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근원분할(히2;14) 1306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22. 19:12

2013-06-15 01:52:24 조회 : 1320         
근원분할 130614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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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30614a-히2장14절(근원분할) - 이 근호목사

히브리서2장14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고 되어있지요. 요 문장에 보면 존재하는 것은 자녀들이 존재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존재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마귀라는 게 있어서 같이 한 문장을 이룹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돼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했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혈육이 그 혈육이라면 마귀는 이 문장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들어 올 수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귤이 세 개, 수박이 네 개, 바나나가 세 개, 기관차가 두 개, 이러면 뒤에 기관차가 빠져야 되지요. 시자에 가서 과일가게에 가가지고 여기 바나나 두 개 주시고, 귤 두 개 주시고, 기관차 두 개 주세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왜, 기관차는 과일이 아니니까. 그렇잖아요. 같은 문장에 섞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녀들은 혈육에 속했는데,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혈육에 속해서 마귀가 세력을 장악해서 어떻게 합니다, 하면 마귀는 거기에 섞일 수 없지요. 그렇다면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혈육이라는 것이 여기에 들어간다는 말은 뭐를 불러내느냐 하면, 우리가 없다고 여기는 마귀를 나와! 마귀 너 빨리 나와! 불러낼 낚시 밥이 뭐냐 하면, 바로 ‘혈육’이라는 겁니다.

‘혈육’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서 마귀가 노리고 있는 바를 마귀를 엮어내는 하나의 미끼 같은 거죠. “나, 잘났어. 나 누구야.” 이게 아니고 “나, 혈육이야.” 짝을 이루는 거예요. 혈육과 마귀와 짝을 이루는 거예요. 그런데 평소에 인간들은 처음부터 중요하지요. 인간들은 자기를 혈육이라고 보지 않고 육신으로 보지 않고 “나, 교사야, 나 사장이야,”이렇게 본다 이 말이지요. “당신, 누구십니까?” “나, 육이야.” 이렇게는 안 하잖아요.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나, 육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하잖아요. 내가 육이다, 하는 것은 나한테 의미 없어요. 나는 직업이 뭐며, 연봉이 얼마이며, 그게 중요하지, 애가 몇 명이며, 가정주부며 이게 중요하지 “나, 육이야.” 같은 인간들끼리 안하거든요.

혈육이라는 것은 육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나 혈육이야, 나 육이야, 혈육에 속했다는 말은 좋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성경에서 혈육에 속했다는 말은 위태하다는 뜻입니다. ‘아! 내 힘으로 안 되겠네.’ 이런 뜻이다 이 말입니다. “나, 교회 다니는 혈육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나는 교회 다녀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혈육은 짝을 이루는데 마귀하고 짝을 이룹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마귀가 갑이 되고 을이 되는 쪽이 혈육이에요. 그리고 그 을은 갑한테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지경, 혈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혈육과 마귀는 짝을 이루어서 문장을 이루어도 되는 거예요. 그렇게 문장을 이루는 겁니다. 성경은 그냥 읽으면 안 되겠지요. 존재하지 않는 마귀를, 실제 마귀는 주민등록증 없잖아요. 마귀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 나라에서 존재하는 것은 다 주민등록증 붙지요. 개 같은 것은 말고. 인간처럼 활동하면 주민등록이 다 있어요. 그거 없으면 노숙자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동사무소에 가서 우리 집에 마귀 있는데 주민등록증 내주세요. 이런 이야기를 못하잖아요. 마귀는 우리한테 존재감이 없는 거예요. 존재감이 없다는 말은 결국은 존재는 누구한테만 활용된다? 우리 인간에게만 쓰여 지게 된다, 라고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여기 사람 몇 명입니까? 하면 사람 몇 명이라고 손들면 되는데, “어, 미안합니다. 마귀 둘이 있는 것을 놓쳤네. 합해서 몇 명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 하잖아요. 군에서 하나, 둘, 셋, 넷... 번호 끝! 다시 해! 마귀 세 개 빠졌잖아! 귀신 세 개 빠졌잖아, 하면 그러니까 본인은 모르잖아요.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이 “나는 혈육에 속한 게 아니야.” “나는 육이 아니야.” 라는 그런 표현을 달리하면 “나는 마귀나 이런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눈에 보이는 숫자에 헤아리는 그런 세상에 성경이 동조할리는 없고 “너희들이 그렇게 하든 나는 마귀를 포함시켜서 세상을 다루겠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니까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동조해야 됩니다. 그렇게 동조하고 나면 우리는, 나는 혈육에 속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쉬운데요, 15절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고 되어 있지요. 요걸 난해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용어로 쓰게 되면 난해한 것도 풀립니다. ‘근원분할’이지요. 근원분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토대, 바탕, 바탕이 갈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의 바탕은 중앙에서 결정하거든요. 중앙에 나무가 두 개 있었지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나란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3장을 미리 아는데 창세기3장을 모른다고 치면, 항상 생명나무 있는 곳에 선악과 있고, 선악과 있는 곳에 생명나무 있고, 짝을 이루어서 나란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3장을 알아버렸습니다. 어떻게 되지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갈라지지요. 근원분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밑바닥이 갈라지는 겁니다. 밑바닥이 갈라지니까 근원, 중앙부위가 중앙부분이 둘로 갈라지게 되지요. 그렇다면 둘로 갈라졌을 때, 만약에 배를 타고 가는데 쫙! 하고 둘로 갈라졌을 때, 우리는 어느 쪽에 서야 삽니까? 사실은 이미 배가 갈라졌으면 어느 쪽에 상관없이 분할된 우리의 토대가 분할됐으면 그건 죽음입니다. 사람은 이미 선악 쪽에 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부터는 생명나무를 따먹지 말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내는 조치가 뭐냐, 근원을 분할시켜 버리는 겁니다.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바탕이 갈라져버렸어요. 갈라짐으로 말미암아 원래 창세기2장에 보면,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함께 있을 때, 그 변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인간이 있습니다. 요게 제 위치에요. 제 위치에 있다는 말은 제가 말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그럴 때만 인간이다, 이 말입니다.

인간은 “나, 인간이다!” 해서 인간이 아니고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분할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주변을 맴돌 때 그 때가 인간이었던 순간이에요. 그 때 부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아담은 자기 아내를 살 중에 살이요, 내 빼 중의 뼈다, 라고 기쁨의 고백을 한 겁니다. 살아, 잘 있나! 집에 퇴근해서 뼈야, 잘 있었어? 내 뼈야! 이런 식으로. 너를 먹이는 것이 마치 내 뼈를 먹이는 것이고, 너에게 월급 주는 것은 이건 나한테 월급 주는 거야, 니가 잘돼야 내가 행복해. 니가 좋아야 내가 만족해. 아직도 이런 식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게 안 되면 아담 탓하지 마시고요, 항상 인간은 근원과 같이 겹쳐져 있어요. 근원 따로 우리 따로가 아니에요. 생명나무 선악과가 같이 있을 때, 그 때는 인간은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행복한 겁니다. 그 때는 죽음이 뭔지를 알 필요도 없어요. 사는 거 자체가 에덴이고 극락이니까.

