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131011a-히4장12절(측정의 오류)-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4장12절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말씀이 운동력이 있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말은 육신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모르는 게 없다는 말이에요. 또 뭐가 모르는 게 없느냐 하면, 우리가 육신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것도 이미 예수님이 경험 다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그냥 계시면서 너희들이 알아서 잘 오너라, 이게 아니라 직접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우리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이 세상에서 삶의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이 세상이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이 땅에 저주가 작용해요.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하나님께서 그냥 추방하신 것이 아니고 마치 군대훈련 보면 화생방 훈련하는 게 있거든요. 창고에 집어넣고 가스를 넣어서 견디는 훈련을 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시켜 놓데 그냥 추방시켜 놓지 않고 빈터에다가 알아서 살아라, 이게 아니고 거기다가 저주라는 가스탄을 터트린 거예요. 그러니 터트리니까 그 자체로 이미 죽은 거죠. 이미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그 죽는다 할 때 꼴까닥 하고 죽는 게 아니고 실컷 고생 고생하면서 서서히 사람이 말라 비트러지도록 만드는 거예요. 서서히 조아가면서 고생할 거 다하고 저주 받을 거 다 받고 이마에 삐질, 삐질 땀 다 흘리고 애기 낳는 해산의 고통과 남자한테 구박받고 하는 그러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을 다 겪게 하고 죽게 하지요.
그렇다면 죽음이란 것이 내 목숨 끊어진 게 죽음이 아니고 이 살아있는 게 죽음입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살다가 죽는 게 죽음이 아니고 살다가 그만 나이 들어 죽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요거 자체를 죽음이라고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저주라는 가스통을 터트린 거예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이 세상사는 자체가 죽음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요.
이런 게 어려워요. 죽음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숨 끊어지는 걸 말하잖아요. 하나님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저주 속에서 사는 것을 죽음이라 하는 거예요. 지옥에서 사는 게 죽음이고 죽었다가 다시 지옥가기 위해서 다시 부활되는 게 그게 죽음이에요. 너가 죽는다, 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인간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아~ 무섭지요?
하나님, 저 죽어요. 하면 하나님이 나는 그 딴 거 모르겠고 니가 죽든 살든 모르겠고 죽음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나는 기어이 너를 살려내겠다는 겁니다. 죽음이 뭔가를 위해서. 그럼 인간들은 내가 숨 끊어지면 죽음 아닙니까? 아니야, 그건 니 생각이고. 그래서 이 죽음이란 것은 어디에 기초해서 죽음이 나오느냐 하면, 우리가 아까 봤던 히브리서 4장11절의 오늘 본문 말씀처럼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의한 죽음을 우리가 오해하는 죽음과 만나도록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암벽타기 해보면 높이 올라가보면 밑에 보면 야, 이게 줄 끊어지면 죽겠다. 들잖아요. 암벽 타는 게 죽는 거예요. 암벽 타는 거 보면서 밑에서 안 올라가고 구경하는 게 죽음이에요. 전부 다. 전부다 산다는 자체가 죽음이에요. 왜냐 하면, 어디에 근거해서? 말씀에 근거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모르니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말씀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몰라요. 마귀가 말씀을 외면하도록 그렇게 조치하기 때문에 죄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제시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그냥 왠지 낯설다 하는 느낌. 굉장히 낯설어요. 말씀이 들었다 놨다 해요. 말씀이 요물 같아. 왠지 말씀이 낯설어요. 낯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셔가지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이 말을 방금 강의대로 한다면 더 쉽게 하면, ‘죽음은 살았고 죽음이 낯선 검이 되어서 살아있는 나를 계속해서 모든 것을 쪼개서 죽음의 위력을 우리한테 실감나게 만드는’ 그 작업을 말씀이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더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죽음 안에 갇혀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죽음 밖에는 뭐가 있느냐, 죽음 밖에는 11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나니” 죽음 밖에는 안식이 있고, 이 세상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 그리고 안식. 안식 그리고 죽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죽었다가 안식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죽었다가 죽음에 들어가느냐, 그리고 죽었다가 죽음에 들어가는 거기는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이고 죽었다가 안식 가는 것은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이고 그런데 왜 이상하게 안식 가는 길이 좁디좁은 길이냐 말이지요. 길이 좁으면 찾는 이가 없을 긴데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 안하는 게 아니겠어요? 사랑하면 많은 숫자가 안식에 들어가게 하든지 아니면 다 들어가게 하든지 100%. 사람 이리 다 들어와! 돼야 진짜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오히려 많은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작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적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얼마나 숫자가 적었으면 두려워하겠습니까? 5000명 교인 앞에서 자기 집안 식구하고 같이 예배드리는 것하고 똑같이 마찬가지예요. 그걸 보면서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렵다는 말은 저쪽은 주의 목사 같고 나는 목사 안 같은 느낌이 든다 말이지요.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각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을 지옥가게 하고 왜 극히 소수만 찾는 이가 거의 없는 가끔가다 한명씩 좁은 길이 좋다고 영생의 길로 가도록 왜 그렇게 하실까요?
