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712b-히2장16절(아브라함 자손)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 봅시다. 18절에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어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 했는데 예수님이 시험 받은 적은 언제인가 하면, 2000년 전입니다 대략. 그런데 2000년 후에 오늘날 주님께서 무슨 수로 오시느냐 말입니다. 그냥 믿자, 라고 하면 안 되고요. 언약의 원리가 있어요. 원리를 알아야 되는데 믿자할 것 같으면 항상 내 이익 되는 것만 챙기면 그만이야, 이리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가 돼 버린다고요. ‘주님이야 어떻든 간에 나만 되면 되지.’ 라고 해버리면 이것은 주님을 이용한 것 밖에 안 되잖아요.
다시 주님의 공로로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일했느냐, 그렇게 되어야 되거든요. 첫 째 시간에 본 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지는 것, 믿어지는 것이다. 제가 아까 설명했지요. 수동력이라 했지요. 우리가 믿는 믿음은 의미 없고 믿어져야 돼요. 믿는 것은 아침, 오후2시에 믿고 3시에 믿고 자꾸 내가 시간 따라 3시에 믿고 5분 동안 가게 되면 5분 후에 3시 10분에는 안 믿어져야 되는 거예요. 왜? 다른데 애들 성적 봐주다가 보면, 주님 안 믿게 되고, 다른데 신경 쓰다가 아이고 이빨이야, 하다 안 믿게 되고, 난데없이 차가 지나가면서 흙탕물 튕기면 에이씨~ 욕 나와 가지고 성령의 열매고 뭐고 화평이고 온유고 뭐고 싸우게 되고,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단회 적이 아니고 늘 상 그대로 지속적으로 유지를 해줘야 되는 그런 입장에 있다면, 믿어지는 것은 단번에 된 효과가 우리에게 계속 적용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몇 번 했습니까? 창조를 한 번 했지요. 그러면 창조를 한 번 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창조를 계속 하느냐, 안 하느냐, 그 문제 생겨요. 창조를 옛날에 한 번 했기 때문에 지금도 창조한다. 라는 것도 말이 될 수 있지만, 정확한 말은 하나님이 단번에 창조했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지게 되면 그 믿음 안에 창조가 계속해서 한 번에 해당하는 창조가 계속 거기서 작용했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창조가 믿어지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는다. 2000년 전의 사건입니다. 만약에 내가 치매 걸렸다. 십자가가 뭐꼬? 이리 나오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잘 믿다가 치매 걸린 그 순간부터는 십자가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아버지 돌아가신지 8년 됐는데 몇 일 전에 어머니 오셔가지고 “야, 야, 느그 아버지 아픈데 가봐야 안되나?” “야, 야 아버지가 집에 아직 안 들어오신다.” “조금 있다가 들어오실 거지요.“ 이게 믿어지게 된다는 것은 내 힘으로 믿음이 유지되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주님의 힘이 우리 육신을 가지고 주님께서 ”내가 이미 믿었어.“ 라는 그 말씀을 완성하기 위한 실습장으로 우리를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내 허락도 안 맞고.
여러분들의 허락도 없이 주님께서 마구 여러분 속에 휘집고 다니는 거예요. 마치 마귀가 우리를 휘집고 다니듯이. 이제는 주님이 성령이 우리를 마음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건 사용료도 안주고 이건 완전히 자기 마당이라, 자기가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사실을 믿어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믿는다, 가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 때문에 나는 믿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믿어지게 됐는데, 십자가 같은 경우에 십자가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아닙니까? 죽음이거든요. 그럼 예수님이 죽을 때 자살한 게 아니고 스스로 칼 들고 죽은 게 아니고 누가 죽인 자가 있겠지요? 누가 죽였습니까? 겉으로는 서리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지만, 누가 동조했습니까? 군중들이 다 동조했고 소극적이지만 협조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12제자들, 12제자들 다 도망갔잖아요. “나, 저 분 모른다.” 했잖아요. 분명히. 저주받아도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사실은 예수님 빼놓고 거의 모은 사람이 다 동조했다 보면 되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단회성을 적용시킬 때는 십자가 사건 뿐 아니고 그 주변에 십자가를 유발시킨 것까지 우리에게 적용이 되게 돼 버리면, 나는 내 힘으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지, 사랑할 사람이 아닌데 주님께서 지금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믿어지게 된 모든 공로는 주님께서 지금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어지는 것,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문법으로 부정법이라고 합니다. 아니라는 뜻에서 부정이 아니고 정해지지 않은 법, 부정사, 정관사도 부정관사와 있어요. 정관사가 영어로 the라고 하고, 부정관사는 뭐라고 합니까? a, an을 붙이지요. 포괄적인 사과를 할 때는 the apple이고, 개별적으로 개체적으로, 독자적으로 할 때는 a apple 한 개의 사과라고 한다 말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보통 육신이 믿는 것은 나의 믿음이에요. 내 믿음 쪽에서 나눠주고 할 입장이 못돼요. 나만 살면 그만이거든요.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생각하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육체적 믿음이라 하는 것은 "주님, 저 믿고 있거든요. 보이지요. 잘 믿지요." 항상 독자적인 나의 독보적인 나의 믿음을 주장하는데 주께서 주시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부정법입니다.
