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130913a-히3장16절(완성된 안식)-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 3장 16~18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본문을 보면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천국 가는데 방법이 한 가지 방법인가, 다른 방법이 있느냐, 라는 그 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입니다. 물론 십자가로 구원받는데 그 모양새가 이쪽의 히브리서 같은 경우에는 순종치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고 반항하면 못 들어간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히브리서 3장, 4장 결정적인 내용이 뭐냐 하면, 믿지 아니하면 그 다음에 순종아니하면 다른 말로 반항하면 못 들어간다. 그런데 여러분이 다 아시겠지만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 보면, 그 때 너희에게 도적같이 온다고 했거든요. 도적 같이 온다. 한 가지만 더 해보지요. 하나님은 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구원받는다 했지요. 법이 아니고 사랑으로 영생 얻는다. 요한1,2,3서에 다 나오고 서로 사랑하라, 사랑 외에는 다른 계명이 없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셋 중에 우리가 어느 것을 골라잡아야 될 문제입니까?
히브리서 3장에서는 순종치 아니하면 못 들어간다. 데살로니가전서 같은 경우는 깨어있어라, 깨어있어야 되지 안 깨어있으면 도적 같이 오기 때문에 안 깨어있으면 못 들어간다. 그 다음에 로마서나 이런데 보면, 법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모든 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 더 보탠다면 십자가에 같이 죽을 경우에만 들어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로마서 6장에도 그리스도와 합한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고린도전서11장에 보면, 성만찬 그러니까 예수님의 떡을 뗐을 때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다, 했고 만약에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고 떡을 떼게 되면 그것은 안 된다 했어요. 어떤 사람은 죽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자기 죄를 살피고 성만찬을 오실 때까지 할 것이다. 얼른 들어보면 성만찬 안하면 참석 안하면 그것은 탈락자 인 것처럼 느껴지고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떻게 영생을 얻지요?
한 번 적어봅시다. 성만찬. 끄집어내려니 한 두 개가 아니네요. 이사가려하면 갑자기 짐이 많은 것처럼. 요한계시록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안돼요.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은 죽은 척처럼 충성하면 안 되고 죽도록 충성해야 돼요. 죽도록. 요한계시록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안 되고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어느 나라 못 간다?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는 거예요. 자, 그만 합시다. 성경 다 나오겠습니다. 영으로 거듭나야 된다. 7가지인데, 이게 골라잡을 문제입니까? 이걸 어떻게 하나로 묶어야 되는 겁니까? 이왕 나온 거 하나 더 해봅시다. 8번 로마서 10장, 코앞에 있는 눈앞에 있는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고 시인하게 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리 되어 있어요. 고백 안하면 안 된다는 거죠. 주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마음으로 시인해야 되고 입으로 고백하면 안 되고 마음까지도 그 시인이 되는 상태에서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서 그래서 구원 받는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3장 3절에 거듭난다는 이야기 있죠. 영으로 거듭난다는 요 이야기 빼보면 다 누가 손질하는 거예요? 영으로 거듭나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이건 성령의 몫이고 그 외 나머지 6가지는 전부 다 이것은 어떻게 돼요? 도적 같이 오니 깨어 있어라, 는 누구 보고 다구 치는 거예요? “똑바로 해! 이것들아!” 이거 아닙니까? 자지 말고 깨어있어라, 그러면 우리는 안 깨어있을 때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안 깨어 있으면 니 놔두고 가지. 그럼 올 때는?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오지.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 다 인간들이 구원받은 성도가 갖추어야 될 그러한 자질 같은 거 그런 것처럼 비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해야 될 히브리서 3장 같은 경우에는 순종치 아니한 사람 그리고 원망한 사람, 4장3절에 보면,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이 말씀을 줬건만 그들이 믿음으로 믿음을 화합치 아니했다. 화합치 아니했다는 말은 말씀 주신 취지를 취지에서 동감하지 아니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주신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야 되는데 주님이 주신 마음은 따로 이고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따로 이었을 때는 믿음이 같지 않다. 