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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강의-칼 바르트 1509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28. 07:20

2015-09-15 17:27:16 조회 : 427         
칼 바르트 150915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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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19.♡.174.209) 15-09-18 10:21 

201509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6-칼 바르트
(강의:이근호 목사)


칼 바르트(1886~1968), 이분에 대해서 다른 후배 신학자들이 많이 거론을 해도 이 사람의 진짜 신학을 건드리지 못해요. 이 사람의 진짜 신학은 뭐냐? 특별한 성경해석은 없다, 이렇게 단언을 했고, 그 다음 더 나아가서 신학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존의 모든 신학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후배 신학자들이 자기 신학을 주장하려고 해도 칼 바르트에 대해서 건드리질 못해요. 신학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을 본인이 칼 바르트에 대해서 반박하려면 신학이 있는 것이라고 제시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칼 바르트가 신학이 없다고 제시한 근거가 있거든요. 그 근거를 후학 신학자들이 넘어설 수 없어요. 그걸 넘어야 선배님 신학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데 칼 바르트가 신학은 없다고 제시한 근거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후학자들이 이게 제 신학이라고 말을 할 수 없지요. 그래서 후학자들이 칼 바르트에 대해서 거론할 때는 그 사람의 문제점, 허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칼 바르트의 중심을 건드리질 못한다는 거예요. 화살 쏘면 핵심을 찔러야 되는데 자꾸 비껴가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칼 바르트가 신학해서 교회에 유익 된 게 뭐가 있느냐? 인류에게 어떤 이익을 정신적인 성장을 제공했는가? 그것은 상당히 뭔가 불분명하다.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인류에게 남긴 업적이 좋지 않고 미미하다. 이런 식으로. 칼 바르트 본인 이야기는 안 건드리고 실적과 업적이 양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는 칼 바르트보다는 폴 틸리히가 오히려 더 영향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칼 바르트보다는 폴 틸리히가 낫다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건 상당히 어떻게 보면 비겁한 거죠.

그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는데,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이야기한 건 자기 이야기는 안 하고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인기가 높았느냐, 호응도가 있느냐, 그걸 따져서 그 사람의 가치를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칼 바르트 신학에 의하면 이단입니다.

칼 바르트 신학은 이거에요. ‘충돌’입니다. 충돌이란 말은 후배 신학자들이 말이 너무 과격해서 못 쓰기 때문에 이렇게 바꿔요. 충돌이란 말을 써야 되는 못 쓰고 겁이 많아서 벌벌 떨고 ‘위기’로 바꿔요. 칼 바르트는 위기의 신학자가 아닙니다. 충돌이에요. 위기라면 누가 위기랍니까? 하나님한테 위기가 아니고 인간한테 위기지요. 그 자체가 칼 바르트 보기에는 건방지고 교만한 생각이란 말이죠. 네가 뭔데 위기를 안 당해야 돼? 너는 위기를 당해도 늘 당해야 되지. 그런데 뭐 위기다, 우리한테 손해다, 우리한테 절망적이 아닌가?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처음부터 절망적이었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절망이니 어떠니. 뭘 은근히 노렸는데? 그 노린 자체가 수상하다는 거예요.

칼 바르트는 이런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계시를 줬으면 계시에 관심이 있어야지 저 계시로 내 생존과 내 존재에 가치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는지 이용해보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 계시 밖에 있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두 물체가 충돌한다면, 두 아이가 충돌하면 혹이 생기겠지요. 지금 충돌하게 되면 이마에 혹이 생기는 것만 걱정하고 있단 말이죠. 칼 바르트는 충돌한 그 자체에 주목하란 말이죠. 충돌하고 난 뒤에 자기 아픈 것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아파도 할 말 없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칼 바르트는 당신의 신학이 인류에게 공헌할 수 있는 내용이 뭐냐고 묻고 싶지요. 내가 분명히 신학 쓰지 말라고 했지, 얼마나 공헌할 거라는 걸 쓰지 말라 했지. 벌써 그런 질문 자체가 내가 말한 내용 바깥에서 나온 네가 원한 네 생각을 내 이야기에 없는 이야기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화가 나서 그럼 가만 입 다물고 있지 책은 왜 내고 외치기는 왜 외치는데? 칼 바르트 신학은 거기에 대한 답변이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를 인간이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인간마저 서로 다르잖아요. 다른 인간을 하나로 묶을 수 없느냐는 겁니다. 칼 바르트 이전의 모든 철학자, 신학자들이.

그걸 존재 또는 존재자, 같은 이야기로 보면 돼요. 하이데거는 다르지만 하여튼 인간은 존재한다, 존재자, 이것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겁니다. 최 씨, 김 씨 다르지만 다 같이 존재하잖아요. 그런데 그 존재에 돌멩이, 해바라기, 코스모스, 인공물 되는 카메라, 자동차, 선풍기 다 집어넣을 수 있지요. 그 공통점이 다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먼저 존재해서 인간이 주물럭거리니까 여기에 존재하잖아요. 영어로 make라 하는데 만들다. 하나님께서는 make를 안 하고 빠라라고 하지요. 창조했다. create라 하지요. 창조한 거죠.

지금 바르트 이전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성경에 빠라가 나오니까 아사, 빠라 구분해서 나오고 아사는 make고 빠라는 창조했다, create라고 되니까 사람들은 그걸 정답이라고 진리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기독교 전통상. 칼 바르트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을 신이 인간이 한 게 아니고 인간이 했기 때문에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을 하면 될 것 아니냐? 신이 창조했다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르트는 이걸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차이가 있느냐?

 

인간이 신을 향하여 다른 이웃을 향하여 말하는 것은 이 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하여 나타날 때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의 특징이 뭐냐?

부재에요. 부재는 존재의 반대말이에요.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는 말씀이 존재하게 되면 기록된 말이 돼요.

그런데 기록된 말씀 같으면, 칼 바르트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유대인들이나 기독교 신자는 뭐라고 합니까? 그건 알지. 옛날 모세가 십계명 받았다. 돌 판에 적혀진 말씀부터 해서 율법 책, 성경 66권, 그게 기록된 말씀이잖아요. 그건 우리도 동의하지.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나오겠지요.
 
바르트는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충돌이란 말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건 서로 동의하는 거예요. 유대인도 동의하고 기독교인도 동의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기록된 말씀이 가만있는 게 아니고 들썩들썩한다는 거예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신약성경 330페이지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역사한다, 활동한다, 그걸 제가 방금 들썩들썩한다. 이게 바로 활동하는 말씀인데 이걸 칼 바르트는 선포된 말씀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일리가 있는 거예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보내지 아니하면 누가 선포하리요. 그러면 선포자는 부재합니까, 존재합니까? 존재하지요. 그런데 선포자를 보낸 자는 부재하잖아요. 다시 설명할 필요성이 있겠지요.

칼 바르트를 할 때 한 마디로 충돌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후학들은 충돌이란 말이 너무 과격하게 들리니까 위기로 바꿨잖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제가 이야기해요. 위기로 바꾸면 안 돼요. 위기가 아니고 충돌이에요. 그러면 충돌이 된다는 말은 칼 바르트 당신이 하는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하는 셈이 되는데 이걸 당신은 어떻게 증거해 줄 거요? 하나니까 하나님의 모든 내용은 숨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학자들이나 교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숨어있는 것이 아니고 기록된 말씀 안에 적혀 있잖아요. 왜 적혀 있을까요? 숨어있는 것이 아니고 보면 납득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납득이 되니까 보는 대로 순종하고 지키고 준수하면 되잖아요. 그게 하나님 뜻이잖아요.

