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84강-통역의 내용(고전14;4-9)16031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3. 14. 07:18
2016-03-13 12:43:19조회 : 61         
   통역의 내용160313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통역의 내용(고린도전서 14:4-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jWK0JKsTC0o, Hit:2

 이근호 16-03-13 13:29 
통역의 내용

2016년 3월 13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4:4-9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14: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초대교회에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잠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지상으로 전달되는 방식이 구약에서는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식으로 주어졌습니다. 홍해나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이나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것을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타나면서 그러한 방식은 새로운 방식과 과도기적으로 병행되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다든지, 귀신이나 병자를 고치는 방식으로 나타나면서 동시에 설교 말씀을 통해서는 나타내십니다. 이러한 예가 바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쭉 담겨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보고 명령에서 바다에 빠지라는 일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산에게 명령해도 바다에 빠지지 않는다면 이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설사 바다에 산을 옮기는 능력을 행해도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3)

이 말씀은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상황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마음을 나중에 배치해두는 방식입니다. 즉 천국다움이 우선이지 인간의 행복이나 영생이나 구원이 우선이 아니다 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말씀들은 통해서 예수님과 그 외의 인간들의 분리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십니다.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5에 보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사랑은 분리작업으로 실시된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유익하고자 하는 경향은, 예수님께서 왜 인간 세계 속에서 죽어야만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내뱉는 경향성이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어떤 이가,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의 죄 때문이다’고 아는 자라면, 그 기준에 준해서 자기 자신을 죄가 발산하는 원천지로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늘에서 땅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 속에 인간 세상이 모르는내용이 담겨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그 죽으심의 이유는, 인간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는 견해에 있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미 자신이 뭘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나’라는 것은 나중에 생긴 겁니다.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가 인간보다 의미적으로 먼저 있는 겁니다. 선악과 열매를 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 열매를 못 따먹게 하시는 것은, 인간 위주로 두 나무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두 나무의 의의를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온통 인간 유익 위주로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인간을 통해서 하늘쪽에서 준비해둔, 저주와 심판과 죽음이 어떤 점을 보고서 주어지는지 그 실재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에서 인간은 들러리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이해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며는 추가되는 체험과 정보를 통해서 기존의 자기중심의 현실상이 자꾸만 확장되어 번창하게 됩니다. ‘자기 증식’이지요. 이 ‘자기 증식’으로 인해 ‘현실재조정’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현실재조정’으로 인하야 ‘주체재조정’으로 이어집니다.

현실을 보는 인식에 변화가 생겨난다고 해서 그 가운데 들어있는 나를 부인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단단해지게 됩니다. 이 ‘자기 것’으로 인하여 인간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진면목을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 현실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 죄인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예수님마저 죄인으로’ 규정될 수 밖에 없는 세상으로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보신다는 말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악마는 자신들을 위해서 신이 존재해야 되는 것처럼 오인하며 버티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나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받는 자들마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성령님은 스스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신체의 반복을 위하여 오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신체는 죄인으로 오신 신체며, 이 신체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질이 밝혀집니다. 이 밝혀지는 내용을 품고서는 성령께서는 특별히 지정해놓으신 자들에게 은사로, 선물로 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성령에 관심이 최종 목표로 두어서는 아니되고 예수님의 죽으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즉 ‘저주받아야 될 자를 왜 건져주시느냐’이다. 이는 모든 인간은 죄와 죽음이라는 삶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님은 자기 사랑을 현실화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함’이란 곧 ‘나는 나를 챙길 자격이 아예 없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는 곧 하늘의 영역에 흡수, 통합되는 상황을 나타내어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통역의 내용입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집단입니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얼마든지 교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여전히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내가 전에 이 교회 안다닐 때는 나의 교회가 아닌데 이제는 내가 다니니 나의 교회‘라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은사의 적용 방식은 단 하나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 ‘죽음으로 함께 처벌되어야 될 대상’으로 여기는 겁니다. ‘나의 것’이 사라졌음으로가 아니라 ‘나의 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매일 죽어야 될 대상으로 여기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주의 은혜로 오늘도 살았다’라기 보다는 ‘어제로 목숨이 다해야 함에도 오늘까지 이어주시는 이유는, 기어이 우리 자신이 기대치로 인하여 여전히 살아야 마땅하다’는 이 교만과 죄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즉 주님의 은혜와 혜택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만심과 오만으로 작용하는지를 평생이 다 가도록 파악하는 식으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식으로 다른 세상사람과 분리된 특이성을 드러내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우리를 사용해서 세상의 말씀의 내용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3-14 06:24 
181강-고전 14장 4-9(통역의 내용)1603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4-9절입니다. 신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그 때 그 당시 교회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 당시 교회, 이걸 초대교회라고 하는데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데요. 그 기이한 현상들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때 그 전달하는 방식과 관련된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이한 현상들을 가지고 방언, 예언, 그리고 통역, 통역, 예언, 방언,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예언이나 방언이나 통역이나 전부 다 하나님이 언어로 준 계시의 삼종세트라고 보면 됩니다.



