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6-칼 바르트 (강의:이근호 목사)
칼 바르트(1886~1968), 이분에 대해서 다른 후배 신학자들이 많이 거론을 해도 이 사람의 진짜 신학을 건드리지 못해요. 이 사람의 진짜 신학은 뭐냐? 특별한 성경해석은 없다, 이렇게 단언을 했고, 그 다음 더 나아가서 신학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존의 모든 신학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후배 신학자들이 자기 신학을 주장하려고 해도 칼 바르트에 대해서 건드리질 못해요. 신학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을 본인이 칼 바르트에 대해서 반박하려면 신학이 있는 것이라고 제시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칼 바르트가 신학이 없다고 제시한 근거가 있거든요. 그 근거를 후학 신학자들이 넘어설 수 없어요. 그걸 넘어야 선배님 신학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데 칼 바르트가 신학은 없다고 제시한 근거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후학자들이 이게 제 신학이라고 말을 할 수 없지요. 그래서 후학자들이 칼 바르트에 대해서 거론할 때는 그 사람의 문제점, 허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칼 바르트의 중심을 건드리질 못한다는 거예요. 화살 쏘면 핵심을 찔러야 되는데 자꾸 비껴가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칼 바르트가 신학해서 교회에 유익 된 게 뭐가 있느냐? 인류에게 어떤 이익을 정신적인 성장을 제공했는가? 그것은 상당히 뭔가 불분명하다.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인류에게 남긴 업적이 좋지 않고 미미하다. 이런 식으로. 칼 바르트 본인 이야기는 안 건드리고 실적과 업적이 양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는 칼 바르트보다는 폴 틸리히가 오히려 더 영향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칼 바르트보다는 폴 틸리히가 낫다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건 상당히 어떻게 보면 비겁한 거죠.
그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는데,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이야기한 건 자기 이야기는 안 하고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인기가 높았느냐, 호응도가 있느냐, 그걸 따져서 그 사람의 가치를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칼 바르트 신학에 의하면 이단입니다.
칼 바르트 신학은 이거에요. ‘충돌’입니다. 충돌이란 말은 후배 신학자들이 말이 너무 과격해서 못 쓰기 때문에 이렇게 바꿔요. 충돌이란 말을 써야 되는 못 쓰고 겁이 많아서 벌벌 떨고 ‘위기’로 바꿔요. 칼 바르트는 위기의 신학자가 아닙니다. 충돌이에요. 위기라면 누가 위기랍니까? 하나님한테 위기가 아니고 인간한테 위기지요. 그 자체가 칼 바르트 보기에는 건방지고 교만한 생각이란 말이죠. 네가 뭔데 위기를 안 당해야 돼? 너는 위기를 당해도 늘 당해야 되지. 그런데 뭐 위기다, 우리한테 손해다, 우리한테 절망적이 아닌가?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처음부터 절망적이었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절망이니 어떠니. 뭘 은근히 노렸는데? 그 노린 자체가 수상하다는 거예요.
칼 바르트는 이런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계시를 줬으면 계시에 관심이 있어야지 저 계시로 내 생존과 내 존재에 가치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는지 이용해보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 계시 밖에 있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두 물체가 충돌한다면, 두 아이가 충돌하면 혹이 생기겠지요. 지금 충돌하게 되면 이마에 혹이 생기는 것만 걱정하고 있단 말이죠. 칼 바르트는 충돌한 그 자체에 주목하란 말이죠. 충돌하고 난 뒤에 자기 아픈 것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아파도 할 말 없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칼 바르트는 당신의 신학이 인류에게 공헌할 수 있는 내용이 뭐냐고 묻고 싶지요. 내가 분명히 신학 쓰지 말라고 했지, 얼마나 공헌할 거라는 걸 쓰지 말라 했지. 벌써 그런 질문 자체가 내가 말한 내용 바깥에서 나온 네가 원한 네 생각을 내 이야기에 없는 이야기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화가 나서 그럼 가만 입 다물고 있지 책은 왜 내고 외치기는 왜 외치는데? 칼 바르트 신학은 거기에 대한 답변이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를 인간이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인간마저 서로 다르잖아요. 다른 인간을 하나로 묶을 수 없느냐는 겁니다. 칼 바르트 이전의 모든 철학자, 신학자들이.
