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측정의 오류(히4;12) 1310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5. 26. 18:58

2013-10-12 00:58:52 조회 : 1509         
측정의 오류 131011 이름 : 이근호 (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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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3.179) 13-10-26 15:39 

안양131011a-히4장12절(측정의 오류)-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4장12절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말씀이 운동력이 있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말은 육신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모르는 게 없다는 말이에요. 또 뭐가 모르는 게 없느냐 하면, 우리가 육신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것도 이미 예수님이 경험 다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그냥 계시면서 너희들이 알아서 잘 오너라, 이게 아니라 직접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우리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이 세상에서 삶의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이 세상이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이 땅에 저주가 작용해요.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하나님께서 그냥 추방하신 것이 아니고 마치 군대훈련 보면 화생방 훈련하는 게 있거든요. 창고에 집어넣고 가스를 넣어서 견디는 훈련을 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시켜 놓데 그냥 추방시켜 놓지 않고 빈터에다가 알아서 살아라, 이게 아니고 거기다가 저주라는 가스탄을 터트린 거예요. 그러니 터트리니까 그 자체로 이미 죽은 거죠. 이미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그 죽는다 할 때 꼴까닥 하고 죽는 게 아니고 실컷 고생 고생하면서 서서히 사람이 말라 비트러지도록 만드는 거예요. 서서히 조아가면서 고생할 거 다하고 저주 받을 거 다 받고 이마에 삐질, 삐질 땀 다 흘리고 애기 낳는 해산의 고통과 남자한테 구박받고 하는 그러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을 다 겪게 하고 죽게 하지요.

그렇다면 죽음이란 것이 내 목숨 끊어진 게 죽음이 아니고 이 살아있는 게 죽음입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살다가 죽는 게 죽음이 아니고 살다가 그만 나이 들어 죽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요거 자체를 죽음이라고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저주라는 가스통을 터트린 거예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이 세상사는 자체가 죽음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요.

이런 게 어려워요. 죽음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숨 끊어지는 걸 말하잖아요. 하나님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저주 속에서 사는 것을 죽음이라 하는 거예요. 지옥에서 사는 게 죽음이고 죽었다가 다시 지옥가기 위해서 다시 부활되는 게 그게 죽음이에요. 너가 죽는다, 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인간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아~ 무섭지요?

하나님, 저 죽어요. 하면 하나님이 나는 그 딴 거 모르겠고 니가 죽든 살든 모르겠고 죽음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나는 기어이 너를 살려내겠다는 겁니다. 죽음이 뭔가를 위해서. 그럼 인간들은 내가 숨 끊어지면 죽음 아닙니까? 아니야, 그건 니 생각이고. 그래서 이 죽음이란 것은 어디에 기초해서 죽음이 나오느냐 하면, 우리가 아까 봤던 히브리서 4장11절의 오늘 본문 말씀처럼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의한 죽음을 우리가 오해하는 죽음과 만나도록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암벽타기 해보면 높이 올라가보면 밑에 보면 야, 이게 줄 끊어지면 죽겠다. 들잖아요. 암벽 타는 게 죽는 거예요. 암벽 타는 거 보면서 밑에서 안 올라가고 구경하는 게 죽음이에요. 전부 다. 전부다 산다는 자체가 죽음이에요. 왜냐 하면, 어디에 근거해서? 말씀에 근거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모르니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말씀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몰라요. 마귀가 말씀을 외면하도록 그렇게 조치하기 때문에 죄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제시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그냥 왠지 낯설다 하는 느낌. 굉장히 낯설어요. 말씀이 들었다 놨다 해요. 말씀이 요물 같아. 왠지 말씀이 낯설어요. 낯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셔가지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이 말을 방금 강의대로 한다면 더 쉽게 하면, ‘죽음은 살았고 죽음이 낯선 검이 되어서 살아있는 나를 계속해서 모든 것을 쪼개서 죽음의 위력을 우리한테 실감나게 만드는’ 그 작업을 말씀이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더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죽음 안에 갇혀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죽음 밖에는 뭐가 있느냐, 죽음 밖에는 11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나니” 죽음 밖에는 안식이 있고, 이 세상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 그리고 안식. 안식 그리고 죽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죽었다가 안식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죽었다가 죽음에 들어가느냐, 그리고 죽었다가 죽음에 들어가는 거기는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이고 죽었다가 안식 가는 것은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이고 그런데 왜 이상하게 안식 가는 길이 좁디좁은 길이냐 말이지요. 길이 좁으면 찾는 이가 없을 긴데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 안하는 게 아니겠어요? 사랑하면 많은 숫자가 안식에 들어가게 하든지 아니면 다 들어가게 하든지 100%. 사람 이리 다 들어와! 돼야 진짜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오히려 많은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작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적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얼마나 숫자가 적었으면 두려워하겠습니까? 5000명  교인 앞에서 자기 집안 식구하고 같이 예배드리는 것하고 똑같이 마찬가지예요. 그걸 보면서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렵다는 말은 저쪽은 주의 목사 같고 나는 목사 안 같은 느낌이 든다 말이지요.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각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을 지옥가게 하고 왜 극히 소수만 찾는 이가 거의 없는 가끔가다 한명씩 좁은 길이 좋다고 영생의 길로 가도록 왜 그렇게 하실까요? 

우리가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이 수가 적어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 12족속 들어갈 때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숫자가 많지 않음에 겁을 집어먹고 되돌아가려 했잖아요. 이스라엘 자체가 많은 민족들보다 극히 적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많은 민족들 있지만 너희만 택하여 세웠다. 이렇게 해서 그러니까 숫자 적은 것 가지고 기죽지 말라. 되겠지요. 그리고 노아방주 크게 만들어놔도 들어가는 사람은 8명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그 당시에 희박해도 15명이상은 많을 게 아닙니까? 16명 가운데 8명 들어가면 과반수는 들어가는데 아무리 숫자가 적다할지라도 16명은 더 될 거예요. 주민들 숫자가. 그렇다면 이것은 과반수도 안 된다 말이지요. 과반수는커녕 0.001%도 안 된다 말이지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한 분이죠. 전 세상 인구가운데서 예수님은 몇 분입니까? 달랑 한 분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분만을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 해가지고 진짜 아들로 봤다 말이지요. 모든 걸 다 이루신. 그런데 이쪽에 보면 이쪽의 숫자가 많고 저쪽에는 적다고 예수님이 이야기 하셨는데 사실은 이쪽의 숫자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명이에요. 아담한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몇 명? 한 명. 주님께서는 숫자를 보지 않아요. 뭘 보느냐 하면, 이 한명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들 숫자를 포기할 수 있는 집단만 구원받습니다. 한명을 위해서.

신천지가 원했던 것은 이 만희씨가 원했다는 것은 자기만 보혜사고 나머지는 아니기를 원하겠죠. 지 말고 또 보혜사 있으면 조직이 둘로 깨지니까. 예수님도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하는 그 하나, 그 하나 때문에 예수님 본인도 하나 됨을 포기해야 돼요. 이쪽 일을 포기하고 예수님 하나에 속해야 됩니다. 그러면 숫자로 몇 명이냐가 아니라 우리는 이쪽에 있어도 한 명이었고 저 쪽에서도 한 명인데 왜, 한 명만 의지하고 하나만 바라보고 하나만 기대하고 하나만 믿기 때문에 나는 안 믿기 때문에 나는 숫자로 치지 말아주세요. 이런 뜻이에요. 우리 식구 4명입니다. 4명으로 치지 마시고 어쨌든 구원받으면 4명이 되더라도 그건 몇 명입니까? 하나에 속하지요.

노아의 8명은 8명이 아니고 하나에 속해요. 한명이 아니고 하나에 속해요. 하나! 이스라엘은 그냥 하나에 속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아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에 하나님께서 같이 편들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은 하나만 있으면 족한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있으면 예수님만 믿으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있으면 예수님만 믿으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몇 명이 됐던 상관없습니다. 예수 믿는 게 5명이고 저 쪽에 안 믿는 사람이 5억명이라도 주께서는 5억명이라도 쳐주지 않고 하나로 보고 이쪽도 5명이 아니고 하나로 보는 겁니다.