치즈버거, 감자튀김, 콜라, 이게 한 세트잖아요. 먹도날도의 3,300원짜리 점심특가, 한 세트로 나와 있듯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서 그 당시 초대교회는 예언과 방언과 통역이라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기이한 현상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보게 되면, 그런 것들은 다 폐하여진다고 되어 있고 그런 것들은 다 부분에 해당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이나 통역이나 예언이라는 그 은사는 멈춰야 된다는 이야기지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이제는 끝나야 된다는 겁니다. 임시방편으로 주어진 것이 통역, 예언, 방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통역과 예언과 방언이라는 것이 어디서 완료가 되느냐 하면, 그 통역과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있어요. 그 자격자를 가지고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봅시다. 초대교회에 성령을 받은 무리가 있다. 그것이 교회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세워졌느냐? 이제 알아서 해라.” 이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집중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교회에 부여하는 겁니다.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듯이 그렇게 부여하는데 그 부여하는 방식이 언어적 방식으로 주는 겁니다.



옛날 구약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 갈라지고, 그리고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뭔가 획기적인, 자연과 충돌되는 현상과 더불어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열 가지 재앙도 마찬가지인데 신약성경에 와서 교회에 계시가 주어지는 방식은 말이라는 것, 언어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거지요. 고린도전서 14장 끝나면 15장 나와요. 15장에 가면 부활이 나오는데 언제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보이는 부활에서 들리는 부활로……,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때 눈에 보이는 획기적인 기적으로 한 것은 구약이었다는 말이지요. 신약에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과도기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말씀과 병행해서 병고치고 귀신 쫒아내는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거든요. 물위를 걷고 오병이어를 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고.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자기 뜻을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 때의 방식과 마지막 신약 때 섞이는 방식이 점차 어디로 바뀌는가 하면, “아이고, 놀라워라.” 하는 방식에서 이제는 말씀만 들어도 구원이 되는 방식으로 바뀐 거예요. 간편해진 거예요. 그 과도기적인 하나의 예가 뭐냐?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기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해볼래?” 그런 거지요. “산이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데 그게 뽑혀서 동해바다에 빠지겠습니까?” “못하나?” 못하냐고 물을 것도 없지요. 당연히 못하지요. 그렇다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거예요. 제일 작은 정도의 믿음만 있어도 산이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데 그거 안 되면 내 앞에서 믿음 있다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면서 동시에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어떤 능력을 행해서 내가 믿음이 있다는 그 폼을 내보일까, 하는 그 말도 있고 동시에 병행해서, 이게 과도기니까요, 중첩되어 있으니까 그 말과 함께 병행해서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라고 했어요.



자, 그렇다면 만약에 산을 옮겨서 바다에 빠트리는 그런 능력자가 등장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어린애같이 안 되면 그 사람은 산을 옮긴다 할지라도, 그런 자이언트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천국에 못가는 겁니다. 어린애 같은 마음이 안된다면. 그래서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는데요. 육체의 할례를 행하라고 구약에서 주님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체의 할례를 행했다. 그게 남자의 포경수술이잖아요. 육체의 할례를 행하면 천국 간다. 그거 되게 쉬운 거예요.



그러면 여자는 어떻게 하는가? 여자는 육체의 할례를 행한 그 남자와 붙어살면 같이 덩달아 한 세트가 되어서 천국갈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육체의 할례를 행하는 것은 고추만 있으면 다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거 하지 뭐.’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로마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 물론 그 전에 이미 예레미야도 이야기하고 신명기도 이야기했지만 육체의 할례를 행해도 소용이 없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겁니다. 육체의 할례는 끊어내면 되지만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지요.



