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614b-히2장14절(근원분할) - 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히브리서2장15절, 첫째시간 제가 이야기한 것이 근원분할이라 했지요. 이걸 쉽게 이야기해서 판을 갈아야 돼요. 판을. 바르게 살아야 소용없고 아예 판을 갈아야 돼요. 그래서 제가 전에 예를 들었잖아요. ‘아줌마 불판 갈아 주세요.‘ 이야기했지요. 판만 갈면 되는데, 판을 안 갈고 그 위에서 백날 열심히 노력하고 말씀 지키고 해봐야 소용없어요. 판이 마귀 판으로 해서 소용없거든요. 주께서 판을 갈아주시는데 그 판가는 방법을 첫 째 시간에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엘리사 같은 경우에 어떤 가정에 아들이 없었는데 선지자가 와가지고 아들 생긴다고 이야기했고 그 여자가 반짝 기뻤지요. “아, 아들이 있데, 농담하지 마세요.” 오, 얼마 후에 아들을 임신했지요. 임신했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들이 크다가 도로 죽었어요. 죽으니까 반짝 기뻐했다가 이젠 선지자보고 막 분개하지요. 왜 당신이 우리 집안 들어와서 우환 만들었다. 하다가 그 죽은 아들 다시 살려내지요.
그러면 판 갈이 하는 방법이 뭡니까? 무에서 유로 했다가 죽여 놓고 뭐합니까? 그 다음에 살리시고, 이 세상에 살지 않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이 돼서 오셨고 없는 분이 이 땅에 왔고, 그 오신분이 죽어서 제자들이 도망가 버리고 “아이고, 굿바이다, 인생 일춘몽 이구나! 아무것도 아니네. 그래, 별거 있겠어.” 했는데 세상에 난데없이 사흘 만에 부활하게 만들었고 그 다음에 부활해서 “아이고, 혼자만 부활해서 좋겠다.” 했는데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 하나 놓치지 않고 기어이 찾아내는 이게 ‘판 갈이’ 입니다. 판을 이렇게 갑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죽게 하고 죽게 한 것을 살려내는 방법, 그러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요 작업을 우리에게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애가 둘인데 그러면 갑자기 또 수술 다 했는데 또 아 하나 생기고 이렇습니까?” “애 생겼다가 그 애가 다시 잘됐는데 리틀 사이트처럼 유명한데 그만 애 죽이고 그걸 또 주께서 기도하니까 목사가 기도하니까 낫고 그런 식으로 판을 갑니까?” 그게 아니에요. 그런 방법으로 하는 게 아니고 어떤 방법인가 하면, 신약시대에 판을 가는 것은 ‘없음’이지요. 이 ‘없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 ‘육신’으로 바꿉니다. ‘혈육’으로 바꿉니다.
바꿔버리면 뭐가 되는가 하면, 고린도후서6장이 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이렇게 되지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자가 되니까 우리를 죽은 자라고 생각하게 되면 살리는 자는 누굽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우리를 살려낸다는 것을 믿게 되고 만약에 내가 죽은 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더 이상 예수님은 필요치 않지요. 왜냐 하면, 내가 지금 살아있는데 멀쩡한 내가, 살아있는 내가 돈벌어가지고 내가 나 알아서 살리면 되지, 뭐를 예수님이 보태주고 돈을 보태 줄 건데요? 이렇게 판이 안 갈린 상태에서는 지금 살아가는 이 식대로 그냥 살게 되고, 판을 갈아버린 사람은 “그래, 이건 살아있다고 사는 게 아니야, 죽은 거야. 죽었는데 죽은 나를 주님께서 성령주시고 십자가 피를 통해서 살려내고 있는 거야.” 이러면 이 판은 영생의 판이지요.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엘리야처럼 애 생기고 이런 복잡하게, 그 땐 그 시대에 그런 사건이고, 지금은 현재 있는 것 가지고 얼마든지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있는 것까지라도 충분하게 판 갈이가 가능한 겁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오늘 본문은 2장 16절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첫째시간, 둘째시간 합쳐서 제일 큰 제일 어려운 제목에 도달했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릴게요.
뭐가 어려운가 하면, 근원분할은 뭐와 뭐가 분할했다고 했습니까? 밑에 바탕이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분할된 겁니다. 지진처럼 판이 갈라지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판 자체가 갈라져버려요. 하나는 선악과에 속했고, 하나는 아벨과 같은 생명나무에 속하고 이 판 자체가 갈라져버려요. 항상 판을 봐야지 내가 잘났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제가 어렵다고 하는 말은 갈라지면 경계가 되지요. 경계선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중요한가 하면, 여기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요 충돌지점에 아브라함 언약이 나옵니다.
