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108b히11장 13절(고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를 하겠습니다. 조금 진도를 더 나아가서 16절에 봅시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라고 되어 있지요. 사모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늘 사모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사모하게 만들어놓고 사모하는 그 순간 스냅 사진을 찍으면서 “네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것은 후대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용으로 사용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교과서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일종의 모델이지요. 신앙인은 이렇게 간다는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신앙의 모델이라고 하면 상당히 중요하고 위험한 해석이 될 수가 있어요.
신앙의 모델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렇잖아요? 예수님밖에 없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델이 되어버리면 모델이 단수, 하나, 유일자에서 모델이 다양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델을 골라잡아요.
“나는 아브라함처럼 해.” “나는 노아처럼..” 이렇게 골라잡아버리면 이 해석은 완전히 망가지는 거에요. 몽골 천막 말고 인디안 삼각 천막 있잖아요. 이 천막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더라도 한 쪽을 쳐다보게 되어 있어요.
사모한다는 것은 초점이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하나로 모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자식에 자식을 낳고 아무리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사모하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분이 한 분이지요. 유일하신 한 분이지요. 그렇다면 나처럼 해봐라가 부정되어야 되는 거에요.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얘야 너 나처럼 살아.”라는 것이 부정되는 거에요. “내가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처럼 너도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만 바라봐.”
이렇게 되어 버리면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 상대방에게 ‘사모하는 방법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당신처럼 사모해야 사모가 되는구나.’라고 오해하게 할 여지가 있어요. 실제로 교회에서 예수님 이야기하지 않고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예수를 잘 믿어서 잘 되었다고 소문난 사람을 데려다가 간증집회 하듯이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오류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암에 걸렸다가 기도해서 나았다고 하면 ‘나도 암에 한 번 걸려봐?’라고 생각합니다.
또 젊을 때 술 먹고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새사람이 되는 데에 관심이 없고 ‘그동안 내가 나쁜 짓을 안 하고 꾹 참았는데 나도 나쁜 짓 실컷 하고 나중에 저 사람처럼 돌아서면 되겠네.’라는 식으로 마음이 뺏기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가시적인 것은 부정하세요.’ 그래서 모든 성경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부정하세요. 하나의 백일몽(꿈)처럼 부정하세요.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 일이 일어난 너를 증거하라고 주께서 사용하지 않고 그렇게 일이 일어난 나를 부정하는 그 모습을 증거하라고 하신 거에요.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할 때에는 내가 정당화되고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라는 식으로 내가 마치 모델이 되어서 주님을 가로막는 셈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바라보게 하는 거에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방법은 있어요. “나의 경건과 나의 결심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것처럼 하면 되는 겁니다.
“왜 나의 경건과 나의 믿음으로 나의 열심으로 된 것처럼 보십니까? 그게 아닙니다.” 하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돌리기 위해서 보이는 것을 부정하는 용법을 사용하는 거에요.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왜 이래요? 나는 아니에요.”라는 식으로만 이것을 사용하라 이 말입니다. 아까 우리 유집사님도 그런 것을 사용했어요. 안양시장에게 훈장도 아니고 표창장을 하나 탔어요. 그것도 2015년 12월 31일날 유일자, 딱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 말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하는 말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누구 하나에게 줘야 되다 보니까 만만해서 그냥 걸린 거에요.” 여기에다가 카메라를 대고 싶지만 참습니다. 괜히 이것이 또 신앙의 모델이 될까 싶어서 ‘믿음 생활을 얼마나 잘했으면 이런 것을 받을까?’..
사도바울이 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그냥 죄를 짓자는 말이 아니에요.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믿음을 따라서 영생을 주셨다는 이것이 고맙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부자가 된다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을 증거하느냐는 겁니다. 무엇을! 여기서 한 번 정리해봅시다. 나의 믿음을 증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니까 신자가 맞습니다.”를 증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교회에 가는 이유가 신앙을 확보하려고 가잖아요. 믿음이 있어야 천당에 간다는데 나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자꾸 그것을 정리하고 그것을 추수리고 그것을 다듬고 그것만 몰두하면서 교회에 가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 가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런 믿음을 가졌습니다.’라는 이야기와 ‘나는 이렇게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는 그 방법에 대해서 듣기를 원하는 거에요.