거기서 제가 멍게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입니다. 그 때는 초등학교라고 안했어요. 그 때 겨울에 보면 가판에서 멍게를 팔았어요. 멍게 팔 때 내장 같은 것은 칼로 잘라놓고 준다는 말이지요. 우리 마음에 뭔가 썩은 부분이 있다면 차라리 마음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이게 내 마음이다.’ 하고 내 뜻대로 처리 못하는 그 못된, 욱하는 성질을 칼로 탁, 쳤으면 좋겠어요. 그게 할례거든요. 그런데 그게 되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구약에서의 구원은 쉬운 게 아니에요. 구약도 쉬운 것이 아니지만 구약보다 더 난해한 구원의 불가능성은 오히려 신약이 말해줍니다.



산을 옮긴다 해도 구원이 안 되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마음을 처리해야 되는데 마음을 끄집어내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문제는 그거예요. 안 된다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구원이 어떻게 되는가, 그게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언과 방언과 통역이라는 언어와 관련된 은사, 쉽게 말해서 선물을 하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게 되는 겁니다. 언어와 관련해서 주게 되면 우리는 그 언어를 지키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새로 가야 돼요. 그것은 엄청난 오류입니다.



하늘에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줬다.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키면 된다. 이게 잘못입니다. 아까 예배 전에 윤 집사님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연옥이 뭡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그런 질문 같아요. 저 뒤에서 듣고 계시는데 그런 질문이 맞지요? 그게 바로 오해십니다. 그게 오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잖아요. 이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우리를 도구로 삼아서 자기의 실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의 우리는 끝났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네 것은 없다. 네 것은 없는 거예요. 애초부터 우리,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산을 옮길 정도가 되어야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고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오해를 한 것인가? “내가 뭘 믿어야 천국 갑니까?”라는 그 말자체가 바탕부터, 근원부터가 오해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있는 것은 나중에 생긴 것인데, 죽음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이며, 준비된 심판이 무엇인가를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기 위함인데 그 드러내는 말의 내용이 뭐냐? “나는 무엇을 어떻게 착하게 해서 천국 갑니까?”라는 이것이 심판받아 마땅한 이유로서 우리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죄를 안 짓겠다는 것이 바로 저주받아 합당한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그 출발점이 뭐냐? 내가 여기 있다, 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이 말을 전부터도 죽 이야기 했는데 며칠 전에 실제로 쉬운 예가 나타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알파고와 이세돌이 바둑을 두었어요. 알파는, 알파, 베타, 감마, 헬라어의 알파벳에서 알파, ‘고’(棋, go)라는 것은 바둑을 뜻하는 겁니다. 알파고와 이세돌이가 바둑을 두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오해입니다.



알파고는 바둑을 몰라요. 그것을 지적하는 기자가 없고, 그걸 지적하는 프로기사도 없고, 방송 아무리 봐도 그걸 지적하는 경우가 없어요. 알파고는 바둑을 몰라요. 바둑이라고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 앞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이 세돌이라는 서른두 살 먹은 프로기사, 이 세돌이가 그 알파고라는 컴퓨터한데 이게 바둑이라고 가르쳐주는 거예요. 알파고는 바둑을 둔 것이 아니고, 인간은 바둑을 둔다고 하는 그 부분이 알파고라는 전체와 맞닥뜨리면서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자기 품에 품어버려서 알파고의 현실은 바둑 두기 전보다 바둑 두고 난 뒤에 더 풍성해졌고 재창조되고 재설정된 겁니다. 알파고의 현실이 다시 설정되면서 재조정된 거예요.



