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여름수련회 7강
이제 사사기의 윤곽이 드러났어요.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주신 자기 백성을 때릴 때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끼어들지 말고 그 얻어맞는 신비로움에 감격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주신 후 언약대로 살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고 마구 때릴 때 그게 신비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분명하네.’ 그러니까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화가 났을 때 모든 학생을 다 때릴 수는 없고 대표로 반장을 때릴 때, 다른 학생들은 주눅이 들면서도 ‘우리 선생님의 성격이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그런 감격이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구경하되 개입하지 마세요. 사사기에 끼어들지 말고 구경을 하되 그 주시하는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끼어들지 말라는 말은, 이방인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누구에게 조종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어요. 왜냐? 주께서 다 해내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매를 맞잖아요. 맞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은 아프겠지만 우리는 신비로운 거예요. ‘아,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하고 느끼는 거죠. 즉 지상의 육적인 세계와 다른 초월적 세계를 온 몸으로 보고 있다는 즐거움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문제는 사사기 이후에 또 매 맞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일 수도 있고 여러분일 수도 있지요. 만약 제가 매를 맞는다면 제 주위의 사람들은 또 신비로움을 경험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매를 맞는다고 해서 끼어들지 말고, 주님께 박수를 치면서 그냥 관람만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자기 증명을 그렇게 해내기 때문입니다.
끼어들지 말기, 조정 당하지 말기, 훈련 받지 말기, 철저히 관람하고 구경하기. 이것이 바로 말씀 앞에 서있고, 말씀 속에 있는 모습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프게 때리시는데 때리는 기준이 있습니다. 사사기 7장 20절을 보면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나오는데, 왜 칼은 등장하지 않고 횃불과 항아리, 그리고 나팔이 등장합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밤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언약 준 자들을 반장으로 취급하셔서 매우 치십니다. ‘네가 언약을 받고도 그런 짓을 해!’ 하면서 매우 치면, 우리는 울타리 건너편에서 매를 맞는 장면을 관람하면서 ‘아, 저게 진짜 하나님이야.’라고 발견하게 됩니다.
진짜 하나님은 ‘밤의 소리’로 나타나십니다. 본문에서는 나팔이 나오는데, 나팔 소리는 지금 하나님이 여기 함께 계신다는 신호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 때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밤에 활동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보면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밤에 구원된 것은 어린양을 통한 이스라엘의 장자들이지요. 이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 소속이 아닙니다. 끝났어요.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장자를 잃어버린 것은 같은 입장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은 그냥 죽었고, 이스라엘의 장자는 죽어야 하는데 소속이 바뀌어 살려주시는 겁니다.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고 했지요. ‘초태생은 다 내 것이고 나는 그들만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들만이 대신 죽음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밤의 원칙이 출애굽의 원칙인데, 이 원칙이 출애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 있는 한 그들은 매일 이것을 되풀이해야 됩니다.
‘우리는 죽어야 되는데 장자라는 이유 때문에 살았어.’ 다음 날이 되면 또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장자라는 이유 때문에 살았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그냥 사는 사이가 아니고 중간에 어린양을 매개로 해서만 ‘우리는 죽어야 되는데 그분 덕분에 살았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인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후에는 필히 예수 안에서 의인 된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으로 예수 믿게 하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 훈련 받을 필요가 없고, 누구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자기가 자기를 조종하지 말고, 훈련하지도 말고, 징계하지도 마세요. 몸조심 하지 마시고, 행동 절제하지 마세요. 그것은 긴장의 삶입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조종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구원을 얻겠다고요? 그러면 어린양의 죽음이 누락되고, 천국 못가는 사람이 됩니다.
항상 어린양의 죽음이 유지되려면 스스로 자기 행동을 조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신비로움에 감격합시다. 낮이 아닌 밤에 왜 공격을 합니까? 비겁한 것 아닙니까? 미디안 군사가 13만 5천명 이었습니다. 300명과 13만 5천 명이 싸웠습니다. 13만 5천은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칼을 든 자 12만 명이 죽었고 1만 5천명 가량이 남았다고 했기에 계산해서 나온 숫자입니다. 사사기 8장 10절에 나옵니다.
전쟁은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구축된 질서가 밤의 혼돈에 이길 수 없는 이유는, 밤에 나온 사람만 천국에 살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하필 밤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죽었는데, 그 죽음을 효과 있게 만들려면 죽음을 근거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걸맞은 새로운 시간을 구축해야 합니다.
