지을 때만 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보같이 이제야 그걸 알았느냐, 이 바보야! 이런 뜻이거든요.
교회 다니면 새삼 구원될 줄 알았지만, 교회 다니니까 나는 처음부터 원천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되었다. 말씀을 듣고. 이것도 은혜를 받아야 되지, 교회 다 다닌다고 되는 건 아니고. 처음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다루었던 사실을 모르고 우리는 죄 안 지으려고 말씀 순종 얼마나 해댔습니까? 바로 그런 오류,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리 지키려고. 우리의 자리는 이미 죄인의 자리로 규정이 났는데, DNA자리지만, 그나마도 건전한 자리, 죄인이라도 같은 죄인이 아니고 좀 우수한 죄인, 남들은 회개안하지만 나는 회개했으니까 반성 잘하는 아주 착한 죄인. 인간들은 꼴에 꼴을 다해요. 그래서 그거 알았다고 하늘나라 보너스 상급 준다고 사람 꼬셔대고.
철학에 두 가지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극적 인생, 인간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하나는 이론적 인간 있습니다. 처음에 그리스 로마의 인간은 비극입니다. 왜 비극인 줄 아느냐 하면, 누구한테 치였냐 하면, 신들의 횡포에 치인 거예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사실은 변덕스러운 자연 환경과 옛날에는 인간의 마음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류했기 때문에, 자연이 변덕스럽잖아요. 태풍치고, 비오고, 뿐만 아니고 인간 마음도 변덕스러워요. 그걸 신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질투도 잘하고 화도 잘 내고 성질도 개떡 같고 좋은 것은 남한테 안 빼앗기려하고 욕심 많고 그래요.
인간은 이 세상 자체 산다는 게 뭐냐 하면, 슬픔이라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냥 이유도 없이 죽어버리고 죽으면 그렇게 요란스럽고 번잡 떨고 내 여기 있다고 외쳐도 죽으면 잠잠해 가지고 결국은 안 죽는 신들만 남아있는 셈이에요. 결국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인간은 뭐냐, 신들이 잠시 갖고 노는 노리개 감으로 즐기다가 그 다음에 “봐라 인간들아, 안되지 까불지 마, 니 죽어” 또 없애버리고 인간 만들어 놓고 또 그 짓하고. 그런 비극적 인간형에서 탈피한 것이 과학의 출발입니다. 그 다음이 이론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냐, 인간은 지. 정. 의로 되어 있다. 지의 지식과 정의 감정과 의는 의지인데 인간의 혼은 이 세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 이걸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혜와 용기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이게 로마의 건국이념이에요. 사나이다운 사나이, 지혜와 용기와 절제, 이 3가지를 갖출 때 로마 군인들은 이걸 갖추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슈퍼인간, 최고인간, 그 인간이 이론적 인간됐지요.
그러면 나머지는 뭐만 남았어요? 이제 목표가 정해졌으면 나머지 인간들은 그걸 반복적으로 학습 받고 가정교육, 국가교육 받아가지고 지혜와 용기와 절제를 해가지고 따라 붙이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느냐, 이상적인 국가가 성립되는 거예요. 이게 플라톤의 국가이론이에요. 그리고 그 뒤의 모든 국가들은 요 국가관이 전부다 해답이 돼있어요. 지금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들, 준비하는 사람들, 전부 이 공부 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지도자가 어떻게 하면 지혜와 용기와 절제를 할 수 있는가. 지금 그 대변인은 절제가 안 되서 그래요.