우리가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이 수가 적어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 12족속 들어갈 때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숫자가 많지 않음에 겁을 집어먹고 되돌아가려 했잖아요. 이스라엘 자체가 많은 민족들보다 극히 적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많은 민족들 있지만 너희만 택하여 세웠다. 이렇게 해서 그러니까 숫자 적은 것 가지고 기죽지 말라. 되겠지요. 그리고 노아방주 크게 만들어놔도 들어가는 사람은 8명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그 당시에 희박해도 15명이상은 많을 게 아닙니까? 16명 가운데 8명 들어가면 과반수는 들어가는데 아무리 숫자가 적다할지라도 16명은 더 될 거예요. 주민들 숫자가. 그렇다면 이것은 과반수도 안 된다 말이지요. 과반수는커녕 0.001%도 안 된다 말이지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한 분이죠. 전 세상 인구가운데서 예수님은 몇 분입니까? 달랑 한 분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분만을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 해가지고 진짜 아들로 봤다 말이지요. 모든 걸 다 이루신. 그런데 이쪽에 보면 이쪽의 숫자가 많고 저쪽에는 적다고 예수님이 이야기 하셨는데 사실은 이쪽의 숫자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명이에요. 아담한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몇 명? 한 명. 주님께서는 숫자를 보지 않아요. 뭘 보느냐 하면, 이 한명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들 숫자를 포기할 수 있는 집단만 구원받습니다. 한명을 위해서.
신천지가 원했던 것은 이 만희씨가 원했다는 것은 자기만 보혜사고 나머지는 아니기를 원하겠죠. 지 말고 또 보혜사 있으면 조직이 둘로 깨지니까. 예수님도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하는 그 하나, 그 하나 때문에 예수님 본인도 하나 됨을 포기해야 돼요. 이쪽 일을 포기하고 예수님 하나에 속해야 됩니다. 그러면 숫자로 몇 명이냐가 아니라 우리는 이쪽에 있어도 한 명이었고 저 쪽에서도 한 명인데 왜, 한 명만 의지하고 하나만 바라보고 하나만 기대하고 하나만 믿기 때문에 나는 안 믿기 때문에 나는 숫자로 치지 말아주세요. 이런 뜻이에요. 우리 식구 4명입니다. 4명으로 치지 마시고 어쨌든 구원받으면 4명이 되더라도 그건 몇 명입니까? 하나에 속하지요.
노아의 8명은 8명이 아니고 하나에 속해요. 한명이 아니고 하나에 속해요. 하나! 이스라엘은 그냥 하나에 속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아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에 하나님께서 같이 편들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은 하나만 있으면 족한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있으면 예수님만 믿으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있으면 예수님만 믿으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몇 명이 됐던 상관없습니다. 예수 믿는 게 5명이고 저 쪽에 안 믿는 사람이 5억명이라도 주께서는 5억명이라도 쳐주지 않고 하나로 보고 이쪽도 5명이 아니고 하나로 보는 겁니다.
