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83강-방언(고전14;1-2) 1603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3. 7. 07:23
2016-03-06 12:40:13조회 : 67         
   방언 160306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방언(고린도전서 14: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1TmME-OR0i0, Hit:3

 이근호 16-03-06 13:27 
방언

2016년 3월 6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4:1-2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사랑을 구체화하기가 곤란합니다.
무엇을 해도 사랑이 될 수 있고, 무엇을 해도 사랑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현실적 작용을 인간 세상에 실시하기 전에
먼저 사랑이 어떻게 형성되었기에 ‘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의 살해의지의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허약한 실체로 죽음을 당하심으로 생겨난 겁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그 사랑의 형성된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즉 사랑을 원해도 가질 수 없는 환경에 인간은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사랑을 희망하고 요구해도 인간은 자신의 처지가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과에 대해서 인간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부터 이미 책임추궁이 가해집니다.


즉 “네가 이런 식으로 살아서 과연 네가 원하는 천국에 갈 수 있겠어? 어림도 없지!”라는 식으로 인생들을 추궁하시고 심사하십니다. 천국이라는 목표점과 연결이 가능한 과정이냐 하는 겁니다. 자신의 뜻과 고집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면서 천국과 연결시키려 한다면 무엇을 목표로 잡느냐와 상관없이 그 과정 자체를 문책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죽어서 들어가는 나라만 영적이 아니라
이미 이 구체적 삶이 영적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방언’이라고 합니다. 신령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이미 완성된 사랑과 결부되어 지상에 구체적으로 퍼지는 은사가 곧 ‘방언의 은사’라고 합니다.
이는 곧 ‘방언의 은사’의 혜택을 입지 않으면 누구나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구체성이 곧 ‘방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8에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사랑의 의미를 담는 것만이 진정한 방언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곧 방언의 형식적인 면에서 해당되고 탈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방언은 ‘어눌한 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못알아 먹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방언을 방언되게 하는 그 내용과 관련된 의미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속에서 한이 폭발하듯이 터져나오면
짧은 구강 구조로 제대로 의미를 가진 질서정연의 소리 정렬을 나타내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집중 기도할 때는 이런 현상이 빈번합니다.

이런 어눌함은 세상에 늘려 모든 종교, 그 어디에서나 다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옛날 이스라엘에게는 이 방언은 특별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즉 “우리 이스라엘 나라 빼놓고 모든 나라는 다 저주받아 마땅한데
이는 그들이 참 하나님의 언어를 받지 못하고
자기네들 끼리 통하는 언어, 곧 방언을 소용하기 때문이다”
는 취지에서 ‘방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겁니다.

언어는 소속된 삶의 환경 끼리 각자의 주관과 자아상을 구축하게 해줍니다.
중국 화과산은 전설에 의하면 손오공의 고향입니다.
손오공이 태어나기 전에는 선녀들이 연못에 목욕하려 왔지만
장난꾸러기 손오공이 오줌을 누고부터는 냄새난다고 선녀들이 오지 않았다는 내용이 전해내려 옵니다.

어른들은 이 전설이 그대로 현실임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2살부터 7살까지의 아이들은 이 내용 그대로 믿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들 아이들의 주체는
그들이 들었던 어른들의 말에 의해서 주체성을 내용으로 갖추게 됩니다.
마치 산타크로서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때 반드시 선물 준다는 사실이 어린애들이 믿듯이 말입니다.

즉 본인이 믿고 있는 그 내용을 주축해서 주체관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들의 주체 내용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돈이 있어야 사람구실하지 그렇지 아니하면 사람취급 못받고 밉상받는다”
가 그들의 주체를 형성하는 신화와 전설이 됩니다.
언어에 의해서 생기는 것은 ‘주관적 형식’입니다.
이 ‘주관적 형식’을 반복하게 되면 ‘절대적 형식’이 됩니다.

바로 인간들의 일방적 착각들이 넘쳐나고 주고 받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뛰어내려 오셨습니다. 언어 속에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의의가 삽입되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절대적 주관 형식’과 싸우시게 됩니다. 모두들 각자 자신이 신인양 된 것처럼 자기가 끌어모은 힘 속에서 자아 판단을 절대화하는 것이 싸우시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방언이란 곧 ‘언약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의미’ + ‘외국어’ 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상에서 뛰어들면서 인간들은 몽땅 하나님 보시기에 외국이 되면 그들의 사용하는 말은 방언입니다.
문제는 그 방언에 복음이 담겨버리면 아무리 자국어로 복음을 말해도 그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알아 먹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은사’의 의의입니다. 즉 언어 형식으로부터 ‘하늘의 의미’로 탈출과 해방과 구원을 성사시킵니다. 바로 이 작업이 ‘사랑의 현실적 작용’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작용’입니다.
즉 인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절대적 주관성을 해체하고 허무하게 무산시켜 버리는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
이 바로 사랑의 현실적 작용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허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체 안에 장착되어 있는 존재 의미는 기존의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그 불온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칭 목자라고 우기면서, 말씀을 전했고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베풀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해도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모른다”하면 결과는 지옥행입니다.