극락이라 하는 것은 깨질 때 알거든요. 인간이 참 후회스럽게 살아요. 뭐든지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있을 때는 좋은 줄 모르다가 건강 잃어버리면 “아이고, 저 인간들은 뭐가 잘난 게 있어서 튼튼하게 잘 걷는데 나는 뭐가 못 났는가 걷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등신 다 됐네.” 지 까불다가 기브스 해 놓고 남 탓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인간은 나 여기 있으니까 인간이다, 이리 하지 마세요. 그것은 범죄하고 난 뒤에 일방적인 육신으로 바뀐 혈육에 속한 거예요. 혈육이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배후에 마귀의 조종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억지를 부리지만, 하나님이 말하는 인간 쪽에 섭시다. 마귀 말 듣지 말고 성경말씀 들어서 인간이란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함께 있을 때, 그 때 그 비치되어 있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것만이 그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단독적으로 인간되는 법은 없다 이 말입니다. 동양철학은 불교는 그것도 모르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거 외우면 인간되는 줄 알고, 동양철학의 특징이 뭐냐 하면, 스스로 도를 깨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미쳤어요. 미쳤어. 자기가 도 닦아서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물어 볼게요. 유한자가 무한 자 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이 될 수 없는 것이 유한한 인간이 생각하는 무한은 뭐가 무한인지, 유한한 입장에서는 모르게 돼 있어요. 유한한 인간이 생각하는 무한은 진짜 무한하고 관계없이 유한의 연장, 확장으로서의 유한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짜 무한입니다. 신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이 될 수가 있겠어요? 신 자체가 뭔 줄 모르는데. 그러니까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말 안되는 게 많아요. “나는 천국갈래” “천국이 뭐냐?” “몰라” 모르면서 간데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란 스스로 결정하고 내가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내가 중앙에 서면 안 돼요. 중앙을 비워드려야 돼요. 생명나무와 선악과 있을 때 그 때만 아담은 아담이었습니다. 만약에 근원이 분할되어 버리면, 아담은 흙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범죄하고 난 뒤에 흙이 되어가는 존재를 성경에서는 혈육에 속했다, 육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은 “아이구, 인간이 까불다가 혈육 되는 거 아이고, 그래, 그래 흙 되라 하면 그만이지.” 인간을 만든 취지가 그렇게 되면 안돼요. 하나님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와 관계돼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하나 됨을 어떻게든지 회복시키면 회복에 따라서 어떤 것도 있어야 되느냐 하면, 바로 인형 같은 인간도 만들어져야 돼요. 세트로. 콜라, 햄버거, 감자튀김, 맥도날드 3천3백원짜리, 이렇게 3종류가 세트가 되어야 되듯이 생명나무 그리고 선악과 하나 그 다음에 인간의 배치 그렇게 있을 때만 인간이라 했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인간되려면 그 조건을 이탈하면 안돼요. 하나님이라도 그 조건을 충족시켜야 그 때 등장한 인간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감 잡을 거예요. ‘아, 나는 인간인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런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구나!’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그대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가고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손꼽놀이 하실 때, 종이접기해서 아빠 만들고 엄마 만들고 부엌 만들고 강아지 만들고 요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손꼽놀이 하시는데 어느 날 마귀가 와서 강아지를 채갔다. 그러면 주님께서 소꿉놀이 못해요. 채어간 강아지를 기어이 그 원래자리에 있어줘야 주님은 계속해서 소꿉놀이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생명나무, 선악과, 그 다음에 인간, 낙원, 이게 놀이인데 마귀가 들어와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니까 이게 엉망진창이 됐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생명나무까지 다치면 안 되니까 얼른 뭘 보호하느냐 하면, 생명나무를 보호한다는 것은 생명나무 이것만 있어도 다시 원래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고 본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단 전염병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겁니다. 격리되면서 근원분할 됨으로 말미암아 배가 갈라진 거예요. 저 쪽 편은 마귀가 왕초고, 그 마귀의 배에 탄 배에 좋다고 인간이 타고 새끼를 낳는 거예요. 그게 혈육에 속했다, 육신에 속했다, 이 말입니다. 계속해서 자식을 낳아요. 마귀 배에는 사람이 우글거려요. 찾는 자가 많아요.

생명나무 가는 것도 원래 저 쪽 살던 사람인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채택되어서 이리로 온 거예요. 생명나무 쪽으로 온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나 백부장이나 이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니까 우리 동네에 와서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아무에게나 기적을 베풀지 않는다, 했어요. 기적 베푼다고 쥐나 개나 만나는 족족 다해준 게 아니고 다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하는 거예요. 조용필 인기 있다고 인덕원 노인 복지관에서 공연 부르면 조용필 오겠습니까? 그런데 안 가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요청한다고 하나님이 덜렁 구원해 버리면 안돼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꿉놀이 있잖아요. 그 세트. 그거 맞추기 위해 적합해야 돼요. 그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지고 있다 이리 보는 겁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이제 근원분할 이해되지요. 근원이 잘라졌습니다. 갈라지니까 혈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신이고 뭐고 다 잊어버렸어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됐기 때문에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은 자기 육신과 흙 이런 것이고, 그리고 육? 어떤 목적? 목표? 목적과 목표는 다르다고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그 다음에 의미 몰라요. 혈육에 속한 사람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같아요. “우리가 왜 죽지?” “아이고, 죽을 때 죽더라도 그런 모르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하고 뭔가 자기가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 몰라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아이고, 몰라도 돼! 몰라도 돼!” “내가 존재하는 목적?” “아이고, 그거 내가 알 필요가 뭐가 있어. 그냥 아침에 눈뜨고 밥 먹고 살면 되고 죽으면 죽고 그만이지.” 너무 많이 누락시켜요.

우리 인간됨에서 많은 요소를 누락시켜요. 너무 많이 누락시키니까 집에 있는 개나 우리가 차이점이 없어요. 왜? 오뉴월의 개 보세요. 부러워요. 이건 뭐 취직을 걱정할 필요가 있나, 그냥 주는 밥 먹고 요새는 고급스러워서 사료먹이지만, 옛날에는 그냥 집에 찌꺼기 나오면 혀를 낼름 거려서 분주하게 움직여서 혓바닥해서 물을 핥아 내고 우리 먹기 싫은 거 다 먹어주니까 고맙기도 하고 먹고 난 뒤에 이거는 동원예비군을 다닙니까? 어디 공부를 합니까? 그냥 슬금슬금 돌아다니다가 짝짓기 하다가 힘센 놈 갑한테 물려 을이 돼가지고 편안히 턱 누워 있잖아요. 얼마나 부러운지. 그게 왜 부럽냐 하면, 개의 사는 목적이 의미 없듯이 우리도 개하고 똑같아요. 우리도 목적이 없으니까 개나 쥐나 우리 신세나 똑같아요. 그래서 남자는 술 먹으면 뭐된다? 개 되는 거예요. 전부 다 흙이 돼 다 사라지지요. 우리는 너무 많은 요소를 빼놨어요. 모르니까 무조건 빼놓은 거예요. 내가 사는 이유, 누가 만들었지? 죽은 다음에 뭐가 있지? 의미의 존재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사는 대로 살뿐이에요. 밥 먹고 배나 좀 부르니까 신이 어떻고 성경이 어떻고 하지요. 살기 바쁘고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피곤에 지쳐서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일어나서 배달해야 되고, 이렇게 사는 삶에 있어서 성경이 어떻고 신이 어디 있어요. 그냥 개지요. 개하고 인간은 차이점이 없습니다. 특히 치매 걸린 노인들 보세요. 애도 그런 애가 없고 애가 더하면 나중에 귀신 돼요.

여러분, 성경이 굉장히 과격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토해 내치리라, 상당히 과격하지요. 얼마나 과격한지 멀미난다 이 말이에요. “니는 내 속에 들어오면 안 돼!” “나, 니 들어오면 멀미나.” 얼쩡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토해 내쳐버리는 거예요. 자동 토해낸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보고 할 이야기입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가룟유다 보고 하는 말이 “차라리 니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 누가 태어나게 했습니까? 주님이 태어나게 해놓고 이제 와서 왜 딴 이야기를 합니까? 아예 애초부터 태어나게 하지 말던지, 자기가 태어나게 해놓고 책임을 누구한테 밉니까? 가룟유다한테 밀어요. 그런 이야기가 우리한테는 이해가 안되는 게 우리는 의미, 목적, 목표, 이유 하나도 모릅니다. 모른다는 말은, 개하고 똑같다 보니까 항상 사수하고 지키는 것은 혈육에 속한 것, 지 몸뚱어리밖에 없다 말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내친 것은 인간 자체에서 억한 심정, 나쁜 감정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기 위해서 무대 판을 새로 짠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나무, 선악과 있고 인간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이 판을 없애버리고 새 판을 짜신 거예요. 생명나무 따로 있고, 저 쪽은 인간은 선악과와 더불어 따먹고 죽어가면서 판을 새로 짜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은 혈육이 되어서, 흙이 되어서 죽거든요. 죽으면 그 죽는 과정에서 뭐가 등장하는가 하면, 그동안 몰래 숨어있던 나쁜 자가 등장합니다. 악마가 등장하지요. 그러니까 뱀이 뱀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뱀이 악마가 될 때까지 주님의 전략은, 작전은 계속됩니다. 

인간은 의미, 목적 아무것도 모르니까 악마고 신이고 이것도 별로 사실은 없어요. 배부르니까 신을 찾지만, 급하면 신이고 뭐고 없어요. 없는 그 쪽을 혈육이라고 잡아놓게 되면, 인간에게는 자기를 그렇게 망쳐가는 장본인, 악마가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쪽의 누구를 등장시키면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면 비로소 저 쪽에도 스물, 스물, 인간을 지배하던 것이 등장해서 예수님의 흉내를 냅니다.

마귀의 특징은 예수님을 흉내 낸다는 겁니다. 어린양을 흉내 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성전에 있는 짐승, 예수님을 모방해요. 이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디 하면, “자, 내가 이제부터 연설하겠습니다.” 하면 “어 어 어 어”해가지고 말 못하게 만듭니다. “어 어 어 어 얼레리 꼴레리 안 들려! 나 귀 막았다.”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뭘 느끼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관련된, 정작 노리는 그 관련된 것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지금도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가? 서서히 그 윤곽을 감지하게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마귀들이 이런 게 있는 줄 모르니까.

