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강-고전 14장 20-25(생소한 계시)1603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20-25절입니다. 신약성경 280페이지입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본문을 길게 읽었는데 단번에 그 뜻이 확 들어오기가 힘들어 보이지요.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방언과 예언을 구분 짓자는 이야기입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방언하는 것이고, 예언은 믿는 자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예언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방언으로 시작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예언으로 이어져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방언을 가지고 작업 걸어서 거기서 믿는 자 생산하고, 그 믿는 자에게는 방언이라 할지라도 예언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
그러면 예언은 무엇인가? 21절에 보면, “율법에 기록된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바’라고 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예상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된 말씀에 의해서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한대로 모든 것이 평정되는 식으로 이 세상은 나타나는 거예요.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이 그대로 현실화된 것이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언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말고 다른 분이 지켜서 그렇게 된 그 결과물들이 오늘날 우리를 포함해서 우리가 속해있는 전 세상의 모든 되어가는 일이다, 그것에 대한 사후작용, 이미 일이 끝나고 난 뒤에 그것을 확인해보니 “주께서 말씀대로 하셔서 그대로 되더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이미 되어진 것이 우리 손이 아니고 다른 분에 의해서 결정 난 사항을 우리가 그냥 수용할 뿐인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로부터,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 것으로 삼습니까?”라고 출발하는 사람은 어디에 다 걸리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되어 진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아요. 구원론을 유발시킵니다.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날 무시하나? 날 모욕해? 내가 알아서 내 인생 잘 꾸리는데, 내 인생이 나로 인해서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는 말인가?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가는 그 시작점과 원인이 나 말고 따로 있다는 말인가?’
따로 있지요. 그 따로 계신 분이 뭐냐? 율법과 말씀이 지칭하시는 분이지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방언과 예언을 구분하는 이유는, 좀 어렵게 설명하면, 두 개의 시간 노선이 겹쳐져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두 개의 시간 층이 겹쳐져 있어요. 한쪽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시작해야 무슨 일이 된다는 것, 이게 행함입니다. 인간이, 내가 뭔가 시작해야 일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위층에는 뭐냐? 우리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생겨버렸다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주님에 의해서 생겨버린 거예요. 이미 일어나야하기에 일어난 겁니다.
모든 것이 평정된 상태에서 뽀글뽀글, 마치 화산에서 유황이 올라오듯이 그렇게 올라오면서 한 80쯤 살다가 죽어버리고 또 뽀글뽀글 올라오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되어버린 거예요. 내가 손대지 않더라도 그래야만 한 거예요. 내가 노력하지 않더라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내 딸이 예수를 안 믿고 지옥 간다?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내가 좀 더 노력을 하고 복음을 전했으면…….’ 그러지 마세요. 복음을 전하는 것, 그 사람이 복음을 듣는 것, 이 모든 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결과물이 아니고 다른 분에 의해서 그래야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만 해야 되는 것에 우리가 예속되고 복속되는 겁니다. 결과로 주어지는 겁니다. 어떤 분은 말해요. “어릴 때부터 연극한다고 고생 참 많이 했어요. 식전부터 남대문시장에서 커피배달 해가면서 이만큼 나를 키워왔습니다. 이제는 그래도 유명배우가 되었지만 초심을 가지고 그 때의 고생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되게 착해 보이지만 이게 단선이에요, 단선. 계단에 앉아서 아들 껴안고 “아버지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너도……” 이렇게 죽 이야기하고 있어요. 고생 되게 많이 했다? 그 고생 혼자만 합니까? 다른 사람은 고생 안 해요? 저도 지금 감기 걸려서 고생하고 있는데요.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우리 교회 처음 시작할 때 몇 명 되지도 않았어요.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힘들더니 오늘날 이만큼 되었습니다.” 그게 단선입니다, 단선. 그렇게 해버리면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점이 돼요. 이것은 이만큼 된 것이 다 내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이야기하고 말씀대로 이야기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식해서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겠다. 오늘도 지금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겠다고 차에 앉아계신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겠대요.
