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강-고전 14장 26-33(통역)1604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26-33절입니다. 신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방금 읽었던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요새 사람들은 ‘완전 개판이다.’ 할 겁니다. 이것은 중구난방이고요. 사람이면서도 사람 아닌 것처럼 그렇게 말을 하고,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도 자제가 되지 않고 알아듣지 못한 말을 했을 때에, 이 단체라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조립된 단체가 아님이 확연하게 드러난 겁니다. 인위적으로 조립된 단체가 아니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이것은 배척해야 될 아주 괴상한 집단이 되고 맙니다. 기존의 질서체계가 갖춰져 있는데 그 질서체제에 의해서 아무리 해석을 해도 해석불가가 되는 단체가 있다면 그것을 흩어버리든지, 억압하든지, 파쇄 해버려서 인간들이 알아듣는 인간들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갖은 학대를 다 할 것입니다.
그것을 핍박이라 하는데, 이렇게 핍박의 대상자로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거예요. 구약에 보게 되면, “마지막 때가 되면 인간의 질서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없는 희한한 단체가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의도에 의해서 조합된 단체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된 성신에 의해서 그들은 예언도 하게 되고, 방언도 하게 되고, 계시를 하게 될 것이다.”라고 구약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것을 고린도교회, 이 초대교회에서 접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특이한 단체가 등장하는 그것만 특이한 것이 아닙니다. 이 단체가 합동으로, 일치된 마음으로, 도대체 이 단체, 교회라는 낯선 이것이 누구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누구 이름으로 모여서 한 마음으로 주어졌는가를 주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각자 자기가 잘났다고 해버리면 그야말로 개판이고 중구난방이 되지요.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예언하는 자들은 예언에 의해서 제재를 받는다, 통제를 받는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라는 그 뜻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쳐다봐야 될 분을 제대로 쳐다봐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에서 숨어계신 하나님,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정말로 이스라엘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만든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주신 약속이 있을 것이고 그 약속이 약속으로만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취가 되는 날이 있어야 되고 그 날이 와야 돼요.
그날이 오게 될 때에 미리 앞당겨서 구약에서 약속을 주신 그 당사자가 누구냐? 그게 마지막 때에 나타납니다. 교회가 중구난방처럼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데, 그들이 하나같이 주목하고 증거 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고, 그분은 이 땅에 오셨다가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분으로, 그냥 살아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나신 분으로 자신들에게 이러한 예언과 통역과 방언을 주셨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설교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누가 들으면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네.’ 또는 ‘옛날 과거의 교회 이야기네.’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이스라엘 역사로 말미암아 주변 역사들이 다 영향을 받는 것을 봐서, 이것은 질서 있는 이 인간세계 속에 뭔가 일부의 이해할 수 없는 단체의 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간세상 전체가 현재 이해할 수 없는 쪽으로 지금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구심점, 핵심, 원심력을 나타내고 있는 그 핵심부분이 지금 교회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때에 등장한 거예요.
그리고 그 교회 빼놓고 모든 인간세상은 그 교회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으며 그 교회중심에는 누가 계신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게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에 분명히 나와 있어요. 만물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분명히 나와 있는데 왜 KBS, MBC에서는 총선이야기를 하느냐 그 말입니다. 지금 제 이야기가!