제가 주일 낮에 초반에 그런 이야기했는가? 사람은 단순한 걸 원해요. 교회 나오는 교인들은 복잡한 걸 원하지 않아요. 시켜만 주이소. 시킨 대로 하겠습니다. 간단한 걸 원한다고. 칼 바르트는 그게 인간을 망쳤다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면 본인이 하나님과 충돌한다는 걸 알아요, 몰라요? 괜찮은 존재인데 어떻게 충돌할 리가 있습니까. 괜찮은 존재가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순종하면 할수록 더욱 더 빛이 나지요. 충돌할 리가 없지요. 시키는 대로 하는 뭘 충돌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하라 하면 아들이, 순종하겠나이다. 이게 무슨 충돌이에요. 고분고분이지. 아이고, 착해. 머리 쓰답고. 기독교, 유대교 모든 역사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해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칼 바르트 신학이 후대에게 굉장히 거부감을 나타나는 이유가, 교회가 없다는 거예요. 교회가 왜 없느냐 하면, 교회가 기록된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없는 거란 겁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은 교회란 것이 에베소서에 나오잖아요. 성경 속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다고 이야기가하고, 바르트는 똑같은 거예요.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없는 거란 거예요. 그게 성경 전체는 부재에서 존재하지 않는 데서 왔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데서 나왔어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존재하지 않는 말씀이 구체화 되면 기록된 말씀이 됐고 그 기록된 말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들썩거린다고. 들썩거리면서 사람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기록된 말씀에서 살아있는 말씀, 선포되는 말씀으로 이것이 영화감독이 “액션!”하게 되면 대사에 있던 문자가 영화배우를 통해서 행위로 나오지요. 그 행위가 우리를 덮치면 우리는 비로소 숨겨진 비밀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식으로 도달된다는 거예요. 이게 칼 바르트의 첫 출발점이에요.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칼 바르트는 말씀과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의 삼위일체에요. 왜냐하면 삼위일체와 너무 닮았어요. 숨어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나타난 하나님 예수님, 그 나타난 예수님을 증거하는 하나님은 성령, 너무 닮았잖아요. 그래서 말씀의 삼위일체에요.

칼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를 바꿔야지요. 왜 그러냐 하면 칼 바르트 보기에 기존의 삼위일체는 내가 여기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니까 분명히 같은 존재의 개념을 하나님께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안셀무스도 그렇게 이야기했고요.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는 공통점이 있는 겁니다.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면 내 존재로 주님 존재를 만나면 되겠네. 그렇게 만나면 안 돼요. 내 존재의 양이 너무 적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돌멩이, 코끼리, 코스모스 다 집어넣어야 돼요. 세상에 있는 해와 달, 별 다 집어넣어야 돼. 다 집어넣으면 모든 것들이 존재가 되지요. 그 중에 하나 인간을 집어넣으면 모든 존재가 존재하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게 시편에 문자적으로 나오죠. 만물을 만드신 분에게 찬양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라. 시편에 나오는 존재했기 때문에 마음껏 찬양하는 찬양에 우리의 찬양도 섞어 넣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교회에서 말하는 존재신학입니다. 그게 천주교고.

천주교에서 그 이야기 듣고 뭐라고 하느냐? 칼 바르트 씨, 왜 그게 존재가 온 목소리를 합쳐서 신에게 찬양하는 게 시편에도 나오는데 왜 나쁩니까? 칼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빠졌잖아. 그러면 천주교에선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 우리 성당 위에 십자가 있는데. 강론할 때 십자가를 늘 언급하는데. 십자가처럼 마음을 낮춰라, 십자가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늘 십자가를 언급해서 참다운 사랑을 전파하라고 십자가 이야기하는데 왜 십자가 없다고 함부로 이야기하느냐?

그러면 칼 바르트는, 십자가는 충돌이다. 단절이잖아요. 우리 존재와 하나님과의 단절. 그게 십자가에요. 물론 칼 바르트가 성경 하나하나를 해석하진 않아요. 그 당시에는 성경해석이 깊이 있게 나눠진 게 없습니다. 교리로 논리 싸움으로 진행되지 성경 본문으로 안 싸우거든요. 그 당시 독일신학이라는 게 성경은 인간의 책이라 해서 Q문서라 해서 성경 자체를 인간이 만들었다고 해서 전부 양식비평으로 다 찢어놓은 입장이기 때문에 성경으로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그들은 의미 없다고 본 거예요. 성경으로 우리한테 무슨 위로를 받고 도움 받느냐 관심사가 그것밖에 없지 성경 자체에는 관심 없는 거예요.

그런데 칼 바르트는 성경 자체에 관심을 둬야 된다는 것을 제가 보기에는 최초가 아닌가 싶어요. 이건 루터도 못하고 칼뱅도 못한 거예요. 성경 자체에서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칼빈, 루터야 말은, 모든 것이 성경에서 나온다고 했지요. 그런데 본인이 성경 해석할 줄을 모르는데. 칼빈이나 루터는 성경 해석하는 자체가 기존의 자기가 내세우는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했지 성경 자체에서 할 줄 몰랐어요. 왜냐하면 칼빈과 루터 이후에 나오는 게 언약이 나왔거든. 언약이 안 나오니까 성경 해석이 안 되지요. 중구난방이죠. 일관된 통일된 해석이 나오질 않는다니까. 그런다고 지옥 갈 사람밖에 없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언약 안다고 천당 갑니까, 예수님 능력으로 구원받지요.

성경해석이 중구난방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 안 돼서 성경을 교회에 있는 문자 아는 사람만 쓰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관심 있다는 인상이 적었어요. 수사들이나 신부들도 관심 없는데 문자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책도 없는데 무슨 성경에 관심 있어요. 그냥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 빌고 복종하고 순종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또 교회 와서 교리 이야기 듣고 삼위일체만 알면 구원되는 줄 알았지요.

칼 바르트는 성경해석은 잘 안 되지만 어쨌든 간에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된다. 그건 우리 존재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 전체 내용에서 나오는 사건이 있다는 것,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죠. 그러면 칼 바르트의 출발점은 존재냐, 십자가 사건이냐? 이 문제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존재로 생각할 때 인간은 존재하다가 죽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맞지요. 죽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그걸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은 죽는다. 맞습니까? 이게 옳은 말이에요? 칼 바르트는 성경해석은 못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감은 잡았어요. 왜냐하면 죽는다는 개념이 성경에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이해 못한 사람을 위해서 다시 할게요.

성경에 있는 이야기는 일단 존재가 아니고 부재지요. 존재하지 않는데서 있지요. 그러면 그 개념이 나올 때는 존재한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 알면 그건 오해에요, 진리에요? 오해지요. 그게 오해란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 자체가 충돌이라니까요. 충돌이고 다른 말로 하면 단절이고. 여러분, 충돌이란 말은 잘 안 듣잖아요. 단절이란 말은 현대철학에서 많이 사용하는데 지젝이라든지 라캉에서 많이 하는데.