그걸 존재 또는 존재자, 같은 이야기로 보면 돼요. 하이데거는 다르지만 하여튼 인간은 존재한다, 존재자, 이것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겁니다. 최 씨, 김 씨 다르지만 다 같이 존재하잖아요. 그런데 그 존재에 돌멩이, 해바라기, 코스모스, 인공물 되는 카메라, 자동차, 선풍기 다 집어넣을 수 있지요. 그 공통점이 다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먼저 존재해서 인간이 주물럭거리니까 여기에 존재하잖아요. 영어로 make라 하는데 만들다. 하나님께서는 make를 안 하고 빠라라고 하지요. 창조했다. create라 하지요. 창조한 거죠.
지금 바르트 이전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성경에 빠라가 나오니까 아사, 빠라 구분해서 나오고 아사는 make고 빠라는 창조했다, create라고 되니까 사람들은 그걸 정답이라고 진리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기독교 전통상. 칼 바르트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을 신이 인간이 한 게 아니고 인간이 했기 때문에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을 하면 될 것 아니냐? 신이 창조했다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르트는 이걸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차이가 있느냐?
인간이 신을 향하여 다른 이웃을 향하여 말하는 것은 말이 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하여 나타날 때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의 특징이 뭐냐?
부재에요. 부재는 존재의 반대말이에요.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는 말씀이 존재하게 되면 기록된 말씀이 돼요.
그런데 기록된 말씀 같으면, 칼 바르트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유대인들이나 기독교 신자는 뭐라고 합니까? 그건 알지. 옛날 모세가 십계명 받았다. 돌 판에 적혀진 말씀부터 해서 율법 책, 성경 66권, 그게 기록된 말씀이잖아요. 그건 우리도 동의하지.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나오겠지요. 바르트는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충돌이란 말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건 서로 동의하는 거예요. 유대인도 동의하고 기독교인도 동의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기록된 말씀이 가만있는 게 아니고 들썩들썩한다는 거예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신약성경 330페이지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역사한다, 활동한다, 그걸 제가 방금 들썩들썩한다. 이게 바로 활동하는 말씀인데 이걸 칼 바르트는 선포된 말씀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일리가 있는 거예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보내지 아니하면 누가 선포하리요. 그러면 선포자는 부재합니까, 존재합니까? 존재하지요. 그런데 선포자를 보낸 자는 부재하잖아요. 다시 설명할 필요성이 있겠지요.
칼 바르트를 할 때 한 마디로 충돌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후학들은 충돌이란 말이 너무 과격하게 들리니까 위기로 바꿨잖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제가 이야기해요. 위기로 바꾸면 안 돼요. 위기가 아니고 충돌이에요. 그러면 충돌이 된다는 말은 칼 바르트 당신이 하는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하는 셈이 되는데 이걸 당신은 어떻게 증거해 줄 거요? 하나니까 하나님의 모든 내용은 숨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학자들이나 교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숨어있는 것이 아니고 기록된 말씀 안에 적혀 있잖아요. 왜 적혀 있을까요? 숨어있는 것이 아니고 보면 납득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납득이 되니까 보는 대로 순종하고 지키고 준수하면 되잖아요. 그게 하나님 뜻이잖아요.