부정법은 to부정사, 예를 들어서 ‘내가 먹는다.’ 를 부정사로 고치면 그냥 '먹기' 내가 뛴다, 할 때는 동사잖아요. 이걸 부정사로 고치면 그냥 '뛰기' 앞에 나는 없어요. 언제 뛰었다 하면, 이건 과거동사가 돼 버려요. 동사에다가 to만 붙이면 to부정사라 해가지고 동사인지, 명사인지, 정할 수 없는 거예요.
'믿음' 이건 시제도 없어요. 과거, 현재, 미래도 없어요. 그냥 그 자체로서의 단회 적이에요. 십자가, 그 자체로 단회 적이에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이건 우리 인간이라 하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데 주님의 사건에는 시간자체가 없어요. 어제 믿었는데 오늘은 왜 안 믿지? 이런 게 없다니까요. 어제는 잘 믿더니만 오늘은 안 믿고! 이걸 우리한테 따지고 묻지를 않는다니까요.
어제 믿은 그 믿음도 주님한테서 나온 이미 확정된 믿음이고 오늘 믿은 것도 확정된 믿음이고 심지어 내가 믿는 것도 확정된 믿음이고 너가 믿은 믿음도 확정된 믿음이고, 내 믿음이 따로 없어요. 우리는 한 믿음 속에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한 믿음 속에서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믿는 자에게는.
믿는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믿음 따로 없고, 다 주님의 믿음이에요. 주님의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초등학교 때 운동회 해봤잖아요. 운동회 할 때, 박 터지기 할 때, 박이 터졌습니다. 청군이 먼저 깨느냐, 백군이 먼저 깨느냐, 모래주머니를 마구 던지는데, 깨지면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안에 흥부의 박처럼 내용물이 마구 나오지요. 공부 잘하라, 365일 운동한다, 건강해라, 나오잖아요.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부정법으로,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지요. 부정법이라는 것은 이미 시제가 없다, 시간 자체가 없이 완료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나온 꼬리표들이 이미 시제를 초월해서 믿을 사람에게만 동일한 믿음이 주어진다 말이지요.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우리는 그 지체로서 머리도 하나요, 우리는 그 지체로서 그냥 다양성을 보여줄 뿐입니다. 은사라 하는 것은 달란트 비유 그런 은사가 아니고 어떤 무엇을 하던지 간에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했습니다. 할 때만 그걸 은사라는 말을 붙일만하지, 단독적으로 내가 했습니다, 는 은사가 아니에요.
은사에는 영원한 것들이 있는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이건 은사가 영원하지요. 내가 병을 고치나, 방언을 하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형태가 중요하지 않고 형식이 중요하지 않고 안에 내용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한 분 되신 주님의 믿음, 주님의 소망,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바로 은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치고 은사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왜, 성도 자체가 은사니까. 온유와 화평과 자비, 성도 자체가 은사에요. 왜 은사냐 하면, 모든 공로를 구원받은 모든 근거를, 토대를, 기초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돌리니까 “아이고, 너희 교회 교인 많지?” “교인 많고 헌금 많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구원해.” 라고 주님에게 돌려버리니까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성도가 어디 있겠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는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뭐를 끌어당겨서 내 것 만들 때, 내 것 만드는 그것을 가지고 나라고 이야기 하지요. 그러면 일반 사람들이 교회 나올 때는 왜 나옵니까? 주님을 사랑해서 나온 게 아니고 내 것을 확장시켜서, 나의 확장을 노리는데, 나를 확장시키면 나의 세계화가 돼요. 나의 세계화라는 게 말은 거창하지만, 뭐냐 하면 이 세상이라는 것이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일어나는 것이 다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 잘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에요. 그래서 “나는 뭔데?” “니는 뭔데?” 나는 이것 있고, 자식들 있고, 어떻고, 어떻고, 이게 있으니까 나다! 이 경계선이 나다! 그걸 제가 첫 째 시간에 아브람이라 했지요. 그게 아브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구원시키지 않지요. 어떻게 구원한다? 누굴 구원한다? 아브람을 구원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거예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건너 갈 길이 있다 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거기에 개입된 게 언약이에요. “아브라함아, 너는 언약을 주어야 구원을 받는다.” 이 뜻이 아니고 그렇게 해석해버리면 엉터리 해석이고 언약이 우선이에요. 언약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뀐 거예요. 이것은 “나, 구원받았다!” 소리하라고 구원한 게 아니고 나보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선이고 먼저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가 된 거예요.