간추리면 이렇게 됩니다. 천국은 천국 주인공의 영광에 합당한 규모로 영광스러워집니다. 천국의 주인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공로에 누가 되지 않고 흠이 되지 않는 조건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을 빛내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현재의 하늘과 땅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임시적으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니까 그때부터 이 세상은 갑자기 탄식하고 신음하며 우리에게 저주를 안겨주는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지요. 이 세상은 주인이 잠시 방문했다가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기에 더 이상 이 세상은 별 볼일 없고, 우리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 곳이에요. 안 살아도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것을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살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이 땅에는 없는 거예요. 여기에 없다는 것은 이 땅의 것과 비교 대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이 달라지면 됩니다. 낮의 사람에서 밤의 사람으로 바뀌면 됩니다.
‘죽은 나를 어린양을 통해 살려낸 그 밤을 나는 사랑합니다. 여호와의 밤이 나의 구원이요, 나의 소망입니다.’ 기드온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횃불은 밤을 의미하고, 나팔을 부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밤의 소리’지요. 이것은 옛날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정리를 하면, 우리 대신 반장이 매를 맞는데, 매 맞는 이유는, 출애굽의 반복에 근거해서 ‘너희는 약속의 땅에 살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심하게 때리는데, 그 낯설고 이상한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울타리 밖에서 박수를 치면서 감격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에 끼어들지 마세요. 우리의 반장 이스라엘이 매를 맞을 때 그것을 보고 때리는 하나님과 맞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반복적인 관계성을 발취해 내면 우리의 건질 것은 다 건진 것입니다. 한결 속이 편하지요? “목사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식으로 끼어들지 마세요. 그냥 지켜보세요. 프로야구 관람하듯이 그냥 보기만 하세요.
사사기의 처음은 놀랍게도 마지막에 나와요.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멸절되는 이야기가 시대적으로 보면 사사기에 초반에 벌어진 일입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제사장 비느하스가 아직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왜 때리시는가? 무엇을 근거로 때리고 그들은 왜 맞는가? 우리는 지켜보면 되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하면 됩니다. 이런 기분으로 수련회 오는 거예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한 적이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않지요.
그러면 사사기에서 때리시는 근거가 뭔가? 레위 언약입니다. 레위 언약은 하나님과 직접 만나면 죽으니까, 죽지 않게 하기 위해 매개자를 세우는데, 13지파를 세워 그 중 1지파를 독자적으로 빼내서 1지파가 12지파를 보호하는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그것이 레위 지파고 하나님은 레위 지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라기에서 말씀하셨어요.
이 레위 지파가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병이어에서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한 분에 의해 주어진 것인데, 그 한 분의 역할을 레위 지파가 담당한 겁니다. 지난 대전 강의에서 언급했는데, [불편한 여정]에도 나와요. 레위 지파가 지존의 집합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부분집합으로 들어가서 부분이 전체보다 더 많은 무한을 보여준다는 수학적 이론을 들어 설명했어요.
레위 지파가 여기에 속해 있을 때, 그들은 경계는 있지만 한계가 없어요. 작다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무한이 담겨 있고, 초월이 담겨 있고, 천국이 담겨 있습니다. 레위 지파는 42개의 성읍과 6개의 도피성에서 사는데, 레위 지파는 12지파에 골고루 흩어져 있습니다.
12지파의 운명은 레위 지파에 달려 있는데, 레위 지파의 제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면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게 되고, 제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레위 지파 중에도 특별히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집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위 지파가 살아야 이스라엘이 산다. 따라서 12지파는 소산물 중 10분의 1을 레위 지파에게 주라.’고 하셨지요. 이것이 바로 십일조인데, 십일조의 의미는 10의 9는 자신들이 갖고 나머지 10의 1만 레위 지파의 것으로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12지파)이 소산물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이 레위 지파를 살려주심 때문이기에 모두가 레위 지파 때문에 얻게 된 것임을 고백하면서 10의 1일 내게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는 첫 것을 드립니다. 맏물이지요. 맏물(장자)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의미를 담고 맏물을 드립니다. ‘레위 지파야, 당신들이 잘해야 우리가 산다.’는 식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거지요.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아들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의 형상을 입어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천국에 예수님 신부의 자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지요. 신부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단장을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도 다 이런 것입니다. 관람만 하는 우리들에게는 이게 이상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본래 하나님이 만든 교실에 있는 자들(이스라엘)에게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사야 말씀에는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나의 신부였다. 그런데 왜 바알이라는 다른 남편을 섬겼느냐?’고 막 나무라지요. 그럴 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말씀을 하고 계시네.’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여분의 자리가 생겨 이방인에게 넘어왔어요.