제가 주일 낮에 초반에 그런 이야기했는가? 사람은 단순한 걸 원해요. 교회 나오는 교인들은 복잡한 걸 원하지 않아요. 시켜만 주이소. 시킨 대로 하겠습니다. 간단한 걸 원한다고. 칼 바르트는 그게 인간을 망쳤다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면 본인이 하나님과 충돌한다는 걸 알아요, 몰라요? 괜찮은 존재인데 어떻게 충돌할 리가 있습니까. 괜찮은 존재가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순종하면 할수록 더욱 더 빛이 나지요. 충돌할 리가 없지요. 시키는 대로 하는 뭘 충돌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하라 하면 아들이, 순종하겠나이다. 이게 무슨 충돌이에요. 고분고분이지. 아이고, 착해. 머리 쓰답고. 기독교, 유대교 모든 역사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해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칼 바르트 신학이 후대에게 굉장히 거부감을 나타나는 이유가, 교회가 없다는 거예요. 교회가 왜 없느냐 하면, 교회가 기록된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없는 거란 겁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은 교회란 것이 에베소서에 나오잖아요. 성경 속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다고 이야기가하고, 바르트는 똑같은 거예요.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없는 거란 거예요. 그게 성경 전체는 부재에서 존재하지 않는 데서 왔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데서 나왔어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존재하지 않는 말씀이 구체화 되면 기록된 말씀이 됐고 그 기록된 말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들썩거린다고. 들썩거리면서 사람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기록된 말씀에서 살아있는 말씀, 선포되는 말씀으로 이것이 영화감독이 “액션!”하게 되면 대사에 있던 문자가 영화배우를 통해서 행위로 나오지요. 그 행위가 우리를 덮치면 우리는 비로소 숨겨진 비밀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식으로 도달된다는 거예요. 이게 칼 바르트의 첫 출발점이에요.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칼 바르트는 말씀과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의 삼위일체에요. 왜냐하면 삼위일체와 너무 닮았어요. 숨어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나타난 하나님 예수님, 그 나타난 예수님을 증거하는 하나님은 성령, 너무 닮았잖아요. 그래서 말씀의 삼위일체에요.
칼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를 바꿔야지요. 왜 그러냐 하면 칼 바르트 보기에 기존의 삼위일체는 내가 여기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니까 분명히 같은 존재의 개념을 하나님께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안셀무스도 그렇게 이야기했고요.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는 공통점이 있는 겁니다.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면 내 존재로 주님 존재를 만나면 되겠네. 그렇게 만나면 안 돼요. 내 존재의 양이 너무 적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돌멩이, 코끼리, 코스모스 다 집어넣어야 돼요. 세상에 있는 해와 달, 별 다 집어넣어야 돼. 다 집어넣으면 모든 것들이 존재가 되지요. 그 중에 하나 인간을 집어넣으면 모든 존재가 존재하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게 시편에 문자적으로 나오죠. 만물을 만드신 분에게 찬양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라. 시편에 나오는 존재했기 때문에 마음껏 찬양하는 찬양에 우리의 찬양도 섞어 넣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교회에서 말하는 존재신학입니다. 그게 천주교고.
천주교에서 그 이야기 듣고 뭐라고 하느냐? 칼 바르트 씨, 왜 그게 존재가 온 목소리를 합쳐서 신에게 찬양하는 게 시편에도 나오는데 왜 나쁩니까? 칼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빠졌잖아. 그러면 천주교에선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 우리 성당 위에 십자가 있는데. 강론할 때 십자가를 늘 언급하는데. 십자가처럼 마음을 낮춰라, 십자가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늘 십자가를 언급해서 참다운 사랑을 전파하라고 십자가 이야기하는데 왜 십자가 없다고 함부로 이야기하느냐?
그러면 칼 바르트는, 십자가는 충돌이다. 단절이잖아요. 우리 존재와 하나님과의 단절. 그게 십자가에요. 물론 칼 바르트가 성경 하나하나를 해석하진 않아요. 그 당시에는 성경해석이 깊이 있게 나눠진 게 없습니다. 교리로 논리 싸움으로 진행되지 성경 본문으로 안 싸우거든요. 그 당시 독일신학이라는 게 성경은 인간의 책이라 해서 Q문서라 해서 성경 자체를 인간이 만들었다고 해서 전부 양식비평으로 다 찢어놓은 입장이기 때문에 성경으로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그들은 의미 없다고 본 거예요. 성경으로 우리한테 무슨 위로를 받고 도움 받느냐 관심사가 그것밖에 없지 성경 자체에는 관심 없는 거예요.
그런데 칼 바르트는 성경 자체에 관심을 둬야 된다는 것을 제가 보기에는 최초가 아닌가 싶어요. 이건 루터도 못하고 칼뱅도 못한 거예요. 성경 자체에서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칼빈, 루터야 말은, 모든 것이 성경에서 나온다고 했지요. 그런데 본인이 성경 해석할 줄을 모르는데. 칼빈이나 루터는 성경 해석하는 자체가 기존의 자기가 내세우는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했지 성경 자체에서 할 줄 몰랐어요. 왜냐하면 칼빈과 루터 이후에 나오는 게 언약이 나왔거든. 언약이 안 나오니까 성경 해석이 안 되지요. 중구난방이죠. 일관된 통일된 해석이 나오질 않는다니까. 그런다고 지옥 갈 사람밖에 없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언약 안다고 천당 갑니까, 예수님 능력으로 구원받지요.
