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85강-기도의 열매(고전14;14-19) 1603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3. 21. 07:16
2016-03-20 12:51:41조회 : 72         
   기도의 열매 160320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기도의 열매(고린도전서 14: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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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3-20 13:35 
기도의 열매

2016년 3월 20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4:14-19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성령에 의해서 기도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기도와 구분되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성도들도 화답하여 “아멘!”할 수 있는 내용이 나와야 성령의 은사로 하는 기도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기도를 둘로 구분짓는 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6:7-8에 보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상되고 기대되는 기도는 그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기도’라는 겁니다. 중국집 주방장이 밀가루를 반죽 할 때에 이미 머리 속에 탱탱한 면발을 예상하게 되고, 총각이 처녀에게 결혼 프로포즈를 할 때에 ‘결혼 승인’되는 발언을 예상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성령의 은사에서 나온 기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주어진 상황을 ‘필연’으로 조립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에게 모든 것은 ‘우연’일 뿐입니다. 즉 인간들의 손에 잡히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를 붙잡고 은사, 곧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이 선물은 결코 소유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주신 분에게 소유당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상대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서 볼 때에는 인간은 그저 흙이요 고기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인간이다”고 자부하는 것은 불순한 세력 아래에 인간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란 실은 출생 후에 생긴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육체적으로 어미와 분화되어도 정신적으로 분화될 것도 없이 아예 ‘자아’라는 것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갓난 아이를 안고 거울을 보면 아이는 그 거울에서 엄마만 찾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자신을 가리켜 “나!”라고 지칭하는 그 자아는 어떻게 생겨나는 겁니까? 그것은 육신 고유의 욕망이 무의식에서 의식 표면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통로에서 육신이 뿜어내는 욕망의 힘과 외부에서 강압적으로 억압하는 간섭을 강제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즉 욕망과 검열의 만남입니다. 이로서 욕망은 억압을 당하면서 발생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부모의 훈계와 양육을 통해서 “너는 사람이 되려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아니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살면 현 세상에서 사람 대우받지 못해.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거야”라고 강제당하게 됩니다.

욕구와 통제를 그때그때마다 균형 맞추고 조절하는 가운데서 “그래, 나는 이런 사람임에 틀림없어”라고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그 훈계가 말동무로부터 주어지게 됩니다. 아들러라는 정신분석자는, 온갖 정신과 관련된 환자들을 나열하면서 (신경증자, 정신분열자, 마약중독자, 도박중독자, 자살자, 범죄자, 매춘부, 등등) 이들이 어릴 적에 가족들과 협업관계를 이루지 못한 결과라고 본 겁니다.

즉 억압된 꿈이 검열없이 그대로 외부로 방출되는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이 억압된 꿈이 대낮에 펼치게 되면 그게 바로 이방인의 기도의 내용이 됩니다. ‘바른 시간 내에 어릴 때 형성된 자아의 이상형에서 결핍된 요소를 회복하고 마저 보충해야 한다’는 경향을 숨길 수 없게 됩니다.

얼마나 자아에 한이 맺혀있으면 기도로 발현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자기 욕망의 닦달에서 벗어나 승화되려는 겁니다. 따라서 기도 응답을 미리 내다보고 예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난 성령님에 의해서 생겨나는 기도는 ‘은사’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이 은사, 곧 선물은 성령님의 선물로 나타나지만 실은 ‘예수님의 기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은사는, 은사 받는 자를 은사 주신 분의 위치를 구심점으로 하여 수렴하고 응집하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자기 자아로 예수님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상대하는 거리가 좁혀지고 결국에는 예수님 안으로 함몰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아의 죽음’입니다.

즉 자기 문제를 자아가 걱정해서 기도하는 것과 본인이 하늘의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되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어릴 때에 형성된 자아 안에서, 욕망의 이성적 도덕과의 협상과 타협의 결과로서 내놓게 되는 그런 이방인의 기도 자체가 바로 흙인 주제에 인간이라고 행세하고 자존감을 갖는 그 바탕이 된 겁니다.

바로 인간을 그런 식의 자아감을 갖고 살아가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그 사단과 예수님은 상대하시려고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예수님은 대변자요 대표자이십니다. 인간들의 자아에서 나온 기도는 그저 ‘살고 싶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죽음이 기적이다’입니다. 즉 죽음을 모르고, 죽을 수도 없는 인간 앞에,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참된 죽음임을 보여주고 관계를 갖게 될 때, 이것이 진정한 기적인 것입니다.

이 기적은 인간들의 기존의 악마의 심보로서는 도저히 예상 못할 기적입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예수님 홀로 이루어내신 그 죽음에 참여할 재주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보내어서, 그 보냄은 받은 자만이 예수님과 ‘너-나’의 관계를 청산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살게 된 자 되게 하십니다.

그 예가 바로 욥의 경우입니다. 욥에게는 재산도 있었고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어놓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새로운 ‘있음’으로 욥을 전환시켜 놓습니다. 이것이 곧 인간의 대표자로서의 중보자의 기능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이러한 현상은 그대로 후대에 반복됩니다.