모든 언약은 그냥 약속이다! 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몰랐던 판을 두 개 가지고 와요. 쉬운 예로 들면, 독도는 누구 땅입니까? 독도는 우리 땅이지요. 대한민국 땅이지요. 일본은 다케시마라 해서 자기 땅이에요. 그러면 둘 사이에 딱 만나면 거기에 예리하게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완전히 대립된 요소가 나오는데 그 경계선에서 비집고 튀어나오는 게 뭐냐, 언약이에요. 언약이 거기서 튀어나옴으로 말미암아 한 쪽은 축복이고, 한 쪽은 저주라고 거기서 재판관이 판결을 내려버려요. 이쪽은 천국, 저쪽은 지옥이라고 판결을 내려버려요. 완전히 서로 섞일 수 없는 판을 놓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런데 판 당기는 것이 먼저겠습니까? 판결이 먼저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판결이 먼저에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자가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한 자가 저주 받는다고 먼저 판결부터 먼저 내려놓고 그 다음부터는 아브라함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에 속하지 않은 자가 아브라함 가정부터 이미 충돌이 일어나요.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 완전히 가정이 지진이 일어나요. 언약이 먼저 일어나고 난 다음에 대칭이 일어나요. 고라자손과 그리고 모세, “니만 애굽에서 탈출한 거야? 우리도 애굽에서 탈출한 거야. 왜, 니 혼자 대장질하는 거야. 요거 바꿔 줘! 왜 니 혼자 대장질해. 우리도 레위지파야.” 왜 혼자만 대장질하느냐고 할 때,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나오고, 완전히 수만명 죽여 버렸지요. 또 죽였다고 모세한테 달려들어요. 나라정치 똑바로 안 해서 이만명 죽여 놨다고.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언약은 경계 틈에서 나온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이냐 할 때, 갈라디아서1장 8절의 말씀 생각할 수 있지요.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했지요. 사도 입에서 무슨 용어 나왔습니까? 저주가 나왔잖아요. 저주는 최종적인 요소입니다. 저주받는다하면 끝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저주 이야기하는 것은 십자가가 마지막 언약입니다. 더 이상 언약 없습니다. 이만희고 뭐고 마호메트고 다 엉터리이고, 십자가 진 그 분을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분은 부활하지 않아요. 죽었다 살아난 것은 소생이고, 부활은 부활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소생에 불과한 거고, 부활은 새로운 세계를 끌고 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를 끌고 오기 때문에 그 세계는 바로 언약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내가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하고 갈라디아서3장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말, 누가 너희들을 꾀이느냐, 악마가 등장합니다. 악마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악마가 아니고 우리를 죽인다고 악마가 아니라 진짜 악마의 원래 목적은 바로 예수님을 흉내내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십자가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볼게요. 악마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거 하는 세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요거 악마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존재거든요. 예수님이 존재예요. 삼위일체도 마찬가지고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이거 악마의 소리에요. 예수님의 존재는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은 십자가에요.
그래서 그 뒤의 악마는 계속해서 유사 예수를 만들어내요. 왜냐 하면, 사람은 뭔가 믿고 의지하려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등장하는데 작은 예수, 예수 인형을 계속 악마가 만들어서 십자가를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예수라는 존재, 존재를 갔다 얹어서 그 존재를 믿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렵게 살았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이 땅에서 어렵게 힘들게 살아도 참으면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순종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했잖아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질 때, 고난 받았잖아요. 우리도 고난 받으면 됩니다. 설교하기 얼마나 쉽습니까? 예수님을 모델로 보는 거예요. 예수를 모델로 보고, 불교신자한테는 모델케이스가 누굽니까? 부처잖아요. 불자들이 부처를 자기를 구원할 메시아로 모델로 삼듯이 그 자리에 그러한 배경에다가 예수님만 찰싹 넣으면 바로 그 예수가 사실은 불자들이 생각하는 부처적인 예수가 되는 거예요.
예수는 우리보다 위대하다. 위대한 분이 못한 인간을 건져낸다. 단순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못하는 것은 그 분이 해낼 것이다. 너무나 명확하고 단순해요. 간단한 문제에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러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런 게 아니에요. 바로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싶은 그것이 바로 판이 악마가 십자가를 흐려놓기 위해서 악마가 제시한 제안이 되는 겁니다. 나는 군인이다, 할 때 괄호로 채워봅시다. 나는 ( )이다. 할 때, 친구라는 영화에 보면 담임선생님께서 말썽부리는 학생이 있으니까 불러내서 ‘너희 아버지 뭐 하시나?“ 할 때, 장 동건이 뭐라 합니까? ”제 아버지 조폭인데요.“ 이게 어디서 해가지고 시계 풀고 패지요. 맞고 난 뒤에 뒤에 나가면서 하는 말이 ”진짠 되요.“ 이제 선생님 죽었다, 이제.
