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강-고전 13장 12-13(사랑이 제일이다)16022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12-13절입니다. 신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것을 하나님 쪽에서 분할을 시켜 놓았어요. 보통 “제일은 사랑이라.” 한다면 믿음과 사랑은 버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분명히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해놓고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해서 믿음과 소망, 이것이 그냥 없어질 내용이 아니고 무엇이 최고인가를 받쳐주기 위해서 믿음, 소망이 필히 이 땅에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 소망, 이것은 제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믿음, 소망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믿음 있다, 그걸로 땡이 아니라는 거지요. 나는 소망한다, 그걸로 땡이 아니고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거지요.
반드시 하나로 응집이 되어야 되고 하나로 집중이 되어야 됩니다. 믿음, 소망, 그 중에 제일은 사랑, 이렇게 배열함으로써 믿음, 소망이 그 자체로서 의미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제 1 되는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믿음과 소망이 더불어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져야 된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를 다 같이 은사로 받아야 돼요. 받아 놓고 “내가 받았던 소망,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받았던 믿음, 이것도 전부가 아니야. 믿음과 소망을 겸하여 주셨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그 말을 성경에서 사도바울만 고백할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사도바울 가는 곳에 같이 안갈 겁니까? 사도바울 간 곳에 같이 참여하려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13장의 말을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지요.
사도바울만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고 할 것이 아니고 우리 평소 일과 속에서도 “역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야. 최고야.”라는 말이 입에서 나올 수 있어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것이 제일이라고 했을 때, 믿음과 소망이 있는데도 사랑이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그런 느낌, 사도바울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이걸 이야기했으면 우리는 오늘날 어떤 느낌을 가지고 그걸 이야기할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거울이 희미한 것은 아니에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희미하겠지요. 초반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거울을 닦는 이유는 거울이 귀해서가 아니라 거울 면에 내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먼지 같은 것을 닦아내잖아요. 희미하다는 말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랑을 알게 되면 바보 된다는 겁니다. 누가? 내가 바보가 돼요. 사랑 앞에서 내가 바보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점잖고, 남들 앞에 체면 차리고, 어딜 가도 말 한마디 조심하고, 이것이 할 말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극히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외손자라도 하나 나오게 되면 갑자기 바보가 돼버려요. 아빠도 바보, 엄마도 바보, 외할아버지도 바보, 외할머니도 바보가 돼요. 사랑 앞에서 바보가 되는 이유는 나는 흐릿해도 좋다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를 고집하는 것은 네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손녀나 손자가 철딱서니가 없으니까 할아버지 수염 잡아당기고, 코도 잡아당기면 그걸 좋다고, “어이구,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좋다고 하는데 누가 누구의 장난감인지 구분도 안가요. 더 만져주기를 원해서 막 다가서게 되지요. 사랑이란 이런 겁니다. 네 앞에 서면 나는 잊어지고 사랑 앞에 서면 내가 잊어지지요. 그래서 나온 노래가 “그대 앞에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느냐”고 하는 노래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주체를 흐릿하게 만들고 지워버리는 겁니다. 그것을 10절을 통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대 앞에 설 때 나는 사라져도 좋습니다. 그대만 있으면 나는 충족합니다. 왜? 그대는 나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이게 바로 사랑이지요. 이것을 논리로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그대의 분할이다. 분할, 하나의 조각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이 등장하게 되면 나는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어떻게 되는가? 내가 뚜렷하게, 내가 나에게 예민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어버리면, 사랑이 없을 때 나오는 외침은 이런 외침밖에 없습니다. “신이라 할지라도 내 것 건드리면 나는 그냥 두지 않겠다.” 이런 외침이 나와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등장하면 “쭈쭈쭈쭈쭈쭈!” 이렇게 돼요. 나의 체면이나 자존심, 이런 것은, 그대 있기에 나의 체면과 자존심이라는 것은 없어도 괜찮은 거예요. 창세기 2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이 창조될 때 흠이 없는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벌거벗었으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대 앞에 알몸을 보이고 싶다는 그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인 것을 그대 앞에서 늘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이를 뭐라고 합니까? “자기야!”