알파고는 바둑 둔 적이 없고 계속 어떤 움직임을 보인 거지요. 그걸 바둑이라고 하는 것은 이세돌이라는 아는 모든 인간들이 ‘이 판에 돌을 두는 것을 우리는 바둑이라고 한다.’ 하는 순간에 알파고는 ‘아, 이게 바둑이구나.’ 하는 거예요. 알파고는 승부라는 것이 없습니다. 승부는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 인간에게 있어요. ‘내 인생 실패했다. 내 인생 꼴아 박았다. 내 인생 망했다.’ 그것은 알파고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나는 몸이 아프다. 지금 암에 걸렸다. 교통사고 났다.’ 이게 주님한테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주님이여, 제가 암에 걸렸습니다.”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딱 그겁니다. “네가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내가 병고쳐줄게, 그게 아니에요. 병이라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생긴 단어가 병이 되는 겁니다. 주님에게는 병 같은 것이 없는 이유가 주님에게는 인간이라는 것이 없어요. 제가 지금 창세기 2장과 3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수요설교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은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겠지요? 창세기 2장과 3장을 보면 인간을 위해서 선악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 선악과를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가 있고 또 생명나무가 있는 겁니다. 인간은 뭐냐?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를 따먹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운명을 자기 맘대로 못하고 선악과나무라는 법칙과 생명나무라는 법칙, 그 교차점에서 인간은 새롭게 등장하는 거예요. 똑같은 법칙이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가인이 제사를 받지 아니하고 그 가인에게 “네가 죄를 다스려야 된다.” 하는 새로운 법칙이 주어졌을 때 죄를 다스리라는 그 법칙, 그 숙제를 안게 됨으로서 가인은 본인이 원치 않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 등장해서 결국 동생을 죽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을 죽게 만든 유발자가 누구냐? 먼저 가인이 이길 수 없는 죄를 가인 앞에 등장시킨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그 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형이 모델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 모델의 연속이 바로 오늘날 모든 인류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법 앞에서 인간이라고 여기는 인간은 없는 거예요. 알파고에게 바둑은 없는 겁니다. 알파고는 바둑둔적도 없어요. 인간이 바둑이라는 것을 시작하니까 ‘아, 이게 바둑이구나.’ 해서 이 세돌이 둔 모든 정보를 자기 품에 안아버리면 알파고는 새로운 현실을 느끼게 되고 그 새로운 현실에서 새로운 주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알파고가누구를 모방했는가? 인간의 두뇌를 모방했잖아요. 인간의 두뇌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내가 누군지는 모르고 뭔가 움직이면서 꿈틀거리면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그 새로운 현실이 와 닿을 때 옛날과 다른 새로운 주체, 새로운 자아가 되고, 그 새로운 자아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또 뭔가 새로운 것을 얻어야 되고. 누굴 닮았는가? 인간이 알파고를 닮았고 알파고가 인간을 닮았고, 서로가 서로를 베끼고 베끼는 거예요. 인간은 괴물입니다. 어디서 멈출지를 몰라요.



문제는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기초해서 계속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는가? 저 숨겨진 하나님나라에서만 비로소 아는데 하늘나라에서 선물로 내려올 때만 그 정보를 알려줍니다. 그 선물을 두 자로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가 내려와 버리면 통역과 예언과 방언의 삼종세트, 이 삼종세트가 내려와요. 그런데 이것이 부분입니다. 고린도교회에 희한한 일이 일어났어요. 방언이 터지고 통역이 일어나고 예언이 일어났는데, 그러나 그것은 부분이에요. 마지막이 뭐냐? 그 교회에 누가 있는가? 사도가 있어서 심사를 합니다. “아, 그것은 아냐. 그것은 마귀 짓이고, 그렇게 통역을 하면 안 되고…….” 이렇게 진두지휘하고 심사하는 자가 있는데 그 심사하는 자가 사도에요.



그 사도가 다 죽습니다. 사도가 죽으면서 확립된 것이 있으니 바로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성경입니다. 이게 성경이에요. 옛날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하나님을 알던 그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성경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성급하게 또 오해할 사람들이 있어요. “이 책에 있는 말씀을 순종해서 지키면 구원받겠습니까?”라는 오해가 여러분 쪽에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일어나요.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건 오해이지 말입니다. 군대식으로 할게요. 그건 오해입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가지고 성경의 말이 왜 옳은가를 증명하는 식으로, 우리를 이 세돌로 삼아서 지금 테스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세계는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를 통해서 주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세계에 이미 편입된 거예요. 구원은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가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인데 그 앞에 반드시 뭐가 붙어요. ‘나의 구원’이 되어버려요. 나의 구원이 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나의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고요, 무슨 구원이 있느냐? 교회구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오늘 본문 4절 봅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교회의 덕, 집단이지요, 집단, 개인이 아니고 집단입니다. 뭐냐? 개인에서 벗어나서 집단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이야기에요. 명령어입니다. 개인에서 벗어나서 집단으로 옮기는데 개인에서 벗어나서 집단으로 옮길 수 있는 마음가짐이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냐, 그 말입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 개인이 교회 가게 되면, 그 교회는 내 교회가 돼버려요. 이미 지금 있는 내가 그대로 교회 가면 처음의 그 나의 행세가 어디 갑니까?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면 또 새거든요.