성경해석이 중구난방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 안 돼서 성경을 교회에 있는 문자 아는 사람만 쓰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관심 있다는 인상이 적었어요. 수사들이나 신부들도 관심 없는데 문자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책도 없는데 무슨 성경에 관심 있어요. 그냥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 빌고 복종하고 순종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또 교회 와서 교리 이야기 듣고 삼위일체만 알면 구원되는 줄 알았지요.
칼 바르트는 성경해석은 잘 안 되지만 어쨌든 간에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된다. 그건 우리 존재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 전체 내용에서 나오는 사건이 있다는 것,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죠. 그러면 칼 바르트의 출발점은 존재냐, 십자가 사건이냐? 이 문제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존재로 생각할 때 인간은 존재하다가 죽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맞지요. 죽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그걸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은 죽는다. 맞습니까? 이게 옳은 말이에요? 칼 바르트는 성경해석은 못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감은 잡았어요. 왜냐하면 죽는다는 개념이 성경에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이해 못한 사람을 위해서 다시 할게요.
성경에 있는 이야기는 일단 존재가 아니고 부재지요. 존재하지 않는데서 있지요. 그러면 그 개념이 나올 때는 존재한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 알면 그건 오해에요, 진리에요? 오해지요. 그게 오해란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 자체가 충돌이라니까요. 충돌이고 다른 말로 하면 단절이고. 여러분, 충돌이란 말은 잘 안 듣잖아요. 단절이란 말은 현대철학에서 많이 사용하는데 지젝이라든지 라캉에서 많이 하는데.
단절됐다는 말은, 이쪽의 견해의 저쪽에서 수용이 안 되지요. 그러니 성경에 보니까 죄 값은 사망이니까 죽음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죽는 것은 사망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게 아니고 잘못된 존재에서 나온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칼 바르트 당신은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으로 죽는다는데 그 죽음의 뜻은 뭐냐? 여기서 바르트 신학의 큰 장점이 있어요. 죽는다는 이야기는 우리는 할 수 없고 누구만 해야 하느냐 하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야기해야 그게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해야 그게 진리가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죠. 그러면 나도 진리지만 너희도 진리라고 한 거예요? only, 자기만 진리죠. 그러면 자기는 빼놓고 나머진 진리 아니어야 하지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사람은 죽는다고 이야기했지요. 그 말이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주님 보시기에 진리 아니지요. 그러면 인간이, 유대인이 사람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진리 아닌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이 안 돼요. 왜? 생각이 그들이나 우리나 똑같은데. 그 점은 동의한다, 그 점은 틀렸다. 이러질 못하는 거예요. 네가 틀렸다는 이야기는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유대인을 비판할 권한도 없어요.
그 비슷한 논리가 갈라디아서에 나오지요. 지금 칼 바르트는 성경해석을 잘 못하지만 그 핵심은 꿰뚫고 있어요. 1장 7절에 보면,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지요. 그 말은 이미 다른 복음이 유행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무림의 고수들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고수가 없다는 말은 그게 다 아니라는 거예요.
그 많은 복음들이 사도 바울 보기에 어디서 나왔어요?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게 왜 나오게 됐느냐 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나온 조작된 날조된 복음이란 겁니다. 다른 고수가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쁠 거예요. “너만 신자가?” 이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1장 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면 너만 신자냐고 질타가 들어올 때 사도 바울은 그래 나만 신자야, 라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1장 8절에 의하면 못합니다. 우리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지요.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칼 바르트가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전체를 다 읽어봤다는 이해가 잘 안 된 느낌이 들어요. 뭐냐 하면,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저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는 거예요.