사람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에게 어떤 병이 있는지를 검사하기 위해, 소변검사하고 피뽑아 검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해야지 자기 안에 어떤 썩은 것이 작렬하는지를 알지 않겠습니까? 성령의 은사는 주변 성도의 “아멘”을 이끌어냅니다. 이는 사적인 욕구 달성과는 상관없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바로 ‘예수님만이 해내시는 일’ 곧 ‘예수 이름’만 합당한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흙이요 고기덩어리인 존재를 ‘천국의 사람’으로 교체하는 작업입니다. ‘내 속에 자아의 세계 확장만 노리는 획책’만  가득 차 있음을 고백할 때, 성도라는 다같이 “아멘”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친히 만드시는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자기 이름을 빛낸 자격자라도 되는 양, 여기면서 살아온 본성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3-21 06:40 
181강-고전 14장 14-19(기도의 열매)1603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14-19절입니다. 신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에서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할 때 그걸 ‘영으로 기도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사로 기도한다.’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기도를 하기 때문에 여기서 필히 무엇과 무엇이 구분되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로 주는 기도와 그렇지 않고 인간이 하는 기도와 구분이 되지 아니하면 은사로서 영으로 기도하는 그 기도가 부각이 안돼요. 이게 혼동을 일으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걸 한꺼번에 처리했어요. 성도가 되어서 하는 기도는 다 영으로 하는 기도라,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선물로,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는 그 기도가 따로 있어요. 그리고 그 기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성령으로 하는 기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가 뭐냐? 오늘 본문에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아멘’이라고 하는 효과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서 나에게 전달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나도 같은 생각으로 현재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동의의 표시가 아멘입니다.



“너 기도 참 잘하네.” 그게 아니고 “너는 구원 받았구나.” 그게 아니라 “주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네.”라는 식으로 “아멘!”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의 은사로, 성령의 선물로 주기 때문에 성령의 선물로 줄 때 이것은 필연이 아니고 우연입니다. 필연보다 우연이 더 세요. 필연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고 잡을 수가 있지만 우연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집 주방장이 밀가루 반죽을 한다. 누구나 예상합니다. ‘주방장이 밀가루 반죽을 한다는 것은 거기서 탱탱한 면발이 나올 것이다.’ 예상이 되거든요.



그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필연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제가 지금 중국집 자장, 짬뽕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필연적인 기도를 하고 있다는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총각이 아가씨에게 프로포즈할 때 장미꽃 준비하고 초 준비해서 이벤트 하잖아요. 우리 때는 그런 것 상상도 못했는데 돈 아까워서 그런 것 어떻게 하는지 몰라요. 그런 이벤트 할 때는 뭔가 예상을 해요. ‘내 프로포즈를 들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 예상을 합니다. 주방장이 밀가루를 만진다, 어떤 총각이 아가씨에게 의사를 표한다, 이런 것은 다 예측이 되는 겁니다. 다 예상되고 기대가 돼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상대할 때 이게 예측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이게 예측이 안돼요. 이게 필연이 아니고 우리의 필연의 범위에서 빠져나와 버립니다. 이게 우연이 되는 겁니다. 우연이 되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걸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연이 될 때 주어진 전체가 선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사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기도의 열매>인데 기도를 언급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기도할 때 주방장이 밀가루반죽 만지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기대를 하고 기도를 해요. 어떤 예상을 하고 기도를 해요.



이게 주의 선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게 성령의 기도가 아니에요. 마치 하나님을 사람 다루듯이, 밀가루반죽 다루듯이 내가 하나님을 주물럭거릴 테니 내가 기도한대로 당신은 응답만 하면 된다, 라고 하는 이것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기는 기분이 좋다 하지만 남들이 ‘아멘’ 할 수가 없어요. 아멘이 안 되는데 억지로라도 아멘을 해주지만 사실 공중기도 하는데 아멘을 붙이는 것은 기도를 좀 빨리 끝내달라는 뜻으로 붙여주는 것이고요.