자기야, 라고 하지요. 자기인 본인을 놔두고 왜 상대방을 자기라고 하는 겁니까? 나는 나를 잊고 당신을 나의 대타로 삼겠다는 겁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있음을 근거로 해서 그 있음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이것이 너무나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내가 나한테 짐스러운 인생은 청산하고 그대가 내 앞에 등장한 이상은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인생은 포기하고 그대 있는 그것으로 내 인생을 대체하겠다. 그것을 한마디로 세자로 “자기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긴긴 문장이 간단하게 “자기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듣는 자기 되게 부담되지요. “저걸 다 감당을 해야 되는가? 저 인생을 책임을 져야 되는가?” 갑자기 무게가 하나 더 얹어오는 느낌이 들지요. 제가 대전에서 주례할 때 식사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자가 되어서 나라를 구한다고 대단한 남자가 아니라 아내를 웃게 한다면 그게 최고의 남자라고 했습니다. 주례 중에는 차마 그 이야기를 못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욕할까 싶어서. 안중근처럼, 나폴레옹처럼 남자가 되는 것이 남자가 아니라 아내의 얼굴에서 웃음이 나오고, 미소가 나오고, 자식 얼굴에서 웃음이 나오게 한다면 그것보다 더 최고의 남자는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남자라고 본인이 이야기하면 안돼요. 내가 사랑하는 자의 입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나오느냐가 중요합니다. 왜? 우리는 항상 조잡하고 조립된, 엉성하게 조립된 나를 위한 거울상을 내가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이게 부분이라는 거지요. 우리는 뭔가 알 수 없는 것에, 사랑에 하나의 분할 체에요. 분할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자가 없으면 내가 소중하게 되고,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없게 되고, 소중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설프게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쓰레기들을 모아서 고물상처럼 내 안에 자꾸 집어넣어야 돼요.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뭐도 잘하고, 뭐도 잘하고……’ 이런 식으로 사는 버릇이 있다 보니까 이게 결국 뭐로 되는가 하면, 폐쇄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내가 나를 지켜왔는데 누구라도, 신이라 할지라도 내가 쌓아놓은 것을 건드린다면 나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것이 강렬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 없는 현상이라고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사랑이 등장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망가지고 무너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즉에 내가 깨져야 될, 내 힘으로는 차마 깨어지지는 못하고 진즉에 깨져야 될 상황입니다.
자기 거울상을 깨야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가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요. 어색해요. 본인도 어색하고 남들 보기에는 이게 괴물입니다. 뭔가 멋있어 보이는데 건드리면 욱, 하고 접근하기가 곤란하지요. 성형견적을 내서 얼굴에 너무 손을 대게 되면 분명히 아름다운 것은 다 끌어 모았는데 황금 율이 안돼요. 뭔가 이상하고 어색해. 팬들 보기에도 어색해요. 고쳐도 잘못 고친 것 같아요. 티가 안 나야 되는데. 남자들은 둔해서 잘 몰라요. 여자들은 여자가 고친 것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예쁘지?” 하면 “저거 고쳤다.” 하면서 어디 고친 것 견적 다 나와요.
어색해요. 거울상을 자꾸 조립하니 어색한 겁니다. “참하게 조립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참하게 조립하지 마시고 잊으세요. 누구 앞에서? 온전한 것 앞에서 잊어버리세요. 왜? 우리는 온전한 것을 보여주는 분할체기에, 부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냥 부분 같으면 우리는 곤란한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너는 나의 부분”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이 창조주의 부분이고 분할이다. 그냥 부분이 아니고 나를 대리했다.”고 봅니다. 대리분할 체에요. ‘대리성분할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분할되었는데 그 조각 하나하나가 그냥 조각이 아니고 나를 건져내신,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조각의 거울상으로 우리가 봉합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한테 일어나는 어떤 것도 사랑의 현상이 돼요. 사람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게 되면요, 아내가 코고는 것도 예뻐요. 방귀 뀌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예뻐요. 안경 낀 것도 예쁘고 안경 벗은 것은 더 예쁘고, 모든 자태가 다 예뻐요. 심지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잔소리 하는 것도 예뻐져야 돼요. 벌써 아멘이 나왔습니다. 잔소리마저 예뻐져야 돼요.