출발점을 나로 시작하니까, 내가 이만큼 되었으니까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안 믿는 사람뿐만 아니고 믿는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오늘을 세상에서는 부활절로 지킨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한테 하는 제사를 왜 드리는지 모르겠어요. 살아있는 분의 제사를 왜 합니까? 부활절을 지킨다고 하는데, 부활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기 위해서 부활이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었다는 말은 흔히 말하는 이 세상이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세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만 혼자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여기 사는 모든 인간이 실은 죽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 중에 포함되어서 죽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것이 그냥 예수님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죽었다는 의미가 제대로 밝혀졌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이걸 예수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전체에 퍼트려버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전체는 하나님께 버림받았기에 죽은 세상이다.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세상에서, 초심을 잊지 않는다, 남대문 시장에서 커피 배달하면서 고생했다, 고생을 하든, 재벌이 되든지, 뭘 하고 뭐가 되든지, 그것은 여전히 버림받은 거예요.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다 버림받은 자들의 이야기에요. 그저 <태양의 후예>만 좋아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후예’도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모든 인간이 버림받은 자입니다,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전부 다!
예수님이 버림받음으로 모든 인간이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자 입장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버림받은 티를 내는 겁니다. “주님이여, 저를 구원하소서.” 그게 바로 버림받은 거예요. 그게 버림받은 자가 하는 소리에요. “예수님 덕분에 구원되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버림받은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가 찾을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부르짖을 대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겹쳐진 시간관에서 생소하게 방언이 일어나고, 그리고 통역을 통해서 예언으로 이어지고 마감이 된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미처 예상도 못한 숨겨진 세상으로의 이동, 이 우발적인 사건, 사태를 통해서 우리를 이동시키기 위해서 방언과 예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방언과 예언이 오기 전에는 어떤 세상이 숨겨졌다는 것을 우리가 몰라요.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이야기하고 뭘 이야기를 해도 단선밖에 없는, 우리가 아는 인생이라는 이 하나의 선밖에 없을 때에 거기서 예수가 어떻고, 삼위일체가 어떻고, 부활이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이 ‘나’라는 것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채로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고생하는 인간을 예수 덕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덕분으로, 십자가덕분으로, 부활덕분으로 그 선을 그대로 저 숨겨진 세상까지 이어보려는 그 시도, 그걸 가동시키는, 그 시도를 시작하는 그 시작점이 나로부터 시작되기에 이게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여기 있는 내가 다른 숨겨져 있는 예수님의 세계로 가고자 할 때 이것은 뭘 누락시키고 빼버리게 되는가? 내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다른 사람은 버림받아도 나는 버림받지 않은 존재가 맞지요?”라고 말도 안 되는 이 우김, 이 건방짐, 이런 것들이 탁탁 티를 내는 겁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집사가 설교를 해요. 구약의 이야기를 죽 하면서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가 그냥 일반적인 설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설교를 끝내자마자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의 설교를 그냥 보통 설교라고 보지 마시고 스데반집사의 설교에서 어떤 요소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할 만한 내용이 품어져 있는가, 그걸 찾아내야 스데반집사의 설교내용을 제대로 해석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설교 끝나고 난 뒤에 돌에 맞아죽었으니까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30-32절에,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이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모세가 단선으로 살았어요. 옛날에 애굽에서 고생을 했고……, 이렇게 단선으로 있던 모세의 인생인데 갑자기 겹쳐져 있고 포개져 있고 숨겨져 있는 다른 시간 층으로부터 말 건넴으로 당해요. “모세야! 모세야!”라고 찾아오는 겁니다.
생소한 계시가 찾아온 거예요. 모세가 생소한 계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적으로 핍박받고 손해 본 그 인생을 회복하려고, 보상받으려고 또 설치게 될 거예요. 안 그러면 스스로 포기하든지. ‘내가 나선다고 누가 알아주나? 내가 왜 나서?’ 이럴 수도 있고, 일본말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요시! 내가 옛날에는 실패했지만 기어이 성공하고야 말리라.” 이런 식으로 나설 수도 있어요. 모세가 단선이니까. 쉽게 말해 모세는 유승민입니다. “너희들이 날 쫓아내? 보란 듯이 내가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표 얻어서 보란 듯이 내가 복당할게.” 이게 백날 이야기해도 단선이거든요. 단선이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듣습니다. 특히 대구시 동구(을) 투표구 사람들은 다 알아먹어요. “찍어줄게. 새누리당, 특히 이한구에게 복수해라.” 제가 지금 선거 운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구(을) 주민들은 벼르고 있어요.