전라도에서도 설치고 경상도에서도 설치고, 또 마치 세상이 북한 핵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관심을 두는데 에베소서 1장 22, 23절은 그게 아니고 세상 모든 것, 만물이 그 발 앞에 복종한다고 했어요. 절대적인 복종, 굴복 당함,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 앞에 어떤 식으로 굴복되는 현장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무질서한 것이 아니고 다 질서가 있는 거예요. 다만 질서를 잡는 그 중심체를 우리가 놓쳐서 문제지.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없어요. 가정의 중심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중심이에요. 세상 잘 돌아가는데 뭐가 어려워요? 이 말씀대로 세상 잘 돌아가는데.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중심을 잃어버렸어요. 중심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기존재를 중심에 집어넣으니까 세상사는 것이 팍팍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뭐가 이렇게 내 뜻대로 안됩니까?” 본인은 마귀한테 속했는데 마귀한테 속했으니까 뜻대로 안되어야지요, 뭐. 그리스도에게 속해보세요. 그리스도의 중심이 그 사람을 가지고 뭘 증거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죽을 때 예수 바라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살아 있으면서 살아온 평생이 “예수님께서 중심이 되셔서 이런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걸 ‘새로 생겨난 과거’라 합니다. 새로 생겨난 과거는 지나온 우리 기억 속에 없는 과거인데 십자가 안에서 뒤돌아보니까 ‘어? 저런 과거가 있었나?’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과거가 새롭게 발견되는 겁니다. 마치 살던 동네골목에 콘크리트 바닥공사를 해놓았는데 밤중에 보이지가 않으니까 그냥 막 밟고 지나왔지요. 뭐가 평소와는 좀 다르게 물컹물컹하다는 느낌으로 그냥 지나왔는데 아침에 다시 거기 가보니 자기 발자국이 죽 있는 거예요.
그 발자국이 뭐냐? 지난날 팍팍했던……, 가정이 어떻고, 내 생활이 어떻고, 회사가 어떻고, 그렇게 신경질부리고 짜증냈던 그 흔적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깔아놓은 새로 생긴 과거에 하나의 일부로서 거기에 박혀 있었던 것이 뒤돌아보니 다 밝혀지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단체 안에서 들추어냅니다. 들추어낼 때 말씀형식으로, voice, 음성형식으로 등장해서 그것이 문자화되게 되면 그것이 성경입니다. 문자화되기 전에 먼저 음성부터 주어졌는데 세 가지로 주어졌습니다. 방언과 예언, 그 중간에 하나 들어가면 통역이지요.
통역은 방언을 예언으로 바꾸는 겁니다. 방언 뒤에 뭐가 숨겨져 있는데 방언을 치워버리면 비로소 나타나는 본래의 방언에 담긴 뜻을 통역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그것을 연결 주는 겁니다. 통역이란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중간에 이어주는 것이 통역이거든요. 통역을 통해서 방언과 예언 사이를……, 방언은 나타난 것이고 그 나타난 내용에 관해서는 예언이고 둘 사이를 연결할 때 통역이 되는 겁니다. 이 통역과 방언과 예언이 일어나는 그런 특이한 집단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구약 약속된 것에 의해서 신약에 드러났습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이 이야기가, 예언과 통역과 방언이 그 바탕,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은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에서 그 중심이 지금 만물을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예언과 통역과 방언,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교회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전 세계에 보편화, 이미 퍼져버린 내용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음성으로 외쳤던 선지자가 먼저 등장했지요. 엘리야, 엘리사입니다. 음성과 거기에 따른 기적. 그 엘리야와 엘리사를 만나지 못하면 혜택을 보지 못하는 공간적이 제한이 있었어요. 엘리야, 엘리사를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못 받는 시절이 있었던 반면에 그 엘리야와 엘리사와 더불어서 점차 분명해지는 것은 이제는 그것을 문서화시키는, 글자 화 시키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누구를 만나지 않더라도 그 선지자가 천상회의에서 받았던 그 문자를 돌려보게 되면, 편지형식으로 돌려보게 되면 돌려보는 그 문자자체 내에서 전 세계를 통치하는 위력적인 능력이 그 문자로 말미암아 드디어 펼쳐지게 되는 세상에 도달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자 했어요. 왜? 만나지 않으면 귀신이 안 나가고, 만나지 않으면 앉은뱅이가 낫지를 않고, 만나지 않으면 소경이 듣지를 못합니다. “소문 듣고 왔습니다.”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되고, 예수님 옷 가를 만져야 되고, 예수님과 직접 신체적인 접촉을 해야 예수님이 갖고 있는 능력이 이쪽으로 이전된다고 생각했던 그것에서, 예수님께서는 점차점차 그냥 지시만 해도, “집에 가봐라. 다 나았다.” 