칼 바르트의 아까 이론과 진노를 결합시켜 봅시다. 숨어있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지요. 숨어있는 진노가 나타난 진노가 십자가고, 그 나타난 진노와 저주를 구원받을 사람에게 알려줄 역할을 성령이 하는 거예요. 이걸 전파된 십자가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칼 바르트의 신학과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섞었습니다. 그러니까 숨어있는 진노가 나타나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되고, 그것이 전파되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식으로 전파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끝났어요.
제가 아까 칼 바르트의 신학이 충돌이라고 했는데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의하면 저주,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지요. 온 우주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지요. 그러면 거기에 속해 있는 성도가 할 일은 간단한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증거하는 일만 하면 끝, 우리 할 일은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이름도 우리 교회니, 진리와 자유 사랑하는 그런 교회 말고 교회 이름을 바꿔야 돼요. 저주 교회 뜨는 진노 교회. 아무리 전위적인 교회라고 해도 저주 교회는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지옥 교회란 말도 들어본 적 없어요. 서양에는 마귀를 섬기자는 그런 교회는 수십, 수백 군데 있는 줄 아는데 저주 교회, 지옥 교회, 진노 교회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회는 바로 저주 교회, 진노 교회입니다. 칼 바르트는 진노까지는 안 나가도 충돌 교회까지 언급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한 걸 간단히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 주장하는 성경에 있다고 하는 모든 용어를 총동원해서 뭔가 개념을 잡으면 그것 자체로 하나님의 저주를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하나님과의 충돌의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네가 성경에 이런 문자 있다고 교리 만들었다면 그 교리를 만든 주동자의 의도는 뭐냐? 존재에 대한 이익이고 유익이란 말이죠. 결국은 어떻게 하면 내 존재가 천국 가느냐는 노림수의 발단에 불과하지 전혀 하나님의 진짜 뜻과는 상관없다는 겁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만약에 천당까지 오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십자가, 충돌의 사건, 십자가를 완전히 개무시한 것밖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어떤 분이 저한테 메일 보내서 농담 삼아 장난삼아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이근호라는 이름 자체가 영어로 하게 되면, ignore, 무시하다. 캐나다에 있는 사람인데 설교 들으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상당히 복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연이에요. 제 이름이.
칼 바르트의 후학들이 칼 바르트의 신학을 정통으로 안 건드리는 이유를 알겠지요. 충돌 자체를 증거해야 되는데 충돌을 비껴가려고 그렇다면 참된 개념이 어떤 것인지 찾을 생각하지 말라. 충돌 자체를 증거하면 끝이지. 그렇다면 올바른 신학은 뭡니까? 그런 식으로 물으면 안 돼. 올바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런 질문 자체가 내 의견과는 충돌된다는 것이 바르트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재를 주장했지요. 그럼 존재와 부재의 싸움이라고 됐는데 저는 그걸 다른 말로 존재와 사건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을 설명하는데 쉬울 겁니다. 그래서 교회교의학에 보면 교회를 위한 신학, 목회를 위한 신학으로 변질 된 것을 다 뒤집어 버린다. 교회 위한 신학 없고 목회를 위한 신학도 없습니다. 신학 뒤집기. 씨름의 뒤집기 한 판이에요.
숨어있는 말씀과 계시된 말씀과 전파된 말씀, 계시의 삼위일체, 이것을 칼 바르트는 계시론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접촉점이 있을 것인데 그건 칼 바르트는 성육신으로 봅니다. 아까 목사님은 십자가라 해놓고 갑자기 바르트는 성육신인데 목사님은 자기 견해 이야기합니까?
바르트는 성육신 안에 십자가가 담겨 있어요. 성육신은 시작점이고 성육신이 마감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에 다 이뤘다는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글쎄요, 칼 바르트가 헤겔을 아는지 모르지만 헤겔 신학의 초점이 성육신이에요. 헤겔을 우리가 했는데 헤겔 신학 간단하게 넘어가겠습니다. 정과 반에서 합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 합은 따로 나오는 게 아니고 이미 정 안에 합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래서 헤겔 책이 어려운 거예요. 이걸 트라우마라고 해요. 내 속에 만약에 내 피부에 점이 있다고 하면, 확대기로 보면 점이 아니고 이만한 면적을 가지지요.