우리한테 넘어 온 것입니까? 아니요. 그럼 누구한테? 주님께서 지목한 사람에게 넘어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가 구원 받았지?’ 하면서 철조망 가까이 가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매를 맞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신비를 느끼자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사기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때리시고 이스라엘은 맞아야 하는가? 십일조를 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레위 지파 사람들이 왜 떠돌아 다녔을까요? 자기 땅을 분배받은 12지파들은 과거의 약속(10의 1을 레위 지파에게 드리라는 것)을 기억지도 않고 살았어요. 이것이 약속의 땅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매일 죽어야 매일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고, 그러니 당연히 제사가 제대로 드리질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주변의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물어뜯도록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만 관할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 땅답게 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도 같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방 나라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물게 하는가? 십일조를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모두 다(10의 10)를 내고 10의 9를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취지인데,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 때 12지파가 땅을 분배받았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가 생겼습니다.
자기 소유가 생긴 후에 그들은 애굽의 사고방식을 약속의 땅에 심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의 특징은 힘이 있어야 사는 나라입니다. 힘이 없으면 인간 취급을 못 받습니다. 돈 없으면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옛날에 잠시 신비롭고 이상한 일이 벌어져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왔지만, 일단 내 이름으로 등기 이전이 된 상태에서 나 땅에서 내 노동으로 결실한 것의 10%를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제사만 드린 자들에게 내놓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잘 사는데 왜 냅니까? 그래서 잘 내지 않고 살다가 이방 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다른 나라 백성들을 보니까 자신들의 요구를 신이 다 들어주고 결핍을 채워주는 멋진 신을 섬기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사기 17장 1-2절에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들이 어머니 돈을 훔쳤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훔쳐간 것도 모르고, “내 돈 훔쳐간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고 선포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들이 찝찝해서 어머니께 사실을 알렸어요. “어머니, 내가 그 돈을 가져갔습니다.” 하면서 그 돈을 어머니께 돌려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말을 바꿉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면서 아들이 돌려준 돈으로 아들을 위해서 신상을 만들어서 저주 대신 복을 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과 어머니가 주고받는 이야기의 내용이 뭡니까? 잃어버린 내 인생 보상 받기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울타리 옆에서 구경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우상이 더 정감이 갑니다. 나의 잃은 것을 채워준다면 아낌없이 바칠 용의가 있습니다. 왜냐? 일단 받고 시작하니까요. 30배, 60배, 100배 받고 시작하는데, 최소 30배를 받는다 해도 여기에서 10% 드려도 엄청나게 남는 장사잖아요.
내 헌금과 기도 노동에 대해 즉각 보상해 주는 신이 우리 본성에 적합한 신입니다. 돈 놓고 돈 먹기. 이건 큰 불만이 없고 만족할 수 있어요. 우리는 다 타짜 기질이 있기에. 그런데 주님은 ‘아무것도 하지 마! 죽은 너를 내가 살릴 게.’ 라고 하십니다. 아무 가진 것이 없을 때는 굉장히 복음처럼 들리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내 것으로 여길 때 이것에 대해서는 주님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잖아요.
우리의 관심은 내 재산의 증식에 있는데 주님은 우리의 주체에 대해 거론합니다. “너는 죄인인데 내가 용서해 줄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내 관심에 대해 응답하는 신(우상)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미가가 지금 다른 신을 섬긴 것입니까, 여호와를 섬긴 것입니까? 여호와를 섬겼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이여, 우리가 당신께 성의를 표시했으니까 당신도 우리에게 성의를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이 그 시대의 대세가 된 여호와 종교였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레위 지파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사가 필요 없어요. 십자가가 빠져 있어요.
십자가는 없고 ‘누가 더 힘이 세냐? 누가 더 많이 가졌나?’로 경쟁하는 이스라엘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어떻게 했겠어요? 울타리 밖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약속의 땅으로 이끈 이스라엘을 어떻게 되돌리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기들 끼리 싸워서 다 망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가짜였음을 들통 내는 것입니다.