주체 자체가 복음적 의미를 지닌 방언으로 인해 늘 와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뽑기 하듯이 진행됩니다.
결과를 미리 내다볼 필요도 없이 이미 이 특수한 과정 속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절대적 자존심이 와해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주체로 정립됩니다.

그 주체는 곧 ‘이미 죽은 자’로서 인간 세계에 재등장된 삶을 사는 주체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바로 죽음 뒤에서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그 정신은 빌립보서 2: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세상이 복음을 알아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게 바로 구원의 길의 과정임을 수용하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3-07 01:39 

181강-고전 14장 1-2(방언)1603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지난 시간까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사도바울이 방언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사랑으로 다 된 것 아닐까요? 사랑이 있으면 구원되잖아요. 그런데 “사랑을 따라 구하라.” 또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화되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모호하거든요. 이게 구체화될 때, 현실화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방언과 관련해서 실질적으로 우리 성도를 찾아갑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냥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역동적으로, 실제적으로 활동을 합니다.


그냥 우리가 찾아가야 되는 사랑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이 이 땅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하시고, 사역하는 거예요.
리 힘으로 천국 못하고 주님의 사랑이 일하시는 그 결과로 우리가 천국을 가게 됩니다.
사랑이 일한다는 것을 어디서 찾을 수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하니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방언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 걱정이 늘어지는데 제가 말하는 방언은 그 방언이 아닙니다.


단양에 가면 천태종 구인사라는 절이 있어요. 불교역사에 양대 교단이 있습니다. 조계종과 천태종인데 단양의 구인사가 천태종계열의 절인데 신도가 2만 명이상입니다. 천태종의 구인사에서 그렇게 신도를 많이 모으게 된 비결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병 고침, 또 하는 방언이었어요. 몰랐지요? 병 고침과 방언을 통해서 교세가 그렇게 커지게 된 겁니다. 매 가을철이면 특집방송으로 수만 명의 김장을 어떻게 하느냐가 나오는 그 절이에요. 어떤 인간이든 기도할 때 속에서 하고픈 말은 많고 혀는 짧고, 그러니 이것들이 서로 밀고 나오려고 하다 보니 랄라랄라,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혼란스럽게.


사람들은 그걸 방언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에서 그걸 그대로 써먹었습니다. 굉장히 크게 되었거든요. 600억 횡령사건까지 일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돈을 많이 끌어 모았겠어요? 방언할 때 사람들은 그걸 성령 받은 증거라고 봅니다. 병 고침과 방언. 이걸 두고 그들은 ‘싸가지 복음’이라고 해요. 4가지 복음이라는 거지요. 병 고침, 그리고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았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성경에 나오는 방언을 악마가 모독하고 가리기 위해서 방언이라는 것을 그렇게 유포시킨 것 같아요.


병 고침과 방언, 이 두 가지가 그야말로 지금 일하고 있는 주의 사랑을 가리기 위해서, 흐릿하게 만들기 위해서 마귀가 그런 장난질을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쳐온 겁니다. 거기에 전부 말려든 거예요. 불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도 방언이 있고 모든 토속종교에도 방언이 다 있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뭔가 지껄여야 되는데 입은 좁고, 공급되는 것은 많은데 빠져나오는 구멍은 좁아서 자기 맘대로 말이 나오다 보니까 힘들이지 않아도 열 시간도 좋고 열 두 시간도 좋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막 터지는데 자기가 한 말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그런 경험들 다들 안 해보셨습니까? 저는 해봤는데요. 방언이라는 것을 열 몇 시간씩 제가 해 본 사람입니다. 봉화제일교회 성가대자리에 앉아서 밤이 새도록, 집사 때. 이게 모든 종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가 깜짝 놀랐어요. 인간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거, 훈련과 양육을 통해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것, 방언학원 하나 차릴까요? 일 개월 완성 반, 한 달만 하면 다 완성돼요. 할렐루야, 한 천 번만 하면 누구나 방언 다 터지게 되어 있어요. 성질 느긋한 사람은 잘 안되겠지만 급한 사람은 됩니다.


성질 느긋해서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도 할렐루야, 할렐루야, 반복해서 한 천 번만 하게 되면 터집니다. 왜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성령 받은 티내려고, “교회 십년 다니고도 성령도 못 받았나?” 이런 욕 얻어먹기 싫어가지고 경쟁적으로 시도한 겁니다. 이거 사기입니다.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거예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성경에서 사랑으로 구원합니다.
그런데 너무 추상적이에요. 사랑으로 우리를 건지시는데 어떻게 건지시는가?

