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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강의-구약해석.아버지와 아들 1204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28. 07:25

2012-04-26 22: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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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6강 마태복음 27강 이름 : 이근호 (IP:117.55.12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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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3.60) 12-05-14 19:25 
대전36강-행15:14(구약 해석)120426a-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15:14~18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강의 전, 어느 질문에 대한 답변내용)
제 질문의 취지는 이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맞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 맞을 것 같으면 선악과 철조망을 쳐놓던지, 이렇게 해야 되는데 죄 안 짓게 하는 것이 사랑이지,  죄 짓게 해놓고 사후처방 한다고 그렇게 병 주고 약주고 하는 것이 무슨 사랑이에요? 약 올리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안목자체가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편집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의 의견은 예수님이 알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전제로 시작해서 출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왜곡되게 해석해 버리지요. 우리의 맞춤하나님으로 된다 말이지요. 그래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 같으면 그 질문에 하나님이 답변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보내지 말고, 종도 보내지 말고, 바로 메시아 오셔서 바로 딱 처리해 가지고 그렇게 해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에 우리가 죄 짓는다 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자기 죄를 알 수 있습니다. 중간에 아브라함이나 징검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 통해서도 아, 우리가 저주받아 합당하다 알면 되잖아요. 아담 범죄하고 난 다음에 바로 예수님 투입해도 우리 구원받는데 아무 문제없는데 왜, 아브라함, 이삭과 같은 자꾸 이렇게 징검다리를 놓았느냐 말이지요. 그 답변은 오늘 나올지 안 나올지 아마 모르겠습니다마는, 시간이 됐기 때문에 봅시다.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15장14절부터인데, 그 이야기를 하려면 앞에 2줄 정도 이야기를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상황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상황이 뭐냐 하면, 3파가 있어요. 대립되는 2파가 있고, 그 중에 사이를 중개하는 1파가 있습니다.  대립되는 것은 이쪽의 야고보와 사도바울 쪽이 서로 대치되고 있는 상황에 여기 중개인으로 나선 사람이 누구냐, 베드로가 나섭니다. 야고보란 사람은 예수님의 동생이지요. 원래 야고보는 일찍 죽었잖아요. 제일 먼저 죽었어요. 이쪽에 패들이 많아요. 이 패들을 가지고 성경에는 뭐라고 하느냐하면 바리새파에 소속된 기독교인들,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인은 맞는데, 앞에 뭐가 붙어요. 바리새파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대변자로서 야고보를 세웠고 바울은 누구를 세웠느냐 하면, 바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바로 이방인들이에요. 야고보 쪽은 율법에 기초한 그리스도, 바울 쪽은 율법이 빠진 상태에서 그리스도, 이렇게 대치되는 겁니다. 

핵심은 뭐냐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천국갈 수 있느냐 하는.  바울 쪽에서는 율법 없이도 그리스도를 인정함으로서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예수님 믿는다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예를 들면 이 학생이 재하인데, 재하를 믿는다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재하를 믿는다하는 말이. 초반부터 어려운데 쉽게 합시다. 경찰이 와서 ‘혹시 여기에 재하라는 학생이 있습니까?’할 때, 사람들이 ‘예요.’ 라고 지적할 때, 지적할 수 있을 때 재하를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은 재하가 아니고 얘가 재하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우리를 구원할 자가 아닙니다. 이 분 빼고. 이러거든요. 그럼 이해하겠지요? 부처 아니고, 공자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이러는 거예요. 옆에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의 구세주는 목사가 아니고 총회장도 아니고 당회장도 아니고, 강도상도 아니고 이 분입니다. 또 더 나아가서 우리 가운데 우리 아버지나 내 자신을 옆에 세울 때 우리 아버지도 아니고, 우리 형님도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게 예수 믿는 거거든요. 그 다음에 예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세워 봅시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옆에 분이 구원을 합니다. 라고 믿을 때 믿음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비교의 대상이 주님께서는 좁혀가요. 처나 자식이나 이렇게 시작하다가  어디로 좁혀 가느냐 하면 바로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를 믿을 수 없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은 안 믿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뭐가 부각되느냐 하면 예수 믿고 있는 나 자신을 더 부각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선택을 해야 되는데, 내가 인생 망가져도 망가진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 있기에 망가져도 괜찮습니다. 하는 쪽으로 연결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개척교회 하시는데, 개척교회 망해도 주께 감사할 수 있느냐 이걸 묻는 거예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지요. 이걸 가지고 원칙이 뭐냐, 원칙대로 합시다. 오늘 어렵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밖에서 안으로, 그리고 미래에서 현재로, 항상 성경 해석을 할 때에 밖에서 안으로, 그리고 주변에서 중심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이렇게 접근을 해서 해석을 해 주셔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항상 교회 나올 때 누구를 의식하느냐, 예수님 생각하고 교회 보통 안 나와요. 누구를 생각하느냐 하면, ‘나‘ 생각하거든요. 오늘 나 도장 찍었습니다. 출석했습니다. 하나님 나 오늘 교회에 참석했습니다. 5분 늦었지만 봐주세요. 5분 늦은 것 가지고 요번 주 화요일에 계약 건 성사 안 되고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 그 대신 천 원짜리, 만원짜리 한 장 찔러 줄 테니까 그걸로 마 잊어버려 주시고 정상이라고 간주해 주세요. 나부터 출발하면 반대가 돼요. 나라는 부분에서 전체로, 그 다음에 나라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나아가고, 나는 잘 믿고 있는데 내 남편은 안 믿고 있습니다. 라든지, 나는 어떤데 내 아들은 안 믿는데 하면서 주변으로 나아가요. 내가 기도를 해가지고 주변을 어떻게 영향력으로 확산시키겠습니까? 이런 쪽으로 나오더란 말이지요.

 그 다음에 ‘나’ 라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예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는 바깥으로 나아가는 이런 성향, 그 다음에 현재 나는 이런데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됩니까? 현재에서 미래로, 이런 것도 어렵지만 제일 어려운 게 오늘 이걸 다룰 건데요.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미래는 오지 않은 걸 미래라 하거든요. 오지 않은 현재에서 출발해야 되는데. 현재는 이미 있는 거고, 미래는 아직 있지도 않고 없는 거고. 없는데 어떻게 있는 것부터 출발해서 없는 게 정상인데, 없는 것에서부터 어떻게 있는 것을 엮어낼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가 우리 속에서 떠오를 수 있겠습니까? 난처하지요. 이것부터 먼저하고 본문 16절 어려운 말 다윗의 무너진 장막, 퇴락하는 그 대목을 제가 아모스9장에 나오는 말씀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신약에서의 구약해석은 문법적, 언어적 해석, 기호학적 해석으로 될 문제가 아니에요. 매일 신학자들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성령의 관점에서 구약의 대목을 뽑았는데 신학자들은 성령을 모르기 때문에 문학적, 문법적으로 그렇게 하면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나는 행복하다. 내가 행복하다는 것은 반드시 행복하다고 하면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행복이 주어집니다.

그 비교대상이 인간은 뭐밖에 없느냐, 과거밖에 없어요. 과거의 나는 이건 예상도 못 했는데 과거의 어떤 어려움을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문제가 해결되어서 나는 행복하다. 우리는 이 과거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과거의 경험에서 오는 거예요. 과거가 경험 속에서 정립이 되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과거의 5000억 있었는데 지금 2000억 밖에 없다면 자기는 지금 불행한 거예요. 요새 이 맹하고 숙희하고 밥 못 먹고 사는 거 아니잖아요. 어떤 불행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과거에 경험한 게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특히 과거의 복수하는 것. 보복하는 것. 과거에 나한테 심하게 했지. 어디 두고 보자. 이런 것들이 자기를 스스로 불행하게 만들어요. 지나간 자기의 경험에 의해서 행복을 하기 때문에 행복의 근거는 결국은 자기의 경험입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10년 만에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는데, 내 쪽에서 하는 말이 나는 금강산에서 칼을 갈았다. 이제 한 번  두고 봐라, 고 했는데, 저 쪽에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리 나오면  곤란하잖아요. 내가 한 경험 속에 왜 니는 빠졌느냐 말이지요. 왜, 니 맘대로 빠졌어? 그럼 그 쪽에서 ‘나는 니가 아니니까. 나는 니가 아니야.’ 나는 사우디에 가서 중장비 몰고 있었는데 건설현장에서, 너는 아버지의 복수고, 나는 기억이 없는 거야. 그럼 복수해도 입맛이 없지요. 상대방에서 ‘아이고, 들켰구나!’ 이리 나와야 드라마가 되는데. ‘아버지의 원수를…’ 이러고 있는데 ‘지금 누구신지요?…’ 결국 인간은 자기 경험에 웃고 우는 거예요.

그러면 경험은 놀라운 사실은 자기만이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허수아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인간들이 그냥 허깨비, 허구, 허수아비라는 점을 오히려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나의 경험밖에 기억 못 하는 허수아비라고 느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허수아비이면서도 남들 다 알고 있는데 혼자서만 허수아비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에 본인의 인생이 힘들어지는 겁니다.

부부 사이에 내가 이 만큼 해줬는데 왜, 너는 안 해줘. 그거는 이 만큼 해 줄 때 그 만큼 자기 해줬다는 경험이 잊어지지 않고 그걸 구축해서 이만큼 해줬으면 반드시 반대급부로 저쪽에서 그만큼 해줘야 돼. 라는 것을 자기 공식을 꽉 붙잡고 있다 보니까 남편은 기억 없는데 혼자 일방적으로 경험을 하다보니까 자기 행복에 수치에 항상 누락이 되는 거예요. 결핍이 되는 거예요. 자기 딴에는 해준다고 하는데 기대치를 만족시킬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허수아비라는 것이 어디서 와야 되는가, 이게 바로 미래에서 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미래에 주어질 말씀을 가지고 먼저 우리로 하여금 맞닥뜨리게 하는데 이 경험은 우리가 기대한 경험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확장된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공된 주님의 경험에 우리가 합류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기에 보면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형성됩니다. 예수님의 몸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미래입니다. 현재는 뭐냐 하면 머리 따로, 귀 따로, 코 따로, 입 따로 부유하고 붕 뜨고 있습니다. 장차 내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내 모습은 영광스러운 모습이거든요.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하시고 의로우신 자를 영광스럽게 하셨느니라. 성경에 보면 영광스럽게 했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어려운데, 이미 주님께서는 미래에 너는 이미 영광스러운 존재로서 이미 확정이 되어 있어요. 확정이 되어 있는데 대전에 사는 우리가 영광스럽다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내 영광을 찾다보니까 이게 파편화 되어있어요. 파편화. 뚝뚝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영광스러운 게.