그 언약의 완성 체 되신 분이 누구죠? 예수님이지요. 말을 이렇게 바꾸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선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차후에 구원을 받아야만 했었었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믿음, 소망, 사랑은 내가 믿었다! 믿었다! 믿었다! 가 아니라 이미 주님에 의해서 믿음 안에 포함돼 버린 거예요. 믿어진 것이 to부정사에요. 시제가 없는 거예요. 이미 나 있는 자체가 결과물이 되니까 나 자신에 대해서 주님 안목에서 해석을 새롭게 내놓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구약의 다윗이나 한나, 그리고 예레미야, 이사야 보세요. 해석이 다 돼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나, 이거 안 해, 나 이거 안 할 랍니다.” 해봤자 욕 소리만 듣고 해봤자 옹한 소리만 듣고, 안 할 랍니다. 하지만 주께서 하게 하시니 할 수밖에 없어요. 다니엘 세친구가 야, 불이다! 하고 들어가지 않았지요. 주께서 그럴지라도 주께서 집어넣는다면 해야지요. 우리 인생이 구약인생하고 똑같아요. 베드로도 그렇고, 사도요한도 그렇고, 자기가 이끄는 삶이 아닙니다. 그냥 주께서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언약의 실존, 언약의 존재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뀌어 지는 사람을 데려가기 때문에 우리는 천사보다도 누가 더 귀하다? 아브라함 자손이 친히 지켜주신다는 이야기를 지난번에 한 거예요.
이번 시간에는 2장 18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했는데,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논쟁이거든요.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시청역 지하철 봅시다. 시청역 지하철에서 그 다음역이 뭐냐 하면, 을지로3가잖아요. 지하철 시청역에서 을지로3가 갈 때 어떻게 가면 됩니까? 현재 본인은 지하철 타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지요. 가만히 있으면 을지로3가에 도착하거든요. 만약에 지하철3가에 버스정류소가 있다고 합시다. 그냥 지하철 3가 지하철역은 그냥 있으면 되는데, 지상 버스정류소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하철타고 있는데 창문 열고 뚫고 나갑니까? 안 되지요. 일단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다른 차원으로 바꿔야 거리는 똑같지만 사실은 가는 길은 이미 이쪽을 포기를 해야 된다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할 때에 우리는 지하철에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돕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사람의 미래라 하는 것은 과거의 영상입니다. 사람이 지금 내가 미래를 생각하잖아요. 그 미래의 모든 요소는 이미 과거에서 경험된 것에서의 확장이에요. 우리의 미래상은 내가 봤던 것들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백화점에서 구입할 때, 그냥 맨 마음으로 구입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서 본 게 있는데? 카다로그에서 한 번 봤는데? 그게 비슷한 게 나왔을 건데, 신제품으로 나와 있을 텐데,’ 항상 과거에 알고 있는 것을 더듬어서 유사성을 찾아서 그 제품을 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라 하는 것은 진정한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가 아니고 과거에 대한 모방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다 할까, 개척해 낸다 할까,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한테 교육시킨다. 그것은 자식 입장에서는 버스 정류소에 있는데, 부모는 지하철에 있는 거예요. 자식으로 하여금 지하철에 있는 내가 못내 그리워하는, 못다 이룬, 그리워하고 있던, 지하철에 애를 강제로 집어넣는 짓이에요. “공부 똑바로 해! 안 그러면 거지 되는 거야, 거지! 이 엄마가 얼마나 공부를 못해서 고생하는 거 알지?” 엄마가 자기의 경험 속에 자식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자식은 헐~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친구 이야기하고, 엄마 이야기하고 왜 다르지? 아이, 나 친구하고 의논할래, 엄마하고 의논 안 해, 이리 된다고요. 그 쪽 세계는 따로 있거든요.