화합하지 않다. 마주치지 않았다.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이야기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3장과 4장 초반에서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이렇게 해서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넣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겁니까? 싫거든 오지 말라는 쪽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싫거든 오지 마! 니에게 말씀 준 취지 몰라? 모르면 오지 마! 이런 뜻이에요. 배짱도 이런 배짱 없습니다. 오지 마!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에서 나올 때, 찬양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어제 내가 잠을 잤던 체육관하는 부부가 일을 저질렀어요. 50평사는 전세에서 주인이 나가라는 거예요. 남편은 벌벌 떠는 타입이에요. 덩치는 이런데 마음은 돈 한 푼 벌벌 떠는데 여자 분은 통이 커요. 에이~ 이참에 대출받아서 사 버리자. 그래서 사버렸어요. 가자마자 제 아내가 일을 저질렀어요. 그래서 이사를 했다는 겁니다. 부정적으로 어떤 것을 할 때, 약속의 땅이 있다. 우리는 그 땅에 들어간다. 신난다. 우리는 확정된 거야. 구원된 거야. 라고 하는 애굽에서 나왔던 그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을 시체로 만들어서 엎어지게 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라고 한 거예요. 아~ 그러니 여기 이 말은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히브리서를 표준으로 한다면 7번을 빼고 나머지 1번~8번이 맞지를 않아요. 백날 교회 다녀도 어느 순간에 8월 달 까지 예수 잘 믿었는데 9월 달 접어들어서 아이고, 하나님 싫습니다. 한 소리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10월 달에는 지옥 가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될 경우에 성경자체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내가 일을 저질렀어요. 막대한 대출을 내어서 갚을 재주도 없이 집을 사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조마조마한 거예요. 돈을 어떻게 하느냐, 약간은 걱정을 하고 있어요.
만약 아내가 하나님이고 남편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믿음이 화합치 않는 거예요. 그 배포, 그 배짱을 남편이 따라갈 수가 없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계획으로? 무슨 계획으로 그렇게 대출을 해버렸느냐, 이자 싼 게 나왔답니다. 2.6%짜리 나와서 했답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가 뭐냐 하면, 남편이 그 아내가 집 산 것에 대해서 계속 궁시렁 궁시렁 불평하고 반항하게 되면 믿음이 화합치 않기 때문에 아내와 갈라서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그 집에 같이 살 수가 없어요. 그 집에. 그러면 제가 한 이야기 된 거죠.
안식이란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을 하나님께서는 통 크게 턱하니 그만 그 집을 천국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문제는 거기에 들어갈 사람들이 겁을 먹고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도저히 해도 대출을 갚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화가 나느냐 하면, 일을 저지른 아내 쪽이 화가 나는 거예요. 평소에는 나하고 마음이 맞다니 어떠니 하더니 그 집에 가면 결혼할 때 사진 찍은 거 걸어 놓고 요새 젊은 사람들 사진 찍잖아요. 사진만 찍었지 막상 어떤 가정에 일에 있어서 마음이 하나 되지 않을 경우에는 나는 당신하고 못 살아.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집에 못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요걸 같이 줄여버리면 하나님은 언약을 살리는 게 목적이지 우리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보시면 7번 뺀 나머지 1번~8번 다 맞아요. 다 맞는다고요. 히브리서 1번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7번 같은 경우에는 영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늘나라를 본다 할 때에 사람들이 이 대목을 1번 히브리서 3장과 4장과 연결시켜서 7번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늘나라 거듭난다고 이해를 해줘야 되는데 히브리서를 모르고 7번을 그냥 멋지다! 성령으로 구원받게 되고 이렇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못 거듭나게 해줘가지고 환장하신 분처럼 그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사랑하니까 저, 거듭나게 해주세요.” “해주세요. 해주세요. 이~잉 해줘!” 이리 된다 말이지요. 주님은 “싫으면 말고.” 그러는데 이게 1번이잖아요. 1번과 연계된 7번해야 7번이 나와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는데 관심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안식에 관심 있고 언약 완성에 관심 있어요. 관심사는 따로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싫으면 말고. 오지 마! 누가 오라했어?”