가짜가 가짜인 것을 알 때 비로소 제사의 의미는 효과가 극대화 됩니다. 제사 드릴 정도로 나는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길 때는 제사가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저를 버려두시면 저는 가짜 신자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습니다. 반장을 때리듯이 저를 때리는 신비를 맛보게 하옵소서.’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그 대표기도가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내 집을 달라고 기도하는 쌍둥이의 기도를 고쳐야 해요. “내 집은 없게 하옵소서.” 이렇게 고쳐야 해요. 그러면 주님은 “‘나는 너의 뜻대로 안 하고 내 뜻대로 한다.’고 하시면서 집을 주시겠지.” 이런 생각으로 기도할 수 있는데, 이런 꼼수는 주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빛과 소금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주님 대답은 ‘꼼수 쓰지 마! 네가 뭘 노리고 그런 기도를 해?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왜 갑자기 평소 너답지 않은 기도를 해. 그냥 자연스럽게 죄 짓고 살아. 그것이 너에게 맞아.’ 괜히 겸손한 척하고, 순결한 척할 필요 없어요.
훈련 받을 필요 없고, 조종 받을 필요 없습니다. 밤에서 나온 힘이 낮의 질서를 붕괴해 버립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의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해요. 모두가 자신이 좋아하는 신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우상 섬겼다는 이유로 매를 때리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우상인가 아닌가는 섬기는 사람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으면 그 신은 참 신이고, 남이 믿는 신은 우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끼리는 신비로운 감격이 없는 거예요. 우상을 섬겨도 때리는 분이 없고, 절에서 기도해도 아무렇지 않고, 처음에는 십일조 안 하면 큰 벌이 내릴 것 같아 불안하면서도 돈이 아까워 안 했는데 이제는 불안한 마음도 없어요. 십일조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니까.
십일조를 3년간 안 했는데 오히려 집안은 더 평온하고 사업도 잘 돼요. 휴지처럼 잘 풀리는 집이에요. 그동안 괜히 불안해했어요. 전도 안 하면 큰일 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안 생겨요. 처음 교회 출석할 때는 예배시간 10분 전에 나왔는데 많은 교인들이 11시 5분, 또는 10분에 오는 것을 보고 자신도 조금씩 시간이 늦어져서 다른 분들과 같이 됩니다.
이미 내 소유가 되었는데 추가적인 엄살을 피울 이유가 없어요. “집사님은 왜 기도 안합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해요. 이게 무슨 뜻이죠? 나는 욕심이 없기에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고, 그러니 기도를 안 한다는 뜻입니다.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나중에 빼앗기면 “주님,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동업자끼리 왜 이러십니까?” 하고 달려듭니다.
지금 자신에게 아무 일 없기에 평화로운 시절이라고 안심하는 분이 있는데, 평화로운 시절이 죄가 숙성되는 시절입니다. 벌을 받기 위한 숙성도 되지만 내 자신의 본성이 무르익는 시간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사들은 힘들어요. 구원 되는 시간도 짧고,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표현이 점점 자주 나옵니다. 사태가 긴급하다는 뜻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를 해야 먹고 살 텐데 십일조를 안 하니까 먹고 살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백성들은 이미 땅을 소유했고 안정된 삶을 누리기에 제사장을 찾지도 않아요. 오히려 주변 나라 신이 마음에 들어요. 왜냐? 자신이 가진 것을 지켜 주니까. ‘안심하고 맡기면 10% 덧붙여 줍니다.’라는 투자회사 광고처럼 나오는 신이 주변에 많아요. 그러니 여호와께 십일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지요.
레위 지파가 없어지니까 12(12지파)+0(레위 지파)에서 0이 소멸해 버린 거예요. 0이 소멸하면 12는 가짜가 됩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간 매체가 소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이 애굽이 된 거예요. 주님은 자신의 언약을 자신이 회수하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보낸 자가 12명의 사사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사들의 면면을 보면 가관입니다. 사사들이 겁을 먹고 있어요. ‘저는 못합니다. 안 됩니다.’ 이렇게 나왔어요. 그러니 주님은 ‘너 같은 인간도 약속의 땅에 살 수 있음을 내가 출애굽 시킨 원리와 결합시켜서 또 다시 보여 줄게.’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입니다.
일단 짐승들에게 물리게 합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 사람이 다 되었으니까 초반에는 힘으로 버팁니다. 조공을 바쳤다고, 신하가 되어 섬기겠다고 하고 다양한 방법을 섰는데 하나님이 계속 짐승들(이방 나라)을 부추기니까 그들이 더 거세게 달려듭니다. 심지어 미디안이라는 집단은 공물을 받고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를 진멸하겠다고 달려들었어요.