“진정으로 당신이 기도를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떠나서 주님이 여기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기도는 기도하는 당신에게만 선물이 아니고 그 기도에 아멘, 하면서 고백할 수 있는 능력도 당신 못지않게 나에게 선물로 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게 덕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난 방언에서 누구한테 질 의사가 없다. 난 누구보다 방언을 잘한다. 하지만 그런 많은 방언, 일만 마디 방언보다 알아듣는 다섯 마디가 나으니라.” 방언의 최고 실력자가, 최고 능력자가 지금 우리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누구보다 방언 많이 하지만 나 혼자 은혜 받겠다는 그것은 아멘, 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가로막는 짓밖에 안 된다. 따라서 방언을 하거든 통역을 기대해야 되고, 통역이 되거든 택한 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아멘이 되고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멘이 되지 않고 노멘이 되도록, 아멘에 도저히 참석할 수 없게 하는 그것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져야 되는 겁니다.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했던 그 기도내용과 오늘 내용이 일치되는 가운데서 마지막 때까지 흘러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이방인처럼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뭔지를 알려면 이방인의 기도가 뭔지 필히 그걸 전제로 하고 있어야 돼요. 그걸 바탕으로 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필요한 것 달라는 것이 이방인의 기도라는 거예요. 나한테 미흡한 것, 모자라는 것, 인생 탈이 난 부분에 대해서 빨리 원상회복하고 싶은 것, 옛날 잘나갈 때 좋았는데, 하고 그 때가 그립고 못 잊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빨리 그 때의 그 영화, 잘나가던 그 시절을 회복해달라고 시도하는 기도, 그거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에 속한 기도인데 그런 기도는 하지 말래요.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 이걸 줄여버리면, 기도하지 말라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것을 더 알기 쉽게……, 제가 지금 ‘알기 쉽게’라고 강조하는 의미가 있어요. 알기 쉽게 말한다면 기도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이 죄가 돼요. 이 소리 듣고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또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기도하는 것이 죄가 됩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기도해서라도 내가 기어이 원상회복하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겠느냐, 그 짓이 바로 네 속에 있던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라는 거예요. 기도하라, 기도를 해야 너 말고, 너를 제쳐놓고 너를 그렇게 만든 배후세력을 내가 성령으로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기도하라는 말은 병원에 가서 피검사하고 소변검사 하라는 겁니다. 당뇨인지 아니면 고혈압인지, 건강검진을 해야 알 것이 아닙니까? “피검사 합시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합시다. 기도하세요.” 그 말이에요. 기도를 해서 주사기로 그걸 뽑아내야 돼요. 대체 네 안에 뭐가 그렇게 분통스럽고 네 인생에 대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내가 만들어가는 인생에 대해서 네가 그렇게 입이 튀어나와서 불퉁스럽게 살아가는지, 피검사를 해봐야 되지 않습니까? “마음껏 기도해라. 그리고 그것이 죄인지를 알아라.” 기도를 해야 죄를 알지요. 중요한 것 나올 때는 적으세요. 줄도 긋고요. 기도를 해야 죄를 알지요. 뭔가 속에 있는 것이 끄집어져 나와야 할 것이 아닙니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방인 같은 기도를 하지 말라.” “그러면 이방인의 기도는 뭡니까?” 자기가 필요한 것 달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이방인의 기도라는 거지요. 한 번 가지고 안 되니까 떼를 쓰는 거예요. 중언부언,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하면서, “주씨옵소서!” 쌍시옷이 들어갑니다. “쭈씨욥쑈셔, 쭈씨욥쑈쎠! 쭈여! 쭈씨욥쑈쎠.” 그거에요. 바닥을 막 쳐가면서, “쭈씨욥쎠써!” 피 뽑는 과정입니다. 주사기 찔러서 뽑는 거예요. “그래, 바로 너!” 피 뽑는 거예요. “이런 썩을 것이 들어 있었구나. 또, 또, 더 해봐라.” 이렇게 뽑을 것을 뽑아내는 거예요.



기도라 하는 것은 유아기에 있었던 환경의 내용이 우리 주체의 내용으로 담기게 됩니다. 하나의 그릇이니까. 인간이 태어나면서 엄마와 분리되면서 처음 출생 시에는 인간에게 정신이 없어요. 엄마가 아기를 안고 거울을 봐도 아기는 자신을 안 봐요. 엄마를 봐요. 얼마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애기를 안고 거울을 봐도 아기는 자기 얼굴을 안 봐요. 엄마를 본다니까요? 자기는 없고 엄마의 일부입니다. 육체는 분리되었지만 정신은 따로 자기 것이 없어요. 그 자기정신을 뭘 로 채우는가? 엄마와 아빠의 양육으로 채워집니다.



채워지면서 그것이 무의식이 되고 그것과 인간의 육체적인 본능과 합해져서 이것이 어디로 올라오느냐? 나중에 자의식이 생기면 의식세계로 표면에 올라와요. 올라오면서 두 가지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나는 소원이 있다, 무엇이 하고 싶다, 갖고 싶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이런 욕망이 나옵니다. 욕망이 나오면서 위에서 아빠 엄마의 훈계가 있으니까 검열이 돼요. 이걸 어떻게 아는가? 애들도 꿈을 꿔요. 개도 꿈을 꾸는데요. 꿈을 꾸잖아요. 꿈은 뭐냐 하면, 억압된 거예요. 억압된 것이 잠을 자는 사이에 분출되는 것이 꿈입니다.



대낮에 꾸는 꿈이 뭐냐? 그게 기도에요. 그게 기도입니다. 설거지 하면서 기도 안하거든요. 모든 행위를 끊고 일종의 가사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무의식속에서 화산폭발해서 자꾸 마그마 올라오듯이 올라오거든요. 올라오면서 의식단계에 옵니다. 올라오면서 ‘나는 저절 갖고 싶어. 나는 저걸 하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어릴 때 아빠의 훈계, 엄마의 교육이 있어요. ‘안 돼. 그러면 너는 사람대접 못 받는 거야. 그러면 너 인간 안 되는 거야.’ ‘그래. 내가 참아야겠지.’ 이게 자기 속에서 조율이 되고 규형을 맞춘다고요.



