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40711a (경건의 비밀)―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3장 14절부터 16절까지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집, 그리고 그 집은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고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집이 나오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거창하게 표현을 해 놓았는데 실제로 이러한 거창한 묘사가 이 세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잘 먹히지가 않습니다.
복음 자체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내용을 말해 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꼭 믿어야 될 분이라는 의식을 사람들은 가질 수가 없었어요. 이게 실용주의적 관점인데 사람의 진리라는 것은 여기에 진리의 기둥이라고 나오지만 사람의 진리라 하는 것은 자기한테 얼마나 유용한가의 진리의 기준으로 이미 마음속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보다도 예수님이 나한테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를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나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 말씀에 대해서 체험적으로 다가가고 일치되는 것이 상당히 곤란한 게죠.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오다가 봤는데 한 60대 넘은 분의 아들과 전화하는 내용을 공원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전화했기 때문에 제가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들려왔습니다. 한번 적어 볼 테니까 이게 얼마나 진리인가 한번 보세요. 날 더운데 술 조금만 마시고 들어오라는 이야기입니다. 날 더운데 술 조금만 마시고 집에 들어오너라! 이런 분이 진리의 기둥에 대해서 관심이 있겠습니까? 교회에 대해서 관심 두고 있겠어요? 하나님의 집에 대해서 관심 있겠습니까?
진리의 기둥과 터에 대해서 관심이 있겠어요? 날 더운데 술 조금만 마시고 오너라! 아들인 모양이에요. 아들이 술 먹고 들어간다고 전화를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엄마가 걱정이 돼서 날도 더운데 술 많이 먹지 말고 조금만 먹고 오너라는 겁니다. 이게 팩트에요. 이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겁니다. 보세요. 얼마나 거리가 멉니까?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날 더운데 술 조금만 마시고 일찍 들어오라는 에 대해서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까? 이게 해석하기 난해 한 말입니까? 누가 들어도 자기 아들이 술 먹고 오는데 엄마가 걱정해서 술 조금만 먹고 오라는 그런 내용이잖아요.
우리한테는 이런 말이 친숙하고 전혀 어렵지 않은 말이잖아요. 거기에 대비해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다, 우선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교회라는 것이 우리 삶에 대해서 그렇게 아쉽거나 필연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아들아! 날 더운데 술 조금만 마시고 오너라!’할 때 이 자식, 아들은 우리한테 필수적인 요소거든요. 엄마가 낮이고 밤이고 걱정하는 것은 아들이잖아요. 염려하고 걱정하고, 그런데 우리는 이 교회에 대해서 낮이나 밤이나 걱정하고 있습니까?
이미 우리의 관심사는 성경과 멀어져 있어요. 우리의 관심사는 여기에 날 더운데 술 조금만 마시고 오너라! 우리는 이런 류, 여기에 친숙해져 있습니다. 여기에 친숙해진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 했기 때문에 여기서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멀어요. 너무 오래 걸립니다. 이 친숙한 우리와 낯설기 짝이 없는 소리, 교회는 진리와 기둥과 터라 하는 그래서 어쩌라고? 뭐 이렇게 나오죠. 교회가 지금 기둥과 터가 돼서 나한테 어떤 수입이 있느냐 말이죠. 나한테 무슨 도움이 돼요?
성경 내용에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나온 말씀은 전혀 일상에 보탬이 안 됩니다. 가계부에 수입을 증가시키는 내용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뭔가 심심해서 볼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알아야 될 생각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하지 않습니다. 이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없으면 나는 죽을 거야! 뭐 이렇게 심각하게 보지를 않아요. 하지만 자식이 날 더운데 술 많이 먹고 오게 되면 나는 걱정 되죠. 예를 들면 날 더운데 술 조금만 마시오너라 하고 전화하고 있는데 제가 지나가면서 그분에게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하면 미쳤나, 무슨 소리 하고 있나? 이게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우리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들어 올수 없는 내용을 지금 글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전혀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러면 연결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돼요. 아들아! 네가 술 많이 먹고 길거리에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어! 나는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면 나는 족해! 이렇게 될 경우에는 그 사람은 바로 말씀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들이 술 먹고 아들이 죽던 말든 아들이 죽는 그 시각에도 여전히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성경은 영원성을 갖고 있고 이것의 반대말은 일시성이죠. 일시적 잠정적으로 관심 있죠. 이론적으로 보게 되면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을 붙들고 사는 게 좋다고 우리는 이론적상으로는 받아들이는데 우리의 몸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의식은 어때요? 눈만 뜨면 생각하는 그것들이 아침에 해 뜨면 눈도 같이 뜨고 생각하면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다’ 늘 이것에 정신 팔려있습니까? 아니면 내 자식 잘 돼야 될 텐데 이것에 관심 두겠어요? 어느 쪽에 관심 두냐고 물으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둘 다 관심 두겠습니다. 하고 이야기할 거예요.
솔직히 하고 싶어 해요. 막상 이것을 같이 마주치게 되면 어느 쪽이 우선이냐 이 말이죠. 마주치면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아들이 술 먹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에 더 신경 쓰이는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애가 술을 조금만 먹으라고 했는데 많이 마셔서 엎어지게 되면 이분은 이렇게 돼요. 내가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분명히 믿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에게 이런 사고가 일어나게 하십니까? 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바탕이 돼요. 어디서 들은 풍월이 있다고 그것 가지고 하나님께 삐지고 대든다 말이죠.
그래서 이 성경은 봐도 의미가 없어요. 보나 마나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성경을 보고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보나마나 이것은 의미 없어요. 그러면 이렇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것이 우리의 삶속에 어떤 구멍을 만들어요. 후벼 파는 거예요. 후벼 파서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아예 장착이 돼야 됩니다. 아예 삽입이 되어 있어야 돼요. 컴퓨터 칩처럼 아예 삽입이 되어 있어야 돼요. 삽입이 되어 있어서 그 다음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어떠한 사태가 우리 속에 삽입되어 있는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것만이 현실인 것을 확인시켜 주는 관련성 있는 사태들이 계속 일어나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경말씀이 더 현실이네! 더 진리이네! 라는 것을 뒤 돌아서서 확인해요.
먼저 우리는 이것이 납득이 안돼요. 반드시 일 터지고 난 뒤에 다시 돌아서서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니까 아, 진리는 우리가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문자가 아니라 나와 더불어 춤추고 있구나! 활동하고 는 진리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긴긴 내용을 한꺼번에 알기 쉽게 말씀 드리면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실 때 어떻게 살아 계시는가? 성경 말씀가지고 살아계십니다.
성경 말씀 가지고 살아계신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기둥의 터라는 것을 자기 백성에게만 그것이 현실임을 날마다 각인시키는 거기에 필요한 사태와 사건들을 유발시켜서 말씀은 그냥 죽은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것 보다 생생하게 현재 구체화되고 있군요! 라고 우리 입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그런 조치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립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 올 때에 그냥 순하게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순하게 들어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를 우리가 성도되게 했던 첫 번 출입구, 그것을 안양강의에서는 경계선이라 했는데 경계선으로 항상 우리를 거기다가 데려가는 역할을 이 말씀이 해 주는 겁니다.
이 점을 다시 한 번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동그라미, 원이 여기 있는데 이 칠판에 원을 그림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구획이 생겼습니다. 밖에 있는 구역과 안에 있는 구역이죠. 영역이 생겼어요. 이것을 경계선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경계선을 우리가 예수 안, 또는 구원, 또는 영생, 들어오는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선에서 이 밖에 있는 것은 뭐냐 이것은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들어올 때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추후 적으로 알아요. 나중에 성령께서 이미 예수 안에 있게 하셨으니까 아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는 예수 안에 있다 이제는 너는 안심해라! 네 마음대로 살아라!’ 이게 아니고 예수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과 밖을 구분짓는 이 경계선에 관심을 두도록 우리를 항상 이 자리에 구형을 시키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 안에 있다면서 안심을 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절차에서 어떻게 예수 밖에서 예수 안에 들어왔는지를 놓쳐버리고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면 여기서 예수 안에는 진리와 기둥의 터가 통하는데 이 진리와 기둥과 터에 대해서 우리가 인식을 못하게 됩니다. 내가 나는 구원 받았다 이것만을 생각했지 우리가 어떠한 셀, 어떠한 세트안에 또는 어떠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수시로 이 밖에 세상과 이 차이를 구분했던 이 경계선에 우리를 수시로 데려가서 아, 이 쪽 세상과 저쪽 세상이 이렇게 차이나는구나 하는 것을 발견케 하는 일을 계속해요. 발견케 하기 위해서 이 전체가 진리 안에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진리 안에서 움직일 때 세상은 뭐냐 하면 세상은 내가 인간 자기 존재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자기가 행복하게 한 것이 중요인한데 여기서는 내가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따로 있어요. 진리가 우선이고 우리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진리가 진리입니다. 라고 고백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 안에 불려옴을 당한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 경계선에 감으로 말미암아 전에는 우리가 내가 중심이었는데 내가 우선이었는데 지금 진리가 우선이었다는 그 차이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서 내가 나 우선에서 진리의 우선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가를 알려주는 그 경계선에 성령께서 계속해서 우리보고 관람시키시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서 이것은 구약이 이 방식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데리고 갑니다.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죠. 이것은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이 뭔가 보통 인생길이 아닙니다. 그냥 아기 낳고 행복하게 사는 그런 인생이 아니죠. 자꾸 누구와 접촉이 되어 있어요. 자꾸 누가 접촉하지요.