실질적으로 사랑이 이 땅에 퍼져서 활동을 하게 되면 자기백성만 뽑혀서 나오도록 뽑기를 해요.
애들 문방구에서 하는 뽑기가 있지요. 뽑기 하듯이 사랑으로 뽑아내는 식입니다.
콩나물 물 주게 되면 콩나물이 자라나잖아요. 집에서 콩나물을 키우게 되면 콩나물을 한꺼번에 다 뽑지를 않아요.
키가 자란 콩나물만 쏙쏙 뽑잖아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사랑으로 자기백성을 뽑아냅니다.
뽑아낼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방언입니다.
룰루랄라, 그런 것이 아니고 방언이에요.
그 방언은 사랑의 은사가 구체화되면서 언어, 말, 목소리, 다 언어에 속하는데
그 언어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사랑이 전달됩니다.

사람들은 자꾸 눈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눈으로 보는 식은 초반기에 했고
그 다음부터는 눈으로 보는 식이 아니고 언어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 언어 안에 사랑을 담아서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게 되면,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는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만삭되지 못해서 출산한 정말 바보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부활된 예수님을 예수님 죽음 이후에 만났고 직접 봤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본 것으로 계속 보이지는 않아요.
한 번 보여주고는 그 다음부터는 안보여주주십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한 번 보고 안 보여줘 버리면 “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데 나도 한 번 보여줘.”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산 번 보여주시고 사라졌는데요.
같이 늘 있다면 “우리 집에 와 봐라. 예수님이 계신다. 인사해라.” 이렇게 되겠는데 한번 보여주고 사라졌어요.

누가복음 마지막에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한번 보여주고는 사라져버렸어요.
봤다는 사람만 완전히 바보 되어버렸어요.
“주님을 봤다.” “다시 보여줘.” “그건 안 되는데.” “거봐. 거짓말 하고 있잖아.”
괜히 주님께서 나타나서 그걸 본 사람들만 바보 되고 말았어요.
“난 봤는데.” “또 보여 달란 말이야.” “그건 안 되지.” “거 봐. 네가 거짓말 하고 있잖아.”
이렇게 윽박지르고 나오니까 되게 억울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보이는 부활 말고 말해지는 부활로 바꾸신 겁니다.
말해지는 부활, 말을 통해서, 언어의 능력을 통해서 사람을 건지십니다.
그게 바로 방언이에요, 방언.
방언 안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들어 있고,
그 성령의 역사의 원천은 물이 고여 있는 저수지처럼
사랑이라는 저수지에서 물길을 잡아서 지상에 내려오게 되면
그게 영적은사로서 언어가 되고 방언이 되는 겁니다.
언어로서, 방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부활도 마찬가지지만 그 방언이 한 번 오고 안 오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방언도 폐하고 통역도 폐하고 예언도 폐한다고 했어요.
14장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방언이란 일종의 낚시 바늘 같아서
방언으로 걸려들어서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는가? 원천지로 끌려가는 거예요.
사랑으로 다시 회귀하는 겁니다.
‘아, 방언했다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나 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구원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예언이나 지식이나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을 미리 당겨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이 되니까.
‘나는 천국 가는 사람인가, 지옥 가는 사람인가? 아, 천국 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뭐가 날라 가버리는가?
과정이 날라 가버려요.
하나님은 결과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지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결과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지우지 않아요.
하나님이 추궁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고 과정입니다. 과정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느냐를 보시는 거예요.

과정 속에서 책임을 추궁 받는 거예요.
“그 따위 식의 과정 같으면 결과는 뻔해. 결과를 기대할 필요도 없어. 너는 저쪽이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너는 천국갈래, 지옥갈래?” 그 천국 가는 결과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천국 갈래. 천국 가고말고.”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천국 가는 그 결과는 누구나 아는 것이고, 누구나 탐을 내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가? 그걸 보이라.” 하는 거지요.
그것은 바로 폐할 수밖에 없고 나중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 방언 안에 있어줘야 돼요.

왜? 방언은 사랑의 은사에서 나온 물줄기처럼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런데 사랑도 폐하고 방언도 폐한다는 말은
그 말과 소리, 언어로 이야기하던 그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화가
나중에 열두 사도가 지나고 난 뒤에는 성경으로 확정이 되어버립니다.
이제는 이 말씀 외에 누구나 더 보태거나 빼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에서 제하여버린다고 요한계시록에 되어 있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22:19)
그리고 사도바울의 이 편지가 우리 보기에는 그냥 편지 같은데
베드로후서에 보게 되면,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성령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본문 14장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네가 이 인간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진입이 되었으면
반드시 방언과 관련된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고
“그 방언과 관련된 사람은 그 자체가 사랑의 구체화의 작업에 말려들었다.” 그렇게 정리해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언어로 이야기하셨는가?
언어로 이야기하신 이유는, 언어가 오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자기가 어떤 주체인지 정립이 되게 되어 있어요.
빨리 할 것이 아니니 천천히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은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왜? 결과는 주님 손에 달렸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보고 보라는 것은 네가 어떤 과정에 속하는지를 보고 책임져라, 그 말이지요.
“네가 이런 식으로 살면서 나중에 천국을 넘봐?
웃기지마. 과정 자체가 그쪽에 연결이 안 되었는데 무슨 천국을 내다보는가?”
과정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추궁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이어야 되는가?
방언과 관련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방언이 뭐냐? 하나님의 구원하는 언어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신령한 것 같으면 기적덩어리가 쏟아지고,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고, 그런 것인데
주께서는 평범하게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신령한 것을 전달해주시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예수님께서 구름 위에서 턱 괴고 내려다보시면서 “야, 너 올라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직접 이 몸을 가지고 이 험악한 세상, 인간 세상에 뛰어들었거든요.