왜냐하면 사랑은 논리 결과를 따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부부라 하는 것은……, 갑자기 주례시간처럼 되어서 미안한데요, 부부라 하는 것은 처음사랑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그 사랑이 반복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는가? 오늘 본문을 요약하게 되면 ‘과정’이에요. 인간은 부분인데, 주님이 대리한 사람인데, 대리된 분할체인데 그것이 온전한 데까지 이어지기 까지는 과정이 소요가 된다는 겁니다. 과정이 요구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과정에 지금 속해 있어요. 어디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하나의 과정이니 그 과정의 길을 우리가 가게 되는 겁니다. 가게 되면 온전함이 뭐가 나오는가? “아, 나를 몽땅 다 대리하셨군요. 나를 몽땅 다 대체하셨군요.”가 온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 전부터 주님께서 내 속에 있는 것, 내장부터 해서 모든 것을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미리 다 가져가셨군요. 죄 된 것을 가져가셔서 의로운 것으로 변경시켜 놓았군요.” 죽고 난 뒤에가 아니라 주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이미 변경된 온전한 내 모습이 주님의 십자가 안에 같이 들어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부분으로 보이냐? 내 안에는 온전함이 계시다. 그래, 내가 부분으로 보이는 것 좋다. 나는 부분이야. 나는 어설퍼. 네가 나를 보니 괴물로 보이지? 그래. 나는 온전치 못해. 하지만 그 온전함이 나의 부분인 어설픔을 대리하고 대체했다.”는 거지요.
그러면 여기서 오해될 소지가 있는 것이 뭐냐? ‘주님이 나를 대리했는가?’라고 주님과 나를 직접 연결시킬 수가 있는데요.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주님께서 나를 바로 거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거쳐서 대리하신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누구냐? 아담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담을 대리했어요. 아담을 대신하고 아담에 속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자격으로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에게만 그 대리 성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 나 뿐이에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이미 괴물이고, 성격도 괴물이고, 이단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전부 다 자기를 위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되어야 된다고 고집부리는 이상성격자, 정신병자로 우리는 태어나는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니까. 세상 전부가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니 이것은 얼마나 대단한 정신병자입니까? 논리적으로는 아니지만 감각적으로서는 세상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다 되었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요구하게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현실과 내 요구가 맞지를 않지요.
맞지 않으면 포기하면 되는데 포기할 줄도 모르네. 맨날 가슴 때리고 탁자 내려치면서 왜 내 뜻대로 안되느냐고 하는 겁니다. 청와대에 책상 내려치는 사람 있어요. 내 뜻대로 안된다고, 경제관련 법안이 속히 처리 안 되고 있다고, 답답하다고. 이런 소리 하면 또 야당성향의 사람들은 좋아하면서 목사님도 여당편이 아닌가보다, 하고 정치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그 정치적인 답답함 때문에 책상 내려치는 그것, 오늘날 우리는 안 내려칩니까? 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되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대리자가 없어서 그래요.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책임져야 되니까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뻔 하지만 고집을 부려도 세상에 이런 고집이 없어요.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는가? 지금 그게 누구한테 묻는 거예요. 날씨는 궂고 바람은 몰아치는데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지 마자 버스가 막 떠나버렸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지요. 요새는 앱이 깔려 있어서 도착시간 미리 알아서 5분전에 도착하지만 백날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버스기사는 자기 맘대로에요. 하여튼 내 뜻대로 안돼요.
그래서 세상을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내 뜻대로 안되는데 행여나 타이밍, 뜻대로 될 때가 있어요. 오히려 그것이 기이하고 고마워야 됩니다. 그게 감사해야 돼요. 발상의 전환을 하세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안 되어도 되는데 이상하게 뭔가 기분 좋게 될 때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에 나와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리할 때 대리하면서 부숴버려요. 어떻게 부수는가? 어설프게 봉합된 나의 자아를 뭐로 부수는가? 하나님의 율법으로 부숩니다.
율법으로 부술 때 우리는 하나의 통합체가 아니고, 통일체가 아니고 어설프게 욕망과 욕망의 누더기로 어설프게 끼워 맞춘, 잡종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율법을 가지고 공개하고 노출시켜 버립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이 한 개가 아니고 두 개도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아요. 엄청나게 많으니까 어떤 것을 지켜서 내가 복을 받겠다고 해도 다른 옆에 있는 율법이 우리를 쳐버리면 우리를 복 받는 자가 아니라 저주받는 자로 만들어버려요.