단절됐다는 말은, 이쪽의 견해의 저쪽에서 수용이 안 되지요. 그러니 성경에 보니까 죄 값은 사망이니까 죽음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죽는 것은 사망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게 아니고 잘못된 존재에서 나온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칼 바르트 당신은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으로 죽는다는데 그 죽음의 뜻은 뭐냐? 여기서 바르트 신학의 큰 장점이 있어요. 죽는다는 이야기는 우리는 할 수 없고 누구만 해야 하느냐 하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야기해야 그게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해야 그게 진리가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죠. 그러면 나도 진리지만 너희도 진리라고 한 거예요? only, 자기만 진리죠. 그러면 자기는 빼놓고 나머진 진리 아니어야 하지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사람은 죽는다고 이야기했지요. 그 말이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주님 보시기에 진리 아니지요. 그러면 인간이, 유대인이 사람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진리 아닌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이 안 돼요. 왜? 생각이 그들이나 우리나 똑같은데. 그 점은 동의한다, 그 점은 틀렸다. 이러질 못하는 거예요. 네가 틀렸다는 이야기는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유대인을 비판할 권한도 없어요.

그 비슷한 논리가 갈라디아서에 나오지요. 지금 칼 바르트는 성경해석을 잘 못하지만 그 핵심은 꿰뚫고 있어요. 1장 7절에 보면,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지요. 그 말은 이미 다른 복음이 유행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무림의 고수들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고수가 없다는 말은 그게 다 아니라는 거예요.

그 많은 복음들이 사도 바울 보기에 어디서 나왔어요?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게 왜 나오게 됐느냐 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나온 조작된 날조된 복음이란 겁니다. 다른 고수가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쁠 거예요. “너만 신자가?” 이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1장 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면 너만 신자냐고 질타가 들어올 때 사도 바울은 그래 나만 신자야, 라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1장 8절에 의하면 못합니다. 우리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지요.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칼 바르트가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전체를 다 읽어봤다는 이해가 잘 안 된 느낌이 들어요. 뭐냐 하면,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저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는 거예요.

칼 바르트의 아까 이론과 진노를 결합시켜 봅시다. 숨어있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지요. 숨어있는 진노가 나타난 진노가 십자가고, 그 나타난 진노와 저주를 구원받을 사람에게 알려줄 역할을 성령이 하는 거예요. 이걸 전파된 십자가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칼 바르트의 신학과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섞었습니다. 그러니까 숨어있는 진노가 나타나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되고, 그것이 전파되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식으로 전파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끝났어요.

제가 아까 칼 바르트의 신학이 충돌이라고 했는데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의하면 저주,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지요. 온 우주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지요. 그러면 거기에 속해 있는 성도가 할 일은 간단한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증거하는 일만 하면 끝, 우리 할 일은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이름도 우리 교회니, 진리와 자유 사랑하는 그런 교회 말고 교회 이름을 바꿔야 돼요. 저주 교회 뜨는 진노 교회. 아무리 전위적인 교회라고 해도 저주 교회는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지옥 교회란 말도 들어본 적 없어요. 서양에는 마귀를 섬기자는 그런 교회는 수십, 수백 군데 있는 줄 아는데 저주 교회, 지옥 교회, 진노 교회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회는 바로 저주 교회, 진노 교회입니다. 칼 바르트는 진노까지는 안 나가도 충돌 교회까지 언급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한 걸 간단히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 주장하는 성경에 있다고 하는 모든 용어를 총동원해서 뭔가 개념을 잡으면 그것 자체로 하나님의 저주를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하나님과의 충돌의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네가 성경에 이런 문자 있다고 교리 만들었다면 그 교리를 만든 주동자의 의도는 뭐냐? 존재에 대한 이익이고 유익이란 말이죠. 결국은 어떻게 하면 내 존재가 천국 가느냐는 노림수의 발단에 불과하지 전혀 하나님의 진짜 뜻과는 상관없다는 겁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만약에 천당까지 오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십자가, 충돌의 사건, 십자가를 완전히 개무시한 것밖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어떤 분이 저한테 메일 보내서 농담 삼아 장난삼아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이근호라는 이름 자체가 영어로 하게 되면, ignore, 무시하다. 캐나다에 있는 사람인데 설교 들으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상당히 복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연이에요. 제 이름이.

칼 바르트의 후학들이 칼 바르트의 신학을 정통으로 안 건드리는 이유를 알겠지요. 충돌 자체를 증거해야 되는데 충돌을 비껴가려고 그렇다면 참된 개념이 어떤 것인지 찾을 생각하지 말라. 충돌 자체를 증거하면 끝이지. 그렇다면 올바른 신학은 뭡니까? 그런 식으로 물으면 안 돼. 올바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런 질문 자체가 내 의견과는 충돌된다는 것이 바르트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재를 주장했지요. 그럼 존재와 부재의 싸움이라고 됐는데 저는 그걸 다른 말로 존재와 사건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을 설명하는데 쉬울 겁니다. 그래서 교회교의학에 보면 교회를 위한 신학, 목회를 위한 신학으로 변질 된 것을 다 뒤집어 버린다. 교회 위한 신학 없고 목회를 위한 신학도 없습니다. 신학 뒤집기. 씨름의 뒤집기 한 판이에요.

숨어있는 말씀과 계시된 말씀과 전파된 말씀, 계시의 삼위일체, 이것을 칼 바르트는 계시론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접촉점이 있을 것인데 그건 칼 바르트는 성육신으로 봅니다. 아까 목사님은 십자가라 해놓고 갑자기 바르트는 성육신인데 목사님은 자기 견해 이야기합니까?

바르트는 성육신 안에 십자가가 담겨 있어요. 성육신은 시작점이고 성육신이 마감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에 다 이뤘다는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글쎄요, 칼 바르트가 헤겔을 아는지 모르지만 헤겔 신학의 초점이 성육신이에요. 헤겔을 우리가 했는데 헤겔 신학 간단하게 넘어가겠습니다. 정과 반에서 합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 합은 따로 나오는 게 아니고 이미 정 안에 합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래서 헤겔 책이 어려운 거예요. 이걸 트라우마라고 해요. 내 속에 만약에 내 피부에 점이 있다고 하면, 확대기로 보면 점이 아니고 이만한 면적을 가지지요.

헤겔 철학은 인간 속에 이미 하나님이 인간 되신 요소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하이데거는 이야기했지요. 들어있어요. 들어있는 걸 확대시키면 이게 죽음이라는 겁니다. 헤겔도 마찬가지고 하이데거 철학은 뭐냐 하면, 그 죽음을 앞당겨 알게 되면 사람은 자유롭다, 이겁니다. 이미 죽어 마땅하니까. 죽어 마땅한 게 아니고 어차피 죽으니까. 하이데거는 죽어 마땅함은 없어요. 죽어 마땅함은 칼 바르트의 신학이지 하이데거가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죽어 마땅함이 아니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헤겔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이미 인간 존재 속에 포함돼있다는 거예요. 이건 하이데거와 헤겔이 둘 다 같이 봐요. 이미 죽음 속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 죽음을 보고 애통하거나 울지 말고 죽음을 미리 알아버리면 그 사람의 어떤 행동도 용감하겠지요. 그걸 하이데거는 인간의 가능성이라 보고, 헤겔은 죽음 품은 채 죽음을 주신 분을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순례자의 길, 이게 헤겔입니다. 이게 일체성, 방향, 절대 정신을 향하여 인간은 죽음을 품고 자기 트라우마를 안고 가는 거예요. 근거가 뭐냐? 성육신, 신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헤겔이나 하이데거나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르트도 같이 동감하고 있어요.