균형을 맞추는데 이게 억지가 돼요. 사람 인생 억지로 사는 겁니다. 우리네 인생이요, 이것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살아야 돼요. 어쩔 수없이 산다는 말이 두 자로 ‘억지’입니다. 산다는 게 억지에요. “휴~! 오늘도 밥을 먹어야 되나……?” 이런 식으로. 오늘도 밤이 되면 또 자야 되느냐, 이렇게 모든 것이 억지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뭔가 하고 싶다는 꿈, 하나의 희망, 나는 그걸 기대한다, 이게 올라오면서 ‘너 그거 맘대로 안 돼. 네가 착한 일을 해야 하나님이 응답해주지.’ 하는 어떤 검열, ‘좀 조정해라. 그건 좀 과하잖아. 너만 생각해서 되겠어? 남에게 피해를 주잖아.’라는 이 검열, 이것이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에 의해서 되는 겁니다.



따라서 어릴 때 부모가 가까이 하지 아니하면 어른이 되어서 그것이 남에게 피해가 되는지도 모르고 막 분출이 돼요. 그 때는 사법당국이 강제로 교도소 보내든지 하는 거예요. 어떤 정신의학자가 조사를 해봤어요. 신경증환자, 정신병자, 알콜중독자, 자살자, 성도착증, 동성애, 매춘부,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뭐냐? 어릴 때 협업관계가 안되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아들러라는 정신의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내 속에 있는 내용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는 그냥 놔둬버리면 동물과 마찬가지에요. 이게 그냥 살덩어리, 고깃덩어리입니다. 짐승처럼. 누가 “안 돼!” 하는 그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을 때는 그냥 마구 나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어요. 인간자체가 흙이니까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고, 잠시 흙에서 고기가 되었다가 고기에서 흙이 되고, 이것이 인간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중간에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해요. ‘나는 사람이다. 나는 그냥 고깃덩어리 아니야. 나는 흙이 아니야. 나에게는 정신이 있어.’라고 할 때 주께서 지적하는 것은 그거예요. 그 정신을 배후의 누가 그렇게 심어줬는가를 이제 추적해 가는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기도하라는 거예요. 기도하라. 네가 기도를 해봐야, 피검사, 소변검사를 해봐야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고 흙덩어리에 불과한 너에게 “나는 그래도 인간이야. 나는 인간이기에 인격성이 있어. 나를 무시하지 마. 너는 나를 모독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자존심과 체면이 있는 것이라는 말, 그래서 내가 인간답다고, 날 건드리면 가만 안 있겠다는 그런 정신세계를 부여한 배후세력이 있는데 그 배후세력에 누가 관여하는가? 주님께서 그걸 관여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보고 맘껏 기도라는 죄를 짓게 하는 겁니다.



기도는 죄에요. 기도 안 해도 죄지만. 피검사 하는 겁니다. 그걸 정당화하지 마세요. 새벽기도 두 시간 한다고 응답받는 것 아닙니다. <기도의 열매>가 오늘 설교의 제목인데 기도의 열매는 성령의 선물로 주어지는 거예요. 지금 제가 성령이 주신 기도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기도를 구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해서 성령의 기도가 주어집니까?”라고 궁금해 하실 거예요.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인간의 대변자와 상대합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사실은 이게 복음의 가장 기초고 기독교의 기초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인간을 대표한 대변자와 상대해서 일을 처리하고 맙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가인이야기를 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가인을 대변자로 내세워서 상대를 해요. 하나님이 대변하는 상대자는 하나님이 알아서 만들어가요. 아담, 가인, 아브라함, 야곱, 이삭, 전부 다 하나님이 직접 관계하는 분들이에요. 하나님이 음성으로 그들에게 찾아온 사람들이에요. 그걸 언약 속에 있는 존재라고 해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라고 해서 그 이야기를 아브라함이 전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삐진 거예요. 네가 뭔데 특별대우를 받느냐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되게 억울한 거예요. 하나님보고 찾아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찾아와서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움 받는 대상이 되고 만 겁니다. 인생이 그런 거예요. 왜? 우리는 흙이고, 우리는 고깃덩어리인데 흙에서 흙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고, 고깃덩어리가 썩고 박테리아가 활동해서 흙이 되는 것이 당연한데, 진짜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표하는 대표자를 일부러 만들어서 그와 관계하면서 “이게 인간이야.”라고 새롭게 진짜 하나님이 기대하는 인간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최종적인 인간이 나타났을 때 그분의 마음, 그분의 성격,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면 그것이 은사고 그분과 합체되는 마음이 있을 때 ‘아멘’ 하면서 우리는 성령에 의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야기는 길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돼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흙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흙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해요. 안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대신 대변자를 내세웠습니다.