오늘 본문 다시 해봅시다. 히브리서2장 14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그 다음에 곧 뭡니까? 마귀를 없이한다, 되어있지요. 혈육이라는 것을 우리로 본다면, 마귀가 우리라는 혈육과 같이 섞일 존재자가 아니거든요. 인간의 모든 언어라 하는 것은 있는 것들만 기록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우리와 더불어서 마귀를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석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존재의 의미, 목적 그런 것도 다 귀찮고 모르고 싶은데, 마귀를 집어넣는 순간 ‘그럼 지금까지 내가 마귀한테 조종 받으며 살아왔단 말인가?’ 라고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기의 인생 판을 점검하겠지요. 그게 바로 말씀의 효과에요. 우리는 기껏 바르게 살겠습니다.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하지만 그 판이 이미 혈육에 속한 판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산다고 해서 생명나무 허락해 주는 건 아니거든요. 왜냐 하면, 배가 달라요. 생명나무 배는 배가 따로 이고, 아까 했잖아요. 유한자가 무한에게 건너올 수 없다고. 이 쪽 배에서 건너갈 수 없어요.

부자가 가슴 치는 게 거지 나사로 땅에 있을 때는 바로 앞집이었는데, 막상 바탕 자체가 분할되고 난 뒤에는 저 쪽으로 건너갈 수가 없어요. 그게 영원한 고민입니다. 고민은 고민으로 끝나버려요. 계속 고민이에요. 바라볼 때마다 고민 돼! 다리가 있습니까? 건너갈 배가 있습니까? 그리스 로마신화에는 배가 있어요. 노 저어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는 어떤 다리도 없고 백날 노래 불러도 없어요. 험한 세상은 다리가 없습니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하는데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어요.

선교단체에서 애들 전도할 때, 세상 그려 놓고 천국 그려 놓고 여기 십자가를 다리로 해서 건너가잖아요. 십자가 다리가 없다니까요. 왜냐 하면, 지금 십자가는 어디에 꽂혔습니까? 세상에 꽂혔지요.  세상에 꽂힌 이런 십자가는 없는 게 세상에서 출발한 십자가는 하늘나라하고 연결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가 거꾸로 됐다니까요. 십자가가 천국에서 시작해서 다가오게 되면 세상사는 사람 가운데서 성령이 나온 사람만 십자가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무수한 십자가가 있더라도 다 이것은 헛방이라니까요. 헛수고에요.

오직 천국의 십자가는 그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의 자리, 주의 오른편의 자리에서 나오는 십자가만이 성령께서 이런 식으로 요 이미지로 우리에게 옵니다. 성령은 요 이미지에요. 왜? 이 세상은 십자가라는 것은 어리석으니까. 십자가 죽을 때만 어리석은 사람인 줄 알아요. 계속 어리석어요. 십자가는 영원히 어리석음이에요. 영원히 어리석고 미련하기 때문에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를 알 자가 없다고 했지요. 고린도전서2장에 보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 목걸이 걸고 돌아다녀도 십자가 올라 탈 수가 없다니까요. 끊어졌어요. 십자가를 이렇게 그려야 돼요. 그 뿌리를 하늘에서 그리게 되면 학생들이 난처해하는 게 우리 쪽에서 올라 탈 방법이 없잖아요.  “목사님, 그럼 우리 쪽에서 십자가 올라타면 되잖아요.” 올라탈 길이 있습니까? “없어!” 없다고 하니까 집에 가자해요. 없다는데 없다는 한 마디로 끝나지요. 이미 분할된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고 원판이 근원적으로 이미 분할되어 버렸어요. 그 분할된 것을 주님께서는 혈육에 속했다는 것으로 해서 혈육과 마귀가 한 통속이라는 것을 히브리서2장 14절에서 이렇게 통보해 주시네요.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를 아는 사람만 그 말을 알아듣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 인간은 인간들끼리 의논하지 “언제 우리한테 마귀가 있나?“ “너 봤어?” “마귀 없잖아, 봐라!” 마귀는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는 것하고 우리가 왜 상의합니까? 미쳤어요?

학생이 학교에서 문제 있어서 “얘, 너는 마귀하고 상담해 봐라.” 이런 소리 안 하잖아요. 상담교사하고 상담해봐라, 상담교사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존재하지 않거든요. 마귀의 존재는 성령 받아서 바로 우리가 혈육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나, 연봉이 얼마고, 나는 우리 집안이 어떻고 이런 게 아니고 나는 바로 연봉이 얼마든, 어느 학교 나오든, 나이가 많든, 나는 혈육입니다! 라고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만 마귀의 존재가 그동안 얼마나 우리를 속여 왔던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보고 “당신, 마귀 들렸지요?” 이러면 화를 냅니다. 빨리 말을 바꾸세요. “혈육에 속하셨지요?” “무슨 혈육에 속해? 내가 삼겹살인가 혈육에 속하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말을 못 알아듣지요. 왜 그런 취지로 이야기합니까? 만약에 혈육에 속했다고 하면 “그래, 혈육에 속했다. 왜? 왜?”  “혈육에 속했으면 마귀한테 잡혀있는 겁니다.” 짝을 이루어서 설명해 줘야 히브리서 2장 14절이 되는 거예요. 이제 제 이야기의 취지를 알겠지요.

그러니 내가 혈육에 속했다, 이 말은 내 힘으로는 마귀의 힘을 이길 수가 없다. 그 다음의 특징이 15절에 보면, 그 혈육에 속한 특징이 나오지요. 죽기를 무서워한다. 이걸 좀 설명을 하겠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한다. “그거 목사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는데 이게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근원분할을 기초로 할 때, 죽음이라 하는 것은 이게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분할되기 이전에는 죽음이란 말씀만 있었지 죽음이 체험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안다하면 안돼요. 죽음을 인간은 몰라요. 왜냐 하면, 진짜 죽음은 생명나무 선악과 함께 있을 때, 그 때의 말씀하시던 그 죽음을 죽음이라고 제대로 알아야 되는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은 근원이 분할됐잖아요. 배가 다른 배잖아요. 우리는 뱀의 후손 마귀와 함께 있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생명나무와 갈라졌잖아요. 그리고 우리 쪽에서는 생명나무 길이 차단되어 있는 입장이잖아요. 우리 입장에서는 죽음이란 개념 자체도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우리는 죽음도 모르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껏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죽는 현상을 수집해서 그걸 일반화시켜 놓고 그걸 죽음이라고 의미를 붙이는 거예요. 정의를 그렇게 내려요. 죽음은 무엇이냐, 숨 끊어지는 것, 요렇게. 참~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죽음이 숨 끊어지니까 고통하고 괴로울 때는 그 고통과 괴로움을 해소하는 최후의 마지막 아예 작살내는, 없애는 방법은 자살하면 되지요. 왜? 이 육신이 흙이 되고 육신이 숨 끊어지면 감정도 없고 느끼는 것도 없고 고통도 없을 거니까 “에이~씨 어찌하면 뭐 해보고 안 되면 죽어버리지.” “술 막 퍼먹고 죽어버릴까” 이런 식으로 죽고 싶다. 어떤 목사가 자기 양녀로 삼은 딸을 성폭행하다가 걸렸어요. 걸리고 난 뒤에 이틀 뒤에 큰 교회 목사인데 그 사람이 자살해서 죽었어요. 왜 자살했겠어요? 쪽팔려서 그래요. 평소에 간음하지 마세요, 라고 설교시간에 했거든요. 성폭행한 놈은 지옥 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자살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평소에 설교한 것이 내가 이 정도로 바르게 삽니다 를 보여주기 위한 자존심용으로 했는데 그게 들통 난 겁니다. 만약에 예를 드는데 교인이 한명도 없었는데 설교했을 때, 자살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자살 안하지요. 그러니까 지 수작에 지가 말려든 거예요. 그게 마귀의 수작이에요.

사는 이유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있는 것은 오직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나의 잘남을 위해서 버티는 것이 배가 이미 갈라져서 마귀 편에 있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죽어버리는 거예요. 죽기를 무서워하면 살아야 되는데, 계속 죽을 때도 죽는 게 무섭고 죽기 전에도 죽는 게 무섭고, 죽는 순간만 죽는 게 아니고 죽는 것이 무섭다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이라는 거, 그걸 알아야 되는데 어디서 그게 나왔는지 인간은 알도리가 없지요. 왜? 저 쪽 마귀는 그걸 안 가르쳐줘요. 마귀는 무조건 복음만 전하면 어어어~ 어어어~ 이런 소리하기 때문에 마귀는 그냥 개처럼 살아라, 밥 먹고 사는 게 그게 사는 거야, 별나게 살지 마! 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유, 목적, 의미 그런 거 아무것도 몰라요. 살다 살다 힘 빠져서 죽으면 그만이고, 어려우면 자살하면 그만이고, 이렇게 했기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결국은 죽어버리고. 아무 해답도 해결책도 없어요. 그래서 차라리 태나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한 거예요.