그런데 바르트는 헤겔과 달리 왜 죽어야 하는가?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헤겔과 다르지요. 헤겔은 목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르트는 목사지요.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면 바르트 씨, 왜 죄 때문에 죽어야 됩니까?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에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죄와 의의 관계입니다. 죄, 다른 말로 악마는, 다른 말로 귀신은, 다른 말로 부정적인 것은 그 자체는 의미 없다는 겁니다. 죄가 왜 죄답게 굴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의 반영체이기 때문에 죄로 등장해야 된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야 될 이유는 배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짓는 것으로부터 출발돼야 된다는 겁니다.

의에 대해서, 악마, 죄에 대해서 너무 많은 비중을 두지 말라. 너무 의식하지 말라. 어차피 의가 되고 주님의 영생 얻기 위해서 우리는 마귀로부터 시달리는 게 당연한데 마귀와 싸운다고 힘 빼고 에너지 쏟지 말란 말이죠. 어차피 죄 짓게 돼있는 걸 죄 안 지으려고 애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죄 짓는 것도 의의 한 방편이 되는 거예요.

바르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기존에 있는 교회를 위한 신학, 사람들이 납득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짜 복음으로 예배당으로 끌어 모았잖아요. 등록시켰잖아요. 그걸 뒤집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기존의 교회가 이제 하나님 믿었으니까 하나님 믿는 백성답게 하나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자. 이걸 완전히 뒤집는 거예요. 업어치기 한 판으로 젖혀버리는 거예요.

그게 교만이라는 거예요. 백날 착해봐야 누가 착한데요? 주님을 빙자한 내가 착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르트는 초반에 나의 교회, 나의 사랑, 나의 믿음, 나의 소망, 앞에 걸친 나라는 것을 다 부셔버려라. 그게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개혁주의자들이 그렇게 바르트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바르트를 싫어해서 바르트가 주장한 걸 이단이라고 개혁주의가 주장하면서 세운 용어가 뭐냐? 발티즘이라 해요.

그래서 발티즘이 통합 측 광나루 장신 신학교에 처음 왔을 때 총신에서 드디어 신정통주의로 끝났다고 얼마나 이단이라고 반대했는지 몰라요. 이제 한국교회는 죽었다고. 처음부터 죽어 있었는데. 세상에 바르트를 받아들이다니. 그래서 박아론은 바르트 공격하는데 평생을 바쳤어요. 보수주의 안 죽었다 이 말이죠. 박아론 그 사람이 칼 바르트를 공격하면서 내세운 게 있어요. 바르트 약점을 쳤다고 내세운 이론이 있어요. 그건 뭐냐? 칼 바르트는 신과 인간의 접촉점을 잘라버렸다. 신과 인간의 만남을 잘랐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종교를 통해서 신을 아는 지식([Knowing God],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마저 죽진 않았다. 그걸 접촉점으로 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바르트는 부재, 단절을 주장해서 그것마저 잘라버렸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단 중에 이단이라고 이야기해요.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눈과 귀를 막았다는 말은 눈과 귀는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귀에 장애자가 있고 장님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다음에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지요.

그러면 마음에서 안 나오는 게 인간에게 나올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이미 먼저 마음에서 뭉쳐져서 나오지요.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은 어디를 경유합니까? 우리 속에 있는 마음을 경유해서 우리도 행동도 마찬가지고 실천하는 것도 마음 바탕에서 수집한 것으로 된 것이지요. 그 마음이 현대생물학적으로는 두뇌 속에 있잖아요. 마음으로 생각 못했다는 말은, 바르트의 말은, 인간의 존재에서 나온 것은 일체 십자가를 안다, 모른다? 모른다는 거예요.

한 번 봅시다. 십자가가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인 건 맞아요. 성육신이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인 건 맞는데 그걸 아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접촉점을 만들어줬다고 해서 우리 보통 인간이 접촉점을 찾아갈 수 있느냐는 그 문제에 있어서 박아론이나 기존 교회에서는 있다고 본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친절하게 사람이 되게 했으면 예수님 붙들고 직접 만나고 살피고 분석하게 되면, “당신, 하나님 맞지요?” 우리 마음으로 안다는 거예요. 일말의 접촉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충돌이 있기 때문에. 만약 알아버리면 다른 건 충돌해도 안다는 점에선 충돌이 안 일어나니까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이 다 몰라야지, 그중에 저는 알았어요, 이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같은 아담 족속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어리석게 보여야 되고 무지몽매해야 되는 것처럼 보여야 거예요. 이사야 53장에 누가 이걸 믿었으리요, 누가 그걸 알았으리요, 하는 말씀 자체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분명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아는 편에 속하는 게 아니고 모르는 편에 속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십자가를 알았으면 우리가 안 게 아니고 십자가 스스로 액션, 행동, 능력을 발휘해서 십자가가 직접 친히 왕림하셔서 우리 마음을 방문하셔서 알게 한 게 아니고, 우리의 무지몽매함을 유발시켜서 우리는 알게 된 거예요. 십자가 영,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십자가 사건을 터트린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봅시다. 다이너마이트로 유대인의 십자가 사건을 폭발시켰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하기를 원하느냐 하면, 폭발이 있었잖아요. 그건 한 번으로 끝나고 그 다음에 우리는 폭발되기 싫어. 그때 인간들이 어리석었지요. 주께서 얼마나 폭발하신다고 아팠겠습니까.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네요. 그때 주님이 아팠습니다. 이러길 원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 다이너마이트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십자가가 폭발하는 거예요. 폭발하면 우리의 껍데기, 우리의 존재, 우리의 개념, 우리의 의미, 소통하는 언어적 개념들이 다 찢어지겠지요. 찢어지면 남는 게 내가 알았다는 게 남는 게 아니고 갈기갈기 걸레처럼 찢어진 우리만 남겠지요.

그러면 나는 십자가 안다는 게 남는 게 아니고 충돌이 벌어진 사건의 현장이 되겠지요. 폭파된 사건 현장을 보게 되면 찌그러진 통조림도 보이고 나무 조각이고 폭파된 흔적이 보이겠지요. 흉측하지요. 흉측한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란 겁니다. 걸레, 쓰레기, 성화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 또다시 규합해서 거룩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 오직 사건만 한 번 터졌다고 사건이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그 다이너마이트를 기록된 말씀이라는 거예요.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걸레가 되고 쓰레기가 되면서 우리는 찬양이라는 결실을 주의 힘으로 나타냅니다. 주여, 고민할 필요도 없는 걸 괜히 고민했나이다. 주께서는 다시 십자가로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리니까 그동안 고민한 그것이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고 나의 오만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한 평생 내일 밥 먹고 살까 하고 고민하는 것,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는 마태복음 6장이라는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리니까 오늘 걱정은 그날로 족하다는 주님의 업적만 폭파 현장에 남으니까 주께서 저를 이렇게 다루시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이게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은 영광 돌리는 방법입니다.