그런데 백날 해봐야 그게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물이에요. 유승민에게 일어나는 일은 전혀 생소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전에는 국회의원 비슷하게 했어요. “내 인생 조져놨지만 그래, 애굽 잘되는가 한 번 보자.” 하지만 모세에게 생소한 계시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예상도 못한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옛날 한물간 조상의 하나님이 등장할 줄이야, 생각도 못한 겁니다.
이 생소함을 섞어서 설교할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스데반집사에게 돌을 던져 죽여 버렸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스데반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만 받았습니까? 돌 세례까지 받았어요. 돌에 맞아 피투성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죽었을 때 위에서 주님이 서서 반기지요. “어서 오너라. 버림받은 세상에서 네가 그렇게 된 것은 성령 충만 때문이다.” 성령 충만 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그런 설교 하는 것이 네 노력이나 네 실력이 아니고 그것 자체도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는 마지막에 이야기하지요.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래층밖에 모르기 때문에, 단선밖에 모르기 때문에, 복선으로 되어 있는 그 세계에서 모든 것을 이미 오랫동안 조정해 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하지만 그들은 단선과 복선사이에 있는 그 차이를 넘어설 수가 없어요. 넘어서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 삼위일체, 부활, 성령, 십자가, 복음, 그런 것을 뇌까리고 반복하는 그 자체가 버림받은 자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그 예수가 예수 믿고 지옥 갈 예수라는 그 말입니다. 한국교회전체가, 기독교 2천 년사 전체가 다 그래요.
그 차이를 몰라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고자, 자기 동질성의 연장 작업에 의해서, 나 여기 있는데 예수가 도와주게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 자기 동질성을 지탱하면서, 나를 유지하면서, 끝까지 나를 질질 끌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가고자 하는 그것은 행함이지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생소한 계시가 아닙니다. 욕망, 구원에 대한 욕망이고 자기에 대한 집착입니다. 버림받았다는 의식이 없어요. 그게 누락되었어요. 그동안 예수 믿은 거 다 헛 믿은 거예요. 차이를 말해야지요, 차이를.
어떤 차이? ‘내가 예수 믿는 것은 결코 내 뜻이 아니다. 내 뜻일 수가 없어. 어떻게 버림받은 자가 구원을 받아? 이것은 말이 안 돼. 버리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날 건져?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이것은 나의 버림받음은 버림받음대로 살리고, 그 취지를 충분히 살리고 나를 통해서 다른 요소를 집어넣어서 버림받아야 될 너를 네 입장에서 네 소원대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나에게 삽입되어서 그 삽입된 것, 주께서는 버리시고 건지는 방향으로 할 때 우리가 거기에 딸려가서, 그 버리시고 건지는 그 작업에 그냥 묻어가니까, 붕어빵 앙꼬 가는데 밀가루가 딸려가듯이 그냥 딸려가는 입장, 앙꼬는 예수님인데, 죽었다가 살아난, 버림받았다가 부활하신 분이 우리의 중심에 있으니까 우리는 그 포장지로서 딸려가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제 정리합시다. 우리가 이거 정리해야 돼요. 아직도 주의 뜻이 있어서 눈 뜨고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이상 이걸 정리하고 살아가야지요. 아직도 내가 살려고 예수 믿고, 그런 짓 자체가 지옥가려고 환장한 짓거리에요. 그런 것 그만해야 돼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내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 달라져요. 이제는 ‘나’라는 내 명예, 내 이름, 내 자존심, 내 영화, 내 잘남, 그것 빛내기 위해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진짜 성령께서는 이제는 나하고는 관계 끊어버리고 예수 이름으로 나를 건지는 거예요. 예수 이름이 거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구원하지 않습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데 뭘 구원해요? 오직 예수님만 구원하다 보니 지체로 딸려서, 예수 이름으로 바뀐 사람이 딸려서 같이 합세해서 양자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고, 이게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 단선과 복선사이에 끼어있는 그 차이에 대해서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숨겨진 세상을 모르고 현재 단선밖에 없는 인생을 가지고 길게 늘어뜨려 버리면 거기서는 차이가 날아가 버려요.