나 위주의 행세가 그대로 교회 가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게 국가가 되어도, 어딜 가도 인간은 자기를 포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뭐냐? “나는 이번 바둑에서 졌다.” 혹은 “이겼다.” 하든지 “내 인생 꼴아 박았다.” 혹은 “내 인생 실패했다.” 혹은 “성공했다.” 그거거든요. 졌다, 이겼다, 이것은 인간만 하는 이야기지 컴퓨터는 졌다, 이겼다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잖아요. 바둑에 진 사람은 있는데 이긴 사람이 없다고. 제가 그런 뜻으로 이야기 한 거예요.



진 사람은 있어요. 3대 빵인데 5대 빵으로 질 거예요. 해 봐야 안 됩니다. 진 사람은 있는데 이긴 사람은 없어요. 뉴욕 월스트리트, 유명한 증권가가 있거든요. 증권투자 70퍼센트를 컴퓨터가 합니다. 저 회사의 재정상태가 어떤가, 저 회사에 지금 투자하면 몇 년 후에 이익을 남길 것인가, 그 복잡한 계산과 자료 분석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컴퓨터가 해요. 알고리즘이라 하는 순차에 의해서 그렇게 하거든요. 70퍼센트의 투자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각자 다 컴퓨터를 가지고 해요. 돈 버는 컴퓨터를 들고 나가면 또 다른 사람이 그 돈 버는 컴퓨터의 정보를 제키고 내가 돈 벌어야겠다고 하면서 컴퓨터를 들고 나가서 투자를 했다가 폭삭 망한 경우가 한 둘이 아니거든요.



옛날 6, 70년대에는 비행기에 조종사가 6명이 들어갔어요. 항법사까지 해서 여섯 명이 들어갔는데 지금은 조종사 두 명이 들어갑니다. 나머지는 컴퓨터가 다 해요. 스포츠중계, 40퍼센트는 컴퓨터가 다 하고 일기예보, 컴퓨터가 하고 바둑도 물론이고, 퀴즈도 컴퓨터가 하고, 공부, 공부도 컴퓨터가 할 거예요. 혼자가 가만 생각해 봤어요. ‘이러다가 설교도 컴퓨터가 할 것이 아닌가? 성경구절을 조립해서, 여호와의 증인처럼 어떤 구절에 해당되는 구절을 죽 연결해서 컴퓨터가 할 것이고.’ 그런데 문제는 컴퓨터가 성령의 은사를 모른다는 거예요.



왜 컴퓨터는 성령의 은사를 못 받는가? 그럴 때가 분명히 옵니다. 수십 년 뒤에는 오는데 그게 왜 안 되는지를 미리 말씀드릴게요. 예언은 안하는데 이건 확실하게 예언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예수님이 대체하신 분에게만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컴퓨터로 왔다면 컴퓨터도 은혜 받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왔기 때문에 인간이 은혜 받는데 아무나 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몸으로 왔을 때 그 때부터 이미 분류작용이 시작되었어요.



어떤 작용인가? 내가 죄의 몸으로 온 이 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십자가의 효력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을 때 저 죄는 내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는 관계, 그 관계를 아는 사람에게만 혜택도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께서 누구에게 구원을 줄지 안줄지는 성령이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대속해서 졌기에 예수님의 진두지시를 받아서 예수님의 공로만 높일 수 있는 사람만 뽑아서 성령의 은사를 주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그렇게 한 사람은 나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한 그 죄의 실제상황, 죄의 구체화가 바로 지금 나라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나의 신체가 책이에요. 나의 신체가 십자가를 증거 하는 계시 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항상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어지거든요. 4월 9일에 우리 김 집사님 아드님 결혼식이 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은 우리 반주자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예정이 되어 있어요. 그 전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못하지만 하여튼 계획은 잡혀 있습니다. 김 집사님 아드님 결혼식 주례본문을 뭘 로 할까 생각하다가 드디어 정했어요.