이게 바르트가 생각하는 바르트의 사상이에요.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19.♡.174.209) 15-09-18 10:23 
201509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6-칼 바르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칼 바르트의 글을 보면 상당히 과격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칼 바르트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하겠지요. 그렇게 하나님과 단절이라면 실제로 역사가 있잖아, 이스라엘이 있잖아. 그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실제로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게 어떻게 의미든 사건화가 되던 간에 실제로 닭이 있고 분명히 나무가 있는 걸 어떻게 포함시켜서 의미에 집어넣을 것이냐, 라고 하니까 칼 바르트는 이렇게 합니다. 시간을 거꾸로 봐라.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은 성육신을 높이 들어버려요. 그러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이미 종말이기 때문에 빼놓고 구약 창조로부터 흘러오는 게 아니고 거꾸로 성육신으로부터 내려주는 게 있다는 겁니다. 성전에서 물 흐르잖아요. 그러면 성전이 중심이 되고 물은 어떻게 됩니까? 에스겔 47장에 처음에 물이 흐를 때 처음에는 발목까지 오지요. 발목, 무릎, 허리에 차잖아요. 그게 뭔 뜻이겠어요? 물의 출발지점이 있는 성전으로부터 저쪽으로 그러니까 물이 채워지는 육지 쪽이 아니라는 거예요. 점차점차 물이 차이니까. 땅에 있는 물이 성전의 물이 합치는 게 아니고 땅에는 물이 일체 없고 유일하게 성전에만 있었는데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칼 바르트는 이걸 다른 말로 하나님만 계신다. 하나님만 존재하는 거예요. 이제 제가 물 이야기하니까 성전 이야기 이해되시죠. 코끼리 있잖아, 바퀴벌레 있잖아, 꽃 있잖아, 사람 있잖아. 칼 바르트는 그래서는 뭐가 있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카메라 있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어디서 흘러나왔느냐를 이야기해줘야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 날씨 좋다. 어디 놀러가자. 이 의미를 따져봅시다. 오늘 날씨 좋잖아요. 방금 뒤에 뭘 붙였습니까? 놀러가게 좋지요. 그러면 놀러가라고 날씨 좋습니까? 북한 같으면 미사일 쏘라고, 중국 같으면 열병식 잘 하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왜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출발점을 마치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양 툭툭 던지듯이, 그런 버릇이 나중에 하나님에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 화목하게 해달라고. 가정 화목을 왜 기도에 넣습니까?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걸 왜 기도합니까? 진원지를 찾아가야지요.

칼 바르트가 기존 교회 비판하면서 왜 출발을 하면서 기존의 교회, 교단, 기독교부터 출발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 자체를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겠다. 읽으려면 뒤에서부터 앞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어요. 128페이지 교회교의학 요약한 부분, 오토가 지은 책 128페이지에 나와 있어요.

그러면 칼 바르트를 비난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사람들이 묻겠지요. 그렇다면 숨어있다는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또 똑같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너만 알면 짜증나니까 난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거예요. 왜 그걸 묻느냐 하면, 그래야 목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사 혼자 은혜 받았습니다. 이게 목회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그러면 학원이나 뭘 차려서 가르치잖아요. 가르친다는 게 뭐예요? 나는 이렇게 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그대로 알려주면서 동일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희망을 제공해야 가르침이 돼요.

초등학교 교사가 학생들 가르칠 때 뭐라고 합니까? 이렇게 하면 문제가 풀려. 선생님이 하고 학생이 하나 똑같이 문제가 풀리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바르트가 너희는 몰라. 나만 알아. 이래서는 무슨 목회가 됩니까? 교육이 안 되잖아요. 그걸 목사들이 바르트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바르트가 제시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후학 교수들이 이걸 걸고 넘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유라는 거예요. 충돌은 하나님의 자유와 지금 나의 자유. 이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택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신을 선택해서 구원받겠다는 시도, 칼 바르트는 단호히 우상 숭배의 버릇이라고 보죠. 내가 어느 신을 섬겨야 유리할까?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우상 숭배했던 그 버릇이 그대로 이어진 거죠. 나한테 이익이 되는 신을 미리 알아서 점검해서 이런 신이면 내가 믿을 만하다 이제부터 신을 믿고자 하겠나이다. 나서는 그것이 가나안 종교, 우상을 섬겼던 버릇이 그대로 나온 거예요. 왜냐하면 칼 바르트는 루터를 인정하니까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숨어있는 하나님이에요.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올 때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스러움이 마음껏 발휘되는 상태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어먹을 때 주어먹으면서 주어먹는 나의 수고는 이렇게 좋다, 이렇게 생각하겠어요? 안 그러면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고 먹겠습니까? 이게 뭐지 하고 먹지요. 만나 이름이 이것이 무엇이냐, 에요. 이게 뭐지, 라고 묻는 순간 내가 없어지죠. 내가 뭘 하고 있다는 것이 날아가 버리죠.

그래서 바르트는 목회는 이렇게 하라. 하나님의 자유를 마음껏 덮쳐버려라. 그 효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완전히 뭉개져 버린단 말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의 목회, 교회 목회다.

시장에 가서 엄마, 나 떡볶이 먹고 싶어. 엄마의 방법은, 뒤통수를 때리는 거예요. 그 순간 얘는 자기 선택에 의해서 시장까지 온 게 아니고 엄마 장바구니를 들기 위해서 끌려온 거죠. 그러면 나는 졸지에 사라지고 엄마의 선택이라는 것이 내 앞에 붙겠지요. 그 엄마의 선택 이전에 칼 바르트는 예수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 자유의 혜택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폭포가 한 번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하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선택해버립니다. 그 마지막 선택된 자는 하나님의 선택에 참여자가 되어서 영원한 창세전부터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칼 바르트는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 예수 안의 선택이라고 규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로 선택하면 되지 않느냐? 그걸 칼 바르트는 예수 안의 선택이 아니고 칼빈의 선택입니다. 칼빈의 선택은 나는 존재하고 신이 존재하니까 존재하신 분에게 어떤 뜻이 있을 것이고 그 뜻이 선택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나를 선택하셨다고 보는 거예요.

칼 바르트가 보기에 중간에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칼빈이 살아있다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선택 안에 예수 안의 선택이 들어있지. 그 말 안 넣었다고 그 말 아닌 게 아니잖아요. 되게 예민하기는. 그냥 하나님 선택 안에 예수님의 선택이 있다고 생각해, 라고 밀어붙이려고 하지요. 그럴 때 바르트는 No, 그게 아니야.

예수 안의 선택이란 뭐냐? 예수님 십자가 사건 안의 선택이기 때문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충돌이죠. 단절이고 충돌이죠. 하나님 선택과 예수님 선택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냥 하나님 선택이면 충돌이라든지 단절이 거기에 담겨있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 안의 선택은 뭘 의미합니까?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 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가 된다는 의미로 추후적으로 덮쳐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첫째 시간 끝에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내가 뭘 안다고 골라잡아 구원되는 게 아니고 나를 구원하는 사건이 나라는 현장을 하나님이 빌려서 다이너마이트로 예수 안에서의 선택을 내 안에 폭발시키면 내가 구원받기 위한 선택은 완전히 찢어져 걸레조각이 돼버리고 그 안에 남는 것은 까불지 마, 내가 널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선택에 네가 말려들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이제부터는 나는 예수님 잘 선택했다고 자랑하지 말고 주님의 선택이 나를 구원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증거하는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것이 칼 바르트의 이야기입니다. 차이점을 아시겠지요. 박아론, 일반의 개혁주의, 칼빈, 루터의 생각과 바르트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지요. 차이 자체를 크게 확대시켜요.

그러면 여기에 대한 후학들, 대표적인 사람이 불트만인데 그 뒤에 몰트만, 그들이 밀리겠어요? 바르트 주장에 대해서 후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한 거예요. 바르트가 인간과 하나님의 다툼, 충돌이죠. 다툼은 여러분 잘 이해합니다. 인간을 누가 지배합니까? 에베소서 2장 1절에 불순종이 역사하는 영, 마귀가 지배하고 있지요. 고린도후서 4장 4절,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못하게 하죠. 마귀를 다른 말로 특별한 자의 신이 아니고 일부의 신이 아니고 마귀가 이 세상 신이에요. 이 세상 모든 걸 지배하는 신이라니까요. 이 세상 신을 복음의 광채를 못하게 한단 말이죠.