내가 자식을 키울 때 자식이 예상대로 공부를 잘하면 나는 자식 키우는 보람을 느끼며 나는 영광을 ‘나는 역시 영광스러워!’ 라고 영광을 얻는데 그 영광이 장차올 전체의 영광이 아니고 일부의 영광이 해당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여기 있다면 다시 성적이 5등에서 2등으로 올렸다하면 갑자기 다른 영광 버리고 ‘야, 저 자식은 내가 공부시킨 보람이 있다. 올인 해볼까?’ 라고 이 영광을 그만  붙잡아서 거기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유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되어있거든요. 피조물이. 피조물이 하나님 섬기는 거 기본이잖아요.

그런데 섬기는 것은 뒷전이에요. ‘미안합니다. 하나님. 이 애가 지금 고3인데 신경 바짝 썼다가 대학 들어가면 그 다음에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은 너무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넓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만 보고, 좁은 것만 보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너는 영광스러운 존재야!’ ‘네가 세리, 창녀라 할지라도 하늘나라는  너를 영접해.’ 그 풍부한 영광에 맛을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맛볼 뿐이지, 전체적으로 파악을 못하고 작은 것에 정신을 쏟아버리는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겁니다.

 수요일날 그런 설교를 했는데 잠깐 대목을 이야기하게 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건너 왔을 때 베드로가 뭐라 했느냐 하면 제게 주시라면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했어요. 다른 제자들이 보면 이건 가당치 않고 황당한 거죠. 중국영화에도 있는가 몰라, 그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이 주님한테 기대할 때는 무엇이 중요하느냐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요 점인데, 사람이 기대하는 것을 원할 때는 내가 현재 과거의 경험가운데 결핍된 것, 이건희에게 빼앗긴 유산을 받아 챙길 때, 영광이라 생각하는 것, 그런 정도, 과거에 내가 결핍을 느낄 때 그걸 마저 채워줄 때 우리는 나의 행복이 되는데.

베드로 같은 경우는 평소에 물 위를 못 걸어서 환장한 사람입니까?  베드로는 평소 세숫대야의 물 위를 풀장의 물 위를 못 걸을까 싶어서 주님을 만나면 기어이 전수 배워서 물 위를 건널 거야, 그걸 기다렸던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겠다, 하는 것은 그 때 그 순간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왔기 때문에 한 거예요. 이것은 뭐냐, 그냥 베드로의 과거 경험에 ‘나는 물 위를 걷고야 말리라.’ 이게 없었다 말이에요.  과거에 없었다는 것이 뭐냐, 주님이 미래에서 가져다 준거예요. 주님께서 미래의 우리가 물위를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우리의 몸이 해야 할 것을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이걸 하이테크 용어로 철학적으로 ‘선취’라 해요. 미리 취한다. 미리 취한다는 것은 시간적 요소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루하루 살라는 것은 장래에 미래에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필요해서 어떤 일을 맡기는데 우리는 너무나 생각이 과거적이기 때문에 ‘주님, 저 기도 할 테니 뭐해줄 건데요?’ 매일 헌금 할 테니까 우리남편 병을 낫게 해 줄 거예요?‘ 자꾸 뭔가 과거의 결핍된 걸 마저 채우는 용도로 주님을 자꾸 흥정하고 이용하려고 나서는 겁니다.

과거로 자꾸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질 않아요. 왜, 우리는 허수아비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허수아비로 만드는 이유는 아무것도 존재 아니라도 구원해 준다는 그 은혜성, 일방적인 100% 은혜, 99.9%은혜이고, 1% 행함이 아니라  100% 예수님의 행함의 근거해서 구원을 하는데, 우리는 자꾸 과거를 생각해 가지고 나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자꾸 한 쪽 발을 끼어드는 거예요.  그럼 치면서 ‘발 빼! 손 빼!‘ 만드는 거예요. 왜, 들어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의 공로가 들어가 버리면 하늘나라 같지 않아요.  하늘나라는 전부다 그냥 다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누리는 세계가  하늘나라지, 우리가 거기서 비교하고 경쟁하고, 세상에서 누가 더 잘났느냐, 싸움하는 동네 아니거든요.

하늘나라가 구멍가게 하는 사람하고 대형마트 하는 사람이 하늘나라 가서 멱살 잡을 일 있습니까? ‘니 일요일날 논다해 놓고 왜 안 놀았어?’ 그런 일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대형마트 하는 사람! 하이마트 하는 사람! 홈플러스! 너도 허수아비야! 구멍가게 한다고 억울하다고 한 너도 허수아비야! 둘 다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는 공통요소가 미래에서부터 주어지는데 둘 다에게 묻는 거예요. 누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가? 못하지요. 어떻게 인간이 물 위를 걷습니까? 그건 우리의 과거의 경험 속에서 예상도 못할 일입니다. ‘집사님, 과거에 물 위를 걷고 싶었어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다 말이지요. 베드로도 왜 걷느냐 하면 베드로가 고기를 잡을 때 나는 죄인이라 했잖아요. 멘트하나 하나가 다 사도바울 서신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베드로가 선배잖아요.  먼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적용해 버리면 그걸 특별화, 개별화 시킨 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에서 이걸 보편화시켜 버립니다. 일반화 시켜 버려요. 예를 들면 기성복 있잖아요. 기성복의 장점이 뭐냐 하면 쥐나 개나 다 맞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기성복을 만들기 위해서 그 기성복의 원 모델을 베드로에게서 삼는 거예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이걸 베드로의 멘트로 끝나면 안 돼요.

이건 뭐냐 나는 너를 개별을 보편화시키고 확대시키겠다, 이걸 교회라 하는 겁니다.  이름이 뭐냐 하면 오늘도 본문에 나옵니다만, 시몬, 또는 시므온, 시몬아, 이름을 너로 베드로로 바꾸겠다. 이건 뭐냐 하면 베드로라 하는 일어난 그 현상을 그걸  캐스팅해서 그걸 확대시키는 겁니다. 왜 확대시키느냐 하면  베드로의 신앙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만남, 관계, 관계 자체를 다음번에 다음 세대에 나오는 모든 교회에게 동일한 관계로서 수학에서 일반식 시키는 거예요. H2 + O는 H2O 잖아요.  이게 화학방정식 일반식이잖아요. 이게 북한하고 필리핀하고 다릅니까? 아니지요. 북한, 필리핀 다 관계없잖아요. 여기는 모든 것이 일반식이 공동 일반식처럼 인간은 다 허수아비니까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공식이 중요한 거예요. 공식만 중요한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 공식보다 그 공식을 믿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달라붙는 경쟁자 있는 거예요. 그걸 미리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스스로 버리도록 한 겁니다.  3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그렇게 좋은 멘트, 좋은 믿음의 관계를 했지만 그 관계라 하는 것은 그냥 딱딱한 파이프 관계가 아니고 고무줄 관계가 되어서 그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수님 자신을 저주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가룟유다는 그런 고무줄이 없기 때문에 저주하면 그걸로 관계가 끊어져 있지만 베드로 같은 경우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베드로에게 통해서 해서 한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멀리 예수님을 해해도 턱하니 어디로 당겨집니까? 예수님에게로 오지요. 그런 관계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야 된다 말이지요. 베드로처럼 마음껏 저주하고 마음대로 사세요. 저주하되 저주 안하기로 회개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내가 예상하지 않은 주님의 관계가 더욱 중요시 여기는 경우와 사태들을 사건들을 대구나 대전바닥에서 유발시킵니다.  아마존에서 유발 시키는 겁니다. 세상에 어느 구석에서든 유발시킵니다.

그럴 때 그런 찬스 놓치지 않고 딱 주입하는 게 뭐냐 하면 옛날의 구약에 있던  예언의 말씀이 지금 너희에게 이루어졌느니라. 라고 하는 겁니다. 신학자들이 성경을 해석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그들은 자기 경험 속에 박사학위를 따야 된다는 그걸 따야 자기는 행복해진다는 그야말로 허수아비가 안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였다는 거예요. 왜, 허수아비인가, 를 알기 위해서 신학을 했다면 괜찮아요. 그게 아니고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이만큼 뛰어난 존재고 박사학위 따고  신학교 교수하고 박사 따서 당회장되면 나는 당회장 큰 교회 갈 수 있다는 이러한 자기의 과거로부터 출발한 자기 미래상을 스스로 구축하다 보니까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세리와 창기보다 더 못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 확~ 당겨주는 고무줄이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 했습니까? 니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주님이 만들어 놓은 띠가 있어 가지고 아무리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해도 주님이 계획한대로 잡아 허리띠를 잡고 딱 잡아 당겨버리면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게 미래에서 과거만 생각하는 우리를 미래에서 잡아당길 때 ‘주여,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당겨지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과거가 주는 그 스트레스, 그 존재의 무게를 우리는 내가 지어낸 마귀의 시험이고  우리는 분석되고 파괴되는 겁니다.

또 내 스스로 쓸데없는 기대를 많이 했구나! 원래 기대가 많으면 실망도 많잖아요. 기대하게 되면 집나간 7귀신 다 붙습니다. 기대나 기도했지? 그러면 기도를 이렇게 하면 응답돼! 다른 사람은 그렇게 응답하는 사람 있어. 요렇게 해봐! 그러면 응답될 거야. 그걸 파악해. 갑자기 우리는 허수아비가 아니고 그 기도와 기대가 응답이 됐을 때 그 모습은 내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신된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상상하면 상상할 때는 즐겁지요.  하지만 그 영광은 주님께서 준비한 영광이 아니고 바로 내가 마귀에 시험받아서 내 자존심을 챙겨주는 그러한 쓸데없는 허수아비 같은 영광이지요.