애굽에서 일단 탈출시켜 줬으면 기본적으로 다 구원해줘야 이게 사람들 앞에서 좋은 이미지의 하나님으로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니한테 좋은 이미지 하나님 듣기 싫거든.“ 이리 하면 그만이에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드리헵번 닮았습니다.“ ”나는 니한테 그런 소리 듣기 싫거든. 어디를 견줘.“ 하나님은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세상의 어떤 것도 이 하나님과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1장부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천사와도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에 죽 나오는 겁니다.
어딜 인간하고 피조물하고 예수님을 비교하느냐, 어딜? 구원해주면 고맙다고 깨갱하고 있어. 내 이 거룩한 하나님이 봐줄 필요도 없는 걸 봐줬으면, 뭐 내 인생 이리 꼬였습니다. 한 달 수입이 적습니다. 애 수능 점수가 안 나옵니다. 어디 감히 천사보다 우위인 주님보고 애 수능 문제가지고 그걸 가지고 기도하고 말이지요. 이건 날 우습게 봐도 보통 우습게 본 게 아니에요. 그런 거 기도한다는 자체가 불만 있다는 뜻이거든요. 불만이면 오지 마! 그러면. 이게 히브리서에요. 아~ 이거 진짜 대단한 배짱이죠. 그런 시시한 것 가지고 기도하려고 주여, 도와주소서. 하면 오지 마! 오지 마! 귀찮아! 나는 니 소원 중심이 아니야.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유가 히브리서 뒤편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을 때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예수님께 들어있지 않았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들어있으면 사람들은 구태여 미워할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만 빼먹으면 되니까. 그런데 예수님 속에는 인간이 원하는 게 전혀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가니까 실제 나타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원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망이 안 될 수가 없어요. 왜? 자기 나름대로의 약속이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약속이 있어요. 그 약속은 자기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런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약속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이게 마찰이 되고 다툼이 되고 싸움이 돼요. 주님께서는 이리 합니다. 싫으면 말고! 이리 나오니까 주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주님하고 대화 자체가 되지를 않지요. 그런데 주님보시기에는 내가 너희들하고 대화할 상대냐 말이지요. 내가 너희들하고 같이 이바고하고 고스톱치고 그런 상대로 보이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하고 이미 일을 끝내놨어요.
끝냈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되지 궁시렁 궁시렁 거리지 말자 말이죠. 인테리어는 이리 해야 되고 천국 출입구는 여기 만들어야지 저기 만들면 안 됩니다. 여기는 장미 하나 심어야 되고 생명나무는 가로수로 이리 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인테리어 할 아무 개입할 것도 없어요. 천국의 건축학 개론은 주님 혼자서 다 했어요. 우리로선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주님의 건축은 끝내놨습니다. 자기의 약속에 의해서 끝냈습니다. 그러니까 싫으면 말고!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것만 봅시다. 도적같이 온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러면 히브리서 1번과 연관시켜서 봅시다. 도적같이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은 혁명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혁명 알지요? 데모하는 거. 완전히 청와대 쳐들어 가지고 뒤집어버리는 거 탱크 앞세우고 쿠데타 일으키는 게 혁명이잖아요. 우리는 획기적인 혁명을 원해요. 그런데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모든 사항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약속 있다고 했지요. 나름대로 약속이 있어요. 내가 구원받는 그 과정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갖고 있어요. 인간은. 나는 교회에 갔다. 교회에 갔다는 것은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임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방언을 했다. 다른 옆에 있는 집사가 부러워 미친다. 어느 날 기도를 못해서 벌벌 떨었는데 어느 날 새벽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터져 나왔는데 기도하다 보니까 온종일 4시간 반이나 신기록을 세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권사가 약 올라 미친다. 드디어 나는 교회 가는 보람을 느낀다. 이제는 목사님도 나를 칭찬해준다. 중직을 맡긴다. 중직은 맡은 후 더 기분이 좋아서 기도를 했더니만 우연히 뭔가 안수라도 해주니까 다음 날 병이 낫다고 했다. 혹시나 내가 실수했나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또 해보니까 똑같이 병이 낫다. 드디어 나는 능력자구나! 이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되지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쓰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짐에 다짐을 했고 이제부터는 갑자기 교회에서 부른다. 부르고 병자들이 온다. 드디어 초대교회의 화신이다, 이래가지고 불렀다. 부를 때 나가는데 보니까 봉투에 두둑하니 주더라. 여러 군데 오니까 계산해보니까 세금 안내고 한 2000모으겠더라. 온갖 시나리오를 다 짜지요. 앞으로 주의 종 나한테 나쁜 소리하면 내가 저주해 버리고 저주 받는다. 온갖 시나리오는 다 있지요. 요거 다 사기입니다. 마귀의 장난입니다. 혁명이에요.