그 하나에서 12 나왔고 12에서 또 12나왔고 12를 두 번 천 번을 계속하니까 이게 숫자로 144,000되는 거예요. 12에 12를 곱하기 하면 사실은 144,000이 아니고 무한대겠지요. 12¹²승을 하면 숫자로 하면 0이 엄청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144,000이라 한다고요. 12에서 12 1000으로 곱했다는 말은 그 만큼 무수히 많다는 거예요. 무수히 많은데 그 무수히 많은 것도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무수히 많더라도 몸은 무수히 많은 몸이 아니고 달랑 한 몸, 머리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사랑도 하나요, 교회는 몇 군데? 교회도 하나요. 그래서 이쪽이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이쪽도 하나입니다. 아담에게 속한 하나, 하나에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이쪽도 하나고 이쪽도 하나다 말이죠. 1:1로 보면 돼요. 예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 말고 다른 건 전부 다 예수님께 벗어난 하나입니다. 이렇게 종합정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계속 이야기해봅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돌아서면 또 다 잊어버려요. 하나를 가위로 잘랐으니까 적지요. 하나하고 붙여보세요. 전부 다 하나로 연결되면 둘, 셋, 이란 의미 없고 세 명 모여도 하나고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만 있으면 세 명이든 네 명이든 든든합니다. 아침에 호박죽 하나 먹어도 든든하듯이. 예수님만 있으면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든든하지요. 노아방주에 있으면 든든하지요. 바깥에서는 감기 들려가지고 지금 사람들을 소각하고 있는데.(‘감기’영화에서) 그렇잖아요. 감기 들렸지, 풍랑 일었지, 노아방주 안에 들어오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예수 안에 있으면 됐지, 그 안에서 숫자 헤아릴 게 뭐가 있어요. 없지요. 일단 예수 밖에 있을 때는 숫자가 자꾸 걱정이 되지만, 들어오게 되면 숫자를 잊게 됩니다. 몇 명이냐가 아니라 뭘 바라보느냐, 제가 대전 시민대학 강의하면서 계속해서 지금 중세, 유럽역사 공부하고 있는데 공부하면서 느낀 점이 천주교고 교회고 문제가 뭐냐 하면, 구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천주교 제도, 교회 제도, 그거 5000명, 10000명 모아놔도 구원이 안돼요. 구원이 될 거 같으면 저도 그렇게 하지요. 목사, 장로, 집사 계급세우고 예배당 짓고 위임식도 하고 성찬 세례 다하고 하여튼 지금 천주교에서 나온 그 역사대로 개신교도 천주교에서 나왔으니까 천주교 하는 그대로 하고 개신교는 약간 변경해서 단출하게 만들어서 하고, 그렇게 해서 구원이 될 것 같으면 하지요. 구원이 안돼요. 문제는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이 문제에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무시하면 그냥 세상 교회식대로 하면 돼요. 무시하면. 그러나 저는 그걸 아는 이상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내 몰라라하고 무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복음을 듣는 사람한테는 구원이 되도록 성령께서 복음을 줬기 때문에 주께서 듣도록 하실 게 아닙니까? 하신다면.
거기서 무엇이 구원을 방해하는지를 제가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 기존의 교회하고 성당하고 구원이 안 되느냐, 그걸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왜 구원이 안 되는가만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구원이 어떻게 되느냐가 더 중요하겠지요. 그러면 교회도 아니다. 성당도 아니다. 주일날 교회 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수요예배 참석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공부 참석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방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말씀이 당신을 이렇게 구원해 주시는 것을 확인하는 그 모임이 중요하다고 봐요.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복음 말씀밖에 없어요. 말씀이 살아있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말씀이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 아까 집사님은 살이 빠졌다고 하는데 나는 위가 빠졌거든요. 누구나 마찬가지거든요. 늙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누가 아느냐 말이죠. 의미를. 말씀 때문에 우리가 지금 죽은 채로 죽어가고 있거든요. 죽은 채로.