그 하나에서 12 나왔고 12에서 또 12나왔고 12를 두 번 천 번을 계속하니까 이게 숫자로  144,000되는 거예요. 12에 12를 곱하기 하면 사실은 144,000이 아니고 무한대겠지요.  12¹²승을 하면 숫자로 하면 0이 엄청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144,000이라 한다고요. 12에서 12 1000으로 곱했다는 말은 그 만큼 무수히 많다는 거예요. 무수히 많은데 그 무수히 많은 것도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무수히 많더라도 몸은 무수히 많은 몸이 아니고 달랑 한 몸, 머리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사랑도 하나요, 교회는 몇 군데? 교회도 하나요. 그래서 이쪽이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이쪽도 하나입니다. 아담에게 속한 하나, 하나에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이쪽도 하나고 이쪽도 하나다 말이죠. 1:1로 보면 돼요. 예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 말고 다른 건 전부 다 예수님께 벗어난 하나입니다. 이렇게 종합정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계속 이야기해봅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돌아서면 또 다 잊어버려요. 하나를 가위로 잘랐으니까 적지요. 하나하고 붙여보세요. 전부 다 하나로 연결되면 둘, 셋, 이란 의미 없고 세 명 모여도 하나고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만 있으면 세 명이든 네 명이든 든든합니다. 아침에 호박죽 하나 먹어도 든든하듯이. 예수님만 있으면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든든하지요. 노아방주에 있으면 든든하지요. 바깥에서는 감기 들려가지고 지금 사람들을 소각하고 있는데.(‘감기’영화에서) 그렇잖아요. 감기 들렸지, 풍랑 일었지, 노아방주 안에 들어오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예수 안에 있으면 됐지, 그 안에서 숫자 헤아릴 게 뭐가 있어요. 없지요. 일단 예수 밖에 있을 때는 숫자가 자꾸 걱정이 되지만, 들어오게 되면 숫자를 잊게 됩니다. 몇 명이냐가 아니라 뭘 바라보느냐, 제가 대전 시민대학 강의하면서 계속해서 지금 중세, 유럽역사 공부하고 있는데 공부하면서 느낀 점이 천주교고 교회고 문제가 뭐냐 하면, 구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천주교 제도, 교회 제도, 그거 5000명, 10000명 모아놔도 구원이 안돼요. 구원이 될 거 같으면 저도 그렇게 하지요. 목사, 장로, 집사 계급세우고 예배당 짓고 위임식도 하고 성찬 세례 다하고 하여튼 지금 천주교에서 나온 그 역사대로 개신교도 천주교에서 나왔으니까 천주교 하는 그대로 하고 개신교는 약간 변경해서 단출하게 만들어서 하고, 그렇게 해서 구원이 될 것 같으면 하지요. 구원이 안돼요. 문제는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이 문제에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무시하면 그냥 세상 교회식대로 하면 돼요. 무시하면. 그러나 저는 그걸 아는 이상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내 몰라라하고 무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복음을 듣는 사람한테는 구원이 되도록 성령께서 복음을 줬기 때문에 주께서 듣도록 하실 게 아닙니까? 하신다면.

거기서 무엇이 구원을 방해하는지를 제가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 기존의 교회하고 성당하고 구원이 안 되느냐, 그걸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왜 구원이 안 되는가만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구원이 어떻게 되느냐가 더 중요하겠지요. 그러면 교회도 아니다. 성당도 아니다. 주일날 교회 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수요예배 참석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공부 참석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방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말씀이 당신을 이렇게 구원해 주시는 것을 확인하는 그 모임이 중요하다고 봐요.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복음 말씀밖에 없어요. 말씀이 살아있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말씀이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 아까 집사님은 살이 빠졌다고 하는데 나는 위가 빠졌거든요. 누구나 마찬가지거든요. 늙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누가 아느냐 말이죠. 의미를. 말씀 때문에 우리가 지금 죽은 채로 죽어가고 있거든요. 죽은 채로.

그러니까 그걸 어느 성경구절을 100점 맞았습니다. 가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말씀이 살아있는 걸 보여주는 증거로서 우리가 지금 계속해서 하루 일과가 부딪힐 게 부딪히고 일어날 사태가 일어나고 누굴 만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자전거 타다 깨지고 모든 것도 자전거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는 겁니다. 말씀이. 그것을 같이 나눌 수 있을 때 그게 바로 주의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제도? 형식? 절차?  의미 없어요. 말씀이 살아있으면 우리는 그 살아있는 말씀이 날마다 계속해서 죽어있는 존재를 죽어있다고 통보를 해주니까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살라고 하지 말라는 사는 것에 어떤 부담, 정신적인 스트레스 이런 것을 덜어주잖아요.

말씀이 이렇게 기억이 안 나게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또 스트레스 받습니다. 오늘 찬거리는 뭐하지? 해물탕 두 번 해주니 먹지도 않고. 시원한 거 해달라는데 뭘 해주지? 모든 게 전부 다 말씀만 안 듣기면 항상 또 뉘엿뉘엿 가을해는 지는데 저녁에는 찬거리는 뭐하지? 이런 거 생각한다니까요.

그런데 말씀이 살아있으면 오늘은 뭐해서 우리 식구들을 죽이지? 해물 탕해서 잡아 죽일까? 시원한 콩나물국으로 죽는 방법을 택할까? 콩나물에다가 농약 넣으라는 말이 아니고. 요번에는 침대를 한 번 바꿔서 죽어볼까? 이런 식으로. 다음 주에서 등산가서 죽어볼까? 항상 끝에는 뭐가 붙어있다? 뭐하다가 죽음을 보여주지? 뭐하다가 이거하고, 뭐하다가 꼭 살아야 되지? 이거하고, 이것처럼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보다 니가 살아있어. 니가! 니가 이리 하면 니가 죽어. 니가 죽으면 가족들 다 죽는 거야. 니가 무조건 살아남는 게 성공이야. 사는 게 장땡이야. 너부터 살고 봐. 마귀가 계속해서 그 이야기하고.

말씀은 내만 살면 돼! 말씀 나만 살면 되고 니는 그냥 죽어주면 되고 나만 살면 돼! 내가 살아나기 위해서 니는 제발 좀 죽어 줘.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어주잖아요. 그것은 예수님이 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여동생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시간 늦춰서 죽으려 할 때 안가고 죽고 난 뒤에 가시잖아요. 그게 남의 일이라서 우리는 편하게 듣습니다만, 우리 집안의 일이라면 우리는 기도해도 안 나으면 그 다음부터 예수 안 믿습니다. 그 정도로 마르다 마리아는 그렇게 예수님을 가까이 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 턱밑에 앉아가지고 말씀 들어도 그렇게 해도 막상 자기 오빠 죽으니까 그게 다 사실은 밑바닥에 어쩠든 사는 게 장땡이다 이 말입니다. 어쨌든 무조건 이 바닥에서는 살아남아야 그래도 무슨 한 소리라도 하지 죽으면 소용없다는 그 강력한 생존의지가 예수님을 시답지 않게 평소에 그렇게 생각들을 한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삶은 분노다.’ 산다는 자체가 교회헌금 한다는 자체가 주님 면상에 돈 뿌리는 분노에요. 이래도 나 안 살려줄 거요? 이래도 정말 안 살려줄 거야, 난 살고 싶은데. 내가 꼭 이런 짓거리 하면서 당신한테 삶을 부인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식에 분노의 표현이에요. 성경에서는 감사함으로 헌금하라 했는데 이것은 인간은 헌금하면서 지 분노의 발산이에요. 특히 젊은 애들,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분노에요. 게임에 졌다고 해서 아파트 불 질러서 3채를 태우고. 지가 인터넷게임 졌다고. 전부 다 분노입니다. 모든 범죄는 분노에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우리가 분노하게 하는가? 그것은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를 죽이고 우리가 죽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창세기4장에서 가인이 있잖아요. 가인의 편을 자꾸 들고 싶어요. 너무 솔직하니까. 창세기4장에 아벨은 양 기름 분류해서 제사 드린 거 외에는 다른 어떤 내용은 안 나와요. 맞아 죽은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안 나오거든요. 그런데 주로 하나님은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가인보고 이야기해요.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더 쓸모 있어요. 아벨보다도.