그런데 진짜 성령 받으면 슬그머니 내가 달라졌어요. 쥐도 새도 모르게. 아침에 눈 뜨고 나니까 성도됐어요. 그런 식으로.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되는 줄은 나도 모르겠어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안돼요. 내가 신자가 된 게. 어떤 요란스러운 징후나 징조도 없었어요. 뜨겁지 아니하느냐, 뜨겁지도 않아요. 말씀이 뜨겁지 아니하냐 했는데 뜨겁지도 않았어요. 그건 베레아 사람한테 이야기한 거고. 뜨겁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다만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뿐이에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 죄를 용서한다는 것. 그 말은 뭐냐,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 용서 받았기 때문에 더는 무슨 짓해도 죄인이 안 된다는 사실이 어느새 믿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걸 어떻게 예를 들까 싶어서 기껏 생각한 게 그겁니다. 아침에 해 뜰 때 그 해가 뜨는 순간과 지는 시간을 유난히 지켜봐도 그게 잘 볼 수가 없어요. 뚫어 하는 것으로 뽑아 당기는 것 같아요. 낙지머리를 확 잡아당기는 것처럼 해가 뻥하고 뚫리듯이 쑥 잡아당기고 해질 때는 반대로 천천히 지다가 갑자기 질 때는 구덩이에 빠지는 것처럼 쑥허니 대머리가 확 빠져버려요. 아~~ 그 순간, 봐야 되는데. 보다가 디디디디~ 문자가 와서 보다가 그만 해 져버렸어요. 해 떠버렸어요. 그 마지막 순간에 프로포즈 하려고 했는데, 프로포즈 시기를 놓쳐 버렸어요. 그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변화에 대해서 그 과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결과만 믿게 하지, “어떻게?” 그러면 “니 몰라도 돼!” 알게 되면 남한테 그걸 써먹으려고 해요. 자랑질 하려고 하고.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만 당신도 기도해봐라, 이렇게 되기 때문에 절대로 혁명이 아니고 도적같이 믿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믿은 것도 도적같이 믿었기 때문에 주님도 그렇게 오시는 거예요. 성령이 오거나 주님이 오시거나 다 도적이에요.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어느 새 아침에 깨어보니까 이미 가재도구는 다 날아갔어요.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는 것이 그 전날 잘 때는 내 자랑 해야지, 이거 해야지, 성공해야지 하다가 아침에 눈 떠보니까 전부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순간이 오면 도적이 왔다 갔다 보면 돼요. 도적이 다녀가신 거예요. 그걸 가지고 여기서 사랑의 법이에요.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간 사람. 아가서에 보면 사랑은 죽음보다 진하다 했습니다.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사랑은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누가 그 사랑을 끊으리오. 사랑은 절대로 안 끊어져요. 그걸 옛날 시대에서는 큐피드라고 하잖아요. 화살이 꽂혔다 이 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어떤 가수는 총 맞은 것처럼. 그 만큼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작업했다? 안 했다? 없는데 그냥 나를 쓰러뜨리면서 온 거예요. 이질적이고 외부적이에요. 구원은 외부에서 나를 쓰러뜨리면서 덮쳐서 나를 데려가는 겁니다. 일종에 주께서 하시는 성폭력, 강간, 성폭행입니다. 완전히 나를 신부로서 장악해 가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에요.