“교회에 30만원을 냈더니만 주께서 90만원을 주시는 기적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그냥 아낌없이 내면 100배, 60배, 30배를 주십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묵히지 말고 그 한 달란트를 사용하시면 곱빼기로 주십니다. 100배, 60배, 30배 주십니다.” “기름 준비를 하시면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구원 받습니다.”
“재판장 앞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면 되지도 않는 과부의 기도도 재판장은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십니다.” 그 방법을 듣고 싶은 거에요. 그 이야기만 귀에 들려오는 거에요. 그 해석이 다 엉터리 해석이거든요. 마귀적 해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마귀적 해석이라도 관계없어요.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니까 거기에 다니는 거에요. 그것이 엉터리인지 아닌지 들려주는 사람도 없고 친구 목사 세워서 헌신예배 해도 똑같은 종류의 목사가 와서 헌신예배하고 똑같은 설교를 합니다.
그러니까 ‘원래 성경말씀은 그런 모양이다. 아마츄어가 뭘 알겠나. 프로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다 맞는 모양이다.’ 다들 그렇게 속아넘어가는 거에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는 죄만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런 방법을 좋아하고 기대하고 고대하고 방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그동안 내 속에 나도 몰랐던 죄가, 나의 욕망이 나의 욕심이 거기에서 타인의 욕심과 만난 거에요.
‘나한테 이런 음흉함이 있었구나. 내가 신앙인인 것을 내가 확인하고 싶었구나.’ 이것을 개인주의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이것은 내일모레 주일날 오전에 설교하려고 준비한 것인데 미리 그 비밀이 천기에 누설이 됩니다.
개인구원이 없는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나에게만 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내가 수단과 능력껏 공들여 만들었으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공들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유지가 되는데 내가 만든 것은 죄이기 때문에 안 받거든요.
안 받음에도 구원이 된다는 말은 그 믿음의 원천과 그 질과 양은 다는 분이 주신 건데 그분은 바로 모든 사람 위에 계시는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진짜 믿음이 온 사람은 내 자랑을 멈추게 되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원인을 제공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자기 자랑을 멈추게 돼요. 내가 죄를 지어서 나를 구원했다면 죄를 지은 것도 나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될 것은 회개도 죄라는 거에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2장 38절)” 얼마나 유명한 구절들입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구원 받기 위해서 뭘 해야 되는가를 조사해보니까 회개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반성인지 회개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무조건 회개해요. 어릴 때 오줌싼 것부터 시작해서 엄마 서랍에서 돈 훔친 것, 머릿가르마를 왼쪽으로 타야 되는데 오른쪽으로 탄 것까지 모조리 다 회갯거리에요.
주께서 묻습니다. “너 회개라는 짓을 왜 하는데?” “구원 받으려고요.” “네가 구원 받을 쨉이 된다고 생각해? 네가 어디에 근거를 해서 나만은 구원된다고 사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데?” “저는 영원하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죄에요. 신처럼 되고 싶은 것 말이에요. 사실은 잠복기가 있었어요. 아닌 척하고 있었는데 쑤시니까 탁 나온 거에요.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이 멸망해도 그 멸망하는 마지막 장면은 본인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에요. 자기가 제일 마지막에 죽고 싶어해요. 이게 인간의 심보입니다. ‘매드맥스 2’에 나와요.
핵폭탄으로 세상이 모두 멸망했을 때 허름한 옷을 입고 살아남은 주인공 멜깁슨처럼 그 마지막 자리가 자기자리이고 싶어요. 그런 심리를 노리고 나온 것이 컴퓨터 게임들이에요. 컴퓨터 게임은 최후의 남은 자가 승자라는 것을 기대하고 벌이는 겁니다. 가라테를 하든 뭘 하든 말이지요.
요새 게임 CF가 많이 나오지요? 나를 위한 전쟁 외에 다른 전쟁을 인간은 생각을 할 줄을 몰라요. 모든 전쟁은 결국 초점이 나를 위한 전쟁만 전쟁이고 그 외에는 전쟁으로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쳐들어오면 이민 가면 되지요. 구태여 내 전쟁할 게 없어요. 미국시민이 되면 내 전쟁이 아니거든요. 미국 시민권이 있고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전쟁이 나면 미국으로 도망치면 됩니다. 이중국적이 얼마나 편리한지 몰라요. 무슨 패를 뭘 낼 것인가 판을 보고 내면 되는 거에요. (참고로 나는 화투를 못 칩니다.)