세상이 죽음이라는 세상을 보여주는데 가인이 더 쓸모 있어요. 그래서 가인의 세상은 뒤에 가인의 도시를 낳고 가인의 세상이 이루어지고 아벨은 아벨 대신 새 씨를 낳아서 누구는 죽고 태어나고 죽고 그 이야기만 있지, 사실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가인의 세계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지금 가인의 세계에 똘마니로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가인이 만든 이 제국에서. 그게 전부라고 여기고. 그래서 그 하는 모든 것에서 따지고 보면 다 분노, 내 인생은 안 도와줘도 내 혼자서 알아서 챙기겠다는 야무진 오기 같은 게 그게 폭발하듯이 젊은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도 말씀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지요.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이,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되는데 그 다음 13절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워요. 뭐냐 하면,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고 돼 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이유는 말씀 앞에 세우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거예요. 지음을 받은 인간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무식해도 너무 무식해요. 무식해도 보통 무식한 게 아닙니다. 무식한 게 용감하다고. 거리에 나가 보세요. 전부 다 용감한 사람들이에요. 말씀 앞에 서질 않기 때문에 전부 다 지 자랑 질하며 돌아다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지가 혼자서 지 자랑하던지 지 과시하던지 그런 거 일체보지 않고 어쨌든 저쨌든 간에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말씀 앞에 다 세워버립니다. 그러면 그들은 뭐냐 하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티를 그들은 완전히 노출되지요.

다시 정리합시다. 모든 지으신 것은 본인은 지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목적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고 내가 왜 여기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말씀 앞에 세워두기 위해서 지었다는 사실, 그러면 그 때부터 말씀 앞에 세워지게 되면 지으신 바가 말씀 앞에 바로 세워지게 되면 아, 말씀이 우선이고 지은바 된 나는 말씀을 위하여 나는 그냥 생겨나야만 되었었구나! 우리 엄마 아빠로부터 생겨난 게 다 이유가 있었네. 그것은 말씀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각자 자기 때를 따라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무식해가지고 대나무집에 가가지고 내가 내년 신세는 어떻겠습니까? 저 남자하고 내 딸하고 궁합이 맞겠습니까? 말씀 앞에 설 생각안하고 토정비결 앞에 세우고 점쟁이 앞에서 자기를 세우니까, 그 점쟁이가 마귀 아닙니까? 마귀가 오죽 잘 거짓말하겠습니까? 김 구라보다 구라를 더 잘하는데. 아니 목사보다도 구라를 더 잘해요.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이게 말씀이 전하는 대로 해야 되는데 아니면 자기가 구라가 돼버려요. 거짓말이 돼버려요. 성도가 누가 왔던 그건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지옥을 가던 왔다가 이 앞에 성당을 가던 어쨌든 그 시간만큼은 하나님이 보냈으면 말씀 앞에 서라 했는데 목사가 이사람 눈치 저사람 눈치 저 집사 눈치다 봐가지고 말씀을 전해야 될 걸 가지고 달래 줄 생각을 하니까 이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다가 매서 바닷물에 풍덩 집어넣는 그 짓을 하는 거예요. 제주도 심야 바다에. 해녀 같으면 떠오르기나 하지. 사람들 바다 속에 다 빠뜨려가지고. 그래서 그 사람도 죽고 자기도 마치 본문해석이 모호한데, 거짓말 친 인간이 사람들을 그렇게 바다 속에 빠뜨리는 해석도 되고요, 그렇게 하는 자 본인도 바다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그 말씀도 되고 둘 다 다돼요. 둘 다 빠지는 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말씀을 한다는 게 참 두렵지요. 그래서 이걸 생각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주일 오후에 기도 안하겠다고 빼는 이유를 내가 알아요.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니잖아요. 말씀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네요. 유구무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봅시다. 모든 지으신 것은 마귀가 됐든 모든 지으신 것은 말씀 앞에 세워두기 위해서 말씀은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음 받은 겁니다.

그 다음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를 상관하신다는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하나님 또 예수님 앞에 다 드러난다, 라는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히브리서 지었던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왜 했을까요? 자,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방금 한 이야기가 말씀은 살았다. 우리는 다 말씀 앞에 드러나기 위해서 지음 받았다. 우리는 다 드러난다. 말씀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쪼개서 완전히 노출된다. 라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말이에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측정의 문제, 측정한다는 것은 자로 재는 것.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눈알이 막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순간, 순간 측정해요. 저 사람은 나보다 나이 많겠다, 적겠다, 측정하죠. 저 사람은 지 아파트 넓을까, 좁을까 측정하죠. 저 애는 내 애보다 잘할까, 못할까 측정하잖아요. 모든 것은 TV에 나오는 나라가 나오면, 저 나라는 잘살까, 못살까 모든 걸 측정하지요.

마태복음7장1절에 보면, 판단하는 자는 본인이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본인도 비판하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비판한다고 해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전부 다. 제주도 근해에 있는 바다에 갈치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 갈치가 제주도 앞에 잡혀 나와서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둘 다 바다에 빠져있다면 갈치 둘은 둘 다 평가할 수 없어요. 한 쪽이 빠져나왔다면 에이~ 저건 아직도 빠져있네. 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처럼 말씀 앞에 설 때는 서로가 서로를 측정한다는 것이 이게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 말씀이 뭐냐가 중요하지 남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내가 남들 보기에 내가 이렇다, 하는 것도 안 중요하고 내가 남을 평가하는 것도 그것도 안 통하는 헛방이고 비현실적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걸 간추리면, 예수님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생각 안하며 살아라, 하는 말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냥 예수님만 생각하고 말씀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일체 생각안하면 되는 거예요.

모든 생각은 다 버리고 예수님만 생각하던지 예수님 말씀만 생각하던지 그것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유일한 측정이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가 성도가 됐으면 가끔 또 그런 걸 느낍니다. 혼자 끙끙하고 고민하고 남들이 날 무시할 때 진짜 침대에 엎드려서 울고 싶고 일어나기 싫어! 나가봐야 또 무시할 건데. 아이고~ 꼴 보기 싫은 것. 칼 있으면 죽이고 싶다. 그 인간 다 죽이고 싶어. 이런 분노 같은 게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생각, 생각, 측정을 내가 어떻게 알아서 한 거예요. 우리는 측정할 자격도 없고 측정할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내 중심으로 내가 생각한대로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측정하고 그것 때문에 남을 비판하기도 하고 남한테 비판 받기도 해서 우울해가지고 약 먹고 하는데. 측정의 문제에서 손 떼라는 거예요. 본문에서. 바로 이 말씀을 한 것은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하지, 니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말이죠.

우리가 구원에 못 드는 이유가 우리가 구원하는 방법을 몰라요. 안다 할지라도 실천의 능력도 없고. 피자 판을 누가 사왔다고 봅시다. 애가 4명이 있다고 할 때 자, 어떻게 가르지? 할 때, 애들이 다 나이차이가 있으니까 적은 아이는 적게 주고 큰 아이는 크게 주고 할 때, 피자 본인이 손들어서 이렇게 잘라주세요 하는 것은 없지요. 그것은 둘러앉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처럼 말씀이 결정해야 되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5장18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라고 했지요. 요 측정, 요 평가 누가 내린 겁니까? 우리가 내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내렸지요. 그렇다면 반드시 이렇게 됩니다. 되니까 내가 세상과 격리되고 싶다든지 내가 지리산 들어가느니 이런 짓 하지 마세요.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 살아도 주께서 이렇게 세상 속에 속하지 않았다고 이미 주께서 내린 판정에 대해서 우리는 믿으면 돼요. 내가 스스로 세상에 속했느냐, 안 속했느냐 내가 따지면 안돼요. 따져버리면 우리는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속한 자가 아니라 해놓고 말로는 그렇게 조정해 놓고 뭔가 일이 좀 잘 풀리면 자랑 질하고 싶어 또 환장하지.