니고데모가 실수한 것은 성령이 어떻게 오십니까? 그게 궁금한 거예요. 그것은 이야기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껏 한 게 바람같이 하신 거예요. 바람이라 하는 것은 기류의 압력의 변화에 의해서 바람이 옵니다.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불거든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이. 곧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것이 바람이에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면 그게 성령의 바람입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하늘이 와서 덮쳐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법을 행함이 아니고 사랑으로 구원받고 그것은 마치 도적같이 찾아오게 되고 그 다음에 이미 그 사랑으로 인하여 이미 우리는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산 사람이 되고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내 소관이 아니고 왜냐, 말씀이 들어오기 때문에 알아서 하니까. 나는 매일 살려고 했는데 주께서 죽도록 충성했다고 이야기해주니까 듣는 내가 미안스럽지요. “죽도록 충성한 거야.” “저는 한 게 없습니다.” “어이, 천국 가는 사람은 죽도록 충성한 걸로 되어있어. 원래.” “원래 그런 거야.” “믿어!”
그러니까 기존 교회에서 하라, 하라, 하는 것이 전부 다 뭡니까? 전부 다 거짓말 되는 이유가 히브리서에 보면 자기 나름대로의 시나리오가 따로 있어요. 이걸 버려야 되는데 이걸 쥐고 성경에서 하라하는 것을 여기에다가 다 우겨서 집어넣으니까 나중에는 지 풀에 지가 지쳐가지고 “아이고, 40년 믿었는데 설마 지옥에 보내겠는가?” 이리 나오지요. 주님께서 “그동안 니 뭐했는데?” “구원받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니까 육으로 난 것은 ”아마도 이쯤 돼서 주님 오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도적같이 오는 거예요.
성경의 모든 것은 인간이 뭐 해보겠다는 것을 피해가는 쪽으로 말씀을 주신다고 보면 돼요. 그 취지는 “싫으면 말고!” 이런 식으로. 그래서 히브리서 3장, 4장에서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광야에서 격노케 한 자가 누구냐? 애굽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본격적으로 본문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3장 한 번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단어를 끄집어내봅시다. 단어 하나 꺼내어 설명하면 되겠지요. 애굽나오지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40년 나옵니다. 성경에서 숫자 이야기할 때 굉장히 주의를 요합니다. 그 다음에 광야 나오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노, 광야, 40년, 애굽. 요 네 가지의 단어를 가지고 성경을 전혀 모른다고 치고요. 네 가지 개념 되는 단어를 가지고 간단한 문장을 써보세요. 라고 시험이 나온다면 우리는 시험 치게 되면 우리는 거의 100% 정답이 아닌 게 나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여기다 이렇게 가지고 가게 되면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전제로 깔고 이 4 가지 문장가지고 이어서 글을 쓰게 되어 있어요. 일단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라는 전제를 깔고, 주체가 누구냐 하면, 결국 구원의 주체가 내가 똑똑해서 구원받은 셈이 되지요. 그렇잖아요.
성경 말씀을 어떤 사람은 100독 1000독 했다는데 1000독 하면서 이 히브리서 3장 대목, 4장 대목을 얼마나 그냥 지나갔겠습니까? 이유를 모르고 100독 1000독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항상 보면서 딱, 나네.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네. 자기 구원받은 걸로 자꾸 하니까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여!” “왜?” “아이고, 무슨 수로 구원받습니까?” 이리 나와야 정답입니다. “그래, 내가 기어이 성경말씀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그래, 나는 순종하고 원망하는 말 안해야지.” 이리 나온다는 것은 성경을 곡해해도 보통 곡해한 게 아니에요. “주님이여, 그렇다면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이야기를 주님께서는 하셨습니다.” 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보고 니가 한 번 글 써봐라. 그러면 뭐라고 쓰겠습니까? 나도 불가능합니다. 약속대로 못 갑니다. 그러면 요 네 가지 문장가지고 글을 쓴다면 이렇게 할 거다 말이죠. 나를 포함해야 됩니다. “나와 그리고 같은 동료들은 애굽에서 살다가 애굽에서 나왔다. 나왔는데, 아~ 보니까 광야가 가로막고 있더라. 광야 지나면 천국이라 열심히 해봤는데 물이 있어 전진도 못하고 양식이 있어서 어디 풍족히 갈 수도 없고 결국 우리는 갈 수 없는 그 지역을 우리는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옆 사람이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을 이해한다. 왜? 나도 같이 원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를 한다는데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우리한테 너무 심한 처우를 해주신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했는데 그 약하디 약한 우리를 향하여 진노한다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끝.