그래서 꿈은 성취될 꿈을 꾸는 게 아니고 그냥 성취돼도 꿈은 꿈으로 남습니다. 이게 인간의 약점이에요. 꿈이 성취되면 그것처럼 허탈한 게 없습니다. 허무합니다. 아이고, 내가 기껏 이것 얻으려고 내가 그렇게 용을 썼느냐? 이거 얻으려고? 이거 안 될까봐 싶어서. 제가 운전면허 6번 떨어졌습니다. 마지막 1번 떨어지면 1년 넘어가지고 새로 접수할 참인데. 왜 떨어졌느냐 하면, 되고 난 뒤에 뭐할 것이냐, 그것 생각하느라 떨어졌어요. 되고 난 뒤에 뭐할 것이냐, 놀러 갈 것이냐, 그걸 생각하니까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럴 때, 내가 5번 째 떨어질 때, 내가 기도를 안 했나? 온갖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는데…. 막상 6번째 되고 나니까 느낌에 역시 될 놈은 되게 돼있어. 그만큼 5번이나 떨어지고 6번째는 될 수밖에 없지. 내가 안 된다는 게 문제 있지,  당연히 될 거 돼있지. 감사는 몇 초 감사하고, 감사는 날아가 버려요. 자, 됐으니까 그 다음에는 뭘 하지? 이리 되거든요.

그래서 뭐냐 하면 사람은 꿈이 현실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꿈 자체가 이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꿈은 계속 생산되기를 원하지 꿈이 현실화되어 버리면 더 이상 꿈이 없는 상태가 되면 그거는 인간에게는 오히려 도저히 상상도 하기 싫은 그런 현실로 오는 거죠. 그래서 남편이 죽었다든지, 아내가 죽었다든지, 자식이 죽었다든지 하면 죽은 사람은 그만이지만, 산 사람이 충격이 되는 이유가, ‘당신 중심으로 꿈을 꿨는데 당신이 뭔데 내 꿈을 갈기갈기 다 찢어버리느냐 말이지요. 당신이 내 소망이고 내 희망이고 모든 것인데. 당신한테 모든 걸 올인 했는데, 그래서 남편이 바람피워서 아내가 치근대는 이유가 그거잖아요. 조건이 바람 안 피운다는 조건하에 밥해주고 라면이라도 끓여줬는데. 나중에 그건 니 생각이지, 그러면 남편들이 흔히 무책임한 발언을 하지요. ’어디 니도 피워라.‘ 맞바람 피우자, 누구 바람이 센지 해보자.’ 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화가 난다는 경우는 바로 내 꿈의 실현에 당신이 왜 훼방하느냐 이리 되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고 외부에서 와요. 외계인처럼.

외부 → 안으로, 또는 주변 → 나란 중심을 가지고 오시는 겁니다. 오셔가지고 겹치기 돼요. 겹치기. 연상이미지가 겹쳐버려요. 겹치면 우리는 뜻하지 않게 호성이 일어납니다. 내 자리가 이렇게 있는데 주님의 자리가 이렇게 겹칩니다. 겹쳐 버리면 우리는 어떤 때는 내 생각하다가 어떤 때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 생각하다가 왔다 갔다 해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모호합니다. 모호해 지니까 내 자체가 누구인 줄을 모호해지고 내 자체가 뚜렷하지 않고 모호해 지면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확실한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몸부림을 치게 돼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증거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은 할 수 있는데 그럼 내가 예수 믿는다, 안 믿는다, 를 내가 확신해야 되는데 확신할 수 있는 나의 취할 수 있는 나의 행동과 투자할 수 있는 나의 종교적인 기능은 뭐지? 이걸 찾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개꿈이라는 거죠.

니가 니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는 것은 그동안 최고 너는 누구한테 경배했느냐 하면 오직 나는 나에게 경배한 거예요. 이걸 교회에서는 신앙이라고 그렇게 거짓말로 가르쳤고, 사기 쳤고, 목사가 사기 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가 모르니까 설치고. 교회 와서 말씀은 ‘여러분, 자신의 경배를 멈추세요. 스텁!’ 그걸 외쳐야 되는데, 내가 이런 인간이 되어야 내 정체성에 만족하겠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나에게 무엇으로 보태겠습니까? 이걸 흥정하러 교회오기 때문에 교회 가서 예배 끝나고 났는데  ‘역시 나는 신앙인이 맞아!’ 라고 우기다가 어떻게 엮여서 욕하고 멱살 잡다가 나, 지옥 갈 존재가 아닌데. 흔들린다 할 때 이게 정상입니다.

 겹치기,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흔들리게 하시는 겁니다. 흔들리는 모든 흔적과 과정을 고맙게도 12제자에게 미리 앞서서 보여 주신 겁니다. 고맙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다 보여주신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게 된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이삭 이름자체가 뭡니까? 이삭의 이름 뜻이 뭐냐 하면 ‘비웃음’이거든요. 큭~큭~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다른 제자가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아니 물 위를 걷기위해서 예수님을 믿은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돌발행동을 그렇게 하느냐 말이지요.  그리고 또 물 위를 걷게 한 주님의 의도는 뭡니까? 그러면 물 위를 못 걷는 다른 제자들은 지옥 갑니까?  갑자기 물 위를 걸었다고 얼마나 우쭐대는 것을 상상하면 밉상이에요. 밉상. ‘니는 물위를 걸어 봤어?’ ‘물 위를 안 걸어봤으면 나한테 말 하지 마!’ 이리 나올 수 있다 말이지요. 물 위를 걸은 사람 교회 간증하면 교회 가득 찹니다. 물 위를 걸은 사람 대집회해서.

그런데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물 위를 걸었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할 수 있는 환경에 베드로가 나를 덮쳐 달라, 나는 나로 과거에 따로 있는데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는 순간 자기의 몸은 포기하고 그냥 주님의 환경이 나를 덮쳐 주시면 그게 바로 믿음이고 저는 그걸 만족하겠습니다. 되는 거예요. 그것이 신약성경에 보면 베드로한테 뭐냐 고린도전서15장에 나오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물 위를 걸은 게 신기합니까? 나는 날마다 죽어도 좋아! 그게 더 신기한 겁니까? 물 위를 걷는 것은 맞춤복이고, 베드로한테 그 상황에 맞춤복이고, 기성복은 일반식은 모든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다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입니다.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남들은 죽었다하는데 주님은 잠자고 있다 하지요. 지금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고 있다. 잠자고 있다는 것은 본뜻은 뭐냐 하면 좀 이제 쉬란 말이지요. 고생 그만 하고, 그걸 어디서 쉬냐, 본향으로.

그래서 오늘의 강의를 함축해서 말씀드리면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작전’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사람을 정말 너무 편하게 만들어요.  서산 아니에요. 돌아갈 곳이 있어요. 돌아갈 곳이. 그런 여유로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세상에 어디를 여행해도 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편안함 속에 있는 겁니다. 그 돌아갈 곳으로 모든 과정, 필요한 모든 것은 예수님이 알아서 거기에다가 채워 주십니다.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보면,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위해서 내가 화목제물로 너희를 의롭게 했느니라, 고린도전서5장에 보면 자기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느니라, 라는 용어로 이야기되어 있어요.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미래에서 우리를 채워주시는 거예요. 미래에서. 잔디에 물 뿌릴 때 어떻게 합니까? 잔디가 알아서 물을 짜냅니까? 아니지요. 잔디는 가만히 있으면 주인이 수도꼭지에 호스 해 가지고 쭉 뿌리잖아요.  그것처럼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생명수를 우리에게 뿌려주면 우리는 잔디가 본래의 잔디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말이지요. 

천국은 이 땅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 합당한 성격이나 품격이나 품성은 주님이 생명수를 줘야 되지 우리보고 스스로 천국갈 수 있는 품성 기르라 하면 우리는 기껏 주워 모은 재료들이 세상 것에서 들었던 고상한  윤리도덕 그것밖에 안돼요. 그런 것은 쓰레기 같은 것들이에요.  주께서 주시는 것으로 우리는 크면 돼요. 크는 방법을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 고향으로 서서히 가고 있구나!’ 그리고 거기에 고향으로 합당한 사람으로 변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 돌아가는 모든 것은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의 편지나 이런 것, 하나의 공식으로 일반식으로 나와 있습니다. 공식으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내가 피를 흘림으로서 너희는 너 자체가 의가 되리라가 아니고 그 자체가 의가 되는 거예요. 의를 가져라, 도 아닙니다. 의를 따 먹어라. 던지, 의를 소유 하라도 아니고 가만히 있어! 니 가만히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주님 보시기에 의가 된 거예요. 의는 달라지는 게 아니고 의의 품성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자체가 의라니까요. 죄 짓고 뭘 해도 그 자체가 의라니까요. 그걸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 일반식을 믿지를 못해요. 일반식을.

‘아이, 의롭게 열매를 맺어야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그게 의인데.‘ 그건 주체가 어떤 자기 주체를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성경 말씀들을 QT하면서 뽑아 모았는데 꽃다발 모았는데 그 꽃다발은 현재 과거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얼마가지 않으면 다시 무용지물이 돼요. 나는 다시는 술 안 마신다. 예수 믿고 술 끊었다. 그건 본인이 장담 못합니다. 또 성질나면 ’에이, 하나님이여, 1년에 한 번 정도는 괜찮지요?‘ 해서 지가 지 법을 만들어가지고 지 맘대로 해 놓고 그 대신 회개 몇 번 하겠습니다. 이리 하는 거예요.

신부들이 필요해서 삐딱하게 앉아가지고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문 열고 봉창 열고 묻고, 그저 대충 묻고 그런 식이다 이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해서 의가 되는 게 아니고 세상에 의가 되어 가는 게 없어요. 어떤 짓거리를 해도 주께서 키우시는 사람은 그 자체가 점수 몇 점을 맞던지 간에 어느 단계에 왔던지 관계없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그냥 굴러가는 거예요. 그게 생명수의 효과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투자해 버리면 우리는 노력한 성과만큼 우리가 투자한 노력만큼 성과가 그 만큼 분량대로 비례되게 돼 있지만 주님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되기 때문에 착함 따라서 의가 정진되거나 점수가 높아지거나 격이 높아지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십자가할 때는 잘 이해하다가 이 대목에 와서는 어렵도다! 누가 믿을 수 있느냐? 그렇게 나오는 사람이 많아요.