이런 식으로 분리가 됩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과 직접 접촉을 하면서 3년 동안 따라다녀도 남은 것은 주님에 대한 배반이고 반항, 배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방언과 예언과 통역, 보이스를 통해서 문자화시켜버리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그 기적과 말씀이 이제는 요한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으로 문자화돼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통역도 폐하고. 이것은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어디서 만납니까? 이제는 성경 보면 만납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만나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총선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이 예언이고 통역이고 방언이에요. 따라서 그 일어나는 현상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성과 구심점과 중심점을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성경책만 달달 외운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책 외우려면 내 쪽에서 성경책으로 다가가야 되는데 내 쪽에서 성경책으로 다가간다는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언어를 그대로 가지고, 나밖에 모르고 나만 챙기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 언어질서, 나 중심의 세계에서 획득했던 이 언어를 가지고 예수님 중심의 성경으로 찾아가려고 한다면 이것은 필히 오해가 유발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성경을 백독했습니다, 천 독했습니다.” 또는 “‘킹제임스번역본’을 보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쉬운성경본’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까? 킹제임스번역본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습니까?” 저에게 그런 질문들을 숱하게 하고 최근에도 했어요.
하나님께서 성경원판을 안주신 것을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경에서 나온 향수는 온천지에 다 퍼져있고 성경에서 나온 그 저주의 능력은 온 천하에 다 퍼져 있어요. 성경은 확인하라고 준거예요. 우리가 늘 부대끼고 살아가는 이 상황, 접촉했던 모든 상황이 도대체 무슨 연유로, 어떤 의미로, 어떤 목적으로 나에게 벌어졌는지 확인차원에서 보라는 겁니다. 아침이 다시 밝거든 출근하면서 콘크리트에 내 발자국을 어떻게 어지럽게 찍어놓았는지를 한 번 보라는 말이지요. 주님이 만든 과거에 이 고집스러운 나의 과거를 가지고 우격다짐으로 나만의 아름다운 과거, 멋진 인생을 꾸미기 위해서 얼마나 나댔는지, 미친 개 뛰듯이 온천지를 밟아놓았어요. “세상아! 날 좀 알아다오.” 하는 식으로 인생을 다 밟아놓은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했던 십자가입니다. 이 말은 뭐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할 수 없는 능력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대신했기에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도 주께서 대신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대신하셨다는 말은 네가 너 된 것도 주님의 대신하심의 작업의 결과물로서 네가 그렇게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니고 거기에는 지옥 가는 사람도 포함됩니다만, 둘 중 하나입니다. 지옥이냐, 천국이냐? 어쨌든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주께서 예수님의 주되심, 심판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생들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인간들은 몰랐어요. 이 세상에 인간들만 있는 줄 알았지요. 인간 말고 사탄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사탄이 자꾸 인간을 앞장세우다 보니까 사탄은 없고 인간들만 있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수요예배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참고가 될 거예요. 사탄은 없고 인간만 있다고 인간의 역사로 우기고, 인간의 진화를 말하고, 인공지능을 말하고. 그냥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예수님 오셔서 살짝 이 세상에 담갔다가 올라가셨어요. 이 세상에 살짝 담갔다가, 이 세상에 오셨다가 죽으시고,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 보여주시고, 탈출에 성공하시고 올라가고 보니까 그동안 인간들이 신을 찾는 이 모든 일이 가증한 일이고, 그야말로 실패고, 하나의 참화, 참혹한 결과를 유발했던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타살상황만 남았어요. 왜 예수님을 타살해서 죽였는가? 그것은 자기존재가 신을 찾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신은 저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신을 찾고자 하는 겁니다. 배후에 있는 사탄이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그 악마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신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는 인간이고 곧 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이냐, 신이냐, 하는 말을 소위 인간들이 하기 때문에 인간이 내뱉은 용어로서의 그 인간은 아니고, 인간이 내뱉은 용어로서의 그 신은 아닙니다.