뛰어든다는 것은 곧 인간들이 서로 통하고 있는 언어세계 속에 뛰어든 게 돼요.
쉽게 말해서 말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 속에 뭐가 있는가? 하나님의 낮아지심,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그 말에 포함되어 있어요.
하늘나라는 말이 필요 없어요. 말은 인간세계에만 있어요. 왜? 언어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니까.
하늘나라가면 딱 보면 딱 아는 것인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인간세계에서는 왜 말이 필요한가?
각각 자기 주체가 말로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말 덩어리,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덩어리가 인간의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 가지고 그 사람의 내부를 파 들어가고, 헤치고, 분석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중국에 가면 화가 산이라는 산이 있어요. 그 산이 손오공의 고향이라는 겁니다. 거기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손오공이 장난꾸러기랍니다. 손오공이 태어나기 전에는 선녀들이 그 산의 연못에서 목욕을 했는데 손오공이 그 연못에 오줌을 누고 나서 냄새난다고 그 다음부터는 선녀들이 그만 목욕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어른들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전설이라고 여기지요. 만약에 세 살이나 네 살의 어린애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진짜 손오공이 있고, 그 손오공이 진짜 장난꾸러기고, 진짜 장난을 쳐서 오줌을 연못에 눠서 진짜 거기서 목욕하던 선녀가 있었는데 그 선녀들이 냄새난다고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겠지요.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 안주고 364일 계속 울었더라도 그날만큼은 정신 차려서 눈물 닦고 기다리면 지붕에서 굴뚝 타고 내려와서 양말 속에 선물 준다는 것, 물론 굴뚝 없는 집은 그냥 문으로 오겠지요. 하여튼 그런 식으로 애들이 그걸 믿잖아요. 언어를 통한 주체형성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어린애는 그걸 믿어요. 어린애의 주체, 자아는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걸 버리지요.

손오공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13장 10절에 나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이 더러운 세상에 자아로 등장하셔서 자기사람을 솎듯이 뽑아 가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우리를 구원할 때
바로 우리 속에 언어적인 것, 언어, 말과 글, 그것에 반응케 해서 그걸 믿게 해요.

믿게 되면 그것이 그 어린애의 주체가 됩니다.
그 주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말씀을 가지고 계속 언어로 이야기를 해요.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세상일, 육적인 일을 버리고 영적인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언어와 방언을 사용한다는 그 말이에요.
지금까지 전개된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렇게 언어를 사용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
계속 쇠뇌 하듯이 언어를 반복하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자아가 되는데 그걸 주체적 형식이라고 해요.
어려운 말로 주체적 형식. 그런데 주체적 형식,
이 주관적 형식을 계속해서 끌고 나가면 그것이 뭐가 되는가? 그게 절대적형식이 돼요.

자기가 마치 신인 양 행세한다 그 말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까불지 마. 건드리지 마. 나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
그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하면, 주관적 형식을 반복하다 보면 이게 절대적 형식으로 변해서
신도 아닌 게 마치 신인 양 으스대고 산다는 그게 인간세상이에요. 참 더러운 세상이에요.
이게 언어적으로 반복하는 가운데 되는 거예요.
반복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이런 인간이라고 확정되는 겁니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이런 식으로 반복하잖아요.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이게 반복이잖아요.

씩 웃으시는데 ‘양화대교’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그 노래 듣고 있으면 막 서글퍼져요. 진짜 택시가 양화대교에 손님 내려놓고 가는 것처럼.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그걸 듣고 있으면 눈물이 막 나요. ‘그래, 엄마 사랑이 그렇고 아빠 사랑이 그렇다.’ 언어의 반복으로 서글픈 주체가 졸지에 형성되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믿쑵니까? 믿쓥니까?” 믿습니까, 가 아니에요. 쌍시옷을 넣어서 믿쑵니까, 믿쑵니까, 반복이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주관적형식이, 자기들끼리의, 우리들끼리의 교회가
‘믿습니다’를 동의하는 사람들끼리의 절대적 형식, 마치 신이 계시는 단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반복적인 형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타락이에요.
그게 숨겨진 죄악이 되는 겁니다
.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언어로 주어졌다. 방언, 물론 나중에 폐할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 사라지지만 언어로 주어진 그것을 방언이라고 했습니다.