설교시간에 결혼식 광고 한 셈이 되어버렸는데 고린도전서 13장 4-7절 말씀으로 정했습니다. 여기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게 무슨 내용이냐 하면, 분류시키겠다는 겁니다.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유익을 구하게 되어있어요. 왜? 자기한테 믿음 갖고, 자기한테 집착 갖고, 내 것은 누구한테도 안 빼앗긴다, 내 것만큼은 쥐어야 되겠다, 이럴 경우에 그 사람한테는 사랑의 은사가 없는 쪽으로 알파고에 의해서 활용되는 겁니다. 주님의 세계에서 활용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랑이 없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분류입니다, 분류. “십자가 지실 때 대체 누굴 위하여 지셨습니까?”를 이야기하게 되면 “기다려 봐. 성령이 갈 테니까.” “성령이 어떻게 옵니까?” “사랑으로 갈 거야.” “사랑이 뭡니까?” “분류다.” “무엇의 분류입니까?” “저 사람 말고 너!”거든요. 그러면 땡 잡았다, 하지 말고 “왜 하필이면 접니까?” 이렇게 해야 돼요. 왜? “저 사람하고 나하고 똑같은데 왜 접니까?” 둘 다 죄인이거든요. 둘 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주님의 죽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선악과 따먹어놓고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해서, 인간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네가 오래 못살고 죽는 그 죽음이 아니라, 생명나무열매 따먹고 오래 사는 그게 영생이 아니라, 생명나무에 오지 못하는 그게 바로 실제로 저주와 죽음과 심판의 실체라는 말입니다.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은 계속해서 번식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뭐냐 하면, ‘나는 생명나무열매 먹었으면 좋겠다.’ 또 나는. ‘나는 예수님 믿겠다. 예수 믿고 나는 천당 가야지.’ 계속해서 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명나무과실을 따먹을 수 없었던 이유가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계속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식이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저 천국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나 교회 나왔으니까 천당 갈래.” 그러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처음에 인간은 신체가 있거든요. 사람은 따집니다. 신체라 하는 것은 엄마 아빠의 결혼을 통해서 신체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체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정신이 있어야 되지요. 정신은 뭘 로 채워지는가? 어릴 때는 부모의 양육, 교육, 훈계로서 채워집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올라가면 같은 또래인 친구들이 채워주지요. 그런데 요새는 일곱 살부터 스마트 폰이 ‘나’라는 것을 채워줘요. 그렇다면 구원받는 주체의 내용은 무엇으로 채워집니까? 성령의 은사로 채워지는 거예요. 성령의 은사가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이 뭐냐? 분류입니다.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 겁니다. 이 말이 참 어려운데 더 쉽게 다시 해봅시다. 이 세돌이라는 프로기사와 알파고가 바둑을 두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5대 빵으로 지는 것도 참 수치스럽고 기분이 나쁩니다.



저도 바둑을 좀 두는 입장에서 컴퓨터하고 바둑을 두거든요. 제가 판판이 이겨요. 그런데 그 인공지능이 9급짜리에요. 이길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 세돌이와 붙은 그 컴퓨터는 cpu 1200여대를 붙여놓은 거거든요. 인간으로서 제일 수치스러운 상황이 뭐냐? 5대 빵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5대 1로 지는 경우가 인간으로서는 가장 극한 적인 부끄러움입니다. 왜냐하면 한 판 일부러 져 준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기계가 일부러 한 판 져줘요. 그러면 인간을 갖고 노는 것이 됩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려요. 일부러 져줄 때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 꽁꽁 감춰놓았던, 내가 끝까지 쥐고 있었던 자기 유익입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정말 얼굴 붉히는 분도 가끔 만나요. 도저히 기분 나빠서 못 듣다가 뛰쳐나가려니 예의상 중간에 못 나가고 끝나자마자 뛰쳐나가는 분도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근처 살면서 교회 왔다가 못 듣고 중간에 가 버린 사람들. 급한 전화 받는 시늉 하면서 예, 예, 하고 가버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준비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야기만 하면,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수 믿고, 십자가 믿으라고 하면 십자가 다 믿고,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믿어도 안 된다고 해버리면 도대체 마지막 남은 나의 유익, 나의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서 찾느냐는 그 말입니다.