“너희 아버지 뭐하시나?“ 우리 아버지 군인인데요. ”너희 아버지 뭐 하시나?“ 우리 아버지 이발사인데요. ”너희 아버지 뭐 하시나?“ 나의 아버지 농부신데요. 여기는 대입만 하면 되지요. 뭐가 안 바뀌어요? 내가 바뀔 필요가 없어요. 나는 군인 될래. 공무원 될래. 나는 사장님 될래. 이것은 ‘나는’변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나는 누구로 인하여 구원 될래.“ ”나는 천국갈래.“ 그러면 요 문장 가만 두고 여기에 부처를 넣든 예수님을 넣든 하나님을 넣든 알라는 넣든 요 문장은 손 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손 댈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요 바탕 판은 악마가 만든 판이에요. 천기누설입니다. 종교심을 이용하면 사람들은 기존 가지고 있는 종교심을 자극받아서 괄호만 쳐놓고 여기다가 예수님만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언약이 먼저 나온다 했지요. 언약이 오면, 두 이질적인 판을 모은다 했지요. 그걸 충돌시키지요. 그러면 충돌이 없으면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충돌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충돌을 싫어해요. 왜? 곱게 가고 싶어요. 사월의 봄처녀처럼, 나물 뜯다가 구원받고 싶어. 그리고 남편 출근 보내고 앞치마입고 구원받고 싶어. 착한일하다가 구원받고 싶고. 충돌, 아! 스트레스 받아, 안 돼! 곱게 구원받고 싶어, 날 안 건드리고 내가 채택만 잘하면 구원받고 싶어요. 나의 어떤 변화 없이 나는 곱게만 하면 돼요. 봄에는 노란 옷 입고 꽃구경하다가 그냥 예수 믿고 구원받고 싶어.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걸 훼방해 버렸어요. 뭐냐 하면, 유대인들 봅시다. 나 유대인은( )로 인하여 구원받는다? 하나님, 구체적으로 하면 여호와, 또는 주의 이름, 아주 철저했지요. 그리고 그걸 성취시키는 매개체가 뭐냐 하면, 두 가지입니다. 안식일과 할례에요.
안식일은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에 영원한 언약이라고 해서 영원한 이 들어가니까 영원한 안식일이 있는 한 우리는 구원받는다. 그다음에 할례라 하는 것은 창세기17장에서 니가 할례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계보에서 끊어질 것이다. 아브라함의 축복에서 니는 이탈될 것이다, 하는 거죠. 아브라함 축복이 뭐냐 하면, 영원히 복을 받을 것인데,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있을 것이고 땅과 자손과 의로움이 너희에게 영원히 주어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났지요. 족보자체가 아브라함 족보인데요. 뭘. 양반집인데 양반 포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것도 우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적한 양반인데.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그게 혈육이라 했지요.
아까 첫 째 시간에 혈육은 무엇과 있을 때 혈육으로 등장한다고 했지요? 악마한테 지배를 받는 그러한 인간을 가지고 혈육이라 했다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는 존재한다? 존재 안한다? 내가 존재하는데 악마가 존재할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존재하면 악마는 없는 거고, 악마가 있으면 존재한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니까 존재하는 내가 내 눈에 안 띠이니까 이건 악마가 없는 거고, 그런데 성경은 악마와 혈육을 같은 한 문장으로 엮었다는 말은 니 존재에 대해서, 니 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니가 어느 판 위에 있는지, 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어떻든 첫 시간에 이야기한 거고,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여호와로 인하여 구원받잖아요. 자, 예수님이 여기에 등장했습니다. 등장할 때, 유대인들은 요 빈 칸을 비워놔요. 메시아를 만나면 접점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인하여 구원받는다. 그런데 메시아라 하는 괄호를 쳐놨어요. 조건이 구름타고 와야 돼요. 그 다음에 예루살렘 출신이어야 됩니다. 베들레헴 촌놈은 안돼요. 그 다음에 화려하게 와야 돼요. 화려하게 온다는 것은 스바냐, 스가랴,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 보면, 이것은 하늘의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와요. 아예 로마부터해서 이방나라를 완전히 작살내 버립니다. 불과 더불어서 오기 때문에. 그 조건으로 하는데, 주님은 어떻게 왔습니까?