그걸 방언이라고 성경에서 언급을 하는데, 자, 이제부터 중요해요,
왜 그걸 방언이라고 했을까? 왜 언어라고 하지 않고, 말, 문자라고 하지 않고 왜 방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가?
방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방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언급할 때
그 다른 민족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교환하는 그것을 방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민족, 하나님의 약속을 유일하게 받았던 이스라엘민족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백날 죽어도 지옥갈 수밖에 없는, 저주받는 그 민족의 말을 방언이라고 해요. 

방언이라는 말은 누가 하는가? 오직 이스라엘이 성경적 의미, 하나님의 복음적 의미를 지니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방언을 쓴다? 에이, 지옥 가겠네.” 그 이야기에요.
다른 민족은 방언을 쓰지만 우리는 방언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라 그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직접 계시를 받은 우리민족과 그렇지 않는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통해서
우리민족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뽐내고, 단지 뽐내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이 부각되도록,
우리 민족의 특수성, 구원의 특수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민족의 말을 방언이라고 사용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영적으로 알 수 없는 말인데 그 알 수 없는 말이
나중에는 외국 말이라고, 방언이라고 중첩해서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의 알 수 없는 말,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몰라. 백날 이야기해도 다른 민족들은 이 복음을 알아듣지 못해.
왜? 이 말, 이 의미는 택한 우리 이스라엘민족만 알기 때문에.”
그래서 방언이라는 말은 “너희는 들어도 못 알아들어.”라는 그 알 수 없다는 의미 하나,
두 번째는 그것이 외국말이라는 의미,
그 두 가지 의미가 구약에 합쳐져서 방언이라는 말을 한 거예요.

룰루랄라,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무슨 소리 하는지를 모르는 그런 말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복음이고, 하나님의 계시적 의미를 함유해서 그렇게 방언이라는 말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 말을 했던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망했습니다.오늘 본문은 신약이거든요.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에서 그런 소리를 했던, 우리만이 특수하게 구원받은 민족이라고 했던 그 민족이 망했어요.
망했다는 말은
사도바울이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 알 수 없는 말과 외국말의 의미를 같이 합해서 “기존에 형식적으로 방언이라 했던 것에서 해방되라.
거기서 벗어나라. 거기서 빠져나오라. 탈출하라.”라는 그런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룰루랄라, 가 나오거든 빠져나오라는 그 말입니다. 그거 멈춰라, 그 말입니다.
룰루랄랄라라라, 그거 스톱, 멈춰! 그거 멈춰야 돼. 거기서 빠져나와야 돼요. 왜? 그것은 형식이니까.
“그런데 집사님, 그거 무슨 내용이지요?” 무슨 내용인지도 몰라요.
그러니 의미도 모르면서 룰루랄라 하는 그런 식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돼요.
그 빠져나오는 방법을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통역을 하지 않는 방언은 스톱, 멈추라는 거예요.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멈춰라.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성령의 은사를 따라서 방언과 언어적계시적들이, 은사들이 주어졌어요.
“방언을 하는 것은 말릴 수 없지만 통역되지 않거든 즉각 스톱해라.
그게 바로 인간의 타락의 모습이다.”

인간의 말을 통해서 주체가 형성되고 주체가 주관적 형식을 갖추고 주관적 형식이 되풀이되면
이것이 절대적 형식으로, “나는 방언한다. 나는 성령 받았다.”라고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시키는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지?” “의미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멈춰야 된다니까!”
그러니까 멈춰야 되는 거예요. 아무리 그렇게 해도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저쪽 이방나라의 언어를 방언이라고 할 정도로
이쪽 이스라엘에게는 진짜 언어인 말씀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은 망했는가?
방언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창세기 10장 5절에 나와요.
거기에 노아 아들이 나오면서 여러 종족들과 방언들이 나오는데 그 방언이 외국말로 나옵니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그 다음에, 이스라엘만큼은 방언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과 통하는, 하나님과 내통하는 신령한 언어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하겠지요.
물론 그 당시 그 지역의 말이지만 그 의미가 알 수 없는 의미인데 이스라엘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의미고
이스라엘 밖에는 알 수 없는 의미에요. 그래서 알 수 있는 의미,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는 의미가
누굴 공격하고 누구를 향하여 전쟁을 벌였는가? 이스라엘 밖의 그 알 수 없는 쪽을 당연히 침범해서 정복할 권리를 가져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만큼은,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께서 진짜 구원해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해낼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시지요.
물론 신약에 오게 되면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 계시는 그 하늘나라와 이 지상 인간의 모든 나라와 대비해서
하늘나라는 진짜 참 계시고 지상의 모든 나라는 뭐가 되느냐 하면, 방언이 돼버려요.
의미도 모르는 채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이 왔을 때
주님께서는 각종 외국 말, 그 방언을 하게 하되 거기에 의미를 담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의미를 담아서 외칠 때 그것이
구약에서 실패했던 그 권리, 다른 나라, 민족을 방언이라고 외쳤던 그 권리가 신약에 와서는
새로운 교회가 “야, 방언이라고 이야기하는구나. 외국말로 이야기하는구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권한을 확보하게 됩니다.