이게 나한테는 자기에 대한 모독이에요. 그런데 어린애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어린애 특징이 자기를 생각할 줄 몰라요. 그저 엄마만 찾아요. 제가 지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사랑이 나타나면 나는 없어지고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나만 우뚝 선다고요. 사랑의 은사가 오게 되면 나는 있으나 없으나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 머리카락을 헤아리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태복음 10장에. 머리털도 헤아리시고, 내가 죽고 사는 것도 그분 손에 달렸고, 내 발걸음도 세시고, 참새를 키우듯이 오늘날까지 나를 키워왔고, 내가 나에게 할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왜? 나는 사랑 앞에서, 주님 세계 앞에서 나는 없어져야 되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법만 있으면 돼요. 그 법만 완성되면 돼요. 그리고 그 법이 완성되면 나오는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피조물은 예수님으로부터 스타트가 되어야 되지 내가 예수님하고 흥정하고 “이렇게 하면 구원해줍니까?” 이렇게, “내가 뭘 하면 복 받습니까?” 이렇게 흥정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거쳐서……예수님 자체가 말씀이거든요.



말씀이 이 땅에 오셨는데 구체적으로 이미 신체로 오셨고 실제 십자가 죽음으로 가셔서 그래서 성령을 왔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게 하는 능력이 우리한테 온 겁니다. 그러면 자살할까요? 자살 안 해도, 가만있어도 늙고 치매 걸려서 죽는데 왜 자살합니까? 그 마지막 남은 자존심, 그런 것을 연세 많은 분에게서 어느 날 문득 발견했어요. 치매 걸린 노인이 기저귀를 차고 있었어요.



기저귀라는 표현을 하면 듣기에 기분 나쁠까 싶어서 “예쁜 빤스를 입었네요. 이거 갈아입으셔야지요.” 하니까 “그거 빤스 아니다!” ‘아이고, 어머니가 정신이 있으시구나. 기저귀 찬 것을 알고 계시는구나.’ 했는데 그 다음에 반전이 있습니다. “팬티다!” 하는 거예요. 빤스나 팬티나……. 기어이 마지막 자존심이 있잖아요.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는 것. ‘신이 있다면 나를 한 번 구원해 봐. 내가 믿어는 줄게.’ 하는 그 은근한 대들기, 고집스러움. 주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기어이 십자가로 데려가는 방법이 뭐냐? 그걸 무 깎듯이 깎아내요. 전도했다는 것, 전도한 그것도 죄인데요. 그러면 헌금, 헌금도 죄인데요. 예배참석, 그것도 죄인데요. 다 깎아내요.



십일조 없다, 주일성수 없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것도 주장해봐야 의가 되거든요. 그것도 깎아내 버려요. 그러면 마지막 남는 게 뭐냐 하면, “그러면 나 어쩌라고? 뭘 해야 됩니까?”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주님이 “누가 말이냐?” “내가요.” 나는 내가 필요해서 만든 게 아닙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중에 만들어진 게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 값으로, 본자리로 돌아가야 돼요. “어떤 법이 나로 하여금 새롭게 창조했습니까? 나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그 법이 뭡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대체하셔서 오신 예수님이, 유일한 인간으로서 그 한 분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의가 넘치고, 그 의로 말미암아 은혜로 우리에게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놓게 되면 그게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그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을 두고 우리가 ‘내가 그 인간 알았다.’ 하면 그건 안돼요. 그렇게 되면 계속 내가 알았다, 가 되니까 주께서는 ‘내가 알았다.’를 무산시키는 방법으로 한 평생을 살게 합니다. “나 주님 아는데 내 인생은 왜 이런가? 내가 주님 아는데 우리 애는 왜 이렇게 말썽꾸러기고 내가 주님 아는데 내 몸은 안 아픈 곳이 없고……?” 이게 욥이거든요. ‘주님 아는데 왜 나는 강도가 되게 해서 이렇게 체포되게 했는가?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그런 식으로 가다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있게 된 강도는, 또 요한복음 8장에서 간통하다가 현장에 붙잡힌 어떤 여인은 주님에 의해서 계속해서 “너는 나의 의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어야 돼. 출생해야 돼. 너의 육체는 내 십자가를 증거 하는 책이야. 나의 텍스트야.” 이런 식으로 끌고 와서 결국 주님 만나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누구뇨?” 지난번에 우리 장로님이 기도했잖아요.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하니까 “없나이다.” 바로 그 “없나이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더 이상 내가 나에게 벌세울 필요가 없고, 내가 나에게 성공과 실패를 따질 필요가 없고, 내가 나에게 ‘너는 지옥 가, 천국 가?’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같은 것도 고려할 필요가 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주께서 만드셨다는 것을 소급해서, 그것을 찾아가서 ‘도대체 나를 어떻게 이렇게 변화시켰지?’ 찾아가보니까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온 거예요.