그러니까 그걸 어느 성경구절을 100점 맞았습니다. 가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말씀이 살아있는 걸 보여주는 증거로서 우리가 지금 계속해서 하루 일과가 부딪힐 게 부딪히고 일어날 사태가 일어나고 누굴 만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자전거 타다 깨지고 모든 것도 자전거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는 겁니다. 말씀이. 그것을 같이 나눌 수 있을 때 그게 바로 주의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제도? 형식? 절차? 의미 없어요. 말씀이 살아있으면 우리는 그 살아있는 말씀이 날마다 계속해서 죽어있는 존재를 죽어있다고 통보를 해주니까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살라고 하지 말라는 사는 것에 어떤 부담, 정신적인 스트레스 이런 것을 덜어주잖아요.
말씀이 이렇게 기억이 안 나게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또 스트레스 받습니다. 오늘 찬거리는 뭐하지? 해물탕 두 번 해주니 먹지도 않고. 시원한 거 해달라는데 뭘 해주지? 모든 게 전부 다 말씀만 안 듣기면 항상 또 뉘엿뉘엿 가을해는 지는데 저녁에는 찬거리는 뭐하지? 이런 거 생각한다니까요.
그런데 말씀이 살아있으면 오늘은 뭐해서 우리 식구들을 죽이지? 해물 탕해서 잡아 죽일까? 시원한 콩나물국으로 죽는 방법을 택할까? 콩나물에다가 농약 넣으라는 말이 아니고. 요번에는 침대를 한 번 바꿔서 죽어볼까? 이런 식으로. 다음 주에서 등산가서 죽어볼까? 항상 끝에는 뭐가 붙어있다? 뭐하다가 죽음을 보여주지? 뭐하다가 이거하고, 뭐하다가 꼭 살아야 되지? 이거하고, 이것처럼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보다 니가 살아있어. 니가! 니가 이리 하면 니가 죽어. 니가 죽으면 가족들 다 죽는 거야. 니가 무조건 살아남는 게 성공이야. 사는 게 장땡이야. 너부터 살고 봐. 마귀가 계속해서 그 이야기하고.
말씀은 내만 살면 돼! 말씀 나만 살면 되고 니는 그냥 죽어주면 되고 나만 살면 돼! 내가 살아나기 위해서 니는 제발 좀 죽어 줘.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어주잖아요. 그것은 예수님이 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여동생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시간 늦춰서 죽으려 할 때 안가고 죽고 난 뒤에 가시잖아요. 그게 남의 일이라서 우리는 편하게 듣습니다만, 우리 집안의 일이라면 우리는 기도해도 안 나으면 그 다음부터 예수 안 믿습니다. 그 정도로 마르다 마리아는 그렇게 예수님을 가까이 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 턱밑에 앉아가지고 말씀 들어도 그렇게 해도 막상 자기 오빠 죽으니까 그게 다 사실은 밑바닥에 어쩠든 사는 게 장땡이다 이 말입니다. 어쨌든 무조건 이 바닥에서는 살아남아야 그래도 무슨 한 소리라도 하지 죽으면 소용없다는 그 강력한 생존의지가 예수님을 시답지 않게 평소에 그렇게 생각들을 한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삶은 분노다.’ 산다는 자체가 교회헌금 한다는 자체가 주님 면상에 돈 뿌리는 분노에요. 이래도 나 안 살려줄 거요? 이래도 정말 안 살려줄 거야, 난 살고 싶은데. 내가 꼭 이런 짓거리 하면서 당신한테 삶을 부인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식에 분노의 표현이에요. 성경에서는 감사함으로 헌금하라 했는데 이것은 인간은 헌금하면서 지 분노의 발산이에요. 특히 젊은 애들,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분노에요. 게임에 졌다고 해서 아파트 불 질러서 3채를 태우고. 지가 인터넷게임 졌다고. 전부 다 분노입니다. 모든 범죄는 분노에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우리가 분노하게 하는가? 그것은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를 죽이고 우리가 죽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창세기4장에서 가인이 있잖아요. 가인의 편을 자꾸 들고 싶어요. 너무 솔직하니까. 창세기4장에 아벨은 양 기름 분류해서 제사 드린 거 외에는 다른 어떤 내용은 안 나와요. 맞아 죽은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안 나오거든요. 그런데 주로 하나님은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가인보고 이야기해요.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더 쓸모 있어요. 아벨보다도.