복음을 모르면 그것은 방언하는 나라가 되고
그들 말에 복음을 실어서 전달하게 되면 그 방어했던 사람들 속에 있는 복음 때문에 같은 하나의 이스라엘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새 방언’이라고 하지요. 사도행전에 나와요. 사도행전에 나오고 또 마가복음 제일 마지막에도 나와요.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새 방언’ 방언이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 쓴다? 특수한 하나님의 구원을 확보한 특수단체가
그렇지 못한 다른 단체에게 전도하거나 선교할 때 그들이 쓰는 언어를 방언이라고 하고,
복음의 의미를 담고 그들에게 전달할 때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복음을 실어서 전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뜻이에요.

형식에서 벗어나서 형식에서 해방되라는 그 말입니다.
의미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그 의미가 뭐냐? 바로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 사랑의 완성은 예수님의 죽음 이전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에게 방언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전달하는 것은
“너도 네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에서 살다가 이제는 그런 주체 그만하고,
그 주체는 죽고 네가 죽고 난 뒤에 저수지에 마련된 구원의 용서의 복음을 가지고 네가 지금 말할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를 죽이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그게 복음이잖아요.
그 복음의 내용을 담는 거예요. 어디에? 그들이 쓰는 언어, 한국말에 담는 겁니다.
그러면 한국말은 방언이 되면서 그 방언을 하는데 보통 한국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언어에는 복음이 없어요.
복음이 없는데 거기에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하나님의 그 복음의 내용을 담아버리면
한국말을 사용해도 그것은 하늘나라 복음을 주고받는 것이 돼요.
그것은 사랑의 구체화적인 전도고 선교가 된다 그 말이에요.

이것은 곧 기존의 ‘내가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는 그 주체자체를 십자가 복음 앞에서 이미 포기한 것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이 없다고요.
우리가 “제가 천국 가는데 이렇게 손을 듭니다.” 이런다고 해서 천국 보내주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천국 가고 싶어 한다고 해서, 그 결과를 내가 선택했다고 해서 그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묻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결과는 주님의 몫이에요. 결과는 주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다만 우리가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어느 쪽으로 가라고 운명이 확정되었느냐,
하는 그 문제는 결과 이전에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뭐냐? 바로 방언이라 했잖아요.
제가 설교 처음에 “결과 말고 과정에 대해서 책임추궁당합니다.” 하면서 그 과정은 방언을 통해서 확인한다 했을 때
평소에 방언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걱정이 늘어졌을 거예요.
‘방언 받는 기도원이라도 가야되는 건가?’ 이렇게 걱정했는데 제 설명을 죽 듣고 보니 그것이 아니지요?
어떤 언어적 형식에서부터 벗어나야 되지요. 언어적 형식에서 벗어나서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해요.
그 의미가 빌립보서 2장 8절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나오는 것이 뭐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 내용이 바로 한국말로 사용하는 그 언어에 담겨있을 때
그것은 신령한 은사를 받아야 가능한 놀라운 기적적인 현상이 된다는 그 말입니다.
룰루랄라, 그 이상한 말 지껄이는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 그게 신령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은 그 방언을 담고 있던 그 내용이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우리 모든 인간은 그 앞에서 죽은 자, 산자가 아니고 이미 죽어버린 자다.
쉽게 말해서 우리 주체는 죽은 거예요.

오늘 말이 참 다 어렵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다시 할게요. 천천히 하겠습니다. 손오공의 고향은 화가 산이다. 화가 산의 손오공은 장난꾸러기다. 손오공이 태어나기 전에는 선녀들이 화가 산 연못에 목욕하러 왔었는데 손오공이 장난으로 연못에 오줌을 누는 바람에 냄새 때문에 선녀들이 그만 연못에 발길을 끊었더라. 어릴 때, 성장과정에서 어릴 때는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요. 세 살이나 네 살 때 “나는 선녀 보고 싶어요.” 하기 마련이다 그 말이지요.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직접 봤으면 좋겠다. 꼭 내가 잘 때만 왔다 가더라.’ 잠시 깜빡 잠들었을 때 선물주고 홱 갔더라. 왜? 다른 집 애들도 선물 줘야 되니까.

그 말을 애가 네 다섯 살 때, 그렇게 믿을 때 그게 그 애의 주체에요. 그런데 그 애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어떤 주체입니까? “사람은 돈 없으면 못살아. 돈을 벌어야 성공한 거야.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아파트에 살고, 그게 사람대우 받는 거야.” 이게 철딱서니 없다는 것을 언제쯤 알까요? 늙어죽는다고 알겠습니까? 이게 확보된 주체인데. 돈이 최고라고 누가 이야기했던가요? 바로 내가 살아오면서 마치 화가 산이 손오공의 고향인데 거기에 선녀가 있었다는 그런 것이 어릴 때는 전부인 줄 알아요.