이것을 가지고 ‘선택은 내가 한다.’는 거에요. 인생은 자기 선택이 모아져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에요. ‘그래 결심했어.’ 내가 옳은 길로 갈 것인지 아닌지는 내 결심에 달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그대로 교회에 퍼져요.
“여러분 결심하세요. 손 들고 나오세요. 이번 결심 잘하면 여러분의 운명이 바뀝니다.” 특히 침례교 쪽에서 많이 하지요. 결단의 시간.. 나오면 뒤에서 찬송 불러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니까 인정 받은 그 믿음을 평생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자기 싸움을 싸우겠어요?
‘그래, 술 끊어야 돼. 담배 끊어야 돼. 이거 하면 안 돼. 이거 하면 안 돼.’ 왜? 공든 탑이 무너지니까요. 교회에서 권사고 집사고 훌륭하다고 소문이 났다고 합시다. “내가 교회의 집사야. 그런데 집사 딸이 그 짓해서 되겠어? 나를 봐서라도 행동을 똑바로 해. 교회에 와서 목사님 말씀 잘 듣고 앞자리에 앉아서 졸지 말고..”
이제는 혈연관계의 중심이 자기 명예, 자기의 신앙 지키기, 자기 자랑거리 유지하는 싸움으로 모든 것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요란스럽지 않아요. 고요해요. 하늘나라는 싸울 필요가 없어요.
대신 싸워주시니까요. 하이카도 이런 하이키가 없어요. 차가 고장났어요. 그러면 고객님을 저쪽으로 밀어내요. 그리고 위험한 곳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최근에 나왔던 CF에 나와요. “저쪽에 계시면 알아서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아니요. 쳐다봐야지요. 아까 본문에 나왔듯이 ‘사모’해야지요. ‘내가 할 줄 아는 일을 혼자 다하셨네요.’ 이걸 좋아하고 이걸 고귀하게 여기고 내 자랑거리는 내 속에서 안 끄집어내는 거에요.
끄집어내봐야 주님이 하시는 것과 족히 비교가 되지를 않으니까요. 생일 이벤트 한다고 불 꺼놓고 촛불 하고 있는데 그 순간에 촌에서 갑자기 늙은 할어버지 부부가 오셔서 “대낮에 무슨 짓인고..” 하고 커텐을 확 젖혀버리니까 그 촛불이 태양빛 앞에 빛을 잃어버리지요.
내 자랑거리, 교회에 가서 상 받고 한 모든 것들이 태양빛이 확 비추는 것처럼 주님의 그 빛 앞에서(요한계시록 1장 이야기입니다.) 그 눈부신 빛에 사도요한은 자기가 고생을 하는지 귀향생활을 하는지 그것이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남들 보기에는 귀향살이를 한다, 밧모섬에 갇혔구나. 얼마나 고생스럽겠구나 하지만요. 거기에서 풀려나와서 다른 데에 가서 죽는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요. 그런 사적인 문제가 문제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끝나고 돌아가면 다 잊어버리거든요. 다시 혈연관계에 매여가지고 ‘오늘 장 뭐 볼까?’ 거기에 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승인난 이야기를 한 거에요. 이제 확인은 기다려봐요. 기다려보세요.
그러면 이 승인이 그냥 하나의 꿈이 아니고 실제가 되는 겁니다. 꿈을 찢어버리고 실제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가 평소에 안 하던 짓, ‘사모’가 일어납니다. 제목이 이것이 더 좋으네요. 아까는 자루라고 했는데 이걸로 바꿔야 되겠네요.
주님을 사모하게 돼요. ‘내 사모하는 분은 오직 주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만 바라보게 되는 거에요. 내가 온전치 않고 온전케 하시는 주가 따로 계시다는 거에요. 그리고 앞으로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승인이 나버렸어요.
이미 원자력 발전소를 짓기로 승인이 나버리면 주님들이 데모하는 것은 좀 기다리면 돼요.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립이 승인이 났잖아요. 아무리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들이 와서 데모를 해도 경찰관이 와서 정리하게 되면 짓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위에서 하는 일을 감히 땅에 있는 우리가 그것도 사적으로 어떻게 반항하고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 넉넉함. 그래서 이 사모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여유입니다. 삶의 여유요.