존재가 신을 찾아나서는 것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통역이고, 예언이고, 그것이 방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서 세상을 지배한다. 아닙니다. 그 말이 전부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었으니까 통제하시고, 지배하시고, 관리하신다. 그 말이 옳은 말이 아니에요. 그 중심에서 어떤 성질이 나와야 되는데 그 중심의 성질을 빼놓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을 다스린다. 그것으로 끝. 아닙니다. 그 중심은 뭐냐? 십자가정신으로 다스리지요. 십자가정신으로 다스리는 거예요.
십자가정신으로 다스린다는 것이 뭐냐? 인간이, 나는 여기 있고 신은 저기 있다는 그것이 통째로 다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어디에 있는가? 사탄은 빠져나오면서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 사탄이에요. 사탄의 권력에서, 권세에서,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면서 “아, 그동안 사탄에게 속았네.”라고 무릎을 치든, 허벅지를 치든, “야, 속았어, 속았다고. 신학에 속았어.” 신앙고백에 속았고, 교회에 속았고, 목사한테 속았고, 전통에 속았고, 역사에 속은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인간이라는 일치된 통일체가 없어요. 처음부터 인간은 갈라져 있었던 겁니다. 갈라진 것을 마귀가 붙여놓은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그 가운데를 통과해버리니까 이게 쪼개진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제가 아까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이 거짓이라 했지요. 이것을 인간이 신을 찾는다고 하지 마시고 존재가 신을 찾는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설명하는데 더 편할 것 같아요. 하나의 존재가 신을 찾아가요. 어떻게 찾아가는가? 내가 여기 있듯이, 존재하듯이, 하나의 신이 있다. 그런데 그 존재는 하나의 통일체로 묶어진, 하나의 완전체로서 생각하는 나가 역시 완전한 신을 찾아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그 인간 속을 쪼갭니다. 쪼개서 인간 속에 어떤 괴물이 들어있는가를 들춰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피를 통해서 이 땅에 오지요. 피는 인간존재내부에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아, 정말 나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면, 정말 내가 너와 이야기를 한다면 너를 하나의 통일체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쪼개서 피 흘려서 피 가지고 설명하겠다. 피 차원에서 나와 너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인간은 두 쪽으로 분열돼야 돼요.
아브라함에게 제물 드릴 때 달라붙는 솔개를 쫒아버리고 제물을 두 쪽으로 마주보게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도 아닌 것이 하나인 것처럼 했는데 하나님은 그 중심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밤중에 하나님께서 횃불로 확 지나가 버립니다. 그게 우리의 시간성이에요. 그게 바로 새로 생긴 과거고, 새로 생긴 과거에 이어져서 새로 미래도 생깁니다. 어제 결혼식 주례를 했습니다. 신랑신부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어요. 신랑신부 이들이 알고 있던 것은 자기가 지나온 과거만 알고 있지요.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앞으로 새 가정을 꾸리겠다는 말은, 그 토대가 뭐냐? 지나온 과거, 두 존재가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안 맞는 것끼리 한 가정 이루겠다는 우격다짐에 지나지 않아요. 이것은 깨져야 돼요. 지나온 과거하고 전혀 다른 미래로 연결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40이고 50이고 산다면 그것은 내가 살아온, 나 중심, “내가 중심이 되고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오직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돼.”라고 고집과 고집의 연속으로 다져진 그 과거, 그것이 나에게 심지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쪼개버리는 거예요. 그 쪼갠 것이 뭐냐? 예언이고 방언이고 통역입니다.