3년 전에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하지만 3년 뒤 어느 시점, 어느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께 욕했다면 3년 전에 은혜 받은 것은 다 날라 가버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싸잡고 통합체로 붙들어 매려고 하는 이 시도가 얼마나 어설픈지 제대로 그 본드가 붙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이야기했거든요. “우리가 어설픈 쓰레기를 모아놓았는데 그걸 붙이는 본드가 어설퍼서 어떤 계기가 오면 다 끊어진다.”라는 조로 이야기하면서 평소에 제가 그런 말을 잘 안 쓰는데 우연히 제 입에서 튀어나왔는데 듣고 있던 집사님들이 웃었어요.
제가 그걸 가지고 엿 같다고 한 거예요. 욕은 아닌데. 우리가 나를 싸잡기 위해서 애쓰는 모든 것이 조금만 온도와 습도가 안 맞으면 다 깨져버려요. ‘내가 정신 차려야지. 바보야! 정신 차려라.’ 해도 어떤 계기가 오면 정신 못 차립니다. 성질 그대로 다 튀어나와요. 조각조각 사이로 다 튀어나와요. 정신 차리라고 하지 말고 그냥 바보가 되면 된다니까요. 사랑 앞에서 그냥 “어쭈쭈쭈쭈쭈쭈!” 해서 그냥 바보가 되세요. 그래서 자기를 잊어버리면 되는데 날마다 자기에 대해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그저 이거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모아 놓은 것 안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이런 인간이다.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다.’ 이걸 붙들려고 하니까 그게 하나님 앞에서 저주꺼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거 지켰나? 저거 지켰나?’
법 앞에서 저주거리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면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니까 남편이 아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냥 다 해요. 그런데 잔소리의 항목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처음에는 “이것, 이것, 하면 내가 좋아할게.”라고 했는데 그거 하니까 아내가 밖에서 무슨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이제는 내가 지킨 그 항목들 말고 틈새시장을 찾아요. “이거 했나?” 이렇게 나와요. 이거 환장할 노릇입니다. 도대체 이 법의 조항이 어디까지 영원토록 이어질지. 그거 지켜 줬다? 이번에는 태도를 문제 삼네요. “네가 지금 내 말 듣기를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해주지? 억지로 한 거 맞잖아!” “그러면 억지로 안하는 것이 뭔데?” “그걸 모른다고?” “모른다.” “그것도 모르는 주제에 왜 나대나?” 이렇게 이상하게 또 대화가 안돼요.
그러면 그것도 또 지켰다고 칩시다. 지키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내일 되면 어디서 또 무슨 잔소리를 가져올지 이제는 겁이 나요. 겁이 나니 이제는 각방 쓰고 만나기도 싫고요. 처음 사랑을 다 잊었다는 요한계시록 2장 4절의 말씀처럼. 처음 사랑이 다 날라 가버렸어요. 그 원인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체할 때 우리를 직접 상대하지 않고 아담을 상대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이미 아담에게 규정된 그 규정조항이 고스란히 우리에 대한 규정조항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그 과정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 규정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이미 땅, 땅, 땅! 규정을 했어요. “피고는 이미 죄인 되었으므로” 땅, 땅, 땅! 똑같은 겁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우리가 모두 죄인 되었어요. “땅! 땅! 땅!”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뭐냐? 순종 안하면 되는 거예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순종 안하고 있음을 본인이 인지하고 있으면 되는 겁니다.
과정은 인식론이에요. 진리는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아는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평생의 과정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한 적이 없음을 우리가 인정하면 됩니다. 순종한 적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내 몸에서, 로마서 5장 19절이 주님의 몸을 대리하는 분할 체에서 발산되고 있는 겁니다.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나는 주님한테 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남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하세요. 어떤 자격으로? 이미 구원받은 성도의 자격으로서. 이걸 이야기할 수 있어야 성령의 은사 받은, 미리 대리자를 알게 된 은사 받은 성도입니다.