여기 16절에 보면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15절 16절 대목을 제가 설명을 드릴 텐데 설명이 상당히 난해 합니다. 앞에 것은 교회이고 뒤에 것은 예수님에 관한 거거든요.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는 집단이고 공동체이고 단체인데 어떻게 단체와 개인이 연결되느냐 그것이 관계의 고리를 놓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 우리가 교인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필요하죠? 연결이 잘 안된다 이 말이죠. ‘야, 우리 식구는 아버지 엄마 나하고 이렇게 행복해!’ 그 안에는 지금 무엇을 생각합니까? 우리 이 가정을 생각하죠. ‘우리 가정 최고야! 역시 좋아!’ 그런데 조금 있다가 ‘우리 아버지 너무 훌륭해!’ 뭔가 앞뒤가 어울리지가 않아요. 그러면 듣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너희 아버지가 훌륭하다는 말이야? 가정이 좋다는 말이야?’ 애가 답변을 못하죠.
만약에 나는 우리 가정 행복한 것보다 아버지가 훌륭한 게 더 좋아요. 이렇게 하면 그 뒤에 질문은 뻔 한 거예요. 그러면 가정이 깨져도 아버지만 있으면 좋겠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저는 우리 가정이 우선이에요. 그러면 아버지는 너 가정을 위해서 뒷바라지, 시다발이나 해 주는 그런 너희들만 위하는 그런 분이라서 좋으냐? 그렇습니다. 하려니까 또 아버지를 우습게 보는 게 돼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럼 뭐야? 가정이 좋은 거야? 아버지가 좋은 거야?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하는 것은 두 인물과의 대비이기 때문에 이것은 쉬운 거예요. 아빠 엄마 다 좋아요. 하지만 그 답변은 뭐냐 하면 아빠나 엄마가 다 좋은 그런 좋은 가정이 좋아!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그 어린 애는 그 가정 행복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겁니다. 가정에 대해서 행복을 갖고 있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있는 나는 어떤 일이라도 포기 못하겠다는 그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품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기둥의 터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야 우리 교회가 딱 그런 교회인데 왜 우리교회 기뻐요? 그런데 1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야, 이렇게 머리 좋은 예수님이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시니까 우리 교회는 이렇게 좋은 거예요!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말씀은 이 본문 말씀과 다른 말씀이에요.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라 말이죠. 이 본문의 해답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때그때 마다 교회를 새롭게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가 한꺼번에 10억을 주시는 게 좋습니까? 하루에 100원, 이튼 날에 곱빼기 200원, 그 다음에 400원, 그 다음 날에 800원 그 다음에 1,600원 이렇게 줘서 1년만 줬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면 계산 자체가 비교가 안 됩니다. 10억이 뭡니까? 이것은 숫적으로 계산이 안 될 정도로 10 곱하기 2의 65승 이게 계산이 나오겠어요? 온 천하의 돈을 갖고 와도 이 만큼 다 안 되는데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가 좋으면 그게 좋다고 생각 하는 거예요.
날마다 예수님이 좋은 게 아니고 날마다 교회가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문 말씀을 곡해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죠. 지금 그것이 잘못 됐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힘든 논리에 우리가, 우리가 아니죠. 제가 혼자 접어 든 거예요. 그게 아니라 이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렇게 거기에 호응을 맞춰주려면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좋은 교회를 버려야 된다 말입니다. 포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교회를 버리세요. 구원 받을 겁니다. 교회를 포기해요. 교회를 만약 믿게 되면 그것은 나의 이상체이고 나의 우상이 되어버려요.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가 다니는 곳이 되어버리면, 학교는 다니는 곳이에요. 그러면 집은 학교입니까? 집은 학교가 아니죠. 학교 가야 학교 도착되죠. 그런데 교회가 다니는 곳이 되면 그 사람이 만약 집에 오면 집은 가정이 되지 교회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우선이냐 가정이 우선이냐 여기서 경쟁이 발생됩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 가정 보다 교회가 우선이라는 것은 그런 사람 거의 없습니다. 몰라요, 목사의 가정은 그럴 수 있죠. 자기 생활비 나오니까 교회가 곧 자기 생명이니 그럴 수 있죠. 그 외에는 아, 또 있겠네요. 거기에 목돈 넣은 장로는 또 가정 보다 교회가 우선이겠네요. 집 팔아서 전세로 옮기고 목돈은 교회에다가 넣은 사람들은 교회가 자기 생명일 수 있지만 처음 등록한지 2개월 된 사람은 교회보다 가정이 우선입니다. 아, 등록 한지 2개월뿐만 아니고 20년 되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교회 보다 가정이 다들 우선 같아요.
제가 말이 겸손했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가정 보다 우선되는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교회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보다 못한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아예 없어요. 교회가 아예 없기 때문에 이 가정이 우선이냐 교회가 우선이냐 하는 것으로 주눅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아예 없습니다.
그 다음에, 가정이 우선입니까? 예수님이 우선입니까? 어느 쪽이 우선이죠? 이게 천국 가는 마지막 수능 시험인데 이거 들통 나야 되는데 가정이 우선입니까? 예수님이 우선입니까?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 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했는데 어느 것이 우선이에요? 예수님이 우선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의 심적인 부담을 덜어드리겠습니다. 가정은 없습니다. 가정 없으니까 비교하는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 주눅 들지 마세요. 그것은 비교 가치가 안 됩니다. 왜냐 하면 가정은 주께서 매일같이 만들어 내십니다. 또 제 말 오해해서 남편 하나인데 남편이 둘 세 명 생기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고 가정이라 하는 것은 중요 것은 여러분들이 가정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여러분들이 가정이 있는 거예요.
가정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가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 가정을 완전히 점령하고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정은 주님의 것인데 그 주님의 것을 틀어막아 버렸어요. 누가? 여기 내 가정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 자신을 틀어막아 버리니까 주님께서 좀 비켜줄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네 가정 내가 관리 할 테니까 너는 좀 빠져달라는 거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 가정은 내식대로 만들어 주고 주께서는 후원해 주면 됩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내 가정, 내 자식 이렇게 잘 키워놨으니까 하나님께서 마땅히 내 공로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해 주듯이 자식은 잘 돼야 되고 가정은 이렇게 화목해야 됩니다. 이 식대로 기도 할 테니까 철야 할 테니까 응답해 달라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가정이 우선입니까? 주님이 우선입니까? 그것은 가정이 우선인거죠. 그러면 그 사람의 천국은 뭐냐 하면 자기가 만든 자기 가정만 잘되는 나라, 다시 말해서 그것이 지옥이에요. 지옥 가서 자기 자식 다 얼굴보고, 물론 사랑하는 사람 그리운 사람 같이 모여 있어 좋겠지만 유황불을 감당해 내느냐 그게 골치 아프죠.