생각해보세요. 여호와증인이 지옥을 안 믿는 이유가 다 인리가 있어요. 지옥에 간 사람들이 일종의 개미 같은 사람 아닙니까? 주식시장의 개미. 기관투자가가 아니고 역외기관 투자가도 아니고 몇 푼 살림살이 나아질까 싶어서 있는 돈 없는 돈 해약해서 몇 백 몇 천 재미삼아 했던 사람이에요. 개미 같은 존재입니다. 그 개미 같은 존재가 죄를 지어도 얼마나 지겠습니까? 그들이 죄 진다고 하늘나라가 없어지고 천지가 개벽하는 게 아니잖아요. 철딱서니 없잖아요. 천국 본 것도 아니고 지옥 본 것도 아니고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제 이야기 잘 들으셔야 돼요.
지금 광야에서 하나님이 진노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 죽이려고 한 사람이 아니에요. 배고파서 배고프다고 했고 목말라서 목마르다고 했을 뿐입니다. 이 연사는 외칩니다. 정말. 그러면 배고픈데 참으란 말입니까? 지 목마른 것은 참을 수 있어요. 이제 난지 갓 1개월 된 애, 그 목마르다 할 때, 엄마가 손가락해서 혈액형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해서 수혈하듯이 그 정도의 심정인데 그걸 나무라고 탓해버리면 더 이상 우리보고 어쩌라고?
애굽에서 살아온 방식이 뭡니까? 양식이 있어 양식 먹고 물 있어 물먹고 기껏 배운 게 그것 밖에 안 배웠는데. 그거 없다고 약간 원망 좀 했더니만 그거보고 하나님이 진노를 낸다하면 진노 안 받을 만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인간으로서는. 없지요. 왜냐,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애굽에서 나온 거예요.
이제 주님의 정답을 말씀드리겠어요. 애굽에 문제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애굽에서 살았다는 겁니다. 자, 중요한 건데. 사람들의 생각은 뭐라고요? 나는 애굽이라는 지역적인 지리에서 살았다 하지요. 애굽을 하나의 지리이고 그냥 일상 땅이라고 생각한다면 약속의 땅은 못 갑니다. 약속의 땅을 가봐야 그곳도 땅인데요. 아니 땅에서 살던 인간이 땅에 못 들어갈까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늘 동네 목욕탕에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36장(요한계시록 36장은 없습니다.) 너희들은 나의 목욕탕에 가라, 이러면 우리는 준비할 게 뭡니까? 우리가 기껏 동네 목욕탕에 배운 게 뭐냐 하면, 목욕 타월하고 샴푸하고 때밀이하고 몇 가지 갖고 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 목욕탕 오너라 하니까 뭐 이거 다 아는 거 아닙니까? 그럼 뭐 준비하면 돼요? 동네 목욕탕갈 때 했던 거 준비하게 되면 어디에 간다? 하늘나라 목욕탕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 왔는데 이것은 샴푸도 없고 물도 없고 하니까 어디서 목욕하라는 말입니까, 하다가 다 죽었어. 애굽이 문제였어요. 애굽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그 동네가 문제에요. 우리 살던 동네가 천국을 못 가게 만드는 동네입니다. 못 가게 하는 동네에요.
제가 개그콘서트 보면서 인상 깊게 본 것은 황해라는 코너에 보이스피싱하는 대목이 있잖아요. “신입이 이렇게 해서 밥 빌어먹고 살겠어?” 해가지고 빼먹어야 되겠지요. 그 연변 그 동네에서 그 일만 한사람들이 만약에 한국에 와서 직업을 할 때 어떻게 하면 빼먹을까만 생각한다 말이지요. 왜? 배운 가락이 그것만 배웠기 때문에. 적응할 수 없지요. 천국에 가려면 지상에서 했던 삶을 가지고 천국에 못갑니다. 이게 삶의 모든 게 다 달라졌어요. 사람이 바뀌지 아니하면 천국 못갑니다. 인간자체가 바뀌어져야 돼요.