‘진멸’이란 단어를 예전에 누가 썼습니까? 하나님 이름이 동행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을 진멸해야 하는데 이제 입장이 완전히 바뀐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은 부르짖어요. 사사기 2장 4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 땅 거민과는 상종도 하지 말고 언약도 세우지 말라’고 했지요. 이 땅은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의 공로와 희생이 뿌려졌기에 주의 명예가 걸린 땅입니다. 천국은 우리 땅이 아니에요. 주님의 명예가 걸린 땅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신 공로가 영원토록 지속되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너희들이 그들을 쫓아내야 하는데 쫓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너희의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이 너희의 덫이 될 것이다(삿2:3).’라고 여호와의 사자가 말한 후에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울었어요. 왜 웁니까? 부동산이 아까워서 우는 거예요.
역사의 시작은 자식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땅을 소유했다는 말은, 사람은 땅이 있어야 사니까 ‘내 식구는 살아야겠다.’는 것이지요. 이건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격 받으니 울게 된 것입니다. 생존에 큰 위협을 느낀 것이지요. 이 때 하나님은 사사를 보냅니다.
3징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고 했습니다.
옷니엘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방 나라에게 이스라엘을 치라고 붙이시고, 이제 옷니엘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구산 리사다임을 물리칩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 지금 약속의 땅을 통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손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제사로 묶었어요.
이스라엘이 이런 혜택을 입었다면 그들은 마땅히 제사가 유지되도록 조치해야 하는데, 자기 소유가 생기니까 십일조나 제사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어요. 그러니까 에브라임 지역에 살던 레위 사람의 첩이 친정 베들레헴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여자가 친정에 간 것은 이유가 있지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제사를 원치 않으니 레위 사람들은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해요. 팔리지도 않는 상품을 계속 쥐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묶은 띠가 끊어진 거예요. 레위 지파 없어도 우리끼리 잘 산다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찾아 처가에 갔는데 3일을 처가에서 쉬었다가 첩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장인이 하루 더 쉬었다 가라고 권해서 하루 머물렀는데, 다음 날 또 하루 더 쉬었다 가라고 해서 결국 5일간 처가에 머물게 되었어요. 마지막 떠나는 날도 오후 늦게 출발하게 되었어요. 장인이 계속 붙잡으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일찍 출발했으면 베냐민 지파 땅을 넘어 자신이 사는 에브라임 지역으로 갈 수 있었는데 늦게 출발하다 보니 중간에 날이 저물어 하루를 숙박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그 지역은 예루살렘 인근 여부스 땅인데, 여부스는 가나안 원주민인데 아직 그들을 몰아내지 못했기에 같이 살고 있었어요.
여하간 이방인이 거주하는 여부스에서 숙박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좀 더 길을 가서 기브아로 갔어요.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의 땅입니다. 이 레위인이 아직 순진해요. 이방인이 사는 곳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지역이 더 안전하다고 여겼지요.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말씀이 있으니까 자신을 영접해 줄 것으로 여긴 것이지요.
사람이 소유가 생기면 소유를 방해하는 요소는 다 제거해 버립니다. 오죽했으면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부자가 아니어서 이 말씀이 크게 안 와 닿을 거예요.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이 짐이 됩니다. 자기 선택이 자신을 옳아 매요. 그리고 그곳에서 탈출할 수 없어요. 왜냐? 그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기브아에서 한 노인의 집에 하루 숙박하려고 하는데 그 지역 불량배들이 찾아와서는 ‘너희 집에 찾아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욕보이겠다.’고 해서 노인이 당부하기를 ‘제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불량배들이 말이 듣지 않았고 결국은 제사장이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주었는데 밤새 그 여자를 윤간해서 결국 그 여자는 죽고 말았지요.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레위인의 첩이 죽어 있었어요. 레위인이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살던 지역으로 왔어요. 그리고는 엽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시체를 12토막을 내서 각 지파에 한 토막씩 보냈어요. 왜 이렇게 했지요? ‘베냐민 지파 사람이 내 첩을 강간하고 살해했는데 과연 이런 행동을 이스라엘 다른 지파가 용납할 수 있습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베냐민 지파 사람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와 함께 분개해 주시고, 그들이 문제 없으면 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여기겠습니다.’ 이런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사기 끝부분에 나오는 내용인데, 시간적으로 보면 사사기 처음부분에 와야 됩니다.
사사기 21장 10절에 보면,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다 죽었어요. 왜 죽였는가 하면, ‘모든 지파 사람들이 다 분개할 때 왜 당신들은 분개하지 않았어? 그러니 너희들은 죽어 마땅해.’ 그래서 그들을 다 죽였습니다. 베냐민 지파 죽인 것 말고 따로 이들을 진멸해 버렸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에 끼어들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신비롭게 관람하면 됩니다. 스스로 갑질 해서 스스로 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저렇게 일하시는구나.’ 신비롭게 보면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