하지만 크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유입되는 남들의 이야기가, 남들의 소리와 언어와 교육방법이 지금 나의 주체로 형성이 되고 겹겹이 우리를 싸고 있습니다. ‘그래, 돈 없으면 쪼다 되는 거야. 돈을 가져야 인간행세 할 수 있고 갑 질을 해. 돈 없으면 서러움 받는 거야.’ 이게 계속 누적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금의 우리의 주체고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말이지요. 그 세계 속에 예수님이 낮아져서 뛰어들어 왔다는 그 말입니다.


뭘 가지고? 하늘나라 복음을 가지고. 그러니 우리는 하늘나라 보기에 기껏 구원받지 못할 방언이나 주고받는 이방나라에 속한 겁니다. 예수님이 뛰어들기 전에 계시가 미리 앞당겨 뛰어든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옛날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지요. 이제 연결이 좀 되십니까? 그 이스라엘나라가 하는 말이 “저들은 방언을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은 진짜 계시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할 즈음에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를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들까지도 이 귀한 복음을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에스겔 3장 5절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요 예레미야 5장 15절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겔 3:5-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렘 5:15)

이미 구약부터 방언이라는 말을 할 때 그 방언이라는 말 자체가 단지 외국말이 아니고, 이쪽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방언이에요. 그쪽 입장 “너희들은 지옥가야 돼. 우리는 구원받을 거야.”라는 그 의미인데 그렇게 생각했던 그 나라가 망해버려요. 망하면서 그 의미가 어디로 빠져나오는가 하면, “방언이나 하는 주제에! 지옥이나 갈 주제에!”라고 무시했던 그 사람들 속에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복음이 성취 성을 가지고 삽입해 들어가는 겁니다.

삽입해 들어가면서 이 고린도교회, 이방나라에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방언, 복음이 들어 있는 말을 주고받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처음에는 외국말, 알아듣지 못하는 의미를 가지고 그들은 외국말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통역이 붙어야 돼요. 통역이 붙어서 “아, 그 뜻은 이런 뜻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은 본인이 해놓고 의미는 본인이 모르니까 통역하는 은사를 세트로 붙여줘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제가 수년전에 서울 방배동의 백석대학교에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해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를 했어요. 

그 자리에 한국에서 최고의 학자라고 쳐주는 김영한교수가 앉아 있었어요. 성가대자리에 따로 앉아서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어요. 지금 나이가 한 70이 넘었을 거예요. 나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해야 되는데 제가 30분이라는 그 짧은 시간에 성의를 다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끝나고 나서 하는 논평시간도 아니고 하고 있는 도중에 하는 소리가 “계룡산에서 왔는가?” 그런 소리를 했어요.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제가 분명히 한국말을 했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고 한 겁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방언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방언이 터진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 통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통역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는데 해봐야 먹히지도 않고. 역사 없이 무슨 구원이 되는가? 나중에 그래요. 역사 없이 무슨 구원이 되느냐고. 역사 속에 비역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역사가 끝나야 비로소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중첩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몰라요.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와 함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보이는 이 세계에서 죽어야 천국 간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천국의 능력은 이미 복음이라는 언어로, 방언으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그 말은 뭐냐?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남들 보기에는 살아 있지만, 살았다고 우기는 사람 따로 있고, 이미 죽었다가 살았다는 사람이 따로 있고, 이 두부류의 사람이 함께 섞여 있다는 말이지요.


왜냐? 새로운 언어가 주어지게 되면 언어에 의해서 주체가 바뀝니다

십자가 복음이 있는 사람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산다.”는 주체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언어가 인간의 주체를 바꿔줘요. 화가 산 이야기 또 할까요? 복음의 십자가가 들어 있으면 다른 사람은, 어릴 때는 선녀 이야기나 손오공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돈이 있어야 사람다운 삶이지.” 하는 새로운 환상, 새로운 착각에 빠집니다. 그런데 거기에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십자가용서가 있어야 이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이지.” 하는 새로운 주체로 바뀌어버려요.