여유는 찢어져야 여유가 생깁니다. 참 이것이 불합리한 이야기인데요 뭔가 내가 하는 일이 안 될 때에 여유가 생기게 되어 있어요. 바쁠 때는 여유가 없어요. (주님을) 사모하게 되면 갑자기 자기의 존재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엄마, 엄마.” “여보, 여보.” 하면 “알아서 하세요.” “양말 어디 있나?” “알아서 찾으세요.”라고 하면 “당신은 근무 태만인가? 파업했나?” “그래. 가정주부 파업했다. 알아서 해라.” 이런 여유는 파리를 여행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일상생활 속에서도 사모하는 분이 나타난다면 다시 말해서 촛불만 모아놓은 어두침침한 곳에 태양빛이 비춘다면 그 사람에게는 삶의 여유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굉장히 가벼워요.
16절 봅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였는데 “한 성”은 승인한 성, 유일한 성으로서 변동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 성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성은 약속된 성이에요. 히브리서 13장 20절을 한 번 누가 읽어보세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언약의 피죠.
약속 뒤에는 뭐가 붙습니까? 약속의 구체화가 뭡니까? 암이 낫는 것, 부자 되는 것이 아니고 ‘피’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 전부입니다. 그것으로 마감되는 기적입니다. 그것이 뭐냐? 예수님의 피입니다.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것만이 유일한 증거에요. 증거를 내 쪽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내 외부(바깥)에서 찾아야 돼요. 나한테 증거를 찾으면 안 돼요. 나는 변하거든요. 위장하고 날조하고 조작해요.
우리는 우리가 한 경험을 내일이 되면 달리 또 확대하고 가장하고 조작하기 때문에 자기가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몰라요.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지, 내가 십자가의 피를 증언하는 것, 내가 예수의 피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을 빼야 돼요. 나의 믿음이 공연이 주의 피를 가립니다.
피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작용하는데 피에서 나오는 능력을 우리가 인정을 하지 않게 되면 내 쪽에서 피에 다가가야 돼요. 이것은 어떤 이이갸인가 하면 워낙 믿음이 없어서 찝찝하니까 “주님 거기에 계세요. 내가 십자가로 찾아가겠습니다.”
이렇게 가다보면 방법론이 나와요. “이렇게 하면 주님의 축과 연결되겠습니까?” 자꾸 이렇게 한다 말이지요. 주님과 연결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 죄를 반길 분이 없어요. 주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죄가 발굴되지요.
우리가 다가가는 것은 주님께 용납이 안 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그런데 영은 이 땅에 없지요? 위에서 주셔야 되잖아요. 그래서 위에서 난 것은 영이고 땅에서 난 것은 육이 되는 겁니다. “땅아, 빠이빠이.” 이 말이거든요. “네가 어디 감히 하늘로?”
그러니까 하늘에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 아니하면 어떤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참 답답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혈연관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정답은 정답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위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느니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위에서 농구공을 던지지 아니하면 밑에서 농구공을 받은 사람이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땅에서 농구공을 만들면 어떻게 됩니까? 구분이 안 되지요. 자기가 땅에서 구한 농구공인지 지붕 위에서 형이 던져준 농구공인지 구분이 안 되지요. 어떻게 구분하느냐? 부정적입니다.
“이거 내가 만든 것 아닙니다.”라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할 때 사모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위를 쳐다보는 것이 되는 거에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내 힘이 아니고 주의 은혜입니.”라는 고백을 사모하는 가운데에 내놓을 때에 절로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누가 떠미는 것이고 누가 강제로 나를 납치해가는 것입니다. 119에 신고하지 마세요. 신고해도 하늘나라에서는 신고전화 받지를 않습니다.
강제로 나를 납치를 해서 강제로 자기의 사람을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나의 멱살을 장악하듯 쥐는 그 힘은 주의 십자가의 힘, 피의 용서, 긍휼의 힘, 사랑의 힘, 아까 말했듯이 폭력적인 질투의 힘이고 이 힘에서 어떤 권세도 목자가 아는 양을 빼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장악(사랑)하는 힘이 더 세기 때문에 그래요. 그 사랑의 힘을 어떻게 우리가 느낍니까? 죄를 지어 보세요. 그러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뭡니까? ‘바보같은 인간아, 왜 그런 짓을 했어? 왜? 왜? 왜? 성도가 되어서 그런 짓을 해서 되겠어?’라고 하면서 내가 나를 치지요.