측정을 요한복음15장19절이 측정해야지 내가 나를 측정하면 안돼요. 세상에 너희가 속한 자가 아니요, 라면 아! 속한 자가 아니구나!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대로 한다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거울 앞에 말씀 앞에 설 때, 말씀의 손가락이 나와 가지고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했잖아.” 우리는 “아멘.” 이러면 되지, 그게 바로 아! 내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구나! 다 쪼개지는 거예요. 골수와 관절 전부 다. 속속들이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야!” 라고 해부하게 되면 우리는 아! 말씀이 살았고 나는 말씀 살아있는 것을 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벌거벗은 채로 앞에 등장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말씀 앞에서는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면 돼요. 괜히 주섬, 주섬 옷 입지 말고 그냥 말씀 앞에서는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다고 보면 돼요. 화학 실에서 실험할 때, 저도 화학과 나왔는데 실험실에 알아보면 그냥 멀건 물 같은데 끓어버리면 나중에 노란 앙금 같은 게 나와요. 물속에 녹아있는 앙금이 나오거든요.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위선을 증발시킵니다. 증발시키면 남는 것은 말씀만 남아요. 예수님의 측정만 남아요. 우리 인생은 휘발성이 있어가지고 하루 살면서 머리카락도 빠지고 전부 다 날아가야 돼요. 머리카락이 휙 날아가야 돼요. 우리의 기억력이고 낭만이고 추억이고 자식이고 딸이고 전부 다 시집가고 주위에 다 날아가야 돼요. 친구도 일찍 죽고 다 날아가야 돼요. 날아가면 남는 게 있어요. 앙금처럼 남는 것. 그게 바로 그동안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라는 그 말씀이 남아요.

우리는 항상 말씀이 말씀대로 되기 위한 그러한 증인으로서 이 땅에 세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왜 사도가 이런 이야기하느냐, 사도 본인이 그러니까. 본인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았어요. 여러분, 저는 말씀 앞에서 벌거벗었습니다. 여러분도 벌거벗었지요? 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자, 14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제사장이 있으니“ 야, 이거 설명해야 되겠어요. 큰 나라, 그 다음에 뭐가 됩니까? 큰 대통령? 아니지요. 큰 검찰총장? 아니지요. 큰 국회의원? 아닙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우리 형님이라면 참, 누나라면, 언니라면, 아마 히트칠거예요. 우리는 백이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택한 백성은 백이 있는데 백이 뭐냐, 큰 형님 뭐냐, 대 제사장 형님이 있다는 거예요. 제사장 형님이 있으면 우리 죄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했지 우리를 용서한 적 없어요. 김대중도 마찬가지고. 박 근혜도 마찬가지고. 민주당 김 한길도 마찬가지고 소설만 썼지 우리한테 죄를 용서한 적 없거든요. 심지어 가까이 있는 시누이, 올케, 사돈, 사돈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거든요. 사돈이 청와대에 있다해 가지고 그걸 자랑 질하지 마세요. 정말 우리가 자랑 질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오직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느니라. 우리 가운데 부한 자가 누가 있으며, 똑똑한 사람 누가 있느냐, 세상에 버려진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데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아! 십자가외에는. 아, 이 자랑하다 욕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왜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이냐, 하는데 자랑할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부정적이지. 미모를 자랑하나? 이쁜 걸 자랑하나? 어떤 세상의 측정과 평가도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지를 못합니다. 교인수를 자랑할 거예요? 교인이 몇 명입니까? 자랑할 게 있어야지 뭐.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게 있다는 거예요.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까.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냐,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이어질 수 있는데. 이 제사장이 어려워요. 왜 어렵냐 하면, 제사장 위가 있습니다. 제사장 위가 뭐냐 하면,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제사장 제도를 할 때는 이 왕이 실선이 아니고 점선이 되어서 나타나지 않았어요. 왕이. 왜 하나님께서는 왕부터 주고 제사장이 나타나지 않고, 왜 제사장만 나타나고 왕은 안 보이느냐, 창세기15장에 보면, 멜기세덱이 나오지요. 그게 예루살렘의 제사장입니다. 왕이요, 제사장이지요. 지극히 높으신 왕은 안보여요. 제사장만 있다 말이지요.

모세자손을 통해서 제사장이 나오지요. 왕은 언제 나오느냐, 다윗 언약 때 다윗이 등장하는  왕이요, 그 밑에 수하에 왕 밑에 직급이 사독계열의 제사장이 나옵니다. 자, 이제 어려워요. 왕하고 제사장하고 그럼 한 통속이네. 한 통속인데 그럼 우리한테는 제사장만 필요한데 왕은 왜 알려주느냐, 제사장만 알려주면 안돼요.

제사장은 제사지내고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뭐냐 하면, 용서가 되지요. 그런데 용서가 되려면 어디서부터 용서가 돼야 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으면 용서가 그냥 날아가 버린다고요. 예를 들어서 내가 서울역에 서있다 합시다. 내가 지금 목포로 가야할지 부산으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다면 기차가 와도 내가 방향이 안정해졌기 때문에 어느 기차를 탈 줄을 모르잖아요.

내가 지금 내 죄를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잖아요. 내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죄 용서하는 기차가 왔다. 그러면 그 기차를 타도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자기 죄를 모르는 이상은. 그래서 이 제사장이 오면서 뭐도 오느냐, 율법이 와요. 그래서 제사장 설명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율법을 제사장만 전하는 게 아니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알려줬어요. 1년에 3번씩. 전 가장들 소집해가지고. 비상소집해서 아니 정기소집해서. 예비군 동원시켜서 전부 다 예루살렘에 모이게 해가지고 세미나 열어서 율법을 알려줬어요. 이번에 하나님의 법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가서 당신이 그 가정에 선지자 되어서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세요. 만약에 가르쳐서 그대로 못 살거든 양 한 마리 들고 양 없거든 새한마리 들고 절기 때 와가지고 여기서 제사 드릴 테니 제사장에게 바쳐서 안수 받으면 용서받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저 변두리까지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마치 십일조는 무슨 노선이 연결돼 있습니까? 율법의 노선들이 속속들이 다 있지요. 거기서 위반했다 싶으면, 이런 것들이 참 어려운데요. 위반했으면 “아이고, 우리가 죄졌구나. 용서받아야지.” 이게 문제가 아니고 위반했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아프게 한다는 그 점을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둬야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위반하게 되면, “야, 내가 하나님한테 벌 받을 거야.” 당신이 벌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 가슴 아픈 걸 먼저 생각을 해야지요. 내가 말씀을 어겼잖아요. 그러면 내가 벌 받는 것은 나중이고 그 말씀 어긴 것에 대해서는 주님이 아파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파하면 우리가 주님의 기분 풀어줘야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각 안하고 주님의 생각을 모르고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감전된 듯이 법을 어겼으니까 나한테 저주가 오게 되면 나 기분 나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빨리 저주 안 오고 다시 행운을 잡기 위해서는 허겁지겁 착한일 해가지고 나쁜 일을 상쇄시키려고 시도하겠지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기분은 뭡니까? 완전히 이용당한 기분이죠. 하나님을 기분 나쁘시게 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되는 거예요. 기쁘게 하는 방법은 뭐냐, 믿으면 되는 겁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게 하지 못한다, 했잖아요. 하나님의 기분을 풀어줄 생각은 안하고 저주 받는 것부터 저주를 빨리 치울 생각부터 먼저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율법주고 속속들이 모든 각처의 노선들이 깔려있고 그 다음에 제사가 있는 이유는 이 제사는 우리 좋아하는 게 아니고 누구 만족하려고? 하나님이 만족하기 위해서 이 제사가 있는 겁니다. 이게 진실인데요, 이 점에 대해서 이스라엘 제사장도 몰랐고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10분 쉬고 합시다.