그거하고 방금 이야기한 것하고 오늘 본문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사도행전 15장 16절 봅시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라는 구약성경 말씀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야고보가 이런 이야기하는데 야고보가 그 전에는 몰랐다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몰랐다 말입니다.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사도바울님 수고 많았군요. 예, 하나님 일 잘 하세요. 우리도 협조하겠습니다. 앞으로 형제로 잘 지내겠습니다.‘ 이리 하면 될 텐데 왜 갑자기 야고보가 이미 지나간 과거이야기 아모스 9장, 과거를 왜 거론하느냐 하면 우리가 일어난 모든 것은 이미 외부에서 결정된 것을  확인 차 이 땅에 확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잠시 태어났다가 잠시 살다가 주님품안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씀의 전체 구조에서 우리가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박수를 칩시다. 이리 되는 거예요. 야고보가.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애쓰십니다.’ 이게 아니라 당신이 어디서 안디옥에서 먼 지방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구약에 이런 예언이 있었고 이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지금도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서 주께서 약속한 모든 말씀을 다 성취하는  과정 속에 있군요.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예수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주’가 붙어요. 예수 믿으면 구원 못 받아요. 앞에 뭐가 붙어야 합니까?  주 예수를 믿는 거예요. 주가 뭐냐 하면 주가 무슨 뜻이냐 하면, 완료 또는 완성의 의미입니다. ‘다 이루신 주를 우리가 믿습니다.‘라는 거예요.

우리한테 어떤 지시와 명령을 주는 예수님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그러면 또 그 명령받은 우리가 새롭게 열심히 또 해야 돼요. 이거 못하면 또 탈락이라, 그게 아니고 이미 다 이루신, 주란 뭐냐 하면 구약에선 여호와거든요.  여호와라는 것은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 주님이 약속한 것을 주님이 알아서 홀로 다 성취하신 그 점을 우리가 다 믿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잔디밭에 호스로 물줄 때 ‘이건 온전한 물이 아니야, 이건 물이 되려고 하는 70% 물이야.’ 이런 물은 없거든요. 그냥 우리에게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있잖아요. 그 이야기도 참 재미있어요. 물 뜨러 와가지고 양동이 버리고 가는 말도 안 되는 아줌마라. 물 뜨러 왔으면 물 떠가지, 양동이는 왜 놔둬요. 집안 식구들 목말라 기다리고 있는데. 우물가서 물 떠가야 될 것 아닙니까? 양동이는 왜 버려둬요. 노선이 갑자기 역사노선에서 묵시노선으로 바뀌게 된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안에 우물이 그 여인 안에 우물을 집어넣어 버린 겁니다. 목마르지 않는 물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게 하나의 맞춤복이에요.

앞으로 모든 신약의 모든 성도가 그 안에 각자의 영원한 우물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물은 지시와 명령이 아니고 그 자체가 완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행동은 뭐냐 하면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죄이기에 그 우물에 의해서 어떻게 용서를 받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알게 하기 위한 우물인 거예요. 우물을 통해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물에 나온 생수가 죄인 것을 만들어 놓고 그 죄를 다시 우물이 나오는 예수님의 피의 효과로서 죄를 씻어 버리고, 그러니까 약주고 병 주는 것이 구원하는 용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도구가 되고 하나의 물감 또는 도화지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주께서 어떤 그림을 그리든지 그 그림은 다 다르더라도 다 동일한 것은 일반식은 뭐냐, 너가 어떤 것을 그려도 너는 나한테 죄고 주께서 그려진 죄고 주께서 실어진 죄인데, 이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은혜를 줄 때는 어떤 그림에 관계없듯이 다 이룬 거예요.

그래서 이건O 형들은 상하이에서 별장에서 그냥 살면 돼요. 삼성은 각자 살면 돼요. 일반식에 소속되면 누구든지 구원받기 때문에 특별히 내 양복 괜찮다, 이걸 주장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왜 그걸 주장해요. 과거에 근거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꿈을 이룰 때, 인간은 행복을 느끼는 육적인 그런 결함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너무 기대와 꿈과 비전을 너무 많이 뒀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바꿔야 돼요. 안 바꾸면 자꾸 술 마시고 이불 덮고 꿈만 자꾸 키워가지고 나중에 우울증 걸립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40대 중년의 아줌마들이 결혼해서 애 키우고 난 뒤에 테라스에 원 탁자에 옷깃 걸쳐 놓고 커피마시며 앉아 바깥 내다보면서 남편은 일 잘하겠지, 아이들은 공부 잘하고 있겠지, 할 때 갑자기 위에서 물세례가 퍼 부울 때 분위기 다 깨지지요. 초치는 겁니다. 주께서. 별거 있나요. 몸베 입고 있으면 되는데.  괜히 폼 잡다가. 그런데 그 반면에 다른 사람은 성경공부도 다 잊어 버려요. 바빠요. 애들하고 들볶이는 바쁜 시간에. 그럴 때 는 오히려 그것이 지나가면 내가 오늘 하루도 어떻게 후딱 보냈지, 이러면 그 존재의 무게를 신경 안 써도 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바빠야 돼요.

15장 16절 봅시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월요일날 언약이란 강의에서 이게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다윗의 장막이라는 것이 다윗이 기거한 장막이냐, ①번 옛날 과거에 찾았던 그 청년, 골리앗을 이겼던 청년, 다윗의 생활공간이었는가, 아니면 ②번 다윗을 다윗 되게 했던 주님의 공간이냐,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②번이 정답이에요. 다윗은 다윗 될 수가 없어요. 보아스하고 룻하고 결혼한 것도 이미 다윗을 내다보고 한 미래의 다윗을 겨냥해서 보아스와 룻이란 이방여자와 결혼하거든요. 그것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혈통과 이방혈통을 섞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천국백성을 만든다는 하나님의 방정식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구원은 죄가 스며들지 않으면 언약 밖에 있는 죄가 스며들지 않으면 언약이 만들어지지 않아요. 언약이 만들어지지 아니하면 이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지 않아요. 어렵게 이야기했지요. 그걸 면역성이라 해요. 우리 속에 병균이 들어오지 않으면 새로운 병균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이겨내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 몸 안에 우리의 지은 모든 죄는 예수님 몸 안에 다 들어있어요. 우리가 새삼스럽게 죄 지을 생각 안 해도 괜찮아요. 그 수고를 다 하셨다니까요.

‘주여, 제가 이런 살인죄를 했습니다. 간음을 했습니다.’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니가 지기 전에 내가 다 갖고 있어.’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을 때 이미 죄 속에 풍덩 들어간 겁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으로 세례 받을 때, 세례관이 말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세례 받을 죄가 없는 분이 세례를 받습니까?’ ‘이래야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세례 나한테 해 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 구원이 문제 아니에요. 주님의 일을 아버지의 일을 해야 되니까. 그렇게 죄 속에 들어가서 잠영해서 바깥으로 튀어 오른 거예요. 돌고래처럼.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예수님의 죄 없는 상태에서 떠올라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죄 있는 상태에서 부활하니까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왔을 때는 어떤 악마도 우리 과거의 죄 우리 일상의 죄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는 근거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나를 위해서 아버지가 너를 위해서 죽었는데 내가 나서서 배웅하는데 보디가드 하는데 누가 개인적인 접촉을 왜 시도하느냐 말이지요. 니가 스스로 개인적인 접촉을 시도하지 말란 말이지요. 개인적인 접촉을 시도해 버리면 중보자의 의미가 어디 있어요? 중보자의 의미가.

한국교회는 이상해요.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 치워버리고 하나님하고 직접 거래 하려고. 주를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믿어요.  왜 할머니들이 성경을 모르니까. 옛날 조물주 사상이 있어가지고 하나님아들이라 하니까, 아들? 아들이니까 형편없이 보는 거예요. 인자니까. 믿으면 그만이고, 이건 부록이니까, 옵션인 줄 알고. 예수님은 나를 믿지 않고서는 아버지에게 갈 자 없다. 이 말은 못 간다는 뜻이에요. 어딜~ 하나님한테 간다고 해서 가는 게 아니고 내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만 아버지가 있고 내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지, 내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버지도 없는 거예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말이지요.

기독교신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기독교신자, 그리스도, 그 말 그대로 예수님 믿는 사람입니다. 이걸 사람들이 겁을 내는 거예요. 왜냐 하면 예수가 인간이거든요. 인간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공자도 있고, 부처도 있고, 소크라테스, 맹자도 있는데, ‘와 너는 자꾸 예수만, 므슬람도 있고 하는데 예수만 자꾸 편파적으로 예수만 다 똑같은 인간을 예수만 뛰어나느냐,  다른 사람도 같이 해 달라 같은 성자니까. 그렇게 할 때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거 다 허수아비다. 예수님 빼놓고 다 허수아비다.

다윗을 다윗이 보아스 룻은 여러분들이 아시지요. 뭐냐 하면 땅 팔아서 모압 갔잖아요. 가뭄 들어서. 그런데 원래 그 땅은 누구 땅이냐 하면 나오미 땅이 아니에요. 하나님 땅입니다.  땅은 못 팔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그 당시 임대차 계약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레위기 26장 끝에 보면 나와요. 천국에는 자기 소유라는 것이 없어요. 천국 가서 몇 평 배당 받을 랍니까? 천국에는 땅 배당 없어요. 천국에는 복덕방 같은 거 없습니다. 자기 소유의 땅이 없습니다. 전부가 우리 거고, 전부가 주님거지, 면류관도 반납하는 거예요. 면류관도.

그걸 미리 지상이란 역사, 이스라엘이란 땅을 통해서 그걸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항상 미래의 그림자가 이스라엘 땅에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과거가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데 그거는 미래가 이스라엘 되게 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몰랐어요. 우리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미래가 미래의 필요해서 지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예요.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하늘의 고향으로.

땅을 팔았으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땅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이, 땅 있나?’ 땅이 없는 거예요. ‘아이고, 내가 대신 갚아줄게.’ 이걸 헬라어로 ‘고엘’ 이라 해요. 고엘. 욥기에서는 이걸 ‘대속자’라 합니다. 먹고 살라고. 하나님 버리고, 예수님 버리고, 땅 다 팔아 버린 것을 되찾아 주는 사람. 관계, 고무줄을 되찾아 주는 분. 떨어진 고무줄을 되찾아 주어서 이제는 띠 띠고 원치 않는 천국으로 가야 될 운명. 물 위를 못 걸으니까 물 위를 걷게 하는 그 모든 관계가 주님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모든 걸 되찾아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다윗인데, 다윗을 앞에 붙어요. 뭐가 붙느냐 하면 언약에 합당한 다윗으로 만드는 작업을 누가 하느냐, 보이는 다윗을 이스라엘 속에 앞장세우면서 배후에 보이지 않는 분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 보이지 않는 분이 다윗에게 남겨준 언약을 완성자로 올 때 다윗의 자손으로 다른 말로 하면 주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보고 뭐라 했습니까?  소경된 자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지요. 다윗의 언약을 이루실 분이 다윗을 앞장세워 놓고 약간 비겁하지요. 약간. 쉽게 말하면 재하를 앞장세워 놓고 나는 뒤에 있다가 나는 뭐로 오느냐 하면, ‘내가 재하다!’ ‘내가 재하야.’ ‘진짜 재하 나야.’ 라는 식으로 오시려고 먼저 재하를 보내고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나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그런 길 안가고 싶은데 자꾸 뒤에서 밀어, 좀 가만히 있어 보세요.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시편이거든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자꾸 미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개별적 본인만 알아요.  오늘날 성도처럼.