사람 말을 해야 될 내가 사람 말이 아닌 성령의 말, 성령의 은사의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과연 인간이냐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내가 정상인인가? 남들은 나를 보고 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것은 내가 과거에 알던 사람의 이야기고 지금 내가 만나야 될 생소한 주님, 숨어 있는 주님 보시기에 이런 꼴이 과연 인간 꼴이냐, 하는 것을 주께서 마중 나와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말해주는 거예요. “네가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은 너 사람 아니야. 너 처음부터 사람 아니었어.” 네가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은 억지를 부려서 과거를 주워 모은 거지요.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강력하게 반항합니다. 반항을 유도했어요. 반항을 해야 이것이 악마 값이 되지요. 반항을 해줘야 악마가 들어 있다는 것이 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반항 없는 구원은 없어요. 반항을 해줘야 “내속에 이런 괴물이 들었습니다.”라고 팍팍 티가 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날 쪼갠다는데 가만있을 위인이 없어요. 자존심을 찢어버린다는데 가만있을 위인이 어디 있습니까? 완전히 자기 몸을 철저하게 감싸면서 “안 돼. 이것만은 안 돼. 이것 때문에 내가 인간이야.”라고 우기잖아요. “내놔, 내놔. 그냥 내놔!” “아니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아니 되옵니다.” “내놔! 내놔!” “이거 없으면 죽습니다.” “그래, 죽자.”
그거 내려놓고 죽으라는 거예요. “다시 봉합해줄게. 분열된 것을 다시 봉합해줄 테니까 네 피로 봉합되지 말고 예수 피로, 대신 죽으심으로, 대신하심으로 봉합해줄 테니까 반항하지 말고 그냥 내 놔.” 반항 안 될 수가 없지요. 왜 반항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바로 나의 가치, 나의 가치를 내가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의 나의 인간의 가치,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인정하는 것은 통역의 가치, 방언의 가치, 예언의 가치입니다. 약속의 가치,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 되는 것, 약속에 의해서 주입된, 외부에서 계속해서 약속이라는 이름을 앞장세워서 주입된 예수님의 가치가 주어져야 예수님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예수의 나라에서.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나라에서 못살아요. 그 가치가 링거주사액처럼 계속해서 들어오는 거예요. 링거 두 시간이면 다 맞는다고 했는데 맞다 보니 네 시간이나 맞았어요. 감기 걸려서 링거를 맞으려고 갔더니 두 시간 반쯤이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세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서 빨리 똑똑 떨어지게 해달라고 했어요. 과거를 단축 시켰어요. 똑, 똑, 똑, 똑, 빨리 떨어지게 했어요. 계속 떨어지게 되면 어떤 식이 되는가? 우리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변화, 성도가 되었다는 변화를 어떻게 측정하는가?
나의 가치를 쥐면 안 된다는 것, 나의 가치는 처음부터 허망한 것이었고 이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 나만의 가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점차 느끼면서, 오직 예수님께서 주님의 가치를 위해서, 자기 가치를 자랑하기 위해서 나를 지금껏 만들어왔다는 것, 그래서 주님의 가치로 전환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성도입니다. 이게 바로 만남이에요. 통역과 예언과 방언은 만남입니다. 만남을 통해서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변화를 통해서 구원의 능력이, 나의 설침과 나의 애씀에 의해서 오지 않고 오직 방언과 예언과 통역 그 안에 구원의 능력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성도도 아니면서 성도인 것처럼 하면서 살아왔던 그 행세가 어떤 행세인가? 그것은 자기실수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이것 악마입니다. 그렇게 들키지 않고 꼬깃꼬깃 숨어 있던 악마의 모습은 너의 실수에 대해서 네가 회개하고 반성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너는 통일체니까. 네 가치를 네가 무식하게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동안 네가 이만큼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걸 이렇게 하루아침에 날려 보내면 너는 무슨 보람으로, 무슨 낙으로 살래?” 윽박지릅니다. “미친 놈 되지 말고 점잖은 사람으로 살아라.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야 동구(을) 군 의원 나올 수가 있다.”
