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완성된 안식(히3;16) 1309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5. 3. 07:21
2013-09-14 01:20:48조회 : 1602         
완성된 안식 130913 이름 : 이근호 (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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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3.179)13-09-30 10:59 
안양130913a-히3장16절(완성된 안식)-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 3장 16~18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본문을 보면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천국 가는데 방법이 한 가지 방법인가, 다른 방법이 있느냐, 라는 그 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입니다. 물론 십자가로 구원받는데 그 모양새가 이쪽의 히브리서 같은 경우에는 순종치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고 반항하면 못 들어간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히브리서 3장, 4장 결정적인 내용이 뭐냐 하면, 믿지 아니하면 그 다음에 순종아니하면 다른 말로 반항하면 못 들어간다. 그런데 여러분이 다 아시겠지만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 보면, 그 때 너희에게 도적같이 온다고 했거든요. 도적 같이 온다. 한 가지만 더 해보지요. 하나님은 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구원받는다 했지요. 법이 아니고 사랑으로 영생 얻는다. 요한1,2,3서에 다 나오고 서로 사랑하라, 사랑 외에는 다른 계명이 없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셋 중에 우리가 어느 것을 골라잡아야 될 문제입니까?

히브리서 3장에서는 순종치 아니하면 못 들어간다. 데살로니가전서 같은 경우는 깨어있어라, 깨어있어야 되지 안 깨어있으면 도적 같이 오기 때문에 안 깨어있으면 못 들어간다. 그 다음에 로마서나 이런데 보면, 법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모든 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 더 보탠다면 십자가에 같이 죽을 경우에만 들어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로마서 6장에도 그리스도와 합한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고린도전서11장에 보면, 성만찬 그러니까 예수님의 떡을 뗐을 때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다, 했고 만약에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고 떡을 떼게 되면 그것은 안 된다 했어요. 어떤 사람은 죽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자기 죄를 살피고 성만찬을 오실 때까지 할 것이다. 얼른 들어보면 성만찬 안하면 참석 안하면 그것은 탈락자 인 것처럼 느껴지고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떻게 영생을 얻지요?

한 번 적어봅시다. 성만찬. 끄집어내려니 한 두 개가 아니네요. 이사가려하면 갑자기 짐이 많은 것처럼. 요한계시록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안돼요.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은 죽은 척처럼 충성하면 안 되고  죽도록 충성해야 돼요. 죽도록. 요한계시록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안 되고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어느 나라 못 간다?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는 거예요. 자, 그만 합시다. 성경 다 나오겠습니다. 영으로 거듭나야 된다. 7가지인데, 이게 골라잡을 문제입니까? 이걸 어떻게 하나로 묶어야 되는 겁니까? 이왕 나온 거 하나 더 해봅시다. 8번 로마서 10장, 코앞에 있는 눈앞에 있는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고 시인하게 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리 되어 있어요. 고백 안하면 안 된다는 거죠. 주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마음으로 시인해야 되고 입으로 고백하면 안 되고 마음까지도 그 시인이 되는 상태에서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서 그래서 구원 받는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3장 3절에 거듭난다는 이야기 있죠. 영으로 거듭난다는 요 이야기 빼보면 다 누가 손질하는 거예요? 영으로 거듭나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이건 성령의 몫이고 그 외 나머지 6가지는 전부 다 이것은 어떻게 돼요? 도적 같이 오니 깨어 있어라, 는 누구 보고 다구 치는 거예요? “똑바로 해! 이것들아!” 이거 아닙니까? 자지 말고 깨어있어라, 그러면 우리는 안 깨어있을 때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안 깨어 있으면 니 놔두고 가지. 그럼 올 때는?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오지.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 다 인간들이 구원받은 성도가 갖추어야 될 그러한 자질 같은 거 그런 것처럼 비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해야 될 히브리서 3장 같은 경우에는 순종치 아니한 사람 그리고 원망한 사람, 4장3절에 보면,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이 말씀을 줬건만 그들이 믿음으로 믿음을 화합치 아니했다. 화합치 아니했다는 말은 말씀 주신 취지를 취지에서 동감하지 아니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주신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야 되는데 주님이 주신 마음은 따로 이고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따로 이었을 때는 믿음이 같지 않다. 화합하지 않다. 마주치지 않았다.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이야기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3장과 4장 초반에서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이렇게 해서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넣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겁니까? 싫거든 오지 말라는 쪽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싫거든 오지 마! 니에게 말씀 준 취지 몰라? 모르면 오지 마! 이런 뜻이에요. 배짱도 이런 배짱 없습니다. 오지 마!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에서 나올 때, 찬양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어제 내가 잠을 잤던 체육관하는 부부가 일을 저질렀어요. 50평사는 전세에서 주인이 나가라는 거예요. 남편은 벌벌 떠는 타입이에요. 덩치는 이런데 마음은 돈 한 푼 벌벌 떠는데 여자 분은 통이 커요. 에이~ 이참에 대출받아서 사 버리자. 그래서 사버렸어요. 가자마자 제 아내가 일을 저질렀어요. 그래서 이사를 했다는 겁니다. 부정적으로 어떤 것을 할 때, 약속의 땅이 있다. 우리는 그 땅에 들어간다. 신난다. 우리는 확정된 거야. 구원된 거야. 라고 하는 애굽에서 나왔던 그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을 시체로 만들어서 엎어지게 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라고 한 거예요. 아~ 그러니 여기 이 말은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히브리서를 표준으로 한다면 7번을 빼고 나머지 1번~8번이 맞지를 않아요. 백날 교회 다녀도 어느 순간에 8월 달 까지 예수 잘 믿었는데 9월 달 접어들어서 아이고, 하나님 싫습니다. 한 소리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10월 달에는 지옥 가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될 경우에 성경자체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내가 일을 저질렀어요. 막대한 대출을 내어서 갚을 재주도 없이 집을 사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조마조마한 거예요. 돈을 어떻게 하느냐, 약간은 걱정을 하고 있어요.

만약 아내가 하나님이고 남편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믿음이 화합치 않는 거예요. 그 배포, 그 배짱을 남편이 따라갈 수가 없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계획으로? 무슨 계획으로 그렇게 대출을 해버렸느냐, 이자 싼 게 나왔답니다. 2.6%짜리 나와서 했답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가 뭐냐 하면, 남편이 그 아내가 집 산 것에 대해서 계속 궁시렁 궁시렁 불평하고 반항하게 되면 믿음이 화합치 않기 때문에 아내와 갈라서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그 집에 같이 살 수가 없어요. 그 집에. 그러면 제가 한 이야기 된 거죠.

안식이란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을 하나님께서는 통 크게 턱하니 그만 그 집을 천국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문제는 거기에 들어갈 사람들이 겁을 먹고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도저히 해도 대출을 갚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화가 나느냐 하면, 일을 저지른 아내 쪽이 화가 나는 거예요. 평소에는 나하고 마음이 맞다니 어떠니 하더니 그 집에 가면 결혼할 때 사진 찍은 거 걸어 놓고 요새 젊은 사람들 사진 찍잖아요. 사진만 찍었지 막상 어떤 가정에 일에 있어서 마음이 하나 되지 않을 경우에는 나는 당신하고 못 살아.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집에 못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요걸 같이 줄여버리면 하나님은 언약을 살리는 게 목적이지 우리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보시면 7번 뺀 나머지 1번~8번 다 맞아요. 다 맞는다고요. 히브리서 1번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7번 같은 경우에는 영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늘나라를 본다 할 때에 사람들이 이 대목을 1번 히브리서 3장과 4장과 연결시켜서 7번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늘나라 거듭난다고 이해를 해줘야 되는데 히브리서를 모르고 7번을 그냥 멋지다! 성령으로 구원받게 되고 이렇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못 거듭나게 해줘가지고 환장하신 분처럼 그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사랑하니까 저, 거듭나게 해주세요.” “해주세요. 해주세요. 이~잉 해줘!” 이리 된다 말이지요. 주님은 “싫으면 말고.” 그러는데 이게 1번이잖아요. 1번과 연계된 7번해야 7번이 나와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는데 관심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안식에 관심 있고 언약 완성에 관심 있어요. 관심사는 따로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싫으면 말고. 오지 마! 누가 오라했어?”

애굽에서 일단 탈출시켜 줬으면 기본적으로 다 구원해줘야 이게 사람들 앞에서 좋은 이미지의 하나님으로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니한테 좋은 이미지 하나님 듣기 싫거든.“ 이리 하면 그만이에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드리헵번 닮았습니다.“ ”나는 니한테 그런 소리 듣기 싫거든. 어디를 견줘.“ 하나님은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세상의 어떤 것도 이 하나님과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1장부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천사와도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에 죽 나오는 겁니다.