가룟유다는 죽는 순간까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몰라요. 주님은 알지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한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난 거죠. 이제  가룟유다가 태어난 이유를 알겠지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했다, 라는 악마에 대한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도화지로서 이 땅에서 만들어낸 자가 가룟유다입니다.

너는 참 태어나길 잘했어, 라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도화지로 사용된 것이 야곱에 속한 성도에요. “넌, 참 잘 태어났어!” “저는 창기인데요.” “잘 태어났어!” “저는 강도데요.” “잘 태어났어!” 잘살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참 잘 태어난 거예요. 주님께서 그림을 그리시는데 눈, 코, 입, 입가에 점하나, 당신의 마음까지 다 그리죠.

주님께서는 원판, 니란 인간은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판이 중요한 것이다. 니가 지금 살고 있는 판이 이미 갈라졌는데, 중요한 건 어느 쪽의 갈라진 곳에 섰느냐, 이게 굉장히 문제거든요. 사르밧 과부가 가뭄 들어서 지금 굶어죽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누굴 만나지요? 엘리야를 만나지요. 엘리야가 그냥 참기름이나 떡이나 밀가루를 던져주고 끝난 게 아니고 그 집안에 판을 가는 거예요. 가는데 어떻게 하느냐, 엘리사 같은 경우인데, 없는 아들 태어난다고 해놓고 태어난 그 아들 죽이고 거기에 대해서 그 여인이 원망했고 원망한 아들을 다시 살려내고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듭니까? 그냥 곱게 구원하면 되지, 왜 이리 복잡합니까?

우리의 존재 판이 기존에 니가 알고 있던 개 같은 존재 판이 아니고, 지금 그리스도가 누워있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고 강림하시는 그 판 위에 우리는 지금 뭣도 모르고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필름이고 우리는 그 위에 예수님을 비춰 투사하는 스크린역할로 살아가는 거예요. 저 쪽에는 마귀가 누워있고 마귀를 스크린에 비춰보는 마귀의 모습이에요. 그걸 예수님 쪽에서 보면서 혈육에 속했다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만날 하는 게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이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봅시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죽는 것을 공통점으로 수집해서 죽음을 안다? 모른다? 모르지요. 그것은 철학적인 죽음이고, 과학적인 죽음은 몰라요. 죽음을 알려면 어디를 가야 아는가 하면, 근원적인 분할이 안 될 때, 그 쪽으로 가야 돼요. 니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죽음을 아담은 죽으면서도 그 죽음을 몰랐던 거예요. 아담이 죽어가면서 그 죽음을 몰라요. 본인이 죽어가고 있으면서. 그러면
그 말씀을 하신 쪽이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죽음의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죽기 전에 뭘 주느냐, 창세기3장15절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줘버리면 비로소 그 안에 죽음의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잎가지고 치마 옷 입히고 수치를 들게 하는 것도 죽음을 알려주기 위함이고 그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들고 그걸 벗기고 만들어 거기에 가죽옷으로 치마를 입히고, 아예 아담을 가지고 놀아요. 이것은 니가 죽고 살고 문제가 아니라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가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본래 하나님의 판은 절대로 마귀에게 보낼 수 없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은 죽어가면서도 창세기3장15절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하는 용도로서 원 없이 쓰여 지면서 결국 아담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는 거죠.

이거 하고 쉽시다. 안식일은 하루 쉬고 6일 일하지요. 자, 묻습니다. 쉬는 날이 중요합니까? 일하는 날이 중요합니까?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쉬는 날이 중요한 이유가 일하는 것이 너무 고되기 때문에 하루 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반대로 이야기해요. 인간의 일 한 것 때문에 쉬는 날이 있다는 거예요. 안식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쉰다는 것은 하나님이 쉬는 날을 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안식의 날을 줬지 쉬는 날을 준 적이 없는데 우리는 혈육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 몸만 챙기는 거예요. “아이고, 오늘은 좀 쉬자.” 이리 된다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안식일 제도를 만드신 것은 이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인간은 율법에 대해서 전부 다 지 편한 데로 일방적인 해석을 하니까 율법대로 인간은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결론은 뭡니까? 율법을 줘놓고 결국 인간은 죽음이 죽이는 거예요. 죽어간다고 해서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내 백성만큼은 죽음을 알아야 된다. 죽음을 알기 위해서는 마귀가 등장해야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 예수님이 등장해야 비로소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죽음의 의미란, 우리한테 죽음의 의미란 의미가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그것만이 죽음의 의미입니다. 그동안 마귀가 그렇게 따먹어라, 따먹어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죽음의 의미를 우리한테 감추기 위해서 얼굴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결국은 이 죽음이 우리는 우리 죽음으로 국한되고 그것이 인생 종치는 것처럼 “그래, 그러면 죽지 뭐” 이걸로 인생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보여주기 위해서 이러한 악마부터 모든 것이 배치되어 있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주의 말씀은 제대로 죽어라 이 말이에요. 제대로. 모든 말씀은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다, 이 말은 안 살거든 니는 죽어야 될 인간이었고, 말씀대로 부자가 천당 가기에 힘든 것도 니가 부자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죽어야 마땅하고, 모든 말씀이 “니는 죽어야 마땅해! 죽어야 마땅해!” 하고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와 연결시키려고 먼저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6.30) 13-06-27 10:41 
안양20130614b-히2장14절(근원분할) - 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히브리서2장15절, 첫째시간 제가 이야기한 것이 근원분할이라 했지요. 이걸 쉽게 이야기해서 판을 갈아야 돼요. 판을. 바르게 살아야 소용없고 아예 판을 갈아야 돼요. 그래서 제가 전에 예를 들었잖아요. ‘아줌마 불판 갈아 주세요.‘ 이야기했지요. 판만 갈면 되는데, 판을 안 갈고 그 위에서 백날 열심히 노력하고 말씀 지키고 해봐야 소용없어요. 판이 마귀 판으로 해서 소용없거든요. 주께서 판을 갈아주시는데 그 판가는 방법을 첫 째 시간에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엘리사 같은 경우에 어떤 가정에 아들이 없었는데 선지자가 와가지고 아들 생긴다고 이야기했고 그 여자가 반짝 기뻤지요. “아, 아들이 있데, 농담하지 마세요.” 오, 얼마 후에 아들을 임신했지요. 임신했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들이 크다가 도로 죽었어요. 죽으니까 반짝 기뻐했다가 이젠 선지자보고 막 분개하지요. 왜 당신이 우리 집안 들어와서 우환 만들었다. 하다가 그 죽은 아들 다시 살려내지요.

그러면 판 갈이 하는 방법이 뭡니까? 무에서 유로 했다가 죽여 놓고 뭐합니까? 그 다음에 살리시고, 이 세상에 살지 않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이 돼서 오셨고 없는 분이 이 땅에 왔고, 그 오신분이 죽어서 제자들이 도망가 버리고 “아이고, 굿바이다, 인생 일춘몽 이구나! 아무것도 아니네. 그래, 별거 있겠어.” 했는데 세상에 난데없이 사흘 만에 부활하게 만들었고 그 다음에 부활해서 “아이고, 혼자만 부활해서 좋겠다.” 했는데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 하나 놓치지 않고 기어이 찾아내는 이게 ‘판 갈이’ 입니다. 판을 이렇게 갑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죽게 하고 죽게 한 것을 살려내는 방법, 그러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요 작업을 우리에게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애가 둘인데 그러면 갑자기 또 수술 다 했는데 또 아 하나 생기고 이렇습니까?” “애 생겼다가 그 애가 다시 잘됐는데 리틀 사이트처럼 유명한데 그만 애 죽이고 그걸 또 주께서 기도하니까 목사가 기도하니까 낫고 그런 식으로 판을 갑니까?” 그게 아니에요. 그런 방법으로 하는 게 아니고 어떤 방법인가 하면, 신약시대에 판을 가는 것은 ‘없음’이지요. 이 ‘없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 ‘육신’으로 바꿉니다. ‘혈육’으로 바꿉니다.