지금 까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해체한다. 무엇을 해체합니까? 우리가 말씀보다 진리보다 대신해서 그 진리보다 더 소중이 여기는 것들을 주께서는 만들어 놓고 그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우상숭배 하듯이 붙들고 있다는 것을 뻔히 하나님이 지켜 보시고 그것을 해체하시면서 우리속에다가 진짜 진리와 기둥과 터 답게 그 상황속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작용해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심적인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제가 그런 설교를 했거든요. 사람들의 모든 고생은 수준 따라 고생한다고 그런 말을 했거든요. 수준 따라 고생한다는 말은 이런 상황이 되면 나는 행복할 거야 하는 그 자체가 어떤 상황에서 이만하면 행복할 거야 했는데 그 행복이라고 여겼던 그 상황이 우리를 본격적으로 힘들게 하는 행보의 시작입니다. 이런 입장에서는 더 이상 근심 걱정이 없을 거라고 장담했는데 거기서 실컷 그 수준에 맞는 내가 그 상황에 들어감으로서 비로소 느껴지는 아픔이 또 있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 위치에서 창세기 3장의 말씀처럼 그 위치에서 저주가 항상 있는 자리에서 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희는 이건희 회장대로 피어나고 어떤 자리에서도 다 피어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만나는게 힘들어서 지리산에 그냥 산속에 뜨는 해나보고 봄에는 달보고 풀잎의 이슬을 보면서 이렇게 지리산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살고 싶다고 하는데 밥은 누가 갖다 주죠? 자기 배는 가만히 있습니까? 자기 세포는 가만히 있습니까? 4시간만 지나 보세요. 꼬르륵 거리는데 배고프다는데 밥달라는데 지리산 그 숲까지 자장면 배달됩니까? 거기까지 누가 밥 배달해 줘요? 밥을 먹으려면 어디 읍내라도 식당으로 기어 나와야죠. 그러면 꼴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되네요. 주방 이모도 불러야되고, 세상 피할 곳이 없습니다.
왜 자꾸 어떤 이보다 낳은 상황을 자꾸 찾느냐 하면 이 상황이 말씀 자체가 교회가 진리의 기둥의 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어진 존재하는 상황인데 말씀이 주인공이 상황에 우리는 마치 이 세상 행복의 주인공처럼 설쳐 되니까 이게 핀트가 안 맞는 거죠. 강의 다시 시작해 봅시다. 날씨가 더운데 술 조금만 먹고 오너라! 라고 60넘은 아주머니가 아들에게 전화를 해 댈 때 자기는 그런 상황이 지금 디모데전서 3장 15절,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살아있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과 상관있다는 생각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안 들죠. 교회는 교회이고 자기 아들문제는 이 문제이지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죠.
지금부터 제가 그것을 연결시키겠습니다. 이것을 왜 연결 시켜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그 아줌마의 문제가 우리가 일상 속에 살아가면서 다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해답은 뭐냐, 여기 보면 16절에 보면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이렇게 되어 있죠.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는데 그 기둥과 터라는 것이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건의 비밀이라고 되어 있죠.
여러분, 전선을 보면 밖은 피복이 되어 있고 안쪽이 전선가닥이 나와 있죠. 이 전선에서 피복은 사실 이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감전되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러면 이 전선을 핵심을 파악하려라면 이 삐져져 나온 가닥을 가지고 역추적을 해야 되겠죠. 지금 디모데전서 뭐라 했느냐 하면 이것을 큰 비밀, 큰 경건한 비밀이라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뭐가요? 교회가, 그러니까 이 더운데 술 조금만 먹고 오라고 한 그 아줌마는 이 교회가 오늘날 비밀이라 것에 관심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 아줌마만 관심 없습니까? 우리는 관심 있습니까? 이게 지상에 교회가 너무 많아요. 교회가 너무 많다 보니까 교회가 그렇고 그런 곳인지 줄 압니다.
교회가 비밀이라? 아, 경건한 비밀이라! 누가 예배당 보고 경건한 비밀이라 이렇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의존교회” 누가 보면서 와, 경건한 비밀이여! 이렇게 하는 사람 있습니까?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뭔데? 안보면서 경건한 비밀! 안보이죠. 저는 이 의존교회가 비밀이 아니고 1층에 쭈꾸미 식당이 비밀이에요. 왜 또 바뀌었냐 이 말입니다. 왜 자꾸 바뀌느냐 이 말입니다.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는지 누가 전셋돈을 떼어 먹었는지 또 누가 와서 장사가 안돼서 누가 또 인수했는지 그게 비밀이에요. 쭈꾸미 7천원, 순두부 5천원인가 6천원인가 받고 맛이 있을까? 굉장히 비밀스러워요. 다음에 한번 먹어볼까 이런 생각이 든다니까요 이런데 의존교회는 여기와서 10년이 넘었죠. 뭐가 비밀이에요? 그 자리에 있었는데요. 따라서 여러분 교회가 비밀스럽지 않거든 그것은 교회 아니라고 봐요. 왜? 성경에서 교회는 경건한 비밀로서 존재하는 것이 교회이지 다음 주나 이번 주나 매일 보는 사람보고 있는 예배당 그대로 있고 피아노 위치도 그대로 뚱땅 뚱땅 치고 전혀 비밀스럽지 않을 때는 아하 이게 교회가 아니구나 라고 이해하시면 아주 쉽니다.
날마다 숨겨진 것이 계속해서 나와야 돼요. 그것을 가지고 창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말씀의 깊이와 넓이를 날마다 새롭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알려주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파서 알려줘요. 우리를 해체시키고 무엇을 해체시키느냐, 항상 우리의 구심점을 건드려요.
이제 본격적으로 강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경건의 비밀이라 했을 때 진짜 정작 우리가 생각하는 비밀은 뭐냐? 내가 비밀이에요. 나 자신이 비밀이에요. 왜냐 하면 내가 신비로워서 비밀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최종적인 관심사를 두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2년 뒤에 어떻게 될꼬? 나는 3년 뒤에 어떻게 되고 내 자식은 5년 후에 뭐가 되어 있을까? 항상 우리의 관심사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환원되어 되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진짜 늘 관심 있게 새로움을 찾는 것은 바로 나 자신에 관한 거예요.
그런데 나 자신의 것을 비밀로 보고 있으니까 정작 무엇을 놓치고 있느냐 하면 정작 주님께서 제시한 교회가 품고 있는 경건의 비밀에 대해서는 영 관심이 가지를 않습니다. 참 이런 것을 볼 때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 같아요. 우리가 사실은 신앙생활을 못해요. 성령께서 신앙생활하게 끔 해야 하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의 힘으로 신앙 생활해 버리는 것은 종교 취미생활이지 신앙생활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새로워야 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예수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아야 돼요. 복음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아야 돼요.
말씀을 보면 볼수록 말씀이 출렁인다고 하는데 뭔가 말씀이 그냥 딱딱한 것이 아니고 뭔가 출렁이고 춤을 추고 말씀이 걸어 나와야 돼요. 글자가 걸어 나와서 우리를 휘감아 돌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그 요정들의 활동이 무서워서 아예 말씀을 눌러버리죠. 하지만 듣는다고 해서 말씀이 활동 안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것은 말씀이 교회가 경건의 비밀인데 우리의 최종 관심사가 어떻게 바뀌어져야 되는가? 그것은 이 숨겨진 가닥을 한번 우리가 뽑아보자 말이죠. 교회에서 가닥이, 경건의 비밀이 나왔습니다. 이것을 한번 뽑는 거예요. 쭉 뽑는 거예요. 쭉 뽑아 버리면 교회가 나오는 게 아니고 누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이 나와요. 그래서 16절 나옵니다.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누가 물어봤어? 우리가 그것을 물어봤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하고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적 있느냐? 그런데 왜 예수님 이야기를 왜 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그 가닥을 뽑아낸 가닥이 바로 16절에 펴지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니까 교회가 많다 보니까 어떤 단체, 집단을 생각하잖아요. 집단이 좋다고 했는데 막상 그 집단속에서 집단이 집단 되게 한 그 나온 가닥을 뽑아보니까 교회가 경건하지 않아요. 교회가 비밀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숨어있는 가닥이 경건의 비밀이에요.
그래서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뭐라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교회에 관심 있냐? 그렇다면 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경건의 비밀인지를 알아라!”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는 주님이 날마다 창조하고 생산해 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존에 네가 교회라고 여겼던 것을 버리고 그것을 포기하라는 이 말입니다. 살아 있는 인물과 상대를 해야지 어디 구조적인 체계와 법의 질서를 갖고 있는 시스템과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일곱 교회가 나오죠. 일곱 교회 설교,100% 거짓말입니다. 그게 교회에 관한 이야기 아니거든요. 그게 주님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게 만약 교회에 관한 이야기라면 지금 일곱 교회가 있어야 됩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이제 남아 있는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일곱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 안에서 있다가 지금도 일곱 교회가 발현되고 있습니다. 이름이 의존교회이고 우리교회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지 일곱 교회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야, 나는 일곱 교회 중에서 이 교회에 있을래.’ 하면 그 사람은 지금 교회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일곱 교회에 중 나는 이 교회에 있을래, 하면 이 사람은 지금 뭐를 놓치고 있느냐 하면 경건의 비밀을 놓친 거예요. 이 교회에 다니는데 갑자기 뭔가 빨려 들어가요. 빨려 들어가보니까 여기는 결국 뭐합니까? 예수님의 안 예수 손 안에 놓이게 된 거예요. 주님의 오른손이 일곱 교회를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은 주님의 손과 관련되어 있지 내가 잡은 한 교회에 결정되는 게 아니거든요. 교회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교회에 있음을 그냥 눌러 앉는다면 우리는 다른 옆의 교회와 라이벌 관계의 속해 버립니다. ‘네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인지 한번 해 봐?’ 라이벌이 되어 버려요. 새순교회하고 의존교회하고 누가 교회답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모독이죠. 이게 모독이 되어버려요. 한 예수님을 믿으면 한 몸이 되는 겁니다. 한 예수님을 믿으면 한 몸이 된다는 에베소서 말씀을 우리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것을 알려면 우리가 믿던 교회가 망해야 돼요. 내가 다니던 교회가 바람 같이 날아가 버려야 돼요. 그래서 목사님 다닐 교회가 없습니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와야 돼요.