 공은주 (IP:218.♡.193.179) 13-10-26 15:40 
안양131011b-히4장12절(측정의 오류)- 이 근호 목사


첫 째 시간 끝에 대제사장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요. 세상권력에서는 왕을 자랑하고 권력자를 자랑하는데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이 든든하다. 자랑스럽다. 그건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사람은 계통이 권력자, 대통령 이런 사람들하고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대제사장과 연결되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왕으로 오신 분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냐, 대통령 같으면 정치하고 행정 하잖아요. 그런데 법은 판사 같으면 판결 받는데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용서하는 겁니다. 죄를 씻기 위해서 다른 흠 없는 대체물을 잡는 일, 그걸 대제사장이 하는 겁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만약에 돼지를 잡아서 우리 죄가 용서된다면 우리의 부모는 매일 집에서 돼지 잡아야 돼요. 그럴 때 우리는 그 부모 말고 돼지 잡는 닭 잡는 다른 집에 가면 구원이 안돼요. 대제사장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이 개시됐다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구원 상황에 놓여있다는 거예요. 대제사장이 제사 지냄으로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런 방식 외에 다른 하나님은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는 결정져라 이 말이죠. 이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 이 기능을 가지고 오지요. 그리고 거기에 왕이 계시니까 왕이시면서 제사장역할을 하시는 분이 옛날 구약에서는 같은 인간들이 제사장이 됐지만, 지금은 하나님 자신이 옛날 구약의 제사장역할을 하심으로서 더 이상 다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전부 다 가짜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우리에게 말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 죄를 용서받는 그 목적이라면 우리는 뭔가 생각을 달리 해야 돼요.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 가지고 용서받는 것이 사실은 우리 기쁨이 될 수가 있어요. “아, 죄를 지었는데 용서받았어. 그럼 난 죄 없이 구원받을 수 있겠어.” 가만히 보면 다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겁니까? 다 내 이익과 관련돼 있잖아요.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제대로 제사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대제사장으로서 용서받는 제도 이 시스템 자체가 우리 하나님 자신이 본인이 기뻐할 일이라면 우리는 믿어주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 기쁨이 아니고 하나님 하시는 일에 동의함으로서 한껏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일을 꾸밀 것이 아니고 내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고 백수가 됐던 늙어 죽던 치매 걸렸던 관계없이 하나님의 제사장하는 일에 그걸 인정해 줌으로서 나는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날아가겠어요? 나는 벌 안 받아야 돼! 나는 저주 안 받아야 돼! 나는 지옥 안가야 돼! 라는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지요. 난 뭘 안해야 돼! 난 벌 받으면 싫어! 라는 생각조차도 우리는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 쳐 먹는 것밖에 안되니까 이런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감사하고 지당한 옳은 일입니다, 라고 인정해 주면 하나님이 기뻐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되지 내 기쁘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사시면 곤란해요. 그건 안 되는 겁니다. 하도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라서 그래요. 십자가 이야기하면 기존교회는 나도 안다, 나도 안다, 전부다 이렇게 하거든요. 십자가가 뭔데? 하면 아, 믿고 구원받는 기잖아! 한다고요.  누구 좋아라고? 내 좋아라고.

우리 좋아라하는 일은 하나님은 그걸 싫어하시고 우리 좋아라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 일을 작정하시고 시행했다는 그 자체가 존경스러워야 되고 그것이 감지덕지해야 되고 그것이 놀라워야 돼요. “야, 진짜 하나님은 말로만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로 작업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제사장이란 제사를 통해서 실제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게 맞구나!” 하는 것을 알아주면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내 좋아라고 살기 없기! 하나님 하시는 일을 인정해서 하나님 기뻐하게 하며 살기! 그렇게 정립돼야 돼요.

예수님이 오신 것이 예수님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제자들이 있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를 보고서 아버지를 보라고 한 것은 니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 달 수입이 얼마며, 애가 어떻게 빽빽 울며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니 집안 일으키려고 온 게 아니고 니 몸 건강하게 하려고 온 게 아니다. 따로 있는 거예요. 너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의 동의가 되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죠.

그 다음에 봅시다. 우리가 중요한 거 통과했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이 일하기 위해서 어디 있느냐, 그건 뒤에 나오기 때문에 그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5장에 나오니 그 때 이야기하겠습니다. 일단은 우리를 위해서 제사장이 있는 게 아니다 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제사장이 어디서 일하는가, 제사장은 보좌에서 일합니다. 보좌니까 더 쉬운 말로 이야기하면, 자리, 자기 자리가 있어요.

물어봅시다. 하나님의 자리가 몇 번지입니까? 안양시 몇 번지에요? 요새는 길로 하니까 무슨 길 몇 번지입니까? 주의 보좌가 여기서 몇 킬로 떨어져있어요? 몇 번 버스 타고 가면 됩니까?  이걸 이야기해주는 신학자 없었어요. 주의 보좌가 있다고 한다면 특정지점에 있을 거고 그러면 우리는 그걸 이쪽에서 그쪽으로 찾아가서 만나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했어요. 왜냐 하면, 그 때 주위 보좌가 어디 있습니까? 만남의 광장에 있었지요.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힌트를 드리면 주의 자리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이름이 있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3,24절 봅시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이름이 있는 곳인데, 이름이 있는 곳이 어디지요? 그것은 모세가 만들면 되잖아요. 없지요. 이름이 있는 곳은 없어요. 보통 평지입니다. 평지인데 시키는 대로 토단 쌓기 전에 뭐부터 없애야 돼요? 은이나 신상이나 금으로 만든 신상을 일단 없애요. 일단 없애버리고 그 없앤 자리에다가 토단을 쌓아요. 그럼 토단이 있다는 것은 뭐가 날아갔다? 우상 섬김이 날아갔지요.

만약에 인간 본인이 본인을 섬긴다면, 본인을 부인해야 되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쌓아야 되지요.  자기를 긍정하고 토단을 쌓아버리면 이것은 누구 좋아라고 쌓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신으로 모시는 신전입니다. 자기 신전이 되거든요. 토단을 싹 밀어버리고 쌓고, 거기다 쌓기만 하면 주님 계십니까? 안되지요. 양이나 소나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면 거기에 하나님 이름이 임하지요. 그렇다면 우상철폐, 토단 쌓기, 양이나 소로 번제 제사 드리기, 고 기능이 장차 오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기능과 일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죄가 없다는 말은 말씀대로 그대로 다 이루었을 때 죄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죄가 없음하고 다르지요. 예수님은 말씀대로 다 이루어진 거예요.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말씀이 뭔지도 몰라요. 우리는 죄를 미워할 수 없는 게 죄가 뭔지 알아야 미워하지. 생전 고구마도 보지 못하고 나는 고구마 싫어.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그래요. 할아버지, 라면 드세요. 하면 나는 라면 안 먹어! 왜? 그냥 싫어. 왜? 맛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할아버지 잡숴봤습니까? 하면 한 번도 안 먹어 봤다는 거예요. 내가 할아버지에게 했어요. 한 번이라도 먹어보고 난 뒤에 맛이 없어, 이러면 납득이 되겠는데 먹어보지도 않고 서양아들, 젊은 아들 먹는 서양음식이라고 무조건 안 먹는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는 축구도 싫어했어요. 본인은 한 번도 축구 한 적이 없어요. 무조건 축구 본다고 싫어했어요. 벌써 50년 전 이야기에요. 그 할아버지는 축구 싫어하고 축구라는 말이 우리말로 뭐냐, 바보라는 뜻이랍니다. 옛날말로 바보를 축구라고 했어요. 바보들의 짓이라 하고 라면 안 먹지요..., 그래서 내가 아이고 저건 너무 억지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뤘다, 죄가 없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주의 이름에 부합하도록 이미 조치가 그 옛날에 있었던 조치가 다 자기에게 적용이 된 것이 성사되었다 이 말입니다. 우상철폐지요. 그 다음 토단 쌓았지요. 그리고 양으로 제사 다 드리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상을 철폐했다면 우상은 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다 우상이라고 보면 돼요.

우리가 예수님 생각하지 않을 때 잠시 우리는, 잠시만요. 우상 섬기고 가실게요. 이리 보면 돼요. 나라는 우상을, 우상에 대해서 추억에 잠기는 그 순간이기도 하고요. 아, 정신 차려야지. 왜 이러지? 우리는 가끔 자기의 꿈속의 캐비넷에다가 멋진 상상하다가 아이고, 정신 차려. 내가 스스로 내가 우상 되었구나.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제가 방금 드린 말씀은 구원은 하나님의 이름의 보좌에서 이 보좌가 만들어질 때 구원이 되고 구원이 되기 전에 뭐부터 만들어집니까?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는 보좌부터 만들어지고 그 보좌는 옛날에는 모세가 만들었지만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보좌를 만들어요. 왜? 본인이 다 양이 되고 토단 쌓고 본인이 다 우상을 철폐했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성경을 생각할 때는 성경 안에서만 생각해야 돼요.

지금 보좌가 어디 있을까? 그걸 자꾸 우리가 어디 예루살렘에 있을까? 이리 생각하게 되면 성경밖에 나가서 찾잖아요. 성경 안에서 찾아버리면 아, 이름이 거하는 곳이 보좌고 그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름 좋아하는 곳이 없었는데 모세가 뚝딱 뚝딱 토단 쌓고 뚝딱 뚝딱 양 잡으니까 아, 거기에 또 계시는 거예요.