그러면 백성들은 지도자를 본받아서 따라 붙이면 나라가 전부 다 이성적인 훌륭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비극적인 인간에서 뭐로 변합니까? 이론적인 인간되지요. 그럼 뭐가 탈락됐습니까? 이동하면서 뭐가 떨어져 나갔습니까? 신이, 하나님이 떨어져 나갔어요. 하나님의 신을 믿는 것은 형이상학적 오락입니다. 이건 교회 다니면서 오락이에요. 뭐냐 하면, 내가 지혜를 얻고, 용기 얻고, 절제되는데 신이 나한테 뭔가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그거로서 충분히 헌금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세상이 그렇게 다 달라졌어요.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육으로 하나를 축했습니다. 왜, 전부 다 아브라함 혈통이기 때문에. 육으로 축을 했거든요. 하나로 만들었다 말이에요. 육으로 하나를 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를 하나로 묶었어요. 이미 책이 나왔거든요. 에스라, 느헤미야 속으로 요번 주일되면 보낼 거예요. 거기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라기 이후에 뭘 만들었지요? 역사를 만들었지요. 그 역사는 통합하는 역사에요. 역사를 만들 때, 역사를 만드는 그 자료로 근거로서 구약성경 구절이 다 동원되는 겁니다. 말라기 마지막 선지자 이름이 말라기이죠. 말라기 마지막에 보면, 그 때 누가 온다고 했지요? 엘리야가 오지요.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지요.
그렇게 말라기가 오게 되고 또 다니엘에서는 구름타고 인자가 와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온다는 것은 초월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은 손 못 대잖아요. 그러면 밑에서 맞을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맞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들은 뭘 했느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를 이용해서 말씀으로 하나로 단결되어 있으면 필히 메시아는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은 거예요. 밑에서 말씀을 준비하게 되면.
그런데 그 말씀이 뭐냐 하면, 모세의 율법가지고 충실하게 지키고 있으면 오는 겁니다. 특히 모세의 율법 중에서 중요한 것이 2가지 있는데, 특히 중요한 거예요. 이방인들도 이 2가지 지키면 유대인 됩니다. 하나는 안식일 지키는 것과 또 하나는 할례를 지키는 겁니다. 할례를 지켜야 될 이유는 창세기 17장에 보면, 누구든지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내 백성에서 끊어지리라, 되어 있고 출애굽기12장에 보면,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유월절에 참석을 못 합니다. 반드시 유월절에 참석하는 사람은 할례 받은 사람이 참석해야 되거든요.
안식일 같은 경우는 출애굽기에 나와요. 이 안식일의 규례는 영원하다고 되어 있고 에스겔에 보면 또 다시 영원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제7일 안식교 있지요. 거기서는 바로 구약에서 그런 본문을 떼어가지고 다른 구절은 예수님이 다 완성했지만, 뭐는 완성 못했다? 안식일은 필히 지켜야한다 해서 예수 믿기 더하기 안식일 지키기 그래야 구원받는다. 하는 것이 그쪽 종교의 특징입니다.
그 2가지를 지켜가지고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과는? 그 역사에 하나님은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인정 안했지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도 모르고 할례도 안 지킨 이방인보고 천국은 니가 차지할 것이고 그리고 자칭 자기가 천국의 백성이라 여기는 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난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직접 오면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바로 왔으면 뭐할 기회가 없다? 회개할 기회가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가까이 왔다는 말은 얼마나 몇 미터 왔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 마지막 기회를 준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회개할 기회가 되려면 직접 올 분이 지금 와야 회개가 돼요. 이해가 되십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가도 되지만 나중에 갈게.” 예를 들어서 경리과 감사를 한다. 사장님이 직접 가기 전에 먼저 경리부장이 감사팀이 먼저 경리부에 부정이 있다. 감사부장이 하는 말이 “회개하라, 지금 너희들 모든 걸 조사할 날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렇게 했다는 말은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말이 문제가 있는 것이 사장이 직접 나타나야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를 알 수 있잖아요. 