“이제 예수십자가는 그만 이야기하자. 지겹지도 않나? 이제는 부활이야기를 해야지.” 그래서 부활절을 만들어놨잖아요. 십자가 흉내 낸다고, 부활절되기 전에 고난 받는다고 하는데 고난을 받는 것인지 다이어트를 하는 것인지 분간도 안 돼요. 6.25때 먹을 것이 없어서 수제비를 먹었는데 우리도 수제비 먹고 남은 쌀은 가난한 사람에게 줍시다, 해서 한 주간 고난주일로 지켜놓고 일 년치 고난 다 해치웠어요. 그리고 수제비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칠성시장 가보세요. 큰 대접에 수제비 얼마나 맛있게 끓여주는데요.
그게 행함입니다. 꼼수를 쓰는 거예요, 꼼수를. 나로부터 시작해서 시작점을 나에게 두는 거예요. 이 사실을 모르니까, 그 차이를 봐야 되는데, 나로부터 출발하니 그 사실을 모르니까, 십자가복음에 뭘 보완해야 한다는 둥, 그런 친절을 베푼다고 참……. 그 차이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인간에게는 차이라는 것이 없어요. 내가 사는 세상 내가 알아서 하면 그만이지 그 차이를 갖다 붙일 수 있는 어떤 계기라는 것도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게 되면, 숨겨진 나라에서 비로소 그 차이를 집어넣어요. 원래 단선 같은 우리 인생에서는 차이가 없어요. 차이가 없다는 것은 뭐냐? 모든 것은 내가 원인이 되어서 생긴 결과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단절이 있겠어요. 그러나 성경말씀은 숨겨진 세상이기 때문에 숨겨진 세상이 있다는 것은 나타날 때 아는 것이지 그냥 숨겨져 있을 때는 몰라요. 숨겨져 있는 일에 하나님께 작용을 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에게 올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차이를 가지고 와서 그 차이를 통해서 분리를 시키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사기 12장 5,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대 나로 건너게 하라 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
사사기 12장에 얼토당토않게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런 이야기가 왜 기록이 되어 있느냐는 겁니다. 이 기록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 관계성을 지어봐야 돼요. 이것은 강자에 의해서 발생된 차이입니다. 힘 있는 쪽에서, 숨겨진 세계에서 그냥 나타난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는 그 세계에 난입했어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침투하는 거예요. 난입하고, 침투하고 침노해서 차이를 발생시켜놓고 그 차이에 의해서 죽을 자와 살 자를 구분하는 작업이 사사기 12장에 하나의 예로 나왔습니다.
입다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이 깡패입니다. 깡패의 기질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깡패가 길르앗 사람들을 규합해서 암몬자손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사람들이 말하기를 “왜 우리는 전쟁할 때 안 데리고 갔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입다가 “이놈들 봐라?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은 모르고 자기 행함을 집어넣으려고 해? 이참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자기 죄로 인하여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는 것도 모르고, 아직도 전쟁의 의미를 모르고, ‘나도 잘났는데 이 잘난 나를 왜 안 데려가?’ 하니까 이걸 손 좀 봐야겠다.” 해서 입다가 시켜서 에브라임 사람과 길르앗 사람을 구분 지으려고 한 거예요.
에브라임사람들과 길르앗사람들은 지역이 달라요. 요단강에서 동쪽이 길르앗이고 서쪽이 에브라임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사람과 길르앗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나루턱에 길목을 잡아서 시험을 합니다. 길르앗 사람들에게 “십볼렛!”이라고 따라하게 하면 “십볼렛!”이 되는데 에브라임사람은 ‘십볼렛’이라는 발음을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고, 이게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씹볼렛!” 하더라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말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거예요. 입다가 등장하기 전에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든 ‘씹볼렛’이라고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아무 상관이 없는데 빌미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에브라임사람인지 아니면 길르앗사람인지 분리를 시키고 구분 짓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입다가 개입하는데 입다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한 자라는 입장에서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의 입장에 서 있는 자리에서 강제적으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차이에 대해서 죽은 4만 2천의 에브라임사람은 평소에 별로 중요치 않는 차이라고 자부한 거예요. 십볼렛이나 씹볼렛이나, 살이나 쌀이나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냥 먹으면 되는 거지요. 이게 차이가 없는 거예요. ‘살’도 쌀이고 ‘쌀’도 쌀이고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데 숨겨진 하나님의 생소한 계시가 주어져버리면 그게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않을 자를 구분하는 차이를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그 말이지요.