기존의 신학자들은 그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과 싸운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바르트의 말을 들어보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이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죠. 그런데 이 인간이 누굽니까? 낯선 인간, 상당이 같은 인간이면서 이질적인 인간이죠. 그래서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납득하기 위한 쉬운 방법을 준 게 아니고 오히려 그 다툼을 그 충돌을 더 심화시키는, 확대시키는 방법으로 사람 대 사람의 대결로 바르트는 보는 겁니다.

바르트가 이렇게 보는 이유가 있어요. 아까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나와 있지만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알지 못하죠. 이 본문이 어려운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귀로 안 들렸습니까? 열두 제자 전부 벙어리였습니까? 그리고 눈으로 못 봤습니까? 예수님 얼굴이 광채가 나서 눈 부셔서 못 봤습니까? 똑똑히 봤어요. 그리고 그 말을 똑똑히 들었어요.

문제가 심각해졌어요.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말을 인간이 할 수 있다, 없다?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젠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이 아니고 낯선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거든요. 이것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란 낯선 인간. 낯선 인간이 보여요, 안 보여요? 보이지요. 뒤에서 만지고 삼 년 동안 합숙 훈련했다니까. 기숙사 생활했어요. 모를 리가 있어요. 알아요. 저 사람, 목수의 아들 아닌가? 다 알아요. 아는데 인간 대 인간인 거예요. 인간인 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바르트는 여기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바르트는 여기까지 갔어요. 사람 대 사람의 다툼이다. 보고도 하나님 어디 있느냐고 이야기하면 돼요, 안 돼요? 이제는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처음부터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 보여주면 믿을 게, 구름 타면 오면 보여줄 게. 이런 소리하면 안 돼요.

칼 바르트는 낯선 존재의 등장을 선포하는 말씀과 연관시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는 몸은 누굽니까? 바로 숨어있는 복음을 증거하는 그들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성경 말씀과 합치되지요. 하나님 보여 달라고, 부활하신 예수님 보여 주면 믿겠다고? 부활하신 예수님 필요 없어요. 네 곁에 바로 옆에 시시하게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작고 미약하게 보이고 무시해도 되는 내 쫓고 싶은 그런 자들이 형제가 돼요. 형제를 무시하는 것이 곧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한테 어떤 용기와 위안을 주겠습니까? 네가 남들에게 기적을 보여줄 생각하지 말라. 네가 남한테 보여줄 기적은 간단하다. 그냥 닭이나 구워. 그냥 운전대나 잡아. 그냥 막 살아. 오히려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뭘 가립니까? 신앙 아닌 자를 신앙인으로 만드는 왜곡된 마귀적인 짓을 하고 있죠. 그 짓을 오늘날 교회들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이 자체가 마귀 짓이에요. 평범해야 되는데 유난 떠는 거예요.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다 잘 되고, 방언하고. 유난 떨면 가짜에요. 괜히 톰즈야 울지 말라고 수단 가서 희생 봉사하지 마세요. 그냥 집구석에서 살아요.

선교라는 게 지구는 둥그니까 끝이 어딥니까? 내가 살고 있는 그 지점이 끝이에요. 초등학교 때 배운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앞으로, 앞으로 계속 가보세요. 내 자리가 세상 끝이에요. 이걸 성경대로 하면 주님과 함께 곳이 세상 끝이에요. 종말입니다,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종말이 바뀌어서 오는 겁니다.

선포하는 말씀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그래 선포하는 말씀이 어디 있는데, 라고 반박할 거잖아요. 바르트는 말하기를 복음을 선포하는 그들이 주의 교회고 그렇게 안 보이던 말씀 속에 있는 교회선포하는 사건의 다발 속에서 비로소 교회가 교회답게 지금 기능하고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10장에 의하면. 로마서 10장 볼게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절)

바르트는 이 말을 기존에 구원 얻기 위해서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본인 개인구원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라는 말이 아니고 보내심을 받은 자만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에 기대를 걸고 하는 사람이 그 자체가 선교요, 그 자체가 전도라는 겁니다. 선포하는 말씀의 기능이라는 거죠. 제 말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구원받으려면 뭘 믿어야 돼? 이런 뜻이 아니고, 내가 예수 믿는 것이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보낸 자를 위해서 일을 하라고 예수 믿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인간 세계에서 어떤 지위나 신분, 위치나 그런 것 일체를 묻지 않는다는 인간의 모든 법적인 한계성은 주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장 4절)할 때 ‘모든’이란 의미가 뭐냐? 인간의 제한된 법적인 신분, 체제나 인간의 질서, 정치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구원받는 사람 따로 있고 전파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예수님이 보내신 전파자다. 그냥 막 사세요. 막 사는 그것마저 주님의 복음 전파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칼 바르트는 이것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전체 자기 이론이 앞뒤가 딱 맞거든요. 그렇잖아요. 빈틈이 없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우리가 교회다? 아니지. 그건 존재지. 숨어있던 말씀이 나올 때 존재가 아니고 사건화 돼있고, 기능화 돼있지요. 그 기능은 바로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오늘날 제2, 제3의 그리스도지요. 예수님 보여 달라고 할 필요 없고 부활하신 주님 보고 싶다는 게 필요 없어요. 그냥 평범한 옷 입고 이웃으로 살아가는데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제이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잘해주는 것이 예수님한테 잘해주는 게 되는 거예요.

칼 바르트는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여기까지라고 언급하는 것은 뒤에 더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예수님의 형제로써 살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몸인지 따져봅시다. 마태복음 25장에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로 심판하잖아요. 양에 속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걸 주었고, 갇혔을 때 돌아보았다고 하니까 양들이 뭐라고 합니까? 주님께서 내 편 들 줄 알았어. 그렇지 주님이 함께 있을 줄 알았다니까. 주님도 아시네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제가 언제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습니까, 하고 의아해하지요. 누가요? 지옥 간 사람이? 아니지요. 양, 천국 간 사람이 이야기하지요.

요한복음에 1장에 나다나엘이 나오지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에서 있을 때 내가 봤다고 할 때 나다나엘이 그럴 줄 알았다고 했어요? 주님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고 의아해하잖아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인식론 문제거든요.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압니까? 이게 불신자 같으면 쉬워요. 우리는 신자니까 안다. 쉬운데 성경에 나오는 말씀 보니까 소위 신자조차도 주님이 뭘 했는지 알아요, 몰라요? 주님의 기능을 신자라도 모른다니까. 그렇다면 결국 바르트의 약점이 드러나는데 뭐냐 하면, 주님 하신 일을 모르는데 사람을 어떻게 신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 논리가 당신의 논리에서 제시될 수 있느냐?

바르트 이론에 의하면, 신자들만큼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안다는 거죠. 불신자는 몰라요. 주의 말씀을 전파하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신자라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할 건데. 물론 후학들 중에서 이걸 비판하는 신학자는 없어요. 제가 이의를 끄집어내는 것이지 불트만, 몰트만은 거기까지는 몰라요. 불트만, 몰트만은 사실은 바르트한테 이의를 거는 게 아니고 그것을 정치적 시대에 맞춰서 확대시킨 거예요. 감히 이런 걸 어떻게 비판합니까? 자기 눈에 완벽해 보이는데.