자, 그럼 물어봅시다. 모세가 그렇게 토단을 쌓으니 이름이 임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 토단 쌓고 양 잡으면 주님 이름이 임합니까? 안 임합니까? 임하지 않지요. 안 임하는 거예요. 그러니 환장할 거예요. 우리는 어떤 누가 만들었으면 똑같이 그대로 하게 되면 똑같은 가치를 부여하게 말인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만든 건 인정하고 그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은 인정 안 해요. 왜냐 하면, 그렇게 만든 그것도 나중에 지나면 죄가 돼요. ‘자, 모세가 만들었구나. 모세가 양을 잡았구나. 이제 우리 구원되겠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니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벌써 새로운 언약이 또 투입될 태세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물지나 간 거예요. 그것도 주의 이름 안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토단을 철폐할까요? 아니. 그럼 제사지내지 말까? 아니. 다 해야 돼요.  우상철폐 그 다음에 토단, 그 다음에 제사, 플러스 뭐냐 하면, 뭐하느냐? 회개해야 돼요. 이게 사울 왕이 사무엘 붙들고 할 때 전쟁은 해야 되겠지, 사무엘은 시간을 일부러 늦췄어요. 일부러 늦게 왔어요. 그러니까 기다려다, 기다려다 안 되가지고 에라, 내가 할란다. 해가지고 자기가 제사하고 다 했어요. 딱 끝나자마자 사무엘이 와가지고 우리 같으면 와가지고 차가 왜 이리 막히는지,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야 되는데 제가 역할을 못해가지고 미안합니다. 제가 다시 하든지 있는 그대로 합시다, 하는데. 오자마자 억지도 그런 억지 없어요. 지가 늦게 와놓고 왕이시여, 제사를 왜 제사를 드립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걸 몰랐습니까? 그러면서 막 따지고 있다 말이지요.

꼭 노아 같아요. 자기가 술 먹은 거 같으면 아예 바지를 벗지 말고 쥐고 먹든지 주사를 아니까. 지가 술 먹고 떡하니 내놓고 이래가지고 자식들한테 보여줘서 얼래리 껄래리 해놓고 깨어났으면 아이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술 취했다. 이리 해야 될 텐데. 깨어나자마자 누가 날 놀리느냐고 따지니까 적반하장이지요.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 있습니까? “자, 이리와! 나 놀린 놈 저주한다.” “잘했어. 복 줄게.” 노아가 상속 줄 때 어떤 기준을 일부러 만들어서 계산을 이용하는 것 같지요. 참 성경 희한하지요.

잘못은 누가 저질러 놓고 책임은 누구한테 돌립니까? 그래서 구원은 희한해요. 죄진 사람은 책임을 안지고 죄 안 지은 사람은 죄인으로 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래야 돼요. “주여, 나 죄에 대해서 모릅니다. 나는 도대체 감당이 안 됩니다. 내가 해결할 수도 없고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이러면 구원받고, 그래도 내가 죄에 대해서 양심 있지 착해 보이려하면 지옥가고 그런 겁니다. 참 희한해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대제사장과 상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하고 다르거든요. 우리 하는 일을 믿지 마시고 주의 하는 일을 존중해 주세요.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은혜의 보좌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 이룬 것을 믿는 사람은 주저할 일이 없지요. 그걸 담대히 하지요. 담대히 나아가시라는 겁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래, 이거야.”하고 주저할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알았는데, 이미 진리를 알았기에 우리 목숨 겁시다. 같이 목숨 겁시다. 이제는 우리 목숨이라는 것은 목숨 걸만한 일을 찾을 때 찾기 위해서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온 것은.

살아온 이것을 몽땅, 올인, 거기다 다 걸만한 것 하나 나타나기만 해봐라, 이것 기다리다가 드디어 온 거예요. 담대히. 이 한마디에 끝났어요. 다 걸어. 예수님한테 다 걸어도 우리는 전혀 나중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걸지 않고 좀 남겨 논 게 나중에 후회돼요. 나중에 또 동양증권 좀 남겨놨다고 나중에 부도나고. 몽땅 예수님한테 다 거세요. 교회한테 걸지 말고. 교회는 은혜의 보좌가 아닙니다. 은혜의 보좌가 아니에요. 은혜의 보좌는 예수님이 그 때 그 때 만드십니다. 한 가지 더. 주께서 만드실 때 요거 필요합니다. 죄인 필요합니다. 죄인 필요할 때 얼른 손들고 뛰어 들어가세요. 그냥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 같으면 다 죄인입니까? 다 필요한 게 아니고 언약적 죄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필요하지 그냥 죄 졌다고 죄인이라고 회개하는 사람 필요 없어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숨만 쉬어도 나는 죄인입니다. 후~ 주여, 죄 졌습니다. 한 번 더 후, 후~ 죄 졌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숨만 세도 죄인이에요. 고거 주님의 토단 쌓는데 필요합니다. 그게 은혜의 보좌에요. 왜, 면류관 반납하거든요. 그 앞에서 면류관 반납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나아가셨을 때, 세리가 나는 죄인이라 할 때, “그래, 니가 의인이다.” 한 것은 바로 주님께서 토단 쌓을 때 니 같은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전봇대에 주님께서 모집 공고를 내실 때 천국주식회사 해 놓고 밑에 사원모집 죄인. 언약적 죄인 00명. 4대 보험 다됨. 이런 거. 광고를 냈는데 문제는 언약적 죄인을 모른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알아야 죄인임을 알지요. “나, 죄인입니다.”이렇게 온 사람도 빠구에요. 왜, 서류심사에서 안 되는 겁니다. 죄인인 걸 알았으니까 나 착하지 않습니까? 라고 우길 가능성이 많아요. “나, 회개 잘합니다.” 회개 기술 자랑하는 사람도 많아요. 안돼요.

언약적 죄인이라 하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죄고, 설쳐도 죄고, 설치다 가만히 있어도 죄고, 가만히 있다가 설쳐도 죄고, 설치는 게 죄라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죄고 전부 다. 주께서 성전을 세우고 주께서 보좌를 만드시는 겁니다. 죄인 앞에 주님은 어린양이 됩니다. 우리가 죄인 될 때 주님은 “잠시만요, 어린양으로 가실게요.” 해가지고 어린양과 죄인의 만남, 거기서 아버지의 취지가 한껏 살아나니 아버지도 흐뭇해하시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나는 죄인 주님은 대제사장. 그런 관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청와대, 국회의원 아는 사람, 법원에 아는 사람, 그거 자랑삼으면 안돼요. 우리는 대제사장 그 분과 아는 사이라면 정말 자랑할 만하지요.

히브리서5장 봅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아까 4장에서는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5장에 있는 대제사장은 뭐냐 하면, 모세 때에 있었던 대제사장 또는 다윗시대 때 있었던 대제사장, 구약성경의 대제사장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은 사람가운데 취한자라 되어 있어요.

그림으로 한 번 그려봅시다. 이 말씀 하나 하나 새겨보면 우리는 그 앞에서 벌거벗은 채 다 드러납니다. 얼마나 나는 내 좋아하는 것만 24시간 몰두했는지, 다 노출돼 있어요. 그거 아무 소용없는데 우리는 아무 소용없는 짓을 24시간 계속하고 있어요. 심지어 내일까지 당겨서 하고 있어요.

말씀에 대한 생각은 뭐냐 하면, 사람가운데 취한 거예요. 그러면 사람 가운데 볼록 튀어나온 거예요. 이불이 있으면 중간을 잡아당긴 거예요. 이불 가운데 볼록 튀어나왔으니까 이게 이불하고 연결되어 있지요. 놔버리면 죄인이 되잖아요. 죄인 중에서 이걸 채택하다보니까 이 죄가 그대로 다 끌려서 이 안에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대제사장이 하는 제사도 이것은 의가 아니고 뭐가 된다? 죄가 되는 겁니다. 간단한 논리거든요. 잡아당기면 돼요. 꽃 만두 할 때, 꽃 해서 밀가루 반죽 비틀면 되잖아요.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성경에서 난해한  어려운 이야기 또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이게 누구 일입니까? 사람일이죠. 사람일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됩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일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도록 조치를 하실 때, 어떻게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까?