전에 성경공부 마치면 가끔 가곤했던 식당이 있습니다. 뜨물이 좀 상한 것 같다고 해서 그 때부터 안 간 식당인데 그분 블로그에 이런 것이 쓰여 있어요. 군 의원 입후보 했습니다. 지금 제가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뜨물이나 좀 제대로 알아보고 올리지 상한 뜨물 올려놓고 또 무슨 봉사를 하겠다고 하는지. 혹시 이 설교 듣고 아는 사람 있으면 또 삐질 텐데 그 삐짐이 반항입니다. “우리 아는 친척인데 왜 자존심을 건드리느냐?” 그 자존심이 어디서 생겼겠어요? 잘만 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십자가는 이미 대신했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행동도 십자가의 대신하는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대신하겠다고 설치는 그것이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사탄의 작용이에요. 악마의 노림수고 속임수에요 그게! 인간이 분열될 때에, 나라는 통일체가 깨어질 때에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주의 말씀 지킬 수가 없고, 내가 한발자국 다가서면 두발 물러서는 것처럼 주의 말씀 지키고자 하면 우리가 지킬 수 없는 말씀이 또 튀어나오고, 같은 말씀이라도 지켰다고 여겼는데 다시 보니까 그 깊이가 또 있고, 이것은 갈수록 점점 더 못 지킨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따라잡아야 될 나의 능력이 어디서 왔는가? 과거의 내가 그만큼 잘 살아왔는데 과거에 잘 살아온 그 과거의 수완과 재주와 종교능력, 기도능력, 그것 가지고 구원에 이르는 자아를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영원히 갈라서게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은 통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이 선과도 아니고 악과도 아니고 선악과지요. 두 사이가 서로 같이 있으면서도 영원히 통합이 안돼요. 그걸 따먹는 날에는 영원히 분리되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도대체 내가 어느 쪽에 붙어야 되는지, 자아가 두 개가 되어버렸어요. 어느 자아가 진짜 자아인지 본인도 헷갈려요.
괜찮은 자아를 대표해서 내세울 수가 없어요. 유아들의 심리에 대한 책을 보게 되면 유아들은 두 가지의 상반된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보호를 받으면서 한쪽은 엄마를 의존하고 한쪽은 엄마가 나를 노린다는 불안감, 그 양쪽을 다 갖고 있어요. 엄마가 나를 삼킨다는 불안감과 엄마가 아니면 낯선 사람이 나를 해칠 것이고 믿을 것은 엄마밖에 없다는 상반되고 분열된 심리, 그런 정신상태가 시작되면서 그것을 80, 90될 때까지 계속 가져가요.
그런데 이 방언과 예언과 통역은 이미 온 세상을 덮고 말았어요. 마지막 때 온 세상을 이미 덮었어요. 덮었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는 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요. 주께서 쪼개주시면 쪼개지는 데로 쪼개지세요. 어떻게 쪼개지는가? 과거에 대한 쪼개짐입니다. 내가 남에게 자랑스러워하는 그 과거, 그 과거와 그 과거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당한 희생에 더러운 발자국, 찌꺼기를 남겼다는, 그 새로이 등장한 과거, 그 둘 사이의 갈라짐입니다. 뒤돌아보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온 모든 것이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과거가 그렇다는 말은 하루 지나면 또 과거가 늘어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도 죄 아닌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전 세계적으로 온천지가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타살시키는 방향으로, 그런 성질로 들끓고 있는 마귀의 세계이고, 그 속에 있는 나도 동일하게 스펀지처럼 그 세계에 빠져들어서 ‘나만 살면 되지. 나만 행복하면 되지. 그게 나의 통일체야. 그게 나의 나다움이야.’ 이렇게 자신이 정서적으로 안정되려고 시도하는 것, 나의 행복,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을 우리로서는 방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가만두지 않고 예언과 통역과 방언으로 오지요. “목사님, 지금 어느 시대인데 그런 게 옵니까?” 그냥 말씀으로 오는 거예요. 보이스가 문자로 된 이 성경말씀이 살아서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오게 되면 뭐가 오는데? 오게 되면 그 바탕이 뭐냐? 통합된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이미 봤지만 13장에 분명히 예언과 통역과 방언의 은사는 어디에 함몰되는가? 사랑의 은사에 함몰되어 있어요. 그 말은 사랑이라는 가치 속에 우리가 이미 놓여 있다는 말이지요. 뭘 하기 위해서?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나 밖에 모르고, 사탄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이 사랑에 함몰되어 있어요.