이 때가 평소에 신앙을 본인이 관리했다는 죄를 폭로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간 곳이 없고 내가 알아서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내가 알아서 성경말씀 봐준 덕분에 이만큼까지 왔다는 자기 자랑의 일종으로서 신앙생활을 해온 거에요.
그 허점이 들통이 나게 만듭니다. 자기를 때리지 마세요. 만약 때리면 “내 새끼 때리지 마. 때리지 마. 애미가 때리는 게 아니야. 내 손자야.”라고 할머니가 말리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징치히거나 벌을 세우거나 정죄하거나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정죄할 때는 선악적 논리로 정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선악적 논리를 가지고 정죄하면 안 돼요. 긍휼히 여기는 긍휼에 위반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정죄당해야 되지만 우리가 아는 선과 악으로써는 자신을 질책하지 마세요.
십자가 지신 것을 공연한 짓으로 처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반성하지 마세요. 원래 성질이 그렇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주여.’ 하고는 또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기장에다가 ‘오늘 일기 안 쓴다. 나 같은 것이 무슨 일기를 써.’ 하고 빨간 볼펜으로 가위표를 해봐도 몇 장 넘기면 가위표가 여러 개 나옵니다.
결심이 며칠 안 갑니다. 상황이 바뀌면 결심은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똑같은 상황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께서 질질 끌고 가는 것을 ‘나그네 삶’이라고 하고 그 가운데에서 사모하게 만듭니다.
목적은 그들을 위해서 한 성을 예비했는데 그것을 ‘언약의 성’이라고 하고 그 성은 ‘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11절에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에서 “약속”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13절에 봅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그 다음에 뭡니까?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고 되어 있지요. 결국 우리에게 우리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준비해 놓은 약속을 주는데 그 약속은 주께서 한 성을 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적인 성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공히 주는 공통적인 성이고 그래서 이것은 개인구원이 아닌 집단구원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개인은 부분이 되는데 이 부분을 다른 말로 하면 지체가 되는 겁니다.
지난 주일낮 설교에서 지체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지체라면 그냥 다가서면 안 돼요. 여기에 카메라가 있잖아요. 카메라를 넘어서 촬영하듯이 이 카메라 자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볼 때에 “아이 참 얼굴이 예쁘네요.”라고 하면 안 되고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내 눈에 예쁘게 보이네요.”(너무 길다.) “예수님께서 이쁘게 하셨네요.”라고 해야 돼요.
“참 이 개 성질 더러운데 예수님 때문에 더럽네.” 항상 중간에 그리스도를 넣어야 돼요. 이것이 영적인 혈연관계에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다”라고 하셨는데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이 대신 이루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할 때에 다 형제고 모친이에요. 참, 교회가 그래야 되는데 1:1로 대하는 거에요. 저 사람은 얼마짜리 신자, 저 사람은 얼마짜리 신자, 십일조를 내는 쪽과 안 내는 쪽, 귀찮게 하는가, 아니면 도움이 되는가를 평가하지요.
주로 귀찮게 하는 쪽은 청년들이죠. 예산을 달라고 하니까요. 이런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빼버리고 교회라는 사업체에 어떻게 유리하느냐, 중간에 사업체가 달려 있어요. 이것은 특히 목사뿐만 아니고 장로들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헌신한 이 자본금을 어느 목사가 와서 키워줄 것이냐 거기에 필요한 목사만을 당회장으로 뽑지요. “이 교회 어떻게 하겠습니까?” “복음 전하겠습니다.” 땡, 탈락이에요. “이 교회 어떻게 하겠습니까?” “3년 내에 300명 자신합니다.” 그러면 장로는 계산하는 거에요.
‘300명이 오게 되면 각자 뿜빠이 하면 교회 운영이 되니까 나는 헌금을 적게 내거나 안 내도 되는구나.’ 이 계산하느라고 통밥이 막 돌아가요. 그러니 이 교회가 친목단체이고 그냥 잠시 왔다가 가는 연극무대이고 그런 거지요.
그런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을 교회놀이라고 하지요. 소꿉놀이의 진화된 형태인 거에요. 17절에 봅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이렇게 해석하면 반드시 여러분들이 말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드리도록 아브라함에게 작용하신 결과로 약속이라는 것이 이 땅에 믿음으로 구체화된 거에요. 약속은 하늘에 있고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믿음이에요.