그분이 누구인가? 구약 때는 가인, 아브라함, 이삭, 이런 분들이었지만 신약에서 예수님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변자입니다. 이게 불교하고 다른 점이에요. 불교는 하나님, 신과 우리가 직접 상대를 해야 돼요. 그러나 복음, 기독교는 뭐냐? 중간에 중보자가 들어가는 겁니다. 중보자가 끼어들어서 왜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하고 중보자가하고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가? 그걸 뒤늦게 ‘아, 이런 이유 때문에 주께서는 나와 직접 상대하지 않고 나대신 중보자와 이야기가 그 끝난 효과, 그 결과를 선물로, 은사로 무상으로 그냥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초대교회 때 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있고, ‘너도 그런 은사를 선물로 받았어? 나도 받았어.’ 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 “아멘!” 하면서 같이 교회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교회란 뭐냐 하면, 나는 내가 잘나고 못나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천국가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동조하는 집단이 교회입니다. 내 행함과 관계없이. ‘그러면 목사님! 이제부터 내기도 안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그 대변자가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전에 인간도 아닌 것을 자꾸 인간이라고 부추긴 그 가짜, 사탄이죠, 악마의 힘인데, 악마의 힘을 바깥으로 내 뿜으면서 바깥으로 나가는 현상이 일어나요. 그렇게 내 안에서 교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한, 내가 예상한 그 기도는 바깥으로 쫓겨나오고 주님의 기도가 내 안에 들어오는 그 과정을 우리가 보여줌으로서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 어렵지 않은데 욥을 생각해 보세요. 욥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 욥 자신은 인간이고, 믿음 좋고, 재산도 많고, 자식도 열 명이나 있다고 한 거예요. 있다, 있음이에요, 있음. 있음인데 주님께서 은혜주기 위해서 그 있음을 뭐로 바꾸는가 하면, 없음으로 바꾸었어요. 있는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욥의 모든 재산과 자식을 없앴다고 할 때 우리가 두렵게 듣지 마세요. 하나님이 날 구원하게 위해서 있는 자식도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하지, 라고 벌벌 떨지 마세요. 왜냐하면 욥은 대변자니까. 우리가 흉내 낸다고 대변자가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직접 욥을 통해서 그 뒤에 오고 오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대변하는,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특별히 상대하기 위해서 따로 뽑아놓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뭐가 있더라도 없다고 생각하면 돼요. 문제 굉장히 간편합니다. 자식이 열 명 되더라도 오늘 같이 죽자, 하고 농약 마시지 마시고 그냥 있어도 없는 거예요. 있음을 주께서 없음으로 바꾸어놓고 없음에서 주님이 개입해서 없음을 다시 있음으로 바꾸어놓으면서 욥을 천국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왜 했을까요? 이미 고깃덩어리고 흙덩어리인데 마귀가 선악과 따먹게 해서 ‘나도 선과 악에 대해서 안다.’ 이래서 인간도 아닌게 자꾸 인간으로 행세하는 거예요.



요새 대구시 동구의 그 국회의원 공천 이야기 나올 때마다 그 생각하는 거예요. 고깃덩어리거든요. 흙이라는 말이지요. 그걸 공천 주느냐, 마느냐, 그 이야기를 뉴스에서 몇 주째 하고 있는지 몰라요. 잘라라, 아니 네가 알아서 나가라, 고깃덩어리 하나 놔두고……, 그런 의원보고 기도하라고 하면 무슨 기도를 할까요? 성령의 은사요? 안 나옵니다. “주여! 국회의원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나올 거라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육적인 기도에요.



욥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욥은 있었는데 없애고 없는 것을 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너한테 주어진 모든 것이 어떤 대변자를 경유해서 선물로 준 자식들이고, 재산이고, 통장이고, 건물이라는 말이지요. 전부 다 선물로 준 거예요. 고기고 흙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은사가 주어지니까 고기가 아니고 천국 가는 진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개입해야 인간이 돼요. 나 혼자 버티면 이것은 흙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으로 가야 돼요. 하지만 주께서 이렇게 찾아오니까 비로소 인간 아닌 것이 인간이 된 겁니다. 그럴 때 성령의 은사가 내용으로 주어지는 거거든요.



주어지게 되면 은사의 어떤 내용을 가지고 아멘, 할 수 있는가? 이게 약간 어려워요. 이게 뭐냐? 세상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땅을 사두었어요. 나중에 그거 팔아서 자식들 혼수라도 하려고 했는데 땅값이 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우리의 주특기인 기도가 나오잖아요. “주여! 주시옵소서. 땅값이 오르게 하옵소서.” 은근히 기대하면서 기도했는데 진짜 땅값이 열 배가 올라서 얼른 팔아서 아들 장가 잘 보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여기서 뭐가 중요한가? 그렇게 했을 때 땅값 오른 것을 기적으로 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대해서 듣고 있던 다른 집사님이 “아멘!” 하겠습니까? ‘에이 씨! 내 땅은 왜 안 오르지?’ 이렇게 아멘이 아니라 노멘밖에는 안돼요. ‘나는 20년 동안 기도해서 아무 일 없고 저건 며칠 기도했는데 응답받고 누군 인삼뿌리 먹고 누군 무 먹으라는 식이야 뭐야?’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아멘이 안돼요. 그러면 다 같이 아멘이 되는 방법은 뭐냐? 땅값 오르기를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되거든요. 시기만 날 뿐이지요. 그러면 뭐냐? 진짜 기적을 주면 돼요. 그 기적이 뭐냐? 죽음이 기적이에요.