어딜 인간하고 피조물하고 예수님을 비교하느냐, 어딜? 구원해주면 고맙다고 깨갱하고 있어. 내 이 거룩한 하나님이 봐줄 필요도 없는 걸 봐줬으면, 뭐 내 인생 이리 꼬였습니다. 한 달 수입이 적습니다. 애 수능 점수가 안 나옵니다. 어디 감히 천사보다 우위인 주님보고 애 수능 문제가지고 그걸 가지고 기도하고 말이지요. 이건 날 우습게 봐도 보통 우습게 본 게 아니에요. 그런 거 기도한다는 자체가 불만 있다는 뜻이거든요. 불만이면 오지 마! 그러면. 이게 히브리서에요. 아~ 이거 진짜 대단한 배짱이죠. 그런 시시한 것 가지고 기도하려고 주여, 도와주소서. 하면 오지 마! 오지 마! 귀찮아! 나는 니 소원 중심이 아니야.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유가 히브리서 뒤편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을 때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예수님께 들어있지 않았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들어있으면 사람들은 구태여 미워할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만 빼먹으면 되니까. 그런데 예수님 속에는 인간이 원하는 게 전혀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가니까 실제 나타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원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망이 안 될 수가 없어요. 왜? 자기 나름대로의 약속이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약속이 있어요. 그 약속은 자기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런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약속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이게 마찰이 되고 다툼이 되고 싸움이 돼요. 주님께서는 이리 합니다. 싫으면 말고! 이리 나오니까 주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주님하고 대화 자체가 되지를 않지요. 그런데 주님보시기에는 내가 너희들하고 대화할 상대냐 말이지요. 내가 너희들하고 같이 이바고하고 고스톱치고 그런 상대로 보이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하고 이미 일을 끝내놨어요.

끝냈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되지 궁시렁 궁시렁 거리지 말자 말이죠. 인테리어는 이리 해야 되고 천국 출입구는 여기 만들어야지 저기 만들면 안 됩니다. 여기는 장미 하나 심어야 되고 생명나무는 가로수로 이리 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인테리어 할 아무 개입할 것도 없어요. 천국의 건축학 개론은 주님 혼자서 다 했어요. 우리로선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주님의 건축은 끝내놨습니다. 자기의 약속에 의해서 끝냈습니다. 그러니까 싫으면 말고!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것만 봅시다. 도적같이 온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러면 히브리서 1번과 연관시켜서 봅시다. 도적같이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은 혁명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혁명 알지요? 데모하는 거. 완전히 청와대 쳐들어 가지고 뒤집어버리는 거 탱크 앞세우고 쿠데타 일으키는 게 혁명이잖아요. 우리는 획기적인 혁명을 원해요. 그런데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모든 사항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약속 있다고 했지요. 나름대로 약속이 있어요. 내가 구원받는 그 과정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갖고 있어요. 인간은. 나는 교회에 갔다. 교회에 갔다는 것은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임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방언을 했다. 다른 옆에 있는 집사가 부러워 미친다. 어느 날 기도를 못해서 벌벌 떨었는데 어느 날 새벽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터져 나왔는데 기도하다 보니까 온종일 4시간 반이나 신기록을 세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권사가 약 올라 미친다. 드디어 나는 교회 가는 보람을 느낀다. 이제는 목사님도 나를 칭찬해준다. 중직을 맡긴다. 중직은 맡은 후 더 기분이 좋아서 기도를 했더니만 우연히 뭔가 안수라도 해주니까  다음 날 병이 낫다고 했다. 혹시나 내가 실수했나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또 해보니까 똑같이 병이 낫다. 드디어 나는 능력자구나! 이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되지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쓰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짐에 다짐을 했고 이제부터는 갑자기 교회에서 부른다. 부르고 병자들이 온다. 드디어 초대교회의 화신이다, 이래가지고 불렀다. 부를 때 나가는데 보니까 봉투에 두둑하니 주더라. 여러 군데 오니까 계산해보니까 세금 안내고 한 2000모으겠더라. 온갖 시나리오를 다 짜지요. 앞으로 주의 종 나한테 나쁜 소리하면 내가 저주해 버리고 저주 받는다. 온갖 시나리오는 다 있지요. 요거 다 사기입니다. 마귀의 장난입니다. 혁명이에요.

그런데 진짜 성령 받으면 슬그머니 내가 달라졌어요. 쥐도 새도 모르게. 아침에 눈 뜨고 나니까 성도됐어요. 그런 식으로.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되는 줄은 나도 모르겠어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안돼요. 내가 신자가 된 게. 어떤 요란스러운 징후나 징조도 없었어요. 뜨겁지 아니하느냐, 뜨겁지도 않아요. 말씀이 뜨겁지 아니하냐 했는데 뜨겁지도 않았어요. 그건 베레아 사람한테 이야기한 거고. 뜨겁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다만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뿐이에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 죄를 용서한다는 것. 그 말은 뭐냐,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 용서 받았기 때문에 더는 무슨 짓해도 죄인이 안 된다는 사실이 어느새 믿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걸 어떻게 예를 들까 싶어서 기껏 생각한 게 그겁니다. 아침에 해 뜰 때 그 해가 뜨는 순간과 지는 시간을 유난히 지켜봐도 그게 잘 볼 수가 없어요. 뚫어 하는 것으로 뽑아 당기는 것 같아요. 낙지머리를 확 잡아당기는 것처럼 해가 뻥하고 뚫리듯이 쑥 잡아당기고 해질 때는 반대로 천천히 지다가 갑자기 질 때는 구덩이에 빠지는 것처럼 쑥허니 대머리가 확 빠져버려요. 아~~ 그 순간, 봐야 되는데. 보다가 디디디디~ 문자가 와서 보다가 그만 해 져버렸어요. 해 떠버렸어요. 그 마지막 순간에 프로포즈 하려고 했는데, 프로포즈  시기를 놓쳐 버렸어요. 그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변화에 대해서 그 과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결과만 믿게 하지, “어떻게?” 그러면 “니 몰라도 돼!” 알게 되면 남한테 그걸 써먹으려고 해요. 자랑질 하려고 하고.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만 당신도 기도해봐라, 이렇게 되기 때문에 절대로 혁명이 아니고 도적같이 믿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믿은 것도 도적같이 믿었기 때문에 주님도 그렇게 오시는 거예요. 성령이 오거나 주님이 오시거나 다 도적이에요.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어느 새 아침에 깨어보니까 이미 가재도구는 다 날아갔어요.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는 것이 그 전날 잘 때는 내 자랑 해야지, 이거 해야지, 성공해야지 하다가 아침에 눈 떠보니까 전부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순간이 오면 도적이 왔다 갔다 보면 돼요. 도적이 다녀가신 거예요. 그걸 가지고 여기서 사랑의 법이에요.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간 사람. 아가서에 보면 사랑은 죽음보다 진하다 했습니다.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사랑은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누가 그 사랑을 끊으리오. 사랑은 절대로 안 끊어져요. 그걸 옛날 시대에서는 큐피드라고 하잖아요. 화살이 꽂혔다 이 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어떤 가수는 총 맞은 것처럼. 그 만큼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작업했다? 안 했다? 없는데 그냥 나를 쓰러뜨리면서 온 거예요. 이질적이고 외부적이에요. 구원은 외부에서 나를 쓰러뜨리면서 덮쳐서 나를 데려가는 겁니다. 일종에 주께서 하시는 성폭력, 강간, 성폭행입니다. 완전히 나를 신부로서 장악해 가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에요.

니고데모가 실수한 것은 성령이 어떻게 오십니까? 그게 궁금한 거예요. 그것은 이야기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껏 한 게 바람같이 하신 거예요. 바람이라 하는 것은 기류의 압력의 변화에 의해서 바람이 옵니다.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불거든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이. 곧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것이 바람이에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면 그게 성령의 바람입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하늘이 와서 덮쳐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법을 행함이 아니고 사랑으로 구원받고 그것은 마치 도적같이 찾아오게 되고 그 다음에 이미 그 사랑으로 인하여 이미 우리는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산 사람이 되고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내 소관이 아니고 왜냐, 말씀이 들어오기 때문에 알아서 하니까. 나는 매일 살려고 했는데 주께서 죽도록 충성했다고 이야기해주니까 듣는 내가 미안스럽지요. “죽도록 충성한 거야.” “저는 한 게 없습니다.” “어이, 천국 가는 사람은 죽도록 충성한 걸로 되어있어. 원래.” “원래 그런 거야.” “믿어!”