다른 사람은 내 인생에 대해서 관여 못하지만, 주님은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알아볼 때, ‘밀지마세요. 나도 좀 잘 하려고 하는데.’ 이래 가지고 다윗으로 하여금 언약적인 다윗으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그 다윗을 벗겨버리고 정식으로 다윗의 자손의 이름으로 나타나시는 그 주님.  그것을 야보고가 지금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 다윗이 자기 장막을 책임지고 다시 일으키는 거예요. 다윗이. 그럼 이 다윗은 죽은 골리앗하고 싸워 이겼던 소년 다윗은 아니고  다윗을 앞에 내세우고 배후에서 ‘다윗이 움직이지?’  이처럼 움직이는 분이 다윗의 자리에서 주의 이름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상상한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그런 하나님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건 항상  인간이 자기를 모델로 해서 자기를 확대해서 그걸 하나의 자기 이상체를 신이라고 규정한 모든 주변에 있는 나라를 인간이기 때문에 만들어 내고 조작해 낼 수 있는 모든 신과 차별되는 하나님으로 오시는 겁니다. 어떻게?

말씀에 성취하는 모습으로. 그 말씀의 내용이 뭐냐, 구약에 있던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엮여져서 성취성을 보여주는가를 그걸 보여주는 모습으로 온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 소원을 전개하면서 나는 옛날에 구약 때 이런 소원이 있었는데 이런 소원이 신약에 이렇게 성취되었고, 그 성취된 속에서 너희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너는 너 뜻이 아니고 나의 뜻에 의해서 구원 되는 그런 공간이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예상치 못했던 것,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천국을 약속 안에 숨어있었던 천국이 예수님과 더불어서 천국으로 드러나는 그 천국에, 천국을 뭐라고 하느냐, 신약상에 이것을 ‘예수의 나라’ 또는 ‘아들의 나라’라고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나라라가 아니란 말이지요. 처음에 강의할 때 했지요. 비교하는 것. 내가 들어가고 싶은 나라는 불교에서 잘 이야기해줬지요. 극락입니다.  회심곡할 때 뚝딱 두드리며 하는 거 있지요. 그게 극락이고. 이  아들의 나라는 숨겨진 나라, 들을 귀 있는 자만 갈수 있는 나라,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매일같이 천국에서 미래에서 날아온  검색대와 검열소를 주님께서 늘 설치해서 그걸 늘 통과하게 식으로 우리에게 사태가 벌어집니다. 늘 공항검색대예요.  매일같이 우리는 검색당하면서 ‘너는 아들이구나!’ ‘너는 아들 아니, 아니 아니야. 너는 이쪽에 빠져 나가.’ 그리고 또 오게 되면 또 검색해서 ‘너 아들 맞지.’ ‘오, 너 아니야, 아니야.’ 라고 하는 그 기준.

그 기준은 바로 말씀의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계속 그 검열대를 통과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지금 검열대가 우리의 마지막 검열대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돼요.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갈 수 있는 검열대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마태복음 하겠습니다.
 공은주 (IP:218.♡.193.60) 12-05-14 19:36 
대전27강-마11장25-30(아버지와 아들)120426b-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1:25-30

마태복음 11장 25절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그 다음에 “숨기시고” 숨김의 작용, 이게 뭐냐 하면 은폐(隱蔽), 인간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인간이 자력으로 그걸 발굴하거나 발견하지 못하도록 ‘야, 여기 숨어있는 걸 가지고, 아! 기어이 내가 찾아내었다. I found it. 나는 그를 발견했어.‘라는 소리를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철학이나 윤리 도덕 어떤 선행.

그래서 숨겨 버리면 어떻게 숨기느냐 하면 ‘못 찾았네.’가 아니라 ‘착함의 끝은 지옥입니다.’ 모든 착함의 끝은 지옥 이예요. 계속 착해 보세요. 지옥 갑니다. 성화 론의 끝은 지옥 이예요. 악마가 거기 서서 줄을 잡아당기는 거예요. ‘착해야 돼, 착해야 돼, 착해야 돼, 반갑다 친구야.’하면서 악마가 얼싸안는 겁니다.

여기 대표적인 단체가 지방교회, 워치만 리, 전부 다 교회 뭔가 불만이 있을 때는 워치만 리 한 번씩 겪습니다. 워치만 리, 위트니스 리, 한 번씩 겪어서 ‘한국교회 썩었어. 교회는 개혁돼야 돼, 역시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거듭나야 돼.’ 이렇게 비판하면서 겪어요. 이게 뭐냐 하면 착했으니까 착한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요. 착한 나를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의 착함을’

기존 교회는 이 지방교회 근처도 가지 못했어요. 착하지도 못하고 착한 흉내 내고 있는 거예요. 숨기는 겁니다. 최고의 착함의 사람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하는 것은 의 문제를 가지고 철저하게 숨겨놓은 의냐, 인간이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드러낼 때만 나타나는 의,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그걸 ‘하나님의 의’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제 나타났으니 로마서 1장에 보면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다. 어떤 빚이냐 하면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 빚을 졌다. 그런데 이 복음이 그동안 숨겨왔는데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이렇게 나타났다는 거예요. 나타난 내용을 보니까 ‘오직 믿음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금 사도바울이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믿음에서 믿음으로 돼 버리면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일반 식, 공식을 해버리면, H2O+O=물이라고 일반식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탁 던져 놓고, 그 다음부터는 일반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뭐를 삭제하는 형식을 드느냐 하면 로마서 그 뒤에는 모든 행함을 삭제하는데, 이 행함을 삭제하면서 여기다 뭐를 거론하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에서를 전부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구약 자체를 보면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 하나의 과거의 아브라함, 아브라함 가고 이삭 나타나고 이삭 가고, 야곱 가고,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건 중첩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이은다는 것은 이삭이 흡수통합하고 이삭이 흡수통합 한 것을 더 추가해서 야곱의 경우가 추가해 버리면 만약에 지붕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그 눈덩이처럼 그 안에 층층이 발생되고 그 층층은 누적된 상황들이 쌓여서 하나의 거대한 하나의 계시의 더미(덩어리)가 돼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생각했습니다. 그 노선을 따라오면 된다. 그렇죠? ‘아브라함? 옳지, 이삭? 옳지.’ 계속해서 증가된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역사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 이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역사의 끝에 이미 이렇게 중첩이 된 끝에 서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의 혜택을 다 누리는 입장에서 우리는 구원받는다.‘라는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성경해석법이었습니다. 이 성경해석법, 이것이 제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해석법이라 했지만, 사실은 현재 모든 신학의 해석법입니다.

목사는 이걸 배워서 합격됐고 이것을 가르치죠. 이것이 강단에서 나올 때는 이런 멘트로 나옵니다. ‘아마추어들아, 칼빈과 루터가 역사적 권위를 존중하라.’ 권위존중을 천주교로 바꾸면 무슨 존중? 전통존중. 성경해석의 주도권은 아마추어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권위 있는 사람들이 한다. 따라서 너희들이 성경을 개인적으로 풀면 위험하니까, 이단에 빠지니까 교회 목사가 있으니까 목사한테 물어서 ‘내가 그 교회 가도 됩니까? 안 됩니까?’라고 물어보고 하라는 거예요.

‘왜 목사한테 묻습니까?’ 목사는 역사적 전통을 가진 개혁주의 신학을 했기 때문에 그 개혁주의 신학은 역사와 전통에 이미 진리로서 보장을 받은 그것들만 추려져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능히 이단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추어처럼 촐랑대고 덤비다가는 그건 이단에 빠지기 십상이니까 목사의 가치는 권위, 강도의 권위, 강도란 칼들은 강도가 아니고 도를 가르치는 걸 옛날 말로 강도라 하는데 강도의 권위 권에 복종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로님, 장로님은 학교에서는 수학과 교수지만 수학은 당신이 권위지만 교회에 와서는 목사의 권위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려면 어린애 같은 믿음이 있어야 되지, 자꾸 교만은 패망의 선봉인데...’ 기둥에다 ‘선지자를 해코지 하지 마라’ 갖다 붙여놓고, 수법이 다 노회에서 배운 수법 이예요. 장로 다루는 수법 이런 거 다 배워요.

그런데 신약에 보면 ‘누가 너희를 가르치리오.’ 해요. 한방에 다 보여줘요. ‘디모데야, 복음이 너를 가르칠 것이다.’ 복음이! 그러니까 목사는 이것만 하면 돼요. ‘저는 인간도 아닌데 십자가 복음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입에서 나올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아니 된장찌개 하는 식당에 가서 삼계탕 달라하면 되겠어요? 나올 게 된장찌개밖에 없는데 무슨 삼계탕을 원합니까? ‘나는 된장찌개 때문에 살았습니다.’ 하면 된장찌개만 먹어야 돼요. ‘나는 삼계탕 때문에 살았습니다.’ 하면 삼계탕만 먹으면 되고, ‘나는 개고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하면 개고기만 먹는다고 나오면 되고.

나는 역사와 전통의 개혁주의 때문에 살았습니다.‘ 이러면 개혁주의만 듣는 교회가 돼요. 그냥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 십자가 피 흘림으로 살았습니다.’ 하면 예수님 피만 나오는 거예요.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뭐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피로 세운 교회, 예수님의 피가 교회 되는 거예요.

‘믿음에서 믿음으로‘에서 여기서 삭제돼 나가는데 이 삭제되어 떨어져 나가는 게 뭐라 했습니까? 행함이라 하잖아요. 행함을 할 때 사도바울은 자기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잖아요. 그러면 바리새인의 해석법을 본인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해석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똥, 오줌, 배설물로 여겼다 이 말이죠. 아까 인터넷 보니까 어떤 여자가 전철에서 대변 본 모양이라. 뭐 정신상태가 어쩌고 나왔죠.