에이, 그러면 뭐~ 주님의 피로 다 구원한다며? 이건 전부 다 예수의 피로 가는 것은 그러면 미끼상품이었나? 이제 와서 왜 딴 소리합니까? 진작부터 인간 바뀌어야 한다면 예수 피 생각 안하죠. 그의 피로 구원 받는다고 그렇게 수천 만 번 이야기해놓고 이제 와서 인간 바뀌라 하면 자, 그럼 예수 피도 믿어야 돼,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 그 다음에 인간 바뀌어야 돼. 또 몇 년 뒤에 가면 이 근호 목사 또 한 가지 더 해야 돼 해서 3가지해야 되고. 아이고, 집어 춰! 한가지라 해서 좋아했더니만 세 가지하라니 이제 와서 딴 소리하니 사기꾼 같아. 이럴 조짐이 있지요.
인간 안 바꿔집니다. 인간 못 바꿔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도 안 바뀝니다. 그래서 미리 당겨 죽이는 거예요. 죽으라고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살려고 이 땅에 살잖아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 어제 밤에 남의 집이지만 갑자기 밤중에 소나기가 쳐가지고 창문을 닫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객지에 와있는데 비가 때리더라, 그런데 지금 어떤 집이 주무세요, 해가지고 참 고맙게 왔지만 만약에 이 시간에 갈데없으면 한데 있으면 비 다 맞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해도 일단은 비 피할 수 있는 집은 있어야 되고 하여튼 동굴 속에 가던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동굴 속에서 나오면 배고프다니까요. 기본적으로 먹을 게 있어야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텐트를 갖고 나왔거든요. 텐트 갖고 나왔는데 뭐가 없습니까? 먹을 건 없고. 돼지고기 뜯고 하면 나중에 목 막혀요. 물이 있어야 되거든요. 또 씻어야 되고. 특히 어린애들은 씻지 않으면 병균 있으니까 씻겨줘야 되고. 물이 있어야 되고 아~ 그게 보장되지 않았는데 무슨 하나님을 믿습니까? 천국은 나중 문제에요. 지금 당장 때 거리 없는데 나중 문제를 왜 생각합니까?
요새 젊은 사람들 보고 자녀들 보고 “야, 야, 복음 알아야 돼.” 하니까 지금 당장 일해서 월급 탈 게 문제지, 천국은 죽어서 문제지, 그거 엄마 자꾸 나한테 그 소리 하지 마, 나 지금 급한데 결혼준비 해야 되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 심성을 우리 힘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애굽에서 우리를 떠밀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애굽하고 격리되는 게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왔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 앞에 뭘 줬는가 하면, 죽음으로 이걸 단절시켰어요.
어린양도 죽음이죠. 그리고 홍해 건널 때 누가 죽었습니까? 나중에 홍해 말라보세요. 애굽 시체들이 가득합니다. 지금. 홍해가 안 말라서 그렇지. 말라보면 애굽 군사들 수십만 군사들 다 죽어있어요. 분명히 죽었는데 그들은 안 죽고 살아났잖아요. 어린양 죽을 때 장자 죽었잖아요. 그런데 맏이는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물론 나중에 맏이를 아버지께 돌려드려야 되지만. 분명히 죽음을 코앞에까지 보여 줬건만,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가 눈앞에 있거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되거늘 십자가가 코앞에 있어도 안 보이는 거예요. 아, 어떤 아저씨 죽었구나, 이리 돼 버리는 거예요. 그 십자가가 내 속에까지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왜? 아직도 애굽이 죽음으로 단절이 되지를 않았어요. 애굽에 살았던 것은 다 죽어야 돼요.