그냥 감사부장 와가지고는 회개해 봐야 “에이~ 감사부장이 지적한 건데.” 직접 와서 지적하는 거하고 다르고, 같은지 안 같은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회개할,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이미 메시아가 와 있다는 겁니다. 직접 심판을 끝내도 되는데 회개하기 위해서 먼저 세례요한과 그만큼 유보를 준 거예요. 그렇다면 마지막 회개하라고 오신 분은 결국은 세례요한도 사라졌으니까 누가 회개시킨 자고 누가 구원자입니까? 예수님 본인이 마지막 회개시킨 분이지요. 왜냐 하면, 예수님 말씀이 기준이 돼야지, 세례요한이 말한 것도 기준이 되면 안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소경된 자 건지니까 세례요한이 뭐라 했습니까? 자기가 오히려 의심해가지고 “오실 자가 당신 맞습니까?“ 회개하라 해놓고 본인 자체도 지금 당사자가 헷갈리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방식은 뭘 깨는 겁니까? 역사에서 이미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자기의 신학을 체계했잖아요. 이 체제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쪽에서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율법을 연구했는데 실제로 언약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언약을 이룬다고 자부했던 그 인간들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그 상태가 곧 언약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하늘나라가면 얼마나 높은 자리에 갑니까?”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예요? 니는 나의 무엇을 마셔야 된다? 나의 쓴잔을 마셔야 된다. 쓴잔이 달콤한 잔이 아니거든요. 그 쓴잔이 누가 유발시킨 쓴잔입니까? 소위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는 그 쓴잔을 마셔야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를 팔아먹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팔아먹는데 거기에 동조까지는 안했지만, 부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사람이 누구였어요? 제자들이지요. 제자들 본인이 저지른 그 쓴잔을 누가 마신다? 본인들이 마셔야 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날마다 자기가 자기를 용서해야 될 존재입니다. 오랜만에 복음 듣지요. 날마다 자기를 용서해 주세요. 주기도문에 나오잖아요. 제발 자기 죄를 용서해 주세요. 자기 죄를 닦달하지 마시고. 베드로가 양을 치기이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물어보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했지요. 그럴 때 베드로가 주께서 아시나이다, 해서 자기가 뭘 실패했다는 걸 자인합니까? 주님의 양을 내가 건사하지 못하고 내가 주님의 양을 목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잖아요. 왜냐, 자기들끼리 따로 고기 잡으러 갔으니까. 완전히 주님하고 결별했으니까. 주님께 찾아왔으니까 바로 그 점이 내 손으로 절대로 목양 못한다는 그 점이 그게 뭐냐, 베드로에게 쓴잔이 되는 겁니다.
이 쓴잔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죄를 아는 사람만이 목양할 수 있어요. 내가 매일같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배반자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양을 양육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내가 배신자요, 하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매일같이 주님에 대한 배신자입니다.” 라고 자백하는 사람이 십자가마을 빼놓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나의 양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의 목자가 아니고 목자는 따로 있습니다.”라는 말을 목사가 해야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왜 이렇게 잘 가르치는데 목자가 아닙니까?” “나! 나 말입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 알기나 알아요? 주께서는 아십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주께서는 아십니다.” 이 말은 누가 했지요? 베드로가 했지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죠. “니가 띠 띠고 니가 원치 않는 길로 내가 몰아갈 것이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쟤는요?” 예수님께서 “쟤가 재림할 때까지 죽지 않고 있던지, 말던지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너는 따로다.” ‘따로’ 이게 바로 ‘형제’입니다.