매일같이 똥, 오줌 같은 배설물이 나온다고 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왜 자꾸 자기가 알고 있던 역사적 해석법을 왜 배설물로 여기느냐 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몽땅 다 이것은 내 몸에서는 똥, 오줌, 이런 것들만 나오고 있음을 예수님이 차지했기 때문에 그걸 보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이 오기 때문에 ‘아이쿠, 슬슬 빠져나가는 것들이 다 옛날에 내가 자랑했던 저런 거, 율법에 흠이 없는 저거, 남과 비교해서 얼마나 착한가, 시합해서 내가 우세한 그거.’ 그런 게 죽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어려운 대목이 나와요. 뭐냐 하면 율법으로 의롭다 하는 자는 다 그리스도에서 끊어진 자로다.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러니까 그 둘을 합칠 생각을 아예 하지 마라 이 말이죠. 예수 믿고 율법 지켜서 착한 일 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 말이죠. 그러나 개혁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그동안 남아있던 숙제 풀듯이 미진한 착함을 한번 본대 보이듯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물론 성령을 집어넣어서 자꾸 성경적으로 합당한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역사 본인은 죄인이라 해도 역사의 후대인들이 죄인이라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것을 극대화 시켜서 영웅을 만들어 놓으니까 본인의사와는 달리 본인이 갑자기 죄인 됐다는 한마디 해서 갑자기 위대한 사람 돼 버린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참, 웃을 일이예요. 후대는 자꾸 모방, 흉내를 내기 때문에 그래요. ‘나 부족합니다. 믿습니까? 알렐루야.’이러면 그것 가지고 교인 떨어졌으면 절대로 후에는 그것을 안 써먹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도 사람들이 안 몰렸으면 안 써먹을 텐데 조 용기 목사가 ‘그러므로’ 집어넣는 이유는 그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서 한 거예요. 이거는 선수는 다 알아요. 말 해놓고 그 다음에 무슨 말 할지 모르니까 ‘그러므로’ 하면서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고, 참 인간에게 나올 게 뭐가 있다고, 중간에서 다 이루셨는데 자기가 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아들을 죽인 사형수를 자기 아들로 삼았다. 옛날에는 그게 튄지 모르지만 다른 종교에 가보세요. 그래서 다른 종교를 공부를 해야 돼요. 불교 위인집이 있어요. 이슬람교에도 신비주의가 있거든요. 신비주의 급 이슬람교에 성자들이 있어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살 수 없는 거의 신적 수준의 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 말고 인도 가면 시민단체 흉내 내서 병원에서 바닥에 깔고 온몸을 엎드려서 5번 걷고 절하고 비를 죽죽 맞아야 분위기가 살거든요. 전부 다 이게 뭐냐 하면 연출 이예요. 인간은 자기표현을 위한 원정이 있거든요. 모든 예술은 표현이다 말이죠. 표현의 이미지거든요.

우리는 표현에서 실체를 파악했어요. 사도바울은 실체를 겉에 집어 넣어버리고 표현을 배설물로 위치를 바꿔나 버린 거예요. 내가 하는 종교적인 짓들은 쓰레기입니다. 이건 똥, 오줌입니다. 이걸 바꾸는 거예요. 왜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흉내 내는 게 아닙니다. 그걸 흉내 내면 안 돼요. 흉내 내면 흉내 낸 지가 경배 대상이 된다고요. 흉내 낼 생각도 하지 말고 주님 십자가거든요. 흉내 안 내도 된다는 거예요.

그 어줍잖게 3살 먹은 애가 손님 온다고 엄마가 잡채 하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게 흉내 낸다고 엄마 따라서 화장한다고 화장품 다 발라놓고 당면 익지도 않은 걸로 하게 되면 ‘제발 좀 나가라, 주는 거나 얻어먹어라.’하고 내보내잖아요.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믿음으로 믿음’이라 말이죠. 행함이 낄 여지가 없게 주께서 만들었다 말이죠.

그 ‘믿음에서 믿음’으로 하는 대표자가 아브라함입니다. 로마서 4장. 아브라함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바로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고 받았잖아요. 행한 것도 없이 의로움을 받은 자의 행복이라고 하잖아요. 어렵게 따지면 시편에 나오는 복의 개념과 로마서 4장에 나오는 복의 개념과 어떻게 언약 적으로 연결되는가를 이걸 추적할 수가 있어요. 그것도 한 논문이 되는 겁니다.
롬4: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분명히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죠? 그것이 어떻게 사도바울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데 그 교육을 다 받았는데, 그렇게 해석한다는 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해석했는데 그 해석 자체가 문제점이 뭐냐, 말씀이 문제점이냐, 아니면 나에게 문제점이 있는가, 결론은 나에게 문제점이 있었던 거예요. 나에게 문제점이 있다는 증거는 뭐냐, 십자가가 나를 위해서 주께서 다메섹에 찾아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문제의 문제가 나한테 있었던 거예요. 내가 문제 있으니까 시편 그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깨지는 능력 자체가 복이라는 것을 알죠.

모든 행함을 삭제하고 뺄 때 빼서 굴러가는 행함 들을 이제는 제대로 저게 행함이고 저거는 구원이 되지 못하면서도 구원 되는 양 나한테 그동안 장착돼 있던 것들이었다. 주님의 능력이 있어서 비로소 나의 몸에서 이렇게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으로 사도바울의 서신이 죽 돼 있죠.

구원은 십자가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인데 오직 구원받을 자에게만 성령에 의해서만 그 십자가를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일반성이라면 여기서 11장 25절에서 이야기하는 “감추시고”하는 이것은 제자들에게 이미 제자들을 출발점, 모델로 삼아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건 별로 어려운 게 아닌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27절입니다. 이것 때문에 신학 계파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보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고 했을 때에 인수인계를 어떤 것을 인수인계했으며 인수인계했을 때 더 이상 아버지 하신 일을 예수님이 도맡아 해버릴 때 아버지는 방관자의 위치에 있는가, 하는 그런 문제가 있을 게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다고 할 때 아버지께는 이제 말끔하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인지, 아니면 일시키기 위해서 아버지는 넘겨주고 아버지는 회장님, 아들은 공장장쯤 되는 그런 사이인지, 그것에 따라서 이게 명확해 져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버지도 다 넘겨준 게 아니고 일부만 넘겨줬으면, 우리는 아들을 믿었는데 아버지가 팔짱 끼고 있다가 ‘니 뭐 믿고 여기 천국 왔어?’ ‘ 전 예수님만 믿었습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인가? 나는 하나님 아닌가? 어떻게 아들만 믿고 난 안 믿어도 돼?’ ‘아니 뭐, 예수님 말씀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 넘겨줬다고 해서 난 아들만 믿으면 되는 줄 알았죠.’ ‘그건 니 생각이고, 아버지를 믿어야지.’ 그 옆에 있던 성령이 나타나서 ‘나도 하나님인데 나한테는 해준 게 뭐가 있노?’ ‘뭐 성령님은 돕기만 한다고.’ ‘도와줬으니까 나한테도 영광을 줘야지.’

오후 2시 37분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영광을 돌리는데 영광을 돌리는 주체는 한명인데 받을 분이 세분이 돼서 하나 주면 세분이 알아서 갈라서 하든지, 아니면 내 쪽에서 성부님 영광, 성자님 영광, 성령님 영광, 따로 모셔서 드려야 되는 그 문제인지, 이런 문제가 사람들이 다 있어요. 있는데 아무도 이걸 끄집어내지를 않아요. 왜 안 끄집어내느냐, 해답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괜히 끄집어냈다가 해답 이야기하면 지가 우스워지잖아요.

시아버지가 세분이라. 며느리는 하나인데 세분 같으면 괜찮아요. ‘오늘 니 담당, 성부 담당이다. 성부 특별비서’ 이렇게 하면 되는데, 이게 아니고 용돈 100만원으로 시아버지가 세분이 돼서 용돈을 어떻게 줄지, 33.33원으로 나눠야 될지, 곤란한 문제죠.

여기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넘겼다 할 때 뭐를 넘겼느냐, 성경의 사도바울의 편지나 이런 데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 돼 있어요. 그 대목을 보면 예수님은 임시적이 돼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서 일을 하시다가 ‘아버지, 아버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러면 가져와야지.’ ‘예, 있습니다.’ 하고 바치게 되면 ‘그럼 저는 이제 빠져도 되죠?’ ‘그래, 니는 빠져도 된단다.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줘라. 더 이상 예수 믿지 말고 아버지가 직접 나서신단다. 예수 믿는 것은 죄 씻음만 필요하고 이제 니 할 일 했지? 했으면 니는 빠져, 빠져. 이제는 아버지께 나와서 직접 영광 돌리도록 니는 얼쩡거리지 말고 빠지고 뒤에 있어. 그동안 수고했어.’ 이렇게 되는 것인지, 거기서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렇게 찾아봐야 돼요. 구약에 이러한 경험, 이러한 의문점을 먼저 겪었던 분들,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그림자로서, 그림자라는 말이 어려우니까 축소 모형으로서 그 안에 소박하게 애들 장난감처럼 들어 있었어요. 구조가!

구약을 생각하지 않고 신약을 바로 와 버리면 내 존재의 구원과 예수님 뜻을 직접 이렇게 엮게 되면 이럴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가 저럴 때는 이렇게 했다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를 몰라요. 그래서 세더스란 유명한 신학자들은 사도바울 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 신학의 끝은 그겁니다. 사도바울도 같은 인간이니까 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하지만 마귀가 뭐라 했습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안다. 세더스 니는 누구냐?’ 사도바울은 자기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 계시입니다. 그리고 사도의 직무로서 계시는 끝났어요. 성경 이외 다른 계시, 펩시콜라인지 코카콜라, 펄시 콜레 그런 거 믿지 마세요. 목사가 천국 갔다 지옥 갔다 하는 건, 지가 상상한 거니까, 사람이 상상이 도가 심하면 꿈에 뭐가 보입니다. 저도 그런 꿈 많이 봤어요.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내가 예수다’해서 ‘주여 감사합니다.’하고 엎드려 절하고 많이 했습니다.ㅎ 신경을 거기다 쓰니까 꿈에도 보이고 그러죠. 목사 꿈에는 교인들 모아놓고 설교하는 그런 꿈을 꾸죠.