그러니까 기존 교회에서 하라, 하라, 하는 것이 전부 다 뭡니까? 전부 다 거짓말 되는 이유가 히브리서에 보면 자기 나름대로의 시나리오가 따로 있어요. 이걸 버려야 되는데 이걸 쥐고 성경에서 하라하는 것을 여기에다가 다 우겨서 집어넣으니까 나중에는 지 풀에 지가 지쳐가지고 “아이고, 40년 믿었는데 설마 지옥에 보내겠는가?” 이리 나오지요. 주님께서 “그동안 니 뭐했는데?” “구원받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니까 육으로 난 것은 ”아마도 이쯤 돼서 주님 오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도적같이 오는 거예요.

성경의 모든 것은 인간이 뭐 해보겠다는 것을 피해가는 쪽으로 말씀을 주신다고 보면 돼요. 그 취지는 “싫으면 말고!” 이런 식으로. 그래서 히브리서 3장, 4장에서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광야에서 격노케 한 자가 누구냐? 애굽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본격적으로 본문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3장 한 번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단어를 끄집어내봅시다. 단어 하나 꺼내어 설명하면 되겠지요. 애굽나오지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40년 나옵니다. 성경에서 숫자 이야기할 때 굉장히 주의를 요합니다. 그 다음에 광야 나오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노, 광야, 40년, 애굽. 요 네 가지의 단어를 가지고 성경을 전혀 모른다고 치고요. 네 가지 개념 되는 단어를 가지고 간단한 문장을 써보세요. 라고 시험이 나온다면 우리는 시험 치게 되면 우리는 거의 100% 정답이 아닌 게 나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여기다 이렇게 가지고 가게 되면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전제로 깔고 이 4 가지 문장가지고 이어서 글을 쓰게 되어 있어요. 일단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라는 전제를 깔고, 주체가 누구냐 하면, 결국 구원의 주체가 내가 똑똑해서 구원받은 셈이 되지요. 그렇잖아요.

성경 말씀을 어떤 사람은 100독 1000독 했다는데 1000독 하면서 이 히브리서 3장 대목, 4장 대목을 얼마나 그냥 지나갔겠습니까? 이유를 모르고 100독 1000독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항상 보면서 딱, 나네.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네. 자기 구원받은 걸로 자꾸 하니까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여!” “왜?” “아이고, 무슨 수로 구원받습니까?” 이리 나와야 정답입니다. “그래, 내가 기어이 성경말씀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그래, 나는 순종하고 원망하는 말 안해야지.” 이리 나온다는 것은 성경을 곡해해도 보통 곡해한 게 아니에요. “주님이여, 그렇다면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이야기를 주님께서는 하셨습니다.” 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보고 니가 한 번 글 써봐라. 그러면 뭐라고 쓰겠습니까? 나도 불가능합니다. 약속대로 못 갑니다. 그러면 요 네 가지 문장가지고 글을 쓴다면 이렇게 할 거다 말이죠. 나를 포함해야 됩니다. “나와 그리고 같은 동료들은 애굽에서 살다가 애굽에서 나왔다. 나왔는데, 아~ 보니까 광야가 가로막고 있더라. 광야 지나면 천국이라 열심히 해봤는데 물이 있어 전진도 못하고 양식이 있어서 어디 풍족히 갈 수도 없고 결국 우리는 갈 수 없는 그 지역을 우리는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옆 사람이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을 이해한다. 왜? 나도 같이 원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를 한다는데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우리한테 너무 심한 처우를 해주신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했는데 그 약하디 약한 우리를 향하여 진노한다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끝.

생각해보세요. 여호와증인이 지옥을 안 믿는 이유가 다 인리가 있어요. 지옥에 간 사람들이 일종의 개미 같은 사람 아닙니까? 주식시장의 개미. 기관투자가가 아니고 역외기관 투자가도 아니고 몇 푼 살림살이 나아질까 싶어서 있는 돈 없는 돈 해약해서 몇 백 몇 천 재미삼아 했던 사람이에요. 개미 같은 존재입니다. 그 개미 같은 존재가 죄를 지어도 얼마나 지겠습니까? 그들이 죄 진다고 하늘나라가 없어지고 천지가 개벽하는 게 아니잖아요. 철딱서니 없잖아요. 천국 본 것도 아니고 지옥 본 것도 아니고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제 이야기 잘 들으셔야 돼요.

지금 광야에서 하나님이 진노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 죽이려고 한 사람이 아니에요.  배고파서 배고프다고 했고 목말라서 목마르다고 했을 뿐입니다. 이 연사는 외칩니다. 정말. 그러면 배고픈데 참으란 말입니까? 지 목마른 것은 참을 수 있어요. 이제 난지 갓 1개월 된 애, 그 목마르다 할 때, 엄마가 손가락해서 혈액형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해서 수혈하듯이 그 정도의 심정인데 그걸 나무라고 탓해버리면 더 이상 우리보고 어쩌라고?

애굽에서 살아온 방식이 뭡니까? 양식이 있어 양식 먹고 물 있어 물먹고 기껏 배운 게 그것 밖에 안 배웠는데. 그거 없다고 약간 원망 좀 했더니만 그거보고 하나님이 진노를 낸다하면 진노 안 받을 만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인간으로서는. 없지요. 왜냐,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애굽에서 나온 거예요.

이제 주님의 정답을 말씀드리겠어요. 애굽에 문제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애굽에서 살았다는 겁니다. 자, 중요한 건데. 사람들의 생각은 뭐라고요? 나는 애굽이라는 지역적인 지리에서 살았다 하지요. 애굽을 하나의 지리이고 그냥 일상 땅이라고 생각한다면 약속의 땅은 못 갑니다. 약속의 땅을 가봐야 그곳도 땅인데요. 아니 땅에서 살던 인간이 땅에 못 들어갈까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늘 동네 목욕탕에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36장(요한계시록 36장은 없습니다.) 너희들은 나의 목욕탕에 가라, 이러면 우리는 준비할 게 뭡니까? 우리가 기껏 동네 목욕탕에 배운 게 뭐냐 하면, 목욕 타월하고 샴푸하고 때밀이하고 몇 가지 갖고 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 목욕탕 오너라 하니까 뭐 이거 다 아는 거 아닙니까? 그럼 뭐 준비하면 돼요? 동네 목욕탕갈 때 했던 거 준비하게 되면 어디에 간다? 하늘나라 목욕탕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 왔는데 이것은 샴푸도 없고 물도 없고 하니까 어디서 목욕하라는 말입니까, 하다가 다 죽었어. 애굽이 문제였어요. 애굽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그 동네가 문제에요. 우리 살던 동네가 천국을 못 가게 만드는 동네입니다. 못 가게 하는 동네에요.

제가 개그콘서트 보면서 인상 깊게 본 것은 황해라는 코너에 보이스피싱하는 대목이 있잖아요. “신입이 이렇게 해서 밥 빌어먹고 살겠어?” 해가지고 빼먹어야 되겠지요. 그 연변 그 동네에서 그 일만 한사람들이 만약에 한국에 와서 직업을 할 때 어떻게 하면 빼먹을까만 생각한다 말이지요. 왜? 배운 가락이 그것만 배웠기 때문에. 적응할 수 없지요. 천국에 가려면 지상에서 했던 삶을 가지고 천국에 못갑니다. 이게 삶의 모든 게 다 달라졌어요. 사람이 바뀌지 아니하면 천국 못갑니다. 인간자체가 바뀌어져야 돼요.

에이, 그러면 뭐~ 주님의 피로 다 구원한다며? 이건 전부 다 예수의 피로 가는 것은 그러면 미끼상품이었나? 이제 와서 왜 딴 소리합니까? 진작부터 인간 바뀌어야 한다면 예수 피 생각 안하죠. 그의 피로 구원 받는다고 그렇게 수천 만 번 이야기해놓고 이제 와서 인간 바뀌라 하면 자, 그럼 예수 피도 믿어야 돼,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 그 다음에 인간 바뀌어야 돼. 또 몇 년 뒤에 가면 이 근호 목사 또 한 가지 더 해야 돼 해서 3가지해야 되고. 아이고, 집어 춰! 한가지라 해서 좋아했더니만 세 가지하라니 이제 와서 딴 소리하니 사기꾼 같아. 이럴 조짐이 있지요.