결국 형제라 하는 것은 형제 되기에 모든 노력이 다 허사로 끝남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찬송가 부르면서 울면서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절대로 형제가 아닙니다. 우정의 무대에 나오지요. 뒤에 계신 우리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여기 모여도 절대로 형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여기서 돈 좀 벌면 우리는 다 무시할겁니다. 이런 집에서 사니까 그렇지 우리가 좋은 집에 살면 우리는 들어오지 말라고 개 열 댓 마리 풀어 놓을 수도 있고 어디 감히 좋은 집에 너희들이 들어 와! 하고 이제부터는 가난한 사람하고 안 논다고 나올 가능성이 있어요. 로또1등 돼 보세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인간끼리 단결해서 절대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에요. 똑같은 고백이에요.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의 배신자입니다.” “나는 내 인생만 생각하지 주님인생은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주께서 매일같이 찾아와서 이불 완전히 활짝 제치고 박살내는 그런 과정 때문에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주님이여, 제가 죄인입니다.“ 소리하지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로 헤헤거리면서 우리는 우리만 챙길 인간밖에 안 됩니다. 라는 고백을 할 때 그게 바로 같은 몸의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모일 때는 누구이름만 부르겠어요? 주의 이름만 부르지요. 그래서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모여가지고 삼창한다고 주여! 주여! 주여! 삼창해가지고 우룰룰 해가지고 주와 함께 있는 줄 알고. 나의 이름이 부정당하는 곳에만 주의 이름, 구약에서 주의 이름이 들어오는 체제는 항상 나의 이름을 부정시키는 식으로만 오시지, 그냥 나를 안 건드리고 오시는 주의 이름은 없습니다. 왜? 언약을 이루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마땅한,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앞장세우면서 십자가로 앞장세우면서 찾아오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이름이 그렇게 당하는 그 이름이 주의 이름의 자리에요. 그걸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아주 어려운 말이지만, 이걸 ‘소자’라고 합니다. “내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언제 마시는 걸 줬습니까?” 본인도 몰라요. “언제 옷 벗었을 때 입을 거 언제 줬습니까? 나는 나만 생각했는데.” 분명히 그 사람은 목마 를 때 마실 물을 주지 않았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소자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럴 때 이 소자는 이 아무개, 최 아무개, 김 아무개 사라지고 뭐로 통일됩니까? 전부 다. ‘소자’로 통일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본문에 형제라는 개념형성입니다.
형제는 내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갈 수 없고 주님한테 혼남을 당했을 때, 그리고 내 자신이 죄인인 걸 깨달았을 때, 내가 내 중심을 예수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한 그런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함으로서 주께서는 우리를 형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제가 모였을 때는 오직 누구 이야기합니까? 주님이야기만 하는 거죠. 이게 단일성입니다. 이게 언약의 단일성이에요.
언약의 단일성 때문에 우리는 다양해야 됩니다. 절대로 남의 신앙을 모방하지 마세요. 나는 저 집사님처럼 돼야지, 나는 테레사수녀처럼 돼야지, 나 주 기철 목사처럼 돼야지,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각자 인생, 각자가 주께서 만드신 자리, 다양한 자리입니다. 우리가 다양한 자리를 만남으로서 우리끼리는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혹독하게 느끼게 만들어요. 내가 언제 암벽을 타겠어요? 목 아파가지고 언제 암벽을 타겠어요? 암벽타도 천당 가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통장해도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제가 언제 통장 하겠습니까? 언제 통장해서 월급20만원 받겠습니까? 보너스 4만원 받고 언제 있겠습니까? 회비 3만원 내고. 언제 윤집사님처럼 당구 칠 수 있겠어요? 안 되지요.
그러니까 각자 자리에서 그냥 사시라니까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주께서 만든 자리인데 절대로 남하고 개별적으로 유지하세요. 우리는 절대로 남하고 의견일치가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과일 중에 참외 있고 키위 있는데 저는 키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참외 좋아한다고요. 또 어떤 사람은 귤 좋아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다 좋아하는 사람 있고, 다 싫어하는 사람 있고. “아이고, 집사님은 내가 차려준 이게 별로인가 본데, 그냥 먹지 안 먹고 그러세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이거 못 먹거든요. 못 먹은 채로 구원 받았습니다.”이러는 거예요. 항상 제발 오버하지 마시고 객기 부리지 마세요.