다닐 교회가 없으면 제가 소개 해 주면 그 사람은 그 교회를 다니게 돼요. 그러면 그 전까지는 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셈이 되어 버렸죠. 예수 안에 있으면 그 자체가 교회인데 자기는 예수 안에 있는 것에 관심 없고 어느 교회 다녔다는 거예요. 그 교회 다니나 다시 이 교회 다니나 또 거기에 문제 있으면 또 교회 소개 시켜 주세요.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답답해서 하는 말이 ‘아이, 교회 하나 만드시죠.’ 이렇게 답변을 하게 되는 겁니다. 교회 하나 만드시면 되죠. 어떤 교회? 없어질 교회, 이름을 “없어질 교회”로 지으세요. 세자입니다.
없어 질 교회라는 것은 이게 희망이 있어요. 뭐냐, 없어 질 교회이니까 지금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좋은 점이 없어져도 말씀대로 되니까 그 자체가 또 교회가 돼요. 이게 괴변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어디 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교회라는 안에 가닥을 당겨보면 거기에 경건의 비밀이 있다, 따라서 교회는 경건의 비밀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가 계신분이 경건의 비밀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가 풀어야 될 숙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단체냐 아니면 예수님이냐 어느 쪽이 교회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단체라고 이야기할 때는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감독된 자, 그 다음에 집사 된 자, 또는 여자 집사 이렇게 나오죠. 감독, 집사, 또는 여자 집사, 이런 것을 봐서는 교회는 어떤 직분이 맡겨져 있다, 직분이 맡겨져 있기 때문에 직분이 맡겨져 있다면 그 직분들이 건축의 하나의 기둥이 된다면 이것은 분명히 어떤 체제로서 제도적인 제도로서 분명히 존립하고 있는 어떤 특정 교회를 두고 이야기한다. 이런 논리가 나올 수 있죠.
예수님의 교회라면 집사도 필요 없고 감독도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수님 혼자 다 하면 되죠. 그런데 감독 시험을 보고 집사 시험을 봐서 감독과 집사를 세웠던 그 어떤 체계 있던 교회는 교회일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이점에 대해서 제가 아까 가닥이란 말을 했잖아요. 이 질문, 반박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때에 제사장이 있었죠. 천부장 백부장 다 있었죠. 옛날 이스라엘이 누가 동행했습니까? 하나님이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면 어떤 질서 체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법령에 의해서 체계가 잡혔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떻게 종결되었습니까? 제가 묻는 질문은 누가 누구를 망하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망하게 했습니까?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죠.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배후에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바벨론을 부추겨서 이스라엘을 치게 만들었던 겁니다.
지금 논점이 뭐냐 하면 단체가 어떻게 해서 하나의 개인 인물이 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인물로 종착되었는가, 그 점을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것은 주님이 계시는 전체가 교회에요. 그렇다면 예수님만 있으면 스스로 교회가 만들기 때문에 제도 같은 단체는 필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이런 반박의 논리가 성립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있어서 교회가 된다면 기존에 있는 장로, 집사, 이런 제도를 하나님께서 쓸데없는 제도를 따로 만든셈이 된다는 그런 논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 논리가 틀렸다면 기존의 교회, 목사, 장로제도 문제는 성경적, 복음적으로 근거가 원초적으로 박살되는 겁니다. 기름부은자 뭐 참기름 부었습니까? 이런 것이 다 소용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주의 사자, 이런 것도 다 소용없는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을 바짝뜨고 볼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출애굽기 25장 또는 29장에 보면 거기 아론의 제사장이 나와요. 제사장이 무엇을 하느냐 하면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제사가 우선입니까? 제사장이 우선입니까? 제사제도를 계속해서 가동시키기 위해서 제사장을 세웠죠.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이것을 죄인이라고 해요. 만약에 제사장이 우선이라면 이 제사는 완벽하게 흠 없는 제사장을 위해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서 백성들이 구원받게 된다 말이죠. 흠 없는 제사장이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을 흠 없게 한다. 이 말이거든요. 이것은 저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뭐가 흠이 없느냐 하면 제사 받으시는 하나님이 흠이 없어요.
그렇다면 제사는 흠이 없고 제사장이나 용서받는 백성들은 양쪽 다 흠이 있어줘야 돼요. 제사가 뭐냐 하면 죄 있는 것을 용서하기 위해서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제사 빼놓고 나머지는 죄 있는 상태가 돼야 돼요. 제사장이 기계적으로 제사를 드리면 안 됩니다. 레위기 10장에 나오는데 나답과 아비후가 왜 죽었죠? 제대로 안 해서 그렇죠. 제단에서 나온 불가지고 흠향을 안해서 그렇죠. 그렇다면 오히려 누가 위험합니까? 제사장이 상당히 위험스런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거죠. 백성들은 죽을 일이 없는데 제사장은 제물을 법대로 하지 않았을 때 주어지는 저주와 심판을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보여줘야 될 임무를 가진 사람이죠. 제사로 인하여 죽음이 초래되었다, 제사장에게 죽음이 초래 되었으면 제사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이 말이거든요. 저주 할 수도 있고 심판할 수도 있다는 이 말입니다. 똑바로 해라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을 왜 만들었습니까? 방금 이야기했어요. 똑바로 하지 않으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 통으로 저주 받아 죽는 거예요. 민수기 11장에서 고라의 자손 있잖아요. 고라의 자손이 딱 갈라서 250명이 죽었는가 그래요. 그 사람들이 레위인들 이에요. 그 사람들은 제사직에 관련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고라 자손이 완전히 절단 났었어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모세의 독점적인 지휘권에 대해서 그들은 뭐라고 주장했느냐 하면 우리가 애굽에서 나올 때 지파대로 나왔지 너 보고 나오지 않았다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지파대로 나왔다는 것은 12지파가 평등을 이루어서 나왔다는 겁니다. 네가 거기서 오야봉이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지파대로 12지파대로 하자는 겁니다. 그럼 그들이 주장이 뭡니까? 요새 말로 교회가 되려면 제대로 질서가 잡혀서 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의 주장이 뭡니까? 교회가 교회되려면 십자가 피라는 이야기랑 똑같은 거예요.
십자가 피가 교회되게 하느냐 하면 교회의 체계가 교회되게 하느냐 그 싸움에서 하나님이 나서서 판단했습니다. 누가 깨졌습니까? 12지파에서 동등한 권리를 줘야 한다는 그 쪽이 깨진 거예요. 고라 자손의 그러한 주장은 오늘날 보기에 누가 합리적이에요? 고라 자손이 너무나 합리적이에요. 인간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는 것이 고라자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서울 의존교회140711b(경건의 비밀)―이 근호 목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했던 모든 제도는 하나님이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족, 모든 진리의 경건과 진리가 충족된 것처럼 보입니다. 뭔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 안에 제사가 이루어지고 이스라엘 가는 곳에 이방인이 물러나고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그때까지는 참으로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인 것처럼 보였지요.