그게 하나님께서 개입하는 모습입니다.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하루 밥 세끼 먹고 잠 잘 자면 되잖아요. 교회 가나 안가나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냥 남에게 해코지 안하고 자기 일 알아서 잘하면 늘 우리는 행복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안 듣고 사람다운 인생 살잖아요. 아무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왜 십자가 이야기를 하느냐 그 말입니다, 십자가이야기를. 그것은 말씀에 의거해서, 창세전에 예정된 말씀에 의거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된 차이를 두신 거예요. 십자가 모르고 예수님 모르면 지옥 간다는 그것이 창세전부터 이미 정해진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까짓 거 예수 믿으라면 예수 믿으면 되고 하나님 믿으라면 하나님 믿으면 되지 그게 무슨 문제인가?’ 차이를 이야기하라니까, 차이를! 예수를 받아들이면 소유가 되지 차이가 아니잖아요. 하나님 받아들이면 그냥 믿는 것이 되지 차이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어떤 차이? ‘아, 처음부터 나는 버림받은 자였구나.’라는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차이, ‘나는 구제불능이고 구원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그 차이, 그 차이는 뭐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애초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인 것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끝까지 다 가보고 오신 거예요. 그걸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 바라본다는 말을 응시한다고 해요. “너 왜 꼴아보는데?” 그게 응시에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응시의 순간이 있었고 그 응시 다음에는 이해를 해요. “세상 참 더럽구나.”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때 천사가 와서 응시하고 평가를 내리지요. “심판을 내려야 되겠구나.” 그 다음에 결론의 순간이 와요. 응시하고, ‘아, 이렇구나.’ 이해하고 마지막에 결론 내려서 ‘세상은 버림받아 마땅하다.’ 하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의 생소한 계시, 복선에서 위층, 아래층 말고 위, 위, 아래, 위위, 아래, 아래층 말고 위, 위층에서 이미 결론부분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와버리면 순서가, 응시하고, 이해하고, 결론내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결론이 난 상태에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 차이로 모든 것이 결정됨, 이라는 입장에서 그 다음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게끔 하십니다. 그 이해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응시하면서 살도록 죽을 때까지 보냅니다.
순서가 거꾸로 에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 아닙니다. 부활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십자가지신 거예요. 이걸 아셔야 돼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이야기해요. 먼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어디까지에서 스톱이 되었느냐 하면, 죽어야 한다는 것, 나는 너희 곁을 떠나서 사라져야 한다는 거기에 베드로가 꽂혔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가 여기 있는데, 보디가드가 여기 있는데 주님이 고난 받고 죽을 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와 함께 있으니까 주님이라는 차이가 구태여 필요치 않습니다.”라고 베드로가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23절에, 주께서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다른 말로 하면, “베드로야, 네가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이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단선적인 것, 자기 동질화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오해하기를, “지금 내가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 있는 나나, 주께서 함께 고난 받는 나나, 죽고 난 뒤에 부활한 나나 동일한 나가 여기 붙어 있잖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동질성, 동일화 작업입니다. 그렇게 되면 버림받았다는 요소가 빠져버려요. “베드로야! 너는 버림받은 자야.”라는 것을 베드로는 지금 수긍 안하고 있습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하니까, “우리와 함께 있음에 주님에게는 그런 해가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뭐냐? 원인결과를 나로부터 출발하는 이것, 이게 바로 행함이에요. 이게 바로 행함입니다.