인간 안 바꿔집니다. 인간 못 바꿔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도 안 바뀝니다. 그래서 미리 당겨 죽이는 거예요. 죽으라고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살려고 이 땅에 살잖아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 어제 밤에 남의 집이지만 갑자기 밤중에 소나기가 쳐가지고 창문을 닫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객지에 와있는데 비가 때리더라, 그런데 지금 어떤 집이 주무세요, 해가지고 참 고맙게 왔지만 만약에 이 시간에 갈데없으면 한데 있으면 비 다 맞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해도 일단은 비 피할 수 있는 집은 있어야 되고 하여튼 동굴 속에 가던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동굴 속에서 나오면 배고프다니까요. 기본적으로 먹을 게 있어야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텐트를 갖고 나왔거든요. 텐트 갖고 나왔는데 뭐가 없습니까? 먹을 건 없고. 돼지고기 뜯고 하면 나중에 목 막혀요. 물이 있어야 되거든요. 또 씻어야 되고. 특히 어린애들은 씻지 않으면 병균 있으니까 씻겨줘야 되고. 물이 있어야 되고 아~ 그게 보장되지 않았는데 무슨 하나님을 믿습니까? 천국은 나중 문제에요. 지금 당장 때 거리 없는데 나중 문제를 왜 생각합니까?

요새 젊은 사람들 보고 자녀들 보고 “야, 야, 복음 알아야 돼.” 하니까 지금 당장 일해서 월급 탈 게 문제지, 천국은 죽어서 문제지, 그거 엄마 자꾸 나한테 그 소리 하지 마, 나 지금 급한데 결혼준비 해야 되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 심성을 우리 힘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애굽에서 우리를 떠밀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애굽하고 격리되는 게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왔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 앞에 뭘 줬는가 하면, 죽음으로 이걸 단절시켰어요.

어린양도 죽음이죠. 그리고 홍해 건널 때 누가 죽었습니까? 나중에 홍해 말라보세요. 애굽 시체들이 가득합니다. 지금. 홍해가 안 말라서 그렇지. 말라보면 애굽 군사들 수십만 군사들 다 죽어있어요. 분명히 죽었는데 그들은 안 죽고 살아났잖아요. 어린양 죽을 때 장자 죽었잖아요. 그런데 맏이는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물론 나중에 맏이를 아버지께 돌려드려야 되지만. 분명히 죽음을 코앞에까지 보여 줬건만,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가 눈앞에 있거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되거늘 십자가가 코앞에 있어도 안 보이는 거예요. 아, 어떤 아저씨 죽었구나, 이리 돼 버리는 거예요. 그 십자가가 내 속에까지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왜? 아직도 애굽이 죽음으로 단절이 되지를 않았어요. 애굽에 살았던 것은 다 죽어야 돼요.

여기 광야에서 누가 죽습니까? 이스라엘 가운데서 애굽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죽어요. 달랑 두 사람만 빠지지요. 여기서 그 죽었던 사람 지옥 가느냐, 그 문제는 생각하지 맙시다. 지옥이란 개념이 최종 확정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하는 것은 광야에서 죽었다. 그 당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은 건데.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는 무슨 흔적을 다 지운다? 애굽에서 놀던 가락은 다 지워야 돼요. 죄는 천국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죄는 천국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이게 제 생각 아닙니다. 주님 생각입니다. 저는 그냥 전할 뿐인데.

하나님께서 세상 적으로 놀던 거 그거 죽음으로 끊어지지 아니하면 어림도 없다 이리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죽어야 돼요. 그런데 성도한테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것을 죽는 삶으로 간주 시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죽음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느끼게 만드는 하루, 하루의 삶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하루 왼 종일 살고 주여,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깨닫게 하는 사람,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미리 앞당겨서 우리와 함께 동반하고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죽음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히브리서3장에는 빠져있지만, 이리 보면 돼요. 회개하면 살아요. 비록 약속의 땅에는 못 들어갔지만 모세는 자기가 성질 낸 것에 대해서는 회개를 한 겁니다. 모세가 회개했다, 어디 나오느냐 변화 산에서, 회개가 딴 게 아닙니다. 반성하는 게 아니거든요.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왜?” “나는 죄인이거든요.” 이게 회개에요. “아, 광야생활해보니까 때려 죽여도 애굽 못 버리겠네.” 이게 회개라니까요. “주여, 나는 사나 죽으나 나는 살 궁리밖에 안하는 인간입니다.” 이걸 자백하는 게 십자가 앞에서 자백하는 게 회개에요. 혼자 자백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의 곧 별세할 것 앞에서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죽으십니까? 주님이 죽어야 삽니다, 하는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지금 하루, 하루 사는 것도 온종일 내 살 궁리밖에 안습니다. 이정도로 죄인입니다. 라는 생각이 이것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겁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걸 가지고 인간 바꿨다고 하는 겁니다. “뭐, 목사님은 십자가 피만 믿으면 된다면서요.” 그게 피 믿는 거예요. 그게 피 믿는 거고 그게 사람 바뀐 거예요. 이제 피 믿었으니까 이제는 나는 또 내 궁리를 해야겠다. 이러면 바뀐 게 아니라니까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 피는 약처럼 먹는 보약이 아니라고요. 자,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애굽은 늘어진 엿가락처럼 죽~ 끌려나옵니다. 애굽에 살던 자가 오니까 이게 애굽의 엿가락이 같이 묻어있네요. 뗄 수가 없어요. 떼고 사는 방법을 몰라요. 왜? 새롭게 사는 방법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은 애굽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이리 산다 해서 거지로 만들어 놨어요. 아침에 나오면 전부 다 맛나 주워 먹는다고 이게 거지에요. 거지. “아이고, 양식.” 이런 식으로.

또 애굽에서 입맛 들은 게 있어요. 육류.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호주산 쇠고기. 일체 주지를 않았어요. 입맛은 고기 먹는 입맛이고, 이건 맛나만 주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력이 쇠했다 해요. 애굽 식으로 해서 기력을 생산하던 그 방식을 못 버리겠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우리 하루, 하루 삶이 그래요. 아무리 하나님이 예수님이 주님께서 십자가 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못 살겠습니다. 천하에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했지만 난 그 짓 못합니다. 내 자식 내 처자가 최고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삽니다. 그렇게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는 게 그게 바로 죽음 받고 있는 중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그렇게 고백할 대상이 없어요. 왜냐 하면, 성경 말씀을 안 믿으니까. “그 때 노하셨대.” “나는 성경 말씀 자체를 안 믿어. 따라서 누구도 나에게 노한다는 것에 대해서 신경 안 쓰겠어.” 이게 불신자잖아요.

그런데 신자는 이 말씀이 생각날 수밖에 없지요. 아, 요 내 하는 짓이 애굽 짓이고 요 애굽 짓이 천국하고 너무나 안 맞기에 주님께서 노하심으로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못 간다는 것을 누누이 우리에게 챙겨주시는 작업을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해주시는 겁니다. 애굽은 늘어졌다. 엿가락이다. 떡가래나 엿가락으로 생각하시면 쉽고, 40년 요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공은주 (IP:218.♡.193.179)13-10-03 08:33 
안양130913b-히3장16절(완성된 안식)- 이 근호 목사

40년 하겠습니다. 40년의 의미가 뭐냐 하면,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40년이라 하는 것은 죽음에 갇혀 있는 세상을 숫자로 표현한 거예요. 세상은 닫혀있고 세상은 끝이 있고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시간이 길게 해봐야 결국은 40년 밖에 안 되는 거죠. 광야 40년이 뭐냐 하면, 어떤 의미가 있느냐, 애굽을 대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실은 애굽을 대표하는 하나의 사람이라 보면 돼요. 그 사람들 다 죽이는 기간이 광야에서 40년이었습니다. 다 죽이는 기간이. 그리고 그들이 원망했으니까 40년 동안 다 죽이거든요. 그런데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곧 이세상이 죽어야 될 이유하고 같은 이유가 되는 겁니다.

40년이라는 것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구약의 광야 이야기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고난 받았지요. 시험받았지요. 40일 동안 시험받는다는 것은 이세상이 전부 다 죽음이라고 했을 때에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누가 와야 드러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와야 예수님이 광야에 40일 동안 있어봐야 그 40일 동안에 이 세상은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가 드러납니다.