그런데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 법을 쥐고 있고 품고 있는 인간들 내부에서 그 법에 의해서 반대성향을 지닌 요소들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되는 겁니다. 그 반대가 나오는 그것을 여기 오늘 본문대로 하면 그것을 육신이라고 해요. 16절에 나오죠.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었다 그러니까 제가 보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육신이 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육신을 다 대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제대로 하게 되면 육신이 될 수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는 것을 예정했는가? 저는 그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이 사실은 예정된 거라고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기들이 함께 있고 이방인들에게서 승리하고 그것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경건한 교회요, 여기 교회라 하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을 다 포함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교회이거든요.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15절에는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백성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족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에 특이한 다른 인물이 육신으로 구태여 나타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 경건의 진리와 기둥과 터로서 부합되지를 못했습니다. 따로 메시야가 육신으로 나타나야 되고 육신으로 오신 그분이 영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어야 돼요. 이런 이야기는 구약 이스라엘에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만드는 거기에 이런 아이디어가 그들은 도저히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육신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선지자 있지요, 제사장들 있지요 그보다 왕 있죠. 백성 있죠. 천부장 백부장 있죠. 그러니까 목사 있고 장로 있고 집사있고 교인들 있고 주일학교 선생님 있고 찬양대 있으면 교회로서는 완벽한 것 아닙니까? 심지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 시편에서 찬양이 있듯이 찬양대 있잖아요. 다윗이 왕이잖아요. 그것으로 모든 교회는 완성돼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큰 비밀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육신으로 오셔야 될 바탕으로서만 제공된 겁니다.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이름이 나오죠.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뒤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하고 난 뒤에 천사로부터 무슨 지시를 받습니까?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지시받죠. 그 이름을 보세요. 이 이름에서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이 다 풀리게 됩니다. 그 이름이 뭐냐 하면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해 놓고 스스로 예수를 풀이를 해 놨죠. 뭐라고 풀이 했습니까? 이는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할 자이죠. 이름은 간단하게 예수인데 그 예수의 풀이가 길어도 너무 길어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이름을 지정할 때는 그 이름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석하거나 이해시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는 뭐냐, 여호수아이니까 이것은 그냥 구원자이죠. 왜냐 하면 예수라는 이름이 그때 처음이 아니에요.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세요. 거기에 보면 누가 나옵니까?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또 나와요.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반복해서 유명한 영웅이니까 계속해서 나옵니다. 미국 같으면 쎄무엘하면서 사무엘 나오거든요 메리하면서 마리아나오고 다 나온다 말입니다. 심지어 카펜트스라 해서 목수라해서 예수님 아버지까지 나오죠. 유명한 가수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고 알고 있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만 주는 게 아니고 그 이름에 뭐가 꼬리처럼 달려오느냐 하면 예수님은 머리이고 거기에 예수를 예수되게 하는 그 이름에 부합되는 그 내용은 연이어 기능적으로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자기 백성이 따로 있으니까 이 백성하고는 아닌 거예요. 아니라는 말은 교체해서 당하는 겁니다. 교체가 되는 거예요. ‘너 백성 아니거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너 백성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뭐로 왔느냐 하면 육으로 오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욕으로 오게 되면 예수님의 육신과 기존에 예수님을 둘러싼 다른 사람의 육신과 이게 대비가 되는 겁니다. 둘 중에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지키고 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냐 아니면 예수외 그 모든 사람이냐를 보라는 겁니다. 심지어 12제자도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주변에 엄마 마리아부터 해서 막달라 마리아부터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곧이곧대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이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육의 한계 때문에 그래요. 제가 어떤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그랬잖아요. 우리가 남한테 책임지지 말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라고 제가 토를 달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왜냐 하면 우리가 남한테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은 본인이 육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우리가 육이라면 반드시 육갑을 해요. 반드시 육적인 자기의 소질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랑을 베풀더라도 막상 우리에게 어떤 돈이나 이익이 오게 되면 사랑을 하더라도 나한테 이익이 되는 쪽으로 항상 돌리게 되어 있어요.
‘저 사람은 인격적으로 너무 훌륭해!’ 인격적으로 너무 훌륭한 사람한테 돈 한번 놔둬볼까요? 어떤 태도가 보이는지 인격적으로 너무 훌륭한 그 자녀에게 아버지 유산 한번 파고 들어가 볼까요? 그 유산 양보하는지? 사람이 자기 육 됨을 들추어내는 상황이 안 오니까 자신만만해 하고 내가 어떤 경우에라도 주의 말씀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을 하시는데 예수님은 12제자 에게 맡기신 일은 뭐냐 하면 네가 육이니까 육갑, 육다운 모습을 보이라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면서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제발 나 혼자 일하도록 좀 놔둬라! 이 말입니다. 나 혼자만 모든 일을 이루도록 어떤 인간의 육적인 도움도 필요치 않고 나만 혼자 아버지 뜻을 이루어서 그 대가가 값없이 너희에게 흘러 가도록 그런 일 조차도 나 홀로 하도록 너희들을 배제 시키겠다는 겁니다. 이 점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랐어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에 마귀 들려서 화인 받은 사람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들이 주장하기를,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 지옥갈 자들이 주장하기를 ‘여러분, 결혼하게 되면 여러분의 거룩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고 깨끗하게 삶니다.’ 하고 이야기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그것이 마지막 때에, 말세에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그런 법도를 가르쳐서 혼인 못하게 했다고 이야기를 하면 여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하냐 하면 그러면 결혼 안하면 되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육의 한계인데 뭐든지 하라 하면 ‘하면 돼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십일조 하라 하면 그거 하면 돼지, 안식일 지키라고 하면 안식일 지키면 돼지,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면 돼지, 그게 뭐가 어려워? 하나님 아버지가 지시하는 건데 하면 그만이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십일조하기가 말라기에 보면 너희들이 안 했다고 했는데 그러면 십일조 안 했다고 질책이 들어보면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십일조 하면 되잖아! 이렇게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게 지킨 거예요? 십일조하면 돈 사랑 안하게 됩니까? 십일조 내면 의와 인과 신은 겸하여 같이 나오는 거예요?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은 뭡니까? 질책한다는 것은 너희가 어떤 그 반대의 행동을 하더라도 그 말씀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자신의 육적인 그 본색만 들어내면 돼요. 오늘 강의 들어 기분 좋지요? 여러분들이 육이 있잖아요. 그러면 평생 살 동안 딴 짓하지 말고 내 육이 이 정도 저질인 것을 드러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일부로 드러내지 마세요. 일부로 드러내게 되면 일부로 드러낸 것이 여러분 자랑꺼리가 되고 의가되기 때문에 안돼요. 가만히 있으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시다보면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관심 있고 성경 관심 있지만 지금 몸 건강하고 배부르고 한가하기 때문에 관심이 있지 막상 지금 전화 와서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대번에 다 가버립니다.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남의 인생이나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마세요. 왜냐 하면 우리가 책임질 그런 자질이나 능력을 아예 구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제파악을 해야 돼요. 우리는 주제 파악만 하면 돼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면 이 백성은 어떤 백성입니까? 죄있는 백성이에요. 죄 없어요? 죄도 없는데 죄에서 구원합니까? 그리고 이 백성은 자기가 알아서 거기서 기어 나올 수 있습니까? 자기가 알아서 기어 나올 것 같으면 예수의 이름이 예수일 필요가 없지요. 알아서 기어 나온 사람만 붙든다. 이렇게 돼야 될텐데. 그럼 예수수? 예수가? 이렇게 밖에 안돼요. 예수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착해서 말씀대로 살아서 그 죄를 벗어버리고 자기가 알아서 착한 사람으로 구원했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생겨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예수님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런 인간은 없어 져야돼요. 만약에 착한 사람 있으면 죽일 거야!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 하는 자는 죽여 버릴꺼야! 이게 뭐냐? 발상의 전환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힘이 모자랄 때 주님이 도와주는 거 아니고 그런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무리 도움 받고자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혀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무리 축복 받으려고 십일조 해도 그게 소용없다는 거예요. 제가 십일조 하라 해도 십일조 해 보세요. 그게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지요. 안해 보고 알지 말고 해 봐 놓고 이게 아무 소용없구나를 알라 말이에요.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기 백성입니다. 숫자가 단수가 아니고 여러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인데 여러 사람을 보통 어떤 사람이라 할 때 일대일 대응하거든요. 일대일 대응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은 내가 책임지고 저 사람은 당신이 책임지고 일대일 대응으로서 구원해야 되는데 여기 보면 예수님의 구원 방법은 뭐냐 하면 이 사람은 다수에요 다수이고 예수님은 혼자에요. 혼자가 다수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굉장히 바빠야 돼요. 아르헨티나 하고 독일하고 결승전 경기할 때 국민들이 서로 결승전 우승하라고 기도 할 때 주님은 바빠요. 이쪽 눈치 봐야 하고 저쪽 기도 들어줘야 하고 지금 바쁘다니까요. 지금 북한기도 들어줘야 되고 지금 브라질 기도 들어줘야 되고 그리고 중국 성도들 기도 들어줘야 되지 주님이 왜 그리 바빠요?