자기가 시험을 당한다, 하잖아요. 쉽게 말해서 고난이거든요. 이 고난은 우리가 해석해봐야 실패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모든 고난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우리가 과거에 힘들었던 데서 나온 고난이에요. 이것은 주님의 고난하고 고생하고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아까 우리 집사님께서 올 때, 1층에 계셨잖아요. 백날 서 계셔 보세요. 10년을 서보세요. 안 되지요. 이게 2층이란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경험이란 항상 1층에 갇혀있는 경험이라서 예수님의 고난을 흉내 내고 순교해도 예수님의 경험을 맛볼 수가 없어요. 언약이 와야 돼요. 주님의 새 언약이 와서 경험해야 되지 우리가 비스므리하게 모방한다고 해서 순교한다 해서 배째고 한다고 해서 그거 순교 아니에요. 그냥 사세요. 모방하지 말고 십자가 진다고 나불대지 말고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는 것이 그게 고난입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게 있어요. 모방이 안 되거든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고난의 차원과 우리가 했던 고난의 차원이 같은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시험할 때, 예수님은 사람 만나기 전에 공생애 할 때, 누굴 먼저 만났어요? 광야에서 누굴 만났지요? 마귀를 만났지요.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주님께서 나한테 “근호야, 니 예수 믿을래?” 우리하고 상담을 안 합니다.
상담은 정형외과에서 하는 거예요. 우리는 상담대상이 안돼요. 그러면 주님은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마와 대결해요. 주님이 당하는 시험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살아보려는 시험이 아니고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악마가 우리보다 세니까요. 그 쪽과 예수님과 관계했을 때 나오는 그 시험, 그 유혹, 그 고생, 그것을 이제 성도가 그걸 경험하게 된다 말입니다. 성도가 그걸 경험해요.
성도가 경험할 때, 우리보고 “이겨라! 이겨라!”가 아닙니다. 이미 이겼기 때문에 마음껏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시험에서 예수님의 시험은 나중에 하고, 우리 시험부터 먼저 합시다. 인간의 시험에서 제일 핵심 되는 요소가 뭐냐 하면, 나를 지우는 건데, 먼저 불교 이야기부터 할게요. 불교가 뭐냐 하면, 첫 째, 이 세상은 고생이다. 두 번째, 그 고생은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긴다. 세 번째, 그 집착을 벗어버리고 네 번째, 팔정도, 바른 말, 바른 생각.... 이런 게 있어요. 바른 판단, 팔정도를 이렇게 그리는 거예요. 수레에 피자처럼 해서 인생이 굴러가면서 바른 말, 바른 정신, 하게 되면 해탈하면 된다. 불교에서도 이게 역사적으로 바뀌게 되면 불교사상이 발전해요. 불교라 하는 것은 이거 네 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생로병사 고생이다. 고생은 마음의 병에서 나오는데 마음을 어디에 집착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집착을 버리면 마음도 욕심도 버려질 거고 그 다음에 버려진 상태에 있지만, 세상에 때가 묻잖아요. 불교에서 거울 비유를 많이 하거든요. 거울을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세상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을 못하잖아요. 매일같이 뭐해야 됩니까? 거울을 브러시로 닦아줘야 되잖아요. 그러니 마음 밭을 닦아주면 깨끗한 마음으로 보는 거다, 이리 되는 거죠. 이게 불교거든요.