“나는 평생 50년 동안 교회 다녔는데 한 번도 내가 믿는 주님한테 순종한 적이 없습니다.”를 옆에 있는 교인들에게, 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미소를 띠면서 이야기하세요. 썩소가 아닌 미소를 띠면서 이야기하세요. 그것이 성령이 주는 자유 함입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기대를 걸지 마세요.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심지어 천국 갈 때까지 순종해서 천국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세요. 얼마나 가볍고 기쁜지 모릅니다. 이미 한 사람이 순종 아니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고 규정을 했으면, “아담은 죄를 지었지만 나는 할 수 있다.”고 이렇게 건방떨면 안돼요.
하나님은 나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상과 상대하지요. 아담이 순종치 아니하고 죄인 되었으면 우리는 그 아담 속에 있어요. 아담 속에서 죄인 되었습니다. 내가 나쁜 짓을 골라서 해서 죄인된 것이 아니고 아담의 자손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존재성 때문에 죄인된 거예요. 이게 슬픈 이야기입니까? 이게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예수 안에서, 또는 다른 말로 아들의 나라에서, 천국 안에서 우리는 의인으로 대우받습니다. 그게 대리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주님이 우리를 대신할 때 먼저 전제가 있어요. “너는 이제부터 어떤 짓을 해도 순종 안함이다.”라고 전제를 깔고 그 위에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의롭다는, 그 착하다는 그것이 행함이 아니고 선물로서만 그냥 포클레인이나 덤프트럭이 일할 때처럼 그냥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순종하지 아니했음을 서로서로 주고받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횡재한 거잖아요. 로또도 이런 로또는 없습니다. 로또에서 1등 했다고 천국 보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돈으로 천국갈 수 없는 입장이라면, 돈으로 안 된다면 뭘 해도 안 된다는 뜻이에요. 요샌 돈의 세상이니까. 빽으로는 안 된다는 그 말이거든요. 안되는데 되었거든요.
그게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주님께서 일찍이 루트, 길을 닦아놓았어요. 아담의 자손들, 부분들만 있는 이 세상에 섞여 오셔서 주님께서는 홀로 이 땅을 떠났습니다. 이게 바로 과정, 길을 닦는 거예요. 길을 닦아서 그길로 죽 가셨습니다. 그 길을 닦아서 가는데 예수님 홀로 가셨는가? 홀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인자의 시대가 되어서 성령께서 인자되시는 예수님을 다뤄야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칭호를 스스로 ‘인자’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자신에게 덮어씌운 것, 성령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만, 성경대로, 말씀대로만 자기에게 주어진다는 사실, 그 말씀대로 성취해야 될 대상자로서 구약에 등장한 메시아명칭을 예수님 본인에게 적용시킨 겁니다.
예를 들면 “인자는 말씀대로 죽어야 하리라.” 이런 뜻이에요. 인자라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지요. 인자라는 것은 주의 말씀대로 나한테 적용이 되어서 인자는 인자의 노릇, 기능을 다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땅에서 어떤 시간적인, 시대적인 루트를 뚫어놓은 겁니다. 내 이름으로 미움을 받으면 지금 제 코스대로, 제 코스대로 가고 있다고 봐도 괜찮다는 겁니다.
길이 있다는 말은 탈출해야 된다는 뜻이거든요. 마태복음 10장 23절에,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탈출하자는 말이에요. 탈출해야 될 동네에 너희가 살고 있다,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벗어나야 돼. 이곳이 다가 아니야. 다른 곳이 있어.” 그런 이야기입니다. “길은 모르지? 내가 길을 닦아놓을 테니까.”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길을 닦아놓을 때 그 길은 누가 인도하는가? 마태복음 12장 31절에서 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아담의 자손들은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다시 말해서 죄인 되게 했던 그것은 인정하되 그 죄인들을 강제로 이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상관없는 사람은 오는 세계에서도, 어떤 세계에서도 구원받지 못한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규정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아는 것이 없기에 주님에 대해서 욕할 수도 있고 배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미 성령이 왔다는 말은 그런 죄인을 강제로 이 땅에서 빼내는 그 성령의 작업에 대해서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형벌, 그러니까 지옥 간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 성령은 오는 세계와 관련된 영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 말고 오는 세계.