사랑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나의 가치라 하는 것, 이것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그게 없어져도 괜찮다는 이야기에요. 그 사랑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담게 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아까 설교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했어요. 몸이 아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요. 사도바울이 소원이 있었는데 이 몸, 이 몸을 후딱 벗어버리는 거예요. 현재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와 현재 내가 입고 있는 이 몸하고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맞지가 않아요.
맞지 않는 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도 가시가 있어서 빼달라고 세 번씩 기도해도 안 빼줬어요. 이 몸은 우리 통일체와 결부된 몸이기 때문에 이 몸이 뭐와 같은가? 기계와 같아요. 그냥 습관대로 하고 버릇대로 해요. 어떤 분이 질문했잖아요. “사도신경이 옳습니까? 왜 반복합니까?” 그게 뭐냐? 우리는 내 몸을 객관화시키고 그 객관화된 몸이 잘되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기도도 반복하고, 성경도 천 독 만 독하고, 기계적으로 교회 나오고, 뭐든지 기계적으로 하게 되면 내 몸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몸이 사탄에 의해서 망가진 몸인데 이 몸에 부합되는 우리의 영혼이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전부 다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따라서 주께서 변화를 주십니다. 나의 가치가 아니고 나의 몸의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예수님의 몸의 가치가 있으면, 그 가치가 씨앗으로 심겼고 그 싹이 피어나고 자란다는 말은, 그 스타일에 맞는 새로운 신상, 새로운 옷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 구닥다리 있잖아요, 나 잘난 체 하는 그 옷을 그만 후딱 벗어버리자.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난 토요일인가, 숙모님이 오랜만에 오셨는데 제일 먼저 하는 소리가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는 거예요. 빠졌습니다. 아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머리카락 안 빠졌거든요. 주님의 영광은 해같이 빛나고 있으니까 머리카락이 빠질 리가 있습니까? 모세와 엘리야도 마찬가지고요. 다 선배들이 미리 간 거예요. 앞선 증인들이 벌써 가 있습니다. 우리는 뒤차 타고 헤엄쳐서 간다고 힘들어하는데,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거예요.
벗어버리는데 지금 벗어버리면 안 됩니까? 지금은 이 몸이 있어줘야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그 악마의 장난, 악마의 집착, 집요한 악마의 노림수가 얼마나 우리 마음속에 섞여 있는가를 이 몸이 있어줘야 발각이 되고 들통 나게 되어 있어요. ‘아, 몸이 아픈데 기도 좀 해서 나아볼까?’ 이게 바로 악마의 모습입니다. ‘내가 전에 교회 안다녔는데 이제 교회 나와서 기도 많이 해서 원상회복 시켜볼까?’ 이게 전부 다 악마 짓입니다. “과거에 네가 이만큼 애썼는데 지금 와서 그 과거 포기하면 아깝잖아.”
그러나 주님이 깔아놓은 그 과거레일은요, 이미 주님께서 가 계신데서 거꾸로 유턴해서 마중 나오는 식으로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왔을 때 그 과거는 어떤 과거인가? 우리가 우리 육신의 욕심에 의해서 해온 호작질들, 주님 살해하고, 주님 미워하고, 주님 싫어했던 그 발자국이 좍 깔려 있는 그런 과거와 미래가 우리의 과거요, 우리의 미래가 될 겁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성령이 이 말씀을 주시는데 이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이미 통합된 사랑, 그리스도와 하나 된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찌꺼기를 객관적으로, 표면위로 올라오게 하는 현상, 그런 변화의 현상이 일어나시거든 성도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약속대로 예수님 보내시고, 말씀 보내시고, 약속 보내주셨으니 이제는 그 말씀이 우리 속까지 파고 들어왔습니다.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가 혹독하게 느끼면서 때로는 반항하고, 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자기인생을 저주하고, 자기과거를 탓했습니다. 그게 마귀의 장난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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