이거는 거지도 아니고 그야말로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귀신들린 자 혹은 귀신의 오야봉이, 악마지요. 바알세불을 힘입어 니가 귀신을 쫓아낸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율법도 모르는 자, 옛날에는 율법모르면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저주 받기로 작정한 자, 그리고 니가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신명기의 성취지요. 신명기에 보면 저주 받을 자는 어디에 달린다? 나무에 달린다는 말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지어라는 그 말씀에 입각해서 합당하게 너는 우리의 율법적인 안목에 의해서 제대로 하는 게 저주 받는 자, 하나님을 대리하는 우리 유대인들이 저주 받는 자라고 한 겁니다. 그 자체를 충돌로 보자 이 말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 자체를 충돌로 본다면, 지금 예수님한테 문제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러면 나는 ( )로 구원 받은다. 할 때, 뭐가 문제 있는 겁니까? 바로 우리가 문제 있는 거예요. 이걸 사도바울은 육이라 한 겁니다. 니가 육이기 때문에 영을 못 알아본다는 거예요. 육인데 자기들은 영으로 인정한 거예요. 자기 자신을 구원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인간들이 오해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을 체포했지요. 자기는 율법의 대리집행자로 간주한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남의 정의가.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간통한 여인을 주님한테 끌고 왔지요. 유대인들은 괄호 쳐 놨습니다. 우리는 법의 집행자로서 돌로 쳐 죽여라를 괄호열고 거기다가 간통한 여자를 집어넣었어요. (이런 여자는 율법에 의하여 돌로 쳐 죽여라 했으니까)우리는 이미 돌을 던졌어요. 돌을 들고 당신이 우리한테 동의할 거야? 말거야? 그것만 보고 동의하면 때려죽일 판이에요. 그 자리에서.
그 때, 주님께서는 “왜 했어? 왜 했어?”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나쁜 여자, 나쁜 여자 왜 했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주체를 지적하지요.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여자는 놔두고 이 괄호는 놔두고 바깥을 이야기하니까 사라져요. 하나 둘 씩 돌 던지고 사라지는데 버티고 있는 인간을 주님께서 땅에다가 글을 쓰니까 자기의 과거가 들어났는지 지가 먼저 간음했어, 없어졌어요. 괄호만 남고 다 사라져버렸어요.
주님께서 그 여인을 심판합니다. 판정을 내리지요. 내리는 판정이 “너는 저주받을 자!”라고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판정을 어떻게 내리는가 하면, 판이 이미 바꾸어진 언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씻을 때, 십자가 완성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나오는 판결을 그 여자에게 미리 줘버립니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 이게 사실은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그 판결을 그 여자는 미리 받은 거예요. “내가 너를 용서한다.” 왜냐? 착해서? 노우, 잘해서? 노우, 뭘 이야기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자유를 출애굽하기 위해서. 죄로부터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온 자가 바로 나다! 따라서 이 세상이 죄라고 규정했던 네가 나에게는 필요했던 겁니다.
또 한 가지 예가 뭐냐 하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 나오지요. 소경된 자는 저주받은 거예요. 문둥병, 소경 등등... 날 때부터 소경될 때, 제자들은 기존의 유대인의 사고방식 속에 있어가지고 “저 사람이 저주 받은 것은 자기 죄 때문에 그럽니까? 부모 죄 때문에 그럽니까?” 자기 죄 때문에 같으면 에스겔에 부합되고요. 부모 죄 같으면 출애굽20장에 해당됩니다. 부모가 죄를 지으면 3, 4대까지 죄가 이르고, 에스겔의 언약에 의하면 부모는 부모 자기 죄, 자식은 자기 죄, 따로 따로 받지, 연좌 죄에 해당되는 거예요.
언약은 주님 자체가 언약이잖아요. 그러면 부모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하는 그 판을 가지고 와요. 그 판 자체가 사실은 새로운 판에 의해서 깨질 판이거든요. 옛 술은 옛 부대에 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데 새 부대는 새 술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야 돼요. 옛 술과 옛 부대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필요해요. 주님은 우리 육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내가 착하게 살고 뭘 어떻게 행동하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것, ‘나는’문제없어요. 나는 그 다음에 괄호열고 (부처를 믿을 것인가? 예수를 믿을 것인가? 이슬람을 믿을 것인가? 마호메트를 믿을 것인가?) 우리는 그것만 남겨둔 거예요. 대입할 것만 남겨둔 거예요. 고 판을 갈아버립니다. “니가 문제야, 구원자격도 없는 게 구원 받고자 하는 니가 문제야.” 하고 판 자체를 갈아버리기 위해서 ‘나’라는 자리에 누구를 집어넣는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죠.
그러면 나는 주어가 아니고 저 술부로 밀려버립니다. 주어 자리는, 내가 차지했던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겨있어요. 예수님이 담겨버리면 그건 악마의 주장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라,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왜냐, 예수님의 존재는 곧 신의 존재를 대행하는 같은 이미지로서 그냥 대입할 뿐이거든요. 인간은 어떤 이미지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신의 자리에다가 뭘 집어넣어도 만들어내요. 자기만 안 다치고. 그런데 예수를 믿어버리면 예수 믿는 자기는 훌륭한 자신이 돼요. 여전히 훌륭해요.