그 십자가에 가보니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원형적인 분이 계셔요.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결론은 간단해요. 예수님의 마음이 언어라는 형식으로 초대교회에 예언과 방언과 통역이라는 삼종세트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책이 오기 이전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하거든요.



그러면 성경의 목적이 뭐냐? 생명나무에서 제하여 버리지 않고, 생명나무 옆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피조물 만드는데 뭐가 필요했다? 주께서 준비한 예언과 통역과 방언의 은사가 준비 되었다는 겁니다. 그 준비된 것이 사랑이라는 은사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 사랑의 은사의 특징이 뭐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나의 자존심을 챙기지 않는 그런 능력이 와버린 거예요. 그게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자력으로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됩니까? 아무도 안돼요. 누가 산을 옮겨서 바다에 빠트리겠습니까? 아무도 안 됩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뭐냐? 성령께서 내 것, 내 자존심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무 자르듯이 잘라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벤츠를 타면서도 그게 쓰레기라는 것을 아는 것, 잘라주는 겁니다. 새로운 빌딩을 구입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주는 겁니다. 내가 결혼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주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 죽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공, 실패, 죽고 사는 것, 이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주께서 죽게 하시기에 죽게 되는 거지요. 아프게 하셨기에 아프고 낫게 하시니 낫는 겁니다.



전도서 3장에 나오지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사랑과 전쟁 Ⅱ’에요. 평화할 때가 있으면 전쟁할 때가 있고요. 사랑하다가 미워하기도 하고 미워하다가도 사랑할 때도 있고요. 이것은 워낙 우리가 마귀와 한통속이 되어서, 마귀의 바탕이 되어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나’라는 것을 우긴 거예요. 마귀가, 죄가 우리를 가지고 ‘나’라는 것을 자꾸 만든 거예요. 그래서 방언은 통역되어야 되는데 통역의 내용이 뭐냐? 통역의 내용은, 예수님과 마귀하고 싸워서 이루어질 그 천국의 내용을 이 지상으로 구체화해주기 위해서, 인간들은 항상 뭐든지 나부터 시작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그 사실, 그것이 통역해야 될 내용으로서 복음 안에 들어 있습니다.



문장이 길었지요? 다시 이야기하면 통역할 내용이 뭐냐? 한 마디로 예수님의 복음인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가? 인간세계의 모든 것이 나 중심, 내 것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그 자체가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들로 쫙 깔려 있다는 그 사실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개혁주의를 통해서 바른 목회를 하자, 하는 그것도 결국은 저주받아야 될,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식으로 계속 유발된 거예요. ‘그래. 교회는 썩었어. 개혁되어야 해.’라는 그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십자가 죽음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성령의 은사로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돼요. 알아서 잘라주는데 본인이 자르지 마세요. 이것은 나쁜 짓이다, 하고 본인이 자르지 마세요. ‘나는 결심했어. 이제는 담배 끊고 술 끊으리라.’ 하지 마세요. 주께서 알아서 끊어주실 거예요. 왜? 내가 끊어버리면 며칠 안가서 어떤 새로운 상황이 오면 욱, 해서 ‘에이 씨! 내 힘으로 안 되네.’ 하고 다시 하기 마련이에요. ‘올해는 공부 잘해야지.’ 일주일도 안가서 공부 안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몰라요.



바둑을 둔다면 알파고가 “너는 그랬어야 돼.” 하면서 두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수는 패배하도록, 어떻게 해도 지도록 되어 있어요. 이 세돌의 모든 수는 알파고에게 질 수밖에 없는 알고리즘, 그런 경과를 보여주는 거예요. 어떤 수를 둬도 지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가장 기분 나쁜 것은, 다 이길 수 있는 알파고가 슬쩍 한 번쯤 인간으로 하여금 이기도록 하는 그것이 인간의 자존심을 가장 극단적으로 모독하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이 뭐냐? 오늘날 진즉 죽어야 되는데 우리가 아직 살아서 이렇게 모였잖아요. 이게 우리 자존심 확 부수는 겁니다. 진즉 죽어야 되는데 오늘 살려주시잖아요. 살려주게 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살았다고, 그게 나오는데 그게 오해입니다,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는 게 없는데 내 중심으로 현실을 재조정했고 나는 마땅히 정당하다고 외치면서, 나는 열심히 살았노라, 죄짓지 않았노라, 나름대로 최선 다했노라, 외치면서 승부에 나서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죄고 주님의 적수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