이 믿음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전혀 개입하지 못했지요. 왜? 자기의 믿음은 탈락이니까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 때문에 해야 되는 것,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왜 우리의 뜻을 꺾으십니까?
내가 가고자 하는 길(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내가 할 수 없는, 내가 기대도 하지 않은 인생으로 몰아가십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라는 그 덩어리 전체가 주께서 주신 믿음이라고 간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믿음의 원형은 하늘의 약속에 있고 내 믿음은 그 약속과 연결되어 있는 믿음이기 때문에 주께서 ‘네 뜻대로 말고 내 뜻대로 너를 이렇게 이끌어 갈 것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의 증거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그 많은 일 중에서 여기에서는 이삭을 바친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삭을 바친 것은 뭐냐? 죽음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음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요.
자기 아내 사라가 죽은 자와 방불해서 임신이 안 되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겁니다. 생명에서 생명이 나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에서 성도가 나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 그분이 죽음을 죽어야 거기에서 생명이 나와요.
이것은 신학자들도 모르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엮어주려고만 신학을 구성하기 때문에 중간에 신은 죽음이라는 에피소드로 잠시 들어갔다가 빠지면 그만인 거에요.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않고 부활이 중요하다고 목사들이 주장하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에 말하기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는데 예수의 흔적이 뭐에요?
바로 십자가를 말하는 겁니다.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 죽음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현재 가짜 생명은 죽음 쪽으로 끌려가요.
이것을 가지고 “십자가로 역행”이라고 해요. 차가 뒤로 갈 때 “빽, 빽.”, 일본말로 빠꾸, 빠꾸 하잖아요. 뒤로 뒤로 뒤로 가는 거에요. 처음 태어나는 그때부터 이미 죽음을 염두에 두고 태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100세 이상 살아봐야 결국은 죽잖아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간다”는 창세기 말씀이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우리 몸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둘둘 말았으니까 이 몸을 통해서 말씀이 말씀되게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이거든요.
그래서 흙에서 태어났으니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실감나게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해서 다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고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나오니까 우리가 걱정하는 우리의 생명의 죽음은 진짜 생명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죽음 쪽에 있습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태어났다(출생)가 죽는다고 해봐야 이것은 수평적이지요. 인간이 백날 죽어봐야 인간은 천국에 못갑니다. 여기에서 위에서 약속(언약)이 등장합니다. 그 흔적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낯선 믿음, 내 뜻대로 안 되는 믿음, 결과적으로 믿음이 되는 믿음을 말합니다.
낯선 믿음이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은 땅에 거면서도 땅에 거하는 그 길이 하늘나라에 합류하게 하는 노선으로서 땅에 거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똑같아요. 그런데 내 이성 속에 약속의 구체화, 십자가의 죽음이 내 안에 흔적으로서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성도와 비성도의 차이를 결정하는 겁니다.
나 대신 누가 죽으셨다는 사실을 안 순간,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 미장원에서 머리가 어떻게 나왔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왜? 나에게 일어난 일체의 모든 일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더 중요하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소중하지 나는 안 소중한 거에요. 그 소중한 분의 지체로 붙어있어야 소중하게 되는 겁니다. 그 증거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 거에요. 아브라함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의 흔적이 아브라함 속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 손으로 이삭을 바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브라함이 의도하지 않은 낯선 믿음인데요. 이것을 후대에 있는 사람이 보고 ‘아,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침으로서 하늘나라 본향에 갔구나.’라고 여기고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잠잘 때 수면제를 먹여서 꽁꽁 묶어서 트럭에 태워서 산에 가서 잡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은 내가 기대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탈락인 거에요. 아브라함은 그 방식이고 너에게는 너의 방식이 따로 있는데 남의 방식을 따라가게 되면 그것은 아브라함을 욕보이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증거했는데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모방하려고 하는 거에요. 주기철 목사를 닮아라, 손양원 목사님을 닮아라, 한경직 목사님을 닮아야 된다, 이것은 이단의 소리입니다. 또 록펠러의 기도를 닮으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경제 사범입니다.