다수와 하나가 연결될 때는 이 다수를 하나로 만드는 방식이 우선됩니다. 이 백성이라는 다수를 하나로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의 집단이거든요. 집단을 숫자 1로 만드는 겁니다. 이것을 유적 존재라 합니다. 인간을 하나의 종류로 만들어서 이게 여러 백성이 아니고 이게 한 사람으로 묶어버려요. 여러분들이 총각김치 담글 때 아주머니들이 시장에서 가지고 올 때 들기 힘들잖아요. 시장 상인들이 하나로 묶어가지고 알타리무 다 들 수 있도록 하잖아요. 이것을 하나로 꽉 묶어버려요. 이게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으로 죄 아래 있다 이렇게 묶어버립니다. 묶어 버리면 이쪽에서 이 백성들은 이 아래 있어요. 아래 있으니까 그들의 대표자가 누구를 상대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앞에 서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이 백성들의 입장은 없어요. 이 백성들의 입장을 누가 가져가느냐 하면 사탄들이 유대인들이 이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해 버려요. 제가 어려운 말로 했는데 쉬운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 하잖아요. 자기 백성인데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 해서 이 소리를 듣고 난 뒤에 다른 제자들이 ‘우리네, 우리네!’ 이렇게 자기 자신을 향하여 이것은 주님이 구원할 백성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자기 백성은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 져야지 ‘주여, 여기 있습니다.’ 손들고 나온다고 ‘어 너 손들었어? 나와 내 백성이야’라고 모집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은 없어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창조는 뭐냐? 없는데서 만들거든요. 가만히 있어! 집에 가만히 있어! 내가 없는 것을 만들겠다! 없는 것을 만들어 놓고 나중에 구원받았을 때 ‘제가 제 구원에 아무 것도 사전에 조치한 게 없습니다.’를 고백만 하면 돼요.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면 그것은 100% 하나님의 백성 맞아요. 제가 구원 받는데 제가 아무 도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전에 교회 나간 것도 주께서 인도해서 갔고 제가 은혜 받은 것도 주께서 인도하셔서 은혜 받았지, ‘은혜 받아야지’ 하면서 준비해서 받은 거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혹시나 은혜 받아야지 하는 마음조차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고백이 나와야 돼요. 이론상이 아니에요. 이론상은 누구나 그렇게 하게 돼요. 여기서 자, 저 따라서 하세요. 이렇게 하게 되면 하거든요. 그것은 소용없어요. 각자 노는 수준을 제가 몰라요. 여기는 간식을 빵으로 먹지만 다른 데 가면 뷔페로 먹는데 있거든요. 다른 데는 의자에 앉는 수준인데 여기는 꿇어앉는 수준이잖아요. 그 쪽은 어떤 주님의 백성의 대표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이에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었어요. 사도가 주님을 만났을 때에 고백이 뭐냐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나왔을 때 그 뒤에 주님의 답변이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에요. 그러면 그것은 결정 났어요. 우리는 주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평소에 핍박하고 있는 와중에서 구원받아 버렸어요.
그러다보니까 우리는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절로 나오죠. 문제는 그 핍박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로는 흉내 낼 수 있는데 그 핍박에 대한 체험은 어떻게 되는가? 평생 사시면서 여러분 일어난 사태 속에서 자기의 육의 본성을 들추어내면서 아, 이것이 주님에 대한 불만이고 불평이고 핍박이구나! 하는 것을 두고두고 살아가면서 받으면 돼요. 계돈은 미리 타고 부금은 장부에 도장 찍으면 돼요. 구원이라는 곗돈 미리 다 타먹고 일 순위거든요. 미리 타먹고 일수쟁이가 오면 하루에 만원씩 도장찍으면 되듯이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 죄가 뭔지 모르면서 구원을 받아놓고 하루 매일씩 죄 지은 것에 다가 도장을 찍으면 돼요. 또 인감도장 없으면 손도장, 사인을 해도 괜잖아요. ‘주여, 이렇게 제가 죄인입니다.’ 이거 하시면 돼요. 그거 못하십니까? 죄 지을 줄 아는데 그것을 못해요? 죄 짓는게 우리 주 특기인데요. 잘해요. 안 시켜도 너무 잘해요.
드라마에 나온 것을 보고 ‘저 인간 죽어야 돼!’ 그 인간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죽어야 됩니까? 이게 우리가 드라마 보면서 평가를 해서 ‘저 강성재 죽여야 돼! 저런 못된 인간이 어디 있나, 사람 죽여 놓고 자기 떠 밀어놓고 안 죽였다고 발뺌 하는데 지 엄마 잘 죽었어’ 아침 8시 SBS 드라마 나만의 당신 151회입니다. 그리고 일본 4대 1, 잘 깨졌어! 일본하고 무슨 억하감정 있습니까? 일본 4대 1로 깨졌다고 이야기하면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일본 졌다고 기분 좋아 할 거다.” 일본 깨져 좋아하니까 닭이 앵 우네요. 왜 세상만사가 나의 지배욕과 소유욕을 만족시켜야 됩니까? 틈만 나면 지배욕이고 소유욕이에요. 내가 남을 누르고 싶어서 미쳐서 환장하고 있는데 그게 우리가 타고 난 육인데 경건? 무슨 경건의 비밀이에요. 내 자체가 경건하지 않는데 무슨 경건의 비밀이에요.
우리는 피복이에요. 나 같은 이런 인간이 구원을 받아? 하고 가닥이 우리 대신 육으로 오셔서 천사와 함께 알림바 되시고 만국을 전파하시고 세상에 믿음바 되시고 영화에 올리셨었고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으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 부름을 받으면서 우리는 죄인의 백성의 기능과 역할을 지금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주장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래야 예수 이름에 부합되는 것이 현실화되고 구체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구원이 현실화 되면 안 되고 말씀이 예수라는 이름에 말씀이 구체화되고 우리는 그 성전위에 휘말려서 같이 구원받는 거예요.
제자들은 자기들이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예수님이 하늘나라 가면 우리 중에 누가 높겠습니까? 하늘나라 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어요. 왜? 주님께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합이 아니었습니다. 동행이었지 연합이 아니거든요. 연합은 주께서 성령으로 다시 그들을 찾아와야 돼요. 주님이 왜 찾아 갔는가? 아버지께서 택한 자이기 때문에 찾아 가신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이 경건의 큰 비밀을 우리는 차후에 체험을 통해서 나중에 파악이 되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을 대표하는 것은 죄인이 대표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대표했고 그런 구원을 대표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하는 거예요. 대표자 교체였습니다. 대표자 바꿔치기입니다. 전에는 아담이 대표자였는데 이제는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의 경험을 다 했기 때문에 두 가지의 사실을 다 언급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이 죄인에서 의인은 없었는데 여기 16절에 보니까 그는 영으로 뭐하심을 얻었습니까? 영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분이 우리의 가닥이 되고 우리는 그 가닥을 둘러치는 피몸으로서 하나의 노선을 이루는 겁니다.
어떤 노선? 비밀스러운 교회의 노선입니다. 그렇더라도 지금 이것까지 이야기했더라도 아직 까지 왜 단체가 교회가 아니고 아직 까지 개인이 구원이냐 하는 것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러면 이것을 이렇게 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이름이 구약시대에는 무슨 이름이냐 하면 주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이죠. 여기 전선 피복이 동시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점선으로 구약을 연결시켜 보면 여기는 주의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 제사장을 뽑아 나왔습니다. 이 제사장이 레위기 10장에 보면 알고 보면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이 있고 병들어서 죽은 사람 있지만 황유 불에서 나온 불에 정면으로 맞다아 죽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소위 거룩하다는 제사장이 그렇게 죽잖아요. 가장 위험한 곳이에요. 그러면 이 제사장이 이렇게 저주를 받았는데 저주받는 일에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뭐냐 하면 주의 이름 속에서 축복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나온다는 것을 가장 가까운 민족들이 스펀지처럼 쫙쫙 빨아드린다 말입니다. 이방 민족들이 죄를 지어도 그렇게 닦달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자기 백성인데 하나님의 자기 백성인데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잖아요. 이스라엘 역사의 90% 이상이 이방나라에 포로 잡힌 시절이에요. 이것은 35년 일제 강점기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유도 아닙니다. 완전히 늘 뺑뺑이 도는 생활을 했어요. 왜? 바로 거룩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가장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깨끗하고 신사적이고 바르게 생활을 하는지 남들 보기에는 참 훌륭한 가장이고 신사라고 하지만 그 훌륭한 신사 때문에 가정의 가족들은 얼마나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돼요. 너무 고상하고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식당에서도 먼지, 언제 닦았어? 이렇게 나오면 참 골치 아프거든요.