헤겔 철학은 인간 속에 이미 하나님이 인간 되신 요소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하이데거는 이야기했지요. 들어있어요. 들어있는 걸 확대시키면 이게 죽음이라는 겁니다. 헤겔도 마찬가지고 하이데거 철학은 뭐냐 하면, 그 죽음을 앞당겨 알게 되면 사람은 자유롭다, 이겁니다. 이미 죽어 마땅하니까. 죽어 마땅한 게 아니고 어차피 죽으니까. 하이데거는 죽어 마땅함은 없어요. 죽어 마땅함은 칼 바르트의 신학이지 하이데거가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죽어 마땅함이 아니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헤겔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이미 인간 존재 속에 포함돼있다는 거예요. 이건 하이데거와 헤겔이 둘 다 같이 봐요. 이미 죽음 속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 죽음을 보고 애통하거나 울지 말고 죽음을 미리 알아버리면 그 사람의 어떤 행동도 용감하겠지요. 그걸 하이데거는 인간의 가능성이라 보고, 헤겔은 죽음 품은 채 죽음을 주신 분을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순례자의 길, 이게 헤겔입니다. 이게 일체성, 방향, 절대 정신을 향하여 인간은 죽음을 품고 자기 트라우마를 안고 가는 거예요. 근거가 뭐냐? 성육신, 신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헤겔이나 하이데거나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르트도 같이 동감하고 있어요.
그런데 바르트는 헤겔과 달리 왜 죽어야 하는가?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헤겔과 다르지요. 헤겔은 목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르트는 목사지요.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면 바르트 씨, 왜 죄 때문에 죽어야 됩니까?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에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죄와 의의 관계입니다. 죄, 다른 말로 악마는, 다른 말로 귀신은, 다른 말로 부정적인 것은 그 자체는 의미 없다는 겁니다. 죄가 왜 죄답게 굴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의 반영체이기 때문에 죄로 등장해야 된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야 될 이유는 배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짓는 것으로부터 출발돼야 된다는 겁니다.
의에 대해서, 악마, 죄에 대해서 너무 많은 비중을 두지 말라. 너무 의식하지 말라. 어차피 의가 되고 주님의 영생 얻기 위해서 우리는 마귀로부터 시달리는 게 당연한데 마귀와 싸운다고 힘 빼고 에너지 쏟지 말란 말이죠. 어차피 죄 짓게 돼있는 걸 죄 안 지으려고 애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죄 짓는 것도 의의 한 방편이 되는 거예요.
바르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기존에 있는 교회를 위한 신학, 사람들이 납득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짜 복음으로 예배당으로 끌어 모았잖아요. 등록시켰잖아요. 그걸 뒤집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기존의 교회가 이제 하나님 믿었으니까 하나님 믿는 백성답게 하나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자. 이걸 완전히 뒤집는 거예요. 업어치기 한 판으로 젖혀버리는 거예요.
그게 교만이라는 거예요. 백날 착해봐야 누가 착한데요? 주님을 빙자한 내가 착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르트는 초반에 나의 교회, 나의 사랑, 나의 믿음, 나의 소망, 앞에 걸친 나라는 것을 다 부셔버려라. 그게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개혁주의자들이 그렇게 바르트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바르트를 싫어해서 바르트가 주장한 걸 이단이라고 개혁주의가 주장하면서 세운 용어가 뭐냐? 발티즘이라 해요.
그래서 발티즘이 통합 측 광나루 장신 신학교에 처음 왔을 때 총신에서 드디어 신정통주의로 끝났다고 얼마나 이단이라고 반대했는지 몰라요. 이제 한국교회는 죽었다고. 처음부터 죽어 있었는데. 세상에 바르트를 받아들이다니. 그래서 박아론은 바르트 공격하는데 평생을 바쳤어요. 보수주의 안 죽었다 이 말이죠. 박아론 그 사람이 칼 바르트를 공격하면서 내세운 게 있어요. 바르트 약점을 쳤다고 내세운 이론이 있어요. 그건 뭐냐? 칼 바르트는 신과 인간의 접촉점을 잘라버렸다. 신과 인간의 만남을 잘랐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종교를 통해서 신을 아는 지식([Knowing God],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마저 죽진 않았다. 그걸 접촉점으로 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바르트는 부재, 단절을 주장해서 그것마저 잘라버렸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단 중에 이단이라고 이야기해요.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눈과 귀를 막았다는 말은 눈과 귀는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귀에 장애자가 있고 장님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다음에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지요.