그런데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면,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거든요. 그러면 세상 죄를 지고 가면 어린양만 높아지고 우리는 어디에 포함됩니까? 그냥 세상 죄 속에 포함돼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동안 우리는 죄인인 주제에 구원받고자 했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 구원받고자 한 것도 뭐가 된다? 죄가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거예요. 죄인인 주제에 구원받고자 한 엄청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데, 누가 했느냐? 배후에서 악마가 죽는 게 무섭지? 예수 믿으면 산다고 뒤에서 부추겨 오는 거예요. 과거에는 예수는 내 구원 받기 위한 용도로만 활용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증인되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고, 이 만큼 살아야 되고, 죽으면 끝난 거예요.
주어가 내가 아니고 이미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주어가 되는 겁니다. 어느 신학 책이든 보세요. 전부 다 예수님의 존재가 주어가 되는 이유가 주님이 존재가 되면, 그걸 파악하는 것은 바로 나의 존재입니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돌아오게 되면, ‘역시 나는 잘 났어!’ ‘내가 예수를 다 믿다니 역시 나는 애초부터 훌륭했었어.’이리 된다니까요.
그런데 야곱 같은 경우는 판 갈이 했지요. 하나님께서 사다리타고 복 준다고 하니까 “역시 나는 그 때 형의 자리를 잘 뺐었지. 엄마가 도와주긴 했지만. 역시 내가 애초부터 뛰어놀 때부터 알았어. 팥죽 준비할 때부터 알았어.“ 다 노리고한 계산이거든요.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어떻게든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싸웠잖아요. 싸웠는데, 자기는 ‘을’이 되고 형이 ‘갑’이 되고, 그러니까 형은 미운 게 아니고 나를 ‘을’이 되게 했기 때문에 형이 미운거지 형 자체는 밉지 않아요. 나를 ‘갑’으로 만들지 못한 것은 형의 존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형을 미워하는 것은 형을 미워서가 아니라 내 존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게 야곱의 육적인 모습입니다. 혈육에 속했기 때문에. 이걸 하나님께서 판 갈이 해줘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복을 받는 게 뭐냐 하면, 자식 12명 낳고 많은 재산이 불었으니까 원천기술로 해서 완전히 살찐 것은 다 빼냈잖아요. 이걸 축복으로 간주한 거예요. 그러면 그 축복을 간주한 것은 축복은 내 소유니까 축복 속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은 나는 축복받아 마땅하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밤중에 괴한이 등장했잖아요. 그러면 그 괴한은 내 축복을 뺏어가기 위한 악마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분명히 이건 형의 밀사든지, 자객이던지 나를 죽이려고 보낸 거예요. 왜냐 하면, 얼마 전에 400명 데리고 가까이 근접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경계근무를 섰다 말이지요. 5분 대기조로 대기하고 있는데, 어디서 낯선 사나이가 등장해 오니까 이건 뭐냐, 드디어 저 쪽에서 기습하고 공격했구나, 정탐꾼을 보냈던지, 그러면 야곱이 지켜야 될 게 뭡니까? 나는 복 받은 사람이고 그러면 내게 준, 허락한 것은 복이라고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나를 공격한 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공격한 것이 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하여 그 오는 괴한을 맞서 싸웠잖아요.
이거 중요합니다. 야곱이 단순히 자존심 상해서 싸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을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이 나라를 누가 지키랴, 축복은 내가 못 지키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는 누구 편이에요? 철저하게 하나님 편이에요. 사력을 다하여 죽으라고 그 괴한에 대해서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해석이 여기서 굉장히 복잡하고 난해한데, 처음부터 천사가 환급 뼈, 남자의 생식기 근처거든요. 이걸 처음부터 왜 치지를 않았지요? 처음부터 한방에. 누구 3회전 봐 줄일 있습니까? 이게 어디를 천사를, 한 방에 칠 수 있잖아요. 왜 한방에 안 칩니까? 마음껏 까불게 하지요. 마음껏.
그런데 그 마음껏 까부는 것이 목적이, 방향이 있었던 겁니다. 그 방향이 뭡니까? 누구라도 나의 존재, 야곱의 존재로 하게 되면 곧 하나님의 축복을 뺏은 걸로 간주해서 나는 너를 죽여 버린다. 죽을 때까지.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 해 보자, 까짓 거.” 그러니 인간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한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구원받습니다. 왜? 예수님을 죽이는 그 순간 우리는 진짜 내 모습은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런 몸을 혈육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발각되거든요.
그러니까 제자가 제일 제자다운 모습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겁니다. 도망갈 때, 가장 제자다운 거예요. 그렇게 제자다움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주께서는 자기를 배반한 그것도 저주한다는 그 베드로를 주께서 찾아와 주시잖아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왜 안 찾아옵니까? 그건 주님 마음대로지요. 주님 마음대로가 그 소리 들을 때, 우리는 “그래, 나는 잘 났어.”가 아니라 얼마나 부끄러운지 몰라요. 주님 마음대로 했으면 지옥가도 우리는 할 말이 있다? 없다? 할 말이 없는데, 주님 자기 마음대로 해서 우리는 구원받는 거예요. 이건 달음박질 한 것도 아니고 이건 내가 부르짖는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오직 불쌍히 여김으로 구원받았다는 로마서 9장의 말씀, 그게 우리의 체험 화, 우리의 삶이 돼요. 그 자체가 평생의 삶이 돼요. 2013년도뿐 아니라 2014년도, 2015년도 계속해서 느끼는 것은 뭐냐, 달음박질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여전히 불쌍히 여김은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성을 지닌 육신을 우리는 품고 있는 거예요.