성령이 미리 왔다는 말은 이 세상 말고 오는 세계가 중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중첩되어 있으면 한쪽은 우리는 희미한 대리자의 분할체가 성령은사 받은 사람은 온전한 것으로, 온전한 채로 그걸 바라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바라보게 되어 있으니까 바라보는 그 모습이 뭐냐? 나는 대리분할체고 스스로 통합체가 아니니까 그저 사랑 앞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신경 안 써도 되지요. “주님 앞에서 바보가 되고 주님만 있으면 저는 족합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전부에요. 제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저는 상관없어요. 주님만 있으면 되지요.”라고 되는 겁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셋은 같이 가야 되는데 특히 이 믿음에 대해서 “내가 믿습니다.” 할 가능성이 많아요. 내가 믿는 것은 다 헛방입니다. 소망도 내가 소망 가져 버리면, 내가 평소에 지상에서 갖고자 하는 것들을 그대로 소망이라고 여기고 착각할 수가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것은 한국교회가 바라지 누가 바라겠어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왜냐? 빠져나가야 되고 벗어나야 되기에.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소망과 믿음이라는 것은 항상 나에게로 귀환하고 나 잘되는 그것이 소망이고 나 잘되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내가 최고다, 사랑이 제일이 아니고 내가 제일이다, 그런 식이 되어버립니다. 드라마 거의 안 보는데 우연히 지나가다 봤어요. <별이 되어 빛나리>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KBS2채널에서 9시부터 40분정도 하는 드라마입니다. 거기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내가 자식에게 피 한 방울도 못주면서 무슨 엄마냐?”
주인공 봉희가 Rh-O 형의 혈액형을 가지고 있는데 애 낳다가 출혈이 심한데 수혈할 피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곧 죽을 판이에요. 그럴 때 엄마가 울면서 탄식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너에게 필요한 피(Rh-O)를 못주면서 엄마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하고 부르짖지요. 그걸 혈연관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에 보면 엄마가 피 한 방울 못줘도 엄마는 우리에게 죄를 줬어요. 듬뿍 죄를 주었습니다. 죄가 뭐냐?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함을 우리에게 준 거예요. 그 엄마의 그 딸이고 그 엄마의 그 아들이에요. 아담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이미 규정받았어요.
주인공 봉희는 그 때 이렇게 해야 돼요. “엄마, 피 한 방울 못줘도 죄는 줬잖아.”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 드라마가 복음적 드라마는 아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못해요. 세상 둘러보면 모든 것이 자식과 부모, 혈연관계가 끝입니다. 거기서 탈출이라는 것은 아예……, 자신들이 탈출을 안 하려고 해요. 내 아들, 내 새끼, 내 딸, 우리 부모, 그거밖에 몰라요.
“봄이 되면 밭에서 새싹이 나오는데 왜 죽은 내 아들은 안돌아오는가?” 봄에 새싹 돋는 것만 보면 그렇게도 가슴이 아프다는 거예요. 누가? 이봉주 장모가. 이봉주 아십니까?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그 이봉주의 장모. 이봉주가 처조카를 키웠답니다. 장모가 사위보고 늘 고맙다고 해요. 천년손님인지 백년손님인지, 잘 안 보는데 휙 지나가다 보면 나오니까. “봄에 새싹은 돋아나서 눈에 띄는데 죽은 내 아들은 왜 눈에 안 띄느냐?” 그 말입니다. 이걸 바알종교라 해요. 그게 바로 불순종이에요. 내 중심, 내 사랑 밖에 모르고, 내 소망밖에 모르고, 내 믿음밖에 모르고. “이렇게 믿었으니 천국 보내주세요.” 무슨 땡깡이 그런 땡깡이 있어요. 네가 뭐라고 네 믿음가지고 천국 갑니까?
우리의 믿음은 부분이에요. 나를 잊어버리라고 주신 믿음이고, 나를 잊어버리라고 주신 소망이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잊어버리라고 주신 사랑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것 잊어버려라. “쭈쭈쭈쮸!” 이런 바보가 돼라. 내가 주님 사랑한 것도 바보가 되고 내가 주님 앞에 봉사한 것, 내가 헌금한 것, 기도한 것, 다 잊어버려야 돼요. 왜? 그것조차도 우리의 불순종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껏 할 수 있는 재주가 한 가지밖에 없어요. 불순종은 잘합니다. 불순종 하나는 최고로 잘해요.