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은혜 받았어요. 예수님은 마귀가 성전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라 할 때, 뛰어내렸습니까? 안 뛰어내렸습니까? 안 뛰어내렸지요. 제발 뛰어내리지 마세요. 그 예로 부흥회 때, 헌금 뜯어내는 이야기했지요. 장로 5천만원 내고, 집사 3천만원 내라고, 그 이야기 듣고 부흥사는 여자들에게는 안하고 남자에게 해요. 남자들은 되지도 않는 객기가 있어가지고 그래도 남자라고 주제에 무조건 손들고 갑니다. 그게 마귀의 시험이에요. “저는요, 헌금할 여력도 없고 헌금할 마음도 없고, 저는 얼굴이 너무 뻔뻔하고 두꺼워서 돈 한 푼 안내고 천국 갈 랍니다.” 이리 나와야 돼요. 그래야 돼요.
주님께서 헌금 받고 구원하지 않습니다. 돈 받고 구원 안 해주잖아요. 이리 이야기하면 “그래가지고는 교회 운영이 안 되잖아요.” “교회 운영 안 되도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교회 운영 안 되도 구원받으면 되지, 왜 교회운영을, 말로는 교회머리는 누구라고요? 주인은? 말로는 주님 해놓고 걱정은 왜 하는데? 아니 주인이 걱정을 안 하는데 종이 왜 걱정을 하는데?
형제라고 할 때는 로마서 8장을 생각해야 돼요. 로마서8장29절에 보면, 성령께서 기도하사 우리로 하여금 뭐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형제 중에서 뭐가 됩니까? 맏아들 되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걸 설명하려 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 있습니다.
이제부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 사람들 다 육입니다. 육인데, 육으로 난 것은 천국 못 갑니다. 영으로 바뀌어야 돼요. 육이 영으로 바뀐다는 말이 요한복음3장에 나오는데 구약의 용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약속의 땅에 간다, 똑같은 말이에요.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려면 이 육이 수정받아야 돼요. 탈락될 자는 탈락되고,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는데 육에서 탈락시키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이걸 집단으로 전체로 봐요. 전체로 보면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이라 해요. “이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아들들이 아닙니다. 그냥 아들이에요. 하나에요.
아들이 어떻게 아들 되는가 하면, 육에서는 아들 안됩니다. 여기에 언약이 들어가요. 여러분들이 여름에 팥빙수 할 때, 얼음만 갈아서 내 놓으면 손님이 화내지요. 팥만 넣었다, 화내잖아요. 국물이 맛이 없다. “아하, 우유를 안 넣었구나!” 우유 넣었다. 화냅니다. 뭐? 알록달록한 거! 그 다음에 제리도 넣고 찹쌀떡도 넣고 미숫가루도 넣고 숟가락 꼽아가지고 아이스크림도 올려서 놓고 이렇게 해줄 때, “야, 이 맛이다!”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계속 뭐가 투입되는가 하면, 언약이 계속 투입돼요.
언약이 투입되고 언약가지고 속에서 뭐냐 하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쫒아 내어버리고 엘리 중심, 애기 못 낳는 여자가 있었고 이름은 한나 였고, 거기서 애기 잘 낳았다고 우기는 브린나하는 여자 생기게 만들고, 그래서 여자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한다 했습니까?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지요. 가만히 있으면 기도 안 할 건데 브린나가 불을 일으켜가지고 술 취하듯이 기도해가지고 응답받아서 만약에 그 여자가 그냥 낳았으면 자기애예요. 조건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애기 주시면 이 애기를 바치겠습니다. 이름을 사무엘지어서 사무엘을 갔다 바쳤고 그 사무엘이 사무엘을 통해서 기존의 모든 육적인 교육으로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일러줘요. 엘리제사장 아들 교육 잘못되어서 죽지요. 까불다가 엎어져서 죽지요. 그러면 사무엘 아들 교육 잘 시켰습니까? 아버지는 훌륭한데 아들은 엉망이란 말이지요. 사무엘 부인이 아들교육 어떻게 시켰는지 모르겠어요. 이것은 교육문제가 아니고 육의 한계를 들추어내는 거예요.