야곱이 끝까지 싸우게 한 것은 두 번 다시 야곱의 이름을 미련을 갖지 말게 하기 위한 시간적인 벌기였습니다. “니는 날 죽이려고 했잖아.” 심지어 그 괴한은 날이 동트면 정체가 들어납니다. 따라서 그 전에 자기 정체는 안 밝혀지고 야곱의 정체만 밝혀지고 떠나야 될 임무를 띠고 온 천사에요. 그런데 야곱은 한방 맞고 난 뒤에 천사인 것을 알고 야곱의 정체가 드러나든 말든 관계없이 천사를 붙들고 하는 소리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말은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이미 지옥에 있습니다.” “지옥까지 방문한 천사여! 전에는 나를 지키려고 살았는데, 이제는 이게 아니면 안 되니까 죽어 마땅한 나를 바지가랭이 붙들고 ”살려주세요.“라고 한 것이 호세아에 보면, 야곱이 울면서, 왜 울었겠어요? 지를 아니까.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놈인가를 아니까. 지가 잘난 체 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가 아니까. 울면서 바지가랭이 붙들고 우는 거예요. 살려달라고. 복 달라는 게 아니고 원상회복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맏이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맏이 해달라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살려주세요, 하는 거예요.
에서라는 형이 있을 때는 “니가 잘했어? 내가 잘했지.” 이리 되지만, 진짜 심판 주를 만났을 때는 형이고 동생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최후의 중요한 분을 만났으니까 살려주세요,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형이 왔을 때, 7번 절을 하면서 용어가 뭐냐 하면, “나의 주여, 당신이 형이 아니었으면 내 자신이 누구인 줄 몰랐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지도 못할 뻔 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나의 더러운 속내가 당신과 쓸데없이 경쟁한다고 다 들통 났습니다. 그런데 이 들통 나게 한 것이 바로 주의 뜻이었습니다.”
이제 은혜 받고 난 뒤에는 마음껏 양보할 테니까 가져가시려면 다 가져가세요, 할 때 에서가 하는 말이 “나 안 받을게.” “아이고, 가져가시라니까요.” “나 안 받는다니까.” 갑자기 형제간에 화해가 돼요.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뭐한다? 하나님께서 화목제물 된다. 도대체 화목제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완전히 쪼다가 되고 멍청이 다 돼야 돼요. 여기서 화목제물로 내려가면 우리의 존재는 인정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완전히 개, 돼지 다 돼버려요. 인간도 아니지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이건 인간도 아니지요.
살려주세요, 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란 뜻이에요. 이제는 처벌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살려주면 사는 거고 안 살려주면 할 수 없는 거고, 바로 그 광경을 주님께서 언약을 만들어서, 십자가로 만들어서, 십자가 피로만 복음으로만 액기스 만들어서 십자가 담았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설 때에 바로 나 라는 것과 악마에 속한 나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틈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서로 양보가 없는, 서로 좋은 식으로 합의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면서 십자가 피가 튀어나오지요. 마그마처럼. 지진이 갈라지면 거기서 마그마가 올라오듯이. 피가 튀어 오르면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주여, 살려주옵소서.“ 하는 말 밖에 할 게 없어요.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타고난 게 그거에요. 타고난 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는 그런 혈육으로 태어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2장에 혈육으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꼼짝 못하고 마귀의 종노릇해서 살았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 자손을 붙들었다, 이 말은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 인간이 혈육인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그런 기능을 과거에 해왔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도 여호와 안 믿지요. 그런데 이방인들에게는 아무 손을 안대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좀 원망하고 이러니까 하나님은 누굴 벌꺽 화를 냅니까? 자기 백성에게는 예민하게 반응하지요. 그렇잖아요. 그게 아브라함 자손의 기능이 그 기능이에요. 저 쪽은 그냥 하나님 믿어도 조작된 거니까 그건 가만히 놔둬도 괜찮아요. 여기는 이스라엘은 진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진짜가 진짜 값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 위반되면 즉각적으로 하늘에서 징벌내리고 갑자기 벌 내리고 난리 납니다. 그게 아브라함 자손의 기능이에요. 아브라함 자손이 됐다, 하는 것은 자랑스러워 할 게 아니고 이제 죽었다, 복창하면 돼요. “아이고, 참 하나님은 매일 내 멱살 쥐고 흔들 분일 것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뭐가 나옵니까? 내가 너를 징계하는 것은 니가 내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 아들이기 때문에. 니가 사생아가 아니기 때문에 니한테 징계하지. 그런 이야기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옛날 이스라엘 기능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16절 다시 봅시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되어 있지요. 징계, 사생아 하는 게 히브리서12장에 있지요. 형제이야기는 저번에 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 하니까 형제란 의미를 해봅시다.