왜 제가 바르트의 이 점을 시비 거느냐 하면, 바르트의 이중예정론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바르트가 선택론에 시비 거는 이유가 칼빈 때문에 그렇거든요. 칼빈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 예수 안에 선택했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건 덤으로 하나님 선택 안에 묻어 들어가는, 의미 없다고 했다는데 바르트는 그걸 시비 걸었잖아요. 왜냐하면 예수 안이란 말은, 십자가 안이란 뜻이고 십자가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봐요. 눈으로 봐도 모르고 귀로 들어도 모르고 심지어 마음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 십자가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선택했다는 말은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자기 구원을 위하여 주께서 선택하시면 구원받는다는 그런 아이디어는 십자가로 걸려내야 돼요.

칼빈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했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되거든요. 그건 인간들의 마음으로 알 수 있어요. 칼빈도 알고 있을 걸? 칼빈 이전에 그런 선택론을 주장한 단체가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유대교입니다. 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단체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죠. 출애굽기 19장에 나온 말 아닙니까.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성경에 왜 적혀 있는가? 보면 믿어진다고 해서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그러니까 택하신 민족이니까 누구만 택하신 민족이에요? 이스라엘만 택하신 민족이에요. 이방인은 택하지 않은 민족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 망했는데? 성전 불 태웠는데?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유대인은 설명 못해요. 바르트는 설명이 돼요. 뭐냐?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바르트에 문제 되는 게 또 하나 있는데 하나님의 속성에 있어서 내가 진노하심이란 사실은 바르트가 진노하심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 제가 언급했지만 바르트는 속성을 사실은 사랑과 자유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사실은 바르트 편을 들어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으로 속성이 돼야 되지 사랑과 자유로 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위반돼요.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진노, 저주지요. 하나님의 저주란 속성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짝을 이뤄야 돼요.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짝을 이뤄야 돼요. 왜 그래야 되느냐, 남은 자가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다른 말로 은혜로 구원을 받게 돼요.

그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느냐? 바로 이삭의 두 아들에게 있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이 쌍둥이죠. 쌍둥이가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하는데 멋져요.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잖아요. 아기 못 낳는 여자에게 아기가 나타납니다. 그게 언약적 창조인데 이건 천지 창조와 달라요. 언약 안에서 새롭게 창조, 숨어있는 속성이 나오는 거예요.

아버지의 장자권을 에서가 갖는 게 합당합니까, 야곱이 갖는 게 합당합니까? 지금 주는 자는 누구에요? 이삭이 주잖아요. 누가 받는 것이 이삭 보기에 합당하다고 봅니까? 맏아들 에서지요. 야곱이 받는 게 정당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아버지, 저한테 상속권을 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했습니까? 속여서 요구했지요. 이건 정식적인 루트는 아니지요. 반칙을 한 거잖아요. 억지지요. 반칙했다는 것은 반칙 없으면 형한테 가게 돼있다. 이게 정상이에요. 정상을 비정상으로 바꾼 거지요.

지금 뭘 설명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설명합니다. 단절, 충돌 물론 이 말 맞아요. 십자가는 이것으로 모자라요. 십자가는 그냥 충돌, 끊어짐이 아니고 거꾸로 에요. 인간과 생각이 안 맞는다는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생각과 반대로 하게 되면 주님의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돼야 돼요. 인간의 생각을 한 판 뒤집기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셔야 됩니다.

바르트의 이 말은 맞아요.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이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의 싸움, 그건 맞아요. 그래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 말이 맞으니까. 예수님 보고도, 예수님 말씀 들어도 못 믿잖아요. 거기서 마음이 문제 있지요.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같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인간, 예수님의 마음과 붙어서 이게 끊어지지요. 충돌되지요.

맞는데 더 나가야 된다니까요. 인간의 마음을 뒤집어야 된다니까. 뒤집은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 돼야 돼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저주받아야 될 그 저주가 그냥 저주가 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축복과 짝을 이루는 안에서 저주가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이란 그냥 지옥이 아니고 천국을 염두에 둔 지옥이고, 천국은 지옥을 염두에 둔 천국이 되고 짝이 돼야 돼요.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목사님, 구원받았습니까? 할 때 구원받았습니다. 이 말만 하면 안 되고 지옥 가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천국 간다. 반드시 지옥이란 걸 끄집어내서 천국을 설명해야 되고, 영생 받지 못함으로 영생을 이야기해야 되고, 구원 안 되도 되는데 구원됐다는 이렇게 짝으로 설명해야 돼요. 목사님들 설교할 때 그렇게 해야 된다니까요. 안 그러면 사람은 한쪽을 가지려고 한다니까. 난 지옥 안 갈래. 천국을 가지려고 해요.

참 이런 설교하기가 힘든 이유가 버릇이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에요. 우린 나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항상 처음은 나쁜 걸 가져요. 그 나쁜 것 중에 천국, 영생, 예수님, 십자가 다 들어있어요. 그게 나쁜 거예요. 왜?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데 성령이 임하면 내가 원했던 천국이, 천국이 아니고 구원이, 구원이 아닌 것을 그대로 교인들에게 증언해줘야. 그들의 마음이 내 마음과 똑같기 때문에. 그들이 납득이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말이 맞지요. 눈으로 보고도 모르고, 귀로 들어도 모르고.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현장이니까 그래요.

에서, 야곱 마무리집시다. 에서가 가져야 되는데 에서는 거짓말한 적 없고 나쁜 짓하지 않았어요. 이 말은 뒤집기가 없지요. 뒤집기가 없으니까 지옥 가야 돼요. 아버지 옆에 있었던 맏이는 집 나간 적 없어요. 평생 아버지를 모셨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정작 좋아한 사람은 누굽니까? 아버지 재산을 자기 것인 양 허랑방탕한 나중에 다 날리고 돌아온 그 아들을 좋아하지요. 맏이가 그걸 보고 궁시렁거리죠. 이게 바로 뒤집기잖아요.

양이 백 마리 있었는데 아흔아홉 마리는 지옥 가고 누가 구원받아요? 말 안 듣고 까불던 한 마리 양이 천국 가는 이유가, 천국이 잃어버린 자만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 그러냐 하면, 천국은 기쁨이 있어야 되는데 아버지의 기쁨은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돼요. 잃어버린 말썽꾸러기가 있을 때만 기뻐해요. 말썽꾸러기가 없으면 천국에 기뻐할 게 없어요. 참 기도 안 찬 이야기에요. 누가 믿겠어요. 더욱 더 거룩하고 더 점잖지 못해서 환장한 인간에게 이건 탕자 되라고 선전하는 것밖에 더 돼요? 사람은 후딱 이 땅 떠나서 천당 가고 싶은 게 소망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에서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를 놓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칼 바르트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게 있어요. 바로 신자 내부에 두 종류의 속성이 있다는 것, 신자 아닌 자와 신자 사이의 구분이 아니고 신자 안에 십자가 사건, 두 요소가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로마서 7장이거든요. 그것을 칼 바르트가 놓치고 있는 거예요. 진짜 교회 안에 교회 아닌 요소가 트라우마처럼 들어있어야 돼요. 헤겔 말이 맞아요. 구원받았기에 비로소 지옥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 돼야 돼요.

야곱이 복 받고 난 뒤에 이런 이야기했습니까? 나는 이제 거짓말쟁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 거짓말을 긍정했기 때문에 거짓말도 잘한 짓이다. 이렇게 이야기했겠어요? 아니면 거짓말한 것은 거짓말한 것으로 계속 남겠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남지요. 남으니까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뭐냐? 십자가에서 부활로 가면 안 돼요. 십자가는 계속 십자가로 있어야 돼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그래서 성도에요. 마음대로 사세요. 그래야 지가 쓰레기인 것이 표시가 나니까.