“우리가 지켜주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회 나와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동질성, 현재 있는 내가 천국 가는 나와 동일한 존재라는 겁니다. 몸이 아프다. 주께서 기도해주셔서 병이 나았습니다. 그게 차이점이에요? 그건 차이점이 아니에요. 몸이 아플 때, ‘아하, 내가 몸이 아파야 되는구나. 내가 몸이 아파서 당장 죽어야 되는구나.’ 이걸 발견해야 돼요. 왜? 아픈 것을 통해서 십자가와 연결시켜야 돼요. 내가 가는 것은 현재로부터 미래로 가지만 주님이 찾아온 것은 미래의 결론을 미리 알고, 결론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그 다음부터는 과거로부터 출발한 나와 결론부터 아시는 주님과 바꿔치기를 해서 그래서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저 “애 잘 키우고, 남 해코지 안하고, 참 행복합니다.” 하는데 그 소리 들을 때 가슴이 찢어집니다. 왜? 그 행복이 어디서 왔는데요? 행복이 어디서 왔는가? “내가 하나님 잘 믿어서요.” 그게 바로 행함이거든요. 자기 잘 믿는 것을 원인으로 해서 행복이 주어졌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원인은 없어요. 원인을 몰라요, 우리는. “그런데 예수도 안 믿고 교회도 안 나오는데 왜 그리 행복합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미래에서 온 미끼지요. 지옥 보내기 위해서 미끼를 던진 거예요. 행복하십니까? 아프지 말자, 아프지 말자, 행복하자, 행복하십니까?
그 행복은 소주병속에 있는 농약 같은 거예요. 마시고 행복에 겨워 죽어라. 그게 바로 네가 버림받아 마땅함에 대한 주님의 일관된 조치입니다. 행복이라는 독약을 마시고 우리는 버림받고 있습니다. 지금 버림받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면 행복을 거부하자는 거예요, 말자는 거예요? 도대체 이 행복이 있을 수 없는 행복인줄 왜 모르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에 행복할 필요도 없는데 행복한 거예요. 모든 행복과 모든 좋은 것은 이미 포괄적으로 평정되듯이 주님께서 결론 내린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하늘의 별, 그리고 달……, 지난 금요일에 광주에서 누가 운전해 주셔서 대구까지 차를 타고 오는데 달이 보이는 거예요. 새로 단장된 고속도로 달려오는데 앞에 달이 크게 보여요. 평균 240킬로에서 250킬로 달렸어요. 제가 속도계를 슬쩍 봤거든요.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만끽했는데 앞에 달이 보였어요. 제가 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광주에서 대구로 달리듯이 어디론가 우리가 가고 있다. 가고 있는 중에 달이 떠 있거든요.
자, 우리는 달리고 있으니 우리가 그 달리고 있음을 느끼지요. 내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러면 달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달은 왜 안 떨어지지요? 달이 왜 안 떨어지는가? 이 생각은 아이작 뉴턴만이 했어요. 그 전에는 이걸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달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만유인력 때문이라는 것, 그것 때문에 뉴턴이 과학자가 된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그냥 달이 떠 있다고만 생각하지 왜 안 떨어지는가, 그 생각은 잘 안하지요.
이제는 우리차례입니다. ‘우리가 광주에 있으나 대구에 있으나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살지?’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예수님 증거 하라고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차가 납작해서 딱 바닥에 붙어서 달리니까 240, 250 막 놓고 달려도 잘 가는데 만약에 차가 높아보세요. 그 속도로 달리면 차 넘어가 버립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납작하게 엎드려야 되지요. 그 이야기 했잖아요. 엎드려야 맞바람을 안 받지 잘난 체하면서 ‘내가 행해서 내 행함으로 산다.’ 이러면 태풍 다 맞고 다 엎어집니다.