첫 째는 돌이 떡 되게 하는 거고, 관심사가 먹어야 산다는 것. 그 다음에 기적을 원하는 신의 기적과 그것이 뭐냐 하면, 뛰어내리니까 부딪혀서 안 죽지요. 역시 또 사는 문제. 그 다음에 세상부귀 영화를 누리면 그게 사는 이유와 목적이 된다는 것. 죽어야 될 세상을 마귀는 사람 살만한 적합한 세상으로 전환하는 이것을 가지고 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죄.

이 세상을 죽음으로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흙이 되라고 죽으라고 갔거든요. 만약에 이 세상이 사는 세상이라면 생명이라는 것이 양쪽 다 나누어져 버려요. 생명나무도 사는 게 되고 그것 말고 따로 지상에 사는 게 있어버리면 미쳤다고 생명나무 따먹을 필요가 뭐가 있어요. 이 땅에서 사는데. 생명나무가 생명나무 되기 위해서는 이 땅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도드라지게 드러나야 돼요. 그게 드러나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살려고, 살려고 해보다 결국은 죽음한테 모이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역사 속에 자식 낳고 죽고 자식 낳고 죽고, 얼마 살았다가 죽었더라, 얼마 살았다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살았다는 어디와 연결되느냐 하면, 언약과 연결됩니다. 에녹은 안 죽었잖아요. 에녹은 노아와 연결된 사람이에요. 노아 언약과 연결됐기 때문에 산거예요.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기이한 것이고요.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마땅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볼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잠시 살게 하시는구나!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살게 하시는 쪽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죽으러 오셨잖아요. 죽으러 오셨는데 마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야, 돌이 떡 되게 하라.” “나, 그냥 죽을란다.” “예수야, 뛰어내리면 안 다쳐.” “나, 그냥 죽을래.” “세상에 나한테 절하면 이거 다 줄게.” “그냥 죽을래. 나는.” 이것이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리고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이 환경이 중요한 거예요. 이것을 그대로 흉내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나는 이런 고백을 해야지, 라고 해서 나만 사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우리는 주변 환경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러면 40년 해봅시다. 구약을 설명할 때에 구약의 의미는 정답은 구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계속해서 밀리기 때문에 신약 쪽으로 멈추지 않고 쭉 밀려요. 컨베이어 시스템 있지요. 선반인데 죽 움직이게 되지요. 자동차 회사나 간장회사 보면 병 놓고 간장 넣고 뚜껑 닫고 자동화 생산되지요. 제약회사나 또는 모든 공장에서는 이 시스템이잖아요. 구약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밑이 움직여요. 어디로 움직일까요? 신약으로 움직이죠.

그림으로 그릴 테니 어느 것이 맞는지 보세요. 구약이 신약과 만나서 예수님을 만나서 신약세대에 완성이 되었다. 따라서 이 세상도 예수님을 만나면 완성된 세상이 된다. 할 때 구약이 예수님을 만나면 완성이 된다, 맞지요. 그런데 이 세상이 예수님을 만나면 완성이 된다. 이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이건 안 맞아요. 왜냐 하면, 요 구약 안에 사실은 이 세상, 저 세상 같이 다 들어있습니다. 다 들어있는데, 밖에 보이는 껍데기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부딪기고. 여리고성? 실제로 있어요. 다윗 왕? 실제로 있는 사람이에요.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다윗 왕이 실제로 있는 인물이라고 밝혀졌어요. 실제로 있는 겁니다. 고고학이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실제로 홍해 있고 지명 있고 다 있어요.

있는 것 안에 뭐가 숨어져 있는가 하면, 장차 올 하늘나라는 그 안에 숨어졌는데 이게 보이질 않네요. 그걸 예수님의 마태복음13장 비유에서는 이를 뭐로 보느냐 하면, 누룩이라고 봅니다. 누룩. 누룩이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누룩은 어느 지점에 있는 게 아니에요. 온통 골고루 퍼져 있는데 그게 작용하니까 빵이 전체적으로 부풀지요.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영 또는 여러 가지 구약 이야기, 생명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오게 되면 이 구약이 두 개가 가면서 두 개로 분류되게 돼 있어요. 자기 속성에 따라서 분류되는 겁니다. 

땅이 있잖아요. 땅은 뭐가 되느냐 지옥이 돼요. 그러니까 땅에 살던 사람들은 뭐냐, 지옥 백성이 되는 겁니다. 너희들이 배나 지옥백성 만든다 하잖아요. 이것이 콘베이어에 구르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구약 안에 들어있는 하늘나라 이 분은 지옥으로 같이 갈 일은 없고, 주님은 음부에 갔지만 사흘 만에 살아났으니까. 구약에 있는 하늘나라는 이 사람들 어디 갔느냐 할 때, 요 지점에서 천국과 지옥이 나눠지는데 이곳에 음부가 있어요. 음부에 집결했다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실 때 이들이 같이 여기서 따라 올라 갑니다.

그러니까 요 갈림길, 갈림길을 주목해야 된다 말이지요. 올라가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 밖에 없어요. 구약에서 예수님만. 예수님과 관련된 영이 구약에 눌러 있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부활할 때 같이 따라 올라가게 되면 구약은 예수님한테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광야 40년 있잖아요. 광야 40년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면, 요 갈림길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거기서 내가 온 것은 죽으러 오셨다는 그런 취지로서 시험을 받으시거든요.

마귀는 뭐냐, 돌이 떡이 되게 해서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 천사가 내려와서 너를 살려줄 거야, 자꾸 사는 쪽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40일 동안 시험받으면서 요게    정답이에요. 정답을 다시 구약으로 들어가서 거꾸로 소급해서 이제 여기서 해석을 해낼 수가 있어요. 정답은 이미 아니까. 그럼 정답 안다면 구약 전체는 뭐냐, 하나의 문제지가 되는 거예요. 원래 문제지 뒤에 해답은 따로 나와 있잖아요. 앞에 문제만 있고. 성질 급한 애들은  마무리 정리한다고 해답보고 하지만. 

구약에 있어서의 우리가 해답을 낼 수가 없는 이유는 우리는 구약에 있으면서 구약의 모든 걸 가지고 살고자 하기 때문에 해답이 안 나옵니다. 하나님 요거 지키면 삽니까? 십계명 지키면 삽니까? 항상 끝에는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삽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 가서 삽니까? 항상 삽니까? 로 해버리니까 주님께서는 예수님 빼놓고 다 죽여 버려요. 사실은 예수님도 죽지만. 예수님 빼놓고 다 죽여 버려요. 왜? 의는 없나니 하나도 없고 그들이 범죄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은 자기 생각밖에 몰라요. 니 사정에 어떤 관계없이 내 영광이 되지 못한다면 너는 좀 죽어 줘! 저주 받아 줘! 이거에요. 니 저주받는 것이 내 영광이라면 나는 너에게 저주하겠다는 거예요.

40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노하셨잖아요. 그 노함이 노함의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노함은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버릴 때 그것은 죄에 대한 노함에 대해서는 나는 어떤 흥정이라든지 양보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거예요. 죄? 없어. 죄?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봐주는 거 없어. 분명히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대신 죄를 졌다는 그 죄 때문이라도 주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버려두신 거예요.

광야 40년은 뭐냐 하면, 인간이 원망했다는 것이고 원망할 때는 “우리는 이런 식으로 못삽니다. 하나님. 하나님이라도 못 살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이런 원망 때문에 그들은 다 죽었고 사실은 갈렙과 여호수아만 빼놓고. 사실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 다 죽이고. 새로 나온 사람들은 애굽의 경험 안하고 만나 먹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만나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먹고 그런데 반석과 만나는 이게 어디에 상주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만나가 여기서 한 5키로 쯤 가면 만나 덩어리가 있는 게 아니고 항상 만나는 없어요.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이 살리는 방식은 없는 데서 있게 하기입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 있다면 우리 속에는 없었던 내가 없는 것이 있게 함으로서 우리가 살게 된다면 우리는 항상 나는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이유만으로 우리는 여기에 있어야 될 사람, 요런 사람을 새롭게 생산합니다. 40년 동안. 40년은 사람들을 조지는 동시에 새로 살 사람들은 원래 너는 없어도 되는데 내가 일부러 너를 있게 만들었어. 라는 것을 알아야 될 사람들은 여기서 40년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럼 누가 우리를 만들었습니까? 할 때 그 없는 것이 너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없는 것인데 보고 싶습니다. 없는 걸 봐버리면 있는 게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있더라도 없는 걸로 치고 있게 하는 기구를 만들었어요. 참 복잡하다. 있는 데도 불구하고 없다고 여겨라. 그걸 뭐냐 하면, 바로 ‘언약궤’입니다. 분명히 있는데 사람들은 구경하면 안돼요. 분명히 있는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제사장 밖에 못 봐요. 그렇다면 없음이 있겠지요. 없는 게 있잖아요. 없는 게 있는데서 솔솔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나와서 짐 밖에 있던 텐트밖에 있던 사람들, 텐트 안 친 사람들, 전부 다 살려내는 그렇게 해서 살아난 나라가 하늘나라, 그들은 이동할 때 약속의 땅 들어갈 때, 뭘 앞장세웁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워요.