세상이 죽음이라는 세상을 보여주는데 가인이 더 쓸모 있어요. 그래서 가인의 세상은 뒤에 가인의 도시를 낳고 가인의 세상이 이루어지고 아벨은 아벨 대신 새 씨를 낳아서 누구는 죽고 태어나고 죽고 그 이야기만 있지, 사실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가인의 세계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지금 가인의 세계에 똘마니로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가인이 만든 이 제국에서. 그게 전부라고 여기고. 그래서 그 하는 모든 것에서 따지고 보면 다 분노, 내 인생은 안 도와줘도 내 혼자서 알아서 챙기겠다는 야무진 오기 같은 게 그게 폭발하듯이 젊은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도 말씀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지요.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이,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되는데 그 다음 13절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워요. 뭐냐 하면,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고 돼 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이유는 말씀 앞에 세우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거예요. 지음을 받은 인간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무식해도 너무 무식해요. 무식해도 보통 무식한 게 아닙니다. 무식한 게 용감하다고. 거리에 나가 보세요. 전부 다 용감한 사람들이에요. 말씀 앞에 서질 않기 때문에 전부 다 지 자랑 질하며 돌아다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지가 혼자서 지 자랑하던지 지 과시하던지 그런 거 일체보지 않고 어쨌든 저쨌든 간에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말씀 앞에 다 세워버립니다. 그러면 그들은 뭐냐 하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티를 그들은 완전히 노출되지요.
다시 정리합시다. 모든 지으신 것은 본인은 지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목적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고 내가 왜 여기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말씀 앞에 세워두기 위해서 지었다는 사실, 그러면 그 때부터 말씀 앞에 세워지게 되면 지으신 바가 말씀 앞에 바로 세워지게 되면 아, 말씀이 우선이고 지은바 된 나는 말씀을 위하여 나는 그냥 생겨나야만 되었었구나! 우리 엄마 아빠로부터 생겨난 게 다 이유가 있었네. 그것은 말씀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각자 자기 때를 따라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무식해가지고 대나무집에 가가지고 내가 내년 신세는 어떻겠습니까? 저 남자하고 내 딸하고 궁합이 맞겠습니까? 말씀 앞에 설 생각안하고 토정비결 앞에 세우고 점쟁이 앞에서 자기를 세우니까, 그 점쟁이가 마귀 아닙니까? 마귀가 오죽 잘 거짓말하겠습니까? 김 구라보다 구라를 더 잘하는데. 아니 목사보다도 구라를 더 잘해요.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이게 말씀이 전하는 대로 해야 되는데 아니면 자기가 구라가 돼버려요. 거짓말이 돼버려요. 성도가 누가 왔던 그건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지옥을 가던 왔다가 이 앞에 성당을 가던 어쨌든 그 시간만큼은 하나님이 보냈으면 말씀 앞에 서라 했는데 목사가 이사람 눈치 저사람 눈치 저 집사 눈치다 봐가지고 말씀을 전해야 될 걸 가지고 달래 줄 생각을 하니까 이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다가 매서 바닷물에 풍덩 집어넣는 그 짓을 하는 거예요. 제주도 심야 바다에. 해녀 같으면 떠오르기나 하지. 사람들 바다 속에 다 빠뜨려가지고. 그래서 그 사람도 죽고 자기도 마치 본문해석이 모호한데, 거짓말 친 인간이 사람들을 그렇게 바다 속에 빠뜨리는 해석도 되고요, 그렇게 하는 자 본인도 바다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그 말씀도 되고 둘 다 다돼요. 둘 다 빠지는 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말씀을 한다는 게 참 두렵지요. 그래서 이걸 생각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주일 오후에 기도 안하겠다고 빼는 이유를 내가 알아요.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니잖아요. 말씀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네요. 유구무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봅시다. 모든 지으신 것은 마귀가 됐든 모든 지으신 것은 말씀 앞에 세워두기 위해서 말씀은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음 받은 겁니다.