이거 아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죽는 것,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고 죽는 것이 기적이에요. 죽는 것이 기적이고 살아 있는 것은 그 기적을 말하기 위한 사전조치로서 작은 부스러기 기적들이에요. 그런데 그 기적, 죽음이라는 그 기적을 통해서 뭐가 주어지는가 하면,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로 내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다는 겁니다. 너무 어려운 것 같으니 쉽게 갑시다. 하나님의 은사의 특징은 뭐냐? 이걸 어려운 말로 응집, 또는 수렴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대변자에 의해서 낚시 줄 잡아당기듯이 죽죽 잡아당기면 이제는 너와 나의 관계가 사라지고 주님과 하나가 돼버려요.



그러면 내 걱정은 없어지고 주님의 할 일만 내 몸에 계속해서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것은 성경에 나오니까 성경적으로 위배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7장59, 60절에 보게 되면,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스데반집사의 죽음은 기적이 되는 이유가 있어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는데 죽게 되면 어떤 기적을 낳느냐? 이게 구원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기적이 돼요.



내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하는 이야기가 “주여, 나에게 돌을 던진 사람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고 용서해주옵소서.”라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이 구원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는 말이지요. ‘스데반집사가 자기에게 돌을 던진 사람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 이유가 뭐지? 아, 스데반 집사는 본인이 죽는다는 그것조차 주께서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자기를 다루고 죽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구나.’ 그걸 알고 있어서 그 사실을 모르는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나의 죽음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죽음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그 계기가 되고 수단이 된다면 이것은 어떤 기적을 낳는가? 스데반집사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아멘!” 하고 동참할 수 있는 기적이 되는 겁니다.



스데반집사가 죽어가면서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이렇습니다.”라고 전할 때 그것 알아듣고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성령의 충만을 받았거든요. 그 같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우리는 그 말을 이해를 하게 돼요. 스데반 집사가 “저들을 용서하옵소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을 우리가 헤아리게 되는 겁니다. ‘아하, 저렇게 넉넉하구나.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그 사실이 얼마나 넉넉한지를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통해서 주께서 또 다시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아는 사실에 대해서 내가 아멘으로 동감하니까 지금 주께서 나에게 똑같이 스데반집사와 같은 식으로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같은 교회가 되고 형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는요?” 이렇게 나오지요. “나만 돌에 맞아죽고 나만 손해네?” 이렇게 나오잖아요. 성령의 선물을 받으면 그 나라는 관계, 나와 너와의 관계, 나와 주님의 관계는 소멸되어 버리고 주께서 다루시는 사람이 돼버려요. 나의 것이 없으니까 내가 내 것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지요. 성령에 의해서 기도하게 되는 그 기도의 내용은 같은 성도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내용만 나오는 거예요.



땅 값 오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아들 공부 잘한다는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멘이 절로 될 수밖에 없는 것,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유일한 최종 기적이었다. 동의되나?” “나 믿어지는데? 동의 돼.” “스데반 집사가 돌 던진 사람을 용서했다는데 이해가 돼?” “이해 돼. 누가 내게 돌 던져도 내가 그런 소리 하겠어. 왜? 주께서 그렇게 나를 사용한다면 그걸로 족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을 명제로 만들면, 죽음은 없습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죽음이 있다면 하나의 죽음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죽음만 죽음이지 다른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안 죽어요. 죽지를 않습니다. 마귀가 “너 그러면 죽는다.” 이렇게 자꾸 협박공갈을 하는데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이란 것을 애초부터 몰라요.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은 자기와 결부된 자기죽음밖에 모르는데 죽음 뒤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죽으면 안 되는데, 나는 죽으면 안 되는데.’ 이런 걱정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기도 다시 해봅시다. 무의식이 의식표면에 올라오면서 ‘나는 살고 싶다.’가 나와요. 그러면 검열해요. ‘너만 살면 안 돼. 다른 사람도 고려해야지.’ 이것이 부모로부터 양육 받으면서 성격으로 구성이 되는 겁니다. 평소에는 억압되었던 것이 밤에 꿈에 나타나는데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와서 기도를 하게 되면 잠시 잠자는 상태가 되어서 꿈꾸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주님이여, 이 소원을 위해서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하고 싶습니다.” 이런 욕구가 나와요. 그러면 주님이 “왜 그렇게 하는데?” “살고 싶어서요.”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주님은 “왜 살아야 되는데?” 거기서 할 말이 없어요.