없었던 분이 우리를 있게 함으로 우리도 역시 이 땅에는 없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는 없는 민족입니다.  투명인간 같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에이, 다 보이는데. 아이 씨~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본인은 투명한 옷을 입었다 하지만 우리보기에는 벌거벗었어.” 이런 식으로 얼마나 놀리겠어요. “그래, 너희들은 우리를 무시해라. 너희 눈에는 언약궤 안보이지.” 하고 언약궤 들이대고 여리고성 들어가니까 여리고성 사람들은 언약궤 의미를 모르고 다만 저 인간들 왜 저리 뺑뺑이 도나, 어지럽게 만들어서 치려고 하나? 이리 하지요.

언약궤 앞장세울 때, 있다고 하는 나라가 없어진 겁니다. 두 번 다시 여리고성을 사수합니다. 있다고 여긴 것을 없애버리고 없다고 여긴 자만 있음을 만드는 대반전, 대역전, 그것이 바로 광야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40년이라 하는 것은 신약의 예수님의 40일과 견주어 볼 때 이 세상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죽음에서 어느 인간도 단 한명도 빠져나가지를 못한다는 것, 따라서 기존의 있는 인간을 살리지 않고 없는 분이 살려내는 인간만 내가 안식의 나라에 간다고 한 거예요.

그 없는 분이 누구겠어요? 예수님이죠.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자진해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없는 분으로 그걸 예수님은 언약의 완성,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방금 한 이야기가 어디 나오는가 하면, 4장 10절에 나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이리 되어 있지요. 여기에 보면 안식이라고 해놓고 하나님께서 일을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마무리한 일에 참여된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런 분들이겠지요. 구원받은 성도들, 나중에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믿음의 조상들 죽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 일입니까? 그건 자기 일로 구원 받은 게 아니고 누가 일했다? 하나님이 일하신 거예요. 어떤 차원에서? 안식의 일을 하신 거예요. 결국 안식이 들이닥치면 그걸 믿음이라 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고 보지 못한 것의 증거지요. 믿음은 이미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 라고 믿는 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서.

내가 노력한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미 이루어졌기에 주의 일의 차원에서 우리는 그 나라의 참여됐을 뿐입니다. “이리 와! 이리 와!” 자꾸 당기는 식으로. “니는 내가 없는데서 만든 백성이야. 이리 와!” “그 쪽이 아니고 얘가 왜 이러나 또.” 매일같이. “주여, 돈 많이 벌었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그 쪽 아니고 왜 이러나 광야에서 왜 이래? 너는 돈 있으나 없으나 이쪽이야. 안식의 백성이야.” 라고 이끌 때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걸 불순종 있을 수가 없어요. 불순종 우리가 할까 말까가 아니라 이미 그런 믿음이 와버리면 우리는 그 안식 다 이루었으매 기쁨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려도 안돼요. 니 예수 믿지 마라. 나 예수 안 믿을게. 말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여기, 예수 믿는 사람 취직 안 시켜 줍니다.” “저요, 저요, 저 예수 안 믿어요. 절에 가요.” 손 들으란 말이지요. 그게 무슨 의미 있어요. 그게. 그들이 하는 질문을. “예수의 얼굴을 밟으면 배신자인 줄 알겠다.” “내가 예수의 얼굴을 밟겠다.” 다 이루었는데 새삼스럽게 주님이여, 밟는 걸 용서하옵소서. 그러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가는 거예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백날해도 여전히 안은 찝찝해. 천안에서 호두과자를 보내줬으면 그냥 먹으면 돼요. 이게 호두가 몇 개 들어있는가, 썩었는가, 아닌가, 철 지난 건 아닌가, 에이~ 철 지난 것도 먹고 죽지 뭐. 그냥 주신 거 먹듯이 하루, 하루를 먹읍시다. 거지처럼. 만나다! 오늘 하루도 만나해가지고 그냥 먹고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은 자기의 안식의 일에 연장선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설쳐대는 것을. 우리가 까불고 설쳐대는 것을 그것도 안식으로 보는 거예요. 어이! 김 안식. 그것도 안식으로 보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잘 한 게 뭐가 있어요? 없어요. 다윗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안식으로 자기 일을 쉬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일을 마치고 안식에 갔다는 말은 처음부터 그 일 한 그 일도 어디서 나온 일이다? 다 이루었다, 에서 나온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자리가 아니고 그 쪽으로 고무줄처럼 튕겨서 가버린 거예요. 태어난 것도 주의 안식의 일이기 때문에 태어난 자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 받기 전에 죽었다면 그 애도 그냥 안식으로 가버린 겁니다. 그것은 둘 다 다 같이 갓난애인데, 하나는 천국가고 다른 하나는 지옥 갑니까? 주님께서 그건 내 맘 대로다. 왜? 어떤 이는 저주할 권리가 있고 어떤 이는 구원할 권리가 있고. 그 일은 이미 십자가로서 완료됐어요. 다 이룬 거예요.

그 안식을 보여주기 위해서 광야 40년 동안 다 죽어야 되는데 만나를 솔솔 뿌리는 겁니다. 그리고 안식일 날은 뭐가 없습니까? 만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나는 없어요. 떡으로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니가 갈 세상은 떡으로 가는 세상이 아니고 만나도 없어요. 그 다음 날 또 다시 만나 주시고. 그러면서 40년 이란 세월을 보내게 하시는 겁니다. 40년 세월이 구약 전체에요. 뭔가 떠나야 될 질서와 새롭게 낯선 질서가 겹치는 대목이 40년이에요.

그래서 40년 이란 말은 뭐냐 하면, 40년에 예수님이 참여함으로서 예수님이 그걸 40일 우리의 실상을 세상 실상을 보여주는 예수님. 예수님과 겹치는 점에서 이 역사는 언약 적으로 의미 있다 이리 보면 됩니다. 이 세상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은 주님이 이 세상을 다녀갔다는 점, 그 뿐이에요. 내가 여기 산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노래 그런 시들이 많이 있거든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하는 그런 가사가 있어요. 그건 잘못된 겁니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 취지가 어디 있는가 하면 국가가 필요 없다. 그런 뜻입니다. 국가가 나한테 뭐해줬다고? 국가 니가 뭔데? 전에는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국가라는 것을 위해서 우리는 자기 적재적소에 자기 할당받은 자리가 있다고 믿던 시대였어요.

국가가 살면 너는 그 자리는 보람 있는 위대한 영웅이라는 겁니다. 조선시대에 어떤 여자가 있는데 열녀에게 만약에 데카르트의 이야기를 접목해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곧, 나는 존재한다. 사실은 그 전에도 이런 이야기는 있었어요. 소크라테스도 이야기했어요. 나는 모든 걸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플라톤도 그런 이야기 했어요. 그러면 그 여자가 그걸 알았다면 그 여자가 열녀 하겠습니까? 열녀 안하지요. 그 당시에는 신분사회기 때문에 열녀 해야 될 이유가 니 하나 고생하고 우리 집안 열녀 났다! 고거 하나 집안 명예를 위해서 니 하나 욕봐라. 이거거든요.

그런데 데카르트는 뭐라 했습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집안이 뭐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하지요. 그걸 가지고 근대의 주체사상의 시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국가보다도 누가 더 중요하다? 나에게는 내가 중요한 거예요. 그것이 현재 전 세계에 모든 사상을 덮는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종교? 예수? 기독교? 부처? 다 소용없습니다.

예수? 내가 나 되기 위한 보조 개념이지요.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만큼 주님도 나를 중요시 여겨 달라는 그 요청.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슬슬 미워지지요. 데카르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그 당시에 소위 예수 믿는 교회 있었잖아요. 교회가 예수님 하나님을 거론하는데 실은 교회가 딱 지만 챙기더라 하는 거예요. 자기만 챙기는. 그럼 민족들, 국가들 하는데 전부다 하나님 예수를 자기 민족, 자기 국가만 잘되기 위해서 도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렇다면 더욱 더 세밀하게 쪼개서 마지막 남는 게 뭐냐, 결국은 국가와 민족보다도 역시 중요한 것은 사실상은 나는 날 위해 존재한다는 거. 왜 사람들은 이걸 진작 말 못했을까? 내가 외쳐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생각하므로 나는 존재하고 있다.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고 생각하는 내가 이것이 존재하는 겁니다. 물론 신은 인정했지요. 신을 인정 안하면 잡아 죽이니까요.