그런데 이 불교를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이게 뭐로 탈바꿈 되느냐, 기독교로 바뀌어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예수 믿어도 고생 많이 해가지고 많이 당황했었지요? 여러분, 세상의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버리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잃었던 복을 주십니다. 욥을 보세요. 욥이 고생을 많이 했지만 끝까지 이겨내니까 전 에보다 더 예쁜 딸 주고 미스코리아 진선미 다 줘버리고 재산도 곱빼기로 줬잖아요. 여러분들이 그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리 되거든요. 마지막에 나온 게 뭡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리 되거든요. 그러면 각 사람마다 믿음의 내용이 같아요? 달라요? 달라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러니 100% 뭡니까? 불교에요. 기독교 전부 다 불교입니다. 불교를 각색한 거예요. 원판이 불교인데, 그걸 기독교로 각색한 거라니까요. 산에서 내려온 불교에요. 기독교가.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했으면 이제는 팔정도, 그게 뭡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육과 몸으로 영광 돌리기 위해서 깨끗한 마음을 하기 위해서 말씀으로 성화되어야 되거든요. 이게 마귀의 특징입니다. 마귀의 덫이에요. 그래서 세상에서 아주머니들 얼마나 힘듭니까? 가정문제, 사회문제, 경제문제, 특히 경제문제, 고부간의 갈등문제, 이건 생로병사 고생이죠. “여러분, 고생되시죠?” 한다고 해서 고생하는 게 아니고 어느 인간치고 지가 고생 안하는 사람 있습니까? 다 고생해요. 심지어 이건희 회장 부인도 고생하고. 미술품 때문에 경찰에 왔다 갔다 하고. 전부 다 고생하고, 세상에 따지고 보면 고생 안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누구 고생하는 거예요? 남이 고생하는 게 아니고 내가 고생하는 거예요. 내가 고생하니까 아까 이야기했죠. 나라는 것은 이 정도, 이 정도 갖추어야 행복을 갖춰야 나인데, 그것이 원활하지 않으니까 나를 확장시키고 나를 체계화시키기 위해서 그 능력 있다는 전능하시다는 신을 찾아서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서 주된 관심사가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 지든 말든 몰라요. 모르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원상복귀 해 놔라, 내가 고생 많고, 나한테 보상책을 내놔라, 지가 땅 뺐긴 적 있습니까? 무조건 하나님한테 원상복귀 해 놔라, 어떤 원상복귀? 내가 만족할 만한 나다운 것을 내놔라 이거지요. 시킨 대로 할 테니까,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십일조 하라하면 십일조 할 테니까 내가 만족할 만한 나를 내놔라, 이 말이잖아요.
아까 제가 한나 이야기할 때, 한나가 애기를 못 낳음으로서 이 세상은 다른 기준에 의해서 이미 마귀가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이 이것이 마치 복음이고, 기독교고, 기독교 진리라고 우기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고생한다는 그것을 통해서 그런 모습을 보고 보상하라는 모습을 보고 누가 더 고생합니까? 주님이 그걸 보고 고생하시는 거예요. 고생한다고 따지는 우리 때문에 주님이 고생하시는 거예요. 지금도 화내시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아까 했던 거 다시 한 번 봅시다. 창조의 단회 성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여러 번 한 것이 아니고 단번에 했지요. 단번에 하시고 단회에 창조했기 때문에 지금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돌아가잖아요. 그걸 인간들은 뭐냐 하면, 지금도 늘 창조한다고, 우리식으로 창조를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꺾어버리는 거예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모든 걸 창조할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 있지요.
그러면 창조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서 창조했잖아요. 창조했으면 하나님의 창조의 단회 성 속에서 왜 우리가 창조에 반대하는 반 창조, 비 창조로서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죽음마저도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일환이다, 이 말입니다.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잖아요. 죄인으로 죽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된 것도 창조의 일환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까 뭐라 했느냐 하면, 마약을 해도 괜찮다고 하면 안 되고요. 마약을 해도 죄다, 이리 돼야 돼요. 마약을 끊어도 죄고 마약을 해도 죄다, 라고 되어야지 자칫하면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위하여 주님을 끌어당기는 셈이 되니까 우리 자신을 위해서 창조가 된 게 아니거든요.
주님을 위하여 창조의 일환으로 지금 같이 녹여져 있기 때문에 항상 우리 하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역시 창조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잘 창조하셨습니다.” 하고 박수칠만한 우리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이걸 우리의 정당화로 끌어 올 수는 없는 문제에요.
바람피워도 죄고, 안 피워도 죄고, 이걸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죄다, 이렇게 표현하시는 거예요. “나, 잘 했지요?” 이렇게 나오면 안 돼요. “그러니까 나 정당하지요?”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일단 나에 대해서는 없어요.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시험의 내용이 뭐냐 하면, 방금 이야기 했잖아요.
나 자신을 중심에서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내가 이걸 했습니다.” 또는 “내가 이 짓을 안했습니다.” 이 짓을 내가 했습니다, 보다 더 하기 힘든 것은 “나는 이런 짓을 안 했습니다.”가 나쁘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거예요. 내가 이런 도둑질은 전혀 안했습니다, 가 이게 얼마나 나쁜 짓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힘들어요.