그 다음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를 상관하신다는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하나님 또 예수님 앞에 다 드러난다, 라는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히브리서 지었던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왜 했을까요? 자,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방금 한 이야기가 말씀은 살았다. 우리는 다 말씀 앞에 드러나기 위해서 지음 받았다. 우리는 다 드러난다. 말씀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쪼개서 완전히 노출된다. 라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말이에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측정의 문제, 측정한다는 것은 자로 재는 것.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눈알이 막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순간, 순간 측정해요. 저 사람은 나보다 나이 많겠다, 적겠다, 측정하죠. 저 사람은 지 아파트 넓을까, 좁을까 측정하죠. 저 애는 내 애보다 잘할까, 못할까 측정하잖아요. 모든 것은 TV에 나오는 나라가 나오면, 저 나라는 잘살까, 못살까 모든 걸 측정하지요.
마태복음7장1절에 보면, 판단하는 자는 본인이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본인도 비판하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비판한다고 해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전부 다. 제주도 근해에 있는 바다에 갈치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 갈치가 제주도 앞에 잡혀 나와서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둘 다 바다에 빠져있다면 갈치 둘은 둘 다 평가할 수 없어요. 한 쪽이 빠져나왔다면 에이~ 저건 아직도 빠져있네. 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처럼 말씀 앞에 설 때는 서로가 서로를 측정한다는 것이 이게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 말씀이 뭐냐가 중요하지 남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내가 남들 보기에 내가 이렇다, 하는 것도 안 중요하고 내가 남을 평가하는 것도 그것도 안 통하는 헛방이고 비현실적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걸 간추리면, 예수님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생각 안하며 살아라, 하는 말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냥 예수님만 생각하고 말씀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일체 생각안하면 되는 거예요.
모든 생각은 다 버리고 예수님만 생각하던지 예수님 말씀만 생각하던지 그것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유일한 측정이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가 성도가 됐으면 가끔 또 그런 걸 느낍니다. 혼자 끙끙하고 고민하고 남들이 날 무시할 때 진짜 침대에 엎드려서 울고 싶고 일어나기 싫어! 나가봐야 또 무시할 건데. 아이고~ 꼴 보기 싫은 것. 칼 있으면 죽이고 싶다. 그 인간 다 죽이고 싶어. 이런 분노 같은 게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생각, 생각, 측정을 내가 어떻게 알아서 한 거예요. 우리는 측정할 자격도 없고 측정할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내 중심으로 내가 생각한대로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측정하고 그것 때문에 남을 비판하기도 하고 남한테 비판 받기도 해서 우울해가지고 약 먹고 하는데. 측정의 문제에서 손 떼라는 거예요. 본문에서. 바로 이 말씀을 한 것은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하지, 니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말이죠.
우리가 구원에 못 드는 이유가 우리가 구원하는 방법을 몰라요. 안다 할지라도 실천의 능력도 없고. 피자 판을 누가 사왔다고 봅시다. 애가 4명이 있다고 할 때 자, 어떻게 가르지? 할 때, 애들이 다 나이차이가 있으니까 적은 아이는 적게 주고 큰 아이는 크게 주고 할 때, 피자 본인이 손들어서 이렇게 잘라주세요 하는 것은 없지요. 그것은 둘러앉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처럼 말씀이 결정해야 되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5장18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라고 했지요. 요 측정, 요 평가 누가 내린 겁니까? 우리가 내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내렸지요. 그렇다면 반드시 이렇게 됩니다. 되니까 내가 세상과 격리되고 싶다든지 내가 지리산 들어가느니 이런 짓 하지 마세요.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 살아도 주께서 이렇게 세상 속에 속하지 않았다고 이미 주께서 내린 판정에 대해서 우리는 믿으면 돼요. 내가 스스로 세상에 속했느냐, 안 속했느냐 내가 따지면 안돼요. 따져버리면 우리는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속한 자가 아니라 해놓고 말로는 그렇게 조정해 놓고 뭔가 일이 좀 잘 풀리면 자랑 질하고 싶어 또 환장하지.