바꿔버리면 뭐가 되는가 하면, 고린도후서6장이 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이렇게 되지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자가 되니까 우리를 죽은 자라고 생각하게 되면 살리는 자는 누굽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우리를 살려낸다는 것을 믿게 되고 만약에 내가 죽은 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더 이상 예수님은 필요치 않지요. 왜냐 하면, 내가 지금 살아있는데 멀쩡한 내가, 살아있는 내가 돈벌어가지고 내가 나 알아서 살리면 되지, 뭐를 예수님이 보태주고 돈을 보태 줄 건데요? 이렇게 판이 안 갈린 상태에서는 지금 살아가는 이 식대로 그냥 살게 되고, 판을 갈아버린 사람은 “그래, 이건 살아있다고 사는 게 아니야, 죽은 거야. 죽었는데 죽은 나를 주님께서 성령주시고 십자가 피를 통해서 살려내고 있는 거야.” 이러면 이 판은 영생의 판이지요.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엘리야처럼 애 생기고 이런 복잡하게, 그 땐 그 시대에 그런 사건이고, 지금은 현재 있는 것 가지고 얼마든지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있는 것까지라도 충분하게 판 갈이가 가능한 겁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오늘 본문은 2장 16절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첫째시간, 둘째시간 합쳐서 제일 큰 제일 어려운 제목에 도달했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릴게요. 

뭐가 어려운가 하면, 근원분할은 뭐와 뭐가 분할했다고 했습니까? 밑에 바탕이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분할된 겁니다. 지진처럼 판이 갈라지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판 자체가 갈라져버려요. 하나는 선악과에 속했고, 하나는 아벨과 같은 생명나무에 속하고 이 판 자체가 갈라져버려요. 항상 판을 봐야지 내가 잘났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제가 어렵다고 하는 말은 갈라지면 경계가 되지요. 경계선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중요한가 하면, 여기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요 충돌지점에 아브라함 언약이 나옵니다.

모든 언약은 그냥 약속이다! 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몰랐던 판을 두 개 가지고 와요. 쉬운 예로 들면, 독도는 누구 땅입니까? 독도는 우리 땅이지요. 대한민국 땅이지요. 일본은 다케시마라 해서 자기 땅이에요. 그러면 둘 사이에 딱 만나면 거기에 예리하게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완전히 대립된 요소가 나오는데 그 경계선에서 비집고 튀어나오는 게 뭐냐, 언약이에요. 언약이 거기서 튀어나옴으로 말미암아 한 쪽은 축복이고, 한 쪽은 저주라고 거기서 재판관이 판결을 내려버려요. 이쪽은 천국, 저쪽은 지옥이라고 판결을 내려버려요. 완전히 서로 섞일 수 없는 판을 놓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런데 판 당기는 것이 먼저겠습니까? 판결이 먼저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판결이 먼저에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자가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한 자가 저주 받는다고 먼저 판결부터 먼저 내려놓고 그 다음부터는 아브라함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에 속하지 않은 자가 아브라함 가정부터 이미 충돌이 일어나요.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 완전히 가정이 지진이 일어나요. 언약이 먼저 일어나고 난 다음에 대칭이 일어나요.  고라자손과 그리고 모세,  “니만 애굽에서 탈출한 거야? 우리도 애굽에서 탈출한 거야. 왜, 니 혼자 대장질하는 거야. 요거 바꿔 줘! 왜 니 혼자 대장질해. 우리도 레위지파야.” 왜 혼자만 대장질하느냐고 할 때,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나오고, 완전히 수만명 죽여 버렸지요. 또 죽였다고 모세한테 달려들어요. 나라정치 똑바로 안 해서 이만명 죽여 놨다고.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언약은 경계 틈에서 나온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이냐 할 때, 갈라디아서1장 8절의 말씀 생각할 수 있지요.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했지요. 사도 입에서 무슨 용어 나왔습니까? 저주가 나왔잖아요. 저주는 최종적인 요소입니다. 저주받는다하면 끝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저주 이야기하는 것은 십자가가 마지막 언약입니다. 더 이상 언약 없습니다. 이만희고 뭐고 마호메트고 다 엉터리이고, 십자가 진 그 분을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분은 부활하지 않아요. 죽었다 살아난 것은 소생이고, 부활은 부활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소생에 불과한 거고, 부활은 새로운 세계를 끌고 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를 끌고 오기 때문에 그 세계는 바로 언약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내가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하고 갈라디아서3장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말, 누가 너희들을 꾀이느냐, 악마가 등장합니다. 악마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악마가 아니고 우리를 죽인다고 악마가 아니라 진짜 악마의 원래 목적은 바로 예수님을 흉내내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십자가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볼게요. 악마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거 하는 세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요거 악마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존재거든요. 예수님이 존재예요. 삼위일체도 마찬가지고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이거 악마의 소리에요. 예수님의 존재는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은 십자가에요.

그래서 그 뒤의 악마는 계속해서 유사 예수를 만들어내요. 왜냐 하면, 사람은 뭔가 믿고 의지하려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등장하는데 작은 예수, 예수 인형을 계속 악마가 만들어서 십자가를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예수라는 존재, 존재를 갔다 얹어서 그 존재를 믿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렵게 살았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이 땅에서 어렵게 힘들게 살아도 참으면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순종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했잖아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질 때, 고난 받았잖아요. 우리도 고난 받으면 됩니다. 설교하기 얼마나 쉽습니까? 예수님을 모델로 보는 거예요. 예수를 모델로 보고, 불교신자한테는 모델케이스가 누굽니까? 부처잖아요. 불자들이 부처를 자기를 구원할 메시아로 모델로 삼듯이 그 자리에 그러한 배경에다가 예수님만 찰싹 넣으면 바로 그 예수가 사실은 불자들이 생각하는 부처적인 예수가 되는 거예요.

예수는 우리보다 위대하다. 위대한 분이 못한 인간을 건져낸다. 단순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못하는 것은 그 분이 해낼 것이다. 너무나 명확하고 단순해요. 간단한 문제에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러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런 게 아니에요. 바로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싶은 그것이 바로 판이 악마가 십자가를 흐려놓기 위해서 악마가 제시한 제안이 되는 겁니다. 나는 군인이다, 할 때 괄호로 채워봅시다. 나는 (     )이다. 할 때, 친구라는 영화에 보면 담임선생님께서 말썽부리는 학생이 있으니까 불러내서 ‘너희 아버지 뭐 하시나?“ 할 때, 장 동건이 뭐라 합니까? ”제 아버지 조폭인데요.“ 이게 어디서 해가지고 시계 풀고 패지요. 맞고 난 뒤에 뒤에 나가면서 하는 말이 ”진짠 되요.“ 이제 선생님 죽었다, 이제.

“너희 아버지 뭐하시나?“ 우리 아버지 군인인데요. ”너희 아버지 뭐 하시나?“ 우리 아버지 이발사인데요. ”너희 아버지 뭐 하시나?“ 나의 아버지 농부신데요. 여기는 대입만 하면 되지요. 뭐가 안 바뀌어요? 내가 바뀔 필요가 없어요. 나는 군인 될래. 공무원 될래. 나는 사장님 될래. 이것은 ‘나는’변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나는 누구로 인하여 구원 될래.“ ”나는 천국갈래.“ 그러면 요 문장 가만 두고 여기에 부처를 넣든 예수님을 넣든 하나님을 넣든 알라는 넣든 요 문장은 손 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손 댈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요 바탕 판은 악마가 만든 판이에요. 천기누설입니다. 종교심을 이용하면 사람들은 기존 가지고 있는 종교심을 자극받아서 괄호만 쳐놓고 여기다가 예수님만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언약이 먼저 나온다 했지요. 언약이 오면, 두 이질적인 판을 모은다 했지요. 그걸 충돌시키지요. 그러면 충돌이 없으면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충돌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충돌을 싫어해요. 왜? 곱게 가고 싶어요. 사월의 봄처녀처럼, 나물 뜯다가 구원받고 싶어. 그리고 남편 출근 보내고 앞치마입고 구원받고 싶어. 착한일하다가 구원받고 싶고. 충돌, 아! 스트레스 받아, 안 돼! 곱게 구원받고 싶어, 날 안 건드리고 내가 채택만 잘하면 구원받고 싶어요. 나의 어떤 변화 없이 나는 곱게만 하면 돼요. 봄에는 노란 옷 입고 꽃구경하다가 그냥 예수 믿고 구원받고 싶어.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걸 훼방해 버렸어요. 뭐냐 하면, 유대인들 봅시다. 나 유대인은(   )로 인하여 구원받는다? 하나님, 구체적으로 하면 여호와, 또는 주의 이름, 아주 철저했지요. 그리고 그걸 성취시키는 매개체가 뭐냐 하면, 두 가지입니다. 안식일과 할례에요.

안식일은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에 영원한 언약이라고 해서 영원한 이 들어가니까 영원한 안식일이 있는 한 우리는 구원받는다. 그다음에 할례라 하는 것은 창세기17장에서 니가 할례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계보에서 끊어질 것이다. 아브라함의 축복에서 니는 이탈될 것이다, 하는 거죠. 아브라함 축복이 뭐냐 하면, 영원히 복을 받을 것인데,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있을 것이고 땅과 자손과 의로움이 너희에게 영원히 주어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났지요. 족보자체가 아브라함 족보인데요. 뭘. 양반집인데 양반 포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것도 우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적한 양반인데.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그게 혈육이라 했지요.