왜 할 말이 없느냐 하면, 끓어오르는 욕망은 이게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는 것은 검열된 상태에서 나가 등장하지 그냥 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배고프다, 내가 배고픈 것이 아니고 내 육체가 배고파요. 그런데 남한테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핑계 댑니다. “내가 배고프거든.” 이렇게 거기에 나를 집어넣어요. ‘배고프기 때문에 빵집에서 빵을 훔쳐야 돼.’ 하면 내 속에서 검열해요. ‘아니야! 배고프다고 그러면 안 돼.’ 그렇게 검열할 때 거기서 자아, 나라는 것이 만들어져요.



설명이 참 어렵습니다만 그게 없으면 정신병자가 되거든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이건 미친 거예요. 자기가 무슨 나폴레옹입니까? 검열상태가 없으면 정신병자 된다니까요. 그래서 인간답게 사는 인간은 없어요. 덜 정신병자인가, 노골적인 정신병자인가, 그 차이뿐입니다. 노골적인 것은 정신병원에 가야되고 덜 정신병자가 소위 반기문총장, 김수환추기경, 법정스님, 한경직목사, 주기철목사, 그런 사람들이에요. 유승민……, 자기 딴엔 억압하고 억압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교회 와서 아무도 없으면 “주여! 이럴 수 있습니까?” 하고 부르짖는 거예요. “공천 받게 하옵소서.” 남이 볼 때는 입 다물고 꾹 참고 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질적으로 같기 때문에 조금 더한가, 덜한가는 관계가 없어요.



협업관계, 어릴 때부터 부모나 친척이 있어서 “너 그러면 안 돼.”라고 억압하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그렇고 그게 없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하는 짓이 남에게 피해가 되는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내지르는 거예요. 애들이 나중에는 부모 곁을 떠나서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서 엄마 말 안 듣고 주로 친구들과 돌아다니지요. 사춘기 때 독립했다고 하면서 친구들과 자기 맘대로 돌아다니고. 망나니입니다. 이것은 그냥 고깃덩어리에요. 놔두면 통, 통, 통, 자기 맘대로 튀는 거예요.



기도할 때 “하나님, 제가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검열해요. ‘마냥 의지해서는 안 되고 네가 할 것은 해야지.’ 이게 바로 성화 론입니다. 기도하면서 조절해요. 왜? 스스로 자아의 균형을 맞추고 균형을 안 맞추면 자기가 힘드니까 “주님이여! 이것은 제 힘으로 안 되니까 기도하지만 이 점은 제가 착함을 가지고 알아서 인간답게 살겠습니다. 제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이 두꺼운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주께서 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이정도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좀 봐주셔서 주께서 내가 기대하는 것을 알아서 좀 채워주시고 기도 안 해도 좀 채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말 안 해주시면 검열관계를 그치고 주께 그냥 매달리겠습니다. 언제까지 기도해야겠습니까? 응답할 때까지 매달릴 거예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공갈협박 하듯이. 그게 바로 이방인들의 기도에요.



이렇게 이야기 하니 이제 여러분은 기도할 맘이 없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말씀 순종하겠다는 사람에게 열왕기하 2장 들이대면 할 말이 없습니다. 열왕기하 2장의 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23절부터,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우리가 이거 순종할까요?

엘리사가 대머리였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철없는 애들이 뭘 압니까? 애들이 철이 없지요. 철이 있다고 해서 훌륭한 애 아닙니다. 철이 있다는 것은 평소에 부모가 대머리 놀리지 말라고 양육을 한 것뿐이에요. 애들이 뭘 알겠어요? 대머리 보고 대머리라고 했지요. 애들이 틀린말 한 것 아니거든요. 대머리보고 대머리라고 했는데 엘리사가 듣고 저주를 하니까 암콤 둘이 나와서 애들을 죽였는데 무려 42명이 죽었어요. 

자, 이 성경 대목을 두고 “주여! 순종하겠나이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고 영광돌리겠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착착, 심지어 기도 안 해도 채워주세요.”라고 은근히 기도하는 모든 것은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는 것이기에 기독교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에요. 엘리사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 그 당시의 어른 세계가 이미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을 개 무시하는 시대입니다. 어린애는 뭐냐? 그 어른의 일부에요. 어른의 대표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주님 쪽에서 나온 대표자에요. 악의 대표자와 하늘의 대표자가 왔을 때에 저주를 하게 되지요. 그러면 암 콤이 나와서 애들 42명을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찢어 죽였어요. 

이것은 뭐냐? 이 시대에 대해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간세상은 하나님께 너무합니다, 하는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엘리사를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는 거예요. 의인 열 명이 없으면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뭐냐 하면, “대머리야!” 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모독하게 된 그 분위기, 그 시대상의 배후인물이 있어요. 그게 악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마는 없고 내가 직접 하나님과 상대해서 ‘하나님을 의존할까? 나도 양심이 있는데 너무 의지하게 되면 안 되지. 내가 지킬 것은 지키고 못 지키는 것은 기도하겠습니다.’ 그저 자기다듬기, 자기 우수함, 자기 괜찮음, 자기 훌륭함, 이런 인간에게 무슨 대변자가 필요하고 대속 자가, 중보자가 왜 필요합니까? 자기가 훌륭한데. 그저 자기세계가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에게. 인간의 모든 기도가 뭐냐? 내 세력화, 내 세력의 팽창입니다. 내 세력을 팽창하기 위해서 악을 쓰는 것이고 떼를 쓰는 거예요.