형제란 의미는 이 땅에서 구멍을 판다는 것으로 했지요. 지금 우리는 형제 혈육이 있잖아요. 꼭 우리 집안에 없더라도 같은 대한민국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단군의 자손 형제 아닙니까? 여기에다가 구멍을 파는 거예요. 가족이 민족이 되고, 민족이 모여서 국가가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의식의 주체화’라고 어렵게 표현해요.
여러분, 가정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가정이라는 것이 우리 의식에 있어요. 왜냐 하면, 가족이 가정으로 변화는 것은 우리 의식이 동원되는 거예요. 그걸 ‘주체화’라고 해요. 주체는 내가 주체잖아요. 요거는 내 가정이야, 할 때는 내가 그 가정에 나의 주체를 대신할 집단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식이 애를 먹여서 남한테 사기를 쳐가지고 유치장에 가있다. 그러면 엄마가 화를 내며 면회 가면서 “나는 니를 자식으로 생각 안한다. 호적에서 파가라.” 이리 한다고요. 니를 내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자기의식의 주체화에서, 너는 나의 의식의 주체화를 니 같은 인간이 와서 훼방하고 방해했다는 겁니다. 의식의 주체화가 가정이라면 이 가정은 누구 뜻대로 되는가 하면,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내 뜻대로 이루어질 때만 나는 아주 행복한 가정이라고 해석하겠다고 보는 거예요.
부부가 이야기하게 되면, 서로가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려고 해요. 남편은 아내를 남편이 부리는 대로 다루어지기를 원하고 아내는 남편이 자기 원하는 대로 다루어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에게 “아이고, 참 이쁘다,” 할 때 뜻은 뭐냐 하면, 요거 내 Pet이다. 애완동물, 요거 내 뜻대로 갖고 놀겠다 싶을 때는 그걸 귀엽다고 하지요. “아이고, 귀여워” 그런데 귀여운 개한테 몰려봤습니까? 그럴 때 가정이라는 이 주체화가 눈물을 흘려지지요. 왜 내가 원하는 가정은 이런 가정인데 저게 예쁜 개가 내 말 잘 듣는 귀여운 개가 언제부터 와가지고 달려들고 저렇게 해가지고 나의 주체화를 훼방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가정폭력 이런 게 있거든요. 4대 폭력 중에 가정폭력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뭐냐 하면, 내 가정에서 해결 안 되면 국가에다가 호소를 하지요. 경찰이 와서 해결하기를 원하지요. 민족이란 같은 친척이라 보면 되고 같은 혈족이니까 그것도 안 되면 국가의 경찰력에다가 호소하는 거, 명절날 가서 “우리 그이가 자꾸 나를 때려요.”하면, 삼촌이 “이놈!”하고 집안이 나서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는 우리 같은 집안이니까. 집안이니까 이것도 의식의 확대된 주체화지요.
그것도 해결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국가에 해결하는 거죠. 바로 이것이 나라는 주체가 확장되고 의식이 주체되면 이렇게 발전하는 겁니다. 요게 바로 마귀에요. 요게 나중에 국가에서 멈추면 괜찮지요.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천국까지 이어져요. 천국에 골프채 들고 골프 치러 가는 사람들이에요. 천국이 지 세상인 줄 알고.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 형제란 형제가 아니지요. 형제라 할 때는 뭐냐 하면, 구멍을 팝니다. 주체에다가 구멍을 파버려요. 구멍을 파버리면 졸지에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한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으로 구멍을 파버려요.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할 때,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요게 형제 되기에 시작이거든요. “그냥 나는 주님을 형제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쉬운데, 그게 아니고 삽질을 해서 이걸 옴팍 구멍을 파버려요.