아까 첫 째 시간에 혈육은 무엇과 있을 때 혈육으로 등장한다고 했지요? 악마한테 지배를 받는 그러한 인간을 가지고 혈육이라 했다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는 존재한다? 존재 안한다? 내가 존재하는데 악마가 존재할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존재하면 악마는 없는 거고, 악마가 있으면 존재한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니까 존재하는 내가 내 눈에 안 띠이니까 이건 악마가 없는 거고, 그런데 성경은 악마와 혈육을 같은 한 문장으로 엮었다는 말은 니 존재에 대해서, 니 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니가 어느 판 위에 있는지, 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어떻든 첫 시간에 이야기한 거고,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여호와로 인하여 구원받잖아요. 자, 예수님이 여기에 등장했습니다. 등장할 때, 유대인들은 요 빈 칸을 비워놔요. 메시아를 만나면 접점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인하여 구원받는다. 그런데 메시아라 하는 괄호를 쳐놨어요. 조건이 구름타고 와야 돼요. 그 다음에 예루살렘 출신이어야 됩니다. 베들레헴 촌놈은 안돼요. 그 다음에 화려하게 와야 돼요. 화려하게 온다는 것은 스바냐, 스가랴,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 보면, 이것은 하늘의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와요. 아예 로마부터해서 이방나라를 완전히 작살내 버립니다. 불과 더불어서 오기 때문에. 그 조건으로 하는데, 주님은 어떻게 왔습니까?

이거는 거지도 아니고 그야말로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귀신들린 자 혹은 귀신의 오야봉이, 악마지요. 바알세불을 힘입어 니가 귀신을 쫓아낸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율법도 모르는 자, 옛날에는 율법모르면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저주 받기로 작정한 자, 그리고 니가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신명기의 성취지요. 신명기에 보면 저주 받을 자는 어디에 달린다? 나무에 달린다는 말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지어라는 그 말씀에 입각해서 합당하게 너는 우리의 율법적인 안목에 의해서 제대로 하는 게 저주 받는 자, 하나님을 대리하는 우리 유대인들이 저주 받는 자라고 한 겁니다. 그 자체를 충돌로 보자 이 말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 자체를 충돌로 본다면, 지금 예수님한테 문제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러면 나는 (   )로 구원 받은다. 할 때, 뭐가 문제 있는 겁니까? 바로 우리가 문제 있는 거예요. 이걸 사도바울은 육이라 한 겁니다. 니가 육이기 때문에 영을 못 알아본다는 거예요. 육인데 자기들은 영으로 인정한 거예요. 자기 자신을 구원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인간들이 오해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을 체포했지요. 자기는 율법의 대리집행자로 간주한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남의 정의가.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간통한 여인을 주님한테 끌고 왔지요. 유대인들은 괄호 쳐 놨습니다. 우리는 법의 집행자로서 돌로 쳐 죽여라를 괄호열고 거기다가 간통한 여자를 집어넣었어요. (이런 여자는 율법에 의하여 돌로 쳐 죽여라 했으니까)우리는 이미 돌을 던졌어요. 돌을 들고 당신이 우리한테 동의할 거야? 말거야? 그것만 보고 동의하면 때려죽일 판이에요. 그 자리에서.

그 때, 주님께서는 “왜 했어? 왜 했어?”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나쁜 여자, 나쁜 여자 왜 했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주체를 지적하지요.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여자는 놔두고 이 괄호는 놔두고 바깥을 이야기하니까 사라져요. 하나 둘 씩 돌 던지고 사라지는데 버티고 있는 인간을 주님께서 땅에다가 글을 쓰니까 자기의 과거가 들어났는지 지가 먼저 간음했어, 없어졌어요. 괄호만 남고 다 사라져버렸어요. 

주님께서 그 여인을 심판합니다. 판정을 내리지요. 내리는 판정이 “너는 저주받을 자!”라고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판정을 어떻게 내리는가 하면, 판이 이미 바꾸어진 언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씻을 때, 십자가 완성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나오는 판결을 그 여자에게 미리 줘버립니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 이게 사실은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그 판결을 그 여자는 미리 받은 거예요. “내가 너를 용서한다.” 왜냐? 착해서? 노우, 잘해서? 노우, 뭘 이야기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자유를 출애굽하기 위해서. 죄로부터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온 자가 바로 나다! 따라서 이 세상이 죄라고 규정했던 네가 나에게는 필요했던 겁니다.

또 한 가지 예가 뭐냐 하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 나오지요. 소경된 자는 저주받은 거예요. 문둥병, 소경 등등... 날 때부터 소경될 때, 제자들은 기존의 유대인의 사고방식 속에 있어가지고 “저 사람이 저주 받은 것은 자기 죄 때문에 그럽니까? 부모 죄 때문에 그럽니까?” 자기 죄 때문에 같으면 에스겔에 부합되고요. 부모 죄 같으면 출애굽20장에 해당됩니다. 부모가 죄를 지으면 3, 4대까지 죄가 이르고, 에스겔의 언약에 의하면 부모는 부모 자기 죄, 자식은 자기 죄, 따로 따로 받지, 연좌 죄에 해당되는 거예요.

언약은 주님 자체가 언약이잖아요. 그러면 부모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하는 그 판을 가지고 와요. 그 판 자체가 사실은 새로운 판에 의해서 깨질 판이거든요. 옛 술은 옛 부대에 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데 새 부대는 새 술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야 돼요. 옛 술과 옛 부대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필요해요. 주님은 우리 육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내가 착하게 살고 뭘 어떻게 행동하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것, ‘나는’문제없어요. 나는 그 다음에 괄호열고 (부처를 믿을 것인가? 예수를 믿을 것인가? 이슬람을 믿을 것인가? 마호메트를 믿을 것인가?) 우리는 그것만 남겨둔 거예요. 대입할 것만 남겨둔 거예요. 고 판을 갈아버립니다. “니가 문제야, 구원자격도 없는 게 구원 받고자 하는 니가 문제야.” 하고 판 자체를 갈아버리기 위해서 ‘나’라는 자리에 누구를 집어넣는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죠.

그러면 나는 주어가 아니고 저 술부로 밀려버립니다. 주어 자리는, 내가 차지했던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겨있어요. 예수님이 담겨버리면 그건 악마의 주장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라,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왜냐, 예수님의 존재는 곧 신의 존재를 대행하는 같은 이미지로서 그냥 대입할 뿐이거든요. 인간은 어떤 이미지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신의 자리에다가 뭘 집어넣어도 만들어내요. 자기만 안 다치고. 그런데 예수를 믿어버리면 예수 믿는 자기는 훌륭한 자신이 돼요. 여전히 훌륭해요.

그런데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면,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거든요. 그러면 세상 죄를 지고 가면 어린양만 높아지고 우리는 어디에 포함됩니까? 그냥 세상 죄 속에 포함돼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동안 우리는 죄인인 주제에 구원받고자 했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 구원받고자 한 것도 뭐가 된다? 죄가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거예요. 죄인인 주제에 구원받고자 한 엄청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데, 누가 했느냐? 배후에서 악마가 죽는 게 무섭지? 예수 믿으면 산다고 뒤에서 부추겨 오는 거예요. 과거에는 예수는 내 구원 받기 위한 용도로만 활용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증인되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고, 이 만큼 살아야 되고, 죽으면 끝난 거예요.

주어가 내가 아니고 이미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주어가 되는 겁니다. 어느 신학 책이든 보세요. 전부 다 예수님의 존재가 주어가 되는 이유가 주님이 존재가 되면, 그걸 파악하는 것은 바로 나의 존재입니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돌아오게 되면, ‘역시 나는 잘 났어!’ ‘내가 예수를 다 믿다니 역시 나는 애초부터 훌륭했었어.’이리 된다니까요.