여기 광야에서 누가 죽습니까? 이스라엘 가운데서 애굽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죽어요. 달랑 두 사람만 빠지지요. 여기서 그 죽었던 사람 지옥 가느냐, 그 문제는 생각하지 맙시다. 지옥이란 개념이 최종 확정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하는 것은 광야에서 죽었다. 그 당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은 건데.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는 무슨 흔적을 다 지운다? 애굽에서 놀던 가락은 다 지워야 돼요. 죄는 천국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죄는 천국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이게 제 생각 아닙니다. 주님 생각입니다. 저는 그냥 전할 뿐인데.
하나님께서 세상 적으로 놀던 거 그거 죽음으로 끊어지지 아니하면 어림도 없다 이리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죽어야 돼요. 그런데 성도한테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것을 죽는 삶으로 간주 시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죽음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느끼게 만드는 하루, 하루의 삶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하루 왼 종일 살고 주여,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깨닫게 하는 사람,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미리 앞당겨서 우리와 함께 동반하고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죽음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히브리서3장에는 빠져있지만, 이리 보면 돼요. 회개하면 살아요. 비록 약속의 땅에는 못 들어갔지만 모세는 자기가 성질 낸 것에 대해서는 회개를 한 겁니다. 모세가 회개했다, 어디 나오느냐 변화 산에서, 회개가 딴 게 아닙니다. 반성하는 게 아니거든요.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왜?” “나는 죄인이거든요.” 이게 회개에요. “아, 광야생활해보니까 때려 죽여도 애굽 못 버리겠네.” 이게 회개라니까요. “주여, 나는 사나 죽으나 나는 살 궁리밖에 안하는 인간입니다.” 이걸 자백하는 게 십자가 앞에서 자백하는 게 회개에요. 혼자 자백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의 곧 별세할 것 앞에서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죽으십니까? 주님이 죽어야 삽니다, 하는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지금 하루, 하루 사는 것도 온종일 내 살 궁리밖에 안습니다. 이정도로 죄인입니다. 라는 생각이 이것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겁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걸 가지고 인간 바꿨다고 하는 겁니다. “뭐, 목사님은 십자가 피만 믿으면 된다면서요.” 그게 피 믿는 거예요. 그게 피 믿는 거고 그게 사람 바뀐 거예요. 이제 피 믿었으니까 이제는 나는 또 내 궁리를 해야겠다. 이러면 바뀐 게 아니라니까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 피는 약처럼 먹는 보약이 아니라고요. 자,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애굽은 늘어진 엿가락처럼 죽~ 끌려나옵니다. 애굽에 살던 자가 오니까 이게 애굽의 엿가락이 같이 묻어있네요. 뗄 수가 없어요. 떼고 사는 방법을 몰라요. 왜? 새롭게 사는 방법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은 애굽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이리 산다 해서 거지로 만들어 놨어요. 아침에 나오면 전부 다 맛나 주워 먹는다고 이게 거지에요. 거지. “아이고, 양식.” 이런 식으로.
또 애굽에서 입맛 들은 게 있어요. 육류.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호주산 쇠고기. 일체 주지를 않았어요. 입맛은 고기 먹는 입맛이고, 이건 맛나만 주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력이 쇠했다 해요. 애굽 식으로 해서 기력을 생산하던 그 방식을 못 버리겠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우리 하루, 하루 삶이 그래요. 아무리 하나님이 예수님이 주님께서 십자가 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못 살겠습니다. 천하에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했지만 난 그 짓 못합니다. 내 자식 내 처자가 최고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삽니다. 그렇게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는 게 그게 바로 죽음 받고 있는 중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그렇게 고백할 대상이 없어요. 왜냐 하면, 성경 말씀을 안 믿으니까. “그 때 노하셨대.” “나는 성경 말씀 자체를 안 믿어. 따라서 누구도 나에게 노한다는 것에 대해서 신경 안 쓰겠어.” 이게 불신자잖아요.
그런데 신자는 이 말씀이 생각날 수밖에 없지요. 아, 요 내 하는 짓이 애굽 짓이고 요 애굽 짓이 천국하고 너무나 안 맞기에 주님께서 노하심으로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못 간다는 것을 누누이 우리에게 챙겨주시는 작업을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해주시는 겁니다. 애굽은 늘어졌다. 엿가락이다. 떡가래나 엿가락으로 생각하시면 쉽고, 40년 요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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