그러면 마음에서 안 나오는 게 인간에게 나올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이미 먼저 마음에서 뭉쳐져서 나오지요.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은 어디를 경유합니까? 우리 속에 있는 마음을 경유해서 우리도 행동도 마찬가지고 실천하는 것도 마음 바탕에서 수집한 것으로 된 것이지요. 그 마음이 현대생물학적으로는 두뇌 속에 있잖아요. 마음으로 생각 못했다는 말은, 바르트의 말은, 인간의 존재에서 나온 것은 일체 십자가를 안다, 모른다? 모른다는 거예요.
한 번 봅시다. 십자가가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인 건 맞아요. 성육신이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인 건 맞는데 그걸 아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접촉점을 만들어줬다고 해서 우리 보통 인간이 접촉점을 찾아갈 수 있느냐는 그 문제에 있어서 박아론이나 기존 교회에서는 있다고 본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친절하게 사람이 되게 했으면 예수님 붙들고 직접 만나고 살피고 분석하게 되면, “당신, 하나님 맞지요?” 우리 마음으로 안다는 거예요. 일말의 접촉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충돌이 있기 때문에. 만약 알아버리면 다른 건 충돌해도 안다는 점에선 충돌이 안 일어나니까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이 다 몰라야지, 그중에 저는 알았어요, 이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같은 아담 족속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어리석게 보여야 되고 무지몽매해야 되는 것처럼 보여야 거예요. 이사야 53장에 누가 이걸 믿었으리요, 누가 그걸 알았으리요, 하는 말씀 자체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분명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아는 편에 속하는 게 아니고 모르는 편에 속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십자가를 알았으면 우리가 안 게 아니고 십자가 스스로 액션, 행동, 능력을 발휘해서 십자가가 직접 친히 왕림하셔서 우리 마음을 방문하셔서 알게 한 게 아니고, 우리의 무지몽매함을 유발시켜서 우리는 알게 된 거예요. 십자가 영,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십자가 사건을 터트린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봅시다. 다이너마이트로 유대인의 십자가 사건을 폭발시켰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하기를 원하느냐 하면, 폭발이 있었잖아요. 그건 한 번으로 끝나고 그 다음에 우리는 폭발되기 싫어. 그때 인간들이 어리석었지요. 주께서 얼마나 폭발하신다고 아팠겠습니까.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네요. 그때 주님이 아팠습니다. 이러길 원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 다이너마이트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십자가가 폭발하는 거예요. 폭발하면 우리의 껍데기, 우리의 존재, 우리의 개념, 우리의 의미, 소통하는 언어적 개념들이 다 찢어지겠지요. 찢어지면 남는 게 내가 알았다는 게 남는 게 아니고 갈기갈기 걸레처럼 찢어진 우리만 남겠지요.
그러면 나는 십자가 안다는 게 남는 게 아니고 충돌이 벌어진 사건의 현장이 되겠지요. 폭파된 사건 현장을 보게 되면 찌그러진 통조림도 보이고 나무 조각이고 폭파된 흔적이 보이겠지요. 흉측하지요. 흉측한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란 겁니다. 걸레, 쓰레기, 성화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 또다시 규합해서 거룩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 오직 사건만 한 번 터졌다고 사건이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그 다이너마이트를 기록된 말씀이라는 거예요.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걸레가 되고 쓰레기가 되면서 우리는 찬양이라는 결실을 주의 힘으로 나타냅니다. 주여, 고민할 필요도 없는 걸 괜히 고민했나이다. 주께서는 다시 십자가로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리니까 그동안 고민한 그것이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고 나의 오만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한 평생 내일 밥 먹고 살까 하고 고민하는 것,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는 마태복음 6장이라는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리니까 오늘 걱정은 그날로 족하다는 주님의 업적만 폭파 현장에 남으니까 주께서 저를 이렇게 다루시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이게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은 영광 돌리는 방법입니다.
이게 바르트가 생각하는 바르트의 사상이에요.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