대화가 안 되지요.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 한쪽은 “돈 없으면 너 인간 아니다.” 이쪽은 “예수님께 용서 못 받으면 너는 사람 아니고 괴물이야.” 둘이 싸우다 볼일 다 봐요. 말이 안 통해. “마치 선녀는 없는 거야.” 하면 어린애는 마구 울면서 “왜 선녀가 없어? 이 책을 봐. <나무꾼과 선녀> 이 책에 보면 다 있는데.” 제목도 나무꾼과 선녀, 선녀 옷 훔쳐서 숨겨놓고 함께 산 나무꾼 이야기. 요즘 제가 나이가 들었는지 동화가 서로 헷갈려요. 은도끼 금도끼, 그 이야기하고 나무꾼과 선녀, 그거하고 막 헷갈려서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선녀가 있는데 왜 없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나중에 크면 다 알아.” “엄마, 내가 크면 선녀가 다 없어지는 거야?” “아니, 선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돈이 우선이고 돈만 된다면 선녀도 지어낼 그 정도 인간이 될 거야.” 이런 식으로, “돈이 전부가 되는, 그저 권력과 힘이 전부가 되는 인간으로 변할 거야.” 하지만 그 인간, 돈으로는 천국에 못갑니다. 이게 문제에요. “나 천국에 가고 싶어요.” 아니, 결과에 대해서는 손대지 마세요. 과정을 말해야 됩니다. 이 과정 속에서 네가 옛날에는 이랬었는데, 돈 없이는 못산다, 돈 없이는 인간도 아니라고 하면서 살았었는데, 그것이 성경을 보고 난 뒤에 

‘주님의 사랑으로서 천국 가는구나.’라고 주체가 바뀔 때, 말씀을 통해서 바뀔 때, 

그 사람은 천국 가나 안가나 볼 것도 없이 그 바뀐 과정을 통해서 천국에 확정된 사람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매일 같이 확정해야 돼요.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이렇게 살다가 끝나지 싶어. 남들 그렇게 사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왜? 개나 소나 다 똑같으니까. 다 그렇게 사는데 저들을 따라가면 안 될 것 같아요. 저래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고급아파트, 빌딩, 부동산, 권력, 승진,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요. 그것 말고, 천국은 그런 식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거든요.

성경 왜 있습니까? 목사가 되어서 병을 고친다, 기적을 베풀었다, 설교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주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설교도 하고 목회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너 누구지? 나는 너 모른다.” 

병고치고, 설교하고, 기적을 베푸는 이것이 천국 가는 그 과정의 전부가 아니에요. 

언어입니다. 복음입니다. 무슨 복음이 나오는가, 그거예요. 십자가복음, 사랑이 전부에요. 

오직 십자가사랑만 나오면 교회 그 까짓 거 없어도 괜찮아요. 그거 없어도 상관없어요. 

왜? 예수님이 사랑으로 뽑기 했기 때문에. 교회로 뽑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뽑아요. 

교회의 직분으로,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되어서 뽑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능력으로 뽑아내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주체 안에 잠겨 있어야 되고, 있으면 그것이 늘 나오지는 않지만 어떤 결정적인 순간들에 툭툭 나와요. 보증 잘못 서서 돈 천만 원 날렸다. ‘내가 그 돈 몇 푼 때문에 사는 인간이 아니지. 내가 복음 때문에 살지.’ 그런데 한 5천 더 날렸다. ‘5천? 그 정도야.’ 한 5십억 날렸다. ‘5십억 정도쯤이야.’ 물론 그렇게 되면 참 곤란하지만, 어쨌든 이 세상의 남들처럼 안 되도록 주께서 조치하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부활의 기적입니다. 자신이 다른 주체로 달라졌다는 것.

끝으로, 누구나 인간은 주관이 있어요. 자기자존심이 있어요. 그런데 그 자존심은 항상 절대적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나 잘났어. 나 믿음 좋아. 나 복음 알아.’ 반드시 자기가 자신을 신인 양 여깁니다. 그것이 날마다 계속되는 이 하나님의 복음이 담긴 방언의 역사, 우리는 외국어잖아요. 하늘나라에서 보기에 이게 남의 나라 아닙니까? 이 외국 방언을 쓰는 우리를 통해서 실패로 끝나요. 나의 이 절대적 주체가, 이 현실이 날마다 실패로 끝나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어떻게 굴러도, 어떻게 뒹굴어도 실패입니다.

제가 지난 3월 1일에 어떤 청년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어떤 청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복음은 알겠는데요. 참 허무합니다.”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직 젊은 30대인데 허무이야기가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철이 났다는 이야기거든요. “참 허무합니다.” 허무해야 돼요. 그게 하나님의 기적이고 그게 작용입니다. 물론 허무로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그 허무를 유발시킨 그것이 나의 최종점은 천국이라는 것, ‘아, 이 땅에서 내가 허무해야 될 나그네라.’ 하는 사실을 결부해서 오히려 기쁨으로, 허무하게 된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게 다른 사람과 차이나는 하나님의 특수한 구원의 사랑인 것을 우리가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허무라는 말은 자기 절대적주관이 깨졌다는 말이거든요. 

절대적주관이 깨지면서 깨어지는 그 과정 하나하나가 감사와 감사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몸이 내가 다듬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환경이 그렇게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환경이 수상한 환경, 더러운 환경,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환경이고 지옥인 것을 

왜 그동안 우리는 알지 못했는지. 이제는 깨달아서 

이 가운데서도 오직 사랑으로만 구원된다는 사실을,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