그 불순종을 무엇과 결합하는가? 주께서 이 세상을 빠져나오면서, 길을 뚫으면서 주신 믿음과 소망, 다시 말해서 주님의 믿음과 주님이 소망,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랑이 왜 사랑이냐 하면, 그 사랑은 충돌에서 일어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치 않는 우리 인간과 순종하신 주님, 하나님의 원하시는 순종과 순종치 아니함과 박치기하고 충돌해서 일어난 그 사태, 우리를 구원하는 피가 거기서 생산된 겁니다.
그냥 가만있으면 전세버스로 여행 가듯이, 비행기타고 데려가듯이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충돌하는 거예요. “너는 끝까지 불순종해라. 이 예수가, 나만이 끝까지 순종할게.” 그 대리 성, 불순종을 계속해서 순종으로 대리해주시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평생 우리의 대리기사라. 우리는 평생 비틀거리고 음주운전하고 있고, 늘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대신 인생의 방향타를 잡으십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내 소망, 내 믿음, 내 잘남, 내 우수함, 내 괜찮음, 이런 쪽으로 자꾸 방향을 틀어요. “날 봐라. 얼마나 멋있느냐? 나 잘났잖아.” 이걸 대놓고 남에게 유도하고 인기를 얻고자 하고 자기 팬클럽 관리하고, 우리는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자기 사랑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에서 좀 여유 있으면 내 혈연관계, 내 새끼, 내 남편, 내 아내, 그것만 챙기고.
혈연관계에서 우리는 못 빠져 나와요. 그런데 그 방향을 틀어줘요. 왜? 그게 루트, 그게 길이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유일한 탈출구를 주님이 알지 우리는 몰라요. 그것은 반복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는 존재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자각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괴물 같은 나, 여기서 ‘같은’은 빼버려야 돼요. 괴물인 나, 이단인 나, 날 때부터 욕심만 채우는 나는 매일같이 주시는 이 말씀의 온전함에 의해서 우리의 일그러진 거울상은 매일같이 쨍그랑, 하면서 우리 앞에서 깨지도록 하십니다.
내가 내 것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거울상은 주님의 십자가, 그 뾰족한 십자가로 찔러서 깨버립니다. 자아도취, 자기만족, 자기행복, 자기쾌락, 자기향유, 자기조이너스(기쁨), 이런 것들을 십자가로 다 깨버리지요. 네가 그걸 보는 순간 남은 울고 있다는 겁니다. 네가 잘될 때 남은 울고 있는 거예요. 나 잘되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있으면서 나 잘 되는 그것으로 자족하고 만족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잖아요. 그래서 사랑은 네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서 피를 흘렸나니. 이것이 요한일서 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저주받을 제물이 되었으니 이제는 네 코스는 내가 갔던 코스대로 인도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까 교독문 하면서 우리는 유명한 시편 23편을 보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때는 다윗이 직사하게 고생할 때에요. 고생이 끝날 때가 아닙니다. 고생 중에 이야기했어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게 누구 집에 액자로 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 이름이 아니고 대리자, 우리를 대신하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우리는 그 길을 몰라요.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하시지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 앞에서는 나는 사라지고 작아지게 하고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고통도 내가 신경 안 쓸 정도로 인식되지 않아야 돼요. 오히려 “주님만 있으면 족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게 만들지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를 보호하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식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그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아파요. 그게 아파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소망 꺾어주시는 채찍이고, 내 믿음 찢어버리는 채찍이고, 내가 나 사랑하고 내 만족하는 그것을 째버리는 아픔입니다.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도착하리로다).” 부분적으로 봤는데, 내가 나를 볼 때에 내가 만든 거울보고 내가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졌는데, 이제는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거울을 쨍그랑 깨주시니까 내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죽음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는 그 사실, 그것만 우리에게 다가오고 이제는 우리의 불순종을 통해서 그걸 외부로 발산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우리 자신이 제일인줄 알았습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되면 세상 살만 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를 대체하시고 대리하신 분이 이제는 제일인 것을 우리의 삶속에서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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