록펠러 엄마의 기도 내용이 어떻고 록펠러가 십일조를 해서 어떻다고 하는데 록펠러가 공황을 일으킨 주범에 해당이 돼요. 록펠러 하나 때문에, 그가 석유에 손대서 많은 사람을 실업자로 만들게 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세상은 홀로 착한 사람은 없어요. 더불어 다 악해요. 누구를 본받을 필요가 없어요. 다 악합니다. 착해 보이지요. 건드려 보세요. 욕 나오지요. 사층 할머니하고 놀지 마라. 이 말은 그렇게 점잖은 사람도 성질이 나면 나오게 마련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욕 나오는 상황이 아직까지 무르익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정 욕할 데가 없으면 드라마를 보면서 욕하세요. 아무 죄도 없는 연기자를 보고 저 건 죽어야 돼. 죽어야 돼. 실컷 욕하고 싶으면 하세요.
그런데 바깥에 욕할 데가 있으면 드라마를 보고 욕하지 않습니다. 왜? 다른 데에서 풀었기 때문에요. 제가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욕을 하는 이유는 쫓기기 때문에 그래요. 쫓겨서 무서우니까 자기를 사수하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강력한 저항의식이 욕이 되는 겁니다. 애들이 욕을 많이 하는 이유는 공부에 쫓기기 때문입니다. 공부 스트레스에 쫓기기 때문에 욕이 아니면 풀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욕을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취약하다는 거에요. 허약하고 설 데가 없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성도가 욕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존재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런 인간인데 뭐. 하는 짓마다 죄가 되는데 남 탓 할 이유가 뭐가 있냐 말이지요. 하는 일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 뻔한데요.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쉽게 말해서 숨어 있는 약속의 구체화로 자기 아들을 바치는 행위를 한 겁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이 미리 예상했어요 안 했어요? 예상을 미리 못한 거지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본인의 의사가 아니지요? 다른 분의 의사가 개입된 것이지요? 이 사람이 바로 성도잖아요. 이것이 바로 믿음 아닙니까?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라고 하면 “네 인생이 네 것이 아니거든. 내 거거든.” 이미 주의 것으로 승인이 난 거에요. 주님께서 값을 주고 이미 죽은 자를 산 자로 바꿔놓았다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죽을까 싶어서 내 식대로 더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거에요.
주님께서 ‘참, 헛짓하고 있네. 이미 너는 살았어. 왜? 내가 너를 죽였으니까.’ ‘그러면 뭐를 하면 됩니까?’ ‘죄만 지어.’ ‘왜 죽어야 됩니까? 왜 내 손으로 인생을 꾸려가지 못합니까?’ ‘하는 짓마다 죄거든.’ ‘어떻게요?’ ‘살아봐. 확인될 거야.’
80이나 먹어놓고도 아직까지 알아서 가겠다고 버티니 그것이 죄가 아니고 뭐에요? 90이 되어서 죽는다고 하는데 좋은 날, 좋은 시를 골라서 가겠다는 거에요. 자기가 무슨 그런 권리가 있습니까?
뭐, 부르는데 못 가다는 게 어디 있어요? 불러주면 가야지요 뭘 못가요. 이게 일종의 주에 대한 욕입니다. 못간다고 전하라는 것은 나 당신 욕하고 싶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쉴 새 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욕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게 마귀의 품성이지요. 참, 그런 인간은 피가 아니면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 받은 거에요. 그래서 성도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심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가는 관심이 없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에게 기대한 것은 자기 자손을 낳는 것을 기대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아브라함의 뜻(자기 뜻)을 꺾어버리고 아브라함이 기대한 자손이 아니고 예수님이 기대한 자손을 아브라함의 몸, 그 가문을 통해서 뽑아내는 참 힘든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한테 뭘 뽑아내려고 이렇게 감귤을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내가 요구하는 것은 아닌데 아마 주님만 아시는 것이 있을 거에요. 그것을 뽑아내는 거에요. 뭐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에게 죽기 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있을 테지요.
그것이 내 식대로 하는 것과 주께서 뽑아내서 전하는 방법이 달라요. 주께서 하게 되면 주의 은혜로 자식들이 복음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착각해가지고 내가 복음을 전하니까 자식이 복음을 들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뽑아내는 작업부터 전부 다 주님이 알아서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뽑힐 준비만 하면 돼요. 언제 어디에서 주께서 사용할 것인지는 주께서 아시는 것이니까요. 다만 남을 흉내내지 마세요. 각자 달라요.