꿈은 편집이라고 프로이드가 이야기했죠. 꿈은 내 욕망을 편집한다. 편집은 내 욕망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세상은 나의 욕망을 위해서 정비돼 있어야 나는 기분 좋겠다하는 것을 꿈이나마 그런 상상을 해보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나한테 절하고 세상의 모든 주변 사람들이 내 꿈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 것을 보고, 하나의 제왕이죠. 제왕 된 기쁨을 꿈이나마 꾸고 싶다는 거예요. 이 꿈을 라캉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에 나만 남고 다 없어도 그걸로 세상은 아름답다. 원더풀 세상 이예요. 루이암스트롱의 원더풀, 나만 남고 다 죽는.

이런 욕망이 이스라엘 속에 뭣과 마주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장착된 장치들, 이 세상의 설비 있잖아요. 공장에도 프레스가 있고 레이저기지의 설비가 있고 정수시설에도 관계자 외 금지돼 있잖아요. 전부 다 있듯이 모든 장치가, 율법이 사람을 지키려고 준 것이 아니고 그 장치로 말미암아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준 거예요. 모든 성경은 누구를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 증거 하는 그런 말뚝이었고 장치였고 가로막이었는데 사람은 그걸 뜯어다가 자기 집에서 도마로 쓰고 이런다 말이죠. 자기 정당성을 위해서 쓰고 있는 거예요. 그건 아까 모든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그 인간의 계속 숨어있는 악마의 욕망이 아담으로부터 계속 내려오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들으면 왜곡시키는 겁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성전제도 속에서 제사장 제도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인간 있다. 하나님 있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종교의 특징은 인간들이 신을 찾는데 중간에 우리보다 특출한 영웅이 필요해서 하나의 신과 예루살렘이 이야기하는 대표자 뽑으라 하니까 그 뽑힌 자가 왕이 되고 이것이 신자(신의 아들)이 돼요. 중국에서는 천자, 이집트 문화에서는 제사지내는 신자, 신의 아들은 가뭄이나 지진, 태풍, 인간이 조절하고 감당할 수 있는 그 선을 넘어서는 자연재해나 어떤 필요에 따라서 신의 대표자로서 신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면 그 정성에 따라서 신의 응답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누릴 때 백성들은 자기가 대표자로 세운 덕분에 신과 원활한 정상적인 화목의 관계, 화기애한 관계에 돌입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왕은 누가 뽑는가, 우리 가운데서 우리 생각들을 찍어요. 투표를 본인들이 하는 거예요. 우리들 가운데 특출한 사람,  지, 덕, 체 뿐만 아니고 인격적으로 겸손하고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봉사하는 마음, 그리고 침착하고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고 이런 사람을 뽑아서 우리 대표자로 신과 하나의 증인으로 삼자. 이걸 한마디로 ‘왕’이라는 거예요. 사무엘상 나오죠? ‘사무엘이여 우리에게 왕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너희들이 왕을 구한다는 것은 곧 더 이상 나의 계약을 만료하는 것이다. 하나님하고 나하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분하고 지긋지긋해서, 뭐 보여야 말을 하지, 보이지도 않는 걸, 상상할까, 차라리 보이는 영웅이 더 낫습니다.

대표자,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를 가운데 두고 목사를 신의 사자, 뜯어먹는 사자인지는 무르겠지만, 성경에서 신의 사자라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니고 천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묵시적 용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천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중간에 왕 자리에 이방인들은 그런데 이방인들은 왕은 누굴 뽑는가, 제사장을 뽑아요. 월급주고 선지자를 뽑습니다. 왕은 행정과 무당 짓 다하려고 하니까 힘드니까 왕이 지시하고 왕이 월급 줘서 지혜자로서 자기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게 잘 나온 게 뭐냐 하면 다니엘에 나오죠. 다니엘에 보면 꿈을 꿀 때 누굴 부릅니까? 자기가 월급 줘서 전문적으로 신과 교류하라고 지혜 자, 무당들을 불러서 ‘내가 어젯밤에 꿈 꾼 것을 너희들이 알아내?’ 이건 베드로가 물 위로 걷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이건 말도 되도 않는 이야기예요. 속으로 얼마나 ‘니 꾼 꿈을 내가 왜?’ 말도 안 되잖아요. 이건 사람보고 ‘물위를 걸으라.’와 똑같은 소리예요.

그래서 ‘임금님 그건 사람이 못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우리보고 하라고 합니까?’ 임금이 하는 말이 ‘그럼 너 왜 월급 받았어? 지금까지 그럼 하겠다고 한 건 사기 친 거네.’ ‘너희들 나한테 사기 친 거면 죽여 버린다.’ 언제까지? ‘삼일 동안 다 풀어내.’ 그때 그 사람들 가짜들이 다니엘보고 ‘살려줘’해서 다니엘이 ‘나도 못 푼다.’ 그럴 때 주께서 알려주죠. 다니엘이 대리자가 아닙니다. 보기만 해라 내가 해결한다.‘ 이러지 않았어요. 자기도 못 풀어요. 그러니까 성도라는 것이 남들 보기에 답답해요. 내 인생 내가 안 만들어 가는데 자꾸 착한 행동해서 복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니까 내가 예수 믿는 것도 복 받아서 예수 믿는 게 아닌데 다른 사람은 지가 믿음 없으니까 나도 믿음 없어야 되는 줄 알고 자꾸 윽박지르는 거예요.
 
진짜 오늘 말씀도 숨어있는 거예요. 어린애들에게만 나타나지, 나타나는 사람들은 행함이 아닌데, 꼭 사이비가 이 행함을 강조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느냐, 이 자리에다 제사장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무슨 뜻입니까? 왕은 필요 있다? 없다? 더 이상 이 나라에 왕은 찾지 마라. 그리고 너희들이 이방나라 본받으면 언약에서 떨어진 줄 알고 너희는 멸망한다. 절대로 이방나라처럼 살지 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 본성은 이방나라 되고 싶어 환장했는데 내가 그것을 제사장을 통해서 없앴다. 왜냐, 더러우니까.

레위기에는 더러움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이 있고, 정화가 있습니다. 깨끗이 만드는 것. 거룩이라 하는 것은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정화라 하는 것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지상에서 바꾸는 작업 이예요.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죠.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정화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더러워야 돼요. 우리는 계속 더러워야 돼요. 헌금하는 더러움, 찬양하는 더러움, 남 도와주는 더러움, 나 하나님께 세우는 더러움, 아프리카 가서 ‘울지 마 톤즈’ 해서 거기서 봉사하는 더러움, 테레사 수녀처럼 빈민 구제하는 더러움, 밥 해주는 더러움, 더러운 일을 하셔서 모든 게 더러울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왕이 아니라는 거죠.

다시 말해서 내가 생각한 그러한 구조를 스스로 내가 포기를 해야만 하는 것으로 우리는 추궁 받는 거예요. ‘포기 해, 포기 해.’ 포기하라는 거예요. 왜, 주께서 너희에게 직접 제사장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제사장은 뭐냐, 투표를 하는 겁니까? 아니죠. 투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언약으로 지정을 해줍니다. 모세 언약에서 지정을 해주는데 모세 형제들, 아론이죠. 아론계열에만 제사장들이 승계가 돼요. 어떻게 하느냐, 옷을 벗어줍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죠. 이건 옛날 구약의 그림자가 이제는 완성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제사장이 옷만 갈아입으면 바깥에서 농사짓는 그들은 농사지어도 ‘이상하다. 왜 비료도 안 주는데 왜 이렇게 농사가 잘 되는지 몰라. 아하! 제사장이 바뀌었구나.’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그 제사 행위가 실제로서는 천국의 모델로서, 에덴동산으로서 우리에게 효과를 얻는 거예요. 옛날에는 땅 자체를 모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땅의 변화를 통해서 천국의 변화를 보여줄 때입니다. 그 때는 구약이고 신약에는 이 땅은 저주한 땅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는데, 구약에서는 그래요.

이 제사장 제도라 할 때 그때 주의 이름이 여기 오거든요. 주의 이름이 어떻게 왔느냐, 제사 제도라 할 때 마지막에 법궤가 있는데 법궤 뚜껑에 피를 바릅니다. 그 피를 바르면서 여기 성전의 뜰에 뭐가 있죠? 제단이 있죠? 제단에서 제사장들이 일하잖아요. 일반인들은 거기 못 가고 여기서 제사장들이 제물을 뜯어서 두 개를 집어넣어요. 하나는 피와 그리고 기름 부위를 따로 뽑아내는 거예요. 그럼 제단을 지은 건 뭡니까?  피와 기름들을 뽑기 위해서,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뜯고, 씻고 뽑고,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놓는 거예요. 흠 없는 제물에서 뭐를 뜯어내기 위해서? 무슨 부속품? 피와 기름을 뽑아내서 기름은 거룩이거든요. 피는 희생이고.

기름을 어디까지 가져가느냐 하면 성소 안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기서 기름을 7번 뿌려놓고 기름을 전부 다 쳐 바르고 그 다음에 마지막 가는 것은 기름도 그걸로 끝나요. 마지막 들어가는 것은 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관통하는 것, 세상으로부터 하늘나라까지 가는 사다리, 관통에 아무도 거기에는 참여를 못하고 흠 없는 제물 되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처럼 그 제물 된 그분이 관통함으로써 그 효과를 땅에서 지금 쟁기로 갈고 지금 풀 뽑고 있는 그 사람에게 축복으로 공짜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럼 왕은 뭡니까? 희생해야 될 왕! 전부 다 스타가 되고 살려고 하는 그런 와중에 죽기 위해서 오셨고, 죽어야 뜻을 모든 걸 완료하시는 죽음의 하나님의 그 모습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죽어도 살리기 위해서, 원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왕이 아니고 ‘죽어도 잘한 거예요.’라고 죽는 것을 잘한 것으로 바꾸어서 잘한 것을 깨우는 식으로 하는 그 작업이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오빠를 일부러 죽이고 난 뒤에 뭐라고 합니까? ‘잔다. 깨우러 가자.’ 했거든요. 우리가 구경할 것은 ‘너희들이 평소에 자고 아침에 깨는 그런 것 말고 이 예수님이 하신 일, 십자가의 일 때문에 미리 앞당겨서 혜택을 입을 잠과 그리고 깨어남이 어떤 것인지를 새롭게 내가 보여줄 거야.‘ 그런 것도 있지만 회당장의 딸은 어땠습니까? 사람들을 다 물러가게 해놓고 ’소녀야, 잠을 왜 이리 오래 자느냐, 빨리 일어나라. 소녀야 그만 자고 일어나.‘하고 손을 잡고 일으키니까 살아났잖아요.  기지개 펴면서 ’아휴, 잘 잤다.‘ 하고.