자, 제가 데카르트 이야기를 왜 해드렸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는 작업이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필요했던 조치라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본인이 노력해서 들어갈 수 없어요. 안식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무리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 덕분을 늘 쳐다볼 수 있을 때 그게 안식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예수 믿습니까? 안돼요. 그러지 말고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없는 데서 있게 하는 작업이 나는 지금 못 느끼지만, 느끼던 못 느끼던 믿음으로 우리는 이걸 인정해야 돼요. 매일같이 오늘도 머리카락이 몇 개 빠졌다. 주께서 그렇게 일하신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주가 개입안한 일이 전혀 없어요. 버스를 잘못 탄다든지 실수한다든지 어떻게 하든 모든 것도 전부 다 예수님이 개입된 일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우리를 있게 만든 겁니다. 유리 만들 때 후~~ 불 때 그 파이프 뒤에 뿅 하고 동그랗게 피어나는 것처럼 지금도 후~부니까 우리 얼굴이 달덩이처럼 동그라니 피어나는 겁니다.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에게 했는데, 그걸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하지 말고 언약궤가 가 있는 곳 곧 천국에서 이 지상을 향하여 계속 바람을 부는데 그게 성령의 바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법이 아니고 아가서의 뭡니까? 사랑입니다. 법 안 따질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법을 어기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구체적으로 예수지요.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럼 우리는 주님이여, 말을 확실히 합시다. 어느 쪽입니까? 법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에요? 왜 자꾸 왔다 갔다 하십니까? 딱 집어 한 가지만 이야기하세요. 주님을 안 믿으면 저주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에요? 법입니까? 주님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물으면 법으로 저주받는 것은 이미 다 저주받은 거고 법에 저주 안 받을 인간은 없어요. 율법을 주신 것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사랑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보조 장치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괜히 쫄았어! 십계명 안 지키면 십일조 안 하면 저주 받는 줄 알았어. 괜히 쫄았어. 괜히 목사님한테 속아서 쫄았잖아.” 보조인데. 보조. 남자가 흰옷 입고 있어서 의사인 줄 알았지. 간호사던데. 괜히 쫄았어. 선생님해서 선생님인 줄 알았더니 가까이 가보니까 간호사야. 괜히 쫄았어. 선생님은 따로 있는데. 또 이리 이야기하면 간호사 폄하해서 사과해라, 사과해라하니 사과합니다. 교만한 게 아니고 제가 예를 든 겁니다.

그러니까 쫄았다는 말은 율법은 하라, 하지 마라, 하니까 갑자기 자기 솜씨를 발휘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 성화될 수 있는가, 법이여 오라! 한바탕 붙어보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40일 동안 시험받은 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마귀를 못 이깁니다. 돌이 떡 되게 하고 싶고 인기 있고 싶고 권력 갖고 싶고 못 이깁니다. 그냥 주님처럼 입장에서 살다가 죽읍시다. 살다 죽으면 죽어도 살겠고 그 말씀 있잖아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날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요 대목 이야기해보고 진도 나가 봅시다. 이미 생명나무가 지금 안식의 나라에 있잖아요. 그러면 생명이 여기에 안식의 나라에 특허를 받아놨어요. 생명은 다른데 쓰면 안돼요. 그런데 특허를 받지도 않은 가라가 가짜들이 우째그리 많은지 이렇게 하니까 삽디다. 칼로리를 낮춰서 똥배 빠지니까 더 삽디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니까 스기야처럼 기도하니까 15년 동안 삽디다. 15년 동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묻는 건 방향성을 말하는 거예요. 우쨌든 간에 저쨌든 간에 하여튼 살고보자는 그 방향성이 문제라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에게만 그런 살고자하는 집착과 집념이 나오는 겁니다. 못 살았으니까. 생명을 모르니까. 어떻게든 더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염병 고치겠다고 코에 호스를 꽂고. 허 선교사님은 그냥 죽었어요. 어제. 오늘 장례식에 가보니까 평소에 활동했던 아마존에서 TV촬영한 것, CBS에서 대담한 것하고 또 설교한 것 죽 틀어줬어요. 그래서 나는 죽어도 저런 거 안 틀겠다고 하고. 동영상 한 두 개가 아닌데. 안 돼! 안양강의 틀어주면 안 돼! 현실은 지금 없는 분이지요. 없는 분이라면 사실은 그 있는 시절을 틀어줄 필요는 없어요. 주께서 없게 만들었으면 다시 기억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사람의 죄 짓는 것만 기억하면 돼요. 아브라함 죄 저지른 이삭 죄 저지른 그것만 기억하면 돼요. 왜? 처음부터 잘한 게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잘한 게 있는 것처럼 오해를 살 수가 있어요. 저 사람 저렇게 잘해서 구원받았구나. 이것은 십자가를 모독해도 아예 십자가를 철거하는 뽑아내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생명은 이미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데, 지상에는 뭘 만드는가 하면, 생명과 죽음을 두 개 다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죽음에서 어떻든 간에 무엇으로 달려간다? 생명으로 달려가기 위해서 노력해 버리면 그러면 이 하늘나라 생명은 뭐가 돼버립니까? 이건 꽝이죠. 꽝!

제가 어제 부시맨 이야기했던가요? 했지요. 콜라병이 떨어졌는데 주인 돌려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시맨이 돌려준다는 방법이 기껏 한 것이 맨발로 먼 행랑을 차려가지고 자기가 평소에 지평선을 봤던 것 끝에 가서 거기서 뭐 드린다? 제사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 콜라병 도로 드립니다. 이거 주인님이 잃어버렸는데 돌려드릴게요. 이 정도로 우리는 주인님 잘 챙깁니다. 절대로 함부로 안 썼습니다.“ 경비행기 운전사가 얼마나 웃었겠어요. 내가 먹다가 버린 콜라병인데. 그걸 신의 병이라고. 사람은 본질을 몰라요. 내가 어디서 왔으며 내가 누구며 왜 모든 인류가 있었는가, 그러니 우리 자신이 콜라병이에요.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걸 알기 위해서 신을 찾는데, 그걸 두 자로 ’제사‘ 예요.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고 신 찾고 이게 뭐냐 하면, 어떻든 간에 죽어가는 나를 어떻게 살려보겠다 하는 시도, 요 생명도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첫 째 부활이 아니에요.

첫 째 부활은 생명나무에서 제공된 것이 첫 째 부활이고 제사는 첫 째 부활이 아니고 그냥 시도해보는 하나의 연출입니다. 조작된 연극이에요. 몸부림치는 거예요. 살아보겠다고. 이거 가지고 사기 치는 데가 교회와 성당이에요. 이래가지고는 살 수가 없어요. 성전이 오게 되면 간단합니다. ‘아하, 위에 있었잖아. 내가 무슨 짓하고 있었지? 위에 있잖아. 위에.’ 위에서 계신 분이 우리에게 거저주면 그게 생명이잖아요. 그럼 거저 줬는지 어떻게 아느냐, 거저 주는 믿음이 생기면 받은 거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신 겁니다. 내 인생요? 거저주신 겁니다. 이게 인간의 철학박사 한다고 서울대간다고 아는 겁니까? 원서 4군데 5군데 내봐야 몰라요. “엄마” “왜?” “원서 내고 왔는데.” “그래” “내 몸은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거야.” 이리 이야기한다면 그러면 “얘, 그 이야기 어느 학교에서 배웠어.” “학교에서 안 가르쳐줬어.” 학교에서 안 가르쳐줬으면 이건 외부에서 온 겁니다. 성령이 한 거죠.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때부터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고 이 이야기는 히브리서11장에 나옵니다.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고 톱에 켜인 것과 돌에 맞아 죽는 것과 왜 하나님께서 돌에 맞고 톱에 켜이는가 하면 너무 웃으니까. 너무 기분 좋아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너무 기쁘니까 좀 자제하라고 돌로 쳐버리는 거예요. 돌로 친다고 자제가 됩니까? 맞으면 맞을수록 오히려 더욱 더 기뻐하니까.  “나를 때려! 그것 봐, 이 땅에서는 이런 생명, 죽음 이거 아무 의미 없잖아.” “이거 있잖아.”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이 히브리서가 보통 책이 아니지요. 히브리서4장에 나오지요. 우리를 완전히 벌거벗은 걸로 만들어놨어요. 우리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가 돼지 껍데기를 그리 좋아해요. 그래서 장날에 사는데. 나는 도저히 그 비계를 못 먹겠던데 어머니는 그걸 좋아하셔요. 비싸지도 않아요. 어쩌면 우리가 껍데기라서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알레고리 다 나옵니다.