이스라엘은 무엇을 받았다? 율법을 받은 거예요. 그 율법은 선합니까? 대충해야 됩니까? 아니면 완벽해야 돼요? 완벽한 선함을 그들은 받았습니다. 자기 딴에는 지킨다고 지켰습니다만 하나님의 율법은 철저해야 됩니다. 진짜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어버립니다. 우리는 죽어야 돼요. 그거 못 지킵니다. 그래서 기껏 유대인들이 핑계 대기를 다른 민족들은 진짜 완벽한 하나님의 법을 모르잖아, 하지만 거룩한 우리민족 유대인은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뭡니까? 알면 뭐하나? 그것을 지켜야지 할례 받으면 뭐하나? 마음에 할례를 해야지, 네가 십계명대로 남한테 거짓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네가 스승이면서 네가 의인이 되어 버리면 오히려 벌을 누가 먼저 받아요? 심판이 하나님의 집부터 먼저 받잖아요. 율법을 잇는 소유자가 먼저 받는다 말입니다. 율법을 소유했다는 말은 뭐냐? 뜨거운 쇳덩어리를 맨손으로 쥐고 있다가 뗀 것으로 보면 돼요. 그것을 누가 감당합니까? 지나 내나 똑같은 육인데 감당 못하죠. 혹독하게 자기 백성을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더 심하게 다룬 분이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말씀대로 했는데 그것도 죄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계약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흠이 없어야 되고 그 다음에 흠이 없는 상태에서 택한 백성의 모든 죄를 담당하기로 약정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기능을 두 가지로 보여 줍니다.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 없는 곳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나한테 들어온 죄는 나의 완벽한 의로서 없어지도록 그런 장치를 한 거예요.
그런 장치가 구약때 제사제도에서 이미 있었습니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제사를 위해서 있는 건데 이 제사 제물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양이나 소나 그렇다 말입니다. 제사제도에서 사람은 양에 비해서 소에 비해서 염소에 비해서 하나의 사람 자체가 들러리가 되어 버려요. 이 사람들은 수동적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향기를 흠향해야 사는 사람들이에요. 수동적이에요. 능동적으로 이거 할게요, 저거 할게요를 내세울 수 없는 그런 입장이에요.
수동적이라 말입니다. 이 제사 제도가 원활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서받고 원활하지 못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다른 나라가 쳐 들어와서 붙여주는 전쟁에 의해서 매를 맞고 고생하다가 다시 여호와여! 살려달라고 하면 그것은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제사제도의 제물 자체를 위해서 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수동적인 동시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죄인 되기 위해서 율법을 주는 거예요. 율법을 줘서 그들로 죄인 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시는 주의 이름만 의지 하고 주의 이름만 신뢰하고 일체 자신의 선함을 신뢰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한 겁니다. 그 중의 하나의 예가 뭐냐 하면 사울이 전쟁할 때, 블레셋 전쟁할 때 사울왕이 전쟁하려고 하는데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약속시간이 지났는데요. 약속시간이 분명히 9시인데 오지를 않는 거예요. 10분이 지났는데 벌써 저쪽 블레셋 군대는 쳐들어왔고 가까이 와서 돌격하고 있고 백성들은 동료 되어 사기가 다 떨어지고 이스라엘의 사령군의 최후 결단만 촉구하면서 임금님 어떻게 할까요? 말까요? 하고 있다 말입니다.
사울왕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율법에 의하면 전쟁할 때에 반드시 제사를 드리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고 이것을 믿고 있는 거예요. 왜냐 하면 언약궤가 앞장서면 승리하고 언약궤가 물러가면 패배해서 포로된 자들이 언약궤 쪽으로 몰려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제사를 흠향하시면 전쟁은 하나마나 이미 시작 전부터 승리한 것이고 제사를 못 드리고 하게 되면 패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입니다. 그런데 제사는 누가 드려요? 선지자, 제사장이 드리게 되어 있다 말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안 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뭐가 잘못됐죠? 지금 사울 왕이 사고방식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들은 승리해야 된다는 생각이죠. 사울 왕이 또 잘못이 있어요. 아말렉군대가 졌잖아요. 이스라엘이 지거든요. 그런데 아가 왕이 있어요. 아가 왕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모든 어린 애부터 귀한 양들을 보냈는데 그들은 살진 양들을 살려주고 아가 왕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 사고방식이 뭐가 잘못됐죠? 이미 승리자인데 승리자가 포로된 자를 갖고 놀 수도 있는데 뭐가 잘못됐죠? 뭘 놓쳤습니까? 이번 전쟁은 인간의, 사울왕의 자존심의 전쟁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전쟁은 아예 없었어요. 모든 이스라엘의 전쟁은 누구의 전쟁이냐? 주의 이름,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를 증명해 주는 전쟁이었던 거예요.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 그 계심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나의 전쟁으로 그들 앞에 나서서 승리함으로서 내가 계속해서 왕으로 굴림 해야 되는 정당성을 백성들에게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알려주려고 한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 보세요. 오늘날 교회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뭡니까? 주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받아서 교회가 커지고 헌금 많고 선교사 많이 보내고 예배당 크게 지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대외적으로 알려서 우리 교회의 자존심을 세우는 쪽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신뢰하도록 우리 교회 등록하시면 무조건 죽으면 천국 갑니다. 하는 완벽한 천국복음 제공하는 샘터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잖아요.
그게 바로 사단의 짓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무엘이 시간 내에 오지를 않았어요. 사무엘도 가고 싶었겠죠. 가야되는데, 가지마! 일부로 하나님이 못 가게 했겠죠. 그래서 사울 왕이 직접 제사 드리고 그때 짠하고 나타나서 ‘너는 왜 내 말을 시키는 대로 왜 안 해?’ ‘제사 드리려고요’ ‘순종이 제사보다 난 것을 몰라?’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누가 잘못을 했어요? 사무엘이 잘못했죠. 그러면 여기서 뭅니까? 잘못한 쪽이 잘했고 빨리 제사 드려서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사울이 잘못되었음이 뒤바뀌는, 이것을 역전시키는 그것을 가지고 큰 경건의 비밀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본문이 이제 풀리는 겁니다. 큰 경건의 비밀이 우리는 자칭 믿음이 있고 신앙이 있고 성령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큰 경건의 비밀이라고 여기는데 그게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나로 하여금 내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내 육적인 본성임을 까발려주는 그 비밀이 큰 경건의 비밀입니다. 역시 주님이 죄 있는 나를 구원해야지 내가 주님을 알아 모셨다는 알아 모심 때문에 내가 알아서 구원되는 법은 없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이게 큰 경건의 비밀이에요. 이 순간 모든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요. 제대로 신앙생활해서 제대로 천당 가려면 이 스트레스는 날아가요.
그게 다 사단 적이고 마귀 적이고 비 복음적이에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내가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너무나 절실히 느낀 거예요. 내가 안 나서면 아무도 나의 구원에 나설 사람이 없다고 철썩 같이 나 자신을 믿는 이 방식은 바로 이스라엘이 되풀이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되풀이해서 보여 준 그 썩어빠진 사고방식이었어요. 그들은 이스라엘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있다고 여긴 것을 없애버린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없다고 느끼고 오직 주님만 바라봤습니다. 주님만 바라볼 때에 언제 그 패역한 신앙 없던 그들이 세상에 그렇게 훌륭한 이스라엘일줄은 본인도 놀랬죠.
이스라엘은 뭡니까? 값없이 주의 은혜, 공로만 값없이 누리고 그것만 크게 보이는 것이 이스라엘이거든요. 자기가 잘난 체할 때는 그게 보였습니까? 안 보였습니까?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왕창 깨지고 난 뒤에 사사기에 나오잖아요. 만날 깨지고 주여 부르짖잖아요. 주여 부르짖으니까 바보 같은 장애자, 왼손잡이가 옛날에 장애자거든요. 왼손잡이 이기죠. 깡패 이기죠, 이럴 때 바람둥이 삼손이 이기죠. 이럴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방앗간 주인 기드온이 이기죠.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우리는 공짜로 은혜를 누리고 있구나!를 깨닫는 순간, 이미 그 순간 그들은 아주 훌륭한 주의 백성입니다.