각자 다르기 때문에 “내 식대로 하면...”이라는 말을 하면 안 돼요. 왜 각자 다른가? 각자 지은 죄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욥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겁을 내고 있어요. 물로 끝장면은 괜찮게 끝났지만 앞장면에서 자식 열 명이 다 죽을 때에 ‘믿는 사람이 꼭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겁이 덜컥 나는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욥의 자식 열 명 죽은 것은 욥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우리는 다른 것에 해당돼요. 이발사가 머리를 너무 짧게 깎은 것도 저에게는 욥의 자식이 열 명 죽는 정도의 아픔입니다. 그래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심각하게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고 진짜 고마워할 이야기지만요. 이런 것까지 다 주님이 손길을 준 겁니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하는 모든 것도 주의 인자하심을 받아 된 것이고 별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꼭 악에 받쳐야 인자하심을 아는 게 아니고 평소에 좀 알라는 겁니다. 아침에 밖에 나가거든 오늘도 감사합니다 라고 하고 평소에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 속에서도 주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할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워낙 혈연관계에 놓이고 자기 뜻, 고집이 세다 보니까 그게 안중에도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주께서 깔아놓은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 거둬내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을 수시로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선조가 나온다고 해서 ‘나 이 사람 따라가야지.’ 자꾸 이렇게 하지 마세요.
너는 너의 숙제를 해야지 남의 숙제를 좋아하면 안 됩니다. 다만 그들 속에 어떤 흔적이 있느냐 그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입니다. 예수의 기능 가운데 일부를 그들이 미리 앞당겨서 예고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노아의 방주, 아벨의 죽음, 아브라함과 이삭이 나그네 된 것, 전부 다가 예수님의 일부분이죠. 그것을 끌어모아 완전체를 만들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의 공생애의 삶이 되는 겁니다.
자신이 구원의 방주지요, 떡이지요, 만나지요, 부모가 있지만 부모를 부모라고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하지 못하는 호불호형 못하는 홍길동 같은 신세가 됐지요 어머니를 놔두고 홀로 가버리고 자기 제자한테 맡겼지요.
이 모든 것이 그 동안 신앙의 선배들이 살아왔던 그 일부일부를 통합한 겁니다. 그래야 장래것과 연관이 되니까요. 그 다음에 19절에 봅시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산다는 의미 앞에 죽음이 전제되어 있지요.
죽음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생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경유해버리면 생명이 되어 버리잖아요. 생명의 근거가 십자가의 죽음이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이상은 죽어도 살아요. 왜? 근거가 확실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살아야지.’가 전제가 아니고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먼저 돌아가신, 귀하신 생명되시는 분이 십자가의 언약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사는 게 되고 무슨 짓을 해도 생명이 돼요. 이게 은혜가 된다고요.
그러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같은 약속에 포함된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진도 빨리 나갑시다. 20절에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라고 했는데 보통 축복은 일대일로 축복을 해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보고 축복하잖아요. 그런데 이삭은 야곱은 축복을 하고 에서는 저주를 했지요. 언약은 둘로 나누어 집니다. 축복과 저주입니다. 이게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같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언약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축복받은 것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 사람에게 저주가 가는 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면 사람은 지옥에 갈 수가 없어요.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지옥에 가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옥으로 축구선수가 골을 몰아가듯이 몰아넣어야 지옥에 갈 수 있는 거에요. 공부를 이제 마치면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저 인간을 어떻게 몰아넣는가.. 아, 지옥으로 가게 하려고 몰아넣는구나. 저 사람은 천국으로 가게 몰아넣는구나.’ 이렇게 믿음의 관점으로 보셔야 됩니다. 강아지는 죽으면 흙이 되어 버리고 끝나는 것이구요.
언약의 레마에 담겨 있는 것이 있는데 (보통 폭탄을 주우면 분해하잖아요.) 언약을 분해하면 그 안에는 서로 섞이지 않는 두 가지 양면성이 있는데 축복과 저주가 그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없습니다. 축복의 대상과 저주의 대상뿐이지 흔히 말하는 인간, “저는요?” “저”는 없어요.
축복의 대상으로 인간이 되었을 뿐이고 저주의 대상으로 인간이 되었을 뿐이지 인간이 축복이냐 저주를 선택하거나 골라잡을 권한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언약 안에 있는 이삭은 말해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의 내용과 우리의 현실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꿈 같은 세상에 너무 마음 상하지 말고 늘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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