그래서 구약 자체가 알레고리라고 했어요. 성경에 보면.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 자체를 알레고리로 사용하십니다. 광야, 애굽 막 난발해요. 그것은 실제로 구약 역사는 역사이면서도 신약에 오게 되면 그건 하나의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아주 멋들어진 장치였습니다. 주님 오게 되면 무대 장치도 이제는 그냥 장치였을 뿐이었었어. 라고 뜯어내면서 철거하면서 공개를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 하나의 너희들은 폼 잡는 하나의 등장인물이었었어. 하고 뜯어내지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 하면 그것은 지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마귀새끼들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안식일을 보여주기 위한 교육자제들 또는 연장 또는 도구, 그런 재료 이리 보면 되는 겁니다.

4절에 한 번 봅시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라고 되어 있어요. 자, 사람들은 물어요. 안 믿는 사람도 물어요. “목사님, 목사님은 성경 아시니까 물어봅시다. 분명히 하나님이 7일 만에 일을 끝냈지요?” “끝냈습니다.” “끝냈는데 왜 또 일하십니까?” 끝냈다며? 끝냈는데 여리고성은 왜 하고 공회는 왜 하고 왜 바쁘십니까? 끝냈다며? 아담 찾아오고. 끝냈다며? 그 질문에 대해서 교회의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학자, 철학자들은. 좀 납득하도록 설명하기 위해서 끝내시고 시계 테입을 감아 놓으면 저절로 돌아가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한 번 만들어 놓은 데로 저절로 돌아간다. 하는 이야기를 지금도 신학자들은 철학자들은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 없다? 개입이 없고 자연히 저절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 힘 다 빠지면 멸망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노하심이라든지 심판주라든지 특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리가 없잖아요. 처음 만들 때에 예수님을 보내시면 되잖아요. 처음 만들 때. 7일 동안에 마지막 6째에 예수님을 보내면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 지시려고. 마지막에. 6일 동안. 마무리하고 7일 날 자, 예수님까지 보냈으니까 나는 마무리 짓는다. 이래야 되는데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 보면,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니까 죽였어요. 종을 보냈더니 또 죽였습니다. 이 마지막 때는 아들을 보내면 그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겠느냐 할 때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종 보내는 역사가 있지요. 또 종을 보내는 역사. 아들 보내는 역사, 합쳐버리면 이스라엘 역사되지요. 그럼 주께서 일하시네요. 종 보내는 일, 아들 보내는 일 하시잖아요. 그러면 안 끝났네. 끝났다며? 요거 설명돼야 되겠지요.

7일을 열대성 저기압으로 봅시다. 먹구름이 있는데 이 형성된 먹구름이 이게 이동하면서 계속 다른 지역에 큰 비를 내립니다. 비를 내릴 때, 땅에 있는 사람들은 구름이 이동했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구름이 인간의 크기나 구름의 크기나 같은 크기라면 우리를 피해가려하면 구름도 바빠. 아이고 저 쟁거름 좀 봐, 왜 이리 빨라. 빨리 가서 비를 쏟아야지. 하겠는데 구름의 크기가 어떻습니까? 우리가 빨리 달린다고 달이 허겁지겁 따라 옵니까? 우리는 시속 100Km를 가도 달은 그 달이고 시속 1000Km가도 달은 그 달이잖아요. 헛걸음 백날해도 우리는 갇혀있는 거예요. 나중에 죄 짓고 난 뒤에는 죄에 갇혀있는 거예요.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에 갇혀있다고 갈라디아3장 22절에 그리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그 다음에 23절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리 되어 있지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바 됐다라고 할 때 믿음이 오기 전에 했지요. 그러면 믿음이 안 올 때가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냥 예수 믿읍시다. 라고 나올 수 있는데 너무 어려워서.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아래 매인바 되지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 그냥 건지세요. 골치 아프고 성경도 안 보니까. 성경도 보기 싫어. 그냥 건지세요. 이것이 전혀 믿음이 아니잖아요. 그건 믿음 아니고 뭐죠? 죄지요. 그러니까 아까 그런 질문 이런 질문 모두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먹구름이 있는데 이 먹구름을 우리가 밑에서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7일 동안 창조를 했잖아요.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게 이해돼야 되는데. 7일 만에 만들어졌고 완성했기 때문에 죄도 만들어져야 되는 거예요. 완성했기 때문에 만들어져야 되는 거예요. 죄가 만들어져야 의가 만들어지고. 율법이 만들어져야 믿음도 만들어지고. 믿음이 만들어져야 모든 게 만들어지고.

어린애의 생일이라고 엄마한테 블록을 받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재봉하는 것도 있고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도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처음 올 때는 엄마가 선물 가득하잖아요. 블록이니까. 그것 뜯어보면 작은 가스레인지부터 해가지고 조그마하게 들어있지요. 그럼 어린애가 뜯어서 자기 방에 요거는 부엌에 배치하고 조그만 인형은 조그만 캐비넷에 넣고 안방에 넣고 하겠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이미 선물을 받았으니까 하는 거예요.

죄는 여기에 놓고 율법은 여기다 놓고 이렇게 되는데 우리는 내가 살고 싶어서 착하고 싶어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착합니까? 말씀 지킬게요. 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출발점이 나부터 하는 거예요. 우리는 ”완성했는데 왜 죄인입니까? 완성했으면 주님께서 같이 해야지 왜 주님께서 나중에 오십니까?“ ”구원이 완성했다 해놓고 마귀는 설쳐대고 피곤하고 미치겠네. 정말.“ ”언제 나는 구원받아요?“  매일 질문이 뭐냐 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게 바로 죄인 거예요. 바로 그 죄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 다 이룬 거예요. 그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거룩하니까 우리는 멋있는 줄 알지만 율법이 주어져 버리면 하나님 믿고 율법 지켰다는 자들이 죄인이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처럼.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에 라는 말은 우리 믿음이 생기기 전에 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란 뜻이에요. 예수님 오실 때를 믿음이 왔다는 거예요. 예수님마저 우리가 꾸며놓은 이 역사 속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은 믿음의 주지만 우리 역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율법 뒤에 오시는 분으로 간주가 되는 거예요. 우리의 역사적 개념에 입각해 보면. 그걸 방금 이야기한 것을 우리 생활에 지금 적용시켜 봅시다.

오늘 호두과자를 먹었다. 오늘 먹었어야 돼요. 오늘. 천안에서 왔다. 천안에서 보내야 된다니까요. 이게. 완성한 것이 온 것을 인정하는 걸 이걸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방주를 만들어 내고. 방주를 만들도록 되어있어. 이게 노아고. 왜? 비는 오게 돼 있으니까. 이게 노아라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자기 쪽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아저씨, 배를 이렇게 크게 만들 필요 없는데. 우산만 있으면 되는데 왜 이리 만들지요?” 그들은 죄 속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노아한테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까 믿음이 미리 당겨서 노아한테 와버리니까 장차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비슷한 방주를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가 만든 건 아니에요. 언약이니까. 시키는 대로. 그리고 야곱에게 어긋맞게 하고. 이거 취미 아니에요. 아들이 있다가 “아버지, 자리를 바꿔드릴게요. 너무 어색하니까 바꿔드릴게요.” “가만히 있어. 요게 내게 맞아.” 어긋맞게. 이미 다 이루었다는 저 쪽 세계를 아직도 미완성이 남았다고 하는 이 쪽 세계를 표현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40년, 40일 이 세상이 죽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40년도 있었고 그래서 다 죽였고 40일도 있어서 그래서 마귀도 드러나게 만들고 우리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긴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그래서 40년, 40일 안식은 위에 있고 우리는 안식하지 않은 때에 있는데 우리가 이 땅에 믿는다면 그것마저도 이 땅에 침투된 안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믿는 사람들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푹 쉬고 있습니다. 어디가시더라도 같이 쉽시다. 우리 같은 하늘나라에 여기 안양에서나 어디서나 부르실 때는 한 곳에 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고백 속에 엄청난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니까 은혜인 줄 알았는데 죽는 것도 은혜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이미 익히 알았습니다. 저희들도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이제는 말씀대로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