이게 예수 그리스도, 왕이라는 것, 그리스도라는 말이 왕이라는 뜻 이예요. 기름 부은 자, 다른 말로 하면 칼빈은 3가지로 이야기했거든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라고 돼 있는데 베드로전서2장 9절에 보면 3가지가 아니고 2+1로 돼 있어요. 왕과 제사장으로 돼 있고 선지자는 없는데 합쳐도 상관없는 건데 기름 부은 자, 옛날 구약 때 기름 부은 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어서 그냥 살아있는 아버지와 살아있는 아들 사이의 체결이 아니고 조건이 있어요. 아들은 이 땅에서 저주를 받는 조건 하에서만 아들로 인정을 해줍니다. 그러니 이것은 뭔 뜻입니까? 살아있고 싶어서 더 살고 싶어서 우리는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관찰자 입장에 선다? 안 선다? 애초부터 우리는 구경할 자격도 안 됩니다. ‘나가 있어. 살고 싶어? 다 나가 있어. 감히 너희들이 여기에 심판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왕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소리 필요 없어.‘ 우리가 어떤 소리 어떤 발언을 해도 그 발언은 살아있는 나를 더 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의 발언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은 살아있는데요. ’이왕 사는 거 더 멋있게 내 원대로 살고 싶습니다.’하는 그런 하소연에 지나지 않아요.

‘나가 있어.’ 나와 있고 그러한 공간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죽은 예수님, 아들을 살리신 아버지의 그 사랑이 합쳐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아예 아들에게 모든 걸 넘겨 놓고 하나님 아버지가 뭐로 기어들어 갑니까? 예수님의 증인으로 예수님이 하는 아버지의 일에 아버지도 그 한 역할을 맡으시면서 들어가서 모든 이로서 모든 뜻을 다 이루시는 거예요.

권세를 아들에게 줘놓고 그 준 권세에 아버지가 거기에 협조하고 거기에 동참을 해버리는 거예요. 주가? 하나님 아버지가 주가 아니고 누가 주입니까? 예수님이 주가 되어서 모든 만물을 아들의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라는 뜻은 이게 모든 이방종교의 구호입니다. 심지어 불교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부처로부터 와서 부처로 말미암아, 이것은 인간이 지어낼 수 있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신 개념 이예요.

이건 제대로 된 구원받은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예수님이라니까요. 하나님이 아니고, 조물주가 아니고 창조주도 아니고 그냥 33살 먹은 나사렛 청년, 그 청년이 바로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러니 33살 먹은 길가는 청년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건 미친 인간이죠. 우리는 뭐 잘못 됐기 때문에 이런 미친 소리를 못 듣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복음 전할 때 주위에서 뭐라 했느냐 하면 ‘니는 미쳤다.’

사도바울이 뭐라 했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에 ‘그래, 그래 나 미쳤다. 그래 미쳤어. 하지만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하니까 그 사람들이 정죄했어요. 사도바울은 있지도 않은 부활되지도 않은 그 예수라는 사람의 사랑에 미친 인간이다. 그 미친 인간의 미친 말을 듣고 미친 인간들이 지금 그걸 진짜인줄 알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는 이건 조치돼야 된다. 그래서 지금도 학문의 신학교에서는 이렇게 해요. 기독교는 사도바울이 세운 것이지, 예수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고 ‘구라 치는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고 구라 치는 사도바울에 의해서  기독교가 만들어졌습니다.‘하는 것을 학교에서 다 같이 들었어요. 예수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없고, 예수님이 죽었다고 구라치는 예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고 구라치는 사도바울에 의해서 기독교가 만들어졌습니다.’라는 것을 학교에서 다 같이 들었어요. 아주 저러면 우리는 기쁘죠. 니들이 어디 감히 숨겨진 것을 너희 능력으로 알 턱이 있나? 알 턱이 없죠.

정리해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넘겼다는 것은 아버지가 넘기고 손 털고 ‘난 쉬련다.’가 아니라 넘겨진 그 일에 주님께서도 거기 합류 하셨다는 겁니다. 합류하게 되면 일은 누가 합니까? 아버지하고 누가 해요? 아들만 하는 거예요. 성령은 그냥 들러리 서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셔서 아버지의 영,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일을 하도록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돕고 있고 예수님은 성령의 도움으로서 아버지 뜻을 이뤄 놓고 그것을, 그 나라를 누구한테 바칩니까? 아버지한테 바침으로서 자기는 빠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가 된다니까요. 나라를 아버지한테 바쳤다 하면 우리는 보통 회사에서는 일을 해서 바쳤다 하면 자기는 빠지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고 바침으로서 예수님이 주가 된다고 아버지도 성령도 인정을 해준다니까요.

‘아휴,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빠지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네가 주가 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인간도 너의 일에 스며들지 않도록 제대로 일을 했다는 겁니다. 12제자 가운데 어떤 제자도 너의 일에 보탬이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그걸 차단시킨다는 점에서 온전히 한 거예요. 왜냐, 그래야 아버지가 예수님에게만 맡겼지, 제자들에게는 일을 안 맡겼다는 것이 티가 나게 돼 있어요.

주님께서 성도하고 뭐 복음 강의했지만 이거 죄 짓는 일이거든요. 이렇게 함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버지로 마감된다는 것을 우리는 그냥 이런 일을 하면서 증거 할 뿐이라니까요. 일은 일대로 하면서 모든 어떤 사업은 사업을 하면서 그걸 증거 할 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주님 말씀대로 사업을 어떻게 하느냐, 그런 생각 할 필요 없어요. 사업을 할 때는 사업은 자선사업이 아니고 어떻게 돈 벌어야 하느냐만 매진해야 돼요. 그렇게 하면서 뭘 느낍니까? ‘역시 주님은 주님밖에 없어. 내가 사업한다고 해서 주님 하시는 일에 보태도 되는 건 하나도 없어.’라는 것을 혹독하게 그걸 느끼면서 사업 하셔야 돼요. 물론 제가 말 안 해도 그렇게 사시겠지만.

그 다음에 27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이미 그 일의 모든 주체는 예수님과 아버지, 아버지와 예수님, 그 외에는 아무도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주는 대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내가 믿게 하면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의, ‘믿음에서 믿음으로’ 하는 것은 처음도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믿게 되고, 끝까지 믿게 되는 것도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믿게 되어서 우리는 이 믿게 되어서 나온 이 열매 전체를 합쳐서 하나님의 숨겨진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게 로마서 11장 36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원래 내용은 그거와 좀 달라요.

그 다음에 28절하고 마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것은 짐을 졌다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이런 짐들이 살아가면서 나오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우리 몸이 우리 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 자체를 짐으로 주께서 이미 삼은 이상은 우리가 아무리 그때, 그때마다 내 무거운 짐을 해결해도 또 새로운 짐을 유발될 수밖에 없는 몸을 갖고 있어요. 그게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마에 땀을 흘리는데 두 바가지 흘리고 그 다음에 안 흘리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로서의 가장 약점이 뭐냐 여자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여자를 모르니까. 그래서 성경적으로 간접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그걸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창세기 3장에 여자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남자를 의식하도록 산다는 자체가 여자의 굴레다. 남자 없이 여자가 단독적으로 나는 여자라고 느낄 수 없고, 항상 나는 남자 아닌 존재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정체성을 본다는 그것이 하나의 굴레다 이렇게 보는 거죠.

남자는 여자 아닌 남자라는 생각을 안 하고 나는 인간의 대표자라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걱정을 안 하죠. 내가 움직이는 게 인간이 움직이는 건데. 그런데 여자는 ‘당신 어디 가는데?’ ‘묻기는 왜 묻는데?’ ‘인간이 가는데 왜 묻노?’ ‘당신이 어디 가는지 알아야 내가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때문에.’ 열 번이나 전화해서 ’지금 뭐 하는데?‘ ’KT해서 당신 추적할 거야. 한두 번 해야지.‘ 여성의 육감은 비상한 게 있답니다.

우리 자체가 짐이기 때문에 우리 자체가 수고하는 짐이 되는 거예요. 우리 자체를 일부를 맡기면 안 되고 아예 짐을 통째로 맡겨야 돼요. 그걸 가지고 포장이사라 해요. 지가 짐 꾸리고 나쁜 거 좋은 거 가리지 말고 다 나쁜데 좋은 게 있어야죠. 해봐야 지 자랑밖에 안 하는데 나올 게 뭐가 있습니까? 고아원에 해주고 지 자랑 해 놓고, 기도 오래해서 응답 받은 것 20년 써먹고 이건 지 자랑밖에 안 나오는데 자체가 역사고 취미인데, 그냥 포장이사! 그냥 맡겨라.

그리고 뭡니까? “내게 배우라” 내게 배우라는 말은 배우고 싶고 싫으면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빨대가 꽂혀 버리면 사슴은 그 빨대에서 피를 낼 수밖에 없잖아요. 황수관이처럼 빨대 꽂아서 따라 다니면서 빤다 했잖아요. 주께서 빨대를 꽂을 때 빨대를 통과하는 게 뭐냐 하면 이 말씀 자체가 빨대로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뭐만 확인하면 돼요? ‘아, 이게 바로 예수님한테 배우는 거구나.’ 이렇게 나오면 되지, 예수한테 배운다고 성경공부 하러 돌아다니고 이러는 게 아니고 나 따로 있고 배우는 거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있는 자체가 주님의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이, 내 예수님이 내가 해나가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니는 그냥 ‘아, 오늘도 말씀으로 아주 조지는구만. 주께서. 하여튼 내 뜻대로 안 되는 데는 주께서는 도사야 도사.’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좁은 길로 가게 하시는 주님께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직도 잠간 살아있는 게 신기합니다. 언제 주님 얼굴 뵈올 때 기쁨으로 뵈올 수 있도록 ‘반갑습니다.’ 할 수 있도록 늘 미래의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