혹시 미흡하거나 모자람이 있다면 빨리 원상회복시켜놓으라는 겁니다. “이렇게 내가 선한데, 나름대로 자기희생하고 자기부인하면서 죽어가면서 내가 이 정도로 주께 아부하는데 하나님도 어느 정도 호응을 해줘야 내가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건 흥정도 아니고, 협상도 아니고, 타협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고. 그래서 열왕기하 2장 같은 본문이 있는 거예요. “네가 속한 세계는 일치감치 저주받아도 합당한 세계다. 어디서 나에게 살려달라고 하는가? 너는 죽음도 모르고 사는 것도 몰라.” 죽음을 모르면 사는 것도 몰라요.



그러면 주님의 조치는 뭐냐?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 어떤 내용이기에 우리가 아멘, 할 수밖에 없는가? 요한복음 1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숫대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대목이 있어요.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이미 목욕한 자, 나대지 말라는 그 말이지요. 이미 목욕한 자는. 반복해서 너희 속에서 육적이고, 세상 적이고, 네 욕심만 챙기고, 어릴 때 생성된 자아, 이 자아 유지하려고 하는 죄성을, 그 소변검사를 끄집어내게 하겠다는 겁니다.



설교 지금까지 길게 했는데요. “목사님, 오늘 설교주제가 뭡니까?”라고 하신다면 기도, 하라는 거예요. 기도하고 제발 숨겨놓은 죄를 끄집어내세요. 그런 기도, 내 욕구, 욕망, 탐욕이 나온다는 말은 이미 뭔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뭐가 들어왔는가? 이미 목욕한 자는, 이미 구원받은 자는 내가 더 이상 나한테 손댈 것이 없는 거예요.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여기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이 뭐냐? 이미 나는 너희를 내 이름의 활동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동의하라는 겁니다. 기도함으로서 본인이 본인에게서 어떤 독소가 나오는지를 발견해야 돼요. “주여, 이것은 너무 심한 기복신앙이지요. 그래서 제가 이것은 좀 자제를 해서 기복신앙이 아니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내놓으니 이런 기도는 괜찮겠지요?”라는 그 죄를 내놓으라는 말이지요. “우리 애 셋이 있는데 그 셋 중 하나는 신학교 보내서 주의 종 만들겠습니다.” 하는 그런 죄 있잖아요. 그런 죄를 내놓으세요.



그리고 그 기도와 마태복음 5장의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과 결부시켜 보세요. 우리는 자꾸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것이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주께서 친히 다루시는지 그걸 몸소 체험하라는 겁니다. 내 뜻대로 응답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되고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이 주께서 손댄 흔적인 것을. 심폐소생술 할 때처럼 가슴 누르는 거예요. 쭈쭈바 쭉 짜면 마지막 얼음이 나오듯이 짜게 되면 죄가 튀어나오고 또 짜면 또 죄가 튀어나오고.



그런 기도를 하면서 ‘아, 역시 나는 죽을 때까지 자아만이 가득 찼구나.’ 하는 것을 내놓을 때 다른 사람이 “아멘!” 합니다. “아멘!” 이래서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동의를 해요. “나도 살아가면서 내 욕구와 욕망밖에 나올 것이 없었습니다. 내 자식 잘되기, 내 집안, 내 부동산 유지하기, 모든 것이 내 것 지탱하는 것밖에 안 나옵니다.” 할 때 “당신만 그런 줄 알아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멘!” 하는 것, 그게 선물 아니면 아멘 못하고 선물 아니면 그런 기도 못합니다. 그럴 때 “난 당신을 믿지 않고 나도 나를 믿지 않습니다.” 왜? 이것은 차후에 형성된 자아기 때문에. 오직 유일하게 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대변자로서 우리를 지금 다루고 있다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는 다 같이 아멘으로, 죄가 쏟아지면서 그게 아멘으로 성화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뭐냐? 발만 씻는 거예요. 계속 발만, 여기 저기 씻는 것이 아니고 계속 발만 씻는다는 것은 “이미 너는 무슨 짓을 해도 구원 받았어. 발 내놔! 구원받았어. 발 내놔! 구원받았어. 육적인 기도 해. 구원받았어. 육적인 기도 또 나와.” 그게 구원받았어, 라는 반복적인 표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멋진 기도, 말씀대로만 하는 어떤 기도를 해도 덩달아 포함해서 섞여 나오는 것은 이런 기도 했으니 특별대우 해달라는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 대응, 상대하기, 참 그것이 죄였습니다. 중보자 가리고, 예수님 무시하고, 하나님 직접 상대하는 것처럼 착각해놓고는 뒤에 예수 이름 붙이는 그 가증스러움, 주여, 진실로 어떤 기도를 해도 주의 이름으로 이미 기도하게 하신 그것을 우리가 소급해서 믿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