측정을 요한복음15장19절이 측정해야지 내가 나를 측정하면 안돼요. 세상에 너희가 속한 자가 아니요, 라면 아! 속한 자가 아니구나!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대로 한다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거울 앞에 말씀 앞에 설 때, 말씀의 손가락이 나와 가지고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했잖아.” 우리는 “아멘.” 이러면 되지, 그게 바로 아! 내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구나! 다 쪼개지는 거예요. 골수와 관절 전부 다. 속속들이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야!” 라고 해부하게 되면 우리는 아! 말씀이 살았고 나는 말씀 살아있는 것을 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벌거벗은 채로 앞에 등장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말씀 앞에서는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면 돼요. 괜히 주섬, 주섬 옷 입지 말고 그냥 말씀 앞에서는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다고 보면 돼요. 화학 실에서 실험할 때, 저도 화학과 나왔는데 실험실에 알아보면 그냥 멀건 물 같은데 끓어버리면 나중에 노란 앙금 같은 게 나와요. 물속에 녹아있는 앙금이 나오거든요.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위선을 증발시킵니다. 증발시키면 남는 것은 말씀만 남아요. 예수님의 측정만 남아요. 우리 인생은 휘발성이 있어가지고 하루 살면서 머리카락도 빠지고 전부 다 날아가야 돼요. 머리카락이 휙 날아가야 돼요. 우리의 기억력이고 낭만이고 추억이고 자식이고 딸이고 전부 다 시집가고 주위에 다 날아가야 돼요. 친구도 일찍 죽고 다 날아가야 돼요. 날아가면 남는 게 있어요. 앙금처럼 남는 것. 그게 바로 그동안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라는 그 말씀이 남아요.
우리는 항상 말씀이 말씀대로 되기 위한 그러한 증인으로서 이 땅에 세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왜 사도가 이런 이야기하느냐, 사도 본인이 그러니까. 본인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았어요. 여러분, 저는 말씀 앞에서 벌거벗었습니다. 여러분도 벌거벗었지요? 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자, 14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제사장이 있으니“ 야, 이거 설명해야 되겠어요. 큰 나라, 그 다음에 뭐가 됩니까? 큰 대통령? 아니지요. 큰 검찰총장? 아니지요. 큰 국회의원? 아닙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우리 형님이라면 참, 누나라면, 언니라면, 아마 히트칠거예요. 우리는 백이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택한 백성은 백이 있는데 백이 뭐냐, 큰 형님 뭐냐, 대 제사장 형님이 있다는 거예요. 제사장 형님이 있으면 우리 죄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했지 우리를 용서한 적 없어요. 김대중도 마찬가지고. 박 근혜도 마찬가지고. 민주당 김 한길도 마찬가지고 소설만 썼지 우리한테 죄를 용서한 적 없거든요. 심지어 가까이 있는 시누이, 올케, 사돈, 사돈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거든요. 사돈이 청와대에 있다해 가지고 그걸 자랑 질하지 마세요. 정말 우리가 자랑 질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오직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느니라. 우리 가운데 부한 자가 누가 있으며, 똑똑한 사람 누가 있느냐, 세상에 버려진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데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아! 십자가외에는. 아, 이 자랑하다 욕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왜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이냐, 하는데 자랑할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부정적이지. 미모를 자랑하나? 이쁜 걸 자랑하나? 어떤 세상의 측정과 평가도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지를 못합니다. 교인수를 자랑할 거예요? 교인이 몇 명입니까? 자랑할 게 있어야지 뭐.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게 있다는 거예요.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까.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냐,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이어질 수 있는데. 이 제사장이 어려워요. 왜 어렵냐 하면, 제사장 위가 있습니다. 제사장 위가 뭐냐 하면,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제사장 제도를 할 때는 이 왕이 실선이 아니고 점선이 되어서 나타나지 않았어요. 왕이. 왜 하나님께서는 왕부터 주고 제사장이 나타나지 않고, 왜 제사장만 나타나고 왕은 안 보이느냐, 창세기15장에 보면, 멜기세덱이 나오지요. 그게 예루살렘의 제사장입니다. 왕이요, 제사장이지요. 지극히 높으신 왕은 안보여요. 제사장만 있다 말이지요.