훌륭한 주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순간, 주의 백성이 날아가 버렸어요. 훌륭한 주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여겼는데 또 주변에 있는 블레셋이나 다른 나라가 또 공격해서 뺏어가니까 그 교만 때문에 또 깨지고 난 뒤에 또 주여 도와주소서! 참,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앞에서 "헬프미"! 했던 경험이 이제 기억도 안나죠. 언제 해 봤습니까? 한 15년 해 봤습니까? 알아서 다 잘 되는데 알아서 장가 잘가고 시집 잘 가고 "헬프미" 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알아서 성경공부 나오고 착한데 "헬프미" 할 일이 뭐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적 "헬프미"입니까? 하나님이여! 도와 주소서! 그 "헬프미"를 외치는 경우를 제가 예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떤 경우 이냐 하면 우연히 누가 로또복권을 갖다 주는데 이것을 버릴까 말까 하다가 이왕 주는데 버리지 말고 기다려보자 하고 기다렸다가 1등 당첨돼서 20억 원 당첨될 때 그것도 아무도 몰라요. 혼자만 알았어요. 20억 가지고 부동산 두 군데 사고 차 바꾸고 아들 장가 밑천하고 딸도 차 사주고 있을 때 당첨되고 난 뒤에 그때 주님이여! 왜 저에게 이런 십자가 보이지 않고 돈이 보이는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할 때 뭐 해야 됩니까? "헬프미"가 돼야 됩니다. “주여, 영생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저로 깨닫게 하옵소서!” 이거 되려면 로또 다 사야 돼요.
로또 다 사서 6등 되면 안 되고 1등 다 돼서 내가 평소에 얼마나 잘되고 성공하기를 원하고 출세하기를 원하고 남들이 박수치는 인생으로서 삐까삐까 빛나는 인생 되기를 얼마나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게 완전히 폭로될 때 그럴 때 우리는 "헬프미"라고 부르짖어야 돼요. 암 걸리고 몸 아플 때 "헬프미" 하지 말고 말씀 볼 때 "헬프미" 하지 마시고 정말 내가 주님 없이도 나 혼자 살고 있고 진짜 하나님 도움 없이도 내 힘으로 넉넉히 산다는 것이 그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에요.
여기 의존교회에 갑자기 교인이 한 50명 몰려와서 누가 돈 5억 내놓고 예배당 지읍시다. 이렇게 나올 때 목사님은 "헬프미" 해야 돼요. "헬프미" 할 그런 기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여 이게 교회가 아닌데 내가 왜 여기에 갑자기 마음이 빼앗기는지 주님 외에 십자가 외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을 마귀가 조장할 때 우리는 "헬프미"라고 주여! 도와 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쳐야 된다 이 말이죠. 갑자기 애가 점수를 100점 맞아서 돌아올 때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하고 올 때 “인간아, 안 된다, 안 된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이렇게 나와야 돼요. 갑자기 미장원에서 머리 잘 나왔을 때 십자가 앞에 보고 나면 거울앞에 이렇게 보고 저래 볼 때 이건 문제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반대로 하죠. 그러니까 기도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는 거예요. 주여, 이거 욕심 아닙니다. 기도 하면서 만날 욕심 아니래요. 누구를 속이려고요. 귀신을 속여요. “주여, 이거 욕심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만 돌리기 위해서 기도 합니다.” 주님이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빙빙 우회해서 주의 영광만, 주의 이름만 높이게 하옵소서! 해 놓고 마지막에 사업 잘되게 하옵소서! 빙빙 돌려서 빙빙 돌린다고 주께서 어지러워서 요점을 놓치겠습니까? 안 놓치죠.
사도 바울은 경건의 비밀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생각하지 않고 주님 계신 그곳이 교회라고 하는 것을 자기는 고생하면서 외치고 있는 거예요. 디모데야, 교회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 뒤에 4장에 나오잖아요. 교회이기 때문에 온갖 마귀가 들끓어요. 마귀가 화인 받아 와서 온갖 것을 집어넣더라도 경건의 비밀스러움을 보여 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여정이고 과정이고 하나의 절차입니다.
시험받았다고요? 야고보서의 시험이 뭔지 아세요? 부자가 왔을 때 인사하고 가난한 사람이 왔을 때 나가라! 그게 시험이에요. 야고보서 1장에 보세요. 네가 교회에 부자가 오니까 인사하고 가난한 사람이 오니까 네가 돌아보지 않는구나!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그 교회 자체가 육적인 죄 있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가난한 사람한테는 관심 두고 부자한테는 관심두지 말아야지! 이것도 하나의 얍싹한 수에요. 부자한테 관심 안두면 주께서 부자 두 명을 더 데려올 줄 아는 계산을 하고 있어요. 인간이 뻔 한 거거든요. 주여, 내가 부자 한테 관심 안 뒀습니다. 가난한 사람한테 관심뒀습니다. 그러니까 마저 미진한 액수는 부자가 와르르 몰려와서 매꿔주시면 주님이 진정 살아 있는 교회맞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경건의 비밀을 모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눈에 띄는 것만 보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게 뭐냐, 죄있는 백성의 본색이 그래서 그렇습니다. 제발 죄 있는 본색대로 사세요. 말씀으로 살 생각하지 말고 책임지지 말고 그러면 성령께서 감추어진 경건의 비밀을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자신을 해체 시켜서 완전히 구멍을 파서 거기다가 집어넣습니다.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개가 천성합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개가 천성 없습니다.
주여, 내가 바로 죄인이군요! 하는 그 순간 비로소 잊어버렸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다 이루었다, 이미 구원을 이루었다는 그 사실이 그 짧은 순간이지만 퍼뜩 스치고 지나 가는 거예요. 베르노성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이 살아남은 시간은 0.3초에서 5초라는 거예요. 길면 5초라는 겁니다. 인간의 의식자체가 왜냐 하면 0.3초밖에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의 망막 속에 새로운 변화가 계속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타 500 좋으네 하다가 갑자기 다른 것을 주면 이거 보다가 다시 이거를 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환경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변화가 오기 때문에 주님 생각하다가도 ‘아빠 전화 왔네’ 하면 전화 받으면 이미 다 잊어버려요. 심지어 주일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다 외우는데 외우다가 딴 생각해 버리면 사도신경이 어떻게 되더라? 전능하사 독생자, 독생자, 그 다음에 뭐지? 그렇게 수천 번 외워도 딴 생각 해 버리면 다 잊어버려요. 주기도문은 짧아서 금방 맞게 하지만 사도 신경은 길어서 딴 생각하면 놓쳐버린다 말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사회 보시는 주일학교 교사님들이 사도신경 들으라고 해 놓고 중간에 본인이 잊어버리고 그땐 다른 사람이 도와 줘야 되고 큰 소리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고’ 하면 따라서 하고 이래요.
인간은 그때 뿐 이에요. 돌아서면 육으로 돌아서는 것을 주께서 미리 아시고 이미 너하고 상대하지 않고 바로 너는 이미 예수님이 우리가운데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가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욱더 죄 있는 백성으로 들추어내면서 주님만이 구원자라는 보여 주는 그런 말씀의 사태에 우리를 참여 시킨 거예요.
교회가 뭐냐? 움직이는 겁니다. 교회는 움직이는 겁니다. 마치 바람 같이 움직입니다. 교회 없다 하는 그곳에 교회가 있고 교회 있다 하는 그곳에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를 지으려고 하면 귀신 유령 짓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생각하면 그 자체가 교회가 그 순간이라도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이게 경건의 비밀이에요. 그러면 교인으로서 어떻게 사느냐? 남은 죄를 알라 하는데 우리는 거룩한 말씀 앞에서 그게 죄라는 것을 혹독하게 느끼시는 그런 사태가 올꺼에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이게 돈이 있을 때는 못 느껴요. 일부로 하나님께서 은행통장 잔고를 떨어지게 해서 먹는 게 있으면 됐지 하는 생각이 0.3초내에 들게 마련입니다. 들 때 아하, 주께서 디모데전서 말씀을 나한테 집어넣으려고 갑자기 그런 일이있게 했구나! 하고 깨닫게 해요.
그러니까 항상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이렇게 쥐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러냐?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인 것을 이미 아는 사람한테는 그 다음에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그 구세주의 구세주다움을 하나님이 스스로 증명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것에 자기 마음대로 우리 인생을 끌고 갈 거예요.
저냐 여러분들이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은 내일 일이 항상 우리 예상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항상 우리 예상대로 안 되고 항상 변화의 여지가 있고 그냥 뒤 돌아보면 내가 예상하지 않은데 항상 좋은 쪽으로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낮추는 쪽으로 주께서 이끌어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통째로 우리가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임을 고백합시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큰 경건의 비밀이라고 했는데 진리의 기둥의 터라고 했는데 우리는 감이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놓쳐버렸을 때 십자가를 잊어버렸을 때 뭔가 가졌는데 답답할 때 다시 한 번 주님의 십자가 생각나면서 주께서 지금 우리를 참된 경건의 비밀로 인도하고 있음을 그때 그때 마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