예수님의 시험이라는 것이 체험 화될 때 그러니까 우리에게 체험의 확장은 뭐냐, 예수님에게 시험받든 악마에게 시험받든 그 체험이 우리한테 밀려와야 되는데 우리는 맞서 싸워서 내가 승리하는 거, 내가 이겨낸 그것 가지고 주님의 그 시험에 맞서 싸운 게 되니까 결국은 우리는 골리앗이 되고 주님은 소년 다윗이 돼 버려요. “나온 나, 나는 정당하다!” 칼 들고, “누구야? 나의 정당함을 부정하는 인간은 누구야? 내가 다 쳐부수리라.” “나는 이런 짓도 안하고 저런 짓도 안하고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나이다. 내가 무엇이 부족합니까? 나는 부족할 것이 없다.” 구약 이사야에도 나오고 마태복음 19장에도 나와요.
“내가 뭐가 부족합니까?” 이사야에 보면, 나는 부족함이 없다. 두로 사람들이 모든 것이 만사형통하고 하는 일이 너무 잘됐으니까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거예요. 오늘 아침 TV에도 어떤 사람이 집을 자랑하는데, 요건 요렇게 꾸몄고, 저건 저렇게 꾸몄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는 거예요. 부족함이 있다, 없다,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내가 나섰다는 자체가 문제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여러분 가까운데 나쁜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나쁜 친구가 그동안 둘이 나쁜 짓을 했는데, 어느 날 가만히 예수 믿고 난 뒤에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야, 나 니하고 안 놀아.” 라고 했을 때, 잘 한 겁니까? “나, 니 같은 거하고 안 놀아.” 했을 때, 결국 얻고자 하는 결과는 뭐예요? 어떤 것을 의도해서 그 나쁜 친구와 결별했습니까? 나쁜 친구와 결별하게 되면 나는 우수한 사람이 되겠지요. 우수한 사람인 그것이 바로 주께서 그것에서 그걸 거기에서부터 구원하려고 십자가 지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생각을 잘못해서 ‘내가 예수 믿으니까 다시는 나쁜 짓은 안해야지.‘ 하면 남는 게 뭐냐, 나쁜 짓 안하는 나를 내가 믿게 돼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그 사람을 구원해 내지요?
이번에 수련회에서 전도서 준비하는데 제가 준비하는 과정에 있거든요. 인간의 지혜가 여러 가지 있어요.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발견할 수 있는,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이미 인간들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50대서부터 80대까지 책임져 주시고 보험은 몇 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그것도 빠른 속도로 이야기해 버려요. 그게 무슨 지혜냐 하면, 저 사람에게 한 구좌 더 보험을 들게 하는 지혜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은 이거 들면 봉급보다 더 훨씬 이익이고 보상해 줍니다. 나중에 원금 되찾아주고 어떻게 하면 6천 원 줍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지혜지요.
그리고 여러분들 이거 한 번 풀어보세요. 어떤 걸 그룹이 있는데, 평균 나이가 19세인데, 최연소 애에게 있어서 1살 더 많은 사람이 있을 테고, 2살 더 많고, 3살 더 많고, 4살 더 많을 때, 최연소 나이는 얼마냐 찾아보세요. 한 번 풀어 볼게요. (X+1)+(X+2)+(X+3)+(X+4)÷5=19→(5X+10)÷5=19→5X+10=95→5X=85→ X=17 최연소 애는 17살이에요. 요게 현재 눈에 보이는 인간 모든 세계에서 말하는 지혜입니다.
또 예를 들게요. 옛날 고대에 피타고라스라는 사람이 지구의 반지름을 구했어요. 희한 하지요. 2500년 전에 어떻게 알았는가, 시에네하고 알렉산드리아하고 거리를 재서 시차를 해서 해시계로 재서 시차 각도를 재서 하니까 지구의 반지름이 나온 거예요. 삼각법에 의해서. 그것이 이 세상의 뭡니까? 그게 지혜에요. 과학이에요. 그러면 모든 어른들도 애들도 학교에서 배우는 게 뭡니까? 이 지혜를 배우는 거예요. 이 지혜가 구원합니까? 우리가 숨어있는 과학법칙을 끄집어내는 것과 보험회사에서 한사람이라도 더 하기위해서 그 사람들에게 적용될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훈련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24시간 가동되는 모든 것은 분명히 지식이고 지혜고 정보인데,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숨어있는 지혜이냐? 이 말입니다. 아니지요.