그러면 그 맞바람은 뭐냐? 십자가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납작 엎드려서 살았어요. “내가 행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산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고 말씀의 완성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 이름으로 나타날 때 그게 방언이고 예언입니다. 그게 차이점이에요. 우리는 단선으로 살기 때문에 다른 세계라는 것이 없어요. 없는데 성령의 은사로 방언과 예언이 와버리면 ‘아하, 우리는 그 건널 수 없는 세계를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이미 그 차이를 받은 입장에서 우리는 건널 수 없었는데 그 차이를 주께서 홀로 건너가서 거기에 도달했다.’ 그 차이가 우리 속에 있을 때 우리가 그 차이를 고백할 때 그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마을에 보면 어떤 분이 저에 대해서 글을 썼어요. 제가 30년 넘게 글을 썼지만 이렇게 상세하게,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득력 있게 저에 대해서 쓴 글은 그 전도사님이 처음이에요.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차이를 말하지 않아요. 그분이 질문한 것은 아니지만 그 글을 제가 따왔으니까 제 글을 덧붙였어요.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혼자만이 이 세상에서 숨겨진 저 세상으로 가시는데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그 성공을, 그 차이에 대한 성공을 우리는 증거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십자가입니다. 성령이 십자가 증거 하라고 오신 거예요. 우리가 십자가를 말하면 안돼요. 십자가가 우리를 통해서, 십자가가 우리를 가지고 십자가를 말하게 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무슨 일이 터져야 되는가? 일이 터질 필요 없어요. 어떻게? 달을 보면서도 달과 우리를 하나로 봐서 ‘달이 떠 있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이듯이 내가 이렇게 광주에서 대구로 달리는 것도 주의 은혜다.’ 그게 바로 천국으로 분류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지요. ‘내가 차 좋은 것 사서 내가 운전 잘한다. 그래서 요리조리 잘 피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모든 원인을 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묻습니다. 죽기는 왜 죽습니까? 늙어죽기는 왜 죽는데? 그렇게 살고 싶으면서도 죽는 이유가 뭔데? 몰라요. 태어나기는 왜 태어났는데? 왜 딸이 아니고 아들로 태어난 겁니까? 그것도 몰라요. 달은 왜 떠 있는데? 몰라요. 별은 왜 떠 있는데? 몰라요. 쓸데없이 별이 왜 떠 있는지, 아무 쓸데도 없는 것이.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관한 겁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자체가 버림받은 마음이라는 것을 단정 지으시고 주님의 성령의 은사로 왔던 방언과 통역을 통해서 숨겨진 것을 노출시키고 다 파서 뒤엎는 거예요. 누가복음 2장 35절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아기예수를 안고 아기예수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아기 백일 되었다고 안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이 아니면 안 됩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아기예수를 보고 ‘칼’이라고 합니다, 칼. 이 아기예수가 커서 사람들의 마음을 전부 다 해부하고, 도려내고, 회치듯이 해서 이런 악마가, 괴물이 네 속에 들어 있다는 것, 그저 행함, 그저 행함,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그 행함, 나만 예수 믿고 천당 가면 되지, 이런 모든 버림받아야 할 짓거리를, 자기 동질성을 다 끄집어내는 작업을 아기예수가 한다는 겁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 참 대단해요. 아기 백일에 예쁘다고 “어쭈쭈쭈~!” 그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고, “어이구, 요거! 나중에 커서 경찰대학 가거라.” 이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고, “어이구, 예쁘기도 해라.” 하고 사진 찍고, 그런 것이 아니라 “너는 크면 뾰족한 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 키가 1미터 80쯤 되고 도포 입고……, 그런 식으로 보지 말고, 인물적인 그런 것은 치워버리고 아예 칼, 야쿠자들이 쓰는 회칼이 있잖아요, 칼로 받아들입시다. 칼이 날마다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나와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고 그 이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을 똑바로 응시해야 될 책무를 갖고 있다는 것. 응시하면서 ‘아, 내가 지금 지옥에 살고 있구나. 버림받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그것을 증거 하고자 우리에게 완성된 언어적 계시, 다시 말해서 통역을 통한 예언을, 우리를 예언덩어리로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말고 십자가가 나와 이 세상을 응시하는 방식을 통해서 나로 인하여, 이미 구원되었음을, 버림받아 마땅한데, 이것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구원되었음을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고 또 속고, 사기 당하고, 다 그것이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 잘되려고 하나님 믿고, 나 잘되려고 예수 믿는 것, 나 행복하고자 교회 찾아 나온 것, 그것이 바로 원인제공이었고 그 자체가 버림받은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인 것을, 버림받을 짓인 것을 이제는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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