그런데 야곱 같은 경우는 판 갈이 했지요. 하나님께서 사다리타고 복 준다고 하니까 “역시 나는 그 때 형의 자리를 잘 뺐었지. 엄마가 도와주긴 했지만. 역시 내가 애초부터 뛰어놀 때부터 알았어. 팥죽 준비할 때부터 알았어.“ 다 노리고한 계산이거든요.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어떻게든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싸웠잖아요. 싸웠는데, 자기는 ‘을’이 되고 형이 ‘갑’이 되고, 그러니까 형은 미운 게 아니고 나를 ‘을’이 되게 했기 때문에 형이 미운거지 형 자체는 밉지 않아요. 나를 ‘갑’으로 만들지 못한 것은 형의 존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형을 미워하는 것은 형을 미워서가 아니라 내 존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게 야곱의 육적인 모습입니다. 혈육에 속했기 때문에. 이걸 하나님께서 판 갈이 해줘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복을 받는 게 뭐냐 하면, 자식 12명 낳고 많은 재산이 불었으니까 원천기술로 해서 완전히 살찐 것은 다 빼냈잖아요. 이걸 축복으로 간주한 거예요. 그러면 그 축복을 간주한 것은 축복은 내 소유니까 축복 속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은 나는 축복받아 마땅하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밤중에 괴한이 등장했잖아요. 그러면 그 괴한은 내 축복을 뺏어가기 위한 악마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분명히 이건 형의 밀사든지, 자객이던지 나를 죽이려고 보낸 거예요. 왜냐 하면, 얼마 전에 400명 데리고 가까이 근접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경계근무를 섰다 말이지요. 5분 대기조로 대기하고 있는데, 어디서 낯선 사나이가 등장해 오니까 이건 뭐냐, 드디어 저 쪽에서 기습하고 공격했구나, 정탐꾼을 보냈던지, 그러면 야곱이 지켜야 될 게 뭡니까? 나는 복 받은 사람이고 그러면 내게 준, 허락한 것은 복이라고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나를 공격한 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공격한 것이 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하여 그 오는 괴한을 맞서 싸웠잖아요.

이거 중요합니다. 야곱이 단순히 자존심 상해서 싸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을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이 나라를 누가 지키랴, 축복은 내가 못 지키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는 누구 편이에요? 철저하게 하나님 편이에요. 사력을 다하여 죽으라고 그 괴한에 대해서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해석이 여기서 굉장히 복잡하고 난해한데, 처음부터 천사가 환급 뼈, 남자의 생식기 근처거든요. 이걸 처음부터 왜 치지를 않았지요? 처음부터 한방에. 누구 3회전 봐 줄일 있습니까? 이게 어디를 천사를, 한 방에 칠 수 있잖아요. 왜 한방에 안  칩니까? 마음껏 까불게 하지요. 마음껏.

그런데 그 마음껏 까부는 것이 목적이, 방향이 있었던 겁니다. 그 방향이 뭡니까? 누구라도 나의 존재, 야곱의 존재로 하게 되면 곧 하나님의 축복을 뺏은 걸로 간주해서 나는 너를 죽여 버린다. 죽을 때까지.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 해 보자, 까짓 거.” 그러니 인간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한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구원받습니다. 왜? 예수님을 죽이는 그 순간 우리는 진짜 내 모습은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런 몸을 혈육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발각되거든요.

그러니까 제자가 제일 제자다운 모습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겁니다. 도망갈 때, 가장 제자다운 거예요. 그렇게 제자다움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주께서는 자기를 배반한 그것도 저주한다는 그 베드로를 주께서 찾아와 주시잖아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왜 안 찾아옵니까? 그건 주님 마음대로지요. 주님 마음대로가 그 소리 들을 때, 우리는 “그래, 나는 잘 났어.”가 아니라 얼마나 부끄러운지 몰라요. 주님 마음대로 했으면 지옥가도 우리는 할 말이 있다? 없다? 할 말이 없는데, 주님 자기 마음대로 해서 우리는 구원받는 거예요. 이건 달음박질 한 것도 아니고 이건 내가 부르짖는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오직 불쌍히 여김으로 구원받았다는 로마서 9장의 말씀, 그게 우리의 체험 화, 우리의 삶이 돼요. 그 자체가 평생의 삶이 돼요. 2013년도뿐 아니라 2014년도, 2015년도 계속해서 느끼는 것은 뭐냐, 달음박질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여전히 불쌍히 여김은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성을 지닌 육신을 우리는 품고 있는 거예요.

야곱이 끝까지 싸우게 한 것은 두 번 다시 야곱의 이름을 미련을 갖지 말게 하기 위한 시간적인 벌기였습니다. “니는 날 죽이려고 했잖아.” 심지어 그 괴한은 날이 동트면 정체가 들어납니다. 따라서 그 전에 자기 정체는 안 밝혀지고 야곱의 정체만 밝혀지고 떠나야 될 임무를 띠고 온 천사에요. 그런데 야곱은 한방 맞고 난 뒤에 천사인 것을 알고 야곱의 정체가 드러나든 말든 관계없이 천사를 붙들고 하는 소리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말은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이미 지옥에 있습니다.” “지옥까지 방문한 천사여! 전에는 나를 지키려고 살았는데, 이제는 이게 아니면 안 되니까 죽어 마땅한 나를 바지가랭이 붙들고 ”살려주세요.“라고 한 것이 호세아에 보면, 야곱이 울면서, 왜 울었겠어요? 지를 아니까.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놈인가를 아니까. 지가 잘난 체 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가 아니까. 울면서 바지가랭이 붙들고 우는 거예요. 살려달라고. 복 달라는 게 아니고 원상회복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맏이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맏이 해달라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살려주세요, 하는 거예요.

에서라는 형이 있을 때는 “니가 잘했어? 내가 잘했지.” 이리 되지만, 진짜 심판 주를 만났을 때는 형이고 동생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최후의 중요한 분을 만났으니까 살려주세요,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형이 왔을 때, 7번 절을 하면서 용어가 뭐냐 하면, “나의 주여, 당신이 형이 아니었으면 내 자신이 누구인 줄 몰랐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지도 못할 뻔 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나의 더러운 속내가 당신과 쓸데없이 경쟁한다고 다 들통 났습니다. 그런데 이 들통 나게 한 것이 바로 주의 뜻이었습니다.”

이제 은혜 받고 난 뒤에는 마음껏 양보할 테니까 가져가시려면 다 가져가세요, 할 때 에서가 하는 말이 “나 안 받을게.” “아이고, 가져가시라니까요.” “나 안 받는다니까.” 갑자기 형제간에 화해가 돼요.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뭐한다? 하나님께서 화목제물 된다. 도대체 화목제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완전히 쪼다가 되고 멍청이 다 돼야 돼요. 여기서 화목제물로 내려가면 우리의 존재는 인정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완전히 개, 돼지 다 돼버려요. 인간도 아니지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이건 인간도 아니지요. 

살려주세요, 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란 뜻이에요. 이제는 처벌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살려주면 사는 거고 안 살려주면 할 수 없는 거고, 바로 그 광경을 주님께서 언약을 만들어서, 십자가로 만들어서, 십자가 피로만 복음으로만 액기스 만들어서 십자가 담았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설 때에 바로 나 라는 것과 악마에 속한 나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틈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서로 양보가 없는, 서로 좋은 식으로 합의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면서 십자가 피가 튀어나오지요. 마그마처럼. 지진이 갈라지면 거기서 마그마가 올라오듯이. 피가 튀어 오르면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주여, 살려주옵소서.“ 하는 말 밖에 할 게 없어요.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타고난 게 그거에요.  타고난 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는 그런 혈육으로 태어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2장에 혈육으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꼼짝 못하고 마귀의 종노릇해서 살았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 자손을 붙들었다, 이 말은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 인간이 혈육인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그런 기능을 과거에 해왔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도 여호와 안 믿지요. 그런데 이방인들에게는 아무 손을 안대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좀 원망하고 이러니까 하나님은 누굴 벌꺽 화를 냅니까? 자기 백성에게는 예민하게 반응하지요. 그렇잖아요. 그게 아브라함 자손의 기능이 그 기능이에요. 저 쪽은 그냥 하나님 믿어도 조작된 거니까 그건 가만히 놔둬도 괜찮아요. 여기는 이스라엘은 진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진짜가 진짜 값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 위반되면 즉각적으로 하늘에서 징벌내리고 갑자기 벌 내리고 난리 납니다. 그게 아브라함 자손의 기능이에요. 아브라함 자손이 됐다, 하는 것은 자랑스러워 할 게 아니고 이제 죽었다, 복창하면 돼요. “아이고, 참 하나님은 매일 내 멱살 쥐고 흔들 분일 것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뭐가 나옵니까? 내가 너를 징계하는 것은 니가 내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 아들이기 때문에. 니가 사생아가 아니기 때문에 니한테 징계하지. 그런 이야기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옛날 이스라엘 기능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16절 다시 봅시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되어 있지요. 징계, 사생아 하는 게 히브리서12장에 있지요. 형제이야기는 저번에 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 하니까 형제란 의미를 해봅시다.

형제란 의미는 이 땅에서 구멍을 판다는 것으로 했지요. 지금 우리는 형제 혈육이 있잖아요. 꼭 우리 집안에 없더라도 같은 대한민국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단군의 자손 형제 아닙니까? 여기에다가 구멍을 파는 거예요. 가족이 민족이 되고, 민족이 모여서 국가가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의식의 주체화’라고 어렵게 표현해요.