3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인간에서 나온 이 제사장이 사람에게서 나온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서 제사하는 그 제사장이 본인을 위하여 또 뭐한다?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본인을 위해서 하는 그 제사는 집례 하는 자는 누굽니까? 본인이잖아요. 본인은 이미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이미 죄인이지요. 죄인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죄를 씻는 제사 일을 할 때 그게 죄인이기 때문에 온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자기 죄 씻기 위한 속죄 죄를 드리는 일조차도 죄란 이유 때문에 그게 온전하게 드릴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됩니까? 인간의 일인데. 부족하고 무능하고 효과 없는 인간이 되는데. 어떻게 되는데요? 참 질문 어렵지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심지어 자기가 지은 죄 자체가 속죄 죄란 것을 알고 또 죄 접수해도 그것을 해도 집례 하는 본인은 본인이 하는 이상은 소용없는 겁니다. 손에 흙을 묻혀 와가지고 떡을 빚어도 이상히 떡이 모래가 자꾸 묻지? 본인 손에 지금 모래가 묻어있는데 될 리가 있습니까? 이사야1장에 보면,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 손에 피를 흘린 죄가 있는데 그것 가지고 아무리 묻히고 다듬고 해도 계속 피가 묻히거든요. 본인 자신이 이미 손에 죄의 피를 묻혔는데 그 성질 어디 갑니까?

잘 사는 사람은 망해도 명품가방 들어요. 이미 놀던 가락이 있거든요. 놀던 가락이 있기 때문에 곧 죽어도 명품가방 들고 나오고 싶어요. 어떻든 간에 놀던 가락이 있어가지고 꼭 잘 사는 체 한다 말이지요. 그러니 해결이 안 되지요. 인간이 아무리 스쳐봐야 인간이지. 어디까지나 인간이지, 하나님 일 안 됩니다. 그러면 이 해답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다면, 이 제사장 구원도 못 받고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4절에 보면 해답이 나와 있어요.

4절에 보면,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그 다음 뭡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하시니라.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불러 주신다는 것은 불러 주시는 분이 있어야 되고 부름 받은 자가 있어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등장해서 그 다음에 불러 줘야 돼요. 그러니 제사장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불러준 제사장만 구원받지, 자기의 죄 씻는다고 속죄 죄 천 날 만날 드려봤자 안 불러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부르심이 없으면 의롭다함이 없고 의롭다함이 없으면 영광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가 열심히 의롭게 살려 해도 불러 준 게 바탕이 없으면 지가 그냥 도 닦고 몸부림치는 것밖에 안돼요. 우리 인간으로서는 기가 찰 일이지요. 50년 60년 교회 다녔는데 목사 되고 했는데도 아직도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어. “니 처소 있어. 와”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사실은 그 소리를 들었어요. 그런데 부르심이 없는 사람은 그 소리를 외면하게 돼 있습니다. 안에 마귀가 있어가지고. 들었다 하면, 고개를 절래, 절래. 

목사 재판할 때 제가 참석했거든요. 날 면제시키는 재판할 때 저는 거기서 하나님이 함께 있고 왜 그들을 내 앞에 두게 하신 것인가, 복음 전한 줄 알고 사도행전 말씀을 전했습니다. 고소가 뭐냐 하면, 십일조 안 해도 된다. 주일성수 안 해도 된다. 그것 때문에 나한테 고소했다 말이지요. 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안목을 봐라,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은 율법의 지킴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자가 없나니 오직 죄를 깨달음인데, 율법 외에 하나님의 다른 의를 주셨는데 그것은 화목제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됩니다. 라고 거기서 복음을 전했거든요. 녹취에도 있어요. 복음을 전했더니만 전부다 외면해 버렸다 말이지요. 왜 외면했을까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끼리 알아듣게 되어있고 성령 안 받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증거를 안 받게 되어있다고 요한일서4장 6절에 나오거든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너희는 하나님께 속한 고로 세상이 너희 말을 못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라고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다 말이죠. 우리는 말씀 앞에 벌거벗은바 되어야 돼요.

말씀이 살았어요.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느끼게 했다니까요. 제가 거기서 살아보려고 목사 유지하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니고 주께서 왜 이런 재판을 주시는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뭘 전하라? 복음을 전하라 하는구나! 그런 기회를 주더란 말이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나오더라 말이죠. 지구는 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야기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는 십일조 낸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의는 오직 십자가 화목제물을 믿음으로 됩니다. 그들은 거부했어요. 부르심을 받지 못한 정말 부르심을 받았더라면 저 사람한테는 죄를 찾지 못했다고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다만 빌라도처럼 손을 씻던지 해야 되는데 아무 반응 없어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설득해서 사람 꾀라고 한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은 이미 정해져있어요. 정해져있는데 우리는 몰라요. 모르는데 우리보고 그걸 찾아내라는 사명을 부여한 겁니다. 어떻게 찾아내겠습니까? 모든 현장은 복음 전하는 현장으로 보는 겁니다. 나는 대제사장만 자랑한다. 니는 세상사람 자랑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자랑한다. 그걸 증거 하게 되면 우리는 기대를 안 하죠. 거의 100% 돌아섭니다. 니 갈 길 내갈 길 다르네요. 그 이야기 딱 나와요. 갈 길이 달랐다. 갈 길이 달랐어요.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갈 길이 달라요. 같은 인간인데, 같은 성경 보면서 같은 목사임에도 갈 길이 달랐던 거예요. 그만큼 사람들은 부르심을 입지 않았으면서도 목사 직업을 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생계수단으로 될 만하다고 했고, 그 생계수단의 방법이 바로 십일조 한 것으로 벌고 주일날 참석하게 되면 광고시간에 선교비 강조해서 교회 봉사하는 광고해서. 그러니 예배가 중요한 게 아니고 광고가 더 중요해. 광고가. 설교 따위는 강대상에서 다 집어치우고. 광고가 중요해. 광고가.

요번 금요일날 노인 복지로 경로 잔치하니까 집사님들 다 나오셔서 한복입고 오셔서 떡국 나눠주세요. 광고시간이 더 중요해요. 다음 달에는 바자회하기 때문에 헌옷가지 내 놓으세요. 광고가 더 중요해요. 왜냐 하면, 교인들은 광고는 알아들어요. 다른 건 못 알아들어요. 광고는 알아들어요. 요번 교육관 새로 계약했습니다. 돈 모자라니까 돈 내라고. 그 소리만 알아들어요. 교회에 와서 한국교회는 돈 내라고 하는 게 문제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또 다 내고 있어요. 한 집사 불러다가 당신 장로 차례고 되고 싶으면 돈 내라 하면, 아이고 더러워라 하면서 내고. 그런 식으로 교회가 일단 커지면 또 교회로 노는 장소로 해서 문화센터로 해서 놀러 오는 사람들 있거든요. 그렇게 해서 구원받을 거 같으면 저도 합니다. 그 방법이.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줬어요. 뭐냐, 다 구원시킬 생각 말고 부르심을 입은 사람만 구원되도록 그렇게 복음만 전해라, 디모데야, 니는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라. 하나님의 안식이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투쟁의 소용돌이 안쪽에 있어요. 영적 싸움을 하는 그 안쪽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태풍의 눈 같아. 태풍 치는 회오리 주위에 고요하듯이 하나님의 안식은 전쟁 버리고 멀리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태풍의 눈처럼 그 안에 하나님의 안식이 들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몸에 있거든요. 예수님 가는 곳에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요. 예수님 갔다하면 이단이고 삼단이고 욕하고 마치 스데반집사처럼 설교하면 욕과 독설을 듣고 그런데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스데반집사와 함께 있는 거예요. 왜, 그게 보좌기 때문에. 스데반집사가 그 보좌만 바라보고 있다가 예수님 만난 거예요.

성령 안에서 설교하다가 맞아죽으니까 주께서 보좌에서 서가지고 스데반집사 안으니까 스데반집사가 주님보고 “재들 보세요.“이런 게 아니고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알지 못한 가운데 그렇습니다.“ 주님하고 스데반집사하고 이야기한 거예요. 지난 수요일날 제가 기도하면서 사람과 대화하지 말고 주님과 대화하는 지시받고 사세요. 그걸 기도제목으로 한 거예요.