사무엘로 하여금 사무엘계통이 아니고 다른 계통으로 뜁니다. 다윗 계통으로 뛰어버리지요. 다윗계통 뛰고 사무엘 통해서 됐던 사울이 하나님의 원수로 변하고 내부적인 갈등을 일으켜가지고 이 모든 것이 언약이라는 것을 작대기하나 세우기 위해서 계속 언약 비스므리 한 것들을 계속해서 들추어내면서 잘라내는 작업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그건 뭐냐, ‘하나’예요. 하나.
그 하나가 바로 언약의 하나인데, 제가 지금 아들이야기 했잖아요. 다윗에 와서 드디어 아들 등장합니다. 다윗이 사무엘하7장14절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니 아들 되게 해줄게.” 어떻게? 내가 나서서 아들 되게 해줄게. 그럴 때, 다윗은 “말씀대로 순종하겠나이다.” 순종해서 아들 되는 게 아니고 내가 니 되어줄게. 순종 하겠나이다, 이게 앞뒤가 안 맞아요. 그런데 언제 아느냐 하면, 그 뒤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고 밧세바 남편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질르지요. 고의 아닌 것처럼 느끼는 고의에서 살인 저질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아들 만든 식으로만 아들 되게 하는 겁니다. 그 상처. 고통. 억울함 속에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억울함 속에서 나온 아들은, 요셉이 굉장히 억울했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창세기 끝에 보면 요셉보고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 죽었다고 당신이 내치려고 하지?” 하니까 “아닙니다. 형들이여,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은 당신의 마음이 나빠서 판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일부러 나를 앞서 보냈습니다. 염려하지 마소서.” 해가지고 요셉혼자만 잘된 게 아니고 덩달아 형제들도 잘 되는데, 그 형제들 하나같이 요셉이 팔려갔을 때 반대한 사람이 아니고 전부 다 찬성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한테 상처를 입힌 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신 피의용서와 은혜로만 하늘나라를 새로 구성합니다. 그 앞에서는 받았던 면류관도 전부 다 반납합니다. 내가 잠시 써놓고 써보니까 아니거든. 써보니까 미안해서 이것은 하나로 모아야 돼요. 내가 각자 쓸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로 모아야 됩니다. 그걸 누가 하느냐, 24장로들이 해요. 24장로들이 누구냐 하면, 신구약의 모든 순교자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보좌에 둘러서서 전부 다 면류관을 던지니까 그 면류관이 어디에 집합하겠어요? 어린양의 발 앞에, 보좌 앞에 다 모이겠지요. 거기서 생명수가 흐르면서 그들은 천국을 강가의 생명나무 만끽하면서 천국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지점이 있잖아요. 그 지점. 하나라는 지점이라는 것은 결국 오늘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하나 되는 지점은 누구라도 그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지점이 성도를 하나 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강도나 세리가 한 형제이고, 그게 바로 십자가지점입니다.
끝으로 하나 더 하지요. 형제라고 했을 때, 형제 아님을 쌍으로 불러와야 돼요. 여러분 장갑 만들 때, 한 짝만 만드는 공장 봤습니까? 아니지요. 반드시 왼쪽장갑 있으면 반드시 오른쪽 장갑 짝을 이뤄야 서로가 의미가 발생돼요. 오른쪽이 뭐냐, 왼쪽이 아닌 게 오른쪽, 왼쪽이 뭐냐, 오른쪽이 아닌 것. 양은 뭐냐, 그냥 양만 있으면 의미 없어요. 염소가 있을 때, 양이 의미가 있고 천국은 지옥이 있음으로서 같이 끌어당겨서 천국을 설명합니다. 거지 나사로 설명할 때 그렇게 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주되심이라 하는 것은 건진다고 주가 아니라 반드시 심판을 해주셔야 주가 돼요. 심판과 구원을 병행해서 보면서 “누가 너를 이렇게 지옥 안 보내고 천국 보내지?” “주님이십니다.” “그래, 그럼 저 사람은 누가 천국 안 보내고 지옥 보내지?” “그것도 주님 이십니다.” 달음박질로 되는 것도 아니고 부르짖는다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천한 그릇과 귀한 그릇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은 오직 1, 하나지요.