여러분, 가정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가정이라는 것이 우리 의식에 있어요. 왜냐 하면, 가족이 가정으로 변화는 것은 우리 의식이 동원되는 거예요. 그걸 ‘주체화’라고 해요. 주체는 내가 주체잖아요. 요거는 내 가정이야, 할 때는 내가 그 가정에 나의 주체를 대신할 집단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식이 애를 먹여서 남한테 사기를 쳐가지고 유치장에 가있다. 그러면 엄마가 화를 내며 면회 가면서 “나는 니를 자식으로 생각 안한다. 호적에서 파가라.” 이리 한다고요. 니를 내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자기의식의 주체화에서, 너는 나의 의식의 주체화를 니 같은 인간이 와서 훼방하고 방해했다는 겁니다. 의식의 주체화가 가정이라면 이 가정은 누구 뜻대로 되는가 하면,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내 뜻대로 이루어질 때만 나는 아주 행복한 가정이라고 해석하겠다고 보는 거예요.

부부가 이야기하게 되면, 서로가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려고 해요. 남편은 아내를 남편이 부리는 대로 다루어지기를 원하고 아내는 남편이 자기 원하는 대로 다루어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에게 “아이고, 참 이쁘다,” 할 때 뜻은 뭐냐 하면, 요거 내 Pet이다. 애완동물, 요거 내 뜻대로 갖고 놀겠다 싶을 때는 그걸 귀엽다고 하지요. “아이고, 귀여워” 그런데 귀여운 개한테 몰려봤습니까? 그럴 때 가정이라는 이 주체화가 눈물을 흘려지지요. 왜 내가 원하는 가정은 이런 가정인데 저게 예쁜 개가 내 말 잘 듣는 귀여운 개가 언제부터 와가지고 달려들고 저렇게 해가지고 나의 주체화를 훼방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가정폭력 이런 게 있거든요. 4대 폭력 중에 가정폭력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뭐냐 하면, 내 가정에서 해결 안 되면 국가에다가 호소를 하지요. 경찰이 와서 해결하기를 원하지요. 민족이란 같은 친척이라 보면 되고 같은 혈족이니까 그것도 안 되면 국가의 경찰력에다가 호소하는 거, 명절날 가서 “우리 그이가 자꾸 나를 때려요.”하면, 삼촌이 “이놈!”하고 집안이 나서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는 우리 같은 집안이니까. 집안이니까 이것도 의식의 확대된 주체화지요.

그것도 해결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국가에 해결하는 거죠. 바로 이것이 나라는 주체가 확장되고 의식이 주체되면 이렇게 발전하는 겁니다. 요게 바로 마귀에요. 요게 나중에 국가에서 멈추면 괜찮지요.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천국까지 이어져요. 천국에 골프채 들고 골프 치러 가는 사람들이에요. 천국이 지 세상인 줄 알고.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 형제란 형제가 아니지요. 형제라 할 때는 뭐냐 하면, 구멍을 팝니다. 주체에다가 구멍을 파버려요. 구멍을 파버리면 졸지에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한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으로 구멍을 파버려요.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할 때,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요게 형제 되기에 시작이거든요. “그냥 나는 주님을 형제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쉬운데, 그게 아니고 삽질을 해서 이걸 옴팍 구멍을 파버려요.

사람이 목욕탕을 갈 때, 탈의실에서 옷을 벗잖아요. 옆에 있는 아저씨가 멋도 모르고 바쁘게 들어가다 보니까 내 바지를 밟았다. 그런데 내 마음이 왜 아파요? 바지가 무슨 신경이 있습니까?  내 마음이 왜 아플까? 이상하지요. 그냥 옷인데, 섬유인데, 내 마음이 왜 아픕니까? 조금 전까지 내 몸에 걸쳤잖아요. 인간의 의식의 주체화속에 누가 숨어있습니까? 오직 나는 나만 사랑한다는 게 있더라 말이지요. 야곱이 아들하고 축복 지키려고 누군 줄 모르고 무조건 싸웠잖아요. 결국은 야곱의 죄악된 기억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자기 요셉의 두 아들 할 때 축복할 때 어떻게 축복합니까? 어긋나게 하지요. 그게 하나님의 판 바꾸기에요. 나도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축복할 것은 복 준다, 소 준다, 양 많이 준다, 돈 주는 거 이게 축복이 아니고 판을 바꾸는 그것만이 축복의 시작이고 끝이에요. 하나님 앞에 살아남는 것이 땡잡은 것이지,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 아닙니까? 이 땅에서 호호, 헤헤 거리는 거 까부는 거, 다 소용없습니다. 그건 자기의식의 주체화밖에 안돼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말씀을 가지고 삽질해서 구멍을 파버립니다. 구멍을 파버리면, 우리는 “아이고, 저건 내 아들인데, 아이고 저건 내 남편인데, 우리 아버지 장례는 치르고 가야지.” 특히 부자청년은 어떻습니까? 제가 착한 일해서 구원받겠습니까? 하니까 모든 걸 다 팔고 나를 따르라, 하니까 근심되는 거예요. 돈을 줘버리면 그 돈은 “아이고, 내 돈이었는데.” 조금 전까지는 나를 걸쳤던 나를 나답게 만들었던 내 벗어 놓은 바지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그거 밟히니까 아이고, 그럼 나는 주님 안 따라간다. 영생포기하고 그거 따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게 마지막 남은 어려운 점인데요. 요거하고 마치겠습니다. 뭐냐 하면, 이게 마귀에게 잡혀서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하잖아요. 마귀에게 잡힌 것은 해결책이 없어요. 분명히 아셔야 돼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건 마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혈육에 속한 사람은 혈육 자체가 마귀한테 지배받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은 안 되는 걸 되게 하기 때문에 얼마나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납득이 안 되고 거친지 몰라요. 왜, 우리가 쉽게 이해될 거 같으면 우리가 언제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못하는 방식을 가지고 되게 하시니까 그 방식이 우리한테는 어리석게 보이고 무모하게 보이고 참 주님께서 일하신 거 보니까 진짜 마음에 안 들어요. 전혀 마음에 안 들어요. 왜냐, 우리가 관계했던 것을 끊어야 되니까.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이건 말씀으로 다 끊어요. 돈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를 미워한다. 세상에 그런 것을 붙여 놓은 그런 회사 봤습니까?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것은 봤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면 회사를 미쳤다고 만듭니까? 돈 때문에 만드는 건데.

주님의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평생 동안 계속해서 안 된다는 소리를 해요. 안 돼! “내가 요번에 헌금했습니다.” “글쎄, 그거하고 구원은 안 된다니까.” “제가 전도를 12명 했습니다.” “글쎄, 안된다니까 왜 자꾸 쓸데없는 짓하고 있네.” “요번에 성경공부 참석했습니다.” “그거 안 된다니까.” “성령 받으려고 충만히 기도했습니다.” “쓸데없는 짓하고 있네.” “왜 니가 납득이 되는 짓을 하느냐, 니가.“ ”예수를 사랑합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안돼요. 끝까지 안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벗어놓은 그 바지에는 뭐가 묻어 있느냐 하면, 바지 안쪽에 보면, 5년 전에 십일조 한 게 담겨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가 다 나를 위한 사랑했던 과거들이에요. 그걸 노동의 산물이라 하는데, 노동의 업적과 결과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습니다. 고거 챙기고 구원은 구원대로 받고. 자꾸 이런 계략을 치는데, 다 쓸데없는 겁니다.

결론내리겠습니다. 우리는 평생 쓸데없는 짓만 하는 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여러분, 면류관 준비 받았거든 면류관 후딱 주님 발 앞에 제발 빨리 선착순으로 던져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인간을 십자가 피로만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자신의 피를 우리와 안 섞이기 위해서 그동안 안 돼! 라는 말을 그렇게 한 겁니다.  안 돼! 그렇게 해 오신 거예요. 우리는 뭘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계속해서 우리는 의미를 두려고 해요. 그래서 이제는 의미 두는 것은 니 자유인데, 의미 둔 그것조차도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 니는 못하지만, 나는 해낸다. 라는 것이 믿어진다면 놀라운 사실은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이게 믿어지는 거예요.

아까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리면, 땅에서 하늘나라 가는 이런 십자가 아니라고 했지요. 반대라고 했지요.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위에서 하늘부터 시작해서 땅으로 내려온 십자가에요. 안 돼!를 통해서 우리를 십자가 안에 십자가로만 크게 보이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 시간 끝나면 안 돼! 생활을 죽을 때까지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서 구원 받는 것이 우리 힘으로 안 되고 하나님께서 작정된 사람에게만 영생주어서 주께서 그걸 노리고 오직 자신의 피 복음을 우리에게만 전달시켜 주신 그 결과인 줄 압니다.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사오니 이것이 나의 원인을 섞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