사람이 목욕탕을 갈 때, 탈의실에서 옷을 벗잖아요. 옆에 있는 아저씨가 멋도 모르고 바쁘게 들어가다 보니까 내 바지를 밟았다. 그런데 내 마음이 왜 아파요? 바지가 무슨 신경이 있습니까? 내 마음이 왜 아플까? 이상하지요. 그냥 옷인데, 섬유인데, 내 마음이 왜 아픕니까? 조금 전까지 내 몸에 걸쳤잖아요. 인간의 의식의 주체화속에 누가 숨어있습니까? 오직 나는 나만 사랑한다는 게 있더라 말이지요. 야곱이 아들하고 축복 지키려고 누군 줄 모르고 무조건 싸웠잖아요. 결국은 야곱의 죄악된 기억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자기 요셉의 두 아들 할 때 축복할 때 어떻게 축복합니까? 어긋나게 하지요. 그게 하나님의 판 바꾸기에요. 나도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축복할 것은 복 준다, 소 준다, 양 많이 준다, 돈 주는 거 이게 축복이 아니고 판을 바꾸는 그것만이 축복의 시작이고 끝이에요. 하나님 앞에 살아남는 것이 땡잡은 것이지,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 아닙니까? 이 땅에서 호호, 헤헤 거리는 거 까부는 거, 다 소용없습니다. 그건 자기의식의 주체화밖에 안돼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말씀을 가지고 삽질해서 구멍을 파버립니다. 구멍을 파버리면, 우리는 “아이고, 저건 내 아들인데, 아이고 저건 내 남편인데, 우리 아버지 장례는 치르고 가야지.” 특히 부자청년은 어떻습니까? 제가 착한 일해서 구원받겠습니까? 하니까 모든 걸 다 팔고 나를 따르라, 하니까 근심되는 거예요. 돈을 줘버리면 그 돈은 “아이고, 내 돈이었는데.” 조금 전까지는 나를 걸쳤던 나를 나답게 만들었던 내 벗어 놓은 바지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그거 밟히니까 아이고, 그럼 나는 주님 안 따라간다. 영생포기하고 그거 따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게 마지막 남은 어려운 점인데요. 요거하고 마치겠습니다. 뭐냐 하면, 이게 마귀에게 잡혀서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하잖아요. 마귀에게 잡힌 것은 해결책이 없어요. 분명히 아셔야 돼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건 마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혈육에 속한 사람은 혈육 자체가 마귀한테 지배받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은 안 되는 걸 되게 하기 때문에 얼마나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납득이 안 되고 거친지 몰라요. 왜, 우리가 쉽게 이해될 거 같으면 우리가 언제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못하는 방식을 가지고 되게 하시니까 그 방식이 우리한테는 어리석게 보이고 무모하게 보이고 참 주님께서 일하신 거 보니까 진짜 마음에 안 들어요. 전혀 마음에 안 들어요. 왜냐, 우리가 관계했던 것을 끊어야 되니까.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이건 말씀으로 다 끊어요. 돈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를 미워한다. 세상에 그런 것을 붙여 놓은 그런 회사 봤습니까?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것은 봤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면 회사를 미쳤다고 만듭니까? 돈 때문에 만드는 건데.
주님의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평생 동안 계속해서 안 된다는 소리를 해요. 안 돼! “내가 요번에 헌금했습니다.” “글쎄, 그거하고 구원은 안 된다니까.” “제가 전도를 12명 했습니다.” “글쎄, 안된다니까 왜 자꾸 쓸데없는 짓하고 있네.” “요번에 성경공부 참석했습니다.” “그거 안 된다니까.” “성령 받으려고 충만히 기도했습니다.” “쓸데없는 짓하고 있네.” “왜 니가 납득이 되는 짓을 하느냐, 니가.“ ”예수를 사랑합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안돼요. 끝까지 안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벗어놓은 그 바지에는 뭐가 묻어 있느냐 하면, 바지 안쪽에 보면, 5년 전에 십일조 한 게 담겨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가 다 나를 위한 사랑했던 과거들이에요. 그걸 노동의 산물이라 하는데, 노동의 업적과 결과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습니다. 고거 챙기고 구원은 구원대로 받고. 자꾸 이런 계략을 치는데, 다 쓸데없는 겁니다.
결론내리겠습니다. 우리는 평생 쓸데없는 짓만 하는 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여러분, 면류관 준비 받았거든 면류관 후딱 주님 발 앞에 제발 빨리 선착순으로 던져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인간을 십자가 피로만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자신의 피를 우리와 안 섞이기 위해서 그동안 안 돼! 라는 말을 그렇게 한 겁니다. 안 돼! 그렇게 해 오신 거예요. 우리는 뭘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계속해서 우리는 의미를 두려고 해요. 그래서 이제는 의미 두는 것은 니 자유인데, 의미 둔 그것조차도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 니는 못하지만, 나는 해낸다. 라는 것이 믿어진다면 놀라운 사실은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이게 믿어지는 거예요.
아까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리면, 땅에서 하늘나라 가는 이런 십자가 아니라고 했지요. 반대라고 했지요.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위에서 하늘부터 시작해서 땅으로 내려온 십자가에요. 안 돼!를 통해서 우리를 십자가 안에 십자가로만 크게 보이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 시간 끝나면 안 돼! 생활을 죽을 때까지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서 구원 받는 것이 우리 힘으로 안 되고 하나님께서 작정된 사람에게만 영생주어서 주께서 그걸 노리고 오직 자신의 피 복음을 우리에게만 전달시켜 주신 그 결과인 줄 압니다.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사오니 이것이 나의 원인을 섞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