하나에게만 하나의 권리가 최종적으로 다 가있습니다. 그 하나 때문에 우리의 다양성은 마음껏 다양해도 괜찮아요. 제가 다양성이라 해서 다른 사람과의 다양성만 이야기했는데 좀 더 깊이 나가면 우리의 같은 인간에 10년 전과 1년 전과 5년 전과 5년 후의 다양성도 포함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스스로 잘났다, 못 났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해바라기처럼 하나를 바라보는 주님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으로 가는 겁니다.
끝으로 12절 봅시다. 이러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주의 이름을 누구한테 합니까? 내 형제에게 지요. 그러면 형제라 하는 것은 뭐의 이름만 모이게 돼 있습니까? 주의 이름만 부르게 돼 있어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아니하면 부를 수 없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했지요.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무엇을 포기한다는 말입니까? 자동적으로 자기이름을 포기하는 거죠. 육에서 영이 되기 때문에 육을 육이라고 신랄하게 지적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는 겁니다. "주님, 저 육입니다." 영이 되게 하신 것은 주의 이름 때문에 그렇지, 내 이름, 내 이름은 기능이죠. 내 인생, 내 이름 때문에 그런 건 아닙니다. 늘 주의 이름만 높일 수가 있는 겁니다.
13,14절에 봅시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사망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사망을 없애고, 사망을 두렵지 않고, 사망을 무서워하지 않고 마귀라는 존재가 우리한테 터치하지 못하게 한다는 그러한 개념들이 떠오를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떠오를 수가 없고 떠오르지도 않아요.
언제 개입할 때, 주의 이름이 사건화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뭐도 같이 옵니까? 무서워 할 필요 없다, 그 다음에 마귀도 그냥 우리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섬기는 종이 바로 마귀구나! 이걸 아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이름이 안 오고 그냥 나만 덜렁 있어버리면 마귀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돼 버려요. 이 세상에 마귀라는 게 없다고 여기지요.
우리가 평소에 마귀 생각합니까?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 떼어 주세요. 마귀야! 이렇게 합니까? 안 하지요. 평소에 마귀 없이 인간으로 보는데, 언제 왔을 때 우리는 마귀를 느낍니까? 주의 이름을 할 때, 마귀는 주의 이름을 못 믿도록, 주의 이름을 생각지 못 하게 그동안 계속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소급해서 우리가 느낄 수가 있어요.
'야, 마귀가 또 또 내 자존심이 중요하다고 해가지고 주의 은혜를 또 잊어버리게 만들었구나!' '야, 마귀가 나를 떠나지 않네.' 다시 한 번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귀에 대해서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돌아서면 결국 마귀 인정도 안 되고 그저 돈 떼어먹은 놈만 마귀지, 내가 평소에 마귀하고 친하다는 사실을 모르잖아요.
우리는 십자가가 은혜 되면, 그 때만 우리는 마귀하고 한 통속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또 다시 십자가를 잊게 되면, 또 내가 잘 잘못가지고 내일은 복 좀 주셔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주의 거저주시는 은혜를 또 우리가 짓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사랑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계속해서 사태가 터지고 사건이 터져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얼마나 평소에 우리만 사랑하고 우리 잘난 것만 자랑하는지 이게 마귀 짓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주님께서 우리의 맏아들 되셔서 우리로 작품을 만들어서 주님만 증거 될 수 있는 천국생활이 지금부터 시작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