다시 정리합시다. 대제사장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부르심을 입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이라면 좀 실수해도 양을 잡는데 목을 한꺼번에 비틀어야 되는데 반밖에 비틀지 못했다. 좀 실수해도 부르심을 입은 사람 같으면 의롭게 되고 영광스럽게 됩니다. 정했느냐, 정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으로 부를 때 알아들으면 정해진 사람이고 못 알아들으면 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르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5절에 봅시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요 이야기하는 것은 부르심의 원천, 모델, 기초 그것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이 말입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아이고, 목사님 그 이야기는 우리도 압니다, 하거든요. 아실 건데, 실제로 이것을 어떤 논리나 성경에 적용하라 하면 번뜩 적용이 안돼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약속의 땅에는 축복도 있고 뭐도 있지요? 저주도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유다백성들이 예수님당시에 자기는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축복받는다고 생각했지 저주받는다고 생각 안 한 겁니다. 왜냐 하면,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땅이 무슨 땅이기 때문에? 축복받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에 보면 그리고 예레미야에 보면 하나님께서 70년 만에 다시 바벨론에 포로 잡혔다가 다시 귀환해서 그 땅을 차지할 백성들이 있을 거고 그 백성은 영원토록 함께할 것이라,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분명히 맞지요?

70년 만에 돌아온다. 그러면 그 말을 굳이 문자 그대로 봅시다. 그러면 지금은 그 당시 70년 전에 쫓겨난 것은 우리의 우상숭배 죄 때문에 그런 거고 그럼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다시 돌아와서 그 땅에 산다는 것은 이미 죄가 없었다는 그런 증거가 된다. 라는 논리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 사는 것 자체가 복 받은 백성이라는 확정으로 인식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보고 예수님이 니 애비는 마귀라고 했다 말이지요. 그러니 그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분명히 예레미야, 에스겔 문자의 예언에 의하면 분명히 자기는 돌아왔으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돌아왔잖아요. 와서 성전 지었잖아요. 그럼 됐잖아요. 택한 백성 맞잖아요. 그게 구약의 자연스런 흐름이란 말이죠. 그게 이탈이고 별난 해석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해석하니까 이 땅에 그냥 돌아오면 되게 돼있어요. 이 땅에 돌아와 살았잖아요. 뭐가 니 애비는 마귀입니까? 정식 백성이지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지금도 교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있거든요. 지 애비가 마귀라고 해도 구원받았다고 해요. 하여튼 희한해요. 그들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모든 성경의 땅이란 개념, 축복, 저주를 뭐를 경유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되잖아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까 예수님을 통해서 한다 해놓고 우리는 알아듣지만, 막상 실제 적용시켜 보면 자꾸 예수님을 안통하고 인간이 뭘 할 수 있지? 자꾸 자기를 경유하려해요. 자기가.

‘아, 옛날에 우리가 우상 섬겼구나!’ “나는 안 섬겨야지!” 끝.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디모데전서6장10절에 나오는 말이잖아요. “그래,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모든 해석은 뭐를 경유해라? 주님을 경유하고 십자가를 경유하고 그걸 주 안에서 섬겨야 되는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니 복종해! 교회 다니면서 성경말씀에 보니까 나오더라. 니 남편한테 복종하란 말이야! 이 해석은 뭐가 잘못 됐습니까? 주 안에서 안 해요. 주를 경유 안하지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능력 없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을뿐더러 복종할 능력도 없어요. 왜? 우리는 분노하는 존재지, 복종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엎드리면서 분노하는 존재에요. “에이씨, 더러워라.” 이러면서 복종합니다. 우리는. 복종이 안돼요. 아내가 남편한테 복종할 때는 주님을 경유해야 돼요. 주님 안에 경유해 버리면 자기는 사라지고 누구만 있어요? 주님이 연약한 여자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그러면 그 복종이라 하는 것은 그 전에 주님을 경유하지 않은 복종과는 정반대에요. 후라이팬으로 패는 게 복종이에요. “저는 무조건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여보.” 이게 복종인 줄 아는데 주 안에서는 조지는 게 복종이에요. “이게 교회 안 나가. 죽으려고, 지옥가려고.” 이게 복종이라니까요. 주님이 안에 있으면 주님이 남편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야말로 들었다, 놨다, 진짜 요물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그런 복종이 복종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생각한 복종은 그 비컵 속에 증발해 버리고 주님이 그동안 우리를 복종케 했구나! 주님이 나로 하여금 남편한테 복종케 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했다는 게 아니고 주님의 공로로서 복종하게 했구나! 그 때 후라이팬으로 3대 때릴 걸 2대만 때리게 해서 복종하게 했구나! 그걸 알게 하신다니까요. 이게 내 뜻이 아니고 예수님 뜻이었구나! 나는 성질나서 했는데, 그게 다 드러난다니까요. 소급해서 주의 일로 바꿔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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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술 먹고 와서 아내 밥상 차려논 거 발로 찼잖아요. 그 다음에 주께서는 아내한테 어떻게 복종하게 하는가 하면, 아내가 술 먹고 들어와 가지고 남편이 여보가 술 먹었으니까 내가 밥상 차릴게. 그 밥상 차는 거와 똑같아요. 니도 한 번 밥상 차는 거 봐라, 마음이 어떤지. 이게 주님이다. 모든 것이 주님을 경유해서 해석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경유가운데서 나는 잘했다가 아니라 ‘야, 남 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주님을 내 분노로서 주님을 싫어한바 된 내가 죄인입니다.’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하지요.

그래서 제사장이 부름 받았다는 그 부름 받음에 원칙도 어느 제사장 부름 받았다. 이리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아버지께 부름 받았을 때 어떻게 부름 받았는가를 먼저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모델이니까. 고 모델이 그대로 적용되고 반복되거든요. 적용될 때에 예수님 뭐로 부름 받았습니까? 아들로 부름 받았어요.

6절에 보니까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러면 여기서 부름 받을 때 2가지 요소가 있어요. 한 가지는 뭐냐 하면, 아들로서 영원한 직분 자, 영원한 멜기세덱, 영원한 제사장, 아들로서 영원한 제사장, 요게 바로 오늘날 성도의 신분입니다. 왜? 예수님에게 1차적으로 먼저 있고 아들이면 어디에 속한다? 역사에 속하지 않고 묵시에 속하고 영원한 하늘에 속한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처럼 부름 받으면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 된다. 그 말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우리가 이미 아는 이야기인데 그동안 우리가 놓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을 경유 안하고 예수 믿으면 하늘나라 아들 된다. 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아들 있잖아요. 그 백성. 그 백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된 거예요. 아들을 경유해야 되는데 성경에서 나를 믿으면 백성 된다 하니까 야, 이제부터 하늘나라 백성이다. 하고 저 혼자 좋아해요.
반드시 성령께서는 아들로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함으로서 나타난 결과는 우리는 아들 될 자격도 없고 천국 갈 자격도 안 되고 우리는 지옥을 가야되는데도 방향을 틀어서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영생을 이렇게 얻게 되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는 고마움. 그 고마운 마음이 들 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경유된 부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안 됩니다. 나는 도저히 천국 가서 산다는 것은 천국은 나한테 너무 넘치는 내 주제에 너무 벗어나는 정말 나한테 해당되지 않는 멋진 나라인데 저한테 그런 나라가 온다는 것은 정말 이것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내가 부활해서 하나님과 더불어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과분한 이야기입니다. 라고 할 때 우리는 세상 근심 걱정으로부터 일시적이나마 모든 근심걱정, 모든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우리는 다 벗어났다는 것을 일시적으로 느끼지요. 이미 벗어났지만, 우리는 24시간 느끼지를 못하고 그 순간만큼은 잠시 ‘잠시만요, 느끼고 가실게요.’ 잠시 우리 하나만 느껴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 ‘아, 말씀은 살았구나!’ ‘내가 살은 게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기에 우리는 살아있는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도 말씀 때문에 내가 살아있구나!’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주님께서 육체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보좌가 되시고 우리가 못한 것 대신 다 해주셨기에 이제 그 혜택이 우리한테 주어졌습니다. 부름 받은 자에게 주어진 그 보너스가 이처럼 놀랍고 엄청난데 우리가 소소한 근심에 우리의 영혼이 질식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