바르트 당시는 기존의 교권과 싸운다고 바르트 사상이 사실은 키르케고르 사상과 상당히 유사해요. 키르케고르 아시죠. 단독자, 신 앞에 실존. 키르케고르 저서의 대부분은 교회 아니다. 완전히 사기 집단이다. 진짜 교회는 주님 십자가 앞에 설 때 교회다. 이게 키르케고르거든요. 그걸 칼 바르트는 다 알고 있었어요. 키르케고르는 교회에서 완전히 미친 인간 취급 받았어요. 바르트도 마찬가지고 욕 많이 얻어먹었어요.

그런데 바르트의 신학이 기존과 싸운다고 싸우는데 너무 급급했어요.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싸우는데 급급해서 정말 십자가의 진수로 나가는데 제가 보기에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단점들이 보여요.

그리고 결국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 하나님은 누구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게 합니까? 야곱 중심이죠. 그러면 여기서 공식 하나 나오지요. 하나님은 거짓말 중심으로. 이걸 누가 믿겠어요. 주님은 뭐라고 했다고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 진리가 이 땅에 왔을 때는 뒤집기가 되지요. 진리가 왔는데 막상 예수님 말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로 봅니까? 어디서 구라치고 있어. 거짓말로 보는 거예요. 거짓말이 진리에요. 야곱의 언약에 의하면.

그러면 우리가 거짓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거짓말을 눈으로 보고도 귀로 듣고도 마음으로 알지 못해요. 그 거짓말이 왜 거짓말인지. 우리 삶 자체가 거짓이 아닌 걸 거짓이라 하고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우리 자신이 거꾸로 돼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거짓말로 곧이들을 수 없어요. 그냥 맡기세요. 그러면 바르트 말대로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게 되면 우리가 평생 살아온 것이 쓰레기로 거짓말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우리가 산다는 것이 남한테 피해주는 거거든요.

생각해봅시다. 아버지여, 먹을 것 없습니다. 한 끼 밖에 못 먹습니다. 주께서 그게 바로 거짓말인 거예요. 그것도 못 먹고 굶어죽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말을 끄집어내면 전부 다 자기 사정 봐달라는 식으로 말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게 우리 한계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존재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그걸 인정한 자가 바로 염소가 아니고 양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이라니까요.

바르트가 109페이지에 글을 하나 썼는데 바르트 본인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아무도 모르는 문장을 남겼어요. 그 문장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뭔 뜻인지 여러분 해석해보세요. [저버림 받은 자믿고서 신자로서 택함 받은 저버림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제가 잘못 인용한 게 아닙니다. 한 번 더. 하나님 원하시는 바는/저버림 받은 자가 믿고서 신자로서 택함 받은 저버림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 바르트가 말 잘못했어요. 저 같으면 말 안 되게 하지 않습니다. 쉽습니다.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버림받은 자는 선택돼야 된다. 짧은 말이에요. 지옥 가는 자는 선택되지 않고서는 지옥 갈 수 없다. 그렇게 했다면 바르트가 만인구원설이란 오해를 안 받는 거예요. 지금 바르트가 만인구원설로 받는 이유가 이중예정론 때문에 그렇거든요. 바르트가 본인도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해버렸어요.

첫 번째,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대표한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선택받았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이 선택받았다. 인간은 빠져라. 인간은 빠져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입니다. 자, 예수님이 버림받았다. 그런데 버림받은 자를 사흘 만에 부활시켰다. 그런데 그분이 인류의 대표자다. 그게 뭐예요? 모든 인간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 번 버림받은 자였고(과거),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돼버리죠. 그러면 바르트에게 지옥은 없는 거예요. 지옥은 주님이 대표로 홀로 경험했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는, 이제 인간에게 저주가 없습니다. 단번에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도 택한 백성의 대표로 했기 때문에 불교고 힌두교고 관계없어요. 마누라가 힌두교 하든지 알라 신을 믿든지 관계없어요. 다 구원받아요. 예수 안 믿어도 괜찮아요. 구원 다 받아요. 예수 믿는다는 조건 없이 너는 빠지고 예수님이 대표로 다 했기 때문에. 우리가, 믿어줄까요? 가만있어. 내가 알아서 다 할 거야.

그러니까 칼 바르트는 만인구원설이 돼버렸어요. 이건 동양철학, 불교와 유사하지요. 누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처다. 끝. 불교에요. 태어날 때부터 부처적인 자질이 있다. 갑자기 바르트가 사람이 좋아하는 말을 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바르트는 만인구원설에 대해서 그런 뜻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세상이 택함 받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했지 세상을 택했다는 말은 성경에도 없고 자기도 한 적이 없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란 분이 유일한 인간이 돼버렸으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바르트가 실수한 게 있어요. 예수님이 한 인간과 흔히 말하는 인간과 인간 개념이 달라야 돼요. 그런데 바르트는 다른 용어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인간 아닌 다른 인간 됐는가? 그러면 제대로 된 성육신이 아닌데? 제대로 성육신 되려면 제대로 죄인의 모습으로 와야지요. 그러면 죄인 젖혀두고 따로 인간 만들어서 오게 되면 성육신 아닌데? 반칙인데?

바르트가 뭘 몰랐는가? 인자라는 용어를 몰랐어요. 이건 인간 아닙니다. 인자입니다. 인자는 언약에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만 방금 바르트의 말은 유효해요.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만 유효해요. 예수밖에 있는 것은 쓰레기고 흙입니다. 그건 아담, 흙, 진흙이에요. 사람 아닙니다. 바르트는 거기까지 나가지 못했어요. 아들이 형상을 입어야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념은 날아가 버렸어요. 골로새서 1장에서 아들의 형상으로 이미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오직 언약 안에서만 이뤄집니다.

그럼 언약 안은 이뤄진 건 뭡니까?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외에는 이방인이라 합니다. 이방인은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는 걸 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약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이스라엘만 구원하는 거예요. 이방인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 이방인은 구원 못 받습니까? 십자가란 언약에서는 이방인이 아니고 새 이스라엘로 전환이 돼요. 그러면 기존의 이스라엘은? 기존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지요. 그걸 모형이라 합니다. 아파트에 살아야지 아파트 모형에서는 비좁아서 못 살아요.

제가 하는 것은 뭐냐? 바르트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했잖아요. 저는 이걸 수정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어요.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게 움직여요. 돌고래가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도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모든’이라 할 때 밑에 존재가 붙잖아요. 그 존재를 떼세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만이 존재가 되고 바깥은 언약으로 확산됩니다. 존재란 말은 예수님만 쓸 수 있고 예수님만 계시고 계실 때는 알파요 오메가라. 옛날부터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계신다. 계시다는 말은 주님만 쓸 수 있어요. 여호와는 나 스스로 있는 자, 있는 자는 사실은 하나님만 쓸 수 있어요. 마귀가 시켜서 우리도 있다는 말을 쓰지만 우리도 있다는 말을 쓰지만 빼야 돼요.

하나님의 속성을 위해서 나머지는 그들은 지옥도 있음, 천국도 있음이란 말을 해야 돼요. 존재가 속성에 의해서. 지옥도 있고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어야 돼요. 있음은 악마가 쓸 수 있는 있음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그게 합당한 개념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됩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 모든 것의 머리가 되신 것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이렇게 모이고 흩어지고 말씀을 생각해보고 신학자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사는 모든 것도 내 것은 없고 다 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