모세자손을 통해서 제사장이 나오지요. 왕은 언제 나오느냐, 다윗 언약 때 다윗이 등장하는 왕이요, 그 밑에 수하에 왕 밑에 직급이 사독계열의 제사장이 나옵니다. 자, 이제 어려워요. 왕하고 제사장하고 그럼 한 통속이네. 한 통속인데 그럼 우리한테는 제사장만 필요한데 왕은 왜 알려주느냐, 제사장만 알려주면 안돼요.
제사장은 제사지내고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뭐냐 하면, 용서가 되지요. 그런데 용서가 되려면 어디서부터 용서가 돼야 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으면 용서가 그냥 날아가 버린다고요. 예를 들어서 내가 서울역에 서있다 합시다. 내가 지금 목포로 가야할지 부산으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다면 기차가 와도 내가 방향이 안정해졌기 때문에 어느 기차를 탈 줄을 모르잖아요.
내가 지금 내 죄를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잖아요. 내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죄 용서하는 기차가 왔다. 그러면 그 기차를 타도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자기 죄를 모르는 이상은. 그래서 이 제사장이 오면서 뭐도 오느냐, 율법이 와요. 그래서 제사장 설명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율법을 제사장만 전하는 게 아니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알려줬어요. 1년에 3번씩. 전 가장들 소집해가지고. 비상소집해서 아니 정기소집해서. 예비군 동원시켜서 전부 다 예루살렘에 모이게 해가지고 세미나 열어서 율법을 알려줬어요. 이번에 하나님의 법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가서 당신이 그 가정에 선지자 되어서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세요. 만약에 가르쳐서 그대로 못 살거든 양 한 마리 들고 양 없거든 새한마리 들고 절기 때 와가지고 여기서 제사 드릴 테니 제사장에게 바쳐서 안수 받으면 용서받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저 변두리까지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마치 십일조는 무슨 노선이 연결돼 있습니까? 율법의 노선들이 속속들이 다 있지요. 거기서 위반했다 싶으면, 이런 것들이 참 어려운데요. 위반했으면 “아이고, 우리가 죄졌구나. 용서받아야지.” 이게 문제가 아니고 위반했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아프게 한다는 그 점을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둬야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위반하게 되면, “야, 내가 하나님한테 벌 받을 거야.” 당신이 벌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 가슴 아픈 걸 먼저 생각을 해야지요. 내가 말씀을 어겼잖아요. 그러면 내가 벌 받는 것은 나중이고 그 말씀 어긴 것에 대해서는 주님이 아파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파하면 우리가 주님의 기분 풀어줘야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각 안하고 주님의 생각을 모르고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감전된 듯이 법을 어겼으니까 나한테 저주가 오게 되면 나 기분 나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빨리 저주 안 오고 다시 행운을 잡기 위해서는 허겁지겁 착한일 해가지고 나쁜 일을 상쇄시키려고 시도하겠지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기분은 뭡니까? 완전히 이용당한 기분이죠. 하나님을 기분 나쁘시게 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되는 거예요. 기쁘게 하는 방법은 뭐냐, 믿으면 되는 겁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게 하지 못한다, 했잖아요. 하나님의 기분을 풀어줄 생각은 안하고 저주 받는 것부터 저주를 빨리 치울 생각부터 먼저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율법주고 속속들이 모든 각처의 노선들이 깔려있고 그 다음에 제사가 있는 이유는 이 제사는 우리 좋아하는 게 아니고 누구 만족하려고? 하나님이 만족하기 위해서 이 제사가 있는 겁니다. 이게 진실인데요, 이 점에 대해서 이스라엘 제사장도 몰랐고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10분 쉬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