그러면 성경 왜 봅니까?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 지혜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예요? 이런 지혜들은 소용 있다? 없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어요. 공부 잘하고는 소용없어요. 수학 잘 풀고.
하나님의 단 회성, 이미 십자가는 끝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느냐, 십자가가 올 때, 오늘 강의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시험 받은 것이 우리에게 들이 닥치면서 구원의 지혜가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니가 얻은 지혜가지고 니가 구원 하고자 해? 그렇다면 그 지혜 때문에 누가 죽었다? 내가 죽은 거야. 내가.” 그 지혜 때문에.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는 거예요.
신학박사, 목사, 성경공부 열심히 하는 것, 이게 우리에게 구원에 도움 돼요? 안 돼요? 도움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런 것으로 하여금 내가 기대하는 내 결과물을 내가 품고 있다는 게 문제에요. 내가 여기서 조금 더 배우면 내가 좀 더 알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나를 우수한 존재로 탈바꿈 시킬 때 그 우수한 존재로 탈바꿈 시키고자 하는 방법을 악마가 배후에서 그렇게 인간을 조종해 왔던 겁니다.
그 조종한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일 먼저 공생애하기 전에 누굴 만나느냐? 바로 마귀와 만나는 거예요. 진짜 마귀와 만나는 거예요. 마귀 속에 예수님이 구원할 자가 있기 때문에 우선 대가리부터 치고 들어가야 되거든요. 주의 이름으로 원수의 이름을 이겨야 원수 이름 속에서 그 사람을 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주님한테 구원받았다는 소리는 안하고 “나는 주님의 원수 속에서 그동안 푹 젖어 살았었는데 주님께서 찾아와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자, 이 지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요 지혜가 히브리인들의 일상생활 가운데에서는 이것은 평소에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하나님이 오신다하면 제사 드리고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데, 그래, 몸을 깨끗이 해야지, 이건 되는데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이 아이디어는 없지요. 없다는 말은 인간의 체험에 확장 속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인간의 체험은 뭐냐 하면, 나의 확장이에요. 무조건 내가 잘나고, 위대하고, 똑똑하고, 순수하고, 거룩하고, 천당 갈만하고, 나는 훌륭하고, 독자적이에요. 독자적. 남보다 지기 싫고 남한테 이기고 싶고 독자적이에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모든 체험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나라고 주장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체험 속에는 어린양 피 바르라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렇다면 어린양의 피를 바른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고난의 체험이 우리한테 확장된 겁니다. 두 개의 확장이 만납니다. 지하철타고 가는데 자꾸 무슨 소리가 들려요. “땅위에 있는 을지로3가 버스정류장에서 만나자 했지, 언제 지하철 을지로3가에서 만나기로 했느냐?” 자꾸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요. 예를 들면.
“니가 백날 애써봐야 그건 지하철이야, 니는 그 세계가 아니고 너는 위에 버스 정류소 을지로3가에서 만난다 했지,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게 아니야.” 그게 옳은 거예요. 지하철역에서 나갈 방법이 없는데. 방법이 없어요.
없기 때문에 버스 정류소가 뚫고 들어와야만 되지요. 뚫고 들어올 때, 우리 눈에는 뭐냐, 예수님은 쪼다고, 바보고, 등신이고, 아무 힘도 못쓰고, 귀싸대기 얻어맞고, 옷 빼앗기고, 눈 안대해 가지고 “니가 진짜 선지자이거든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다시 말해서 누가 너에게 귀싸대기를 때렸는지를 알아맞히면 너를 구원할게.” 라는 소리를 들어야 되고 우리도 지금 듣고 있어요. 우리도. “니가 예수님 믿으면 나는 천사 게. 니가 예수 믿어 천당 가면 나는 장동건이다.” 이래 가지고. 그래서 듣고 주님께서 오실 때, “봐라, 니가 믿었던 제자들 한 번 봐라, 니가 믿던 인간 꼴 좋다. 뭐~ 천사가 온다고? 천사 오지도 않았어! 십자가 그냥 곱게 갔어. 끝났어. 게임 오버야! 죽었으면 끝난 거야.”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것이 우리 인생에 경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체험에 없는 거예요. 지금 우리 체험에 없는 체험 속에 주께서 찾아오셔서 집어넣으니까 우리도 이 땅에서 덩달아 바보 되어 버렸어요.
교회가면 고생된다, 하나님께서 착한 걸 원합니다. 예수 믿었으면 성화해야 됩니다. 착한 일을 해야 영광 돌립니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런 걸 익히 알고 있는 그래서 나는 질 좋은 나, 남한테 지기 싫은 나, 기도도 남이 2시간하면 나는 3시간, 헌금 천 만원하면 나는 이천만원, 그런 식으로 모든 게 익히 아는 방법으로 나 됨을 확장시키는 그런 방법인데, 어? 강도도 구원받고, 창녀도 구원받고, 피로서 구원받고, “에이씨~ 그거 이상한 소리다! 그건 내 아이디어에 없는 이야기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십자가는 끝났고, 십자가 다음에는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가 중요한 문제야.”라는 생각을 우리가 갖게 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던 나의 확장으로서의 체험입니다. 평소 우리가 생각한 것이 얼마나 육신적인입니까?
그래서 주께서 시험을 돕는다 하는 것은 요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사운드오브뮤직에 보면, 트랩대령 집에 오스트리아의 제독 아닙니까? 여러분 오스트리아에 바다 있는 줄 몰랐지요? 옛날에는 제국주의들이 식민지 개척에 바다가 있었어요. 해군도 다 있어요. 그 사람이 나치가 쳐들어와서 오스트리아를 먹지요. 먹을 때, 자기는 반대하지요. 그 때 친 나치 쪽이 고발해 들어갑니다. 그래서 트랩대령은 사랑하는 수녀 마리아역의 줄리 앤드류스하고 에델바이스를 부르면서 탈출을 감행하지요. 가족 노래자랑 할 때 잠자는 노래 부르고 난 뒤에 불 끄고 심사회할 때, 그 때 아슬 하게 빠져나가 가지고 수녀원으로 갑니다. 대령 딸의 애인이 밀고해서 독일군이 따라왔어요. 그 때 수녀가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이야기를 했거든요. 그거는 아니거든요.
우리의 시험은 이미 구원받았기에 주님의 체험을 알기 위해서 우리 체험을 신뢰하지 말라고 준 시험이 체험이에요. 우리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어떻게 하면 독일군에게 안 잡힐까하는 그 자체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우리의 희망, 살 길에 불과한 겁니다. 그 때 빠져나오면서 부른 노래가 산을 넘고 강을 넘어서, 행복은 저 위에 하는 노래가 있어요. 끝나면서 마지막 노래 따로 있어요. 원래 마지막 주제가 나오면서 끝나잖아요. 그 수녀가 탈출합니다. 등으로 비춰서 발견했는데, 애인이라서 쉿 !하고 아무 소리 안하고 그냥 넘어가서 탈출합니다.
얼마나 우리는 평소에 내가 힘든 일 있을 때, 그것을 주의 은혜라고 일방적으로 번역해 왔느냐 이 말이지요. 그런 모든 종교 다 있거든요. 진짜 우리가 시험에서 늘 벗어날 때, 나오는 그것은 뭐냐, “나는 죄인이군요.” 라는 고백만 나왔을 때, 그것은 이미 주께서 시험에 주님의 십자가 체험에 부정법적으로 이미 합치된 겁니다.
나는 내 살 것만 챙기는 못된 놈이라고 느낄 때, 이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회개인 동시에 감사고. 세상에 요런 거 암 나으려고 병 나으려고 기도하다니 죽는 게 복인 줄 모르고 이 나쁜 놈아! 할 때, 그게 바로 회개에요. 암 낫게 해줘서 내가 얼마나 좋은지, 교회에서 선전하게 과시하는 이게 아니고 내가 참 살 필요도 없는데 자기 자신이 지워지는 “나는 니하고 안 놀아.” 왜? 나는 착하기 때문에 이게 아니라 “나는 니하고 사귀면서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라는 것을 밝혀주니까 친구야, 고맙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친구야, 고맙다!
그게 바로 그 시험이 어떤 인간도 빠져나올 수 없던 시험을 이미 빠져나온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주님의 체험에 풍덩 호수에 적셔보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터져 나오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모든 게 주의 말씀대로 되어 가는데 그것이 우리 속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지키려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이미 주님이 접수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